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57)

원풍 원년 10월 초, 경성 날씨는 그래왔던 것처럼 화창했다. 특히 대상국사 앞은 만 명이 모인 듯이 바글바글, 절을 열었던 날보다 더 떠들썩했다. 

짐을 이고 든 행상, 벗과 함께 온 여객, 성 안을 돌아다니며 구걸하던 수많은 거지까지 모두 우뚝 솟은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대상국사 앞으로 몰려들었다. 

타지에서 온 여객 몇몇이 저 멀리 공자정(公子亭)에 서서 그 광경을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자기들끼리 수군거리자, 마라(摩羅) 진흙 인형을 파는 행상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화가 나 있다가 설명했다. 

(※마라: 구마라, 하늘의 대장군. 초선천初禪天의 우두머리 범왕의 이름이라고도 함.)

“오늘 강녕부 소가가 환원 보시를 드리는 날이라 그래요. 그 집 대관인이 며칠 전에 큰 변을 당했다가 살아 돌아온 데다가 부인은 회임해서요. 꼬박 3년 치 시줏돈을 냈는데, 겹경사가 생겼으니 오늘은 죽을 보시하고 돈을 나눠준다네요.” 

보통 1년 치 시줏돈을 내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소씨 가문의 화통함에 다들 혀를 내두르며 까치발을 하고 대상국사 안을 내다봤다. 절 앞은 이미 물 샐 틈 없이 사람이 붐비고, 줄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행상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직접 봤지 뭡니까. 돈을 상자로 바리바리 끌고 들어가더라고요. 족히 마차 다섯 대는 됩디다. 전 너무 늦게 와서 들어가지 못했지 뭐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 앞에서 울리는 환호성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대상국사의 유유한 종소리와 함께, 강녕부 소가의 보시 진풍경은 꼬박 하루 동안 이어졌다. 그날 수많은 거지가 얻은 돈을 가지고 작은 장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소문도 전해졌다. 소가에서 돈을 얼마나 많이 뿌렸을지 짐작할 수 있는 소문이고, 이건 황가에서조차도 보인 적 없는 씀씀이였다. 

온 경성 사람이 이번 보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물론이지만, 내원에 앉은 임새옥은 쉴 새 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소금남에게 약을 마지막 한 입까지 먹인 다음 손수건으로 입을 닦아 주고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기껏해야 돈 몇 푼이에요. 낭자의 마음이 편안한 게 더 중요하지.”

소금남이 빙긋이 웃으며 손을 잡자, 임새옥이 조금 과장스럽게 입을 쩍 벌렸다. 

“돈 몇 푼이요? 세상에, 250만이라고요! 세상에나. 개봉부 대인에게 들으니, 예전에 조정에서 제방 367리 보수하면서 8,300명을 동원했을 때 하루에 썼던 돈이랬어요. 금가, 8,300명의 일당이라고요!” 

임새옥이 툴툴거리는 모습을 소금남은 그저 빙긋이 웃으면서 바라봤다. 

“내가 쩨쩨한 게 아니라 어머님이 너무 통이 크신 거예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렇게 쓰는 건 아니죠. 흥, 나더러 바보라고 하시더니, 상금을 올리는 바람에 당신 찾는 데 며칠이나 더 걸린 건요?”

소금남은 큰 소리로 웃다가 상처를 건드려서 숨을 들이마시고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알고 보니, 그날 물에 빠진 다음 버둥거리다가 바로 물에 가라앉은 청아와 달리 그는 기절해서 그대로 흘러내려 갔고, 성에서 2, 3리 떨어진 곳에서 강가에서 넝마를 줍는 노인이 발견해서 끌어 올렸다. 범상치 않은 옷차림을 본 노인은 자신의 운이 텄음을 알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그러나 소금남은 피를 너무 흘려 줄곧 눈을 뜨지 못했고, 노인도 어디에 가야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하루가 지나고, 소가에서 사람 찾는다는 소식과 함께 상금이 백은(白銀) 삼백 냥이라는 말이 들렸다. 농가에게는 얼마나 큰 돈인가. 노인은 신이 나서 돈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소가 근처에 가기도 전에, 청아의 시신을 건지고 초조해진 소 노부인이 상금을 오백 냥으로 올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하루 만에 상금이 이렇게나 오른 걸 본 노인은 돈의 유혹 앞에서 욕심이 생겨 버렸다. 어차피 소금남도 줄곧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기화가거(奇貨可居: 진기한 물건이나 사람은 당장 쓸 곳이 없다 하여도 훗날을 위하여 잘 간직하는 것이 옳다는 말), 진기한 물건이 값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소 노부인은 역시나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듣지 않고 연달아 돈을 올렸고, 그 바람에 소금남의 소식이 오히려 가족들의 귀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임새옥이 사람을 보내 길을 따라 찾아다녔지만, 그 노인이 소금남을 꼭꼭 감추고 있어서 찾을 수가 없었다. 소금남이 눈을 뜬 후 기척을 내고서야 노인의 이웃이 듣고 관아에 신고했다. 

“다 돈이 많아서 화를 입은 거잖아요. 상금을 걸지 않았다면 이렇게 고생했겠어요?” 

임새옥은 겁에 질려 걱정했던 그 나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화나고 울고 싶었다. 

소 노부인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데다가 지금은 홑몸이 아닌 임새옥이 상전인지라, 요 며칠 줄곧 피해 다니고 있었다. 임새옥은 가슴속 가득한 화를 풀 곳이 없어서 답답하기만 했다. 

그러니 대상국사 환원 보시는 당연히 그녀 모르게 진행되었다. 안 그래도 임새옥이 못마땅한 세 자매는 더 거북해져서 싸늘하게 조롱해댔다. 수단이 좋으네, 며느리가 시모를 이렇게 겁을 주네, 하는 소리에 안 그래도 화가 잔뜩 쌓인 임새옥은 잘됐다 싶어 달려가서 한바탕 싸움을 벌였다. 소 노부인이 딱히 편들어주지 않자, 세 자매는 화가 난 나머지 제 남편을 끌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어머니, 어머니가 우릴 딸로 인정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아우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여기 오느라 든 비용, 어머니 돈 한 푼도 쓰지 않을 거예요! 우리한테 돈을 쓰면 얼마나 아깝겠어요? 보시했다 칠 것이고, 앞으로 이 집 일엔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 

소 대저는 뒤에서 소매를 당기며 쓸데없는 돈을 쓰지 말자고 귀띔하는 부군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울며 말했다. 

노부인이 딸들의 마음을 모를 리가 있나, 달래려 입을 열었다. 

“뭐 대수라고 그러느냐. 홑몸이 아니라서 성격이 괴팍해진 거다. 나이 더 먹은 너희가 져주어라. 가족끼리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어.” 

각자 백 냥씩 나눠주라고 시녀에게 지시하고서야, 딸들은 그제야 기분 좋게 돌아갔다. 

“어머님 마음이 편안하다면야, 가산을 탕진한다고 한들 또 어때요.” 

소금남이 그녀를 품에 안고서 웃으며 말했다. 

