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윤이 도령이 범산에 제사를 드리러 간다.’
윤은 창식 아범의 입을 빌려 이런 소문을 낼 작정이었다.
그의 계산대로 앞서 걷는 창식 아범은 벌써부터 들썩이고 싶어 말라 가는 입술을 슬쩍 핥았다.
‘범산이라면 호환(虎患) 많고 창귀 득실대기로 유명한 산인데……. 온 동네 아씨들이 윤이 도령 무사히 돌아오시라며 눈물 바람으로 치성하겠구만.’
윤이 가게에 들렀다 간 날이면 가게 앞에는 곧장 아씨들의 행렬이 생겼다. 주전부리를 싸 들고 와 “우리 윤이 도련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던가?” 하며 은근히 묻는 아씨들이.
덕분에 운종가 상인들은 윤이 도령의 방문을 재물신의 강림처럼 여겼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이것저것 사며 돈을 쓰는 아씨들 덕에 주머니도 채우고 아씨들이 뇌물 삼아 가져오는 주전부리로 배도 빵빵하게 채울 수 있으니… 사실상 ‘윤이 도령’은 재물신과 다를 바 없었다. 오늘 아침 남가의 시종이 윤의 방문을 알린 뒤로 창식 아범이 줄곧 콧노래를 흥얼댔을 정도였다.
‘윤이 도령 덕에 오늘부터 넉넉히 닷새쯤은 매상 걱정 하지 않아도 되겠다.’
한껏 기분이 들뜬 창식 아범은 나름 멋을 내어 기르는 중인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뒤따라오는 도령을 흘끔댔다. 윤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잽싸게 마당 평상 앞으로 그들을 살갑게 안내했다.
“도련님께서 가볍고 아담하면서 탄탄한 소반을 찾으신다 하여 고심 고심 하며 골라 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자네 안목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
평상 위에는 그가 윤을 위해 미리 골라 둔 개다리소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반질반질 검붉은 옻칠이 된 작은 소반에는 우아한 곡선의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창식 아범은 퍽 자랑스럽게 난초 문양을 가리켰다.
“요즘 소반에 난초 문양을 도드라지게 새기는 게 유행이랍니다. 새김이 섬세하고 칠이 고운 것들 중심으로 골랐습니다.”
“음, 오라버니, 저 난초를 보니까 말인데요.”
요즘 유행이라는 그 문양을 쳐다보면서 단은 아까부터 벼르고 있던 소문의 진상을 가감 없이 물었다.
“오라버니가 왜 얼음물 속 난초여요? 용궁은 또 무엇이고요?”
“…….”
“네에? 무어냐니까요?”
윤은 단의 물음을 두 번이나 못 들은 체하며 소반을 고르는 데에만 집중했다.
“오라버니이.”
여덟 살이 되어도 단은 여전히 윤의 품에 안겨 다니고 궁금한 것은 뭐든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응석받이였다. 세 번째 물음에서는 허리 숙여 상을 고르는 윤의 갓끈마저 흔들어 대며 채근했다.
“오라버니, 못 들은 체 마시고요!”
“어이구, 아씨! 도련님 갓끈 끊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귀를 쫑긋 세우고 단이 채근하는 꼴을 구경하던 창식 아범이 기겁하며 단을 말렸다. 깜짝 놀란 남자의 얼굴과 모르는 척하는 오라버니를 한 번씩 돌아본 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끊을 만큼 세게 흔들지는 아니하였는데?”
“예에, 예. 하나 아씨가 흔드시는 그 갓끈 한 줄이면 어지간한 집 한 채쯤은 너끈히 산답니다. 보는 제 가슴이 덜컥덜컥하니 제발 놓고 말씀하시지요.”
“흥. 그리 겁준다고 내가 오라버니께 그만 물을 것 같나?”
“아이고!”
호박과 금구슬이 찰각대는 소리가 가게 마당을 크게 울렸다. 단의 심술에 창식 아범의 안색만 허옇게 질려 갔다.
잠자코 있던 윤이 창식 아범과 눈짓을 교환했다. 윤의 눈이 가게 한켠에 전시된 경대를 가리켰다. 창식 아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단이 대번에 눈을 흘기며 갓끈을 더 세게 말아 쥐었다.
