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6화 (56/57)

六.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각자 운명대로 흘러간다

원풍 2년 여름, 날씨가 범상치 않게 더웠다. 불덩이처럼 하늘 높이 걸린 태양이 온 천지를 태울 듯이 이글이글 끓었다. 안 그래도 목화 때문에 피해를 본 각 지방에 이런 무더위까지 닥치니, 소작인들이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어렵게 심어낸 수수 싹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관아 대인들까지 양산을 치켜들고 싹을 지키러 나섰다. 그렇게 목화에 대한 원망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서 경성으로 날아가는 상주서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리고 이 순간, 황제 역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상주서를 와당탕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렇게 원풍 2년, 그 유명한 오대시안 사건이 역사의 궤적을 밟고 정시에 무대 위로 올라왔다. 

“무엄하게 감히 시를 지어 정사를 빗대다니. 지간원 장조(張璪), 어사 이정, 죄를 헤아려 다스리게.” 

황제가 얼굴이 시커메져서 하는 말에 서안 앞에 서 있던 이정은 매우 기뻐했다. 

“경기 동서 북로, 하북 서로 여름 수확량이 절반 가까이 줄었고, 복건 강남 서로에서는 벼 모내기가 늦어져 처음 예상한 가을 추수량이 3할 감소했습니다. 울부짖는 백성들이 길가를 가득 채웠고, 농 재해 피해를 구제해달라는 요청과 세금 감면을 청하는 상주서가 줄짓고 있습니다. 이번 농 재해는 모두 추밀도 승지 유문장이 미천한 학식으로 함부로 입을 놀렸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이 일을 추궁하지 않으시면 백성의 마음을 어찌 어루만지겠습니까, 폐하.” 

황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어째서 짐은 황제 노릇을 이토록 구질구질하게 해야 하는 것이냐. 모처럼 작년에 풍년이 들어 국고도 가득 채웠는데, 몇 달이나 지났다고 이런 뜬금없는 인재 사고가 일어나! 그래, 이건 분명 사람이 일으킨 사고다!

대상공이 찾아와 단호한 어조로 자신에게 혼군이라고 말하고 싶다는 듯이 쩌렁쩌렁 외치던 말이 떠올랐다. 시기적절하지 않은 어리석은 일임을 뻔히 알면서도 따랐다느니, 세상 농사일을 장난으로 여겼다느니, 한바탕 비난을 쏟아놓는 통에 황제는 처음 제위에 올라서 어리석고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정은 하늘이 준 이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안 그래도 유문장과 깊은 은원이 있는데 새로운 은원이 생기고 말았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이정은 우연히 유문장을 만났다. 서로 못마땅하게 여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닌지라, 이정은 술기운을 빌려 경성 전체에 소문이 파다한 유문장의 휴처 사건을 끄집어냈다. 현명한 처를 내쫓고 사창을 집으로 들인 일을 조롱했더니, 말주변이 좋아진 유문장이 곧바로 이정의 금기를 입에 올릴 줄은 몰랐다. 예전에 삼년상을 치르지 않으면 조정에 나올 수 없다는 율령을 어긴 것은 이정의 가장 큰 금기였고, 그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툭하면 그 일을 거론하는 소동파를 드디어 어사대에 가뒀는데, 그 일로 아픈 곳을 크게 찌른 유문장을 가만히 둘 이정이 아니었다. 가만히 두면 얼마나 변변찮아 보이겠나 말이다.

편전에서 황제에게 그 일을 거론한 뒤, 이정은 조정에서 어사대 서단(舒亶), 하정신(何正臣) 등을 거느리고 다시 여러 번 상주서를 올렸다. 그리고 목화를 한발 먼저 심어서 한 몫 챙기려던 관리들도 나섰다. 손실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행여 조정에서 책임을 추궁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누가 속죄양을 끌어내 주니 당연히 기뻐서 울고 불며 따라 호응했다. 

6월 말이 되자, 그나마 반 건진 목화 싹이 또 반이 시들어 죽어 버렸다. 어사대에서 유문장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강골인 간원 간관, 각 지방의 크고 작은 관리, 거기에 민간에서까지 ‘조정에 망할 유 멍텅구리 때문에 해가 갈수록 흉년이 거듭된다.’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한가하던 각지 문인, 지사(志士) 중에 이 일로 울분을 터트리지 않는 자가 없었고, 에두르고 빗대어서 원망을 쏟아놓은 명문장은 자연스럽게 유문장을 엄중 처벌하라는 상주서가 되어 산더미처럼 황제 앞에 쌓여갔다. 

원풍 2년 7월 초, 조정에서 드디어 유문장을 추밀도 승지에서 파직하고 옥에 가두어 어사대에서 심문하라는 성지가 내려왔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당연히 어사중승 등관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등관은 그 천성대로 조정에서 유문장을 질타하는 모두의 의견을 따라 가장 먼저 튀어나와 유문장과의 선을 그었다. 그것도 모자라, 애초에 무턱대고 일을 하지 말라고 유문장을 어떻게 설득했는지 운운하며 비통하게 쏟아놓는 말이 황제를 자극했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황제는 매우 심하게 욕을 퍼부으며 ‘괴이한 것에 마음 쓰고, 천성이 간악하다. 분별없이 일을 논하고 사람을 천거한다!’고 그를 칭했고, 등관은 3년 늦게 원래 역사 궤도대로 자기 자리를 찾아 괵주로 좌천됐다. 그 후로 다시는 조정에 들어오지 못했고, 이정도 드디어 원래 그의 것이 마땅한 관직, 어사중승 자리에 올랐다. 

원풍 2년 무더운 여름, 어사대 감옥은 전례 없이 떠들썩해졌다. 

조정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이제 막 영광스럽게 어미가 되어 강녕부 안채에 있는 임새옥의 귀에까지 당장 들어가진 않았다. ‘신임 어미’ 자리에 새로 오른 임새옥은 곁에 종복이 잔뜩 있어도 온갖 상황이 발생하는 아이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시시각각 놀라고 기뻐하고 당황하는 생활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7월 초가 되어, 소씨 가문의 손녀 소향저는 자기의 백일 의례를 맞이했고, 그제야 조금씩 새로운 신분에 적응한 임새옥과 온 저택 사람이 발에 땀이 나도록 사나흘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겨우 거처에서 나올 수 있게 된 임새옥이 새로움을 즐기려고 아이를 안은 채 밖에서 잠시 연극을 봤는데, 그날 밤 향저아가 몇 번이나 젖을 게운 바람에 드디어 며칠 조용하게 보내던 임새옥은 다시 가슴이 철렁하고 말았다. 대경실색하여 야밤에 사람을 보내 의원을 불러왔는데 다행히 가벼운 풍한이 든 것이니 약을 먹으면 바로 나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 날 사실을 알게 된 소 노부인은 당장 유모를 불러 무엇을 함부로 먹였는지 야단쳤고, 이리저리 물어본 끝에 임새옥이 기억을 떠올리고는 겸연쩍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 유모 탓이 아니에요. 제가 입이 당겨서 복숭아를 많이 먹었는데 향저아가 자기 전에 제 젖을 먹었어요.” 

