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1/57)

9월 초열흘은 날씨가 매우 좋았다. 시끌벅적한 노아촌 소가 저택 앞에 마차와 나귀가 가득 서 있고, 종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주변엔 이 집 사람들이 들어온 첫날처럼 마을 사람들이 가득 둘러서 있었다.

“옷 상자만 열 개가 넘어.”

구경하던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부러운 듯 말했다. 사실 이 말도 두 번째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처음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저 머리 장식들 좀 봐. 성에 사는 귀한 부인들보다 더 좋은 거야.” 

이쪽에 사람이 많은 걸 보고 방물장수들도 몰려와서 한순간 시장통처럼 떠들썩해졌다. 

“아버지, 제가 한 말,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해야 해요. 내년엔 과수원에 열매가 익을 거예요.” 

임새옥은 시녀가 물건을 옮기는 걸 지켜보면서 조삼랑에게 거듭 당부했다. 노씨는 궁금한 듯 이것저것 뒤적이면서 끝도 없이 툴툴거렸다. 몇 개 들고 가고 싶어도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시녀의 시선에 뜨끔해서 콧방귀를 뀌며 물건을 내려놓았다. 노씨는 임새옥이 거듭 하는 말을 듣고는 퉁명스럽게 외쳤다. 

“열매가 익든 말든,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냐? 겨울에 산에 올라가서 그 고생을 하라고?” 

하지만 조삼랑은 빙긋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빠 보이는 시녀들을 보고 도와주려다가 노씨의 눈총에 차마 움직이지는 못했다.

“저는 아무래도 봄이나 되어서야 돌아올 수 있어서…….”

임새옥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또 조삼랑을 붙들고 말했다. 노씨가 눈을 부릅뜨며 머리를 힘껏 쥐어박았다. 

“돌아오긴 뭘 돌아와! 얼른 아이 낳을 생각이나 해! 이 멍청한 계집애가 정말. 집에 그 큰 장사를 내버려 두고 빌어먹을 산이 뭐가 중요하다고!” 

임새옥이 입술을 내밀고는 다른 쪽으로 가다가 금단과 전가아가 서로 손을 붙들고 조잘대는 걸 보고 다가갔다. 

“금단, 우리가 없다고 글공부 안 하면 안 된다. 나중에 와서 볼 거야.” 

금단은 금세 서리맞은 채소처럼 시무룩해졌지만, 전가아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어머니는 우리보다 글공부 못 해서 봐도 몰라.” 

그 말에 임새옥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그렇게 한창 어수선한 가운데 소 노부인이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노씨도 있는 걸 보고는 콧방귀 뀌며 고개를 휙 돌리고는 전가아를 끌고 마차에 올라탔다. 노씨도 물론 좋은 얼굴이 아니어서, 혀를 차며 금단을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얼굴만 보면 싸워댔다. 금단과 전가아가 놀다가 싸우는 걸 보고 싸우거나, 금단의 옷차림 가지고 싸우거나, 하물며 노씨가 같이 밥을 먹다가 병자 하나 더 먹은 것으로도 싸웠다. 어찌 됐든 입만 열면 싸우고, 사이 좋은 때가 없었다. 

“네 시어머니는 딸이 셋이다. 잘 지켜봐야 한다. 너 몰래 딸에게 재산 퍼주면 어쩌니. 그건 네 재산이다!” 

노씨가 임새옥을 끌고 가서 당부했다. 

“어머니, 어머니 재산은 나 줄 거예요?” 

임새옥이 퉁명스럽게 묻자 그대로 머리를 쥐어박혔다. 그것으로 송별 의식이 끝나고 소씨 일가는 사람들이 배웅하는 가운데 위풍당당하게 경성으로 떠났다. 

임새옥은 가는 내내 도토리 옮기는 다람쥐처럼 마차를 들락거렸다. 소 노부인이 그녀와 이야기하면 재미없다고 타박하며 같은 마차를 타고 가지 않겠다고 했다가, 또 이야기 듣고 싶다고 불렀다가, 임새옥이 하는 말에 말문이 막혀서 화가 나서 쫓아냈다가, 또 불러가고. 그렇게 시끌벅적하게 꽤 충실한 시간이 흘렀다. 

