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고된 여름날, 젊은 부부 집안에 즐거운 일
흥화?
임새옥은 얼떨떨하다가 자기가 전에 그쪽에 가서 목화 씨앗을 구해야겠다고 이야기했던 걸 떠올렸다. 순간 기뻐서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기억해줘서 고마워요. 정월 지나고 가도 돼요. 목화는 대추 싹이 난 다음에 심어도 돼서 급하지 않아요.”
“정월 끝나면 바로 갑시다. 며칠 일찍 가면 어때서.”
소금남이 대답을 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의 단추를 풀자, 임새옥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그리고는 하늘이 어두워진 걸 보고 전가아를 데리고 오려고 시녀를 불렀더니, 소금남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해 지나면 선생을 붙여줍시다. 계속 같이 자다니, 옳지 않아.”
“이제 만 네 살인데, 뭘 배워요. 아이는 노는 게 일이에요.”
자신의 말에 소금남의 얼굴이 흐려지자, 임새옥이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가요, 같이 가서 전가아 데리고 와요. 그 김에 어머님 저녁 문안도 드리고요.”
그렇게 사등을 든 두 시녀를 앞세우고 소 노부인의 거처로 향했다. 소금남은 가는 내내 이 여인의 작은 손에 이끌린 채 낮에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밤바람에 습기가 가득한 걸 보니 밤에 눈이 올 듯했다. 어둠이 내린 깊은 저택에 등불이 아른거리는 걸 보니 문득 집안의 온기가 온몸 가득 느껴졌다.
소 노부인의 거처에 도착했더니 불은 몇 개 꺼져 있었고, 노부인은 대시녀 둘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이가 쓰는 안쪽 방의 작은 침상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었다. 시녀들은 두 사람이 온 걸 보고 곧바로 차를 내왔다.
“전가아는 잔다. 오늘은 여기에 두어라.”
노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임새옥을 바라봤다.
“그 작은 집에서는 방이 별로 없어서 같이 잔 것이겠지만, 저렇게 큰아이를 이렇게 길들이면 되겠느냐. 아이는 내가 알아서 볼 테니 넌 가서 쉬어라. 계모라서 아이를 잘 안 돌본다고 할 사람은 절대 없다.”
임새옥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되었다.
“어머님, 아무리 그래도 천천히 해야죠. 밤에 울어서 편히 못 주무시면 어쩌려고요. 내일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노부인은 듣기 싫어서 얼굴을 구겼다.
“내가 친할미다. 들어온 지 며칠 안 된 계모보다 못할까 봐?”
임새옥이 뭐라고 하기 전에 소금남이 안색이 변해서 일어섰다.
“말끝마다, 계모, 계모. 전가아가 잊을까 그러시는 겁니까?”
“계모인 걸 어쩌라고! 계모라고 하지 않으면 친어미가 된다더냐? 늙은이가 하는 말이 듣기 싫으면 안 오면 될 것을, 누가 오라고 했다고 얼굴 내미는 것이냐! 한마디 했다고 눈치 주는 것이냐? 누구 보라고!”
노부인이 당장 혀를 차고 손가락질하며 혼내자 소금남은 얼굴이 새파래져서 임새옥을 일으켰다. 임새옥이 버티면서 가지 말라고 말리자, 소금남 혼자 나가버렸다. 말리지 못한 임새옥은 돌아서서 노부인을 바라봤다.
“어머님도 참. 왜 그러세요. 절 혼내시더라도 왜 저 사람 앞에서 하세요. 사내들은 하나같이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들인데, 보는 앞에서 저를 혼내시면 체면이 서겠어요? 일부러라도 어머님한테 한소리 할 수밖에 없잖아요.”
“흥, 그렇기는 무슨. 그냥 내가 싫은 것뿐이다.”
임새옥은 소 노부인 옆에 다가가 앉고서는, 노부인이 반쯤 마신 찻잔을 옆에 내려놓았다.