결국 소 노부인이 한바탕 혼냈지만, 자기 잘못임을 잘 아는 임새옥은 머쓱하게 웃기만 하고 말대답은 하지 못했다. 

소 노부인이 노련하게 향저아 옷을 갈아입힌 다음 품에 안고 토닥였다. 

“뭘 바보같이 웃으며 보는 거냐!” 

소 노부인은 임새옥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고개를 숙여 잠든 향저아에게 중얼거렸다. 

“어리석은 어미 탓에 네가 고생하는구나. 앞으로 할미와 함께 지내자. 뽀얗고 포동포동하게 키워주마.” 

임새옥이 키득 웃으며 소금남을 바라봤다.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만 직접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는데, 어머님처럼 귀한 분도 아이를 잘 돌보시네요.” 

소 노부인은 코웃음 치고는 곁에서 내내 미소를 지은 채 앉아 있는 소금남을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바라봤다. 

“나라고 가난한 적이 없는 줄 아느냐? 그때 저 아이 아버지가 세상을 떴을 때, 큰아이가 고작 아홉 살이고 나머지도 하나같이 사람 손 가던 나이였다. 한 달 넘게 기름진 음식은 입에 대지도 못했고, 식구가 먹을 것도 없는데 유모를 어찌 들여!” 

소금남도 얼떨떨해져서 모친을 바라봤다. 그땐 너무 어려서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고 그런 가난한 나날이 있었던 기억도 흐릿해졌다. 나이 든 어머니의 주름진 얼굴, 눈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어머니가 쉰일곱이시던가. 어째서인지 콧날이 시큰해졌다. 

소 노부인 곁에 앉은 임새옥이 코를 훌쩍이며 아이를 받아 침상에 눕혔다.

“사람들이 집에 어른이 계시는 건 보물이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잖아요. 어머님, 어머님 안 계시면 우리 여인네와 아이들은 기댈 곳이 없어요.” 

소 노부인이 혀를 차더니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이런 버릇 없는 며느리를 봤나! 정말로 나더러 네 아이를 키우라는 거냐!” 

방 안에 있던 시녀, 어멈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그중에 나이가 많은 어멈이 입을 열었다. 

“노부인, 매일 부인이 말주변 없다고 탓하더니, 꽤 듣기 좋은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소 노부인도 웃으며 임새옥을 노려보았다.

“흥, 이런 답답한 것을 봤나. 그렇게 듣기 좋은 말을 남한테만 들려주고, 제 사내는 어를 줄도 모르고!” 

임새옥이 얼굴이 붉히며 소금남을 슬쩍 바라봤더니, 소금남은 고개를 돌리고 시선을 피했다. 

한순간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피해 주어 방 안에 두 사람만 남자 임새옥이 소금남의 팔을 잡아당겼다. 

“어머님이 당신을 미워한다더니, 봐요, 역시 아들이 며느리 앞에서 서러움 겪는 건 못 보시잖아요. 안 그래요? 미안하다는 말을 아무리 해도 소용없겠지만, 대관인, 내가 오늘 다시 사과할게요. 소첩, 그날 어떻게 됐었나 봐요. 당신의 호의에 그렇게 맞서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건 둘째치고, 온 세상의 신을 향해 맹세할 수 있어요. 그날은 정말 그 사람이 변변치 않아서 많은 이에게 누를 끼친 게 원통해서 그런 거예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남아서 그런 거라면, 다시는 농사지을 수 없게 이 손이 망가질…….”

말이 끝나기 전에 소금남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화아, 어머님이 하신 말씀,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 어머님이 입에 올린다는 건, 꿍한 게 없다는 거니까. 나는 당신 지아비고, 이곳은 당신 집이에요. 그동안 당신이 조심스러워하는 걸 보고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요? 그날 한 말은, 다 화가 나서 한 말이잖아요. 당신이 나한테 안 하면, 또 누구한테 하겠어요. 나는 또 당신한테 성질부리지 않으면 또 누구한테 성질을 부리고. 인생은 길어요. 서로 부딪칠 일이 없을 수야 있겠어요.” 

소금남이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품에 안았다.

“어머님 말씀이 맞아요. 내가 아둔해요. 양보해 줘서 고마워요. 가르쳐 줘서 고마워요.”

임새옥이 코를 훌쩍이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자, 소금남이 피식 웃더니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리면서 놀리듯 말했다.

“새로 지은 옷인데, 더럽히면 안 되지.” 

임새옥도 웃음을 터트리며 제 눈물을 제 소매로 닦았다. 

“낭자, 내가 당신 마음을 알고, 당신이 내 뜻을 아는 건 우리의 복이에요.” 

소금남이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그녀를 바라봤다. 고개를 끄덕이는 임새옥의 눈빛에 미안함이 사라졌다. 그렁그렁한 눈이 다시 예전처럼 깨끗해지는 걸 보고 소금남도 그제야 안도했다. 

아직 확인하지 못했던 백일 선물을 부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살펴보는데 옥매가 혼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고함쳤다. 

“부인! 노부인이 두 분 모시고 오래요! 경성에서 또 성지가 왔어요!” 

그 말에 임새옥은 부르르 떨며 무심결에 소금남의 팔을 꽉 잡았다. 

내 책임을 추궁하러 온 것인가. 어찌 됐든 유소호에게 목화의 효과와 이익을 알린 건 나인데? 내가 모든 일의 원흉인 건가? 

소 노부인도 성큼성큼 나타났는데, 얼굴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재촉했다.

“얼른 옷 갈아입어야지, 넋 놓고 뭐 하는 게냐!”

“어머님,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소금남 역시 놀라서 임새옥의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 두 사람의 그런 모습에 노부인은 의외라는 듯 혀를 찼다. 

“무엇은 무엇이야! 곡식을 조금이라도 더 심으려다가 하마터면 우리 소씨 가문의 어린 생명을 잃을 뻔했는데, 조정에서 상 하나 내리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겠느냐? 바보같이 무슨 짓이냐! 대상공이 계시는데 너를 해치겠어?” 

소금남과 임새옥은 그제야 안도하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온 가족이 밖으로 나가보니, 역시나 사람들이 마당에 바글바글했고 강녕부의 아래서부터 위까지 온갖 관리들까지 모두 와 있었다. 관리 앞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대상공도 무명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이미 재상이 아니지만, 그분이 서 있으니 아무도 앉지 못했다. 

문밖엔 어느새 하늘을 찌르는 북, 징 소리가 울렸다. 온 가족이 무릎을 꿇고 성지를 받았다. 내시가 성지를 읽는데, 임새옥은 놀라서 고개를 조아리는 것도 잊고 말았다. 