“오라버니! 저 떼어 낼 생각 마시고요!”
“…떼어 내기는 누가.”
새카맣게 옻칠 입힌 경대 쪽으로 단의 관심을 돌리려던 두 남자가 머쓱하게 눈을 굴렸다.
“대답해 주세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우리 단아는 대체 몇 살까지 저잣거리 소문에 휘둘릴 셈일까?”
“오라버니가 대답 주실 때까지요.”
“…….”
“그럼 이거라도 대답해 주세요. 오라버니는 오라버니가 무어라고 생각하세요? 수중 난초? 용궁 도령?”
이번에도 윤은 못 들은 체 대답을 피하면서 반질반질 윤이 나는 개다리소반 하나를 가리켰다.
“창식 아범, 이 소반과 그 오른쪽 뒤에 있는 것으로 하나씩 주게.”
“예에, 예.”
“소반 사셨으니 이제 대답해 주시어요.”
손으로는 바지런히 소반을 포장하면서도 창식 아범의 눈은 흘끔흘끔 윤을 곁눈질하기 바빴다.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단이 포기할 기세가 아니었다.
‘수중 난초냐, 용궁 도령이냐. 윤이 도령이 뭐라 답하려나?’
사대부들은 입신양명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고 남가의 담장 안에 처박혀 사는 윤의 삶을 수중 난초라 칭하며 비웃었다. 사대부들이 비꼬는 얼음물 속도, 저잣거리 아낙들이 말하는 용궁도 모두 남가의 담장 안을 뜻했다.
난초든 용궁 도령이든, 윤이 제집 담장 안에서 숨죽이고 살아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윤이 도령이 스스로를 난초라 칭하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지. 현재의 남가가 얼음물 속과 다를 바 없다 인정한 셈이니까. 만일 용궁 도령이라 대답한다면 지금의 삶으로도 충분하다는 뜻.’
호패 없는 삶에 만족하느냐, 아니냐.
윤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기만 한다면야 닷새가 아니라 보름쯤은 너끈히 떠들 수 있는 이야깃거리였다. 나이 든 상인의 눈이 채근하는 어린 아씨와 심지 굳게 모른 체하는 도령 사이를 오갔다.
“네에? 알려 주세요!”
“쬐끄마한 아이가 그 많은 음식을 다 어디로 먹어 치우나 했더니. 이제 보니 우리 단아는 궁금한 게 많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게였구나.”
“무슨……. 저 그리 많이 먹지 않아요!”
청명한 가을바람이 칭얼대는 단과 고개 젓는 윤의 사이를 짓궂게 스쳐 새파란 하늘로 내달렸다.
창식 아범은 윤을 볼 때마다 딱 지금 같은 계절을 떠올리곤 했다. 요즘은 끝없이 청명한 하늘이 갈증을 더 키우는 시기였다. 배 주린 봄이 지나고 보리밥이나마 해 먹으며 견디다 보면 돌아오는, 열매 맺기 직전의 맑은 바람 부는 계절. 조금만 견디면 풍성하게 거둘 수 있을 테지만 그날이 좀처럼 오지 않을 듯이 그저 하늘만 파르라니 맑아 안타까운 기간. 추수철은 기다리면 다가온다지만 윤의 미래는 기약이 없다는 면에서 창식 아범의 안타까움은 조금 더 커졌다.
그는 흘끔 시선을 돌려 어린 누이에게 시달리는 도령을 훔쳐보았다. 일패 기생보다도 더 뽀얀 뺨, 더 붉은 입술, 눈썹도 눈도 기다랗게 쭉 뻗어 서느런 눈매, 나이답지 않은 침착한 성정.
윤의 이런 외모 때문일까. 한동안은 후사가 절실했던 당상관이 손녀를 남장하여 키운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관례를 올린 사내가 저렇게 마냥 곱상할 리 없다나. 남가에서 깔끔하게 거절당한 중신어미들이 앙심을 품고 그 소문에 날개를 달았다. 혼기 찬 도령이 좋은 혼사를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냐며.