“낭자, 어머님이 너무 놀라서 그래요. 평생 남 앞에서 고개 숙인 적도 없는 분이라서, 무슨 일이 생기면 돈으로 해결할 줄밖에 몰라서 그래요.” 

임새옥은 그의 몸에서 어렴풋이 나는 피 냄새를 맡자 코가 시큰해져서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어딜 가든, 날 데리고 가야 해요.” 

며칠 동안 잘 요양한 다음, 소 노부인이 절에서 길흉을 점쳤더니 소금남과 경성이 상극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노부인은 어서 돌아가자고 했고, 임새옥은 소금남의 상처가 덧날까 봐 누가 뭐래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부 두 사람은 말다툼 끝에 서로 말을 하지 않았다. 소금남은 아내를 달랬다가 모친을 달랬다가 했지만, 결국은 아무도 설득하지 못했다. 병문안 온 오 부인을 비롯한 부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어 황궁에 좋은 태의들을 소개해 주었고, 배를 타고 가면 안전하니 괜찮다는 말을 들은 임새옥이 그제야 안심하고 그 자리에서 날을 정해 10월 보름에 출발하기로 했다. 

“용가 집에 불이 나고 좌천됐다고?” 

이날, 소금남이 창틀을 붙잡고 서서 옥매와 함께 짐 정리하는 임새옥을 향해 물었다. 

“용가가 아내와 말다툼하다가 홧김에 휴서를 썼대요. 용가 처가 욱해서 살던 누각에 불을 질러서 큰불이 난 일로 폐하께서 화가 나서 영남으로 좌천시켰어요.”

임새옥이 안됐다는 얼굴로 말했고, 소금남은 한숨을 내쉬었다. 

“떠났나? 만나 봐야겠군. 곱게 자란 용가가 영남에서 어찌 견딜까.”

임새옥은 관리 부인들이 가지고 온 선물을 분류하라고 옥매에게 지시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떠났어요. 당신이 사고 난 다음 용가가 옆에서 이것저것 도와줬어요. 그걸 봐서라도 배웅해야 했는데, 어머님이 안 된다잖아요. 게다가 꼴좋다고 잘됐다고 하시고. 그래서 사람을 시켜 돈이랑 옷감을 보냈어요. 불이 크게 나서 재산도 못 챙겼고, 다른 사람들의 손실도 보상해야 했거든요. 형님 얼굴 봐서라도 당연히 도와야죠. 그런데 사환이 다시 들고 왔더라고요. 안 받았다고. 당신이 서신 한 통 쓰면서 다시 보내요.” 

소금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옥매가 ‘백자희춘도(百子嬉春圖)’를 수놓은 비단을 꺼냈다. 금을 들고, 나무에 올라가고, 어린애 손을 잡고, 연을 날리고, 사자춤을 추는 얼굴이 하얗고 포동포동한 아이들의 모습에 소금남이 웃음 지으며 물었다.

(※백자희춘도: 송나라 때 사자춤이 매우 유행했고, 특히 아이들이 추는 사자춤은 인기가 많았다. 송나라 민간 무용을 반영하는 아이들의 생활 위주의 풍속도)

“솜씨가 좋군. 누가 이렇게 마음 써서 보낸 거지?”

선물을 제대로 보지 않았던 임새옥은 그 말에 고개를 내밀고 바라봤고, 옥매가 아원이 보낸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원이 원래 솜씨가 좋다고 말하면서 비단을 꺼내서 보던 임새옥은 순간 얼떨떨해졌다. 유씨의 솜씨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는데, 전가아가 쿵쾅거리며 달려와서 놀자고 떼를 쓰는 바람에 그 일은 곧 잊고 말았다.

“전가아, 어머니한테 떼쓰지 마라!”

소금남이 고함치자 전가아가 입술을 내밀고 더는 조르지 않았다. 임새옥은 안쓰러워서 놀아 주려고 손을 잡는데 소금남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한동안 고생해서 절대로 조심해야 해요. 몸이 튼튼하다고 안심하면 안 돼.” 

임새옥도 3개월까지 유산하기 쉽다고 책에서 본 걸 떠올렸다. 어렵게 가진 아이인데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전가아의 손을 잡고 설득했다. 

“전가아, 이야기해줄 테니 앉아서 듣는 건 어때?” 

소금남이 소리치는 바람에 얼굴을 구기고 있던 전가아는 임새옥까지 그렇게 말하자 손을 뿌리치며 고함쳤다. 

“거짓말하지 마! 아우가 생기니까 나 필요 없어진 거 알아! 나도 필요 없어!” 

전가아가 엉엉 울면서 달려가자 밖에 있던 시녀와 어멈이 허둥지둥 쫓아갔다. 임새옥도 다른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려나갔고, 소금남은 옥매를 재촉해서 내보내고는 창가에 서서 초조하게 바라봤다. 임새옥이 치맛자락을 잡고 뛰는 걸 보고는 날개가 없어서 잡아 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전가아가 나이는 어려도 여인네들보다 훨씬 빠르게 뛰었다. 

“내가 필요 없으면 나도 필요 없어. 외할머니한테 갈 거야.”

전가아가 울면서 바람처럼 밖으로 달려갔다. 마침 시녀들과 들어오던 소 노부인은 귀한 손자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누가 감히 널 괴롭힌 것이냐? 할미가 다리를 부러뜨려주마!” 

고개를 들었더니 임새옥이 치맛자락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죄다 창백해지고, 노부인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지팡이를 짚고 고함쳤다. 

“이것아! 그 몸을 하고, 밭에서 뛰어다니는 것처럼 뛰어? 내 손자를 해칠 셈이냐!” 

소 노부인은 전가아를 안을 겨를도 없이, 달려오는 임새옥을 붙들고 꾸짖었다. 임새옥은 입을 다물고 웃기만 하다가, 전가아가 입술을 내밀더니 밖으로 나가려는 걸 보고 허둥지둥 손을 뻗었다. 

“전가아, 또 왜 내가 싫어진 거야? 할 말이 있으면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지?” 

의원을 모셔오라고 시녀를 보내던 소 노부인은 그제야 전가아가 울며 달려왔던 걸 떠올리고는 같이 붙잡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전가아는 코를 훌쩍이다가 참고 있던 걸 쏟아내듯이 외쳤다. 

“내 어머니가 아니잖아. 아우가 생기면 내 어머니가 아니야! 날 버릴 거야!” 

“말해라! 누가 이간질한 것이냐!” 

소 노부인이 순간 화가 나서 주위의 시녀들을 노려보며 불을 뿜을 듯이 소리쳤고, 시녀들은 기겁해서 손을 내저었다. 

“저희는 아닙니다. 어디 감히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전가아는 작은 얼굴을 구기고 울음을 참지 못해서 헐떡이고 있었다. 아이의 두 눈에 가득한 깊은 두려움에 임새옥은 눈이 시큰해져서 웅크리고 앉아 아이를 잡았다. 

“전가아, 왜 내 말을 안 믿고 다른 사람 말을 믿는 거야. 혹시, 내가 싫어진 거야? 이 어미가 필요 없어진 거니?” 