“저는 저 사람이 직접 고른 아내잖아요. 자기가 직접 고른 화물 같겠죠. 다른 사람이 싫어하면 체면이 서겠어요?”
그 말에 노부인과 시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헛소리 하나는 잘한다!”
노부인은 혼내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말은 거칠어도 이치는 맞잖아요, 어머님. 저 사람도 속으로는 어머님을 거스르고 싶지 않을 거예요. 제 앞에서 체면이 서지 않아서 그러는 거지. 저 나이가 되어서도 어머님께 혼나는 걸 처에게 보이고 싶겠어요? 우리 여인네 일은 우리끼리 해결해야죠. 사내가 끼어들면 옳은 것도 이상해진다고요.”
소 노부인이 헛기침을 하고 있는데, 임새옥이 신을 벗고 침상에 올라가는 걸 보고는 밀어내며 물었다.
“뭐 하는 게냐? 내가 전가아 하나 시중들면 됐지, 너까지 여기서 잘 생각이냐? 어서 돌아가라. 네 거처에 가서 자란 말이다.”
임새옥이 그 말에 바로 침상에서 내려오면서 웃어 보였다.
“어머님도 참. 저 때문에 어머님 아들이 화가 난 걸요. 돌아갔는데 저한테 성질내면 저는 참아줄 성격이 아니라서 바로 때려 버릴 건데요? 어머님, 우리가 싸운다고 그때 아들 편드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결국 시녀 몇 명이 밀어내자 임새옥은 그대로 방 밖으로 나가야 했다.
“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설사 노부인께서 아들 편들어도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너희들, 지금 한 말 꼭 기억해야 해. 나중에 딴소리하면 안 돼. 싸울 때 문 닫고 달아나기만 해 봐라.”
임새옥은 웃으며 돌아가면서 전가아가 혹시 잠자리를 가리면 아무리 늦어도 괜찮으니 바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시녀들도 직접 데리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노부인, 이제 안심하셔도 되겠어요. 저렇게 좋은 며느리는 다른 집에 없어요.”
소 노부인의 대시녀가 문을 닫고는 요와 이불에 향을 뿌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흥. 너도 뭘 받은 게냐? 편을 다 들고.”
그러다가 전가아가 뒤척이는 기척에 이야기를 접고 안으로 들어갔다.
임새옥이 소 노부인의 거처에서 나오자, 시녀들이 등을 들고 기다리는 게 보였다. 소금남은 보이지 않길래 화가 나서 먼저 돌아갔구나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큰 어른이 아이 같다고 웃으며 돌아왔는데 소금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행여 속이 답답해서 술 마시러 갔을까 싶어 찾아보라고 시녀들을 보냈다.
시녀 하나가 금방 돌아와서 말했다.
“부인, 원가가 그러는데 나가시지 않으셨대요. 술도 안 드셨고요. 부인께 말씀 남기셨대요. 걱정하지 말라고요. 화도 나지 않았고, 곧 돌아오신다고요.”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수롭지 않게 서재에 계시냐고 물으면서 직접 가보겠다고 하자, 시녀가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서재가 아니라, 그, 혜원(慧院)에 계세요.”
임새옥은 멈칫하고는 들어 올리던 겉옷을 내려놓았다.
그 시녀를 돌려보낸 후, 옥매는 화장을 지워주면서 임새옥의 안색을 살폈다. 뭐라고 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소금남이 돌아온 걸 알고 재빨리 다가가 휘장을 젖히자, 소금남이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방으로 들어왔다.
“눈이 오기 시작했더군.”
옥매는 옷을 받아놓고는 바로 밖으로 나갔고, 회랑에 있던 시녀들도 일제히 따라 물러갔다.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기척 말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머님은 원래 그래요. 언제나 기분 내키는 대로 하시지. 다른 사람 체면은 아랑곳하지 않아. 사람이 있든 없든, 마음에 안 들면 곧바로 욕부터 하고 손을 올리시고…….”
