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즐거운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
지금 임새옥을 모시는 시녀들은 임새옥 부부가 같이 있을 때는 누가 곁에 있는 걸 싫어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차 시중, 옷시중 모두 임새옥이 직접 하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아는 옥매는 소금남이 들어오자 바로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임새옥은 소금남이 놀리듯 하는 말에 입술을 내밀었다.
“왜 기다리지 않았어요? 맞고 나오면 어쩌라고. 아무도 없잖아요.”
소금남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입술에 살짝 입을 맞추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자가 아까워서 당신을 때릴 수는 있고?”
그러면서 손을 잡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둘 다 유씨 가문의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밥을 안 먹었다는 임새옥의 말에 소금남이 그녀를 일으켰다.
“분탕(粉湯: 당면에 가늘게 썬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탕)이 있어요. 밥도 있으니 같이 먹읍시다.”
“안 먹을래요. 느끼해요.”
임새옥이 눈살을 찌푸리자 소금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나가서 먹읍시다. 골목 모퉁이에 청풍루로 갑시다.”
나가기 싫다고, 배도 고프지 않다고 하는 임새옥을 소금남이 안 된다면서 억지로 끌고 나갔다. 막 채루 안으로 들어서는데 뒤에서 어린아이가 웃으며 “아버지!”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전가아가 뒤에서 덥석 안았다.
“어찌, 너랑 할머니도 밥을 먹지 않은 게냐?”
소금남이 전가아를 안아 올리며 물었다. 전가아가 땀에 흠뻑 젖은 걸 보고는 임새옥이 어느새 손수건을 꺼냈다. 땀을 닦아주고 돌아봤더니 노부인과 떠들썩한 일행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외삼촌하고 온 거예요. 할머니는 다루에서 이야기 듣느라 나오지도 않아요. 어머니가 이미 다 해준 이야기라 나는 듣기 싫은데, 아무리 졸라도 할머니는 나오지 않아서 심심했어요.”
전가아는 그새 임새옥에게 안겨서 깔깔 웃으며 말하더니 뒤를 가리켰다. 담청색 비단 장포를 입은 이용이 그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 있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괜히 떼써서 노부인 귀찮을까 봐서요.”
이용은 다가와서는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소금남 뒤로 가서 서는 걸 보고 빙긋이 웃었다.
“자형이 경성에 와서 집에도 들르지 않는 걸 보니, 이제 남인가 봅니다.”
그 말을 하고 여인의 표정을 보니 거북한 모양새였다. 소금남도 언짢아져서 담담하게 말했다.
“곧 가려고 했다. 너무 나무라지 말아라. 지금은 식솔이 있으니 함께 식사하지 못하고, 저녁에 전가아를 데리고 가마. 노부인께도 말씀드려주고.”
이용도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별말은 하지 않고 그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웃으며 임새옥을 바라보며 물었다.
“부인, 썩은 쥐의 맛이 어떠합니까?”
임새옥은 거북한 건 둘째치고 화가 났지만 고개를 들고 방긋 웃었다.
“대인께 대답할게요. 인간 세상의 별미더군요.”
이용은 그녀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말할 줄은 정말 몰랐다. 한순간 멈칫하고는 이내 씁쓸함이 몰려왔지만, 혼자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는 소금남은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조금 전까진 조심스러워하던 어린 아내가 이제 오히려 그의 손을 잡고서 작은 새처럼 기대는 걸 보니 웃음이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숨김없이 정을 표현하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럼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저녁에 집에 연회가 있으니 꼭 오십시오, 자형.”
이용이 웃으며 말하자, 소금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가아가 여기에 있다고 노부인께 알리라고 사환에게 당부하고는 자신은 여인의 손을 잡고 주랑을 따라 들어갔다.
막 정오가 지난 때라 식객이 많은 시간이었다. 가족 세 사람이 인파 사이로 들어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주위의 대나무 발 너머로 들리는 금 소리와 웃음소리가 이용의 고막을 아프게만 했다.
“어째서 너만 이리 운이 좋은 것이냐…….”
이용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양손을 움켜쥐고서 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녁이 되어서 소금남이 전가아를 데리고 이가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노부인이 싸늘한 얼굴로 언짢은 듯 말했다.
“난 그 집 사람들이 싫다. 시름시름 앓는 애를 보낸 걸 타박하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우리가 그 애를 죽게 했다고 욕해대지 않느냐. 쯧. 그 애가 우리 집에서 하루도 편히 못 살고, 내가 매일 욕하고 때린 것처럼 굴지 않느냔 말이다! 내 아들을 홀리고, 손자를 뺏어가더니, 이제야 좋아졌는데, 또 나타나서 역겹게 굴어!”
그 말에 소금남은 안색이 안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도 외조모잖아요. 얼굴 보여줘야죠. 안 돌려보내기야 하겠어요.”
이내 임새옥이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아쉬워하는 모양새이자, 소 노부인이 코웃음을 쳤다.
“술 마시지 말고 바로 돌아오라고 하지 그러냐!”
“어머님이 하신 말이에요. 내가 한 말 아니에요.”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이 또 노부인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래! 내가 한 말이다! 그 노인네! 우리 집을 하찮게 여기지 않아! 전에도 얼마나 난리를 부렸어! 우리가 귀한 여식을 죽였네, 어쩌네 하면서! 전가아 성격을 그 지경으로 만들고! 상대도 하지 말고 얼른 돌아오너라.”
소금남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웃으며 전가아를 데리고 갔고, 임새옥은 노부인과 함께 식사했다. 한 상 가득하게 차린 연화압첨(蓮花鴨簽), 강하(姜蝦), 여지요자(荔枝腰子), 비절양두, 선절와순(旋切萵笋), 매운 무 곁들임 등 정교한 음식이건만 이상하게 입맛이 없어서 죽 두어 입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죽고 없는데 그저 그 집에 간 걸로 뭘 그리 거북해해! 정말이지 밴댕이 소갈딱지구나. 밥도 안 넘어가는 것이냐?”
노부인이 즐겁게 먹다가 노려보자 임새옥이 입술을 내밀었다.
“어머님이야말로 밴댕이 속이시네요. 점심을 늦게 먹어서 입맛이 없어서 그러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어요!”
그 말에 시녀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밥을 먹은 뒤, 임새옥은 소 노부인의 침상에 비집고 앉아서 노부인이 밖에서 뭘 하고 놀았는지, 무얼 봤는지 이야기를 듣다가 떠날 일정 이야기를 했다.
“배를 정해놓았다. 내일 오후에 바로 떠나자.”
“역시 어머님이 절 제일 예뻐하시네요. 제가 마차 힘들어하는 거 아시는 거죠?”
노부인이 다시 한 번 슬쩍 흘겨보고는 별말 없이 시녀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다가 이내 재미없다고 하자, 시녀 하나가 말했다.
“그럼 우리 부인께 손후자 이야기 들어요. 다루에서 끝까지 못 들었잖아요. 부인이 이야기해주는 것보다 재미도 없고요.”
아무 생각 없이 한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퍼질 줄 몰랐던 임새옥은 갈수록 두렵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속으로 오승은을 향해 죄송하다고 몇 번 외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노부인을 바라보다가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어머님이 재미없다고 해서 못하겠네.”
그러자 노부인이 베개를 던지면서 꿍얼거렸다.
“버르장머리 없이 무슨 짓이냐! 네 거처에 있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굴어?비켜라, 이불 구겨진다!”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 나누는 사이, 소금남이 전가아를 데리고 돌아왔다. 전가아는 눈을 비비며 노부인에게 안기더니 졸리다고 칭얼거렸다.
“일찍 왔구나.”
노부인은 소금남의 얼굴이 발그레하니 술을 마셨다는 걸 알고 혀를 찼다.
“그 집안사람하고 뭔 술을 마신 게냐!”
