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다시 신혼이 된 부부, 온정이 넘쳐흐르다
임새옥이 족발을 슥슥 찢어서 접시에 올려놓자, 전가아가 곧바로 들고 먹었다. 옥매는 임새옥의 기름진 손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노부인은 대방(大房)이시고, 아래로 이방 이부인(二夫人)과 삼방 삼부인(三夫人)이 계세요. 이노야와 삼노야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각자 아들 한 분을 두셨는데, 이 어멈은 이부인 댁 사람이에요. 음식 솜씨가 좋아서 집으로 불렀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갑자기 미쳐서는 헛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어요.”
임새옥이 족발 하나를 다시 찢어서 옥매에게 건넸다.
“옥매도 맛볼래? 우리 어머니 솜씨가 매우 좋거든. 어렵게 두 개 얻어왔어.”
옥매는 손사래를 치려다가 멈칫하고는 고맙다고 인사하며 하나를 집어 먹었다. 임새옥이 손을 씻은 걸 보고는 재빨리 손수건을 건넸다.
“제가 소홀해서 소야를 잘못 가르친 걸 모르고…….”
임새옥이 피식 웃으며, 며칠 바람을 맞아서 얼굴이 튼 옥매를 돌아보았다.
“교훈이 작지 않네.”
옥매는 쓴웃음 지으며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는 그래도 머리를 써서 이틀째에 수건을 썼죠. 저보다 더 심한 애들도…….”
임새옥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래도 다들 똑똑한 편이야. 뭘 말하려는지 바로 눈치챘잖아. 역시 하나같이 여우구나.”
옥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바느질을 빼곤 일이라곤 별로 한 적이 없는 종비들이 며칠 동안 눈이 시뻘게지게 일을 했다. 몇 사람이나 된다고. 그러니 그 어멈이 견딜 수가 있나.
“부인, 이 방법은 때리고 욕하는 것보다 무섭네요.”
옥매가 웃으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그녀는 화항에 앉아서 돼지머리를 치우며 답답한 듯 말했다.
“정말 재미없네. 그런 속셈 부릴 생각도 없거든.”
“부인, 어떻게 벌하실 건가요?”
“팔아.”
임새옥은 일어서서 궤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종비들의 노비 문서가 담겨 있었다. 이번에 남겨두고 간 사람은 모두 가노는 아니었다. 노부인이 상자를 전해 줄 때 모습이 떠올랐다. 얼마나 비아냥거리던지.
‘대낭자, 잘 가지고 있으렴. 이건 노비 문서다! 노비 문서! 지전처럼 태우면 안 된다!’
임새옥이 입을 비죽였다. 한 달 내내 욕하시고도 부족하신가. 한 번 잘못한 걸, 평생 물고 늘어지시려고?
“판다니, 무얼?”
사내 목소리가 갑자기 들리더니 소금남이 싸늘한 바람을 몰고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옥매가 걸음을 떼기도 전에 임새옥이 사내에게 거의 매달릴 것처럼 다가가자 옥매는 당황해서 서둘러 돌아서서 나갔다.
“오늘쯤 돌아올 것 같더라고요.”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녹색 융창의를 벗겨주었다. 환하게 웃는 여인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소금남이 바로 품에 안으려고 하는데, 전가아가 아버지! 하고 부르면서 달려와서 바로 손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차 한잔하고 안아줘요. 당신 몸이 아직 차요.”
임새옥은 뜨거운 차를 건네고는 전가아의 양손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아버지, 칼, 창, 깃발, 말, 사 오셨어요?”
전가아가 소금남의 목을 끌어안고 다급하게 물었다. 소금남이 싱긋 웃으며 아이의 코를 쓸어내렸다.
“그것 때문이었구나!”
“금단은 있는데 나는 없는걸요. 전투할 때 나만 졸병이야! 나도 장군 할 거야!”
“사 왔다. 사 왔어. 원가에게 가서 받아…….”
소금남이 웃으며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가아가 쪼르륵 내려가서는 짧은 다리로 쿵쿵 달려가자 어멈이 곧바로 뒤쫓아갔다.
방에 두 사람만 남자, 임새옥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바라보면서 웃기만 하니, 소금남도 마주 보며 웃었다.
밖에 있는 동안 얼마나 이 여인이 보고 싶었던지.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가득했던 그리움이 말이 되어 나와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 우물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살이 좀 오른 건가?”