하늘도 유난히 너그러워서 줄곧 날씨가 좋았고, 닷새 만에 경성에 도착해서 진작 정리해둔 큰 저택으로 들어갔다. 

임새옥은 여행길에 지쳤는지 집에 도착해서 꼬박 하루 잠만 잤다. 그러고도 잠이 부족한 듯 멍하게 있다가 소 노부인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다. 노부인은 전가아와 시녀들을 데리고 거리 구경, 연극 구경, 내기 도박을 즐겼다. 

아침을 먹은 다음, 임새옥은 서재의 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소금남이 장부 정리하는 걸 내내 바라봤다. 창을 통해 들어온 가을볕이 그를 비추자, 대리석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음영이 졌다. 

“오전 내내 봤으면서 아직도 질리지 않아?” 

소금남이 문득 고개를 들고 싱긋 웃어 보였다. 임새옥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리 아름다우니 질리지가 않네요.” 

임새옥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여인의 이런 직접적인 표현에 이미 익숙해진 소금남은 달콤함에 취해서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손을 잡았다. 

“답답해? 어머님은 잔소리만 하시니 같이 가지 말고, 우리 따로 교상박(喬相撲: 공연자가 두 사람으로 꾸민 나무틀을 메고 씨름하는 모양새의 동작을 표현하는 놀이) 구경 갈까요?”

그런 것에 관심 없는 임새옥은 고개를 젓다가 문득 소금남의 옆 머리에 흰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잉, 소리를 냈다. 

“벌써 흰머리가 생겼네.” 

“벌써는 무슨. 곧 서른이 될 사람인데.” 

소금남이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살며시 입맞춤하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낭자, 늙었다고 날 버리면 안 돼요.” 

임새옥이 빙긋 웃다가 소금남이 흰머리를 뽑으려고 하자,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뽑으면 더 많이 자라요. 괜찮아요. 나중에 내가 검은깨 심을 테니 먹으면 돼요. 우리 과수원에 호두가 자라면 1년만 먹으면 돼요.” 

그 말을 하고는 하암 하고 하품했다. 그녀의 살짝 발갛고 나른해 보이는 얼굴이 전보다 훨씬 간드러지게 보여서, 소금남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밖에서 들리자, 임새옥이 화들짝 그를 밀어내며 일어섰다. 

“부인, 아원이라는 분이 찾아왔어요.” 

옥매가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말을 전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임새옥이 기쁜 얼굴로 달려 나오길래 바라봤더니 어느새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정방에 가보니, 아원이 붉은 꽃무늬 옷을 입고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곁엔 시녀가 포동포동한 아가를 안고 있었다. 임새옥은 빠르게 다가가 아원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살폈다. 예전보다 조금 살은 쪘지만 눈매는 변함이 없고 피부는 더 발그레하고 보드라워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1년 만에 보는 건데 그새 더 예뻐졌구나.” 

그 말에 아원이 피식 웃고는 임새옥이 입은 백능 웃옷, 청남색 치마를 쓰다듬었다. 

“그러게요. 부인처럼 단장할수록 촌스러우면 안 되죠. 옷감은 좋네요. 다만 모양이 너무 옛날 거예요. 소가 부인의 기세가 없잖아요.”

임새옥이 빙긋 웃다가 또 아원에게 혼났다. 

“입 좀 다물어요. 이 보여요!” 

그래도 임새옥은 웃으면서 아원을 대뜸 끌어안았다.

“아원, 법도 이야기 좀 그만해. 지금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그런 거 신경 안 써.” 

아원은 피식 웃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시큰해서 서둘러 아이를 안아오며 말을 이었다. 

“자요, 제 아들 좀 보세요.” 

임새옥이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아왔다. 대홍색 융모삼(絨毛衫)을 입은 몇 달 안 된 아가는 얼굴이 뽀얗고 입술이 빨간 것이 귀티가 흘렀다. 임새옥은 아이 한 번, 아원 한 번 번갈아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들은 어미를 닮는다더니, 정말 너랑 똑같이 생겼구나.” 