“용가하고 딱 두 잔 했습니다. 내일 성밖에 화물 보러 가야 한다고 했더니 많이 권하지 않았고요.”
소금남이 웃으며 말하고는 전가아를 데리고 가서 재우라고 어멈을 불렀다.
“할머니, 혼자 자기 싫어요. 할머니랑 잘래요. 제가 이야기해 드릴게요. 다루에서 듣는 것보다 재미있을 거예요.”
전가아가 노부인을 끌어안고 몸을 배배 꼬자, 노부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다가 소금남이 전가아를 꾸짖는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왜 혼내는 것이냐! 넌 전가아 나이까지 침상에 오줌 쌌다!”
그 말에 소금남은 얼굴이 시퍼레져서 소매를 휘두르며 돌아갔고, 시녀들은 웃음을 참으라 난리였다. 임새옥은 노부인을 향해 빙긋 웃고는 다급히 쫓아갔다.
보름이 가까운 때라 하늘에 큰 달이 둥그렇게 떠 있고 달빛이 바닥을 환하게 비춰서 시녀가 등을 들 필요도 없었다. 소금남은 임새옥과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며 거처로 돌아갔다. 임새옥은 내일 오 부인을 만나러 갈 생각이라고 이야기했다.
“공교롭게 내일 오전에 성밖에 가서 화물을 살펴야 해서 함께 가지 못해요.”
“아원이랑 같이 갈 거예요. 알아서 갈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임새옥이 그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슬쩍 물었다.
“정말로 그때까지 오줌 쌌어요?”
소금남이 얼굴을 붉히며 그녀를 잡으려 하자 임새옥이 먼저 달아났다.
임새옥은 요즘 가뜩이나 잠이 는 데다가 밤늦게까지 소금남에게 시달리느라 아침에 졸음이 와서 눈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금남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나직이 다녀올게요, 하는 게 어렴풋이 들렸었다. 옥매에게 부인의 식사를 챙기고, 굶게 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 소리를 들으며 안쪽으로 돌아누워 다시 잠들었다가 옥매가 깨우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임새옥은 눈을 비비고 앉아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 사이 옥매는 침상 휘장을 젖히고 있었다.
“지금 사시(巳時)예요. 오늘 옛벗들을 만나러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일어나셔야 해요.”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서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단장한 다음 급해서 밥 생각 없다고 하니, 옥매가 안 된다고 했다. 대관인이 말씀하셔서 안 드시면 절대로 못 나간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밥을 먹고는, 노부인에게 말씀드리러 가야겠다고 했다.
“그냥 얼른 다녀오세요. 노부인은 일찍 일어나셔서 벌써 전가아를 데리고 소타(小打) 보러 가셨어요.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하다며 나가시느라 부인 신경 쓸 겨를도 없으셨어요.”
“소타? 그건 또 뭐야?”
임새옥은 시녀들이 집에 가지고 갈 채소를 싣는 걸 바라보며 물었다.
“대타는 사내들이 말 타고 하는 격구고, 소타는 여인들이 나귀 타고 하는 거예요.”
옥매는 임새옥이 놀라는 걸 보고 그녀의 등을 떠밀며 말을 이었다.
“강녕에도 있어요. 궁금하면 돌아가서 보러 가요. 지금은 그럴 겨를 없어요.”
그러면서 재촉해서 마차를 타고 아원의 집으로 향했다. 진작 기다리고 있던 아원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았고, 임새옥이 한참 달랜 후에야 입을 다물었다.
오 부인의 집에 도착했을 땐 벌써 정오였다. 마중 나온 시녀들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더니 내원에 벌써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라 임새옥은 여인들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다들 그녀의 성격을 아는지라 여인들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렇게 다 같이 모여서 화원에서 좋은 술, 진귀한 음식과 함께 노래꾼의 노래를 들으며 경성을 떠난 뒤의 이야기를 자세히 나눴다.
한참 동안 이야기 나누고 차를 마시는데 섬섬옥수로 금을 켜는 두 노래꾼이 목소리를 모아 “모진 동풍 때문인가, 은애하던 정이 부족했던가.” 하고 노래하는 걸 듣고는 임새옥은 마시던 차를 내뿜고 콜록거렸다.
“이런, 이런 나 좀 보게. 깜빡했네. 대저아 앞에서 이걸 부르면 안 되는데.”
오 부인이 웃으며 말하고는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려는 두 여인을 가리켰다.
“어서 다른 노래로 바꾸게.”
모두 웃음을 터트리는데, 누군가 어안이 벙벙해진 노래꾼에게 설명해주었다.
“바로 이분이 쓴 시라네. 지금은 그때 그 심경이 아니니까 앞에서 부르면 안 되지.”
노래꾼들이 모두 임새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부인, 참 좋은 시예요. 여인의 씁쓸함을 어쩌면 이리도 잘 나타내셨답니까.”
얼마나 눈빛들이 열렬한지. 후세에 아이돌을 만난 팬 같은 눈빛에 임새옥은 부끄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 시, 원래 남자가 쓴 건데.
“부인, 다른 좋은 시도 지으셨으면 알려주세요.”
“내가 그런 재주가 있으려고!”
임새옥은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때려죽인대도 다시는 표절할 순 없어!
오 부인이 무언가 떠오른 듯이 손뼉 치며 모두를 향해 웃어 보였다.
“시는 됐다 치고, 요즘 다루에 유명한 서유기라고 들어 봤는가? 그것도 동생이 한 이야기일세.”
그 말에 한순간 또 난리가 났다. 노래꾼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여인들도 결말을 몰라서 답답해하던 참이라 결말을 묻느라 소란스러워졌다.
“아이들 달래려고 한 이야기예요.”
임새옥은 웃기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손을 저었다.
“동생, 그럼 우리도 좀 달래봐.”
누군가가 하는 말에 다시 웃음이 터졌다. 임새옥은 계속 사양할 수만은 없어서 잠시 생각하다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했었던 여인국 편을 골라서 이야기해주었다. 다들 손수건을 물고 집중하면서 떠들썩했던 연회 자리가 조용해졌다.
“아름다운 풍채, 위풍당당한 용모. 하얗고 고른 치아, 붉은 입술. 고르고 드넓은 이마, 맑고 고운 눈매.(<서유기>에서 여인국 국왕의 시선으로 바라본 당 삼장의 외모 묘사 부분) 다루에서는 손후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이야기뿐, 이 당 삼장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오늘에야 우리는 그 당 삼장이 이런 사내임을 알게 되었구나. 이러니 여인국 국왕이 첫눈에 반했지. 내 정은 깊디깊건만, 그는 떠나려는 의지가 더 굳으니, 인연이 아니라고 한탄할 수밖에.”
이야기를 마친 임새옥은 주변이 조용한 걸 보고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한 부인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서야 제가 너무 낭만적으로 이야기했음을 깨달았다. 행여 풍속을 해친다는 죄명이 떨어질까 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졸라도 더는 이야기하지 않자, 다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회가 끝나고, 오 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고 문 앞까지 배웅했다.
“동생, 돌아올 때마다 꼭 내게 들러야 해.”
오 부인이 손을 잡고 당부하자, 다른 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저는 출신도 빈한한데 부인들께서 꺼리지 않으셔서…….”
임새옥은 이 여인들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문득 경성을 떠나던 그 날이 떠올라 눈시울을 붉혔다.
“그때 잘못하면 큰 비난 받을 수 있는 걸 무릅쓰고 저 때문에 나와주셔서 저는 정말로…….”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오 부인이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동생, 동생은 마음이 진심인 사람이야. 우리한테 부족한 거? 동생 같은 사람이야. 같이 있으면 속이 후련해. 이번에도 그래, 우리를 피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대범하게 와줄 줄은 몰랐어. 우리가 고마워해야지.”