임새옥이 피식 웃으며 눈을 흘겼다.
“수발드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당연하죠.”
말이 끝나자마자 소금남이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허리를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얼마나 살이 올랐는지 좀 볼까…….”
임새옥이 얼굴이 붉어져서 허둥지둥 사내의 손을 밀어냈다.
“대낮에! 다 보고 있는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역시나 발걸음 소리가 들려서, 할 수 없이 소금남이 급히 그녀를 놓아주는데, 시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노야께 올릴 탕 가지고 왔어요.”
“그래.”
시녀는 고개를 숙인 채 탕을 들고 와서 내려놓고는 후다닥 나갔고, 임새옥은 소금남이 탕을 마시는 걸 바라보다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소금남은 그릇을 내려놓고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고 의자에 앉았다.
“당신 솜씨야 나도 알아요. 힘들지 않으면, 다 쫓아내 버릴까?”
“정말요? 이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고요? 알아 두어야…….”
웃으며 농담하다가 소금남의 안색이 살짝 변하는 걸 보고 이런 농담을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에도 없이 시녀를 이낭으로 들인 일은 그의 마음의 병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새옥은 혀를 날름하며 양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
“혼나야겠네, 혼나야겠어. 잘못했어요. 화내지 말아요.”
소금남이 금세 표정을 풀고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에서는 잘 먹고 잘 자며 잘 지냈는지 물었다. 몇 마디 하지 않았는데 소금남의 손이 허리를 쓰다듬는 게 느껴지더니 어느새 옷 안으로 들어왔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큰 손의 감촉이 피부에 닿는 순간 몸이 바르르 떨려서 버둥대며 일어섰다.
“부끄러워요.”
“낭자!”
이 보드라운 피부를 쓰다듬고 있으니 몸도 마음도 떨리는데 쉽게 놓아줄 리가 있을까. 귓가에 부드럽게 애원하는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임새옥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손가락까지 떨리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피가 혈관에서 빠르게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주저하는 사이, 소금남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차가운 입술이 그녀 입술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며 빨아당기자, 그녀의 손이 저도 모르게 소금남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소금남의 큰 손은 어느새 허리를 지나 위로 올라갔다. 다른 손은 그녀가 뒤로 쓰러지지 않도록 등을 받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해가 질 텐데…….”
임새옥은 잠시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타서 고개를 뒤로 힘껏 젖히며 간절히 채근하는 그를 피했다.
어째서인지, 밖에 항상 누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집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람이 없는 곳이 거의 없었다. 후원엔 어멈들이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리고, 문 앞엔 시녀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거처 앞에도 항상 살금살금 걷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긴장을 알아챈 소금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솟구친 욕정을 억눌렀다.
“알았어요. 당신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임새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 헐떡이느라 숨 가쁜 가슴, 붉어진 얼굴에 웃음이 터져서는 뺨에 살며시 입을 맞췄더니 또 허리를 안으려 해서 서둘러 밀치고 달아났다.
“밥하러 가요!”
여인이 나가기 전에 돌아보며 싱긋 웃자, 소금남은 참지 못하고 다시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여인은 벌써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온 정신이 딴 데 팔린 채로 하는 식사였다. 전가아는 진짜처럼 생생하게 만든 작은 칼, 창, 깃발, 말을 만지작거리며 ‘죽여라, 죽여라, 공격, 공격’ 같은 말을 수시로 웅얼거리며 밥을 먹었다.
“전가아! 다 먹고 놀아야지!”
임새옥이 밥을 더 담아 주며 말하자 전가아는 다 먹었다고 외치며 보물을 끌어안고 내려가려 했다. 임새옥이 바로 눈을 부릅떴다.
“안 돼! 겨우 반 그릇 먹었잖아! 다 안 먹으면 뺏어 버릴 거야!”
“아버지도 반 그릇밖에 안 드셨어요!”
전가아가 가리키며 하는 말에 무심하게 음식을 씹던 소금남은 사레가 들릴 뻔했다. 임새옥이 묘하게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자 결국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그럼 조금만 더 먹을 거야.”
전가아가 내키지 않는 듯 임새옥을 바라봤다.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가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렵게 식사를 마친 후, 소금남은 시간이 왜 이렇게 더디게 흐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여인은 우선 장부를 가지고 온 옥매와 함께 장부를 들여다보며 돈을 아껴야 한다고 한바탕 잔소리했다. 그러는데 어멈 하나가 울며 찾아왔다. 자기는 노부인의 사람이라서 부인은 팔지 못한다고 하면서.