“……험난한 민생에 경이 짐에게 백성을 사랑하는 책임을 덜어주었으니, 강녕 조씨를 일품 부인에 봉한다.” 

임새옥이 대송의 제도는 잘 모르긴 해도 지아비가 영달하면 아내도 따라 귀해지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조정 대신의 정실부인은 모두 지아비를 따라 품계가 정해졌다. 그런데 지금 일개 상인의 아내인 그녀가 일품 부인 신분이 된다는 건 조금 적합하지 않은 것 아닌가? 

하지만 어리둥절할 틈도 없이 소 노부인에게 다리를 걷어차여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성지를 받는 큰 의례가 끝난 뒤, 소가 대관사가 당황한 모습으로 소작인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소작인들은 임새옥을 보자마자 대낭자의 은혜로 굶어 죽지 않았다 운운 고함치며 무릎을 꿇었다. 선두에 선 것이 장 대노야라는 걸 본 소 노부인은 기도 차고 우습기도 했다. 이런 일도 꾸밀 줄 알고, 그래도 눈치는 있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장 대노야에게 눈짓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은원은 없던 것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성지를 내린 내시는 그 광경을 보고 얼굴 가득 희색이 되어서는 소작인들을 향해 직접 이것저것 묻기까지 했다. 소작인들이 너무 들떠서 말이 두서없었지만, 내시는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임새옥은 부끄럽고 난처하고, 땅을 파고 들어가 숨고 싶었다. 이게 무슨 난리람! 

내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조 부인, 관가께서 입궁하시랍니다. 저와 함께 가시지요. 가는 길에 부인께 감사 인사하려는 백성이 분명 많을 테니, 단단히 돈을 준비하시고요.”

놀리는 말에 안 그래도 난감해서 미칠 것 같던 임새옥은 말문이 막혀서 겸손 떠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 일가는 어느새 호화로운 큰 마차에 타고 관아 아역이 길을 여는 가운데 강녕성을 떠나고 있었다. 

“그냥 은혜에 감사하라고 부르시는 거겠죠?”

얼떨떨하게 말하던 임새옥은 소 노부인에게 등을 한 대 맞았다. 

“은혜에 감사하라고 부르시겠냐? 황제께서 그런 어린애 같은 짓을 하실 리가 있을까. 그딴 건 집에서 경성을 향해 절 한 번 하면 그만이다. 당연히 농사일을 물으시려는 게지!” 

소 노부인은 아이를 안고 흔들어 대면서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소금남은 노부인은 집에 계시라고 했지만, 소 노부인은 굳이 가야 한다고 따라나섰다. 평생 온갖 것은 다 타봤는데 관아 아역이 길을 열고 호위하는 마차는 타 보지 못했다고, 그걸 타고 나면 죽어서 조상님 얼굴을 더 당당하게 볼 수 있겠다고 우겼다. 

“그러게 우리 향저아가 든든한 아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자기도 지키고, 어미의 부귀영화도 지키는구나.” 

“어머님, 이건 제 공인데요. 아이와 무슨 상관이에요.” 

노부인이 다시 한 대 때리려 하자, 임새옥이 재빨리 피했다.

“어머님, 그만 때려요. 안 그래도 멍청하다면서요.” 

그 말에 소 노부인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내시의 말대로,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러 자발적으로 나온 백성들이 가는 내내 수시로 나타났다. 임새옥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치도 빠르고 이런 것에 잘 호응하는 관리들이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그렇게 가다 서다 하는 동안, 소 노부인은 이런 광경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임새옥은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서 너무 천천히 가는 것 같아서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렇게 어렵게 보름 만에 겨우 경성에 도착했고, 아무리 뭐라고 해도 관아에서 준비한 저택으로 가지 않고 소가 저택으로 향했다. 

“미리 약속해요. 성상을 만난 뒤엔 곧바로 돌아가는 거예요. 괜히 사람들이 몰려와서 붙잡히지 말고요.” 

문단속 잘하고 방해하지 말라고 하인에게 분부한 다음, 임새옥은 곧바로 연탑에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고 가서 재우라고 유모에게 넘겨준 소 노부인은 그런 임새옥의 꼴을 보고 투덜거렸다. 

“변변치 않은 것. 이 정도로 기죽은 것이냐!” 

임새옥은 네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저는 식견이 좁아서 다리에 힘이 쪽 빠지네요. 그러니까 어머님도 답답하시겠지만, 막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 계세요. 내일 입궁했다가 돌아오면 바로 떠나요.” 

소 노부인이 그런 그녀를 상대할 리가 있나, 흥흥, 대며 시녀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임새옥이 그렇게 말해도, 소금남은 접대를 소홀히 할 수 없어서 벌써 관사를 데리고 선물을 고르러 갔다. 빠질 수 없는 예절이라 해가 어두워질 때까지 바삐 움직이다가 돌아왔더니, 아원이 문간에서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거냐? 왔는데 왜 들어가지 않고?” 

소금남이 의아한 듯 물으며 행랑 등불 아래서 아원을 살폈다. 틀어 올린 원보빈에 하얀 꽃을 꽂은 그녀의 얼굴이 조금 어두운 걸 보고 흠칫했다. 

“대관인, 외람된 이야기를 하려고 왔어요. 그러니 대관인부터 만나고 조 부인을 만나야 해요.”

아원은 예를 갖추고는 고개를 들어 담담하게 소금남을 바라봤다. 

“유 노부인이 7월 초이레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안 그래도 몸이 좋지 않은데 정혼을 서두르느라 정월에만 몇 번 몸져누우셨어요. 요 몇 달 몸이 좋아졌길래, 며느리가 올리는 차를 마시고 경사스러운 분위기로 액땜하면 좋아질 거라고 했는데, 그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사대 사람들은 사람 그림자만으로도 사람을 기겁하게 할 수 있잖아요. 오 부인이 옛정을 생각해서 연루될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을 데리고 가 봐서 다행이지, 돌아가신 걸 아무도 모를 뻔했어요…….”

아원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실내에 여러 개 켜진 등불이 눈이 시리게 아른거렸다. 임새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쪽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가끔 떠올려봐도 그 사람들의 모습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생각해 봐도 요즘 유씨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 기억 속에 유씨는 그해 집 앞에 나타났던 그 행색 그대로였다. 그때 유씨는 겨우 서른 몇 살이었다. 왜소한 몸매, 처량한 얼굴, 그러나 일거수일투족에 오기가 느껴졌다. 생존을 위해 할 수 없이 구걸해야 하는 비참함과 마뜩잖은 기색.

‘적선을 베풀어 남은 밥 좀 주련.’ 

그 여인은 막대기를 짚고 조삼랑 집 앞에 서서 비틀비틀 넘어질 것 같이 몸을 덜덜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지만, 평온했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잘 아는 사람이고 하는 말도 날씨 이야기 같은 일상적인 대화인 듯이 느긋하고 담담했다. 다만 짙은 무기력함이 느껴졌다. 

