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57)

원풍 원년 7월, 장마철이 지난 경성엔 뙤약볕이 내리쬈다. 올해 들어 가장 편안한 한 달을 보낸 황제는 경복전에 앉아 젊은 관리의 보고를 들으며 모처럼 안도한 표정이었다. 

“……수확이 늘었을 뿐만 아니라, 보리는 밭을 거름지게 할 수 있으며…… 보리가 푸를 때 밭을 고르고 토양의 성질을 따듯하게 해주면 가을 추수량이 배가 될 것입니다.”

유소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아뢰었다. 

보리를 수확한 후 벼가 무르익었고, 토지를 잘 이용했다는 보고가 강산현에서 들어온 이래, 황제가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에 유소호와 관계가 좋지 않던 관리들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곡식은 백성, 그리고 국가의 영원한 중대사였다. 

지금 유소호는 만 스물둘이었다. 새해 들어서 조정에서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반년이 흐른 오늘, 이 청년이 관복을 입고 당당하게 대전으로 들어섰다. 몸은 여전히 말랐지만, 얼굴은 예전과 달리 활기가 넘쳤다. 평소와 다름없이 겸손이 느껴지는 가운데 위엄이 풍기는데, 까맣게 그을린 청년의 맑던 눈빛은 더 깊어진 듯했다.

“폐하, 하늘이 우리를 보우하심입니다.” 

갑자기 대신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었다.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듯했다. 그의 말에 닭살이 돋든 아니든, 모든 이가 허리를 굽히며 같은 말을 외쳤다. 

“유 경이 큰 공을 세웠구나.” 

황제도 흥분해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백성을 굽어살피시어 하늘이 보우하신 것입니다. 올해는 바람도 비도 순조로워서 벼와 보리 이모작을 처음으로 성공했습니다. 어찌 감히 신의 공이라 아뢰겠습니까.” 

유소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곁에 있던 등관은 의아한 듯 힐끔 바라봤다.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이런 상황이 되자, 등관도 더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지금 조정엔 노신이라 할 만한 대신들은 이미 없었다. 동쪽에 서 있는 중서성 대신은 재상 왕규만 남아 있었다. 오충은 상주 안건으로 재상직을 사직하고 조정을 떠났다. 그의 자리를 대신한 사람은 채확이었다.

사실 그 자리를 가장 원한 건 등관이었다. 이번엔 절대로 남의 연회에서 춤출 생각이 없어서, 유소호에게 배운 농업 지식을 크게 떠들어댔다. 한순간 온 조당에 기뻐하는 소리가 넘치고 나이 든 대신은 눈물 콧물을 다 흘렸다.

“유 경, 그렇다면, 양절이나 검남(黔南) 일대에서 모두 추진하면 좋지 않나? 어째서 그리하지 않는 것이지?” 

황제가 기쁨을 억누르며 물었다. 유소호가 웃으며 허리를 숙였다.

“아직은 시기상조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벼와 보리 모두 망칠 수 있습니다. 신이 한 2년 더 시험해 보고자 합니다.” 

황제는 조금 실망했지만, 2년 뒤엔 곡식 생산량이 증가할 거라는 생각에 더 따지지 않았다.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등관이 나서며 말했다. 

“유 대인이 생각이 깊고 신중하니, 그리하면 반드시 될 것입니다.” 

황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희녕 6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현성에서 농 재해로 고생했소. 세금 문제도 심각했으니, 특별히 감면할까 하는데,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대신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폐하의 어진 마음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실로 백성의 복입니다.” 

유소호가 가장 먼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그 말이 나오기 무섭게 온 조정을 가득 채운 대신들이 뒤질세라 홀판을 치켜들고 허리를 숙이며 따라 칭송했다. 

대신들의 아첨에 황제는 기분이 더 좋아졌고 한순간 조정 대신 모두 미소 지으니, 분위기도 덩달아 홀가분해졌다. 

유소호도 자연스레 원래 관직으로 복귀했다. 그뿐만 아니라 추밀도 승지 자리도 겸임하게 되었다. 단번에 한 단계 승급하게 된 것이니, 궁문을 나서기도 전에 축하하는 사람이 그를 겹겹이 에워쌌다. 

소식을 들은 유씨는 놀랍기도 하고 기쁜 마음으로, 마주 앉아서 죽을 먹는 유소호를 바라봤다.