“그 말은, 제가 희한해서 언니들이 좋아한다는 거로군요.”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다들 따라 웃는데, 말 한 마리가 질주해 왔다. 문지기가 서둘러 나가서 막으며 무례하다고 호통치는데, 말에 탄 사람이 구르고 기듯이 허둥지둥 내려왔다. 사환 하나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임새옥 앞으로 구르듯 달려왔다.
“부인, 부인, 대관인이 물에 빠지셨습니다…….”
원풍 원년 9월 중순, 올 한해는 무병, 무재해, 모든 일이 순조로워서, 황제는 연호를 바꾸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몸져누웠던 조 태후 또한 훨씬 좋아졌다.
화창하게 맑은 이 날, 조 태후를 문안 갔다가 허탕을 친 황제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
“마마께선 잠룡원(潛龍園)으로 가셨습니다.”
궁에 남은 궁녀가 하는 말에 황제의 울적함은 곧바로 걱정으로 바뀌었다. 날씨가 좋다고 해도 서늘했다. 잠룡원은 여기서 겨우 1, 2리만 가면 되지만, 출궁은 출궁이었다. 황제는 즉시 어가를 준비시켰다.
잠룡원은 황궁 서북쪽, 공진문(拱辰門)을 나가서 2, 3리 거리로, 황제가 도착했을 땐 관사 태감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관가, 오셨습니까.”
조 태후 측근 조 내시가 관사 태감과 함께 나와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맞이하는 바람에 황제가 깜짝 놀랐다.
“이런 간 큰 놈을 봤나. 어찌 마마를 종용하여 이곳에 올 수 있어!”
황제가 크게 분노한 얼굴로 호통쳤다.
말은 그렇지만, 주인이 간다는데, 노비인 그들이 뭘 어쩔 수 있겠나. 노비는 때리면 맞고 욕하면 들을 수밖에. 조 내시는 연신 허리를 조아리고 죽어도 싸다고 말하며 황제를 부축해서 들어갔다. 길다란 교각, 구불구불한 난간을 따라 석방(石舫: 배 모양으로 지은 장식적 건축물. 보통 호수 등의 물속에 위치하며 하부는 반쯤 물에 잠긴 석조 선체, 상부는 목조 선루 모양), 수각(水閣: 연못 안의 섬에 세운 정자)을 지나갔다. 날씨가 서늘해졌지만, 연못엔 여전히 먹이를 찾는 붉은 잉어들로 울긋불긋했다.
“오신 지 반나절이 되었는데, 줄곧 기분 좋으셨습니다. 몸소 원숭이 먹이도 주시고요. 하필 눈치 없는 노비가 그 일을 새로운 일이라고 여기고 이야기한 바람에, 새로 나온 서유기 이야기를 듣고 한창 기뻐하시던 마마께서 곧바로 울적해지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조 내시가 황제를 부축하고 가는 내내 이야기했고, 황제는 눈살을 찌푸린 채 들었다. 가는 길에 학장(鶴庄)이니 녹채(鹿砦), 공취(孔翠), 후산(猴山)을 지나쳐 오면서도 거들떠볼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한참 걸은 뒤, 어느 정자 앞에 도착하자 울긋불긋 차려입은 여인들이 서 있었다.
“관가, 오셨습니까!”
눈썰미가 좋은 향 황후가 목소리를 높이자, 다들 우르르 무릎을 꿇은 바람에 연탑에 앉아 눈물을 훔치는 조 태후가 한눈에 들어왔다.
곁에서 말리던 고 태후는 황제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손을 잡아당겼다.
“관가, 어서 마마를 설득해 보세요.”
다들 일어나라 분부한 황제는 조 태후 곁에 앉았고, 입을 열기 전에 조 태후가 자세를 바로 하고 물었다.
“조 대저의 관인이 정말로 죽었습니까?”
황제는 어쩌면 좋을지 몰랐다. 주변에서 온통 궁금한 듯, 혹은 안 됐다는 듯, 심지어 절박한 듯 바라보는 시선에 할 수 없이 한숨을 내쉬며 조 태후의 손을 잡았다.
“마마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생로병사란 인지상정이라고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 태후가 연달아 기침했다. 고 태후를 가리키며 무슨 말을 하려 하는데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다들 식겁했다. 고 태후가 조 태후를 부축하고 등을 쓸어내렸다.
“정말로 간악한 노비에게 당한 것이요?”
숨을 고른 조 태후는 연탑에 기대면서 다시 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개봉부에 물었더니, 그날 소금남이 성밖으로 나와 물건을 가지러 가려 했는데, 주인을 고발했던 그 간악한 노비가 어떻게 소식을 알았는지 몰래 쫓아가서 아무도 못 본 새에 배에 올라탔답니다. 칼로 찌르기에 피하려다가 소금남도 함께 물에 빠졌고요. 마마도 아시지만, 그곳이 변하 급류입니다. 개봉부에서도 사람을 보내 강을 따라 찾고, 방도 붙이고, 소가에서도 수십 명 고용해서 며칠 동안 강을 뒤졌는데도 노비의 시신만 건졌답니다. 소금남은 아무래도 십중팔구는 변을 당했을 겁니다…….”
“어째서 그때 그 노비를 그 자리에서 때려죽이지 않았답니까? 어째서 지금까지 살아 있게 했어요!”
성격이 다소 불같은 고 태후가 노기가 가득해서 말하자,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소가 사람들이 대명부에 요청해 조사해 봤는데, 당시에 옥에서 죽어서 내다 버렸었다고 했답니다. 버렸는데 어찌 다시 살아난 건지 누가 알겠습니까. 짐이 엄정히 수사하라고 개봉부에 명했습니다.”
황제의 말에 주변이 온통 고요해졌다. 조 태후는 말이 없다가 한참 만에 한숨을 내쉬었다.
“박복한 아이 같으니라고. 그 아이, 지금 죽겠다고 울고 있겠습니다, 그렇지요?”
황제는 헛기침하며 속으로 ‘제가 어찌 압니까. 제가 그 여인을 찾아가 보기라도 해야 합니까?’ 하고는 서둘러 다른 이야깃거리를 생각해서 들려주었다. 조 태후가 눈물은 그쳤지만, 기운이 여전히 없어 보이니, 재치 있는 향 황후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코끼리 우리를 보고는 코끼리를 꺼내 오라고 명령했다.
머지않아 코끼리 조련사 아이가 외국에서 진상한 큰 코끼리 네 마리를 이끌고 곡예를 선보였다. 코끼리 등 위의 화려한 연꽃 장식에 궁녀, 내시들도 매우 신기해하며 바라봤다.
“저렇게 큰 동물을 훈련하다니, 대단하구나.”
고 태후는 조 태후가 소리 내어 웃는 걸 보고 상을 내리라고 명했다. 내시가 돈을 들고 와 보랏빛 옷을 입은 조련사 아이에게 뿌리자, 조련사 아이가 코끼리와 함께 절을 올렸다.
코끼리 곡예를 보고 나니 오시가 되어, 다들 호춘당(壺春堂)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고 휴식했다. 비빈들은 시녀들과 함께 물러가고, 당 안엔 조 태후, 고 태후, 향 황후, 그리고 황제만 남았다. 궁녀, 태감들이 시중을 들기 위해 곁에서 대기했다.
“관가, 조 대저가 얘기한 서유기 들어보셨소이까?”
황제는 조 태후가 조 대저의 일을 신경 쓰는 걸 알기에 조금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습니다. 유문장이 어가 수행할 때 이야기해주어서 들었습니다.”
“그 조 대저의 전 지아비 말입니까?”
차를 마시던 향 황후가 궁금한 듯 묻고는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웃음 지었다.