전가아가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니야! 아니야! 외할머니가 그랬어요! 어머니에게 아우가 생기면 날 미워할 거라고. 날 버릴 거라고. 어머니, 말 잘 들을게요. 버리지 말아요.” 

임새옥은 더는 참지 못하고 눈가가 발개져서는 아이를 품에 안았다. 

“설령 아우가 백 명이라도 나한테는 전가아는 하나란다. 이 어미가 어떻게 널 버려. 우리 손가락 걸었잖아. 평생 사이좋게 지내자고. 절대로 어기지 않아.” 

소 노부인이 옆에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망할 노인네가 어디서 이간질이냐고, 그러니 불이 나고 저 멀리 좌천된 거라고 고함치며 밖에서 죽으라고 고함쳐댔다. 

시간은 매우 빨리 흘러, 엊그제 새해맞이 폭죽이 울린 것 같은데 어느새 춘분이 지났다. 따듯해지는 양춘 3월이 되자, 영양을 찾은 대지에 한 계절 잠자던 만물이 살며시 기지개를 켰다. 종산 자락에 새로 지은 큰 저택에도 봄기운이 찾아왔다. 

어두운 금빛 장포를 입은 소금남이 커다란 말을 타고 와서 문 앞에서 고삐를 쥐고 날렵하게 내려왔다. 사환이 뒤에서 말을 건네받고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소금남의 몸도 봄이 돌아온 대지처럼 서서히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칼에 찔려 상처를 입었으니 호흡이 가빠지지 않도록 말도 조심스럽게 타야 했다. 

이 저택의 배치는 십방촌 노씨 가택처럼 널찍한 뜰에 정면을 바라보는 단순한 구조의 큰 집채 다섯 채가 있었다. 청석으로 작은 길을 낸 것 외에 바닥은 전부 장식하지 않은 흙이었다. 옮겨심은 큰 나무 모두 잘 컸고, 아직 잎은 자라지 않고 길게 손아귀를 내밀 듯 뻗은 나뭇가지만 뜰에 보일 듯 말 듯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푸른 치마를 입은 시녀 네 명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제철이 아닌 채소를 손질하고 있다가 기척을 듣고 돌아서서 소금남에게 예를 갖췄다. 

“성안현에서 사람이 온 것이냐?” 

“예, 맞습니다. 대관인 어서 가보세요. 닭과 오리를 한 광주리 잔뜩 갖고 오셨다니까요. 마당 뒤에 우리를 만들라고 부인이 분부하셨어요. 잡아먹을 게 아니고 기를 거래요.”

시녀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소금남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3개월이 된 이래, 임새옥의 몸이 슬슬 불기 시작했다. 원래 잘 먹기도 하고, 큰 슬픔 뒤에 찾아온 아이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날까 봐 다들 불안해서 온 가족이 신선처럼 모시고 있어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정월이 지나면 성안현으로 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배가 나오기 시작했으니 임새옥이 뭐라고 해도 소 노부인이 보내주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라! 아이 낳기까지 고작 열 달이다. 아이 낳고 나면 저 하늘 끝으로 가서 양을 키운대도 상관하지 않으마. 단 올해는 조용히 몸조리해라. 그 빌어먹을 산이 네 배 속에 아이보다 소중하겠냐!”

소 노부인의 호통에 임새옥은 입을 축 늘어뜨리고 대답했다. 

“곱게 자란 것도 아닌걸요. 시골에선 여인들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아이를 잘만 낳아요.” 

“그런 말 할 것 없다. 우리 집도 가난했으면 널 밭에 보냈겠지!” 

“어머님, 또 돈 이야기세요? 옛말에 재물은 드러내지 말랬다고, 금가가 하마터면 돼지 취급당하고 팔려 갈 뻔했는데도 또 돈을 뿌리시나요. 느낀 게 없으세요? 지금은 관아 사람까지 사흘돌이로 찾아오잖아요. 뭐 하러 그런 골칫거리를 만드세요?” 

돈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임새옥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경성에서 벌인 진풍경으로 언젠가 문제가 생길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은 몰랐다. 새해가 지나고, 갖가지 명목으로 분담금을 내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벌써 여럿이다. 언제 끝날지 누가 알까?.

임새옥은 얼굴을 구긴 채 지나치게 부유해서 황제의 시기 질투를 산 명나라 심만삼(沈萬三) 이야기를 했다.

(※심만삼: 원말, 명초 강남 최고의 대부호. 중국 역사상 10대 거부에 손꼽힘. 본명은 심부. 해외 무역을 통해 강남 거부가 됨. 심만삼 가문이 주장(周庄)을 건설하고 발전시킴. 가문의 재산이 나라보다 더 많았다고도 한다. 주원장이 남경성을 건축할 때 재산도 내놓았고, 그 공으로 심만삼의 두 아들이 고위 관리로 임명되었으나,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은 귀양 가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 뒤로 증손과 사위가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일가 전체가 몰살당했다. 심만삼은 죽음은 면했지만 다시 재기할 희망을 포기하고 운남에서 보내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주원장이 시기할 정도로 부자였던 심만삼 가문은 이렇게 몰락했고, 지금도 중국 강남, 절강 일대에서는 부자를 ‘심만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디서 지어낸 해괴한 이야기냐! 네가 이 집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강녕 상인 중에 분담금을 내지 않는 사람이 있는 줄 아느냐? 가난한 집 출신이라 세상 물정 모르니까 이러지! 겁에 질린 것 좀 보게! 내 아들과 손자의 평안을 빌려고 돈을 뿌리는 거지, 성을 짓고 병사를 모아 황제하고 싸우려 하는 게 아니거늘!” 

소 노부인은 무시하는 얼굴로 혀를 차다가 핏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내 평생 고개도 숙여보고 멍청한 척도 해봤지만, 가난한 척은 안 해봤다! 돈이 있는대도 가난한 척하란 말이냐? 아들, 손자에게 쓰겠다는데 남이 무슨 상관이냐! 내가 이 나이 먹고서 두려울 게 무엇이냐!” 

임새옥은 할 말이 없어졌다. 노인네가 말주변이 좋아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임새옥이 과수원 생각에 매일 울적해하자, 결국 소금남과 함께 강녕에 온 이 대관사가 나서서 종산 근처에 산을 하나 사서 저택을 짓고는 열흘 정도는 거기에서 살게 하라고 설득했다.

“뭐 하러 쓸데없는 돈을 써요. 처음부터 다시 심을 시간도 없는데요!” 

임새옥은 입술을 내밀었다가, 소 노부인이 화가 나서 그것조차 안 된다고 할까 봐 금세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관사가 알아서 날짜를 골라서 공사를 시작했다. 그사이에 영아가 찾아왔는데, 오자마자 인사치레도 없이 시아버지에게 그곳 자재, 공임 관리를 맡겨달라고 청했다.