손님이 아이와 함께 온 걸 본 옥매가 선물을 준비하러 갔다가 들고 들어왔다. 임새옥이 힐끔 보니 은팔보(銀八寶) 비단 턱받침에 오색실, 장수실도 있었다. 아원은 사양하지 않고 시녀에게 받으라고 하고는 옥매를 살펴보았다. 

“좋은 아이네요. 부인, 운이 참 좋으셔요. 부인 성격이 어떻든,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옥매가 얼굴을 붉히고 웃었고, 임새옥도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너처럼 재주 좋은 아이란다. 다행히 너보다 성격이 좋아.” 

임새옥이 아기를 예뻐라 하면서 품에 끼고 어르자, 아원이 물었다. 

“벌써 2년이 다 돼가는데, 부인은 왜 아직 소식이 없어요.” 

“그러게, 이상하네. 전에 그 집에서도…….”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없어서 다행이죠!” 

아원은 “옷 더러워져요.” 하면서 시녀에게 아이를 안으라고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사람 불러서 한 번 보이세요.” 

“응. 시어머니가 좋은 분이라 그걸로 뭐라고 안 하셔.” 

“쯧. 아이고 답답해라, 진짜. 손자가 떡하니 있잖아요. 낳지 않길 바라실걸요.” 

그러다가 임새옥의 얼굴이 흐려지는 걸 보고 서둘러 화제를 돌려서 잘 지내는지, 밭은 잘 되어가는지 물었다. 

“아원,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어.” 

임새옥은 잠시 침묵하다가 자세를 가다듬고 물었다. 

“얼마 전에 금가가 알아봐 줬는데, 유 노부인 몸이 안 좋았다며. 그때 일부러 못 만나게 한 거였니?”

“맞아요. 일부러 그랬어요. 왜요? 심문하는 거예요? 그랬으면 뭘 어쩌려고요.”

아원이 숨기는 것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임새옥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었다. 그래도 화를 낼 수가 없어서 그저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했어. 얼굴 보면 내가 못 떠날까 봐?” 

“맞아요. 멍청하게 남았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가 내가 먼저 속 터져서 죽으면 어째요? 그래서 아예 못 만나게 했죠.” 

또 고개를 끄덕이던 아원은 임새옥이 뭐라고 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짠 무 먹으면서 싱거울까 걱정한다더니, 괜히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세요. 멀쩡한 며느리, 아들 다 있는데 인연 끊고 버려진 전처가 뭘 참견하려 해요.” 

“그 며느리 이제 없잖아.”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역시나, 아원이 벌떡 일어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요? 왜요? 다시 가서 옛 인연을 이으려고요?” 

임새옥은 웃음을 참으며 다시 아이를 데리고 와서 품에 안고 토닥였다. 

“어미가 된 사람이 아직 성격이 불같아서는. 아이가 놀라면 어쩌려고.” 

아원이 그제야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도 다 내려놓았는데, 왜들 못 내려놓는 거야.”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 숙이고 아이를 어르는 그 여인의 얼굴엔 기쁨만 가득하고 근심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됐든, 알던 사람이잖아. 아프다는데 한 번 가봐야지. 가족이 아니라고 원수가 될 것 있겠어?” 

아원이 콧방귀를 뀌며 일어섰다. 

“내가 괜히 나섰네요! 날 고르느니 바로 하랬다고, 말 나온 김에 오늘 가요. 저도 한동안 안 갔네요. 그 여인이 죽었으니까, 이제 잘 살겠죠. 같이 가서 들여다보자고요.” 

임새옥이 멈칫하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의문이라는 듯 “지금?” 하고 물었고, 아원은 눈썹을 치켜뜨며 묘하게 웃었다. 

“왜요? 옛사람은 그리운데, 새사람이 싫어할까 봐 무서워요?”

임새옥이 웃으며 일어섰다. 

“밥때인데 밥 얻어먹으러 온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나, 해서 물은 거야.”

아원이 그제야 좀 웃더니 임새옥 옷이 젖은 걸 보고 손뼉을 쳤다. 

“어머나, 아이 오줌 묻었네. 복 받으시겠어요.” 