“축하하러 온 사람으로 대문 앞이 비좁더구나. 연회를 열어야 할 터인데, 집에 그럴만한 장소가 없으니 사람을 불러 화원을 정돈하도록 하자.” 

오늘은 집에서 쉬는 날이라, 유소호는 푸른 직철에 양혜(涼鞋: 여름용 신발) 차림이었다. 

“어머님, 마음 쓰실 것 없습니다. 알아서 주루에서 대접하면 됩니다. 어차피 우리 돈을 쓰는 것도 아닌데, 괜히 집에 와서 어머님 신경 쓰이게 할 것 없습니다.” 

“그래도 성의가 있는데…….”

유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유소호가 피식 웃었다. 

“성의요? 여기에 성의 같은 게 있습니까.”

유소호가 뜨거운 죽을 저으며 느긋하게 말하자 유씨도 입을 다물었다. 냉대받았던 일을 유소호가 떠올린 걸 알고 있었다. 득세하면 열렬하고 실세하면 냉담해지는 세상인심은 그들 모자 모두 겪어 온 일이었다. 

유소호가 죽을 다 먹자 시녀가 탁자 위를 치웠다. 하늘을 올려다본 유소호가 정원에 나가자고 유씨를 부축했다. 유씨가 그의 손을 잡아서 앉혔다.

“이랑, 나 때문에 마음 쓸 것 없다. 그 아이가 아무리 잘못했다고 해도 네 아이를 품었다. 한동안 냉대했으니 되었다. 슬슬 집으로 데리고 오너라.” 

유소호가 피식 웃으며 일어섰다.

“어머님, 정말로 어찌 되신 겁니까. 휴서를 정월에 썼습니다. 버티고 떠나지 않았을 뿐인데, 아이라니요?” 

유씨는 얼떨떨해져서 넋을 놓고 유소호를 바라봤다. 

“정말로, 정말로 그랬단 말이냐? 그럼 그 후로는 다시…….”

유소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씨의 가슴이 턱 막혀왔다. 

“그 음탕한 것을…….”

유씨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려 하자, 이렇게까지 놀랄 줄 몰랐던 유소호가 다급하게 의원을 부르라고 소리쳤다. 재빨리 인중을 꼬집고 물을 먹이자, 유씨가 겨우 숨을 내쉬었다. 

눈을 뜬 유씨는 유소호가 앞에 있는 걸 보고 있는 힘껏 뺨을 내리쳤다. 당황한 시녀들이 말리려고 다가오자 유소호가 쫓아내고는 피하지도 않고 가만히 제 어머니의 매를 맞았다. 

“네가 눈이 멀고 속이 시커메져서 그런 파렴치한 것을 집으로 들였구나. 벽에도 귀가 있다고 했다. 밖에 소문이 파다하겠구나. 뒤에서 얼마나 우리 유가를 손가락질하고 씹어댔겠느냐!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 박고 죽어버릴 걸 그랬다. 네 아버지를 따라갈 것을 그랬어. 평생 참고 견뎠는데, 이 나이가 되어서 명성을 잃었구나!” 

유씨는 목 놓아 울다가 이내 제 얼굴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내가 눈이 삐었구나. 내가 미쳤어. 너를 사람답게 가르치지 못했다. 네가 허튼짓을 해도 다 받아주었어…….”

유소호가 그녀의 손을 잡고 무릎을 꿇었다. 유씨는 눈물로 흐릿해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옷자락에 바늘땀이 조잡한 커다란 매화가 기워진 걸 보고는 저도 모르게 조화를 떠올렸다. 그해 조화가 덜렁거리다가 유소호 옷에 불똥을 튀어 구멍을 냈었다. 얼마나 혼냈는지 모른다. 조화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다음 날엔 기워왔다며 자랑스럽게 보여주기까지 했다. 그때도 또 한 번 아둔한 솜씨라고 혼을 냈었다. 

그 아이는 전혀 찌푸리는 것 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먹는 거든 쓰는 거든, 좀 조악한 게 나아요. 너무 좋은 걸 쓰면 오히려 불편해요. 그게 어디 사는 거예요?’

“그래, 요즘 확실히 사는 것 같지 않구나.”

유씨가 중얼거렸다. 멎었던 눈물이 다시 왈칵 쏟아져서 곁에 있는 유소호를 마구 때리면서 울었다.