영아는 아이를 낳은 후에도 살이 빠지지 않고 갈수록 공처럼 둥글어졌다. 임새옥이 자기 안주인이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영아는 지금 신이 나서 어디에 가든 그 이야기였다. 상단을 따라 각지를 누비는 소정가는 크든 작든 관사 자리에 있긴 하지만, 영아는 그가 자주 밖에 있는 게 싫어서 점포에 나가 장궤 밑에서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임새옥을 졸랐다. 임새옥은 그녀 뜻대로 말을 넣어주었고, 그 선례가 생긴 후 영아는 더 으스댔다. 나중엔 시어머니를 후원 설거지 일에서 끌어내 채소 구매 담당으로 밀어 넣었다. 다행히 소정가 모친이 착실한 사람이라 관사 어멈도 별말 없었다. 그랬더니 이제 저택을 짓는다는 말을 듣고 또 부탁하러 달려온 것이다. 

이날도 참으로 공교롭게도, 아이가 생긴 이래 입덧은 하지 않는데 잠이 많아진 임새옥이 잠을 자고 있었다. 정월에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기도 했고, 지금은 친척 만날 일도 줄어서 매일 잠자는 시간이 많아졌다. 영아처럼 무지하고 무례한 아이를 매우 싫어하는 옥매는 바깥채까지만 들여서 차를 내주고 기다리게 할 뿐 가서 알리지도 않았다. 영아는 원래 남 눈치 볼 줄 모르는 사람이라 거들먹거리며 바깥채에 자리 잡고 앉아 있었다. 탁자에 놓인 과일을 먹으면서 차 내오라고 시녀를 부르다가, 시녀가 굼뜨다고 한마디 했다. 이렇게 굼뜬 애는 부인 거처에 있으면 안 된다 운운하는 말에 그 시녀는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러니 거들먹거리고 으스대는 영아의 태도를 비아냥거렸고, 잠에서 깬 임새옥이 그 말을 들었다. 

임새옥은 그제야 경각심을 느꼈다. 지금 그녀는 온 집안 몇백 명을 통솔하는 안주인이었다. 자신이 태만하게 굴면 안 될 것이고, 자신의 가노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건 절대로 용납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은 티를 내지 않고 영아의 이야기를 듣고 돌려보낸 다음, 사람을 보내 수소문했다. 영아의 시아버지는 정원 관리나 하는 사람이지 장부 정리 같은 건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바로 거절했다. 

처음으로 거절당한 영아는 당연히 찾아와서 눈물을 쏟았다. 임새옥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보고는 지금의 부인은 자기가 허튼짓해도 내버려 두던 그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는 한바탕 불평하고 돌아간 후로 다신 찾아오지 않았다. 역시 영아의 시어머니가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 알아서 찾아와 사과했다. 임새옥은 그런 걸 신경 쓸 생각이 없어서, 3월이 되어 저택이 다 지어졌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측근 시녀 몇과 부엌어멈만 데리고 서둘러 옮겨왔다. 

거처로 다가온 소금남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임새옥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그냥 하던 대로 하면 돼요. 우리 어머니 헛소리는 들을 것 없어요. 봄에 난 새싹이 제일 중요하니 잊지 말고 거름도 추가로 뿌리고요. 이번 겨울은 빨리 왔으니 물 줄 때 적은 양을 빠르게 주어야 해요. 시든 풀은 베어서 거름으로 주고요. 그래야 나무가 물, 거름을 빼앗아 가지 않아 새 풀이 잘 자라요. 그리고 대추나무는 꽃이 피면 반드시 꽃을 쳐내야 해요. 열매가 많이 자랄 필요는 없고, 실하게 자라야 해요. 운대 수확하고 나면 땅이 윤택해지니 보리 같은 걸 심으면 돼요.” 

소금남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휘장을 열고 들어갔다. 바짝 굳은 채 의자에 앉아 있던 십방촌 조육아와 사내 몇 사람이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서는 듣고 있었다. 

“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이야기면 이들이 어찌 다 기억해요. 차라리 나중에 사람을 보내요.” 

소금남은 일어선 사람들을 향해 앉으라고 손짓했지만, 역시나 앉으려 하지 않았다. 이 시골 사내들에게 앉으라고 권하는 게 더 거북하게 하는 것임을 아는 소금남은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고 임새옥 곁에 가서 앉았다.

“한번 들르시라고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는데, 장인어른과 장모는 어째서 안 오시는 겁니까. 집안에 별일은 없고요?” 

“노부인 몸이 안 좋아져서 부인과 노야 모두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대저아를 뵈러 왔습니다.” 

차를 마시던 임새옥은 하마터면 찻물을 뿜을 뻔했다. 분명 어머니가 정한 호칭이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하는 줄 알 지경이었다.

몇 마디 더 물어본 뒤에, 사내들이 너무나 거북해하는 걸 보고 시녀를 불러 모시고 가서 술과 차를 대접하게 하고, 며칠 머물다 가라고 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내일 바로 가야 합니다. 날이 곧 따듯해지는데 이제 봄 농사지어야지요.”

조육아가 얼굴이 빨개져서 손사래를 치자 임새옥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하면 안 되죠. 저도 여기서 시작할 거예요.” 

시녀들이 사내들을 데리고 음식 대접하러 가자 사람을 시켜 낡은 옷을 보내주라고 옥매에게 지시했다. 

“가지고 돌아가면 아내나 딸이 입을 수 있어.” 

옥매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전가아도 돌아왔어요?” 

임새옥이 물었다. 방에 두 사람만 남자, 신이 나서 소금남 곁으로 다가가 끌어안고 이야기를 나눴다. 소금남은 여인의 발그레하고 살짝 살이 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조금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쓰다듬었다. 가장 편안하고 흡족한 때였다.

“열여드레에 수추천(水秋千)이 열려요. 그걸 봐야 하니 당연히 돌아왔지.” 

(※수추천: 고대 수상 운동. 다이빙과 그네를 결합한 것. 송나라 때 시작한 일종의 다이빙 경기)

소금남은 임새옥의 눈빛이 반짝거리는 걸 보고 서둘러 덧붙였다. 

“어머님이 당신은 내년에 가라고 하셨어요. 사람이 많아서 당신은 가면 안 된다고.” 

“갈 시간이 어디 있어요. 왕 노상공이 내 고구마 싹 나기만 기다리면서 본인 땅을 몇 번이나 갈았다고요. 하루에 세 번 찾아오지 못해 안달인데, 내가 가긴 어딜 가요.” 

임새옥이 입을 비죽이며 하는 말에 소금남도 웃었다. 

“다 내 탓이로군. 다른 곳으로 고를 것을, 하필 왕 노상공의 반산원과 같은 곳을 골라서 말이야.”

그 말에 임새옥도 따라 웃었다. 입으로는 싫다고 해도 흡족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으로 옮겨 온 후에 왕안석의 반산원과 나란히 있는 걸 알게 됐을 때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모른다. 전부터 아는 사이라고는 해도 불과 한 달 왕래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해서, 역사에 기록된 신 같은 인물을 임새옥 역시 매우 경외했다. 그래서 무명옷을 입은 왕안석이 나귀를 끌고 이웃이라는 신분으로 찾아왔을 때 정말이지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역시 엄격하고 빈틈없는 분이세요. 배우려는 의지도 강하고요. 나라면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 알면 그만일 텐데, 굳이 돼지가 어떻게 달리는지 보려고 하시잖아요.”

