6화
각오는 했지만 윤에게 오랜만의 나들이는 그리 녹록지 않았다. 윤은 인사를 건네는 이들에게는 마주 인사하고 시비 거는 이들은 깨끗하게 무시하며 인파를 헤쳤다. 남들보다 눈높이가 높아진 덕에 사람 틈을 누비고 다니기 유리해졌다는 것 정도가 윤의 위안이 되었다.
“오라버니, 저도 키 크고 싶어요.”
“가리는 음식 없이 잘 먹으면 된다지 않아.”
“이상하다? 오라버니 입 짧고 까다롭기가 조선 팔도 제일이라던데. 유모도, 어머니도, 영목 오라버니도 그러던데.”
무성의한 듯 꼬박꼬박 대꾸해 주던 윤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단의 맑은 웃음소리가 내리쬐는 가을볕 사이사이로 호쾌하게 퍼져 나갔다.
“나 이겨 먹는 게 그리 재미나니?”
“그러믄요. 오라버니는 저한테만 져 주시는걸요.”
동그란 눈이 배싯 초승달 모양으로 좁아졌다. 윤은 티 없이 웃는 말간 눈동자 위로 겨울날 문 앞에 버려져 있던 갓난아기를 겹쳐 보았다.
어쩌면 평생 호패 없이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조부의 말에 절망했던 날이었다. 당연히 과거에 급제하여 나랏일에 몸담으리라 생각했던 윤으로서는 미래를 송두리째 잃은 기분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자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문 앞에 놓여 있던 누더기 안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밤새 쌓인 함박눈 위에 누워 빼액빼액 잘도 우는 소리에 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 뺨이 추위로 붉게 얼어서도, 남의 집 앞에 버려진 채로도 아기는 기운 좋게 울어 댔다. 저보다 더 작은 생명을 내려다보며 윤은 마음을 다잡았다. 제가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이 아이와 함께 증명해 보이리라고. 호패 따위 없이도. 출생 따위 아무렴 어떠하여도.
윤에게 단은 그가 흔들릴 때마다 맑은 소리로 일깨워 주는 자명종이었다. 그가 내내 반듯할 수 있도록, 단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였다. 첫 만남이 그러했듯 앞으로도 내내 그러할 것이었다.
윤은 종일 사람에게 치여 시들어 가는 마음을 그리 다잡고 단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단아, 갓끈이든 목덜미든 꽉 붙들고 있어라. 떨어지면 크게 다친다.”
“오라버니가 절 떨굴 리 있나요.”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그렇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 뭐가 그리 우스운지. 단은 연신 까르르 웃으면서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로 윤을 이끌었다.
“오라버니, 저기요. 저거 보고 싶어요.”
“그래.”
포동포동한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움직이면서 윤은 단이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려 미간을 찌푸렸다.
“도련님,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
요령 좋게 도포의 소맷자락으로 슬쩍 집어넣고 가는 연서며 비단 손수건들이 셀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한다고 피하는데도 오가는 사람이 워낙 많았다. 단을 안고 있는 윤으로서는 이 이상 몸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하아.”
점점 무거워지는 소매의 무게는 고스란히 마음의 짐이 되었다. 윤의 입에서 피로감 짙은 한탄이 흘렀다. 오라비의 시름을 알 길 없는 단은 천진하게 나무 조각 파는 좌판으로 검지를 뻗었다.
“저거 사 주셔요. 물 닿으면 새소리 나는 참새 모양 나무 조각.”
“매번 사서 네 방 처마에 매다는 바람에 유모가 질색하잖니. 비 올 때마다 시끄럽다고.”
“그게 재밌어서 모으는걸요?”
“…유모에게 내가 또 한 소리 듣겠구나.”
와중에도 윤은 단이 검지를 내뻗으며 호기심을 보이는 것들을 빠짐없이 사서 안겼다. 상인들은 윤이 값을 치르기도 전에 단의 손에 냉큼 물건부터 쥐여 주었다. 새 물건을 조물대던 단은 금세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단의 검지가 바빠질수록 짐 보따리는 점점 묵직해졌다.