“내 며느리를 돌려내라. 어서 그 아이를 돌려줘. 다 너 때문이다. 이 양심 없는 놈. 이런 일을 겪다니, 다 네 업보다. 꼴 좋구나.…… 그 아이를 돌려내라…….”

유소호는 피하지도 않고 그녀의 무릎에 엎드린 채 맞고만 있었다. 유씨는 눈물을 흘리며 서서히 손을 거뒀다. 무릎이 곧 축축해졌다. 마음이 씁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도 없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유소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데리고 오겠습니다. 데리고 올 겁니다…….”

“단단한 쇠는 세월이 흐를수록 빛이 나지만, 가짜 금에 무슨 색이 있겠느냐. 이랑, 우리는 그럴 복이 없다. 그만두어라.” 

유씨가 쓴웃음을 지으며 아들의 등을 두드렸다. 

흐릿하던 하늘이 어느새 맑아졌다. 구름을 벗어난 태양이 이글이글 빛나며 사방으로 햇살을 내리쬈다. 낡은 창틀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어른어른한 무늬를 그리며 두 사람을 감쌌다. 

정오가 지난 뒤, 유소호는 서재에서 청첩을 잔뜩 써서 방가에게 주었다. 시녀가 들고 온 차를 마신 후 유씨가 무얼 하는지 물었다. 

“노야, 노부인께서는 산매탕을 드시고 피곤하다고 주무셔요.” 

시녀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잠시 주무신 후엔 깨워라. 밤에 못 주무신다.”

유소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렇게 말하고는 요새 유씨가 식사는 잘하는지, 평소엔 무얼 하는지 물었다. 시녀가 하나하나 대답했고, 유소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인지 가보아라. 노부인 깨지 않게 조심하고.”

유호소가 막 그렇게 말하는데 시녀 하나가 당황해서 뛰어 들어왔다. 

“노야, 부인……. 아니, 그 사람이 들어오려고 난리를 부립니다. 장씨가 문을 닫았더니 밖에서 욕하고 있어요.”

벌써 7월인지라 낮잠을 즐기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매미 울음소리 말고는 온통 고요한 이 골목에 유가 대문 앞에 갑자기 울려 퍼진 울고 욕하는 소리에 평온함이 깨졌다. 사람들이 문과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바라보니, 하얀 비단 웃옷과 푸른 비단 치마를 입은 젊은 여인이 문에 기대 울고 있었다. 배 주위가 불룩한 걸 봐서 홑몸이 아닌 듯한데 한눈에 봐도 유가 송씨였다.

유씨와 조화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상냥해서 이웃들과 자주 교류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온 이래, 관리와 백성은 어울리지 않는다며 왕래를 끊었었다. 못마땅해하던 이웃들은 이때다 싶어 문을 열고 나와서 구경했다. 

여인이 울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친정이 없다고 사람을 이리 핍박하다니! 내 팔자야! 시어머니에게 미움받아서, 이렇게 홑몸도 아닌 채 쫓겨나다니. 내가 들어온 후로 집안이 부귀해졌으면서, 해를 가리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나를 내쫓다니. 이 세상에 법도라는 게 있겠어!” 

그 말에 이웃들이 손가락질하면서 지나가던 구경꾼에게 설명했다. 

“다 헛소리요. 대관인이 정월에 내쫓았는데, 그때는 한창 처지가 안 좋았을 때요. 다시 일어선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혀가 잘릴까 두렵지도 않은 게지.”

한창 소란스러운데, 유가 대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유소호가 나온 걸 본 송옥루는 더 심하게 울어댔다. 빗방울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 “양심 없는 이랑!” 하고 외치면서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누이, 안 그래도 데리러 가던 참이었어요. 집이 엉망이라 아이에게 좋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알아서 돌아왔군요.” 

유소호가 웃으며 말하면서 시녀를 향해 어서 대낭자를 모시고 들어오라고 말했다. 

송옥루가 얼떨떨해했을 뿐만 아니라, 구경하던 사람들도 듣고 넋이 나갔다. 당황한 시녀가 두려워하며 부인을 부축하고는 유소호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어찌 됐든 아이가 있으니…….” 하고 속삭였다. 그러자 누군가 혀를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대관인은 반년에 다섯 달은 집에 없는데, 아이는 뭔…….”