“웃기는 소리네. 우리 집인데 내가 결정을 못 한다고? 그러고도 우리 집이라고 할 수 있겠어? 노부인 사람? 천황 사람이라도 안 되지. 이곳에 있는 이상, 내가 결정해.”
곁에서 기다리던 어멈들은 귀찮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남주인의 얼굴을 보고는 재빨리 그 어멈을 끌고 나갔다.
“옥매, 피곤하다. 오늘은 다시 찾아오지 마라.”
소금남도 더는 참지 못하겠어서 얼굴을 굳힌 채 말했다.
옥매가 후다닥 장부를 정리하고 웃음을 참고서 얼굴을 붉히며 나갔다. 밖에 발걸음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사람들이 모두 멀어졌다.
“시녀들이 당신을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임새옥도 얼굴이 붉어졌다. 소금남은 어느새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고 내실로 들어갔다.
“내가 집에 열흘 넘게 없었는데, 보고 싶지도 않고?”
폭신폭신한 큰 침상에 여인과 함께 그대로 쓰러진 소금남이 그녀의 옷을 풀면서 속삭였다.
임새옥은 귀를 간지럽히는 그의 목소리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져 저도 모르게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웃옷이 풀어 헤쳐지고 따듯한 입술이 몸에 닿았다. 야릇하고 부드러운 기운이 흐르는 가운데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몸을 계속해서 탐하자 임새옥이 부르르 떨면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안 돼요…….”
소금남이 그녀를 밀어서 다시 눕히며 중얼거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상관 안 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쿵쿵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다급하게 외치는 어멈 목소리가 들렸다.
“소야, 들어가면 안 돼요…….”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튈 듯이 일어나서 허둥지둥 제 매무새를 고쳤다. 전가아가 벌써 문을 열고 들어와서 눈을 비비며 말했다.
“대저아, 나 졸려. 여기서 잘래.”
커다란 침상에 세 사람이 나란히 누웠고, 맨 안쪽에 있는 임새옥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바깥쪽에 누운 소금남은 이미 잠든 전가아를 얼굴을 잔뜩 구기고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당신이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잖아…….”
임새옥이 킥킥 웃으며 전가아를 사이에 두고 눈을 깜빡이자, 갑자기 커다란 손이 이불 속에서 스윽 다가오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손가락이 얽히면서 방 안에는 가쁜 숨소리가 가득해졌다.
“우리 바깥으로…….”
임새옥의 몸이 서늘해지는가 싶더니 이불이 휙 젖혀졌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소금남이 그녀를 그대로 안아 올리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겨울 달빛이 탁자 위에서 뒤엉킨 두 그림자를 뿌옇게 덮었다. 거친 호흡과 함께 가느다란 신음이 방 안에 은근히 퍼져나갔다. 창밖 나뭇가지 위에 걸린 겨울 달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구름 뒤로 모습을 감췄다.
섣달 말, 변하 물이 얼어서 소가 사람들은 육로를 통해 강녕으로 돌아갔다. 집 지킬 일고여덟 명만 남기고, 온 식솔을 데리고 말과 마차 열 몇 대가 우르르 관도를 따라 길게 줄지어 내려갔다.
임새옥은 전가아가 조잘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휘장을 젖혔다. 전가아는 금단과 어린 벗들이 준 이별 선물을 자랑하고 있었다. 선물이라 봐야 다리가 없거나 꼬질꼬질한 인형들, 심지어 양 똥 덩어리 같은 검은 대추도 있었다. 창밖 논밭에는 가을보리가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에는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지금 그들은 하남 경내를 벗어날 참이고 조금만 더 가면 큰 배로 갈아타서 남으로 내려갈 예정이었다. 피해를 입은 현을 지나갈 때면 임새옥이 재난 후 콩, 보리가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해서 거의 성 안에서 요기하지 않고 시골 노점을 찾아서 갔다. 그 바람에 이런 생활을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소가 시녀, 어멈들이 앓는 소리를 해댔다.
“이번에 돌아가면 많이 쫓아낼 거라고 하던데.”
이 나간 큰 그릇을 들고 차를 마시던 종비들이 옹기종기 보여서 추위를 피하며 속닥대고 있었다.
“그럼 더 좋지. 난 진짜 더는 싫어…….”