소금남이 등 뒤에서 그녀를 안고서는 답답해하자, 임새옥이 그의 손등을 토닥이며 웃었다.
“당신도 잘못했어요. 며느리 앞에서 어머님과 싸우면, 어머님 체면은 어쩌고요. 밖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그런 이치도 몰라요? 다른 사람 앞에선 영리한 사람이 왜 어머님 앞에선 어리석어져요? 당신이 화를 내도 어머니라서 받아줄 걸 알고 그러는 거잖아요.”
소금남은 얼떨떨해하다가 잠시 생각하고는 웃었다.
“당신 말이 맞네. 내가 어리석었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고 나직이 속삭였다.
“화아, 고마워요.”
임새옥이 오히려 겸연쩍어져서 웃는데, 소금남이 그녀를 그대로 안아 올려서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마주 닿은 입술이 떨어질 줄을 모르더니, 임새옥의 귓가에 뜨거운 속삭임이 들렸다.
“밤마다 아이 때문에……. 낭자, 오늘은 신혼 첫 밤처럼…….”
그녀의 몸은 이미 뜨겁게 달아오르고 잇새에선 무의식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오는데, 목에 아까부터 솜처럼 막혀 있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당신, 아까 어디에 갔었어요?”
온몸이 달아올라서 정신이 흐려지고, 이 여인과 하나가 되고 싶어 온몸이 떨리던 소금남은 귓가에 들리던 신음이 사라지고 이 말이 들리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방 안이 캄캄하게 어두워서 이토록 가까이에 있어도 얼굴은 잘 보이지 않고 거칠면서도 따듯한 숨결만 가슴에 느껴졌다.
“향 하나 피우고…….”
소금남이 천천히 말했다. 뜨거워졌던 몸이 순간 식어서 온몸에 힘을 풀고 여인 위에 그대로 엎드려서는 이불 위에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화아, 화났어?”
화가 났나? 그건 아니었다. 다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오늘에서야 자기가 그 사람을 줄곧 회피해왔다는 걸 알게 된 임새옥은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오래된 습관이에요. 연말마다 찾아가 향 하나 피우는 습관.”
그녀 곁에 옆으로 누운 소금남은 이 여인이 살짝 거부감이 생긴 걸 느낀 듯이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나직이 말을 이었다.
“임종 때, 내 손을 잡고 울며 부탁하더군. 나중에 내가 지음을 만나 금(琴)과 슬(瑟)처럼 좋은 짝이 되어 금슬처럼 살더라도, 박명했던 자기를 잊지 말고 해마다 향 하나만 피워달라고.”
바람에 날려온 싸라기눈이 문틀에 부딪히는 소리에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휘장 너머로 보이는 바깥은 칠흑처럼 어두운데 싸라기눈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잘게 부서진 발걸음 소리처럼 느껴져서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더는 고개를 들 용기가 나지 않아 소금남의 품을 파고들었다.
“화아, 화아.”
그녀가 두려워한다는 걸 느낀 소금남은 조금 이해할 수 없었다. 얼른 그녀의 매끄러운 등을 토닥여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한 사람이고, 또 나 때문에 심신을 다쳐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그러니 당신, 내가 그 사람을 기억한다고 나무라지 말아줘요.”
임새옥은 고개를 살짝 들고서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금가, 지금 그녀가 살아있다면, 분명 난 쳐다보지도 않겠죠? 설사 내가 쫓겨나서 처량하게 떠돌아다녀도, 나와 혼인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겠죠?”
사내가 잠시 침묵하더니 문득 한숨을 쉬었다.
“아마, 그랬을 것 같아.”
말이 끝나자마자, 앞에 누운 여인의 몸이 멀어지더니 안쪽을 향해 누웠다. 흐느끼는 것 같아서 다시 안으려다가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준 채 품에 안았다.