“하하하. 그 새로운 물건을 식량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렇지. 나도 궁금해 죽겠는데. 아니면, 일단 한 조각 먹어볼까?” 

소금남이 껄껄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큰 적을 만난 듯이 경계하며 눈을 부릅떴다. 

“차라리 내 살을 먹어요! 한 광주리뿐인데! 그것도 버려질 뻔한 걸 가져온 거잖아요. 이제 겨우 그 절반에서 싹이 났다고요.”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다시 들떠서 소금남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금가, 마음 써 줘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고구마를 만났어요.” 

소금남은 정말로 감격한 것 같은 어린 아내의 얼굴을 웃으며 바라봤다. 많은 이가 표현하는 갖가지 감정을 모두 겪어 봤지만, 지금이 제일 뿌듯했다. 

얼마 전에 항료를 운반해온 상선이 해외에서 돌아올 때 괴상한 붉은 껍질 뿌리줄기 한 광주리를 실수로 가지고 왔다. 그래서 버리려고 하는데, 외국 사람들은 그걸 먹는다는 선원의 이야기를 들은 소금남이 마음에 걸려서 챙겨서 돌아왔다. 혹시나 하고 임새옥에게 줬더니, 임새옥이 보자마자 좋아서 펄쩍 뛰고, 웃고, 덥석 잡아서 입에 넣으려고 했다. 옥매가 재빨리 빼앗아서 다행이었다.

“이건 고구마라고 해요. 살짝 달고, 배를 채울 수 있어요. 밭에서 재배하기 적절하고, 반찬으로 먹어도 되고 끼니로 먹어도 돼요. 이건 벼, 보리에 버금가는 채소예요.” 

임새옥은 별것 아닌 것 같은 뿌리줄기 한 광주리를 끼고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책에는 명나라 때나 되어야 들어온다고 했는데. 이때도 들어왔구나. 고구마야, 고구마야.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한다. 널 좀더 일찍 빛 보게 해줄 거야.”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미친 듯이 하는 걸 본 옥매는 기겁하고 의원을 부르려고 했다. 자신의 어린 아내가 그저 농사 이야기만 나오면 미치는 병이 도진 걸 잘 아는 소금남이 그럴 필요 없다고 했다. 

임새옥은 지금 안 먹고 싹을 틔워야 한다며 방 하나를 치우고 화항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미장이가 드나드는 걸 본 왕 상공이 궁금해서 무슨 일인지 보러 왔다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특히 벼, 보리에 버금가고 끼니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말에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왕 상공은 그날부로 임새옥보다 더 마음을 썼고, 종일 소가에 들러붙어 있지 못함이 한스러운 듯 임새옥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했다.

“낭자, 당신이 너무 힘들까 봐 그러지.” 

소금남은 그녀를 품에 안고서 마음 아픈 듯이 말을 이었다. 

“농사가 힘들다고 하기에 그저 사지가 고된 줄 알았지, 이렇게 머리와 마음도 써야 하는 일인지 몰랐거든. 날씨도 봐야 하고, 온도도 봐야 하고, 큰불, 작은 불, 제어해야 하고, 거기에 또 날이 뜨거워지면 물을 뿌려야 하고, 싹이 나면 물을 덜 주어야 하고, 싹을 따기 전엔 물을 안 줘야 하고. 낭자, 이게 어디 농사일이에요, 이건 장원 급제만큼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일이지.” 

임새옥도 빙긋 웃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농사일은 간단해요. 하지만 제대로 하려면, 세상에 어디 쉬운 일이 있나요. 예전에 온갖 고생 다 하고 실험실에만 틀어박혀 있을 때도 아예 우량종자 하나 못 거둔 때도 있었어요. 농사일은 머리와 마음을 안 써도 된다는 건 그야말로 헛소리…….”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또 실수한 걸 알고는 서둘러 웃으며 얼버무렸다. 진작 적응한 소금남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그녀가 지나치게 신경 쓰지 않도록 재빨리 아이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딸을 낳으면 뭐라고 지을까,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옥매가 밖에서 노상공이 오셨다고 말했다. 

“아이고, 정말 하루도 빠짐없이 오시네. 오늘은 안 봐도 된다고 했는데. 싹이 텄으니 온도만 유지하면 된다고, 여드레쯤 뒤에 밭에 심을 수 있으니 그때 와서 옮겨 심는 걸 보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왜 또 오셨데요.” 

임새옥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다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꽤 좋은 새싹이에요. 잘 가르쳐서 세상에 내보내도 되겠어.” 

그래놓고 자기가 웃겨서 큰 소리로 웃었다. 정치가를 농학자로 바꾸어 놓다니,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현재 왕안석은 조정에서 물러난 지 어느새 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형국공(荆國公) 겸 사공(司空), 집희관사(集禧觀使) 관직에 있어서 감히 홀대할 위치가 아니었다. 소금남과 임새옥은 재빨리 매무새를 가다듬고 왕안석을 맞이하러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무명옷을 입은 왕안석이 나무에 묶어둔 나귀에게 커다란 병자를 먹이고 있는 게 보였다. 곁엔 어린 시동, 그리고 마을 아이들이 에워싸고 “왕 할배, 나귀 좀 태워줘요.” 하고 재잘대고 있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도 그저 고개를 살짝 까딱이며 “반산, 며느리가 불러서 성에 가지 않았소? 왜 다시 돌아왔소?” 하고 물었다. 누군가는 “반산 선생, 시간 날 때 아들에게 보낼 서신을 좀 써주시겠소?” 하고 물었고, 왕안석은 모두 응응, 그래그래, 그러면서 대꾸해주었다. 아무도 이 소박한 차림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한때 조정에서 황제와 여러 대신을 상대하며 신법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대상공임을 알지 못했다. 어딜 봐도 산야에 묻혀 사는 평범한 노인이었다. 

“대낭자, 어제 생각해 보았는데, 모처럼 자란 싹을 모두 내가 심어버리면, 대낭자는 뭘 심고?” 

왕반산은 부부의 예를 받은 다음 겸연쩍은 듯 물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고구마 싹은 탐 나고, 또 이 어린 여인이 자기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하는 걸까 봐 걱정은 되고, 이래저래 난감하고 또 아쉬운 얼굴이었다. 

임새옥은 웃으면서도 마음도 포근했다. 왕안석이 요즘 거의 매일 이곳에 머무르는 바람에 부인 오씨가 너무 걱정되어 어제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려 직접 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단지 이 어린 여인이 심을 게 없을까 걱정이 되어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것이다. 

“선생님, 이건 부추처럼 베어서 또 심을 수 있어요. 그러니 안심하고 심으세요. 제가 손해 보면서 드리는 게 아니에요.” 

그 말에 왕반산은 깨달은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다면 안심하겠네. 옛말에 군자는 다른 사람의 이득을 빼앗는 게 아니라고 했네. 마음이 급해서 외람되게 대낭자에게 폐를 끼친 줄 알았지.” 

