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 원년 봄이 곧 찾아올 무렵, 청명이 지난 경성은 여전히 매섭게 추웠다. 시름시름 앓던 조 태후가 새해가 되어 기운을 꽤 차리면서, 황제도 매우 기뻐했다. 그러나 기쁨을 즐기기도 전에 이제 막 열두 살이 된 공주가 갑자기 병이 났다.
황후궁에서 나온 황제의 안색이 더 암울해졌다. 연달아 아들과 아버지를 여의고 지금은 또 딸을 잃을지도 모르는 젊디젊은 황후는 심신이 거의 무너질 듯했다.
황제는 막 옷을 갈아입고 잠시 쉴 생각이었는데 어사대 채확이 알현을 청한다고 내시가 보고했다. 짐작할 것도 없이 상주(相州) 안건으로 온 걸 아는 황제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서 보지 않겠다고 분부를 내렸다.
(※상주에서 일어난 강도 살인으로 세 사람이 사형을 선고받은 사건. 재조사 결과 오판이었고, 두 종범은 사형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 상주에 재심을 요구했으나, 두 종범 모두 처결되었다. 이 사건을 심리한 상주 관찰사 판관 진안민의 조카가 오충의 사위였고, 채확은 관리 사이의 결탁을 단절하고자 개봉부에서 어사대로 사건을 넘겼다. 우상 왕규가 채확이 심리에 참여하도록 천거했고, 이 일로 채확이 어사중승으로 승진하고 사농시를 이끌었다.)
웃는 얼굴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서던 등관은 채확이 나라와 백성 걱정과 사직을 짊어진 듯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걸 보고 가슴이 턱 막혔다.
이놈이 요즘 하늘을 찌를 기세라, 어사중승을 아예 안중에 두지 않아?
왜,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지만 사실 채확이 억울한 일이었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지금 어사중승이어야 할 사람은 바로 채확이었다.
“지정(持正), 일은 잘되어가는가?”
등관이 실실 웃으며 공수했다. 이 녀석이 황제를 못 만난 걸 뻔히 알아서 일부러 자극하는 것이었다. 역시나, 채확이 언짢은 얼굴로 답례했다.
“등 대인, 하관, 예를 올립니다. 대인, 폐하를 만나러 오셨습니까?”
등관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고 걸음을 서둘렀다.
“성상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어서 먼저 가네. 이야기는 다음에 하세.”
문전박대를 당한 채확을 제대로 한 방 먹인 등관은 숭정전에 들어갈 때까지 입가에 웃음을 걸고 있었다.
“중승,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관포와 신발까지 갈아신은 황제는 딱 봐도 언짢은 얼굴로 용상에 앉아 있었다.
“폐하, 공부 대인의 회신을 막 받았습니다. 유 대인이 절동(浙東)과 절서(浙西) 일대에서 보리밭에 벼를 이미 심었답니다.”
등관의 말에 황제가 역시나 용상에서 벌떡 일어섰다.
“보리밭에 벼를 심어?”
황제가 놀라서 물었다. 놀라는 게 당연했다. 자연환경, 역사 전통, 경제, 기술, 그리고 사람들의 생활 습관 등등 요인으로 남방에서 보리를 보급하는 게 쉽지 않았고 생산량도 매우 적었다. 어째서 많이 파종해도 수확이 이렇게 적은지를 묻는 관리의 상주서가 줄줄이 올라오는데 줄곧 뾰족한 해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남방에서는 보리를 중시하지 않았고, 고지대, 황지, 비탈땅 같은 곳에 대충 심는 곡식이었다. 소동파가 지은 ‘길가의 기름진 밭에 보리가 무성하네.’라는 시가 황제에게 전해졌을 때, 황제는 그 일로 며칠이나 기뻐했었다. 혜주에서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 이미 만족했는데, 논벼와 함께 심을 수 있다고 생각이나 했으랴.
“높은 곳엔 좁쌀, 낮은 곳엔 콩을 심고, 수원이 있는 곳은 벼를 심고 없는 곳은 보리를 뿌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보리밭에 벼를 심는단 말인가?”