“전처의 일을 거리끼지 않고 이야기하다니, 진솔하고 우직한 사람이군요. 조 대저가 병중에 있는 전 시모 병문안 갔었다는 말을 본궁도 들었습니다. 이미 부부가 아닌데도 서로 깍듯한 모양이군요.”
황제는 웃음이 날 것 같았지만, 웃을 상황이 아님을 생각하고는 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관가는 어느 부분이 제일 좋습니까?”
조 태후가 묻자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재미는 있으나, 항간의 조잡한 이야기라 짐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미친 원숭이가 오행산에 갇힌 그 부분만 좋았습니다.”
향 황후가 입을 가리고 웃자, 다른 사람들도 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원숭이가 부처님 손바닥에 소변을 보고, ‘이곳에서 놀다가 가다’라고 글까지 남긴 부분 말씀이시군요. 정말 재미있던걸요.”
조 태후 뒤에 서 있는 궁녀가 웃으며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웃던 조 태후는 금세 표정이 흐려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완결된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결말을 듣긴 그른 모양입니다. 그동안 애가가 들은 건 모두 재미있는 부분을 고른 간략하고 평이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 장공주가 궁에 들었을 때 조 대저가 얼마 전에 이야기한 여인국 부분을 이야기해주더군요. 그 부분은 그동안 들은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마마, 밖에서는 그 부분이 재미없다고 하는걸요. 요괴, 마귀, 괴물 이야기가 없고 성인들이 무술을 쓰는 부분이 없어서 흥이 깨진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대저아가 지은 이야기가 아니라고도 한대요.”
궁녀 하나가 앞다퉈 하는 말에 조 태후가 그녀를 흘깃 바라봤다.
“어린애가 뭘 안다고. 거칠고 무식한 사내들이 뭘 알겠냐. 다른 부분이 위작이라면 몰라도, 그 부분은 절대로 조 대저의 작품이다.”
조 태후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여인네가 아니면 그렇게 훌륭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지.”
거칠고 무식한 사내에 포함되는 황제는 조금 껄끄러운 표정이었다. 솔직히 황제도 그 부분은 들었을 때 재미없다고 생각했고, 당 삼장의 마음을 흩트려 대업을 실패하게 만들려는 여인국 국왕을 말희(妺喜), 달기(妲己)에 전혀 뒤지지 않는 요물이라고 여겼다.
(※말희, 달기: 유명한 악녀. 말희는 하나라 걸왕의 총희, 달기는 상(은)나라 주왕의 귀비. 둘 다 나라를 망하게 한 악녀로 알려졌으나, 실제 역사로 인정되지 않은 상고 시대의 이야기고 망국의 과정이 비슷하게 되풀이된 것으로 보아 망국의 책임을 여인에게 돌리려는 책임 전가의 일환이라는 관점이 대두된다.)
고 태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도 그 부분의 글귀를 좋아한다고 말하고는 뒤에 있는 궁녀들에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한 궁녀가 스스로 나와서 임새옥이 표절한 여인의 정을 노래했다. 물론 임새옥을 훌쩍 넘는 수준의 노래였고, 임새옥이 지금 여기서 들었다면 누군가 또 천월해서 원본을 들은 줄 알고 놀라 고함치지 않았을까.
곡이 끝나자 실내가 고요해졌다. 황제는 여인들의 이런 뜬금없는 감회와 서글픔을 이해할 수도 없고, 어이도 없고, 재미도 없었다. 조 태후가 슬픈 듯이 하는 말이 들렸다.
“‘나의 정은 이리도 깊은데, 그는 떠나려는 의지가 더 확고하니, 이번 생은 인연이 없음을 원망할 수밖에.’ 관가, 그때 내가 인연을 잘못 판단하여 멀쩡한 부부를 찢어 놓아서 조 대저가 이런 말을 한 거겠지. 요즘 한가히 지내다 보니 종종 옛일을 생각하곤 하는데, 생각할수록 내 잘못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린 부부고 또 둘 다 농사에 정통했으니 상부상조하고 의기투합하여 잘 지냈을 두 사람이거늘. 그저 한때 홧김에 입씨름한 것뿐인데, 하필 내가 화를 내며 찢어 놓았으니 아무리 정이 깊어도 헤어질 수밖에요. 이제는 각자 집을 이뤘으니, 헤어질 때도 힘들었지만 만나는 건 더 힘들어져서 마음에 담은 천만 마디 말을 어찌 털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이가 여인국 국왕의 입을 빌려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은 이 인간 세상의 슬픔을 읊은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황제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웃었다.
“마마, 그건 지나친 생각이신 듯합니다. 그저 이야기일 뿐인걸요.”
“이야기요? 연고 없는 이야기가 있답니까? 아무튼 사내들이란, 여인네들의 마음을 이해한 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황제는 여인네의 마음을 이해한 적이 없지만, 여인과 시시콜콜 실랑이해선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조 태후는 황제의 조모지만, 그 전에 여인이었다. 그러니 그 이치는 그녀에게도 통용될 터. 황제는 곧바로 옥신각신하지 않고 웃으며 대답했다.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유문장이 홧김에 처를 새로 들이는 걸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습니다. 처의 마음을 돌리라고 해야 했습니다. 모두 짐의 잘못입니다. 옛말에 청백리도 집안일은 잘 처리하기 어렵다고, 집안일에 끼어들면 안 되는 것인데 짐이 그 집안일에 끼어들었습니다. 그 바람에 그 좋은 인연을 찢어 놓아 이 세상에 멍청한 사내, 원망을 품은 여인 하나 더 늘었습니다. 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길게 이어진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조 태후도 참지 못하고 황제의 손을 토닥였다.
“관가, 관가의 마음, 고맙습니다.”
분위기도 좋아졌고, 그 자리에 있는 윗전 모두 기분 좋아하는 걸 본 어느 약삭빠른 궁녀가 분위기를 맞추며 말했다.
“마마, 그렇다면 마마께서도 조 대저 일로 마음 아파하실 것 없으시겠어요. 조 대저는 관인이 죽었고, 유문장도 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마마께서 교지 한 번 더 내려서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여인국 국왕이 다시 소원을 이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 말에 사람들은 또 한바탕 웃었고, 그 웃음소리가 대전에서 흘러나와 울타리를 넘어 살구 동산 위 민둥민둥한 살구나무를 건너 북쪽에 있는 변량 옛 성벽으로 두둥실 흘러갔다.
성벽 밖엔 촌락이 흩어져 있고, 논밭 사이를 변하 물살이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평소에 그다지 소란스럽지 않은 강변엔 지금 새해를 맞이한 듯이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강변의 어느 공터, 우뚝 선 장대에 사람 모양이 연처럼 바람에 휘날렸고, 그 아래에 사람들이 잔뜩 서서 손가락질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죄업이군. 사람이 죽으면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던데, 저 여인은 어쩌다가 이곳에 시신이 걸리게 되었소?”
위에 걸린 것이 여인의 시신인 걸 본 행인이 물었다. 강물에 불었다가 볕을 쬔 시신은 형체가 완전히 변해서, 너덜너덜해진 복장만이 성별을 알려주었다. 날이 선선했지만, 악취를 감출 수 없어 무수한 파리, 벌레가 날아들었다. 시체를 먹는 새들도 상공을 선회하며 괴상하게 울어댔다. 밝은 대낮에도 온몸이 으스스하게 소름이 돋았다.
“모르시오? 소가의 노비요. 주인을 살해해서, 소가 사람들이 명을 내려 시신을 걸어두었소. 관아에서도 상관하지 않는데 당신이 뭔 걱정이오. 저길 보시오, 소가 노부인이 매일 여기에서 지키고 있소. 편드는 소리는 절대로 하지 마시오. 노부인이 들었다간, 당신도 한패로 여기고 때려죽일 것이오.”