누군가 작게 하는 말에 쉿, 소리가 들렸다. 붉은 직금(織金) 웃옷, 갈색 자수 치마에 두건을 두른 임새옥이 나와서 전가아를 찾았다.
“부인, 소야가 원가를 졸라서 밭에 새 잡으러 갔습니다.”
한 어멈이 웃으며 말하자, 임새옥은 눈살을 찌푸리자 아이고, 하고는 아이를 찾으러 가려 했다. 걸음을 떼기 전에 양털 모자를 쓴 원가가 전가아를 안고 돌아왔다.
“원가 바보! 차라리 금단이 더 똑똑해. 새도 못 잡아!”
전가아가 입술을 내밀고 투덜거리면서 손에 쥔 보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원가는 머쓱하게 웃으며 달려갔고, 임새옥이 성큼성큼 다가가 전가아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걸 뽑으면 어떡해? 안 그래도 힘들게 자라고 있는데, 뽑기까지 하면…….”
문득 손에 쉰 보리를 자세히 살피니, 보리가 대부분 유난히 누렇고 시들시들했다. 임새옥은 눈살을 찌푸린 채 몇 번이고 살폈고, 그 사이 전가아는 손에 든 걸 진작 내버리고 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올해 겨울엔 아직 눈도 안 왔는데.”
임새옥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고개 숙인 채 보리를 살폈다. 대부분 분얼과 곁뿌리가 매우 적었고 아예 없는 것도 있었다. 미간이 점점 더 찌푸려졌다.
(※분얼: 종자에서 최초로 형성된 가지 및 그 이후 형성된 모든 지상부 가지. 새끼치기에 쓸 마디 부분)
“전형적인 수축 모종이야.”
“왜 그래? 병해라도 있나?”
소금남의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여인은 웅크리고 앉아 손에 보리 모종을 들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건 아니고요.”
임새옥이 일어서서 손을 털었다.
“나랑 밭에 한 번 다녀와요, 부군 대인.”
왕강은 하남 서남부 진평현(鎭平縣)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 지역은 산비탈 구릉 지대로 수리 조건이 원래 좋지 않아서 10년에 9년은 가뭄이 들었고, 그래서 기우제는 해마다 열어야 하는 의식이 되었다. 여름에 비가 충분히 내려서 올해는 열지 않아도 되겠구나 했는데 입동 이래 눈이 하나도 내리지 않을 줄이야. 밭이 말라서 다 갈라질 지경이었다.
“용왕신을 모십시다!”
이장이 징을 치며 집집마다 지나쳤다. 뒤엔 사내 넷이 소쿠리를 들고 있었는데, 징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나와서 많든 적든 돈을 소쿠리에 던져넣었다.
“삼담야(三潭爺), 보우해주소서! 비를 내려주소서!”
(※삼담三潭: 진평현 이용향 오타산에 있는 못. 산 정상, 허리, 산자락에 각각 연못이 있고, 대담, 이담, 삼담이라고 부름. 오타산에 ‘삼담용왕묘’가 있다.)
이장의 징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다시 서서히 멀어졌다. 징 소리에 사람들의 고막이 징징 울렸다.
심각한 얼굴로 길가에 서 있던 소금남과 임새옥은 은자 몇 개를 던졌고, 덕분에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나가던 분 같은데, 감사합니다, 대관인, 대낭자.”
이장이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하는데, 여인이 갑자기 물었다.
“어르신, 저쪽에 연못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물을 끌어오지 않나요?”
그 말에 다들 안색이 변해서는 이장이 재빨리 말했다.
“몰라서 하는 말은 탓할 수 없지. 부인이 가현후(嘉顯候)를 모르니 탓할 수 없지, 없어.”
이장은 온화한 얼굴로 임새옥에게 그 연못은 조정에서 봉작을 내린 기우제를 올리는 영험한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삼담의 삼담야는 조정에서 ‘소천후(掃天候)’로 봉한 분인데, 그 연못의 물을 어찌 건드리겠나.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대의 농업은 다사다난하여 후세에 보기에 우매한 미신이라고 비난할 만한 각종 활동이 있었다. 그중엔 다소 비굴한 기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르신, 그러지 말고 물을 좀 빌릴 수 있는지 삼담야에게 빌어 보는 건 어떠세요?”
임새옥은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뙤약볕에 머리가 다 어질거렸다. 그녀는 아까 봤던 보리를 떠올리며 “얼마 못 기다릴 텐데…….” 하고 중얼거렸다.