그러더니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임새옥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더럽다고 타박하지 말아요. 금방 아이 생길 거예요!”

“너희 소관인의 귀한 소변 감사드려요.”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유가 저택이 있는 곳은 골목이 좁아서 소가 마차는 골목 입구에 세웠고, 말에서 내린 소금남이 임새옥부터 부축한 다음에 보니 아원은 벌써 알아서 내려와 있었다. 

“난 저 앞에서 기다릴게요.” 

소금남이 선물 상자를 마차에서 내리자 옥매가 서둘러 받았다.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익숙하고도 낯선 그곳을 바라봤다. 심장이 심하게 뛰어서 무심결에 손에 힘이 들어가는데, 소금남이 갑자기 옷자락을 잡길래 고개를 돌렸다. 미소 짓는 그의 눈빛에 마음이 놓여서 살며시 웃어 주었다. 

“대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으니 낭자가 달아날 일은 없어요.” 

아원이 웃고는 임새옥과 함께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아원의 시녀는 아이를 안고, 옥매는 크고 작은 짐을 들고, 네 사람과 아이 하나가 고요한 검은 대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문 앞은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임새옥은 문 앞에 멈춰 서서 아원이 문 쪽으로 다가가는 걸 바라봤다. 문득, 채소 사고 돌아와서 이따 맛있게 요리해서 가족에게 먹일 생각에 신이 났던 때가 생각났다.

“할 말은 아니지만, 요즘 이 집도 잘 살아요. 황제께서 내리신 하사품도 가득하고, 새 저택도 있고요. 정리도 다 했는데 옮기지 않았을 뿐이에요. 얼마 전에 왔을 때, 노부인이 잠꼬대하시더라고요. 부인이 못 찾아올까 봐 옮기지 않는 모양이에요.” 

아원은 문고리를 잡고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평소 시원스러운 말투와 달리 느릿느릿 말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우리가 모진 게 아니에요. 쏟아진 물을 다시 담는 거 봤어요?”

임새옥은 씁쓸한 마음으로 아원이 문을 탁탁 두드리는 걸 바라봤다. 어쩐지 허탈해졌다. 정말이지 인생무상이었다. 이 집으로 막 옮겨왔을 때, 손님으로 찾아올 날이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던가.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문 앞에서 멈췄다. 

“장씨, 나예요.” 

아원이 소리 높여 말하고는 임새옥을 돌아봤다. 

“요즘은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서 장씨가 문단속을 엄하게 해요. 아무나 들이지 않아요.” 

임새옥이 미소를 쥐어짜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훌쩍 나이 들어 보이는 장사가 웃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대저아구나. 안 그래도 노부인께서 아침부터 까치가 운다고 하시며 손님이 올 거라고…….”

그러더니 아원 뒤에 서 있는 임새옥을 보고는 순간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다. 

“장씨.”

임새옥이 웃으면서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장사가 휙 돌아서더니 비틀비틀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노부인! 노부인! 대저아가 돌아왔습니다. 대저아가 돌아왔어요!”

“아이고, 장씨도…….”

아원이 헛기침하며 웃고는 임새옥의 팔짱을 꼈다. 

“우리끼리 들어가요.”

망설이는 임새옥을 아원이 그대로 끌고 들어갔다. 마당을 둘러보고 싶지만 고개를 들고 싶지는 않아서 고개를 숙인 채 발치만 보며 걸었다. 전혀 변한 것 없는 청석길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고 양쪽 땅에는 풀이 조금 누렇게 떠 있었다. 

‘낭자는 심는 걸 좋아하잖아. 그러니 길은 조금만 내고, 나머지는 다 화초를 심으면 어때?

돈이 생기면, 화원을 싹 밀고 채소도 심고…….’

소년의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장사의 울먹이는 소리에 임새옥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뒤이어 귀에 익은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러는가? 다시 말해봐, 누가 왔다고? 왜 이리 우는 게야. 취란, 네가 나가 보아라.” 

그 소리와 함께 새로 바뀐 휘장이 젖히더니 앞머리를 가지런하게 내린 시녀가 나왔다. 

“오셨군요!” 