“우린 어릴 때 혼인한 결발 부부예요. 그 사람은 관리 집안의 대저아인데 나 같은 미천한 상인 때문에 부모를 거스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고. 화아, 화아, 난 그 여인의 흔적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어요. 화아, 언젠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간다면, 당신은 날 잊을 수 있겠어? 우리가 만난 적 없는 것처럼?”
소금남이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 사람은 내 마음에만 있지만, 당신은 내 마음뿐 아니라 내 눈에 있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에요. 화아, 우리 뒤돌아보지 말아요. 날 못 믿는 건가요?”
여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더 커지는 것 같아서 순간 막막하고 두려워졌다. 들여다보려고 일어나려는데 여인이 돌아눕더니 그를 꼭 안아주었다.
“억지 쓰면 안 되는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당신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나도 알아요, 알아. 내가 미안해요.”
소금남은 씁쓸 달콤한 마음을 억누르며 여인을 다시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사이에 턱을 대고서, 여인이 나직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당신에겐 내가 있고 나에겐 당신이 있어요. 우린 서로에게 다행인 거겠죠.”
다음 날 눈을 떴더니 방 안은 환한데 곁에 있는 이불에는 온기만 남아 있었다. 임새옥은 서둘러 옷을 걸치고 일어났다. 기척을 들은 옥매가 뜨거운 물을 들고 직접 들어왔다.
“소야가 일찍 일어나서, 노야가 데리고 눈 구경 가셨어요. 돌아와서 함께 식사하신다고 기다리시래요.”
옥매는 임새옥의 부은 눈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어젯밤 결국 울다가 잠들었구나.
임새옥은 민망해서 세수를 하고 경대 앞에 앉았다. 분과 연지로 세세히 가리고 막 머리카락을 빗는데 전가아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바쁘게 맞으러 나갔더니 전가아가 어느새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신발의 눈을 털어주면서 어제 잘 잤는지, 할머니를 깨우진 않았는지 물었더니 전가아가 헤헤 웃으며 아니라고 대답하고는 할머니 방에 쉬야를 가득했더니 욕하길래 도망쳐 왔다고 말했다. 임새옥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가서 보고 오라고 시녀를 재촉했다.
“내가 가봤어요. 전가아가 새벽에 난리를 부려서 지금 다시 주무시고 계세요. 귀찮게 하지 말라 하시던걸.”
소금남이 빙긋이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금세 얼굴이 붉어져서 퉁퉁 부은 눈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시녀들이 상을 차리자 온 가족이 밥을 먹고서 이틀 후 일정 이야기를 했다. 임새옥은 마당에서 눈을 가지고 노는 전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추울까 봐 걱정이네요. 전가아가 추워하면 어떡해요.”
“가는 곳마다 데리고 다닐 수야 없지. 그렇게 오냐오냐 키우면 안 돼요.”
전가아를 데리고 갈 생각이 아예 없었던 소금남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자, 전가아가 그 말을 듣고는 곧바로 고함쳤다.
“나 몰래 맛있는 거 먹으려고요? 안 돼요!”
그 말에 임새옥의 얼굴이 붉혀졌다. 침상 하나에서 두 부자가 고집을 부리며 맞서자 임새옥은 방 안에 작은 침상을 놓았다. 그제서야 두 부자 모두 겨우 만족했다. 아이는 거리끼는 게 없으니, 전가아가 그 일을 소 노부인에게 말했고, 소 노부인도 어른답지 않게 “두 사람이 너 몰래 맛있는 걸 먹는다.”고 전가아를 놀렸었다. 전가아가 난리를 부리는 바람에 온 집안 사람이 다 알게 되었고, 소금남은 모친과 한바탕했으며 임새옥은 며칠 동안 밖에 나가지 못했었다.
“매일 먹을 생각뿐이냐! 내일부터 학당에 나가라!”