사정을 아는 사람이 행인을 잡아당기며 한쪽에 새로 세운 천막을 가리켰다. 안에 사람들이 십여 명 서 있고, 커다란 천막 안에 붉은 옷을 입은 백발노인이 앉아 있었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기세가 대단해 보였다.
행인은 저도 모르게 주눅이 들어 목을 움츠렸다.
“그랬구먼. 정말 고약하군.”
그렇게 말하고 다급하게 지나가는데, 갑자기 호령이 울렸다. 뒤를 돌아보니, 강기슭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이 밧줄과 그물을 강으로 던지고 있었다. 강엔 배도 있었다. 배 위에 서 있는 사람들도 강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중에 붉은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배가 뭍에 이르자, 임새옥은 옥매가 이야기하기 전에 알아서 일어서서 배에서 내렸다.
“다들 밤새 고생했으니 좋은 차를 대접하도록 하세요.”
따라나온 대관사에게 분부하자, 대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며칠 밤을 새웠는지 모를 이 여인의 새빨간 눈을 보고 쓰린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부인, 그런 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그러고는 그 여인이 시녀를 데리고 가는 걸 지켜봤다.
임새옥이 강가에 세운 다섯 칸짜리 천막으로 다가가자, 이미 마중 나온 시녀와 사환이 서둘러 차를 건네고 수건을 건넸다.
“어머님, 또 왜 오셨어요. 집에서 전가아나 돌보고 계시지.”
소 노부인이 안에 앉아 있는 걸 본 임새옥이 눈을 비비며 곁에 앉았다. 노부인의 흰 머리카락이 그새 더 많아진 것 같고 얼굴은 누렇게 떴지만, 기운은 있어 보였다.
“음, 역시 농사짓는 며느리를 들이길 잘한 것 같구나. 몸이 튼실하니 잘 견디지 않아.”
임새옥을 살핀 노부인은 시녀에게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임새옥이 받아서 한 모금 마시는데 노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넌 오후에 좀 쉬어라. 내가 배 타고 다녀오마.”
“어머님이 가시면 괜히 혼란스러워져요. 어머님이 건강하게 계셔야 우리 집안도 살아요.”
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이용이 전가아를 안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들어왔다. 이용은 두 여인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제 말대로 두 분은 하루 쉬고 오시라니까요. 여긴 제가 있습니다.”
전가아가 이용에게서 내려와 임새옥의 품으로 안기며 고개를 들고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언제 우리를 데리러 오세요? 우리 언제 돌아가요?”
임새옥이 전가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뺨을 토닥였다.
“며칠만 더 기다리렴. 아버지는 물건 전하고 돌아오실 거야. 착하지. 외숙과 잘 놀고 있어야지.”
옥매가 새빨개진 눈으로 당과를 꺼내서 전가아를 달래며 저쪽으로 데리고 갔다. 임새옥도 일어서서 이용을 향해 예를 갖췄다.
“지금도 수고 끼치는데, 직접 찾으러 나서게까지 할 수 없죠. 우리 소가 식구만 해도 많은걸요. 요 며칠 형님들도 오실 거예요. 우리가 돌아가면서 해도 돼요.”
이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을 더 바라보고 싶은데, 뚱하게 쳐다보는 노부인의 시선에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감췄다. 그는 차 한 잔 마시고 노부인에게 말했다.
“개봉부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옥졸을 찾아봤는데, 몇 달 전에 병으로 죽었답니다.”
소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곁에 있는 지팡이로 바닥을 쳤다.
“죽었대도 흙을 파서 시체라도 때려야지. 대관사! 그 악독한 년 어미, 아비를 잘 지키게. 형제들도. 하나라도 도망 못 가게 해. 돌아가서 단단히 죄를 묻겠네.”
“예.”
밖에 마차 소리가 어지럽게 들리고,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돌아다니는 기척에 임새옥은 싸늘한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로 저러는 건지 알아보라고 시녀를 보내려는데, 시녀 하나가 후다닥 뛰어 들어와서 강녕에서 고내내와 고야가 왔다고 외쳤다. 말이 끝나자마자 여인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노부인은 안색이 확 변해서 벌떡 일어섰고, 임새옥도 차가운 얼굴로 일어섰다. 상복을 입은 소가 세 자매가 울며 들어왔다.
“아이고, 박복한 내 아우.”
천막 안에 있던 시녀들이 달려가 “고내내, 대관인은 살아계셔요. 이렇게 우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말려도 세 사람은 듣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노부인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임새옥을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다.
한참 울어도 아무도 부축하러 오지 않자, 소 대저가 가장 먼저 울음을 그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째서 흰 장막을 걸지 않는 거야?”
그녀는 시녀들이 난감해하는 걸 보지도 못하고 임새옥을 바라봤다. 임새옥이 붉은 배자를 입고 머리엔 신선한 국화까지 꽂고 있는 걸 보고 또 울음을 터트렸다.
“박복한 내 아우, 상복을 입어주는 사람도 없구나!”
“형님, 그게 무슨 재수 없는 말씀이세요? 아우가 일찍 죽길 바라는 건가요? 아침부터 와서 재수 없는 소리를 하시다니요. 아직 안 죽었습니다. 울긴 왜 우세요?”
임새옥이 코웃음 치며 싸늘하게 말했다. 벌써 눈을 깜빡이며 천막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던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곧바로 울음을 그치고 실내에 사내가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복 겉옷을 벗어 던지며 곁에 있는 시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망할 계집애, 허튼 소문을 듣고 와서 전하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그러면서 소 노부인에게 다가가 눈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런 봉변이 어디 있대요. 어머니, 온 가족이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그 아이 자형들이 모두 성 밖에서 소식을 들었지 뭐예요. 소식을 듣고 온 집안이 놀라서 어수선해요.”
두 딸이 그 자리에서 노부인의 왼손, 오른손을 잡고서 문지르고, 쓰다듬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소 노부인은 눈을 내리깐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 있던 첫째 딸이 벌떡 일어나서 임새옥을 노려보고는 노부인에게 다가가 거칠게 말했다.
“어머니, 시신을 못 찾았대도 액땜하게 뭐든 해야죠. 어린 애가 뭘 몰라서 그런다고 어머니까지 가만히 계시면 어째요. 아까 집에 갔다가 봤는데, 종들이 마구 돌아다니고, 꼴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임새옥은 코웃음 치면서 상대도 하지 않았다. 이용은 그제야 다가가 사람들과 인사했다. 소가 자매들도 그제야 그를 알아보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뭐라고 말하기 전에 전가아 들어와서 우선 임새옥 앞에 가서 몸을 배배 꼬다가 또 이용에게 다가갔다. 이용이 전가아를 안아 올리고 달래는 걸 본 자매들은 이용과 임새옥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입술을 비죽였다.
“쉬고 계십시오. 나는 관아에 다녀오겠습니다.”
이용은 그녀들의 시선을 못 본 척하고 일어서서 웃으며 인사하고는 임새옥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사환들이 있으니, 밤낮없이 밤새우지 말고 쉴 땐 좀 쉬어요.”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전가아에게 말썽 피우지 말고 외조모와 잘 놀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이용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성격 급한 큰딸이 두 동생에게 눈짓하고는 소 노부인을 붙들었다.
“어머니, 아우 때문에 마음 아픈 거 알아요. 그 애가 죽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것도 알고요. 그래도 얼른 준비해야죠. 나중에 다급하게 움직여야 하면 어째요. 오기 전에 애 자형에게 좋은 관을 봐두라고 했어요. 그렇든 아니든 액땜하면 좋잖아요.”
소 노부인이 딸들의 말을 듣고 있는데, 점포의 장궤들이 찾아와서 임새옥을 불러 장부를 맞춰 달라 했다. 임새옥이 인장을 옥매에게 주어 찍으라고 했고, 일을 마친 장궤들은 급하게 돌아갔다. 뒤이어 먹을 것을 가지고 와 돈 받아 가려는 사람이 찾아오자, 임새옥은 목록을 확인한 후 내주었다. 천막 안에 사람들이 들락날락, 정신이 없었다.