그땐 피난하는 사람이 줄짓던 시절이었고, 메뚜기처럼 문 앞을 휩쓸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 임새옥이 할 수 있는 일은 문을 굳게 닫고 밖에서 아무리 울고불고 애원해도 절대로 문을 열지 않는 것이었다.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때 상황이 그랬다. 상대가 죽거나 내가 죽거나였다. 임새옥은 목숨이 아까웠고, 노씨와 조삼랑이 생계를 위해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부엌칼을 품고 곡식이 바닥을 보이는 항아리를 사수했다. 

그런데 그날, 집에 갇혀 있느라 미칠 듯이 답답했던 닭이 털이 빠진 틈을 타서 문틈을 비집고 밖으로 나갔다. 죽을 자리를 찾는 닭이 제 발목까지 잡는 걸 임새옥이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닭이 한 마리만 줄어도 노씨에게 맞아 죽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문을 열고 닭의 다리를 몽둥이로 때려 부러뜨린 다음 끌고 들어왔다. 바로 그 순간, 문 앞에 유씨 모자가 나타났다. 

임새옥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구걸하는 사람이 그토록 침착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그런 기세 때문인지, 아니면 곁에 바짝 붙어 있는 앙상한 소년 때문인지 마음이 약해졌다. 그 아이는 사람 꼴이 아니었다. 입술이 다 부르트고 나뭇가지처럼 마른 팔다리를 덜덜 떨면서 쭈뼛쭈뼛 미소 짓는 모습에 임새옥은 눈물이 터질 뻔했다. 그녀의 동생과 너무 닮았다. 어릴 때부터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동생. 커서는 누이더러 공부하라면서 제 공부를 포기한 동생.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돌아와 함께 과수원을 키우던 동생. 

“……크게 고생하진 않으셨어요. 깔끔하게 떠나셨고요. 부인, 해야 할 건 제가 다 했어요. 따지고 보면 노부인은 좋은 사람이었잖아요. 어찌 됐든 제가 주인으로 모신 분인데, 임종을 지킨 사람이 없었으니 얼마나 안쓰러운지…….” 

아원이 코를 훌쩍이고는 말을 멈추고 차를 홀짝였다. 

“어디에 묻었니? 지전이라도 태워야지. 마땅히 그래야 하고.”

묵묵히 눈물을 흘리던 임새옥이 물었다.

“아시겠지만, 이런 상황에 누가 감히 받아주겠어요. 어렵게 부탁해서 당분간 절에 모시기로 했어요. 천벌 받을 놈은 지금 감옥에 있어서 제가 만날 수도 없고요. 만날 수 있으면 자세히 물어보고 아무리 어려워도 고향으로 보내드릴 텐데.” 

아원은 초조한 얼굴로 손에 든 찻잔을 묵직하게 내려놓았다. 임새옥은 더욱 마음이 아파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아원은 그런 그녀를 힐끔거리며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 난처하시겠지만, 부탁할 일이 있어요.”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임새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일으키려는데, 아원은 일어나지 않고 고개까지 조아렸다. 

“부인, 이건 제가 올리는 절이 아니라 유 노부인 대신 올리는 거예요.” 

임새옥은 넋을 잃고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일단 일어나. 그분 마음 나도 알아. 알겠으니까, 얼른 일어나.” 

아원은 그제야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부인. 저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사실 그 사람 탓도 아니라서요. 그 집 땅에 심은 건 잘 자라기만 해요. 다른 사람들이 망쳐놓고 그 사람 발목까지 잡은 거죠. 며칠 갇혀 있다가 파직되고 풀려날 줄 알았더니, 오 부인이 며칠 전에 허둥지둥 소식을 보내왔는데, 죽을죄로 정해져서 가을이 지나면 목을 벤다잖아요.” 

임새옥 역시 얼떨떨해졌다. 

죽을죄가 되었다고? 송나라 황제는 대신을 죽이는 일이 드물다더니? 기껏해야 눈에 거슬리지 않게 멀리 유배 보내는 거 아니었어? 

사실 유소호가 너무 운이 안 좋았다. 어사대에서도 그를 죽일 생각까진 아니었다. 어사대의 관심은 소동파에게 쏠려 있었고, 소동파를 두 번 심문하며 시 60여 편이 비방 혐의가 있다고 죄를 확정했다. 사마광 이하 수십 명도 연루되었고, 또 선을 그으려는 사람들이 나서서 발목을 잡는 바람에 순식간에 여론이 기울어 소동파는 죽은 목숨이라는 게 거의 확정되었다. 

그런데 태황태후가 다시 나섰다. 7월이 되어, 조 태후는 이제 일어나지도 못했고, 황제는 침상 앞에 쓰러져 울면서 대사면으로 할머니가 건강해지시길 기원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태황태후가 대사면은 됐고 소동파 한 사람만 사면하면 된다고 했다.

줄곧 곁을 지키던 고 태후도 입을 열었다. 

“소동파는 그저 미친 소리를 한 것뿐 아닙니까. 윗전을 모독하긴 했어도 사람을 해치진 않았어요. 하지만 유문장을 보세요, 말만 번드르르하게 하고 결과는요? 얼마나 많은 이를 해쳤습니까? 천하 창생을 해쳤어요. 죽을죄라면 유문장이야말로 죽을죄를 지었지요!” 

생각해 보면 대송의 황가는 나날이 쇠약해졌고, 황제는 하나같이 나약했다. 심한 황제는 툭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오히려 후궁을 주관하는 여인들이 툭하면 ‘때려라, 죽여라!’ 하고 외쳤다. 조 태후는 예전에 혼자 몸으로 궁변(宮變)에 대항한 사람으로 더욱이 여걸의 기세가 넘쳤다. 

(※송 인종 경력 8년, 호위들이 반란을 일으켜 궁으로 침입한 사건. 마침 시침 중이던 조 태후가 혼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달아나려는 인종을 말리고 도지 왕수충을 불러 병사를 데리고 들어와 반란을 평정하게 함.)

그리고 성격이 급하고 괄괄한 고 태후는 예전에 그녀의 아들이 궁에 사는 건 법도에 어긋난다고 어사대에서 말이 많자 어사를 죽이겠다고 난리를 피운 여인이었다. 최근엔 또 아들의 왕부에 불이 났다고 며느리를 죽인다고 외쳤고, 지금은 유문장을 죽이겠다고 외치는 걸 보면 화포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소동파는 죽을죄를 면하고 풀려났고, 유문장은 백성을 해친 죄를 하늘이 용서할 수 없다는 명분으로 죄가 더해져서 사형이 정해졌다.

“부인, 유 부인이 눈 감기 전에 부인께 미안하다고 하셨어요. 이번 생에 보답할 수 없으니 다음 생에 노비가 되어 모시겠다고요. 다만 유소호를 한 번만 도와주라고 하셨어요. 유가 핏줄은 남길 수 있게요. 부인, 저도 지금으로선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다른 사람에겐 부탁해도 소용도 없고요. 오 부인 말씀이, 부인께서 궁에 들어가 폐하를 만나실 때 좋은 말 한마디만 해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거래요.”