소금남이 얼굴이 시커메져서 호통쳤다. 어찌 됐든 소금남을 무서워하는 전가아는 임새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다닥 달려와서 축축하게 젖은 손자국을 온몸에 남기면서 몸을 배배 꼬는 걸 보고 임새옥이야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가아가 신이 나서 달려가자 사환들이 다급하게 쫓아갔다. 고개를 들었더니 소금남이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어서 웃음이 났다.
“멀지도 않잖아요. 데리고 가요. 좋은 사내는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야 해요. 여자아이처럼 규중에만 있으면 되겠어요?”
“당신이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예요. 좋은 사내는 무슨, 그럼 글공부는 왜 안 시켜요!”
소금남은 미소 짓는 임새옥을 바라보며 짐짓 화난 체했다. 그러다가 시녀들이 다들 눈치 빠르게 자리를 피한 걸 보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면서 놀리듯 “한바탕 울고 나더니 전보다 예쁜데요.”라고 했더니 여인은 더 부끄러워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래는 정월 지나기 전에 출발하려고 했는데, 소 노부인이 정월엔 멀리 가는 게 아니라는 이유로 나가지 못 하게 했다. 소금남이 불평했더니, 노부인은 또 한바탕 욕을 하고는 다시는 성안현에 가지 말라는 말까지 한 바람에 이번에는 임새옥도 화가 났다.
“그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전 돈 없이도 잘 살아왔어요. 돈은 쓸 정도만 있으면 돼요. 어머님, 제가 돈 몇 푼 때문에 이러는 줄 아세요? 그냥 농사일이 좋아요. 돈 버냐고요? 정말이지 당장은 못 벌어요. 오히려 손해 볼걸요.”
“알고는 있구나? 난 모르는 줄 알았지!”
임새옥이 찾아와서 하는 말에 노부인은 불퉁스럽게 눈을 흘기고는 시녀들과 쌍륙 놀이를 했다.
“어머님, 직접 뭔가를 심어본 적 있으세요?”
임새옥이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노부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시녀 하나가 샐샐 웃으며 대답했다.
“부인, 노부인을 얕잡아 보지 마세요. 정원에 있는 꽃, 대부분 노부인이 손수 심으신 거예요.”
“흥. 네 부인에게 그런 말 할 것 없다. 농신 마마 아니시냐. 그딴 게 이분 앞에서 이야깃거리나 되겠느냐.”
임새옥은 웃으며 소 노부인의 어깨를 주물렀다.
“어머님, 직접 심은 꽃이 푸르게 잘 자라서 활짝 피면, 기분 좋으시죠? 돈이 문제던가요?”
노부인은 그녀의 손을 쳐내며 대답했다.
“흥. 알랑거리지 마라. 금가는 이제 다 커서 내 말 안 듣는다. 제가 가고 싶다는데 내가 어째!”
허락이라는 걸 아는 임새옥은 이내 빙긋 웃었다.
“나무가 아무리 커도 뿌리 없이 살 수 있나요. 며느리는 아직 그 사람을 못 뺏어가니 안심하세요, 어머님.”
시녀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고 노부인도 기분은 좋아졌는데 얼굴은 여전히 구기고 있었다.
정월이 지나고, 누이들을 비롯한 온 가족이 밥 한 끼 하고 배웅한다고 모였다. 임새옥이 성격이 좋은 것 같아도 빈틈이 전혀 없어서 이득을 보기는커녕 오히려 안 좋은 말만 들은 소금남의 누이들은 정월에도 친정에 그다지 드나들지 않았었다. 그러다 임새옥이 출타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 희희낙락해서 왔고, 소 대저는 웃느라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젓가락을 든 채, 할 일 없으면 자주 돌아다니라고, 집엔 우리가 있으니 올케는 신경 쓸 것 없다고 재잘거리다가 소 노부인이 젓가락을 내리친 후에야 조용해졌다.