시녀가 생글생글 웃다가 임새옥을 바라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임새옥 역시 멍한 얼굴로 시녀를 바라봤다. 몇 수밖에 모르는 고대의 시가 갑자기 툭 튀어나왔다. 

“꽃은 해마다 비슷하게 피지만, 사람은 해마다 달라지는구나.” 

(※당나라 시인 유희이가 지은 시. 세월의 무상함을 읊었다.)

작게 속삭이는데, 아원이 듣더니 피식 웃었다. 

“문자 읊지 말아요. 뭐가 그렇게 서글프고 애틋하다고.” 

“아원이냐? 아이도 데리고 왔어? 얼른 들어오너라.” 

아원의 웃음소리를 들은 유씨가 안에서 웃으며 말했다. 아원은 임새옥을 끌어당기며 싱글벙글 들어갔다. 

“아이만 데리고 온 게 아니라, 보세요, 누굴 데리고 왔는지.” 

임새옥이 무심결에 멈춰섰지만 아원이 힘껏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순간 약 냄새와 함께 유씨가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렸다. 

“이제 여섯 달 되었…….”

“대낭.” 

임새옥은 애써 웃으며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유씨를 바라봤다. 새카맣던 머리카락은 희끗희끗하고 몸이 반은 굳어서 한쪽 손을 기운 없이 구부정하게 늘어뜨린 유씨는 다른 손으로 탁자 모서리를 짚고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거의 일어섰던 유씨는 방 안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는 바로 주저앉았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이 익숙하고도 낯선 여인을 바라봤다. 삐쩍 말랐던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키도 좀더 큰 것 같고, 몸매도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높이 틀어올린 원보빈에 비녀를 꽂고 귀걸이를 늘어뜨린 채 우아한 자태로 서 있는 이 여인에게서는 전에 알던 그 아이의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편찮은 걸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마침 경성에 온 김에,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왔네요. 대낭, 나무라지 말아주세요.” 

임새옥은 유씨 앞에 낮은 의자에 앉아서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많이 움직여야 낫는 병이에요. 대낭, 나가서 자주 걸으셔야 해요.” 

아원은 유씨의 안색을 보고 서둘러 아이를 안고 달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저도 그렇게 말씀드리는데, 체면 때문에 싫다시더라고요.”

곧 시녀가 차를 내왔고, 유씨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임새옥을 바라봤다. 

“많이 좋아졌다. 마음 써 줘서 고맙구나. 그런데 뭘 찾아오고 그래.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까. 네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어쩌니. 자고로, 듣기 좋은 말만 하라고 하지 않니. 바른말은 비위를 거스르기 쉽단다. 넌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다.”

임새옥은 그저 웃기만 했고 아완이 아이를 어르며 대답했다. 

“아이고, 노부인, 노부인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소 노부인은 대저아랑 성격이 똑같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다투고 바로 풀어 버린답니다. 다음 날까지 담아두지도 않아요.” 

유씨는 멈칫하더니 겸연쩍은 표정이었다. 임새옥이 아원을 노려봤지만, 아원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계모로 사는 게 쉽지 않을 텐데. 그 집에 아이가 있다고…….”

“그건 더 걱정하실 것 없어요. 그 아이가 대저아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아원이 또 말을 가로채자, 임새옥이 헛기침하며 말을 잘랐다. 

“다 하는 만큼 돌아오는 거지, 내가 잘해주니까, 그 아이도 당연히 아는 거야. 원래 영리한 아이고.”

유씨는 아무런 말 없이 애써 웃으며 아원에게서 아이를 안아왔다. 아이를 품에 안고 어르면서 선물을 주어야겠다고 시녀에게 지시했다.

“그 비단도 가지고 오너라.”

시녀가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커다란 돈주머니와 붉은 비단을 안고 나왔다. 어릴 때부터 관리 집안을 드나든 아원은 오색 연꽃이 수 놓인 걸 보고 궁에서 나온 물건인 걸 금방 알아보고는 손을 저었다. 

“돈은 몰라도 이건 못 받아요. 안 돼요.” 

유씨가 웃는 얼굴로 시녀에게 가져온 걸 내려놓으라고 했다. 