유소호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송옥루는 살이 떨렸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했다. 장사가 문을 닫는 소리에 가슴이 더욱 철렁했다. 멍한 눈으로 제 앞을 걸어가는 사내를 바라봤다. 모습은 예전과 똑같은데, 어쩐지 모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안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후원 회랑으로 데리고 가더니 시녀에게 등나무 의자를 옮겨 오라고 해서 자미화 나무 아래 앉았다. 

“너희는 물러가라.” 

유소호가 담담하게 말하자 시녀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송옥루 곁에 서 있는 녹옥은 안으로 들어온 이래 계속 덜덜 떨고 있었다. 유소호가 바라보자 더는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서 송옥루를 나 몰라라 하고 가버렸다. 

“송 대낭자, 어서 앉아요. 아이를 품은 지 넉 달인데, 이 더운 날 땡볕에 서 있으면 쓰나.” 

유소호가 웃으며 말하고는 옷자락을 살짝 걷어 올리고 맞은편에 앉았다. 천천히 말을 내뱉은 모습, 특히 넉 달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모습에, 송옥루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었다. 사내가 자기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모습에 뙤약볕 아래인데도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이랑.” 

송옥루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소호 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 간악한 자에게 속은 거야. 옛정을 생각해서 이번만 용서해줘요. 다시 또 이런 짓을 하면 내가 벼락에 맞아 죽을 거야. 갈가리 찢어져서 온전히 죽지도 못할 거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사내의 안색을 알 수 없었다. 일으켜 세워주지도 않았다. 그저 나지막한 목소리만 들렸다. 

“옛정이라……. 누이, 우리의 옛정을 어찌 잊겠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송옥루는 흠칫하며 조금 뜨악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쉽다고? 

사내가 미소 지으며 그녀를 일으켰다. 

“다 내 잘못이지. 1년 내내 집을 비웠으니 내 부인이 남에게 속기 쉬웠겠지.” 

유소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아이는 남길 수 없어요.” 

송옥루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유소호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부드럽고 애틋하게 대하거나, 미워하고 때리고 욕하면 차라리 노련하게 상대하겠는데, 뜨뜻미지근하고 속을 알 수 없이 구니, 오히려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랑, 이 아이는 당신 아이일 수도 있어요. 잊었어요? 그날 술 마셨을 때, 내가 서재로 당신을 찾아가서…….”

송옥루가 숨을 들이마시며 훌쩍이는데, 유소호가 천천히 말을 잘랐다. 

“누이, 지금 누이에게 생긴 일을 감출 수가 없어요. 설사 내 아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테고. 설령 낳는다고 해도 분명 눈총받지 않을까? 아니면, 퇴로를 남겨두고 싶은 건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그 말투에 송옥루는 살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눈을 들고 유소호를 바라봤다. 한번 나갔다 오더니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 같은데 또 아닌 것도 같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다. 예전에 그녀 집 앞에 서 있던, 다정하고 온화한 사내는 아니었다. 

쯧. 송옥루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진작에 아니었잖아! 이 집에 들어온 때부터 아니었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람. 앞으로 이 사내의 아내로 살 수만 있으면 돼. 앞날은 길어. 사내는 다 간사하고 비열해. 냉대했다가 얼렀다가, 다 그래! 

“이랑, 나를 타박하거나 내쫓을 거면, 지금 바로 문 앞에서 목을 매달고 죽을 거야!” 

송옥루가 눈물을 거두고 유소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또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살아서는 유가 사람이고, 죽어서는 유가 귀신이야. 이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원망스러우면, 때리고 욕해도 다 받아들일게. 어릴 때 헤어져서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몰락한 나를 타박하지 않고 곤경에서 도와주고 부부까지 되었잖아. 그게 얼마나 깊은 인연이야. 이랑, 이랑, 어릴 때, 넌 항상 날 지켜줬지. 이랑, 내가 잘못했어. 앞으로는 새사람이 될게. 다시는 어리석은 짓 하지 않아. 이랑, 날 버리지 마.” 

그 말이 끝나자, 정원 안이 조용해졌다. 매미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송옥루는 몸이 파르르 떨렸다. 입을 열려는데, 유소호가 한숨을 쉬었다. 

“누이, 안심해. 누이 뜻대로 하리다. 다만 그 한 가지만 들어줘요.” 

송옥루는 주저하며 잠시 생각한 끝에 울며 말했다. 