임새옥의 말에 사람들은 언짢아했고, 개중엔 아까 그녀가 내놓은 은자를 되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어디에서 온 사람이요. 안 그래도 힘든데 신령을 거스르란 말을 하다니. 죽으라는 건가! 가시오, 가!”
소금남이 안색이 굳어서 임새옥을 데리고 가려는데 그녀가 잠시 말렸다. 그리고는 큰 용기를 내서는 안색이 안 좋은 이장을 향해 예를 갖췄다.
“저는 성안현 조씨라고 합니다. 잘못한 게 있다면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 주세요, 어르신.”
사람들은 그녀가 이름을 밝히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었다.
“그것도 좋겠군. 삼담야가 죄를 물으시거든 그쪽을 찾아가면 되겠어. 우리는 연루하지 말라고.”
임새옥은 대답하지 않고 다시 이장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르신, 삼담야는 영험한 분이니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실 거예요. 공물도 넉넉하고, 성의도 가득하니, 일단 잘 빌고 물을 끌어와서 해갈하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이장이 불현듯 얼떨떨한 얼굴로 그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더니 뭔가 깨달았다는 듯이 “어, 어, 다, 당신…….” 하며 급한 나머지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임새옥이 생긋 웃으며 “성안 조씨예요.” 하고 다시 말했다.
“농신 마마! 삼담야가 나타나셨다!”
이장이 별안간 무릎을 꿇자 임새옥은 깜짝 놀라서 부축하려 했고, 이장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은 넋이 나갔다.
“대낭자, 대낭자. 우리 마을 백팔십여 가구가 이 척박한 땅에 기대서 살고 있소. 자비로운 대낭자, 어서 방도를 생각해 주시오. 이 늙은이, 대낭자를 위해 장수 비석을 세워드리겠소.”
환갑이 가까운 이장이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있었다. 임새옥은 부축하기도 그래서 얼른 일어나라고 연신 말했다. 사람들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더니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큰일도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임새옥이 난감한 얼굴로 소금남을 바라봤다. 소금남이 빙그레 미소 지은 채 보고 있기만 하자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서 일어나라고 해요!”
“대낭자는 세상에 강림한 농사 신인데, 소인이 어찌 감히 무례를 범하겠습니까.”
놀림을 받은 여인의 얼굴이 붉어진 걸 본 소금남은 황급히 목을 가다듬었다.
“여러분, 어서 일어나세요. 대낭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길을 떠나야 해서 마을로 들어가자는 요청은 사절했더니, 이장이 또 울 것 같은 모양새라 임새옥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정말로 큰일 아니에요. 가서 삼담야에게 비세요. 빌고, 연못을 끌어다가 밭에 물을 주면 돼요.”
“대낭자, 물을 줬더니 밭이 얼어 땅이 다 죽었다는 말을 들어서, 물 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장이 눈물을 닦으며 말하고는, 돈 모을 생각도 없이 사람들과 함께 임새옥과 소금남을 데리고 마을 입구 큰 나무 아래로 가서 앉았다.
“지금은 날씨가 좋잖아요.”
임새옥이 하늘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사시(巳時: 오전 9-11시)에서 미시(未時: 오후 1-3시)까지만 주면 돼요. 오는 길에 이 마을 남쪽의 밭을 살펴봤는데 모래가 많아서 심하게 가물어 보이는 것뿐이에요. 물만 주면 바로 스며들어요. 땅이 갈라지겠지만, 걱정할 것 없어요. 금방 좋아져요.”
그녀의 말에 일부는 기쁜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일부는 더 슬퍼했다.
“그쪽 땅은 그래도 괜찮은 편인데, 우리 북쪽은 보리가 더 누렇게 떴습니다.”
임새옥은 잔뜩 기대한 얼굴로 빙 둘러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미간을 찌푸린 채 바라봤다. 불현듯 전생에 지도 교수와 함께 빈곤층을 만났을 때를 떠올리다가 찬 바람이 불어와 몸서리를 치며 정신을 차렸다. 눈치 빠른 사람은 어느새 자기 밭에 가서 보리를 뽑아서 헐레벌떡 달려왔다.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더니 마흔 넘은 장정이 얼굴을 붉혔다.
“잘 자라고 있네요. 하지만 땅 때문이에요. 땅을 제대로 안 갈아서 심하게 말라서 그래요.”