황제의 호기심 어린 시선에 등관은 난처한 척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신도 모릅니다. 유 대인에게 자세히 듣지 못했습니다. 그저 6월이나 되어야 돌아온다는 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보리를 수확하고 논벼가 익는 걸 보아야 돌아와 폐하를 뵐 낯이 있다고 말입니다.”
황제는 한참 침묵했다. 한동안 그 젊은이를 냉대하고 연달아 타격을 준 게 맞았다. 공부와 함께 순찰을 가겠다고 청하길래, 조정을 떠날 핑계를 찾는 줄 알았다. 자포자기한 줄 알았더니, 그런 의향이 있었을 줄이야.
“짐이 틀림없었구나.”
희색이 돌던 황제는 물러가려는 등관을 서둘러 불러세웠다.
“유 경 집에 병든 모친이 있으니, 사람을 보내 잘 보살피게.”
황급히 명을 받드는 등관의 귀로 혼잣말인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라리 짐이 그 집에 친히 가볼까…….”
등관이 화들짝 놀라서 말렸고, 다행히 황제도 그냥 해본 말이었다. 궁에 환자가 둘이나 있는데 어찌 출궁하랴. 나중에 돈이나 먹을거리를 하사해서 마음을 표시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이때 유가의 작은 저택은 평소처럼 고요했다. 문 앞에 먼지가 휘날리자, 장사가 날도 좋으니 물을 길어서 바닥에 뿌리는데 아원이 열네댓으로 보이는 시녀 아이 하나를 데리고 다가왔다.
“날이 이리 더운데, 어째서 걸어온 것이냐.”
장사가 재빨리 달려가 맞이하면서 시녀가 건네는 종이봉투를 받았다.
“그 여인은 또 나갔어요?”
아원이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유씨 거처의 주렴이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낯선 시녀 둘이 신발 천을 그리는지 계단에 앉아 있다가, 그녀를 보고 쭈뼛쭈뼛 일어섰다. 아원은 유소호가 떠나기 전에 직접 골라서 들여온 시녀 둘을 유심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안목이 조금은 발전했네. 둘 다 착실해 보여.”
어린 시녀가 휘장을 젖혀주어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 안 배치는 간단해도 깔끔했다. 유씨도 정갈하게 차려입고 창가에 앉아서 서신을 읽고 있었다.
“넌 슬슬 배도 불러올 아이가 왜 자꾸 돌아다니는 거냐.”
유씨가 눈살을 찌푸리면서 살이 조금 오른 아원의 허리를 보며 서신을 내려놓았다. 아원이 곁에 앉으며 서신을 힐끔 보니 ‘이랑’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다.
“나간 지 한 달쯤 되었으니, 곧 돌아오겠네요?”
아원이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으며 묻자 유씨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멀었다. 6월이 지나야 온다는구나.”
“흥. 제가 글공부는 안 했어도 부모가 살아 계실 땐 멀리 가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이러니 과거에 급제 못 했죠. 제대로 글공부 안 했나 보네요.”
아원이 얼굴을 붉히며 콧방귀를 뀌었지만 유씨는 화내지 않고 담담하게 웃었다.
“‘유필유방(遊必有方)’이라. 이랑은 부친이 살아계실 때 알려준 방도가 있어서 떠난 거다. 그곳에서 해보는 중이야. 성공해서 곡식을 생산해내면, 재해로 인한 고통을 조금은 해소할 수 있을 게다.”
(※부모재, 불원유, 유필유방父母在, 不遠遊, 遊必有方, - 논어.
자식은 부모가 생존해 계실 때는 멀리 떠나 있지 말아야 하고, 공부를 위해 떠나 있을지라도 반드시 일정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
아원이 아하, 웃으면서 물었다.
“그럼, 농신 나리가 되고 싶은 건가 보네요?”
아원의 한마디에 유씨의 얼굴이 흐려지는 걸 보니 농신 낭자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잘 지내고 있으니 자꾸 마음 쓰지 마세요. 그럴 겨를이 있으면 곁에 있는 며느리나 단속하시고요. 이러다가 그 여인이 두 분을 팔아버려도 모른다고요. 왜 아직 곁에 두시는 거예요? 몽둥이로 때려 내쫓아 버리시지.”
유씨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려는데 문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창 너머로 바라보니 요란스럽게 치장한 송옥루가 들어왔다. 관을 쓴 머리엔 장신구가 잔뜩 꽂혀있고 대홍색 배자, 청남색 금박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원이 코웃음 치며 일어섰다.