아원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을 내쉬며 자기를 비웃었다. 

“이런 말을 하지만, 사실 저도 제 입을 때리고 싶어요. 유가와 인연을 끊으라고 죽어라 난리 부린 게 저잖아요. 그런데 지금 제가 와서 이런 부탁을 하다니요. 부인, 차라리 절 한 대 때리세요.” 

마음 아파하던 임새옥은 얼굴에 눈물을 단 채로 가만히 웃었다.

“나도 황제께 감사 인사하려고 알현하는 것뿐이야. 말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몰라. 하지만 걱정하지 마. 기회만 있으면 꼭 할게. 네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한테 죽을죄가 떨어진 걸 알았으면 그렇게 했어.” 

아원이 쓴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우리가 비싼 밥 먹고 쓸데없는 짓 하는 거라고 할 거예요. 남이 망한 걸 보고 위로하는 척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특히 부인은요. 전 지아비를 위해서 이러는 걸 알면, 관인과 시어머니가 속으로 타박하는 건 둘째치고 세상 사람들이 비웃으며 능멸하려 들 거예요. 부인, 유 부인의 절을 받을 만해요.”

임새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죽을죄까지는 아니야. 가르칠 만한 사람이기도 하고. 오는 길에 그 사람이 심은 목화를 보고 왔는데, 진짜로 죽기엔 아까운 사람이야. 옛말에 사부가 제자를 들이면 잘 가르치고 수행은 본인에게 맡겨야 한다고 했는데, 난 가르치지 않았어. 그냥 달래고 내버려 두기만 했어. 이런 결과에 이른 건, 내 책임도 있어.” 

그 말에 아원이 다시 고개를 조아리자 임새옥이 서둘러 막았다. 

“부인, 부인이야 당당하지만, 제가 대관인과 노부인께 말씀은 드려야겠어요. 괜히 나중에 안 좋은 말이 들리면 어째요. 삼인성호(三人成虎), 세 사람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 수 있다잖아요.” 

그러고는 일어서서 문을 열자 문밖에 앉아 있던 옥매가 일어섰다. 임새옥이 말리려고 하자, 아원이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알아요, 이 댁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 거. 그냥 제 마음 편해지려고 그런다고 생각해 주세요.”

임새옥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데리고 갔다. 소 노부인의 거처에 도착했더니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들어가 보니 격고전화(擊鼓傳花) 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건돌리기와 비슷한 중국 민속놀이. 손뼉을 치는 동안 꽃을 돌리고 멈췄을 때 꽃이 있는 사람이 술래가 됨)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는 여인도 있고, 유모도 향저아를 안고 한쪽에 서 있었다. 전가아는 소 부인과 침상에 같이 앉아서 침상 바닥에 잔뜩 해바라기 씨를 까놓고 있었다. 

아원이 미리 소금남에게 사정 이야기를 해서, 소 노부인은 임새옥이 눈이 부은 걸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향저아를 재우라고 유모를 내보냈다. 전가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어멈의 손을 잡고 나갔다. 방 안에 세 사람만 남자, 아원은 무릎을 꿇고 임새옥에게 부탁한 일을 말하고는 또 머리를 조아렸다. 

“착한 아이구나, 어서 일어나라. 대의로 하는 일인데, 그 절을 내가 어찌 받겠느냐. 역시 영리한 아이로구나. 말이며 행동이며 본분을 지키는 것이, 네 주인보다 훨씬 낫다.” 

소 노부인이 아원을 일으키라고 시녀에게 지시하고 웃으며 말했다. 임새옥도 슬쩍 웃었고, 아원도 웃으며 소 노부인을 살폈다. 

“노부인 성품이 참 좋으셔요. 부인이 복 받으신 거네요.”

소 노부인은 하하 웃으며 맞는 말이라고 하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별일도 아니지. 내 보기에 죽을죄도 아니고 그냥 겁만 주면 될 것 같구먼. 조정에 나서서 편드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런 인연이 아니더라도, 알고 지내는 사람이면 마땅히 나서서 좋은 말 몇 마디는 해줘야지. 애초에 그 사람도 네 체면을 깎았을 뿐이지,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니지 않으냐. 우물에 빠진 사람한테 돌 던지면 안 되지. 네가 이번에 나서서 도와주면 네 체면도 되찾는 거다.” 

임새옥은 아무 말이 없었고, 소금남도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이번뿐이다. 그리고 모든 일엔 정도가 있는 법이니 황가를 거슬러서 집안 발목 잡지는 마라.” 

임새옥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저도 알아요.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이치는 제가 제일 잘 아는 일이에요.” 

7월 스무날은 화창하게 맑은 날이었다. 일품 부인 예복을 입은 임새옥은 내시를 따라 황궁 작은 길을 걸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발치의 변함없이 깔끔한 작은 길을 내려다봤다. 문득 가슴이 철렁해서 저도 모르게 돌아왔다. 서서히 닫히는 궁문 사이로 소금남이 목을 빼고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풍경은 같은데 사람이 다르구나. 

임새옥은 콧날이 시큰해졌다. 

“부인, 이쪽입니다.” 

내시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넋을 잃고 있던 임새옥이 정신을 차렸다. 더는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 서둘러 살짝 미소 지으며 공손하게 내시를 따라갔다. 미궁처럼 구불구불한 궁전을 지나 숭정전 앞에 당도했다. 

내시의 지시하에, 임새옥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름을 밝히고 알현을 청했다. 안에서 들이라는 소리가 들리고, 내시가 나와서 그녀를 대전 안으로 이끌었다.

이 순간 임새옥은 천월해서 온 사람의 우월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긴장해서 손발을 떨면서 당황한 모습으로 예를 마쳤다. 관례에 따라 황제는 인사치레를 늘어놓았고 임새옥은 황공한 듯 겸손의 말을 했다. 뒤이어 황제가 입을 다물자, 실내에 정적이 감돌았다. 그 고요함에 임새옥은 더욱 긴장했다. 

“유문장이 무턱대고 일을 처리한 바람에 나라에 우환이 닥치고 백성이 고통받았네. 짐이 죽을죄를 내린 것을 어찌 생각하는가.”

황제가 별안간 묻는 말에 임새옥은 얼떨떨하다가 곧 기뻐했다. 

역시, 황제는 유문장이 죽길 바라지 않는구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난감해하던 그녀는 순간 크게 안도했다.

“폐하, 신첩은 일개 촌부라 국정을 논할 수 없습니다.” 

황제가 슬며시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조씨, 짐은 자네의 의견을 들어야겠네. 부인이 보기에 유문장의 죽을죄가 타당한가?” 