소가 세 자매는 앉아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며 얼굴을 잔뜩 구겼다. 둘째 딸이 잠시 생각하다가 노부인의 어깨를 문지르며 속삭였다.
“어머니, 제가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어째서 다 저 애에게 맡기신 거예요? 혼인한 지 고작 1년이고, 아이도 없잖아요. 한창때라서 언젠간 떠날 아이예요. 전가아도 있는데 아우 대신 잘 지켜야죠, 어머니.”
저쪽에 앉아 있는 임새옥을 향해 턱짓하며 말하는데, 그 목소리가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아서 임새옥에게도 다 들렸다. 임새옥의 안색이 더 안 좋아졌다. 세 자매가 데리고 온 시녀들이고 사환이고 모두 상복을 입고 밖에서 어수선하게 돌아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이 다들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환 몇이 마차에서 관에 쓸 나무를 내리더니,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지 보라고 불러대자, 결국 화가 치밀어서 벌떡 일어섰다.
“어디서 소란이냐! 안 그래도 재수 없는 일이 생겼는데, 재수 없는 사람들까지 나타나서, 죽으라고 저주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 있는 사람 모두 아무것도 못 먹고 사나흘 잠도 못 자고 있는데, 나타나자마자 울어? 싹 다 상복 벗지 못해? 관 목재 가지고 온 것들을 모두 매로 쳐라!”
안주인이 그렇게 외치고는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가자, 시녀와 사환들도 일제히 대답하고 정말로 우르르 몰려나갔다. 몇 명은 상복 입은 시녀와 사환들에게 달려가고, 몇 명은 갑판 길이만 한 장대를 짊어지고 관 목재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향해 휘둘렀다.
“어머니, 저것 보세요. 저렇게 난리를 부리며 미친 짓 하는 걸 두고 보시는 거예요?”
큰딸이 화가 나서 부르르 떨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치맛자락을 들고 따라 나갔다. 성씨가 다른 남이 소가를 차지하려고 하네, 운운하며 욕을 하다가 임새옥이 빗자루를 휘두르자 기겁해서 천막 안으로 달아났다.
“형님 대접하려고 형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겁니다. 진짜 성씨 다른 남이 누군지 생각해 보셔야죠! 저는 아래로는 정주 6품 부인이 중매를 서고 위로는 태후마마의 전교를 받고 이 집에 들어온 사람인데, 뭐라고요? 관인의 생사도 모르는 지금, 시집간 딸들이 절 쫓아내려고요? 소가 가업을 손에 넣으려는 건가요? 한 번만 더 그런 소리가 제 귀에 들리면, 하늘님이 와도 때려서 쫓을 겁니다!”
임새옥이 따라 들어와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큰소리로 외치자, 소가 자매는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어머니가 계시는데도 저렇게 사람을 핍박하는데, 이젠 다시는 이 집에 못 오겠네요!”
소 노부인을 붙들고 울어대자, 노부인이 시녀들에게 눈짓해서 밖으로 내보냈다. 밖으로 나간 소가 자매 셋은 성에 있는 집으로 향했다.
실내는 다시 조용해졌다. 임새옥은 옥매가 건넨 차를 받아서 마시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차려놓은 탁자 앞에 앉아서 퍽퍽 먹기 시작했다. 소 노부인은 한숨을 쉬다가 임새옥이 거의 다 먹어가는 걸 보고서야 다행이라는 듯이 웃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구나. 언젠가 내가 없어져도 네가 가업을 이어갈 수 있겠어.”
임새옥은 젓가락질을 멈칫하더니 아무런 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었다. 노부인은 그녀 곁으로 다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의지할 데 없이 아이를 키우는 우리 같은 여인네들은, 여인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사내보다 더 흉악해야 해. 그래야 사람처럼 산다. 귀신도 그렇게 흉악한 사람은 봐준단다. 이 세상이 그렇다.”
임새옥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밥을 먹었다. 머지않아 관사가 들어와서 오후에도 계속 건지는지 물었다. 손을 씻은 임새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강 쪽은 당연히 계속해야지.”
그러고는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닷새나 흘렀으니 강 양쪽에도 사람을 늘려야지. 이렇게 하지. 오후에 나는 배에 타지 않고 강을 따라 찾아볼 테니 마차를 준비하게.”
관사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다른 말 없이 서둘러 준비하러 나갔다.
한편, 이용은 전가아를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진작 기다리던 이 노부인은 아이를 보배 덩어리라고 부르며 안고 들어갔고, 이용은 그제야 미소 짓는 얼굴로 차를 마시며 관사를 불렀다.
“여인들은 다 팔았지?”
“노야께서 분부하신 일 아닙니까. 물론 바로 처리했습니다. 어제 거간꾼을 불러서 그 여인들을 팔았고, 오후에 또 한 무리 데리고 갔습니다. 이제 다 끝냈습니다.”
이용은 눈까지 웃고 있었다. 창밖에 활짝 핀 국화에 나비가 춤을 추며 날아왔다. 반년 동안 이렇게 속이 후련한 날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다만 그 월낭은 부인이 놓아주지 않아서…….”
관사가 다시 하는 말에 이용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아직 있는 거냐? 휴서를 이미 주었지 않아? 어째서 떠나지 않아?”
그러다 관사가 조심스럽게 웃기만 하는 걸 보고는 손을 저었다.
“됐다. 둘이 사이가 좋았지. 안 팔겠다니 되었다. 돌아갈 때 데리고 가게 해주면 되지.”
관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참으로 너그러우시다며 한껏 추켜올렸다. 동씨에게 그렇게 많은 재산을 떼어주더니 이제 시녀도 내어주시냐고 한창 알랑거리는데 별안간 후원이 떠들썩해지더니 북이며 징 소리가 울렸다.
“불이다! 불이야!”
시녀 몇이 당황해서 달려 들어와 후원을 가리키며 외쳤다.
“노야! 부인이 계신 철수루에 불이 났습니다!”
“부인은?”
이용이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시녀가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울면서 대답했다.
“부인과 월낭 모두 아침부터 내려오지 않았어요.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어요. 지금도 안에…….”
개봉성은 도성을 건립한 이래 지금껏 토목으로 크게 흥했다. 왕공 귀족, 명사, 관리 중에 저택을 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저마다 전각을 세우고 저택을 보수하는 바람에 경성의 거리와 골목이 갈수록 비좁아질 지경이었다. 주택과 점포가 따닥따닥 붙어 있어서, 멀리서 경성을 바라보면 점포와 주루가 빽빽하게 늘어서고 높낮이 다른 건물이 들쭉날쭉 이어진 모양새였다.
거처가 붙어 있고 부엌이 이어져 있다 보니, 경성엔 화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희녕 연간에 일어난 삼사사(三司使) 화재 사건도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데 원풍 원년 9월 말, 창합문(閶闔門) 밖 이용의 저택에 일어난 화재로 온 성이 소란스러워졌다.
백여 묘 부지의 이가 저택은 그야말로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이가 후원 누각에 불이 났을 때 하필 바람이 풀어서 한순간 큰불이 사방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이가 저택 반을 태운 불은 이웃에까지 불똥이 튀었고, 게다가 시내와 맞붙어 있어서 주루 한 곳을 태우다가, 그 주루에서 다시 그 옆으로 불길이 번졌다. 한순간 거리 전체가 불꽃에 휩싸여 짙은 연기가 가득 찼다.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처참하게 울부짖었고, 성밖에 주둔하는 금병(禁兵)을 동원한 후에야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
개봉부의 철저한 조사 끝에 불탄 가옥 백 칸, 사상자 수십 명, 직접 경제 손실이 몇만 관(貫)이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깊은 궁궐에 있는 황제도 해가 지기 전에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안 그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던 황제는 등사랑 이용의 처첩이 방화하여 자결했다는 개봉부 보고를 들은 뒤엔 더더욱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폐하, 듣자 하니, 그 이용이 첩들을 팔고 처를 내쫓았는데 처가 떠나고 싶지 않아 자결하려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마침 황제에게 보리와 벼를 어떻게 다시 심을지 설명하러 궁에 들었던 유소호가 곁에서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그 말에 황제는 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래졌다.