“어머, 요즘 끗발이 다시 좋아졌나 보네요. 절에 사는 보살처럼 치장하시고? 전 이만 가요. 시간 나면 다시 뵈러 올게요.”
아원이 송옥루를 좋아하지 않는 걸 아는 유씨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나면 매일 밖을 돌아다니지 말고 집에서 몸조리나 해라. 네 부군에게 미움받을라.”
아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입구에 온 송옥루가 그 말을 듣고 거칠게 휘장을 젖혔다. 아원이 있는 걸 모르고 자기에게 한 말인 줄 안 것이다.
“미움받아요? 남이 들으면 얼마나 웃을까! 어느 집에 이런 사내가 있답니까? 무늬 있는 모과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먹지도 못한다더니, 그 말이 딱 맞네요. 밖을 신나게 돌아다니며 방탕하게 즐기는 게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날 단속해요!”
송옥루의 말에 유씨가 바로 손을 뻗었지만, 아원이 한발 먼저 혀를 차며 다가갔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깜짝 놀란 송옥루가 화들짝 뒷걸음질 치는 사이, 아원이 손가락질하며 욕을 했다.
“염치없는 창부 같으니라고! 휴서도 받았으면서 나가지 않고 어디서 입을 놀려! 어서 떠나지 그래? 이 유가에 당신이 설 자리가 있나?”
송옥루는 아원인 걸 보고 더 화가 치밀어서 우리 집에 네가 무슨 상관이냐, 노비 주제에 어쩌고저쩌고하며 손을 휘두르며 나섰다. 아원 곁에 있는 시녀아이는 꽤나 기가 센 아이인지, 송옥루가 다가오기도 전에 나서서 주먹을 마구 휘둘러댔다. 송옥루의 관이 비뚤어지고, 비녀가 뽑히고, 신발이 짓밟혀 더러워지는 모습에 아원은 속이 후련해졌다.
“잘한다! 이런 창부는 맞아야 하지! 감히 나한테 손을 대려 해? 용기가 가상하다!”
송옥루는 시녀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건 또 처음이었다. 손을 휘두르면서 자기 시녀를 불러서 겨우 막아내는데, 유씨가 안에서 지팡이를 두드리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그만해라. 아원은 지금 홑몸이 아니다. 넌 네 거처로 가서 쉬어라!”
그 말에 송옥루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대답했다.
“홑몸이 아니야? 그럼 나는 홑몸인가요? 이것이 밴 아이가 유가 씨처럼 구네요? 제가 밴 아이는 아닌가요? 노인네가 망령이라도 났나. 가족인지 남인지 분간을 못 하시네!”
아원은 멈칫하고는 유심히 여자를 살폈고, 시선을 느낀 송옥루는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요즘은 겨울보다 옷이 얇아지긴 했는데 아무리 봐도 알 수 없었다.
“맞는 말이네. 누구 씨일지 어찌 알아.”
아원이 혀를 차면서 더는 상대하지 않고 시녀를 붙들고 가려 했다. 송옥루의 안색이 한순간 거북해지더니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뿌듯한 표정으로 아원을 막아서더니 어느새 문 앞으로 나온 유씨를 향해 말했다.
“어찌 됐든 제가 어머니라고 불렀는데, 저를 이렇게 대하시는 거예요? 남이 제게 구정물을 퍼붓는 걸 그냥 두시냔 말이에요! 정말로 이 집에 못 있겠네요!”
송옥루는 녹옥을 불러 짐 챙겨 대명부로 돌아가자고 외치면서 아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똑똑히 봐라. 내가 가려는 게 아니라 유가에서 날 쫓아내는 거다. 대저아, 제발 말 좀 가려서 해. 내 명예를 더럽히지 말고.”
그녀는 녹옥을 재촉해서 내원으로 들어가면서 잊지 않고 한마디 내뱉었다.
“이랑이 돌아와서 꽃가마를 태우며 모시러 온대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유씨는 다급해져서 어서 말리라고 시녀를 불렀고, 아원이 그녀를 잡았다.
“내버려 두세요. 집이 가난해지니까 떠나려는 거지, 부귀해지면 알아서 돌아올 거예요. 그냥 두고 보세요.”