“오라버니, 이제 광통교 밑 그림 보러 가요.”
주변을 휘 둘러본 단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이만하면 호기심을 다 채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만 가자고? 더 사지 않고?”
“네에.”
누이의 취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윤이 가는눈으로 슬쩍 단을 떠보았다.
“흠. 이상하다. 오늘은 우리 단아가 아직 당과 사 달라는 말을 안 했는데.”
“먹고는 싶지만… 어머니가 단것 그만 먹으라 하셨단 말이에요.”
“어머니께 안 들키면 안 먹은 게지.”
태연히 대꾸한 윤은 색색의 당과에 유과까지 사 기어이 단에게 건넸다. 단이 과자들을 색동 소매 안으로 쑤욱 감췄다.
“잘 먹고 양치만 잘하면 돼.”
“네에.”
배시시 웃는 단과 이마를 콩 부딪친 윤이 지친 얼굴로 집을 향해 돌아섰다.
“이제 집으로 가자. 최 형이 기다리겠다.”
“집으로요? 광통교 아래 그림은요?”
“휙 걸을 동안 휙 보렴.”
불만스레 고개를 끄덕인 단이 집 한 채 값이라는 갓끈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아이의 손가락이 동글동글 원을 그리며 움직일 때마다 색동 소맷자락에서 달큼한 향이 퐁퐁 솟았다. 기분 좋은 향기에만 집중하면서 윤은 큰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으음. 오라버니, 이리 걸으시면 광통교에 걸린 그림을 어찌 봅니까?”
“휙 보라니까.”
“오라버니 걸음이 너무 빠른걸요.”
“휙 걷겠다 했잖니.”
단내가 나는 자그마한 손가락이 갓끈을 얽은 채 아래를 가리켰다.
“오라버니 휙 걷는 걸음이 전보다 훨씬 빨라지셨어요. 다리가 길어져서 그런가?”
“그런가.”
“그렇다니까요.”
윤은 무얼 해도 사랑스럽고 무엇이든 다 해 주고픈 어린 동생을 바라보면서 아주 약간 속도를 늦췄다.
“이 정도면 휙 볼 수 있겠니?”
여전히 내키지 않아 하는 얼굴의 단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기하다는 듯이 허리를 기울여 윤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는 어찌 이리 쑤욱 커지셨지?”
“우리 단아가 더 무거워져도 잘 안고 다니고 싶어서 빨리 컸지. 하루가 다르게 점점 묵직해지니, 원.”
“네에? 저 무겁지 않아요!”
사실이었다. 무겁기는커녕 단은 갓난아이일 때에 추운 곳에 오래 방치되어 있어서인지 또래보다 작고 약했다. 온 집안사람들이 단을 오냐오냐, 애지중지 귀애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랬지만 윤은 틈틈이 단을 무겁다고 놀려 대곤 했다. 그가 놀릴 때마다 단은 억울하다는 듯이 볼을 마구 부풀렸고, 윤은 빵빵해진 누이의 뺨을 쿡쿡 찌르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았으니까.
“정말 무겁지 않아요! 행랑아범도 모란댁도 바람 불면 날아가겠다고 걱정인걸요!”
“으응? 어떤 바람에? 태풍이라도 분다던?”
“에이, 또 놀려!”
내내 윤에게 안겨 다니던 단은 집 대문을 몇 걸음 앞두고서야 그의 가슴을 획 떠밀고 바닥에 가뿐히 내려섰다.
“왜 오라버니는 한 번씩 심술을 부리세요?”
“지나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렴. 내가 누구에게 심술부리는 성정인가.”
윤은 허리에 손을 얹고 씩씩대는 단의 앞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추고 나지막이 장난을 걸었다.
“어때. 사람들이 무어라 대답할지 내기해 볼 테냐? 새로 산 댕기를 걸고?”
“으… 그건…….”
둘의 투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대문 안팎의 사용인들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당상관 댁을 찾은 객들도 눈인사로 윤을 알은체했다. 시선이 모이자 단은 부루퉁한 얼굴을 감추고 새초롬히 뒷짐을 졌다.
