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 나 부르실 날에-2화 (2/157)

2화

“나는 병조 판서 최시을의 손녀 최나은이오.”

“아니, 병판 댁 아씨가 왜…….”

“왜냐니. 귀하들에게 내 외출의 연유까지 이해시킬 이유는 없지 싶소만.”

그녀가 누군지 똑똑히 알게 된 사내들은 죄다 입을 굳게 다물고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최나은.

병판 대감이 귀애하다 못해 시집보내기도 아까워한다는 소문 자자한 아씨였다. 신분을 앞세워 큰소리치고 성별을 앞세워 눈을 부라리던 그들도 병판의 권세 앞에선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나은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꾼 이들을 한심해하며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쳐다보았다.

“그쪽이 반상의 도리와 배움을 퍽 중시하기에 가문과 이름을 밝혀 보았는데. 돌아오는 통성명이 없어 내 적잖이 서운하오.”

“…….”

“어느 가문의 몇 대손들이시오? 대체 조선 천지 어떤 집안이 한참 어린 도령 뒷덜미에 시비를 걸라 가르친답니까? 못 견디게 궁금하구려.”

“흠, 흠……!”

사내들은 연신 헛기침만 흘리며 못 들은 체 딴청을 피웠다.

사실 나은도 그들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버젓하게 입신양명한 사대부라면 평일 한낮에 저잣거리에서 거들먹댈 여유 따위는 없을 터이니. 내세울 거라곤 족보뿐인 집안에서 과거 급제 한번 못 해 본 책상물림들일 게 뻔했다.

“다들 과하게 과묵하시구려. 내게 어디서 굴러먹던 계집이냐 호통칠 때는 세상에서 제일 당당하시던 분들이.”

나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내들 앞에 서서 나직이 탄식했다. 그리고 좌판 앞에 앉은 두 여인을 가리켰다.

“나는 저 아낙들이 틀린 말을 했다 생각지 않아 나선 거요. 옳은 말 한 아낙들이 귀하들에게 무시당할 이유가 없다 싶어서.”

“아니, 우리가 저것들을 무시했다기보다는… 반상과 남녀의 귀천이 엄연히―”

“구차한 덧말은 듣기 싫소.”

만면에 숨기지 못한 경멸을 담은 나은이 고운 손을 들어 그들의 변명을 끊었다.

“귀하가 말하는 그 귀천은 대체 무엇으로 나누오? 호패? 내 눈엔 귀하들의 호패보다 남가 상단의 증명 패가 훨씬 값지게 보이는데?”

나은의 말에 아낙들은 각자 허리에 매단 증명 패를 들어 올려 여 보란 듯 흔들었다. 남가의 문양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금분이 발린 목패. 남가 상단과 정식으로 거래하는 상인들에게만 주어지는 일종의 증명서였다.

나은의 시선과 음성이 남가 상단의 증명 패에 못 박힌 듯 머물렀다.

“저 패는 저 여인들이 좋은 물건을 다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 노력이 증명되었다는 뜻이잖소. 남을 폄훼하는 재미로 소일하는 귀하 같은 이들은 ‘노력’이란 게 무엇인지 영 모를 테지만.”

그녀의 눈에 가득 담긴 부드러운 부러움이 이내 매서운 질타로 변해 사내들을 향했다.

“문득 궁금하오. 귀하들께서는 지금까지 대체 무엇을 노력하여 무엇을 증명하였소?”

“뭘 증명했냐니…….”

“운 좋게 반가에서 태어난 것. 운 좋게 사내로 태어난 것. 열여섯 살 사내라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주어지는 호패 하나 달고 다니는 것. 이런 타고난 것 외에 무얼 성취하였느냐고.”

“…….”

“무엇 하나쯤은 번듯하게 이룬 분들이라 남을 조롱하고 동정하고 무시도 하는 거겠지. 아니 그렇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개중 제일 나이 많은 이가 “어허!” 일갈하며 침묵을 깼다.

“거, 귀한 댁 아씨라고 가만 들어 주니 점점!”

“가만 들어 주지 않으면? 내게 손찌검이라도 하려오?”

붉으락푸르락하는 낯빛과 씨근벌떡하는 숨소리가 우물가를 메웠다.