유씨가 한숨을 내쉬며 근심스러운 듯 말했다.
“아무리 잘못했대도 홑몸이 아니라서…….”
“흥. 그러면 뭐 해요. 아이를 낳아서 데리고 가기라도 한대요? 떠나면 아이 성이 유씨가 아니래요? 뭔 수가 있겠어요. 내버려 두세요.”
곧이어 송옥루가 보따리를 잔뜩 들고나왔고, 뒤에서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녹옥 역시 두 손 가득 짐을 들고 있었다.
“저것 보세요, 진작 짐을 싸둔 모양이네요.”
아원이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대단하네! 이 밝은 대낮에 도둑질이라도 하려고! 이 집에 당신 물건이 하나라도 있어? 다 내려놔!”
송옥루가 상대할 리가 있나. 배불리 밥 먹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아원은 아무래도 아이를 가진 몸이라 정말로 막진 못하고 시녀를 불렀지만, 결국 그렇게 주인과 종복은 마차 한가득 짐을 싣고 가버렸다.
“장씨, 어디로 가는지 가보게.”
유씨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장사를 재촉했고, 장사가 다급하게 뒤쫓아 나갔다.
“노부인, 사람이 착하면 괴롭힘당하기만 한다더니, 정말이네요. 아니면 악당 상대는 악당밖에 못 한다고 해야 하나. 대저아를 대하던 그 기세는 다 어디 가셨어요?”
아원은 싸늘하게 말하다가 유씨의 얼굴이 굳는 걸 보고 입을 다물고 시녀를 붙잡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성안현 시골, 아원이 말한 착한 사람 임새옥은 두립을 쓰고 밭에 서서 허리를 펴는 참이었다. 노씨의 쩌렁쩌렁한 잔소리가 귀에 울렸다.
“멀쩡히 좋은 시기 버릴 줄 알았다, 내가! 이 좋은 땅을 쓸데없이! 요즘 채소는 없어서 못 파는데, 굳이 땅을 비워서 웬 괴상한 걸 심는 게냐! 돈이 있어도 이렇게 내다 버리는 건 아니다!”
노씨는 화를 내며 한쪽에 쌓아 둔 나무틀을 끌고 가면서 쉴 새 없이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금단과 전가아가 그중 두 개를 가져다 목마 놀이를 하는 걸 보고 내놓으라고 뒤를 쫓았다.
“불쏘시개로 쓰면 밥이라도 지을 수 있는걸! 망치지 말고 내놓아라!”
그러다가 소금남이 시골 사람 같은 거친 옷을 입고 괭이를 짊어지고 오는 희한한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웃다가 혀를 찼다.
“어찌 이런 허튼짓을 한다니!”
임새옥도 빙긋이 웃었다. 안 그래도 어색하게 웃던 소금남은 더 거북해졌다.
눈 깜빡할 사이, 무더운 여름이 찾아왔고 노아촌은 하룻밤에 신록으로 뒤덮인 듯했다. 나무에 잔뜩 붙은 매미의 맴맴 소리에 낮잠을 자는 전가아가 수시로 몸을 뒤척였다. 임새옥은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아원이 보낸 서신을 읽었다.
아원의 남편이 대신 쓴 것인지 글씨가 매우 수려했지만, 내용은 아원의 성격처럼 간단했다. 새로 집을 옮겼고, 작은 과자 점포를 열었으며 남편은 개봉부 관아에서 작은 일을 찾아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5월 말에 아들을 낳았는데 일곱 근이 넘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말과 함께 잘 지내고 있는지, 아이도 슬슬 나아야 하지 않냐 등등의 말이었다.
옥매가 산매(酸梅)탕을 들고 옆에 서서 아원의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는 임새옥의 말을 듣고 있었다.
“바느질해서 주는 건 안 돼. 아원이 솜씨가 뛰어나서 내가 한 건 눈에 차지도 않을 거야.”
임새옥이 산매탕을 받아 마시며 나직이 말했다.
“부인 드리려고 만든 비단 배두렁이가 있는데, 우선 그걸 보낼까요?”
임새옥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무심결에 제 배를 내려다보았다.
아이 하나 생기는 게 왜 이렇게 힘드는지. 남들은 한방에도 생기는 일이 많던데.