“역시 행사가 옳지 않으면 큰 화를 부르는구나! 여봐라, 짐의 말을 전하라. 이용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처의 허튼짓을 방종했다. 도성에 화재 피해를 일으켜 수많은 가옥을 불태운 죄,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터! 관직을 삭탈하고 영남(嶺南)으로 좌천한다.”
소식이 이용 가문에 전해졌을 때, 큰불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울부짖었다. 특히 이 노부인은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마찬가지로 낭패스러운 꼴인 시녀의 품으로 쓰러졌다.
“세상에. 우리 이씨 가문이 내 손에 끝나는구나! 조상님 얼굴을 어찌 볼꼬.”
오로지 이용만이 덤덤하게 매무새를 가다듬고 성지를 받았다. 성지를 가지고 온 내시를 태연하게 배웅한 후, 모친의 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님, 슬퍼할 것 없습니다. 없어지면, 다시 찾아오면 되지요. 아들이 집안의 영광을 어찌 되돌리는지, 두고 보십시오.”
이 노부인은 이용의 손을 잡으며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아들아, 혹시 불이 나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리에 사람들이 혼란스럽게 뛰어다니는 기척이 들렸다. 문간에 앉아 있던 이용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바라봤다. 미친 듯이 말을 재촉하여 달려온 무리가 소가 가복인 걸 알아보고 눈살을 찌푸리는데, 말에 탄 자가 목소리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노부인께 알립니다! 소 대관인을 찾았습니다! 대관인의 생명에 지장이 없습니다!”
대문 밖을 스치며 지나간 목소리가 골목 안을 맴돌았다.
잠시 얼어붙어 있던 이용은 허물어진 대문을 넘어서 나갔다. 마차 두 대가 빠른 속도로 대문 앞을 지나는 걸 보고 부르려고 팔을 뻗는데, 목이 잠겨서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눈만 뻔히 뜨고 바라보는 사이, 그 마차는 빠르게 질주해서 곧 시내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소가의 경성 저택은 강변의 큰 거리 동쪽 욕당(浴堂) 골목에 있었다. 이곳은 주루나 상점들이 있는 떠들썩한 곳이어서 처음에 집을 고를 땐 이곳으로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 노부인이 떠들썩한 걸 좋아해서 결국 이 시끌벅적한 시장 거리에 있는 곳에 가택을 마련했었다.
안 그래도 떠들썩하던 거리는 지금은 더더욱 사람과 말로 붐비고 있었다. 무명옷을 입은 사환 몇이 마차 위에 서서 외쳤다.
“관으로 쓸 목재 세 벌을 다 골랐는데, 세 분, 대체 어느 것으로 하실 겁니까?”
좁은 대문 앞, 높은 계단 위에서 소씨 가문의 사위 셋이 한데 모여서 논쟁하고 있었다. 하나는 ‘자네가 산 하얀 천은 못 쓰네.’, 또 하나는 ‘천막을 이렇게 세우면 안 되네.’ 시끄럽게 싸우다가, 사환이 묻는 말에 순간 모두 화를 내며 돌아보고 욕을 했다.
“망할 노비 놈! 다 네가 쓸 것이다! 네 가족이 쓸 것이라고!”
한창 욕하고 있는데 다른 사환이 달려 나오며 고함쳤다.
“대관인! 부인이 차 맛이 안 좋다고 다른 걸 사 오랍니다.”
소 대저의 남편이 얼굴을 구기며 욕을 하려는데 한 무리 인마가 마차 한 대를 에워싸고 우르르 달려왔다.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밀려서 비켜나는데, 말에 탄 사환이 말에서 내리면서 고함쳤다.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습니다! 소 대관인을 하늘이 도왔습니다!”
“저것, 미친 거 아니냐?”
흥분한 사람들의 모습에 놀란 첫째 사위가 혼잣말하다가 임새옥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는 걸 보고 혀를 끌끌 찼다.
괜찮은 척하더니, 몇 날 며칠 못 자고 드디어 버티지 못해 무너진 거지. 희망이 없는 것 같으니 더는 못 버티는 게지?
그렇게 꿍얼거리는데 그 여인이 돌아서서 마차 휘장을 걷었다. 가복 네댓 명이 우르르 달려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두 눈을 꼭 감은 소금남을 들것에 실어 들고나오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의원은 도착했지?”
임새옥이 들것을 따라 안으로 달려가면서 바짝 쉰 목소리로 물었다. 뒤를 바짝 따르던 옥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대관사가 가셨어요. 저기 보세요, 오셨네요.”
한시름을 놓은 임새옥은 사위 셋이 넋을 잃고 서 있는 걸 보더니 “아주버님들, 수고스럽지만 이 물건들 치우셔야겠습니다.” 하고는 문 앞에 어지럽게 쌓인 삼끈이니 돗자리니 등을 가리키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게 살 필요 없다니까, 말 안 듣더니!”
정신을 차린 둘째 사위가 새로 사 온 물건을 바라보며 아까워서 화를 냈다. 저게 다 얼마야!
소금남을 못 찾고 있으니, 소 노부인 눈에 가장 먼저 들 생각에 제 주머니를 털어서 산 것들이었다.
첫째 사위는 아직 소금남이 죽었다가 살아난 충격에 빠져있다가 불현듯 손뼉을 쳤다.
“과연 액땜이 되었군! 사길 잘한 걸세!”
“아무리 액땜이라도, 굳이 이런 비싼 것을!”
셋째 사위가 아까워 죽겠다는 얼굴로 상 치르는 데 쓸 재료들을 바라보며 꿍얼거리자, 첫째가 혀를 찼다.
“어머님이 알아서 돈을 내실 건데, 뭐가 겁나는가!”
“돈을 내요? 흥. 지금 살림을 누가 맡았는지 생각하시지요. 반 푼도 못 받을걸요! 미리 말해두는데, 말 꺼낸 사람이 돈 내는 겁니다. 난 상관없어요.”
둘째 사위가 말을 던지고 돌아서 가려고 하자, 첫째 사위가 덥석 손을 잡았다. 한마디 하려다가 소 노부인의 마차가 다가오는 걸 보고 입을 다물고 가장 먼저 달려가 알랑거렸다.
소 노부인이 몸을 떨며 내원으로 들어가자, 소가 세 자매 모두 눈물을 닦으며 맞이했다.
“어머니, 우리는 정말 남이 되었어요. 걱정하고 찾아왔는데 이젠 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해요.”
딸 셋이 거처 앞에 서 있는 시녀, 어멈들을 가리키며 억울해하며 말해도 노부인은 상대도 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가 휘장을 젖히자 세 자매도 그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방 안에 대관사, 옥매 그리고 시중드는 시녀 하나가 있고 임새옥은 침상 곁에 서 있었다. 모셔온 의원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고 소금남을 진맥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목놓아 울 준비했던 소가 세 자매는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의원이 소금남의 옷을 풀고 한바탕 살펴보더니 돌아섰다.
“어떤가?”
소 노부인이 지팡이를 꾹 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저 피를 많이 흘리고 한기가 들었을 뿐입니다. 구해낸 사람이 좋은 창상약을 써서 다친 곳은 없으니 잘 쉬면 괜찮아집니다.”