다음 날, 부부는 두껍게 옷을 챙겨입고 옥매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소 노부인에게 안긴 전가아를 보니 임새옥은 많이 미안했다. 그날 눈을 가지고 놀다가 풍한이 들었는지, 처음엔 기침하다가 나중엔 열이 났다. 의원에게 보이고 며칠이나 약을 먹은 후에야 겨우 나았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소 노부인은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그 표정, 무엇이냐! 내가 이 아이 친할미다! 내가 구박하기라도 할까 봐?”
소 노부인은 임새옥의 표정에 언짢아져서 얼굴을 구기고 말하고는 전가아를 흔들어댔다.
“아가, 우리는 가지 말자꾸나. 시골이라 재미있는 것도 없단다. 힘들기만 해. 또 춥고. 할미랑 재미있는 것 구경 가자꾸나.”
고개를 갸웃하고 저울질하던 전가아는 먹는 것과 재미있는 것을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다가 금세 소금남과 임새옥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맛있는 것 가지고 돌아오라고 당부하고는 곧바로 놀러 가자고 노부인을 끌어당겼다.
“어머님! 뭐든 다 오냐오냐해주면 안 돼요!”
임새옥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 노부인 뒤에서 떼쓰는 전가아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전가아! 말 안 듣기만 해 봐. 데리러 안 올 거야!”
전가아는 깜짝 놀라서 떼를 쓰는 것을 곧바로 멈췄고, 노부인은 혀를 찼다.
“대낮부터 웬 재수 없는 소리냐! 가라, 어서 가! 열흘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찾으러 갈 거다!”
열흘 후, 소 노부인은 정확하게 돌아온 아들과 며느리를 맞이했다. 하지만 부부는 며칠 머무르지도 않고 금 같은 씨앗 상자를 들고 전가아도 데리고 성안현으로 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 시녀들에게 지시해서 쉴 새 없이 먹을 거며, 입을 거며, 쓸 거며, 필요한 걸 마차 한가득 싣는 소 노부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바라보던 임새옥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찬가지로 말이 없는 소금남을 쿡쿡 찌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지 말고, 당신은 여기 있어요.”
소금남은 그녀를 한 번 보고는 손을 잡았다. 망설이는 얼굴이었다.
“청명 지나면 목화를 심을 거예요. 과일나무 봄맞이 준비하고 나면 별다른 일도 없어요. 당신이 왔다가 갔다가 해야 해서 힘들까 봐 걱정이지만요.”
임새옥은 그의 손을 마주 잡으며 고개를 들고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여름엔 더우니까, 어머님을 모시고 피서 와요. 가을 지나고 다 같이 돌아오면 되죠. 어때요?”
“이렇게 합시다. 일단 내가 바래다주고 나서 다시 이야기해요.”
소금남이 그녀의 겉옷을 여며주는데 소 노부인이 언제 곁에 왔는지 헛기침했다.
“사람들 앞에서 체통 없이!”
두 사람은 화들짝 떨어졌고, 임새옥이 입을 떼려는데 노부인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됐어. 어서 출발해라. 정월 내내 속 시끄럽다. 얘들아, 이제 우리는 자유다. 어서 성으로 놀러 가자꾸나.”
노부인이 돌아서서 웃으며 하는 말에 시녀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부부가 출발하는 것도 보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들 안으로 들어갔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녀 아이들 사이에서 노부인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는 것 같은 모습에 임새옥은 마음이 쓰렸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어머님 성격이 원체 다정했다가 냉랭했다가 해요. 같이 없으면 그리워하면서 곁에 오래 같이 있으면 또 이것저것 다 마음에 안 들어 하시고. 안 돌아올 것도 아니고, 당신을 바래다주고 나는 곧바로 돌아올게요. 이제 마음 놓여요?”
소금남은 그녀의 손을 잡고서 마구 뛰어다니는 전가아를 안아 올렸다.
“가자. 농사지으러 가자.”
마차로 이틀 달린 후, 큰 배로 갈아타기 위해 부두로 향했다. 부두는 여전히 인파로 붐볐다.