“전가아도 이제 다 컸고, 여름도 되었으니 저쪽 방을 정리해서 그쪽에서 재우세요.”
옥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혼인 안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려니 어쩐지 부끄러웠다. 하지만 노비 된 사람으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임새옥도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생각하다가 응, 하고 간단히 대답했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다른 선물은 뭘 보내야 할지 잠시 더 이야기하고 옥매는 물러갔다.
임새옥이 서안 앞에 앉아 붓을 들고 뭐라고 쓸지 궁리하면서 두어 줄 쓰는데, 전가아가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는 금단에게 가겠다고 졸랐다.
“안 돼. 아버지께서 모셔온 선생이 곧 오실 거야. 매일 놀기만 하면 안 돼. 며칠 뒤에 가자.”
임새옥이 얼굴을 닦아 주고 탁자 위에 놓인 신선한 과일을 골라 먹였다. 전가아가 얼굴을 구기며 싫다고 몸을 비틀어대는데, 마침 들어오던 소금남이 보고는 한바탕 혼을 내자 전가아가 입을 다물었다.
“금단도 올해 일곱 살이니 공부할 때가 되었지. 내일 금단도 불러옵시다.”
소금남은 임새옥이 건네는 차를 받아마시며 혹시라도 땀 냄새 날까 봐 멀찍이 떨어져서 말했다. 전가아는 짝이 생긴다는 말에 신이 나서 과일을 들고 놀러 나갔다.
“물 데워두었어요. 가서 씻어요. 당신 좋아하는 교자 만들었어요.”
임새옥은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주며 소금남의 등을 떠밀었다. 소금남이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입을 맞추자 놀라서 밀어냈다.
“끈적끈적해요. 얼른 가서 씻어요.”
“오전에 또 밭에 갔군.”
소금남이 웃으며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부부의 생활은 요즘 매우 규칙적이었다. 새로 심은 목화 때문에 임새옥은 매일 해가 뜨기도 전에 2리 밖 십방촌으로 향했다. 전가아를 데리고 갈 때는 거기서 밥을 먹고 오후가 되어서 돌아왔고, 전가아와 함께 가지 않을 때는 오전에 돌아와서 부자와 함께 밥을 먹었다. 오후가 되면 전가아는 소금남에게 글자를 배웠고, 소금남은 매일 집에서 아이와 책을 보거나 성으로 가서 서신을 살피거나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강녕에 돌아가서 닷새 정도 지내고는 금세 돌아오니, 이래저래 바쁘고 충실한 나날이었다.
소금남의 말에 임새옥은 뜨끔했다. 피곤해서 씻지 않았는데 냄새가 나나 싶어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목화 보러 다녀왔어요. 또 많이 죽었더라고요.”
자신의 어린 부인이 이것저것 따지는 게 없는 걸 아는 소금남은 그녀의 콧등을 톡 치며 함께 씻으러 가자고 했다. 막 문밖에 왔다가 그 말을 들은 옥매는 서둘러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시녀 아이를 꿀 넣은 매실탕을 끓여오라고 내보내고, 자기는 정원 문밖 큰 나무 밑에 앉아서 아이 신발 천을 그렸다.
여름의 더운 바람이 정원 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지막하게 들리는 가쁜 숨소리와 신음에 고개를 숙이고 신발 천을 그리는 옥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임새옥은 옥매가 매실탕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인 채 나가는 걸 보고는 덜 마른 긴 머리카락을 닦으며 짧은 옷을 걸치고 침상에 앉은 소금남에게 그릇을 건넸다.
“어머님 오신대요?”
임새옥이 머리를 갸웃하면서 묻자, 젖은 머리카락이 소금남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소금남이 수건을 들고 그녀의 머리를 닦아주었다.
“덥다고 외출하기 싫다고 하시는군. 가을이 되어 선선해지면 대추 드시러 오신대요.”
소금남이 웃으면서 여인의 긴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얇은 웃옷 안에 입은 붉은 가슴가리개가 보이자 조금 전 환락의 시간이 떠올라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여인이 깜짝 놀라며 피하려 하자 더 단단히 품에 안고는 나직이 웃었다.