임새옥이 전생에서 만난 가장 높은 관리라고 해봐야 고작 가난한 현의 현장이었다. 그것도 상 받으러 올라가서 잠시 악수한 것뿐인데, 이런 상황에 대응책을 어찌 알랴. 한순간 땀이 흐르고 혀가 꼬였다. 그러나 황제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눈을 질끈 감고 대답했다. 

“유문장은 재능이 있고 열심히 하는 자입니다. 법으로 처형하면, 폐하께서 재자(才子)을 품지 못했다고 후세에서 말할까 두렵습니다. 폐하, 부디 엄벌하여 경고하시되 죽을죄는 면해주시길 바랍니다.”

임새옥은 그 짧은 몇 마디를 하고 진이 다 빠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육중한 예복을 입어서 온몸이 열기로 가득한데 이런 상황이 두렵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안 그래도 언변이 서투른 일반인일 뿐이었다. 단지 이 시대 사람들이 모르는 기술을 조금 알 뿐이지, 신선도 아니라서 황제가 목을 베려고 작정하면 살아나올 수가 없지 않나. 

그녀는 열심히 예전에 읽은 천월 소설을 떠올렸다. 뛰어나게 잘난 주인공이 어떻게 황제 앞에서 강산을 논하고 신선이 강림한 것처럼 위풍당당했는지 떠올려 봤지만, 그런 걸 회상해 봐야 오히려 머리만 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유문장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는데, 짐이 어찌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있는가.” 

황제의 한숨에는 무기력함과 아쉬움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던 임새옥이 퍼뜩 고개를 들고 물었다. 

“온 세상 사람에게 목화를 심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그의 잘못입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황제의 청수한 얼굴이 순식간에 시퍼레지더니 냉랭하게 물었다. 

“조씨, 그 말은 짐의 잘못이란 말인가?” 

더워서 땀을 흘리던 임새옥은 식은땀을 흘리며 털썩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신첩 죽어도 마땅합니다! 신첩이 어찌 감히!”

성심은 추측하기 어렵다고, 조금은 아이 같던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변했다. 하물며 그녀 앞에 있는 사람은 유전적인 정신 질환이 있는 북송의 황제였다. 송나라 황제는 유전 문제인지, 아니면 직업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인지 역대 황제 모두 미치거나 얼이 빠지거나 했고, 요절한 사람은 부지기수였다. 송 태종의 아들은 황궁을 불태웠고, 송 진종은 아들을 싹 다 죽일 뻔했다. 송 인종은 수시로 혼절했고, 송 영종은 정신 질환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 이 송 신종의 정신 상태도 당연히 낙관적이지 않았다. 

정신 질환이 있는 사람을 자극하는 건 죽을 자리에 발을 뻗는 것이다.

“폐하, 신첩도 작년에 목화를 심었습니다. 꽤 성과도 있었고요. 목화는 반드시 심어야 하는 작물입니다. 다만 지금은 우량 종자가 너무 적습니다. 또 온도를 장악하기 실로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처럼 농사를 대규모로 망친 것입니다. 폐하, 유문장이 심은 목화가 많이 살아난 것으로 보아 무턱대고 농사지은 것이 아닙니다. 폐하, 목화의 수익은 유문장이 말한 대로 나라와 백성에게 큰 이득을 가지고 올 것입니다. 폐하, 부디 유문장의 목숨을 살려두고 기한을 주어 우량 종자를 재배하게 하십시오. 그때가 오면 널리 퍼트리십시오. 이렇게 목화를 포기하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임새옥은 허리를 숙인 채 단숨에 말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질 때쯤, 드디어 황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말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부인, 일어나게.”

임새옥은 반사적으로 일어서려다가 금세 감히 그럴 수 없다고 했고, 황제가 다시 한번 일어나라고 말한 다음에 후들거리면서 옆으로 섰다. 

“짐이야 심하게 꾸짖고 싶지 않네. 다만 천하를 설득할 수 없어. 어찌 됐든 유문장으로 인해 화가 닥쳤으니까. 지금 부인의 진언이 있으니, 짐이 특별히 기한을 주어 우량 종자를 재배케 하고 그 효과를 기다려 보겠네.” 

황제가 천천히 말했다. 다리가 떨려 제대로 서 있지 못하던 임새옥은 잠시 주저하다가, 이제 더는 무릎을 꿇지 않기로 결심하고 깊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고명하십니다. 신첩, 만민을 대신하여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우러나서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이 황제가 유소호의 목숨을 살려주기로 선택한 것을 보면 부강한 나라와 백성을 바라는 마음이 절실한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개혁의 물결을 연 이 황제는 분명 뜻이 있는 혁신적인 젊은이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가 선택한 길은 너무나 험난한 개혁의 길이었다.

임새옥은 대담하게 다시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구체적인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황제에게 몇 년 남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황제는 지금 막 서른둘이 되어 유망하고 재능이 넘칠 시기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고귀한 분위기가 넘쳤지만, 안색에 어렴풋이 병색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괄이 관여된 서하 전쟁이 이 젊은이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된다. 왕안석처럼 눈앞에서 가르침을 주는 사람이 없어지고, 나라와 백성을 부강하게 할 개혁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황제는 그 공허한 정신세계를 방탕한 궁정 생활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몸이 안 좋은 황제가 오래 못 사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 생각에 어째서인지 마음이 저렸다. 역사를 읽어서 아는 건 아는 것이고, 직접 그 역사를 겪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그녀의 나이로 셈해 보면 북송의 멸망을 겪어야 할 텐데, 딱히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조씨, 그대 지아비와 비교하면 짐의 용모가 어떠한가?” 

이 여인이 처음에 만났을 때처럼 또 자기를 빤히 바라보는 걸 본 황제는 순간 재미있어졌다. 조 태후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우울했던 마음이 조금 사라졌다. 예복을 입어 돋보이는 것인지, 아이를 낳고 살이 올라서인지 임새옥은 지금 황제의 눈에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곱게 꾸민 고운 여인보다 고왔다. 특히 지금 이 순간, 애수 어린 모습이 더 마음을 건드렸다. 그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해서 여인을 놀린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문장, 어쩌다가 이 복을 놓친 겐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황제의 운명을 탄식하던 임새옥은 현대에서 들었어도 꽤 노골적일 희롱을 듣고 순간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목을 옷 안에 움츠려 숨기지 못함을 한스러워하며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원풍 2년 조정, 우선 소동파의 폄하 시 사건, 뒤이은 유문장의 목화 사건으로 조정에 전대미문의 비바람이 몰아쳤다. 조정 대신들은 저마다 위기를 느끼며 안절부절못했다. 누군가는 부채질하며 물에 빠진 사람 발목을 잡고, 누군가는 상주서를 올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구원하려 애썼다. 하지만 어사대 옥에 갇힌 유소호는 일절 모르고 있었고, 알려고 하는 마음도 없었다. 