몸집을 불려 가던 남장 여인 소문은 예상보다 빨리 사그라들었다. 또래에 비해 낭창하고 아담했던 윤이 도령이 지난 두어 달 새에 쑥쑥 커 버린 탓이었다. 봄비 맞은 죽순처럼 기다랗게 자라던 그의 몸은 어느 순간 어깨마저 반듯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늘하늘 곱기만 하던 도령이 어엿한 사내의 모습을 갖추자 사람들은 얄궂게도 냉큼 입방정의 방향을 바꾸었다. 누구와 누구의 자식인지 온 한양 사람이 다 알지만 아비 없이 태어날 수밖에 없던 윤의 출생으로.
창식 아범은 소년에서 청년이 되어 가는 도령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윤의 조부를 떠올렸다.
당상관 남양일.
남양일은 중인 신분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나 자력으로 당상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청나라 연행에서 무역으로 재산을 불리기 시작한 그는 금세 사대문 안팎으로 그의 땅 아닌 곳이 드물다 할 정도의 거부가 되었다.
그는 재력만큼이나 팔불출로도 아주 유명했다. 양자라도 들여 대를 이으라 채근하면 무남독녀 외동딸 남인혜가 열 아들 부럽지 않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내였다.
그리 말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남인혜는 장사에 대단한 수완을 타고난 천재였다. 남양일이 단시간에 큰 부를 축적할 수 있던 것은 기실 남인혜의 덕이었다. 자연스레 남인혜는 조선 최고의 신붓감이 되었다.
이런 흐름에서 우의정 김서량네 집안과의 혼담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의정에게는 재물이 절실했고, 당상관에게는 권력이 절실했으니.
문제는 남양일의 외동딸 남인혜와 김서량의 장남 김욱진이 거창하게 혼사를 치른 지 한 달쯤 뒤부터 시작되었다. 저 아래, 따뜻한 남해로 요양 가 있던 김서량의 부친이 대노하여 들이닥쳤던 것이다.
- 우리 가문이 어떤 집안인데 중인 따위와 혼인을 해!
이미 혼사를 치렀다고 설득해도 노친네 고집은 도통 꺾이지 않았다. 그 늙은이는 모두 까맣게 잊고 있던 복중 혼약까지 들먹이며 영의정 강대진의 손녀를 데려왔다. 죽으면 죽었지 남인혜가 아닌 다른 여인은 싫다면서 김욱진이 곡기를 끊고 버텼으나 늙은이 고집을 이기지는 못했다.
‘다른 잡스러운 가문도 아니고 하필 영의정 집안 손녀를 데려올 게 무어냐…….’
머릿속으로 불꽃 튀게 주판을 튕기던 우의정은 그리 오래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고민이 길었을 뿐, 통보는 신속했다.
[중인 가문과는 도저히 격이 맞지 아니하나 이미 혼사가 선행된바, 자비를 베풀어 남씨를 욱진의 소실(小室)로 거두기로 결정하였다.]
때는 가뭄이 한창이던 시절. 곳간 넉넉한 당상관 댁에서 연일 쌀과 보리를 퍼 주며 백성을 구휼하던 때였다. 한양 사람 거의 전부가 남가의 대문 앞에 긴 줄을 서 있던 덕분이라 해야 할까. 종이 한 장 쥐고 홀로 시댁을 뛰쳐나온 남인혜를 온 한성 사람이 목도했다. 남인혜가 내민 통보문을 펼쳐 본 당상관 댁 마님이 졸도하던 순간도 모두가 기억했다.
‘우의정이 민심을 잃은 게 그날부터였지.’
비록 중인 출신이라고는 하나 남양일은 조선 팔도에서 남부럽지 않은 부를 쌓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남인혜는 평생 부족함 없이 고이 기른 외동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아무리 우의정 집안이라 해도 보석 같은 딸이 첩 따위로 전락하는 꼴을 두고 볼 리 없었다.
대노한 남양일은 혼약 자체를 무효로 돌리기를 요구했다. 영의정 집안과의 혼맥이 간절히 탐났던 김서량도 이에 흔쾌히 응했다.
그 사달로부터 채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당상관 댁 담장을 넘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으나 그 아기가 김욱진과 남인혜의 자식임은 온 한성 사람이 다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