의원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소 노부인은 눈물을 뚝뚝 흘렸고, 세 자매도 울기 시작했다. 이제야 겨우 한시름 놓은 임새옥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겨우 버티며 의원을 향해 절을 하며 고맙다고 입을 열자마자 눈앞이 시커메졌다. 귓가에 울리던 놀란 고함도 곧 들리지 않았다.
꼬박 하루 밤낮이 흐른 후, 임새옥은 의식이 차츰 돌아왔다. 짧은 순간에 겪은 큰 슬픔과 큰 기쁨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두 귀가 윙윙 울리고 귓가에 계속해서 대관인이 물에 빠졌다는 사환의 말이 맴돌았다.
‘대관인이 물에 빠지셨습니다……. 계속해서 건졌지만 찾지 못했는데……. 노부인은 아직 모르시고……. 대관인이 칼에 찔려서…….’
가슴에 물이 꽉 찬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지더니, 이번엔 혼탁한 강가에 서 있었다. 그곳에 서서 물에 불은 시신을 강에서 건져 올리는 걸 바라봤다. 노부인에게 말할 순 없어서 겁에 질려 한 걸음씩 곁으로 다가갔다. 강물에 불은 시신은 그녀가 어릴 때 집안 양식장에서 봤던 죽은 물고기 같았다. 그녀는 피가 날 때까지 양손을 쥐어뜯으며 시신 앞으로 다가갔다.
“금가! 금가!”
임새옥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평생 쓸 기운을 모두 쓴 듯이 목 놓아 울었다. 며칠 동안 쌓인 눈물을 다 쏟아냈다.
“나 여기 있어요. 화아, 울지 말아.”
나지막한 음성이 임새옥의 귓가에 울리는 동시에 따듯한 손이 그녀의 얼굴을 감쌌다. 그 덕분에 임새옥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붉은 연꽃무늬 휘장이 보이고, 너무나 익숙한 팔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걸 느끼고는 눈을 번쩍 떴다. 진한 약 냄새가 온몸을 맴돌았다. 그녀는 눈앞에 보이는 창백하고 낯익은 그 미소 띤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잠이 들면 꿈을 꿀까 봐. 그런데 결국 잠들었나 보다. 그래서 꿈을 꾸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을 힘껏 꼬집었다. 그러면 꿈에서 깰 테니까.
“꿈이 아냐, 화아. 내가 이렇게 멀쩡히 당신 앞에 있지 않아.”
소금남이 여인의 손을 팔에서 떼어내 꼭 잡았다. 여인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 또 천월했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휘장 밖에서 들렸다.
“노야, 부인 깨신 건가요?”
옥매의 기뻐하는 목소리와 함께 휘장이 올라갔다. 석양이 남긴 노을이 곧바로 쏟아져 들어오자, 임새옥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깼다. 탕약을 가져오너라.”
소금남의 목소리는 아직 조금 무기력했다. 그러나 임새옥의 귀에는 고막을 찢을 듯이 크게 들리기만 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 아랑곳하지도 않고 사내를 힘껏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돼! 울화가 치밀어서 태기를 건드릴라.”
소 노부인이 큰 소리로 말하고는 어서 안신탕을 가지고 오라고 시녀들을 채근했다. 그 말에 소금남도 긴장해서 여인을 진정시켜 보려고 등을 토닥였다.
“태기요?”
임새옥은 부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휘장 밖에 만개한 국화처럼 활짝 웃고 있는 노부인을 향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노부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금세 얼굴을 굳히며 두 사람을 노려봤다.
“둘 다 멍청이라고 했지! 인정하지 않더니, 두 달이나 되었는데 아무도 몰라?”
그러고는 또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놀라서 죽을 뻔했구나. 밤을 새우기까지 했잖느냐. 보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님. 보아하니 내 손자가 튼실한 모양이다. 아비를 지키고 자신도 지키지 않았느냐.”
임새옥이 소금남을 바라봤다. 그 역시 싱글벙글했다. 갑작스러운 기쁨에 더 얼떨떨해지고 넋이 나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역시 저것이 바보인 게지.”
노부인의 반응을 예상했던 시녀들은 모두 까르르 웃었다.
“아이고, 부인이 너무 좋아서 넋이 나간 거죠. 노부인, 의원 말씀을 들었을 때 노부인도 마찬가지셨잖아요. 감히 말하자면, 노부인도 그때 바보 같았어요.”
“흥.”
노부인은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곁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임새옥을 부축해서 일으켰다. 옥매가 약을 먹이려고 약그릇을 들고 왔다.
임새옥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어서 평평한 배를 양손으로 이리저리 쓰다듬었다. 이 안에 정말 생명이 있어? 내가 작은 생명을 잉태했다고? 내 피가 흐르는?
“부인.”
임새옥이 멍청하게 웃는 걸 본 옥매는 화도 나고 웃음도 났다. 숟가락을 입가에 대는데 여인이 정신을 차리더니 화들짝 피했다.
“병 난 것도 아닌데 무슨 약을 먹어! 그냥 며칠 정신이 곤두서서 그런 거야. 며칠 지쳤다가 금가가 무사히 돌아온 걸 알고 탈진한 것뿐이야. 아이도 생겼는데 함부로 약을 먹으면 안 되지.”
임새옥이 재빠르게 뒤로 숨는데, 어찌나 기민한지 방 안에 있는 모두 놀라서 고함을 쳤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내가 널 해롭게 하겠느냐!”
소 노부인이 혀를 찼다. 너무 크게 고함치는 바람에 기침이 나와서 연달아 콜록거리자 시녀들이 기겁하고 달려가 등을 두드렸다. 대시녀는 약을 가지고 와야 한다고 안달 냈고, 소금남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어머님, 어머님도 약 안 드셨지요?”
소금남이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노부인이 뜨끔한 듯 돌아봤다.
“내가 무슨 약을 먹어! 종이로 만든 인간 같은 너희들처럼 바람만 불어도 쓰러지는 줄 아느냐!”
소 노부인이 말을 마치고 바로 밖으로 나가자 시녀들이 어쩌면 좋으냐는 듯 소금남을 바라봤다.
“어머님, 물에 빠지는 그 순간, 어머니가 얼마나 눈에 밟혔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아들이 철이 없어서 반평생 어머님 속을 썩였습니다. 이 아들 이번에 죽다 살지 않았습니까. 어머님, 제발 건강하세요. 여생은 제대로 효도하고 살겠습니다.”
잠시 앉아 있던 소금남은 더 버티지 못하고 다시 누웠고, 말을 많이 해서인지 숨이 조금 가빠졌다. 노부인의 억척스럽던 몸이 순간 굳었다. 임새옥이 코를 훌쩍이며 하는 말이 들렸다.
“어머님, 어머님이 제 뒤에 계시지 않았으면, 이 며느리, 벌써 물에 뛰어들었을 거예요. 지금까지 어떻게 버텼겠어요. 어머님, 우리 둘 바보 맞아요. 어머님 없이 못 살아요. 그러니까 건강하셔야 해요. 저도 약 먹을게요. 어머님도 잊지 말고 드세요.”
소 노부인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아서 파르르 떨다가 돌아보지도 않고 혀를 찼다.
“멀쩡한 것들이 또 날 저주하는구나!”
그러고는 허둥지둥 가버리자, 옥매가 임새옥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따라 나갔다.
방문이 서서히 닫히고, 임새옥은 기운이 쭉 빠진 듯이 침상에 누웠다. 그러고는 소금남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청하게 웃었다가 울다가 했다. 소금남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는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평생 못 본 것처럼 서로 가만히 응시했다.
임새옥은 또 눈물을 흘리면서 소금남의 팔에 고개를 묻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이라는 게 이런 거였군요. 언젠가 그날이 오면, 당신이 반드시 나보다 먼저 가요. 당신이 이런 고통을 또 한 번 겪는 건, 나 못 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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