옥에 들어온 지 보름이 지났는데, 이웃 옥방에 있는 소동파를 심문하느라 바빠서인지 유소호는 세 번밖에 심문받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이곳에서 유소호는 그저 거적에 앉아서 벽에 기댄 채 꿈쩍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발치만 바라봤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일매일 그러고 있었다.

“넋이 나간 건 아니겠지?” 

옥을 순시하던 아전이 오늘도 변함없이 멍하니 있는 유소호를 힐끔 보고는 동료에게 속삭였다.

“며칠 전에 소 대인이 사면받았으니, 자기는 죽을죄가 정해진 걸 알고 얼빠진 거겠지.” 

동료는 옥에 있는 유소호가 자기가 하는 말을 듣든 말든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문을 여시오, 문을 열어. 옥바라지 온 사람이 있소.” 

깊은 감옥 밖에서 탁탁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유가 노인네가 울면서 대인을 귀찮게 했나 보군. 제 주인에게 단두(斷頭) 밥이나 바치라고 들여보내 주신 모양이야.”

아전은 “갑니다, 가!” 하면서 느긋하게 걸어 나갔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매일 옥 밖에서 잠을 자는 장사라는 노인이 한가득 채운 바구니를 구부정하게 들고 서 있었다. 

“고함은 왜 질러. 허가는 있고?” 

아전이 성가신 듯 툭 내뱉는데, 고개를 들기도 전에 제 손에 커다란 은자가 쥐어졌다. 귓가에 듣기 좋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옥졸 오라버니, 편의 좀 봐줘요. 장 대인의 허가증, 여기 있어요. 시간 넉넉히 주세요.” 

아원이 미소 지으며 드러낸 덧니에 아전은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 뒤엔 나이가 비슷한 여인이 서 있었다. 장신구를 많이 달진 않았지만, 군색한 모습은 아니었다. 

유소호에겐 노모 하나뿐이고, 그 노모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여자 식솔이 옥바라지를 와? 정혼했다고는 들었지만, 혼인하기 전에 일이 터졌는데? 꽁무니 빼기도 부족할 텐데 옥바라지 올 리가 없지. 

아전은 절로 호기심이 생겨서 여인들을 힐끔거렸다. 뒤에 서 있는 여인이 짜증 나는 듯이 노려보는 게 느껴졌다. 

“얼른 들어갔다 나오시오.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아전이 몸을 틀어 비켜주자, 세 사람이 순서대로 들어갔다. 

임새옥으로서는 처음으로 옥에 들어와 보는 것이었다. 청아가 소금남을 고변했을 땐, 대명부 관리가 예우해 주어서 아예 옥에 들어가지도 않았었다. 

“미끄러워요, 조심해요.” 

아원이 넘어지지 않도록 재빨리 임새옥을 부축했다. 

“내가 그렇게 연약하니?”

임새옥이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나직이 웃었다. 장사는 벌써 두 사람을 팽개치고 재빠르게 걸어갔다. 주인을 한눈에 알아본 장사는 몇 걸음 만에 가장 안쪽 옥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엉엉 울었다. 

“노야, 노부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상복으로 갈아입으세요.” 

장사가 울면서 바구니에서 하얀 당건(唐巾), 하얀 직철을 꺼내 건넸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도 주지 않던 유소호는 장사가 무릎을 꿇고 울어도 쳐다보지 않다가 그 말을 듣고야 목구멍을 긁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다가가 옷을 받지도 않고 그 자리에 엎드려서 거칠게 머리를 박아댔다. 입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았다. 

“노야, 노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원 대저아가 돌봐 준 덕분에 편안하게 가셨습니다. 발인도 순조롭게 했고요. 노야, 몸 상하면 안 됩니다. 이러면 노부인이 마음 놓고 떠나지 못합니다.” 

장사가 울면서 유소호를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다. 임새옥과 아원도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원 대저아, 나 유문장, 이렇게 감사하네.” 

유소호는 무릎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서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으스스한 옥에 쿵쿵 소리가 메아리치고, 순식간에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이랑, 어서 일어나요.” 

임새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밖에 누가 서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유소호는 그 목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그는 망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가…….” 하고 중얼거렸다. 어둠에 진작 적응한 그는 눈을 들자마자 장사 곁에 주저앉은 임새옥을 발견했다. 분 하나 바르지 않고, 예전처럼 단장한 여인을 보자 눈물이 저도 모르게 흘렀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우스운 꼴을 보였군.”

장사가 옥문 너머로 당건을 걸쳐주자, 유소호는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는 곧 담담해진 얼굴로 옷을 받아서 입었다.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고는 더는 임새옥을 바라보지 않았다. 

“이랑, 날 원망해요?” 

옷을 갈아입은 유소호는 표정도 침착해져서는, 다시 임새옥을 바라보며 웃었다. 

“안심해. 그동안 알고 싶었었는데, 이제 알게 됐어.” 

유소호의 웃는 얼굴을 보며, 눈물을 그쳤던 임새옥은 또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호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두 사람은 또 한 번 까만 옥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했다. 

아전이 짜증스러운 듯 고함치는 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임새옥은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 깨알같이 글자가 적힌 종이 더미를 꺼내서 건넸다. 

“당신이 심은 밭에 가 봤어요. 잘했더라고요. 목화씨를 심을 때 해야 하는 건 다 했어요. 다만 균형이 잡히지 않았어요. 목화가 더위에 강하다곤 하지만, 만물의 근본은 흙, 거름은 힘, 물은 생명이에요. 당신이 고른 땅에 습기가 부족했어요.”

유소호는 무심결에 종이 더미를 받아들고 물었다. 

“가 보았다고? 종류를 구분해서 심었는데, 씨앗을 오래 불린 것이 더 잘 자랐나? 아니면 짧게 불린 것이 더 잘 자랐어?” 

“관건은 씨앗이 너무 물기를 많이 머금지 않게 제어하는 거예요. 껍질이 말랑한 것으로 심고, 수온으로 정하는 게 좋아요. 사실 꼭 온탕으로 불려야 좋은 건 아니에요. 불리지 않고 심은 것도 잘 자랐어요. 심는 양도 잘 제어했더라고요. 다만 깊이가 부족했어요. 이 정도면 돼요.” 

임새옥은 손가락으로 양을 가늠하며 알려주었다. 

옥바라지하러 온 사람이 전문적인 기술 이야기를 하는 건 또 처음이라, 시간 됐다고 재촉하러 온 아전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결국 아원이 정신을 차리고 발을 굴렀다. 

“아이고, 여기가 어디라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유소호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숙여 종이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건 뭐지? 글은 전혀 늘지 않았군.” 

“늘지 않을 거니까 대충 읽어요!” 

임새옥이 살짝 노려보더니 웃음 지으며 말했다.

“유소호, 이해할 수 있겠어요? 목화 재배 요점을 적은 거예요.”

임새옥의 눈빛이 놀리는 듯하자, 유소호가 종이를 흔들며 거적 위로 가서 앉았다. 