“아이는 나중에 다시 가지면 되긴 하지. 당신 말대로 할게. 다만, 어머니는 어떻게 해요. 내가 아이를 지운 걸 알면…….”

마차가 성을 따라 거의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마조마하던 송옥루는 더 불안해졌다. 밖을 내다보려고 휘장을 젖히는데 같이 있던 어멈이 손을 잡았다. 

“부인, 누가 보면 안 됩니다. 이러면 대상국사에 향 피우러 갔다고 누가 믿겠어요.” 

송옥루는 머쓱해져서 손을 내리면서 콧방귀를 뀌는데, 유소호가 한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어머님을 만날 것 없어. 내일 이렇게 말하면 되지. 대상국사에 향을 피우러 갔다가 오는 길에 말이 놀라서 마차가 굴러서 아이가 떨어졌다고. 내가 저녁에 당신을 데리고 오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아.’

“날 팔아 버릴 용기도 없는 사람이야.”

송옥루는 가슴을 누르며 중얼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마차가 돌연 멈춰섰고 어멈이 그녀를 끌고 내렸다. 담장 낮은 집이 가득한 골목이었다. 한참 동안 마차를 타고 있어서 조금 멍해도, 성 안을 샅샅이 다녀 본 그녀는 이곳이 성 동쪽, 이재민을 안치하던 곳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나중엔 천민 거리가 된 곳임을 알기에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여기로 온 거지?” 

어멈이 그녀를 끌고 들어가며 대답했다.

“부인, 이게 어디 자랑할 일인가요. 사람들 다 보는 데로 갈 일입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예민해진 육감이 송옥루에게 경종을 울렸다. 곧바로 달아나려고 몸을 비틀었는데, 어멈에게 떠밀려 골목 안쪽으로 넘어졌다. 살려달라고 외치기도 전에 옆의 낮은 막사에서 사내 넷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그녀의 입을 막고 끌고 들어갔다. 어멈은 바닥에 떨어진 진주 비녀를 주워들고 사방을 둘러보고는 마차로 돌아갔다. 처참한 비명이 어렴풋이 들리는 것 같지만 어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손에 쥔 진주 비녀를 가늠하며 중얼거렸다.

“팔아? 차라리 팔려 가는 게 나을걸?”

얼마나 기절해있었을까, 송옥루는 하반신이 욱신욱신한 통증에 눈을 떴다. 주변이 칠흑처럼 어두웠다. 그녀는 무심결에 움직이다가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손발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어렴풋이 무슨 일이 생겼는지 떠올랐다. 두려움이 목을 옥죄어와서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어둠에 적응하고 보니, 자신은 온몸이 발가벗겨진 채 나무판 침상에 누워있었다. 있는 힘껏 고개를 드는 순간, 엉망이 된 아랫도리가 온통 붉었고, 바닥에는 이미 모양새를 갖춘 핏덩이가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번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그때 바로 희미한 발걸음 소리가 바로 울렸다. 

“소리치면 안 되지. 아이를 막 지웠는데, 그러다 목이 다쳐.”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유소호가 나타났다. 

“이랑, 이랑!” 

송옥루가 일어나려고 버둥거렸다. 

“지웠어? 지웠으면 어서 날 데리고 가줘. 어서. 무서워…….”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이 웃는 듯했다. 

“누이, 누이가 무서워한다고? 누이가 무서워할 리가 있나.” 

송옥루는 그 나직한 웃음소리에 심신이 다 떨렸다. 그녀는 온몸이 쑤시는 것도 상관할 겨를 없이 미친 듯이 버둥거리며 울먹였다. 

“이랑, 아이를 지웠지만, 나중에 꼭 당신 아이를 낳아줄게. 이랑, 어서 날 데리고 가줘.”

“누이, 누이는 앞으로 아이를 낳지 못해. 그 어멈, 어찌나 아둔한지 실수로 누이 자궁을 떼어냈다지 뭐야.”

유소호가 느릿느릿 유감이라는 듯이 하는 말이 송옥루 귀에는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말이 끝난 뒤 잠시 고요해졌던 실내에 나무 침상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소리가 가득했다.

“네가 한 짓이구나! 네가 한 짓이야! 유소호!”

송옥루의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그녀는 몸이 아픈 것도 잊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손발이 단단히 묶인 게 아니라면, 저 유소호의 몸에서 분명 살점 몇 덩어리는 물어뜯었을 것이다.