임새옥이 보리를 뒤적이며 살펴보다가 손으로 비벼 보았다.
“심하게 뜬 데다가 얼었어요. 연초에 물을 주지 않으면 눈이 온 데도 7할은 손실할 거예요.”
그 말에 다들 탄식했고, 어서 삼담야에게 빌자고 이장을 재촉했다. 이장도 더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일어나 임새옥을 향해 웃음 지었다.
“대낭자, 대낭자가 삼담야에게 빌어주시겠소? 흠, 흠, 같은 신선이니…… 말도 통할 것이고.”
임새옥은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내가 삼담야를 어떻게 알아요?!
하지만 민간 풍습을 공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이 응하지 않으면 이 마을 사람들은 절대 물을 끌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심각한 얼굴로 일어서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물론이지요.”
이장은 크게 기뻐하며 제사용품을 준비하라고 마을 사람을 재촉하고 자기가 직접 삼담묘로 안내했다.
“대낭자, 먼저 가시지요.”
소금남은 웃음을 참으며 임새옥을 향해 공손히 말했고 임새옥도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몸과 함께 가자. 잘 모시면 네게도 큰 복이 내릴 것이다.”
이장이 멀어진 뒤에 두 사람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손을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기우제를 직접 체험한 임새옥은 얼굴빛을 단정히 하고 ‘동료’ 삼담야와 잠시 교감을 나눈 후 뒷문으로 나왔다. 물을 끌어다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일제히 제게 절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임새옥은 혹여 제 수명이 줄까 봐 냉큼 비켜섰다.
“기억하세요. 물 줄 때 조금씩 뿌려야 해요. 그래야 얼지 않아요. 정 안 되는 곳은 지푸라기 같은 것으로 덮어두세요. 그래야 수분은 주되 얼지 않아요.”
배웅을 끝낸 후에도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고 서 있자 임새옥이 재차 당부했다. 이장이 또 무릎을 꿇으려고 하자 임새옥은 서둘러 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이제 천명을 기다리세요.”
마차에 타고서도, 돌아가지 않고 저 멀리에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임새옥은 아직 붉은 눈시울로 코를 훌쩍이며 혼잣말했다.
“사실 정말로 큰일도 아닌데. 그냥 물을 안 주면 죽을까 봐 무섭고, 물 주면 얼까 봐 무서워서 못 움직였던 것뿐이에요. 게다가 기정(機井: 펌프식 우물)도 없고.”
“기정이 뭐야? 집에 있는 우물이랑 달라?”
전가아가 궁금한 듯 묻자 임새옥이 흠흠대며 대답했다.
“같아, 같아.”
전가아는 곧 흥미를 잃고 혼자 놀았다.
일행이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동안, 주위에 흩어진 마을에서 간헐적으로 폭죽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한 해가 또 시작되었다.
나라에 연이어 찾아온 액운에서 벗어나기 위해, 황제는 내년 연호를 원풍(元豐)으로 바꾼다고 성지를 내렸다. 황제가 연호를 바꾸는 건 흔한 일인데, 신법, 구법 다툼이 이어지는 신종 대에선 한바탕 동요가 일어났다. 사람들 눈엔 황제가 왕안석의 신법에서 벗어나려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한순간 경성, 심지어 지방까지 암류가 맴돌았다.
그러나 조당에선 누구도 감히 기색을 내지 못했다. 한창 기세등등한 재상 오충이 옛 사건 하나로 채확 손에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지금 조정은 자기 자리를 보전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특히 다른 재상 왕규는 아예 병을 핑계로 등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는 지금 채확이 보고하는 안건을 들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의 시선은 저 아래 유소호에게 향해 있었다. 예전처럼 마음에 들어 하는 부드러운 눈빛이 아니라, 진정한 제왕가의 위엄이 보이는 서늘한 눈빛이었다.
현재 유소호는 이미 등청할 자격이 없지만, 이번에는 불러들여서 온 것이었다. 다소 아득한 표정, 창백한 얼굴이었다.
“유 경, 가을보리 병 재해는 어찌 되어가는가?”
황제가 천천히 하는 말에 유소호는 뼈를 파고드는 한기를 느꼈다.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 섣달이 되자마자 가을보리가 누렇게 떴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유소호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 있었다. 다쳐서 집에서 쉬어야 하기도 했고, 기분도 좋지 않아서였다. 거기에 강등도 됐으니 부하가 가지고 온 양본(樣本: 샘플)을 보고는 곧바로 손을 내저으며 작년의 보리 재해가 또 생긴 것이니 하던 대로 하라고 심드렁하게 지시했다.