“화아, 또 날 무시하는군.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배운 게 없는 건 아냐. 아침에 이치를 깨우치면 저녁에 그것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말도 기억하고 있고.”(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 논어)

그러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어서 돌아가. 그래야 몇 장이라도 더 읽지.” 

장사는 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노야,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노부인의 영구를 조상 묘에 안치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또 고개를 조아리자, 유소호가 그 자리에서 답례했다. 

“고맙네, 이번 생에 갚을 길이 없으니 내세에서라도 자네의 큰 은혜를 기억하겠네.” 

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임새옥을 향했다. 임새옥도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목구멍 속이 타는 것처럼 아파 왔다. 

아전이 재촉하기 시작하자, 세 사람은 그제야 정리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화아!”

결국 유소호는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옥문을 움켜쥐고 물었다.

“그때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어.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 날 좀 기다려주지 않았지? 울기라도 하고, 난리라도 부리지. 그 여인이 있으면 당신은 없어도 되는지 물어보기라도 하지 그랬어. 어떻게 그렇게 떠나버릴 수가 있었지?”

그의 목소리는 그저 그의 입가에서만 맴돌았다. 모기처럼 작은 그 소리는 네댓 명이 옥 안에서 타박타박 걷는 소리, 아전이 찬 칼이 부딪치는 소리, 옆에 방에 갇힌 죄수가 울부짖는 소리에 순간 묻혀 버려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유소호가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그 여인은 갈수록 멀어져 저 멀리 끝에 비치는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문장, 유문장!” 

얼마나 흘렀을까, 유소호는 옥 안에 작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종이를 다 읽었다. 그는 시큰해지는 눈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수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깨우쳤다. 수시로 바닥에 손으로 쓰고 그리면서 열중하느라 아전이 옥문을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유문장! 폐하의 성지다. 1년의 시간을 허하고, 목화를 재배한 성과를 보고 다시 죄를 묻겠다.”

궁에서 온 내시는 넋이 나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채 큰 소리로 성지를 읽은 다음 내버려 두고 돌아갔다. 유소호는 성지를 들고 직접 읽은 후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원풍 2년 10월 말, 조 태후가 붕어했다. 원풍 3년 10월 말, 경성 황가 소속 땅에 목화를 수확하는 경사가 생겼다. 솜 겹옷, 솜이불을 여러 벌 만들어 바치자, 성상은 크게 기뻐하며 신하에게 하사했다. 또 기름을 수십 근 짜서 등유로 썼다. 경기 일대에 목화 재배 허가를 특별히 내리고 효과를 기다렸다. 유문장은 죽을죄를 면하고 원래 자리로 복직되었으나, 모친의 상을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11월 말, 모친의 영구를 들고 대명부로 돌아간 이래 그의 소식은 다시는 들리지 않았다. 

원풍 6년 단오가 가까워질 무렵, 여름 수확을 앞둔 좋은 시절을 맞이했다. 전날 비가 와서 덥지도 춥지도 않아 길을 가기 좋은 날이었다. 임새옥은 마차에 앉아서 전가아와 향저아가 돌멩이를 던지며 노는 걸 바라봤다. 말을 타고 길을 가는 소금남과 열린 창을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다. 

“대궐 같은 집보다 내 초가집이 낫다잖아요. 어머님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 

임새옥이 아직 얼굴이 좋지 않자 소금남이 웃으며 설득했다. 강녕으로 옮겨 오라고 조삼랑 일가를 설득하려고 일부러 성안현에 간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작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노씨는 여전히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땅이랑 과수원이 아까워서 그러는 거잖아요. 내가 다시 달라고 할까 봐. 내가 그렇게 쩨쩨해요? 설령 내가 가져가지 않아도 나중에 전쟁통에 세상이 어수선해지면 다 망가질 건데…….”

임새옥은 입술을 내밀고 중얼거리다가 향저아의 손을 살짝 때렸다. 

“손 물지 말아야지. 아기도 아닌데 아직 손가락을 물면 어떡해!” 

소금남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쟁통에 세상이 어수선해지기는! 또 그런다 또!” 

그들은 지금 시골의 작은 길을 지나고 있었다. 길 양쪽 모두 밭이고, 밭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갔다. 임새옥은 입술을 내민 채 시선을 돌리다가 갑자기 마차를 세우라고 마차벽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마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려서 보리밭 근처로 다가갔다. 

“금가, 금가, 이리 와 봐요. 보리가 참 잘 자라요! 다른 밭보다 수확이 많을 것 같아요.”

임새옥의 이런 버릇이야 일가도 진작 익숙해져 있었다. 전가아와 향저아는 자기들끼리 재미있게 놀았고, 소금남은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네! 낭자, 우리 밭보다 더 잘 자라는걸?”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꼿꼿하게 서서 밭을 바라봤다. 저 멀리 두립을 쓴 농부가 밭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걸 보고 손을 저었다. 

“거기 오라버니, 이 밭, 오라버니가 농사지은 건가요?” 

아무리 불러도 그 사람이 고개를 들지 않자, 소금남이 그녀 손을 잡으며 “혹시…….” 하며 귀를 가리켰다. 임새옥은 그런가 하며 다시 불렀다가, 그래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몰래 보릿대 몇 개를 뽑고는 빙긋 웃었다. 

“몇 대만 빌려야지. 돌아가서 봐야겠어요.” 

소금남은 그녀의 코를 콕 찌르며 예뻐 죽겠다는 듯 웃었다. 

“어머니, 안아줘요. 오라버니가 억지 부려요. 같이 안 놀 거야!”

“에이, 부끄러워. 진 걸 인정하지도 않아!” 

향저아가 마차에서 일어서서 입을 내밀고 고함치자, 전가아도 뒤에서 혀를 내밀고 눈 밑을 잡아당기며 연신 고함쳤다.

부부는 뽀얀 딸, 키가 또 자란 아들을 바라보며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각자 한 명씩 안아 올렸다. 

“얼른 집에 가자. 같이 연극 보러 가자고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셔. 너희들이 집에 없어서 분명 심심하실 거야.” 

임새옥은 아들과 딸의 손을 잡고 마차에 태우고는 어서 가자고 재촉했다. 

“어머니! 보리 알갱이 먹어요!” 

임새옥이 내려놓은 보릿대를 보고 전가아가 외치자 임새옥이 손으로 막았다. 

“먹으면 안 돼. 돌아가서 우리 거 먹자.” 

향저아는 뜻을 못 이룬 오라비를 보고 작은 손을 짝짝 치며 까르르 웃었다. 

사람들이 점점 멀어지는 가운데 아이의 웃음소리가 여전히 밭 주변을 맴돌았다. 밭에서 허리를 숙이고 열심히 일하던 농부가 그제야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두립을 들어 올리자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드러났다. 멀어져가는 일가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사내의 눈가에 얼핏 물기가 빛났다.

<고대 지주>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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