“선생님께서 심으시면, 고구마에게도 큰 영광일 거예요.” 

임새옥의 말에 왕반산도 신이 나서 시동이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육묘방(育苗房)으로 가 보자고 임새옥을 채근했다. 

육묘방은 한여름처럼 따듯했다.

“새싹 관리의 기본 중점은 촉진이에요. 그리고 단련으로 보조하고요. 선 촉진, 후 단련, 촉진과 단련을 잘 결합하면서 온도를 제어하는 게 요점이에요.”

왕반산은 임새옥의 설명을 들으며 그 알 것 같고 모를 것도 같은 ‘초기엔 고온으로 발아를 재촉한다. 중기엔 상온으로 싹을 키운다. 말기엔 저온으로 싹을 단련한다.’ 같은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지금 임새옥은 출산을 두 달 앞둔 몸이라, 소금남도 매우 조심하며 뒤를 따랐다. 그는 따듯한 실내에 서서 곁에 있는 노인과 젊은 여인이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 진지하게 듣고 말하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사면이 굳게 닫힌 어슴푸레한 방 안에 있으니 두 사람 모두 진짜인 듯 가짜인 듯한 뿌연 안개를 드리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여드레쯤 지난 뒤, 왕반산이 들뜬 얼굴로 주시하는 가운데 임새옥이 첫 번째 고구마 싹을 잘라냈다. 주변에 있던 소작농이 신줏단지 모시듯이 흙에 감싸서 바구니에 집어넣었고, 왕반산은 곧바로 붓을 들고 임새옥의 모든 동작, 모든 말을 기록했다. 

“싹을 뽑기 전엔 물을 주지 않고, 싹을 뽑은 후에 물을 줘야 해요. 처음엔 거름을 추가하지 않고, 두 번째에 추가해요. 싹을 잘라낸 당일엔 거름을 추가하면 안 되고 다음 날이 되어야 주는 걸 꼭 기억하세요. 거름을 추가로 준 후엔 싹이 마르지 않도록 물을 주고요…….”

습관적으로 입으로 읊으며 알려주던 임새옥은 왕반산이 진지하게 듣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예전에 교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격려의 뜻으로 제자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만은 참았다. 

별로 많지 않은 싹을 광주리에 담아서 나오니, 거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왕반산이 밭으로 가는 걸 지켜봤다. 이랑을 이미 다진 밭에서 배가 잔뜩 나온 여인이 일일이 설명하며 시범을 보였다. 옷에 곧 진흙이 묻었고, 치마도 다소 예의에 어긋나게 말려 올라갔다. 발그레하고 살이 오른 얼굴에도 진흙 자국이 남았지만, 그녀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는 사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는 것처럼 사랑스럽고 어여쁘기만 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소작인의 동작이 갈수록 노련해지는 걸 본 왕반산도 더는 참지 못하고 바짓자락을 말고 밭으로 들어가서 땀과 흙을 뒤집어쓴 채 일하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을 받들어 직접 대상공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왔던 중사(中使: 궁에서 파견한 사자) 풍종도(馮宗道)가 그 모습을 제대로 맞닥뜨렸다. 

풍종도가 이곳에 처음 오는 것은 아니었다. 희녕 10년, 왕안석 생일에도 직접 황제의 선물을 가지고 왔었다. 하지만 그때는 강녕성에 있는, 호화롭진 않지만 그래도 기세가 장중한 왕가 저택에서 만났고, 농부처럼 일하는 왕 대상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이번 일화는 풍종도와 함께 경성 황궁 경복전으로 가게 되었다. 

황제는 대신들을 거느리고 창고를 순시하고 있었다. 먼지가 폴폴 나는 평방(平房) 안에 비단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지금 나라는 천하가 태평하고 안팎으로 우환이 없었다. 여러 차례 농 재해를 겪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창고가 가득해졌다. 어느 황제라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드러낼 일이었다. 

“이게 모두 경들이 선정을 베푼 덕에 오늘 같은 풍족함을 누리는 것이오!” 

황제가 대신들을 훑어보며 웃었고, 대신들은 홀판을 치켜들고 허리를 숙이며 모두 폐하의 공덕 운운하고 외쳤다. 

“유 애경, 벼, 보리 이모작은 어찌 진행되어 가는가?” 

두 번째 줄에 선 유소호를 본 황제가 다급히 물었다. 관포 차림의 유소호는 그리 좋지 않은 안색으로 조금 주저하다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요즘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보리가 대규모로 해를 입었습니다. 그리하여 보리와 벼 모두 망칠까 봐 논벼를 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기뻐하던 황제는 기분이 다소 가라앉아서 언짢음을 감추지도 않고 말했다. 

“연후부터 곡식을 교차해서 심었다는 보고가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실패하면 그야말로 헛수고한 것 아닌가?”

유소호는 성상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말하면서, 굳게 다문 입술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어려운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토록 어려울 줄 몰라서 속이 탔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어려운가. 어째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인가. 조바심내며 자문하는데,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서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황제가 어느새 다시 기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금은 들뜬 모습이었다.

“봉양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가슴에 영원한 슬픔을 품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듯 충성하리. 

황제께 총애받은 대의를 갚을 길 없네.”

(황제와 왕안석이 서신으로 나누었던 내용)

황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한 점 사심 없이 나라를 지극히 사랑하는 은사가 보고 싶은 듯 겹겹 궁전 너머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대상공은 언제나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지. 풍종도, 그것이 정말로 벼, 보리에 버금가는 물건이란 말이냐? 허기를 채울 수도 있고?”

풍종도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왕안석은 그런 말을 전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나중에 결과를 봐야 하고 아직은 말하기 이르다고만 말했고, 황제에게 쓴 감사 서신엔 더더욱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그래서 풍종도가 마을 사람을 떠보고 알아낸 사실에 본인의 견해까지 과장해서 보태서 설명했다.

“그렇다면 실로 우리 송나라의 큰 복이겠군. 조 대낭자, 과연 기이한 여인이로다.” 

황제가 들뜬 듯이 말했다. 

풍종도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조정 대신들도 술렁였고 유소호의 안색은 더 안 좋아졌다. 소매 안에서 손을 꾹 쥐는 그의 이마에도 땀이 배어났다. 조 대낭자를 거론하는 황제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에서 독기가 생겼는지, 갑자기 걸음을 내디뎌 앞으로 나왔다. 

“신, 폐하께서 이토록 백성에게 은혜로운 식량을 얻은 것을 경하드립니다. 신에게도 바칠 물건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물건으로 백성들이 따듯하게 지낼 의복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백첩자(白疊子)라는 물건입니다. 원래 복건 일대에 자라는 것으로, 신이 외유할 때 따 온 것인데 집에서 심어냈습니다. 여름에도 잘 자라는 물건으로, 성공하면 면을 4, 5백 근 넘게 수확할 수 있고, 씨로 기름을 짜서 유채 기름 대신 등불로 쓸 수 있습니다.” 