“저는 혼자 들어가겠어요. 오라버니는 일 보시어요.”
“그러렴. 태풍 만나지 않게 조심해서 들어가려무나.”
“어휴, 진짜!”
샐쭉하게 돌아섰던 단이 윤을 팩 흘겨본 순간. 안마당에서 잰걸음으로 달려 나온 유모가 단을 불렀다.
“아씨, 도련님 귀찮게 마시고 이리 오세요.”
“나 오라버니 귀찮게 하지 않아.”
“아니긴요. 분명 나가실 때엔 딱 열 걸음만 안겨 가시겠다 약속해 놓고, 하루 종일 도련님께 안겨 다니셨죠?”
유모는 말로는 단을, 눈으로는 윤을 핀잔했다. 가끔 하는 짓마저 똑 닮은 남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서로 다른 쪽으로 스윽 얼굴을 돌려 유모의 힐난을 외면했다.
“이것 보라니까. 종일 안겨 다니셨네.”
“누, 누가 그런 소릴 해? 내가 오라버니께 안겨 다니었는지 아닌지 유모가 보았어?”
“운종가 소문은 제비보다 빠르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 아씨는 걸음을 못 걷는 아가인 줄 알 정도였다던걸요.”
단이 새빨간 비단 당혜로 감싸인 발을 탕탕 굴렀다.
“내 다리는 이렇게나 튼튼한걸? 눈이 있으면 어찌 모르누. 바보 천치가 아니고서야.”
유모가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젖살 통통한 얼굴이 코끝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유모는 오냐오냐할 수밖에 없는 단의 당돌한 귀여움에 오늘도 두 손을 들었다.
“네에. 그럼 그 튼튼하신 다리로 안채까지 걸어서 들어가실 수도 있겠죠?”
“뛰어갈 수도 있어!”
앙증맞은 발이 제법 야무지게 땅을 두드렸다. 피식 웃음을 흘린 유모는 단이 이 집에 처음 들어왔던 날을 떠올렸다.
열 살 윤이 도령이 조부인 당상관 어르신과 함께 청나라로 연행(燕行)을 다녀왔던 날이었다. 누덕누덕 기운 강보에 둘둘 말린 갓난아이 하나가 바로 이 대문 옆에 버려져 있었다. 생전 버려진 강아지, 고양이 한 마리 거둘 생각 않았던 도령이 이날은 무슨 생각인지 제 손으로 직접 아기를 안아 들었다.
- 조부께서는 항시 저에게 과객(過客)을 내치지 말라 가르치셨습니다. 미욱한 손자의 눈에는 이 아이 또한 남가의 샛문을 두드리는 과객과 다르지 아니합니다. 남가가 갓난쟁이 하나 거두지 못한다면 그 또한 우스운 일 아닌지요.
처음에는 내키지 않아 했던 당상관도 윤의 설득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날부터 업둥이 갓난아이는 금보다 옥보다 더 귀한 남가의 막내 아씨가 되었다. 윤은 울다 지쳐 잠든 아기의 뺨이 빨갛다며 단(丹)이라는 이름까지 직접 지어 주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한눈에도 남매로구나, 할 정도로 윤과 단은 날로 닮아 갔다.
과거를 더듬으며 유모의 눈이 아련해지자 단은 부러 더 심술궂게 발을 굴렀다.
“단아, 발 구르지 마라. 가뜩이나 무거운 아해가 쿵쿵대니 땅 꺼질까 무섭다.”
“으이! 오라버니 진짜 미워!”
유모만큼이나 생각 많은 눈으로 단을 지켜보던 윤이 놀리자 단은 눈을 샐쭉 흘기고 안채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유모가 윤에게 눈을 흘겼다.
“평소에는 쓸데없는 농도, 표정도 없는 도련님이. 어째 단이 아씨만 있으면 짓궂은 소년처럼 구신다니까.”
윤은 어느새 웃음기를 거두고 평소의 덤덤한 얼굴로 돌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애랑 놀려면 애가 되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