전가아를 안은 임새옥은 자신을 꼭 감싸고 있는 소금남에게 말했다.
“가서 일 봐요. 난 경성엔 같이 안 가요.”
소금남은 뒤에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전가아가 또 뭘 봤는지 잡으려 버둥거리는 바람에 임새옥이 비틀거렸다.
“조심해요.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소금남은 서둘러 전가아를 안아가며 임새옥을 부축했다. 앞에 징, 북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어보니 관선(官船) 한 척이 기슭에 도착해서 지나가는 배들이 모두 뿔뿔이 피하고 있었다. 관병들이 관선에서 줄줄이 내렸고, 뭍에도 관아 사람이 나타나서 부두를 정리했다.
“들어가서 옛날 이야기해줘, 옛날이야기.”
갑판을 잠시 둘러본 전가아는 지루한 듯 안으로 들어가자고 임새옥을 잡아끌었다. 바람도 불고, 경치도 충분히 본 임새옥은 전가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다른 백성들과 달리 관리들이 배웅하고 마중하며 공연히 떠들썩한 광경은 어차피 관심이 없었다.
“대낭자, 대낭자. 혹시 조 대낭자십니까?”
저 멀리서, 다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걸음을 멈췄다. 이미 선실 안으로 들어갔던 소금남도 소리를 듣고 다시 나왔다. 부부 두 사람은 나란히 뱃머리에 서서 배쪽으로 달려오는 아역 하나를 바라봤다.
“당신…… 장이랑?”
그 사람이 다가오자 임새옥은 한참을 빤히 쳐다본 후에야 누군지 알아봤다. 정주 관아의 장이랑이었다. 전보다 조금 마른 장이랑이 겨울옷을 입고 싱글벙글 달려와 예를 갖췄다.
“아직 기억하시는군요.”
그러고 소금남에게도 인사했다.
“장이랑, 어떻게 여기에 온 거예요? 저건, 주 대인의 배인가?”
임새옥이 웃으며 묻고는 저쪽을 바라봤다. 관선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서 있는데 멀어서 잘 보이진 않고 갖가지 색 관복만 보였다.
장이랑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농사 순찰을 나오신 경성의 대인이 정주도 지나가셔서 며칠 동안 제가 호위했습니다. 오늘 교대합니다. 제가 눈썰미가 좋아서 다행이군요. 얼핏 보니 대낭자 같아서 냉큼 쫓아왔지요.”
그랬구나. 임새옥과 소금남이 데려다줄 테니 들어와서 앉으라고 하자, 장이랑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딜요. 대인들 말씀도 기다려야 하고, 동료도 있는걸요. 같이 돌아가면 됩니다. 대관인과 대낭자께 수고 끼칠 것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 큰 소리로 불렀고, 장이랑은 시간이 되시면 정주에 오라고 말하고는 인사를 고했다.
“대낭자 덕에 올해 곡식을 수확했습니다. 굶어 죽진 않게 되었습니다!”
장이랑이 우직하게 웃어 보이고는 붉게 그을린 얼굴을 더 붉히면서 허둥지둥 돌아갔다.
장이랑이 무리로 돌아가는 것도 봤고, 선실 안에 있는 전가아가 고함치고 난리 난 바람에 임새옥은 웃으며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보니 소금남은 아직 뱃머리에 서서 눈을 찌푸리고 관선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시선을 따라 바라보다가 멈칫했다. 저쪽 뱃머리에 홀로 서 있는 키가 크고 마른 관리 하나가 뒷짐을 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그 사람의 생김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도, 누구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유소호였다.
관선이 이미 출항하여 부두에서 빠져나가자, 갑판 위에 가득하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임새옥은 그저 멍하니 그쪽을 바라봤다. 그 배는 징, 북소리와 함께 서서히 움직이더니 갈수록 속도를 높이며 남쪽으로 향했고, 그 사람도 빠르게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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