“잔뜩 쌓여있다. 집에 사람도 없어서 쌓아둬도 소용없어. 아무리 좋은 옷감이라도 해도 결국 옷 짓는 데 쓰는 거 아니냐.”

그러면서 임새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 집엔 이런 게 많을 테니, 네겐 주지 않으마. 예전 시가 물건을 쓸 필요도 없고.” 

“네. 어차피 저도 이런 옷 안 입어요.” 

유씨도 입을 다물었고, 각자 차를 마시고 아원의 아이를 어르며 시간을 보냈다. 유씨는 소가 일을 더는 묻지 않았고, 임새옥도 예전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몸조심하고 자주 걸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아원의 아이가 졸린지 떼를 쓰기 시작하자, 임새옥은 가보겠다고 일어섰다. 유씨도 일어서려 해서 다가가 부축했더니 유씨가 손을 꼭 잡는 바람에 가슴이 저려왔다.

“대낭, 몸조심하세요.” 

임새옥은 한참 넋이 나가 있다가 결국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유씨도 하고 싶은 말이 천만 마디인데 말할 수가 없어서 천천히 손을 놓았다. 

“한가할 때 다시 오겠다는 그런 소리도 하지 말아요. 집에 시어머니, 아이, 식솔이 잔뜩 있어서 어차피 한가하지도 않잖아요. 얼른 돌아가요.”

아원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유씨가 배웅하려고 시녀를 붙잡고 나오자 손을 휘두르며 말렸다. 

“노부인, 나오실 것 없어요. 노부인 응어리 풀어드리려고 대저아 모시고 온 거예요. 대저아 바람도 들어드렸고요. 이제 앞으로 서로 기억하지 말고 살아요. 없는 사람인 셈 살자고요. 나오지 마세요. 괜히 울고 그러다가 누가 보면 안 좋아요.” 

그 한마디에 결국 유씨는 정말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벌써 문 쪽까지 나갔던 임새옥이 뒤를 돌아보자 유씨가 물었다. 

“하나만 물어보자. 그때, 어떻게 그렇게 모질게 우릴 버리고 간 것이냐.”

임새옥이 멍하니 유씨를 바라봤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원이 먼저 듣기 싫은 듯 눈을 부릅떴다. 

“노부인, 왜 이러셔요. 그러게, 호의를 베풀지 말았어야 한다니까. 그때 무슨 짓을 하셨어요? 모질다는 말씀을 어떻게 하세요? 모진 게 누구였는데요!”

유씨는 아무런 말 없이 시녀에게 기댄 채 임새옥만 빤히 바라봤다. 유씨가 대답을 기다리는 듯하자, 임새옥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예. 제가 모질었어요. 얻고 싶은 마음을 못 얻어서, 제 마음도 버렸어요. 마음도 버렸는데 모질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어머님, 절 원망하지 마세요.”

임새옥은 말을 마친 후 휘장을 젖히고 나갔다. 아원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있었고, 유씨는 ‘어머님’이라는 말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게, 이러실 걸 예전에 왜 그러셨대요.” 

아원이 꿍얼거리면서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더니, 다급하게 걸어가는 임새옥을 향해 소리쳤다.

“이왕 온 거, 제대로 둘러보고 가요. 괜히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이미 문 앞에 다다른 임새옥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휙 돌아보며 아원을 노려봤다.

“정말이지, 저 입, 마음에 안 들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자흑색 장포에 복두(幞頭: 사내가 쓰던 두건의 일종.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쓰던 관)를 쓴 유소호가 뒤를 따라오는 방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을 건네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자가 가만히 있지 않을 줄 알았다…….”

“노야, 다녀오셨습니까!” 

장사의 격한 외침과 함께, 갑자기 앞에 누가 나타날 줄 몰랐던 두 사람은 그대로 부딪치고 말았다. 유소호와 방가가 화들짝 놀라서 앞을 바라보다가 임새옥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특히 방가는 눈이 튀어나올 듯이 놀라서 고함쳤다. 

“아이고, 정말 낮엔 사람 이야기, 밤엔 귀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더니…….”