“내 앞에 호패 찬 사내들이 이리도 많은데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구려.”

“…….”

사내들은 갱엿이라도 먹은 듯 입은 꾹 다물고 분통만 터뜨렸다.

나은이 한 발짝 더 다가서자 우물가의 사내들은 벌게진 낯에 부채질을 하며 너도나도 눈을 피했다. 나은이 헛웃음과 함께 탄식했다.

“이 많은 사내 중에 스스로 이룬 것을 증명할 이가 하나 없다니. 애잔한 일이오.”

서로 슬금슬금 눈짓을 주고받던 그들은 크게 헛기침을 하고 일제히 몸을 획 돌렸다.

“가세, 가! 우리 체면이 있지, 아녀자와 말로 싸워 무엇 하겠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여인네 목소리가 저잣거리를 메우나……. 허허.”

“어, 어흠! 가자!”

더러는 걸음을 빨리하여 자리를 피하고, 더러는 분하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나은을 노려보면서 내뺐다.

“저 양반들 오늘 술 좀 자시겠구만!”

“나으리들! 엉망으로 취하려거든 저기 나루터 앞 주막 탁주가 일품이오!”

지켜보던 이들의 비웃음이 도망치는 이들의 뒷덜미에 진득이 들러붙었다.

수치로 벌겋게 달아오른 사내들이 쏜살같이 사라지자 운종가 초입은 다시 원래의 부산함을 되찾았다.

“때가 어느 때인데 반상의 도리와 남녀 구분을 운운해?”

“양반들 다 잡아 죽이겠다는 검계들이 판치는 시절인데 겁도 없네.”

“운 좋게 양반 사내로 태어나 누리고 사는 것뿐이면서 목청 높이는 게 얼마나 우스운지, 저들만 모른다니까.”

자랑하듯 남가 상단의 목패를 내놓았던 여인들이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윤과 나은을 슬쩍 쳐다보며 운을 뗐다. 나은은 아낙들이 전하는 무언의 감사를 담담히 받으며 윤을 응시했다.

“실례하였소. 도령께서는 부디 불쾌해 마시오. 아무래도 상황과 무관한 타인이 목소리를 높여야 정리될 모양새라 부득이하게 끼어든 것이니.”

“실례라니요. 배려에 감사할 뿐입니다.”

윤은 아무 연고 없는 자신의 편을 들어 준 나은에게 예를 표했다. 나은도 멀찍이서 고개를 까딱여 그의 인사를 받았다.

“금일 저희 남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편하신 때에 남가로 기별 주시면 예를 다하여 모시겠습니다.”

“인사를 받으려 한 일이 아니오. 바쁜 걸음이신 듯하니 이 이상 지체 말고 지나가시길.”

부드럽게 답례를 사양한 나은이 장옷을 다시 걸치면서 먼저 걸음을 옮겼다.

잠시 나은의 등을 바라보던 윤은 곧 눈을 돌려 좌판 앞의 아낙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우리는 남가 상단 덕에 입에 풀칠하고 사는걸. 마음 두지 말고 가세요, 도련님.”

그들은 겸연쩍어하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입을 다물고 관망하던 이들마저 도련님은 이제 어서 볼일 보러 가시라며 채근하는 덕분에 윤은 불편한 자리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그런지, 지나는 모든 곳마다 윤이 도령의 이야기로 한창이었다. 그는 이 이상 사람들에게 휘말리지 않기로 다짐하며 꼿꼿하게 앞만 보고 걸었다. 한 치 흐트러짐 없는 윤의 유려한 걸음걸음마다 호박과 옥으로 장식된 갓끈이 차락차락 경쾌히 흔들렸다.

“언제 나와도, 어디를 가도 오라버니 이름이 들려요.”

윤의 품에 안긴 단이 귀하고 귀한 갓끈을 앙증맞은 손가락에 돌돌 말며 속삭였다. 윤은 표정 하나 변치 않고 다정히 답했다.

“들어 무가치한 이야기란다. 새겨들어 무얼 하니.”

“새겨듣지 않아요. 그냥 들려오는 대로 입에 담을 뿐이지요.”