유소호가 그 말을 끝내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보 보듯이 그를 바라봤다. 이 시대에 말하는 ‘면(棉)’이란 ‘목면’으로 후세에서 말하는 ‘솜’이 아니었다. 후세에서 말하는 솜은 棉(면)이 아니라 綿(면)으로 다년생 목면, 즉 아시아 면이었다. 

당나라 초기<양서, 서북제융전(梁書, 西北諸戎傳)>에는 ‘고창국(高昌國)엔 초목이 많고 그중 고치처럼 생긴 풀이 있는데 이름이 백첩자로 고치 안에 가느다란 실이 있다. 그 나라 사람은 주로 천을 짜는데 그 천은 매우 보드랍고 하얗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 내용이야말로 아시아 면, 즉 솜이고 중국에 전해지긴 했지만 신강 지역에만 국한되었고 중원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줄곧 견(繭)과 마(麻)가 주요 의복 원료였고, 베(布)도 이미 나타났지만, 생산량 문제로 보급되진 않았다. 북송 시대에 베 대신 쓰던 건 여전히 지금 쓰는 목면 위주였고, 이것 역시 생산량이 지극히 낮았다. 그래서 한 근에 30에서 50문(文)은 받는데, 지금 유소호가 4, 5백 근이라는 말을 꺼내니 얼마나 놀랐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유 경, 지금 한 이야기, 근거가 있는가?” 

황제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유소호는 이마에서 땀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순간 주저하는데, 꼬투리를 잡은 이정이 냉큼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유문장이 명성과 이득을 탐하여 감히 무엄하게도 요사스러운 말을 내뱉은 것은 대신의 도리를 실추한 것입니다. 신, 유문장을 탄핵합니다.” 

이정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소호는 고개를 들었다가 의심스러운 황제의 눈초리를 마주했다. 순간 자신의 마음에 남은 한 가닥 망설임을 완전히 물리치고, 고개 숙인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면(棉)이라는 것은 본디 남해 여러 나라에서 나던 것으로, 당나라 초기에 해외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그 씨를 복건, 남해 등에서 심었는데 아직은 대규모로 재배하지 않습니다. 

밭에서 잘 자라기에 신이 오래 주시하다가, 연말에 사람을 보내 종자를 구해와서 집에 암굴을 지어 실내에서 재배했습니다. 올봄에 밭으로 옮겨 심었더니 잘 자라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살펴봐 주십사 이렇게 상주하는 것입니다.” 

어가를 준비하라는 황제의 말 한마디에, 3월 중순이라 아직 서늘한 봄바람이 부는 이날, 관리들이 줄줄이 궁에서 나와 번화한 거리를 지나 경성 밖 가장 열악한 밭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다시피 한 그 밭에, 바람에 나부끼는 작은 새싹을 본 대신들은 법도를 따질 겨를도 없이 쭈그리거나 허리를 숙이고 들여다봤다. 이 고지대 주변엔 모두 잡초가 무성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좋은 밭엔 보리가 하루하루 쑥쑥 자라고 있었다. 

“이곳은 보리도 잘 자라지 못하는 열악한 땅인데, 이렇게 자란 걸 보면 실로 비범한 물건입니다.”

어느 대신이 그렇게 말했다. 거기에 유소호가 황제에게 상세히 설명하는 걸 들은 사람들은 다들 마음이 동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누구나 집에 백 묘 정도는 땅이 있는데 물론 그중엔 척박한 땅도 있었다. 정말로 면화를 심을 수 있다면, 금은을 키우는 셈이었다. 심지어 성질 급한 사람은 벌써 씨를 어디에서 사는지 물었고, 심을 시기를 놓친 게 아닌지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복건 각지엔 흔합니다. 지극히 저렴하고요.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어 날이 맑아지면 파종하면 됩니다. 저는 옮겨심을 것이라 조금 서둘렀고, 직접 파종할 때는 다음 달 말까지도 괜찮습니다.” 

유소호가 웃는 얼굴로 대답하면서 파릇파릇한 목화밭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그 당시 임새옥이 심었던 목화를 떠올리고는 덧붙였다.

“7월이 되면 꽃이 피는데, 그 아름다운 자태가 목단에 버금갑니다.”

이때 등관이 들떠서 허리를 굽히고 “신, 경하드립니다, 폐하. 의식주는 만민의 대사인데, 현재 대상공이 몸소 고구마를 심어 우리 만백성의 먹을 걱정을 덜고 또 유 대인이 면화의 싹을 발견했으니 우리 대송에 더는 기근과 추위 걱정이 없겠습니다. 하늘이 보우하심입니다.” 하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아부가 시작되자, 물론 많은 대신이 따라서 황제 폐하의 태평성대,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쩌렁쩌렁한 소리에 황제는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폐하, 이것이 성장하긴 했으나 아직 대규모로 재배하진 않았으니 무턱대고 추진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견을 발표하는 법이 없던 재상 왕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유소호를 힐끔 보며 “조 대낭자가 농사에 정통하니 물어보는 게 좋겠소이다.” 하고 덧붙였다. 유소호가 빤히 바라보자, 천성이 남에게 좌지우지되는 이 재상이 서둘러 덧붙였다. 

“유 대인은 벼, 보리 이모작을 성공한 사람이니, 급하게 추진하지 말고 서서히 상황을 보고 차차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신, 폐하 곁에 이런 사람이 있음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제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유 경, 짐이 이 일을 자네에게 맡길 테니 땅을 골라 신중히 재배하고 결과를 보세.” 

유소호는 허리를 숙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땅을 골라 신중히 재배하라고 했으니 일은 쉬워졌다. 그는 지금 이 목화의 가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낸 이상, 황제의 한마디로는 사태를 제어할 수 없다는 걸 알지 못하고 고개 숙이며 안도했다.

곡우(穀雨)란, 곡식이 비를 얻어야 성장한다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곡우 전후로 날이 서서히 따듯해지고 강수량도 늘어난다. 씨앗을 뿌리고 싹을 옮겨 심고, 오이와 콩을 묻는 최적의 시기였다. 3월 열이레, 강녕 종산 자락 작은 마을엔 보슬비가 촘촘하게 내렸지만, 소작인들은 변함없이 부지런히 밭에 나와 일했다. 

붉은색 대금 웃옷, 흰색 도선 치마를 입은 임새옥은 두립을 쓰고 밭머리에 서 있었다. 옥매는 한 손에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 단단히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우산을 썼는데도 빗물이 들이쳐서 잔뜩 긴장하고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임새옥의 볼록한 복부가 금세 비로 흠뻑 젖자, 옥매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돌아가요, 부인. 곧 다 끝날 거예요. 다들 배웠잖아요. 몸도 무거운데 아직도 밭에 나오기만 하면 반나절 계시다니요. 대관인이 말씀을 안 하셔서 그렇지, 밤엔 분명 근심으로 잠도 못 주무실 거예요. 눈이 다 벌게진 거 못 보셨어요? 부인은 튼튼하지만, 대관인 생각을 하셔야죠.”

임새옥은 빙긋 웃으면서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넌 아직 혼인도 안 한 애가 뭘 아니. 몸 풀 때가 가까워질수록 많이 걸어야 해. 그래야 나중에 수월해.” 