“속 시커먼 나쁜 놈, 내가 싫으면 시원하게 날 보내주면 되지, 이런 짓을 해? 유문장, 유문장, 귀신이 되어서도 널 용서하지 않아!”

아등바등하던 임새옥은 금세 기력이 빠져서 온몸에 아픔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마치 바닥에 죽어있는 아이처럼 하얗게 질려서는 한마디도 더 하지 못하고 그저 짧게, 혹은 길게 비명만 질렀다.

“무서워하지 말아, 무서워하지 마. 마취가 풀렸나 보네. 조금 이따가 약 먹고 며칠 잘 돌보면 아프지 않아.” 

유소호가 안타까운 듯 천천히 말했다. 그 말에 송옥루는 다시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있는데도 아득해 보이는 유소호를 시뻘건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 앞에서 얼쩡거리던 게 누군데! 굳이 날 연회로 데리고 가서 곁에 앉힌 게 누군데! 굳이 날 집에 들인 게 누군데! 이랑, 이랑, 나한테 왜 이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처량하고 으스스한 여인의 목소리가 이 어둡고 비린내 나는 실내에 메아리쳤다. 듣는 사람이 상심하고 눈물을 흘릴 만한 목소리였다. 

“옥루 누이, 이러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물어? 그럼 누이는 나한테 왜 그런 건지,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지?”

비통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가 천천히 울리더니, 기척이 들리면서 유소호가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송옥루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는 나무 침상에 제 머리를 쿵쿵 박으면서 깔깔 웃었다.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잘 살고 싶었어. 잘 먹고, 잘 입고, 누구나 날 존중하고 부러워하는 삶. 그게 잘못이야? 그저 우리 집이 망했단 이유로? 누구나 무시하는 노래꾼이 되어서? 저택 깊은 규방에 갇혀 사는 부인들이 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어서?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인데, 나는 왜 그렇게 살면 안 돼? 너한테 왜 그랬냐고? 내가 어쨌는데? 환락의 시간엔 밤이 짧다 타박하고, 즐거움보다 외로움과 한이 더 길다더니, 세상 사내 중에 좋은 놈 하나 있어? 하나같이 한때의 풍류에 마음을 팔고 평생 분 냄새를 탐할 뿐이지 않아? 

사내는 앞문으로 처를 들이고 뒷문으로 첩을 들이지. 옛것은 질려 하고 새것만 탐내. 안 그러는 사내가 있어? 이 세상에 진심이 어디 있겠어? 모두 다 생계, 돈 때문이야! 불꽃은 오래가지 않아, 그저 다 가짜일 뿐이야. 

눈먼 멍청이 주제에 왜 내 앞에 나타났어? 술 몇 방울 흘렸을 뿐인데, 의로운 척 다가온 건 너야! 술은 취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알아서 취하고, 색은 유혹하지 않는데 알아서 빠지는 거라고! 네가 빈틈이 없었다면, 나 송옥루에게 당했겠니? 인제 와서 내가 왜 그랬냐고 원망해? 퉤! 그럴 담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시원스럽게 끝내 줘! 날 살려뒀다간, 너도 죽은 목숨이니까.” 

단숨에 그 말을 하느라 기운이 빠진 송옥루는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왕 어멈, 이 여인, 죽으면 안 되네.” 

유소호가 갑자기 하는 말에 자잘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왜소한 어멈 하나가 어둠에서 나와서 허리를 굽히고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대관인, 안심하세요. 자주 하는 일입니다.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지요.”

밤 고양이가 우는 소리 같은 어멈의 목소리에 송옥루는 놀라고 또 놀랐다. 다시 욕을 퍼붓고 싶어도 기운이 빠져서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왕 어멈, 다른 건 몰라도, 이 여인, 침상에서 재주가 매우 좋다네. 손해 볼 일은 없을 걸세. 단 하나, 말버릇이 안 좋네.”

유소호가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갈수록 휘몰아치는 통증에 의식이 혼미해지던 송옥루는 그 말을 듣자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고개를 떨궜다. 실내엔 어멈의 끌끌거리는 웃음소리만 퍼졌다. 

“대관인, 안심하세요. 약 한 그릇이면 끝날 일입니다.” 