그러다가 제 입이 실수한 걸 깨닫고는 후다닥 입을 가렸다. 임새옥은 방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는, 유소호가 부축해준 걸 깨닫고는 어색하게 뒷걸음질 쳤다. 

“난, 노부인을 뵈러 왔어요.” 

유소호의 시선이 제게서 몇 번 맴도는 것 같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어쩌면 조금 기쁘다는 듯이 하는 말이 들렸다. 

“대낭자가 와있을 줄 몰라서 차와 식사 준비를 해두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고는 어서 차를 내오고 식사 준비하라고 시녀를 향해 고함쳤다. 

아원이 어느새 성큼 다가와서 두 사람을 갈라놓으며 대답했다. 

“초대받지 않고 온걸요. 우리야말로 갑작스러웠지요. 화나지 않으셨길 바라요, 대인. 이제 돌아가는 길이라 대접은 필요 없습니다.” 

아원은 임새옥의 손을 잡아끌며 인사하라고 속삭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임새옥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폐 끼쳤다고 이야기하고 걸음을 뗐다. 

여인이 제 곁을 지나쳐서 가는 걸 그대로 바라보던 유소호가 말 채찍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이왕 온 거, 차 한잔하면 또 어때서.”

여인이 멈칫하더니 웃는 얼굴로 돌아봤다. 

“노부인하고 이미 마셨어요. 대인의 차까지 마시진 못하겠네요.”

유소호의 안색이 살짝 변하고 손끝이 새하얘졌다. 하지만 이내 얼굴엔 다시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이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의 말씀이 옳지. 법도에 맞지 않아. 그럼 여기서 뭐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낭자는 농사에 정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묻고 싶은데, 벼와 보리를 함께 수확하는 방법, 통하겠습니까?”

유소호가 그걸 물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벼를 수확한 땅에 보리를 심고, 보리를 수확한 다음에 다시 벼를 심으면 땅을 잘 이용할 수 있어요. 농민의 수익도 늘릴 수 있으니, 나라와 백성 모두에게 득이 되는 큰일이죠. 다만 강남은 지대가 낮고, 땅이 진 데다가 온도가 높아서 보리를 심기에 좋진 않아요. 그래서 위험이 너무 크지요. 성공했더라도 추진하지 않은 건 잘한 거예요. 성공한 것보다 더 큰 공이에요. 지금으로서는 작은 범위로는 괜찮아도 큰 범위로는 어려워요.” 

유소호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깨달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또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결국은 안 되는 건가.” 

임새옥도 그 자리에 서서 똑같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조심해야 해요.”

아원이 헛기침하며 끼어들었다.

“흠, 이런 큰일은 유 대인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우리 여인네는 집단속 잘하고 아이를 잘 키우면 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임새옥을 끌고 나갔다. 그 여인이 밖으로 나가는 걸 본 유소호는 몇 걸음 따라갔다. 하지만 결국 문 앞에서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고 여인이 마차 쪽으로 걸어가는 걸 지켜만 봤다.

“뭘 말을 섞어요. 되고, 안 되고는 무슨. 뭐든 알아서 하라고 해요. 뭘 상대해요!” 

아원이 임새옥의 팔짱을 끼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임새옥이 웃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원, 사실 나 만나는 게 무서웠거든. 그런데 만나고 보니까 그렇게 무섭지도 않았어.”

“흥.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앞으로는 길 가다 만난 사이처럼 해요. 누가 누굴 무서워해요.” 

임새옥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고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유소호가 문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또 마음이 아팠다. 

“부인, 노야는 점포에 가셨어요. 바로 못 돌아오신다고 아원 저아하고 시간 보내시랍니다.”

마차 앞에서 기다리던 사환이 두 사람을 맞이하며 말했다. 임새옥이 아원을 바라보자, 아원이 크게 하품했다. 

“전 돌아가서 아이랑 잠 좀 자야겠어요. 같이 있어 달라고 하지 말아요.” 

“알았어. 바래다줄게.” 

임새옥이 웃으며 마차에 타라고 하자, 아원이 먼저 올라타서 시녀 품에서 잠든 아이를 안았다. 