“흥. 부인, 부인도 지금 처음 몸 푸는 거예요.” 

옥매가 그녀를 부축하고 돌아섰다. 

“고구마는 손이 안 가는 식물이야. 심어놓고 이제 비만 기다리면 돼. 그렇게 한 달 지나고 짚 태운 재만 몇 번 뿌리면 돼. 그럼 한로(寒露) 전에 수확할 수 있거든. 그때 내가 구워줄게. 튀겨도 되고, 끓여도 되고, 볶아도 되고, 쪄도 된단다.” 

임새옥은 시큰한 허리를 쓰다듬으면서 빗물과 흙 비린내를 맡으며 흡족한 듯 하품했다. 

“그럴 복이 있다니 좋네요. 부인이 솜씨 발휘하는 걸 기다릴게요.” 

밭에 난 길이 좁아 한 사람밖에 지나가지 못해서 옥매는 밭에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태연하게 내려가서 잔뜩 진흙을 묻힌 채 임새옥을 부축하며 길을 서둘렀다. 진작 습관 되어서 새로 신은 붉은 신발에 흙이 다 묻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인은 별것 아닌 듯 말씀하시는데, 대상공은 금산을 지키는 듯이 조심하시네요. 요즘은 우리 집엔 별로 안 오시고 매일 밭을 지키고 계세요. 고구마가 자라는 걸 매일 곁에서 보지 못해서 안달이시고요. 부인은 못 보시겠지만, 오 부인이 한바탕 한 다음에야 겨우 따라서 돌아가시곤 해요.” 

옥매는 웃으며 밭에서 나온 다음 평탄한 길에 올라서서 대충 발을 굴러 진흙을 털었다. 

일고여덟 민가가 흩어져 있는 이곳에서 가장 큰 가택이 바로 돌다리 옆의 반산루와 바로 그 옆의 소가 농원이었다. 이 두 가택 모두 청산녹수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주변과 두드러지지 않게 잘 어우러져 있었다. 이곳에 있는 다른 민가처럼 토담이 낮았고, 반산루는 아예 담장도 없고 화려한 장식도 없는 그저 비바람을 피할 평범한 가택이었다. 닭과 개가 날뛰는 시끌벅적한 소가 가택과 비교하면 반산루 쪽이 더 우아해 보였다. 

임새옥과 옥매가 들어가자, 처마 밑에 앉아서 작은 이불을 짓던 어멈 둘이 일어서서 맞이했다. 

“부인, 또 나갔다 오신 건가요. 늙은이가 입방정 떠는 게 아니라, 두 달 후엔 몸 푸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임새옥이 몸이 무거워지자, 소 노부인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벌써 불시에 필요한 때를 대비해서 산파 두 사람을 불러 놓았다. 임새옥이 두 사람의 잔소리를 들으며 방에 앉아 차를 마시는데 소금남이 밖에서 들어왔다. 

“소식이 왔는데, 장인은 안 오시고 장모님이 금단을 데리고 출발하셨다더군.”

임새옥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찌 됐든 이 몸의 어머니인 노씨가 출산할 때 곁에 있어 준다고 하니 까닭 없이 안심되었다. 

“왜 얼굴 찌푸리고 있어요? 장모가 와서 어머님과 싸울까 봐요? 괜찮아요, 진짜로 싸우는 것도 아닌데요.” 

임새옥이 다가가 소금남이 살짝 찌푸린 미간을 쓰다듬었다. 소금남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럴 리가요. 어머님도 듣고는 벌써 사람을 시켜 거처를 준비하신걸.” 

그러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임새옥의 시선에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낭자, 작년에 낭자가 심은 그 목화란 게 매우 희귀한 물건 아닌가?” 

한참 기다리다가 그 말을 들은 임새옥은 안도하며 웃었다.

“지금껏 심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렇지, 대단히 희귀한 건 아니에요.”

그제야 소금남의 얼굴이 한결 좋아졌다.

“우리 낭자가 농사를 지으니, 나도 농부처럼 밭에 자란 것만 봐도 신기하고 궁금하더군요.” 

이런 걸 보고 마누라가 예쁘면 처가 말뚝에도 절한다고 하는 건가. 

하지만 임새옥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어진 소금남의 말에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그 목화가 이젠 희귀한 게 아니었군요. 얼마 전부터 복건, 심지어 영남 일대의 목화씨 가격이 배가 되었어요. 다들 심으려고 난리고, 논벼도 다 뽑고서 물을 빼 밭으로 만들어서 목화를 심는다던데…….” 

소금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릎에 앉아 있던 임새옥이 화들짝 일어났다. 소금남은 깜짝 놀라 그녀를 붙잡으며 살짝 나무랐다. 

“조심해야지. 아직도 이렇게 덤벙거리면 어째.” 

임새옥은 지금 들은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 소금남의 손을 잡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다 목화를 심는다고요? 사람들이 목화를 어찌 심는지 어떻게 알고요?” 

고대 농민이 지혜가 비범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지식을 돌연 갖추었다는 건 너무 갑작스러웠다.

정확히 말하면, 모든 새로운 것은 서서히 추진된다. 벼도 그랬고, 보리를 남쪽에 심게 된 것도 조정이 강하게 제어하면서 서서히 진행된 것이었다. 밀만 해도 그랬다. 북송 초기에 남쪽에서 밀 농사를 시작한 이래 남송 말기까지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음식 습관, 지리 환경, 기후와 관련된 문제이자, 새로운 작물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가치를 드러내지 않은 목화가 어떻게 갑자기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논벼까지 대신해서 심으려고 들까? 

“목화 한 묘를 심으면 4, 5백 근 얻을 수 있다고 조정에서 그랬다는군요. 낭자, 생각해 봐요, 지금 목면 가격을 생각해 보면, 목화가 아니라 황금을 심은 거나 마찬가지지. 낭자도 이야기했잖아요. 목화는 면을 뽑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름도 짤 수 있다고. 보아하니 조정에서도 알게 된 모양이에요. 

원래 조정 관리들끼리 몰래 재배했는데, 금세 부자들도 알게 되어서 다들 앞다퉈 심는 모양이에요. 그러다 보니 씨앗이 모자란 것이고. 그래서 다들 보물처럼 여기고 있고. 

조정에서는 버려진 땅에 심어도 된다고 한 모양인데, 사람들이 어디 그러겠나. 다들 가장 귀한 땅에 심었다더군요. 우리 강녕은 소식을 늦게 알게 되어, 다 해도 고작 일고여덟 집에서 대여섯 묘 심었다고 해요. 듣자 하니, 북쪽엔 더 많이 심었다던데. 부자들은 땅이 없어서 보리도 다 뽑았다고 하고…….”

소금남의 말이 귓가에 맴돌자, 임새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어지는 말은 들리지도 않고 윙윙거리기만 했다. 

큰일 났다! 

그녀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창밖으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촘촘하게 내리던 비가 갈수록 더 굵어졌다. 창 너머로 바라보니, 마당에 바닥이 벌써 흠뻑 젖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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