허름한 휘장을 누가 들어 올렸는지,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와 유소호의 얼굴을 비쳤다. 그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고는 나무 침상 위에 누운 그 여인에겐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밝아오는 하늘, 이곳 천민가도 아침 안개에 뒤덮였다. 유소호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있는 마차 쪽으로 향했다. 한쪽 마차 휘장이 올라가더니, 지극히 잘 가꾼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유소호가 웃으며 살짝 공수하고 입을 열었다. 

“도위 대인, 하관이 집을 잘못 다스린 바람에 대인께 골치를 안겨드렸습니다.” 

슬며시 미소 짓던 사내가 부채를 착 펼쳐서 얼굴을 살짝 가렸다.

“유 대인, 신경 쓰게 했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대인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게 제 본분 아닙니까. 게다가 제가 내쫓은 사람이 일으킨 일인 걸요. 오늘 밤에 백루에 연회를 열어 놀란 마음을 달래드릴까 하는데, 체면 세워주시겠습니까?” 

도위 대인이 껄껄 웃으면서 부채로 유소호의 어깨를 툭 쳤다. 

“대인의 농사 기술이 뛰어나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니, 인간사에도 이리 정통했구려. 기억해 두지.” 

말이 끝난 후 휘장이 내려오고 마차가 서서히 사라졌다. 사내가 멀어짐에 따라 하늘이 밝아왔다. 온몸을 고급 비단으로 두른 유소호는 이 더러운 골목에서 유난이 눈에 띄었다. 그는 잠시 그곳에 우뚝 서 있다가 서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잠시 걸어 나가니, 방가가 말을 끌고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노야, 다 준비되었습니다. 오후가 되기 전에 공주께서 알게 되실 겁니다.” 

유소호는 무표정하게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말에 올라탔다. 방가가 나지막이 “노야, 아무리 그래도 부마 대인인데…….” 하고 말하자, 피식 웃더니 문득 한숨을 내쉬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난교에 빠진 부덕한 사람이다. 공주가 여러 번 궁에 들어가 울며 호소해서 폐하께선 벌써 마뜩잖아하고 계셨다. 내가 저자를 도와? 가소로운 일이지. 장공주의 울분을 풀 수 있도록 폐하께 선물 하나 보낸 것이다. 대명부에 있는 가택은 송 대낭이 나이 든 후에 거둬 와라. 다른 건 알릴 필요 없다. 어찌 됐든 송 대낭은 관계없는 일이다.”

방가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원풍 원년 7월 말, 즐거운 일이 극에 달하면 비극이 생긴다던가, 좋은 일이 연달아 생겼던 신진 추밀도 승지 유소호에게 슬픈 일이 생겼다. 그의 처가 친지 방문하러 대명부로 돌아가던 길에 말이 놀라 절벽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위로하러 그를 찾아간 인파로 온 골목이 붐볐다. 그런데 유가에서는 천막도 세우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그저 유소호가 흰 직철을 입고 객을 맞이하며 다소 겸연쩍은 듯, 사실은 정월에 이미 휴처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우르르 흩어졌다. 

며칠 지나지 않아, 큰 사건이 또 발생했다. 장공주의 부마, 정주 관찰사, 이주 방어사에 봉해졌던 왕선(王詵)이 갑자기 성심을 거슬려서 부마도위 자리에서 박탈되어 소화(昭化) 군절도행군사마가 되어 균주(均州)로 좌천되었다. 

그 소식이 유가 사건을 누르고 새로운 이야깃거리로 떠올랐다.

이 소식이 성안현 시골까지 퍼졌을 때도 임새옥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부마와 공주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의 작은 나비 날갯짓이 또 한 번 역사를 바꾸어 원래 내년이 되어야 죄가 정해졌을 부마 대인이 1년 일찍 지방으로 간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때 임새옥은 노아촌 소가 저택에서 소 노부인과 나란히 앉아서 어멈들이 사고(社糕: 추수 감사 제사에 이웃 친지들과 모이는 자리에서 먹는 떡) 만드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시녀가 들어와 재봉사가 왔다고 알렸다.

“어머님, 새해도 아닌데 또 무슨 옷을 만들어요.” 

임새옥이 떡을 집어 먹으며 묻는데 소 노부인은 벌써 시녀에게 옷감을 들고 오라고 지시했다. 

“1년 내내 몇 벌로 돌려 입고. 넌 창피하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사람들이 며느리 홀대한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할까 봐 무섭다.” 