“낮에 시간 있으면 오 부인이나 만나러 가세요. 볼 때마다 부인을 그리워하셨어요.” 

임새옥은 옥매의 부축을 받지 않고 알아서 마차에 타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금가가 모레쯤 떠나자고 하니까, 우리 밭에 심은 채소나 과일 가지고 찾아갈까 했지. 좋은 건 아니지만, 마음이니까.” 

“좋아할 거예요. 지금까지도 그때 우리 집에서 열었던 농가연 이야기하는걸요.”

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휘장을 내리자 마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유소호는 아직도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장사가 뒤에서 허탈한 듯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고, 유씨의 지팡이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천천히 돌아섰다. 

“문 닫게.” 

유소호는 담담히 말하고는 채찍을 방가에게 건넨 후 유씨 앞으로 다가갔다.

“날이 추운데 왜 나오셨어요.” 

시녀의 부축을 받아 회랑 기둥에 기대선 유씨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시녀가 먼저 웃으며 대답했다. 

“노야, 아까 오신 소 부인이 그러시는데, 많이 걸으셔야 좋다고 해서…….”

시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시녀를 노려보며 분노한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소 부인은 무슨! 아무나 하는 말을 듣고 노부인을 모시고 나오다니! 풍한 드셨다가는 너를 가만히 두지 않으마!” 

욕을 먹은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유씨는 유소호를 힐끔 보고는 식사 준비하라고 시녀를 후원으로 보내고 기둥을 짚고 섰다. 

“네 마음, 나도 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화를 낸다고 무슨 이득이 있겠니. 잘 지내는 것만으로 안심해야지. 어찌 됐든 미안한 건 우리다.” 

유소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피식 웃으며 유씨의 말을 잘랐다. 

“그 망할 놈이 그렇게 수작을 부려 데리고 간 것이니 당연히 잘 지내야지요.” 

유씨는 멈칫하더니 지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어리석은 것아, 하늘이 보고 있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해! 그 소 대관인이 어디 그럴 사람이냐? 대저아의 성격을 몰라? 그런 말을 하다니, 그 아이의 명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나도 두고 보지 않아!” 

유소호는 유씨가 화를 내는 걸 보고 웃으며 그녀를 부축해서 앉혔다. 

“압니다, 알아요. 그녀는 나랑 비슷한 사람입니다. 솔직한 사람이지요. 그 사람을 뭐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다만 그 사람이 왜…… 저를 버리고는 또 그런……. 그놈이 부추긴 게 아니라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씨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랑, 그 아이는 이제 잘살고 있다. 더는 그리워하지 말아라. 옛말에 베틀이 빠른 게 아니라 베틀 북이 빠르다고 했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난 게야. 마음이 언짢다고 그런 말을 내뱉으면 네 속이야 후련할지 모른다만, 그런 말이 그 아이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 아이를 해롭게 해야겠니!” 

유씨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꾸짖는데도, 유소호는 그저 무릎을 꿇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문득, 요즘 밤에 지팡이를 짚고 유소호의 거처에 갈 때마다 봤던 등불 아래 길게 늘어진 외로운 그림자가 떠오르자, 유씨도 마음이 시려서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켰다. 

“이랑, 저마다 인연이 있는 법이다. 우린 그 아이와 그 인연이 없는 게야. 관리 부인이 여럿 찾아와서 괜찮은 여인의 사주를 주고 가더구나. 한가할 때 한 번 보아라. 젊은 나이 아니냐, 살날이 길다. 좋은 날이 올 게야.” 

“어머님 마음에 들면 저는 다 좋습니다.”

유소호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하는 말에 유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새 저택을 정리하고, 네가 혼인한 다음엔 그쪽으로 옮기자꾸나.”

이야기하는 사이, 시녀들이 음식을 들고 왔고 유소호는 유씨를 부축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한편, 아원을 배웅한 임새옥은 마음이 답답한데 소금남도 집에 없다고 하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점포에 갔다. 사환이 손님 접대하는 걸 보면서 뒤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옥매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소금남이 들어왔다. 

“왜 이리 일찍 돌아왔어요? 밥도 못 얻어먹고 왔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