“입에 담을 가치도 없으니 그냥 흘리렴.”

“네에에.”

단은 대답 하나만큼은 참 잘하는 아이였다. 순순히 대꾸하는 입은 남의 것인 양, 아이는 동그란 눈으로 수군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귀를 쫑긋대느라 바빴다.

‘단아같이 어린 아이가 들을 만한 말들이 아닌데…….’

이럴 것 같아 어떻게든 단을 떼어 놓고 나오려 했건만. 윤은 오동통한 뺨을 비비며 제게 안겨 드는 단에게 유난히 약했다. 그도, 단도 아는 사실이었다. 윤은 스스로를 향해 한숨을 지었다.

‘나는 무슨 말을 듣든 상관없어. 단아도 별생각 없이 흘려듣기만 바라야지.’

그는 온갖 수군거림을 못 들은 척하는 데에 이골이 나 있었다. 남들이 뭐라 하든 그는 당상관 남양일의 자랑스러운 손자이자 모친이 이끄는 남가 상단의 후계자, 남윤일 뿐이었다. 오직 그것만이 가치 있는 진실이었다.

윤의 모친, 남인혜는 그가 말을 떼고 글을 익히기 시작할 때부터 가치 있는 것과 무가치한 것의 구분을 가르쳤다. 어머니가 아니라 남가 상단을 이끄는 대방(大房 : 상단의 최고 경영자) 마님으로서의 지도였다. 남인혜의 가르침은 고스란히 윤의 양분이 되었다.

덕분에 윤은 단언할 수 있었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윤이 도령’을 두고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남윤의 인생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무가치한 단어의 조합 따위는 흙바닥에 구르는 지푸라기만도 못하다고. 그는 오늘따라 더 심하게 수군대는 주변을 깔끔히 무시하면서 재차 마음을 다잡았다.

윤의 이런 성정 또한 뭇 사내들이 ‘윤이 도령’을 유독 못마땅해하는 이유였다.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좀처럼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윤의 모습을 유난히 고까워했다. 저의 어떤 면이 미움받는지 훤히 알면서도 윤은 괘념치 않았다. 그런 감정 소모야말로 쓸모없다 결론지었으므로.

‘촌각을 허비할 필요조차 없는 헛소리들이다. 단아에게 별 해만 끼치지 않는다면 입도 열지 말고 빠르게 지나치는 것이 상책이야.’

그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하며 단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단아야, 이제 사람이 더 많은 골목으로 들어갈 거야. 두리번대지 말고 단단히 매달려 있어라.”

“에이. 큰길이 좋은데.”

단의 도톰한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럼 내가 일 보고 올 때까지 단아는 큰길에서 구경하고 있으련?”

“싫어요!”

“싫다면 하는 수 없이 골목으로 같이 가야겠구나.”

윤은 불만스레 바르작대는 단의 등을 감싸 안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반듯하게 꺾인 모퉁이를 돌기 무섭게 커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당상 역관 남가(南家)네 담장 안에는 소박맞아 돌아온 아씨 하나, 아씨 혼자 낳은 도령 하나, 도령이 주워 온 업둥이 하나.”

음정도 박자도 엉망인 노래였다.

대낮부터 만취한 한량은 주막 평상에 반쯤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더 크게 꽥꽥 목청을 높였다. 앞만 보고 걷는 윤의 옆얼굴에 고주망태의 진득한 시선이 들러붙었다.

“자네… 너무 많이 취했네. 그만하게.”

함께 마시던 사내가 낮은 담장 너머로 지나가는 윤의 눈치를 보면서 한량의 입을 틀어막았다. 옆에서 그만하라 말리자 한량은 심술궂게 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취하였으니 흥이 돋아 노래 한 곡 뽑는 거 아닌가!”

“…원 참, 그만하래두.”

“당상 역관 남가네 담장 안에는! 소박맞아 돌아온 큰아씨 하나! 아씨 혼자 낳은 도령 하나! 도령이 주워 온 업둥이 하나!”

벌겋게 술이 오른 낯으로 몹쓸 가사를 더 크게 꽥꽥댄다. 대관절 누가 만들어 퍼뜨린 노래인지. 만든 이도, 부르는 이도 참으로 고약한 심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