노부인은 시녀들이 비단, 백능, 항주 명주를 들고 오자 재봉사를 불러 지시했다. 

“며느리가 입을 비단옷 두 벌, 가을에 입을 웃옷, 배자 두 벌, 취란(翠蘭) 치마 세 벌 짓고, 옥매가 입을 백능 웃옷, 배자 한 벌씩, 어멈과 시녀들은 각각 명주옷 한 벌씩 지어주게.”

노부인의 말에 정원 가득한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다. 임새옥은 곁에서 깔깔 웃으면서 “어머님, 인정 베푸셨네요!” 하고는 시녀와 어멈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안하네. 내가 농사만 짓느라 챙기지 못했어. 새해에만 옷 지어주려고 생각하다니, 그러면 안 되는데.” 

그 말에 시녀들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흥. 다들 마음 독하게 먹어라. 달랄 건 달라고 해야 한다. 네 부인이 잔뜩 모은 돈에 곰팡이 필라.” 

노부인이 임새옥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재봉사는 웃느라 치수도 재지 못하다가 임새옥도 같이 웃는 걸 보고 말했다. 

“노부인, 부인 성품이 좋아서 다행입니다. 없는 말씀 하시는데도 웃네요.”

“흥, 그건 아니지. 내가 성격이 좋은 거지. 아니면 이 아이가 이럴 수 있겠나?” 

노부인의 말에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씀이세요.” 

그렇게 다 같이 웃고 있는데 사환 하나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대낭자, 대관인이 과수원으로 오시래요. 호박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시겠다고요.” 

“이것 좀 봐라, 내 아들은 해외에서 들어온 진귀한 보물 장사하던 사람인데, 지금은 농부가 되지 않았느냐!” 

임새옥은 노부인이 손가락질해도 웃기만 하고 치맛자락을 들고 그 사환을 따라갔다. 

마차를 타고 과수원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나뭇가지를 다듬고 있길래 잠시 서서 지켜보며 알려주었다. 

“대낭자, 잘 자라고 있는데 멀쩡한 걸 왜 벱니까? 올해 대추가 꽤 자란걸요. 왜 다 따는 겁니까? 이 과수원도 놀이로 심으신 겁니까? 아까워서 손을 댈 수가 없는데요.” 

낯익은 소작인 몇이 웃으며 묻자, 임새옥도 웃으며 대답했다. 

“나뭇가지가 너무 무성하면 열매가 잘 영글지 않아요. 바람이 잘 통해야 새 가지가 자라거든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년에 대추나무가 튼실해지면 나무껍질도 베어 내야 하는걸요.” 

그 말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올해 연초에 임새옥이 과수원에 호박을 잔뜩 심어서, 지금은 온 과수원이 호박 풍년이었다. 호박이 잘 자라서 사러 온 사람도 많았다. 노부인을 이곳으로 모시고 온 소금남도 과수원에 자주 와서 둘러보는데, 지금은 타지 상인과 함께 호박을 고르고 있었다. 임새옥의 말을 들은 한 상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습니다. 북쪽에 커다란 대추 농장이 있는데, 꽃이 필 시기에 가지를 쳐내더군요. 도끼로 나무껍질을 베기도 하고요. 그걸 대추 시집 보낸다고 하던걸요?” 

“남북조 때부터 쓰던 방법이에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임새옥이 웃으며 대답하다가 소금남 뒤에 서 있는 사환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소정가는 이제는 키가 더 크고 살도 조금 찌고 어린 티도 가신 모습이었다. 그녀가 소정가를 향해 손짓했다.

“노부인께 들었는데, 영아가 저아를 낳았다며? 딸이라고 타박하지 말아.”

그 말에 소정가가 싱글벙글 웃었다. 

“누가 감히요. 다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걸요. 요즘 집에서 먹고 자고 통통해져서 몰라보실걸요?” 

“지금도 먹는 걸 밝히는구나. 타고난 복이 있어서 다행이다.” 

임새옥이 크게 웃고는, 이번에 돌아가면 만나 봐야겠다고, 영아에게 필요한 건 없는지 물었다. 소정가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 쓰지 말라고 하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리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별 고민 없이 잘 지내는데, 다만 한 가지, 어느 노부인 이야기만 하면 웁니다. 병이 나았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해서 누구냐고 물으면 또 입을 다뭅니다. 이상해요. 대낭자, 누구 이야긴지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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