“자주 밭에 가서 일하니 과연 허리에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
임새옥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대로 침상 위로 쓰러졌다. 커다란 두 손이 옷을 파고들더니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화아, 난 한순간도 당신 곁을 떠나기가 아쉬워.”
나른하게 지쳐있던 임새옥은 그 갑작스러운 거친 동작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전에 없던 거친 동작에 온몸이 긴장해서인지 안 된다는 말도 교성처럼 흘러나오고 말았다. 거칠게 몸을 문지르던 두 손이 갑자기 아래로 내려가더니 허리를 움켜쥐고 휙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얕은 탄성이 터졌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애틋한 손길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천천히 움직이지도 않았다. 거친 바람이 불고 세찬 비가 쏟아지듯이, 거부를 용납하지 않고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침상을 비좁게 차지하던 작은 탁자 하나가 뒤엉키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구석으로 밀려나 침상판에 부딪혔다. 휘장이 흔들리고, 삐걱대는 소리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미세하게 울려 퍼졌다.
그날 밤, 전가아는 노아촌에 온 이래 처음으로 혼자 잤다. 어멈이 함께 있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은 임새옥은 밤에 두 번이나 옷을 걸치고 가서 전가아가 새근새근 자는 걸 보고는 오히려 조금 낙담했다.
“나랑 떨어지면 안 될 줄 알았더니.”
임새옥은 불을 끄고 다시 침상에 누웠다. 잠에서 깬 소금남은 여인을 품으로 당기며 슬쩍 웃으며 웅얼거렸다.
“누가 없다고 못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러고는 잠이 들려는데, 품에 안은 여인의 몸이 굳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걸 보고 졸음이 싹 사라졌다. 그는 몸을 틀어 여인과 얼굴을 마주했다.
“화아, 낮에 하려던 말이 있었는데, 잊고 있었어.”
소금남이 매끄러운 그녀의 볼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웃었다.
“강녕에 돌아갔다가 들었는데, 뭐라더라, 보리밭에서 벼를 거둔다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새옥이 놀라서 물었다.
“보리랑 벼를 같이 농사짓는 곳이 있다고요? 책에서 봤을 땐 원(元) 이후에나 쓰는 방법…….”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소금남은 그저 농사 용어인 줄 알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듣자 하니, 벌써 성공했다는군.”
그러고 가만히 있는데, 침묵하던 여인이 중얼거렸다.
“6월인데 이제 곧 이곳에서도 오전엔 온통 누렇고 오후엔 온통 푸르른 장면을 볼 수 있겠네요. 실로 백성들의 복이에요. ……그 사람이 한 걸까요.”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누구를 가리키는 말인지 알고 있었다. 소금남이 응, 하고 대답하자 여인이 살며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안도한 듯 말했다.
“역시 많이 성장했네요…….”
소금남도 안도하다가 다시 불안해져서 무심결에 임새옥의 손을 꼭 잡았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여인이 벌떡 일어나 앉더니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모종에는 비가 필요하고, 보리에는 해가 필요해요. 한 달은 맑고, 보름은 흐리고. 맑은 날과 비 오는 날을 모두 얻을 수는 없잖아요.
큰 공덕이지만,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자칫하면 벼와 보리 모두 망칠 수 있고요. 현대에서도 보리를 심었다가 벼농사를 망친 일이 자주 있다고 교수님이 그러셨는데…….”
“화아.”
소금남은 제가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고 후회하면서 여인을 잡아당겨 제 품에 안았다.
“강산현 일대에서만 심었고 다들 기뻐한다더군. 조정에 보고를 하되 각지에서 그 방식을 쓸 것을 건의하지는 않아서 설사 실패해도 영향이 크진 않아요.”
임새옥은 그제야 안도하며 소금남의 품에 가만히 안겼다. 살며시 토닥이며 자신을 위로하는 그의 마음이 느껴져서 왠지 미안해졌다.
“금가, 난, 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도 알잖아요. 농사일은 쉽다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일이에요. 사람이 제어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얽힌 일이 많아요. 나는 그 사람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대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당황하는데 소금남이 손을 꼭 쥐었다.
“알고 있어요, 알아. 화아, 안심해요.”
밤이라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지만, 안심되는 목소리였다. 임새옥은 그의 가슴에 딱 붙어서 허리를 끌어안고 달콤하게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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