기우제라는 건 원래 신성한 것으로, 지방 관리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소동파가 풍상현에서 비가 오길 빌면서, 태백 산신에게 관직을 내리라는 상주서를 황제에게 올렸다. 그래서인지 기우제에 관련된 상주서가 갈수록 황제 앞에 더 많이 나타났고, 사람을 불러 물어봤더니 병 재해가 아니라 순전히 가뭄이라지 않은가!
“신, 죄를 지었습니다!”
유소호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황제는 이번엔 정말로 화가 났다. 지체된 바람에 하남 경내 보리가 대규모로 시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진평현에서 적시에 상주서를 올린 덕에 각지에서도 분분히 강물을 끌어다 밭에 물을 댔다. 물론 논쟁도 많았다. 겨울에 물을 대면 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황제는 백관을 거느리고 몸소 기우제를 지냈다. 진평현에서 가장 먼저 가뭄을 해소했기에, 다급히 진평 현령을 소환해서 동상이 심한지 여부를 물었다. 대낭자가 상세히 알려준 덕분에 물을 뿌리는 식으로 조금씩 주어서 언 부분은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는 보고가 있고서야 논쟁이 수그러들었다.
“짐에게 대낭자가 있어서 다행이구나.”
한참 말이 없던 황제가 갑자기 그 말을 내뱉자, 계단 아래 있던 유소호가 주먹을 꾹 쥐고는 옷깃을 펼치며 무릎을 꿇었다.
“신, 배움이 얕아서 중임을 맡을 수 없습니다. 폐하와 만민 앞에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더 배우고 오라.”
원풍 원년 정월 초사흘, 정6품에서 종6품인 직용도판(直龍圖判) 어전시로 강등되었던 유문장은 또 한 번 강등되어 현령과 같은 급인 8품 통직랑(通直郎)이 되어 사농시에서 한직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사대에서 관리들을 두들겨 패는 안건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조정 대신들의 지위가 오르고 내리는 것은 흔한 일이라, 한동안 조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청년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관리가 된 건지도 서서히 잊게 되었다.
유소호는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서재에 앉아 손엔 서책을 들고 창밖을 통해 음산한 날씨를 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뜨거운 죽과 반찬을 들고 들어오던 시녀는 자기네 노야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얼핏 들었다.
“내가 그녀보다 못하다고? 내가 어떻게 그녀를 당해내지? 나는 공을 세울 수 없는 건가…….”
시녀가 조심스럽게 그릇을 내려놓고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입구까지 갔을 때 유소호가 갑자기 노부인이 식사 전이냐고 묻길래 황급히 대답했다.
“올렸어요. 지금 들고 계세요.”
“그럼 나도 어머니와 함께 먹어야겠다.”
유소호가 일어서길래 서둘러 다시 그릇을 들고 따라서 서재에서 나갔다. 땅바닥에 시든 나뭇가지가 어지러운 걸 본 유소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치우는 사람이 없는 거냐.”
“노야, 장씨가 며칠 병이 나서…….”
시녀가 황급히 대답하는데 유소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집에 사람이 장사뿐이냐? 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노야, 이제 몇 명 없습니다. 부엌에 둘, 저는 노부인 곁에, 부인 곁에 둘이 있고…….”
“또 팔았군.”
유소호가 중얼거리며 유씨의 방에 들어갔더니, 유씨는 다리에 요를 걸친 채 밥을 먹으며 시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탁자엔 고작 죽 한 그릇, 채소 두 접시뿐이었다.
“이랑, 집에만 있지 말고 정초인데 나가서 둘러보고 그래라.”
유씨가 앉으라고 손짓하며 음식을 유소호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는 유심히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에만 있으니 안색이 안 좋구나.”
“이 김에 서책 읽고 좋지요.”
유소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유씨는 별말 하지 않았다. 모자 둘이 천천히 밥을 먹고 있는데 문 여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장사가 문을 늦게 열었는지, 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송옥루가 얼굴을 구긴 채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따르는 녹옥은 더더욱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기색이었다. 안에 있던 시녀가 슬쩍 잡아당기며 또 잃었냐고 묻자 녹옥이 화들짝 놀라 손을 휘둘렀다. 시녀는 더는 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안으로 들어온 송옥루는 유씨와 유소호가 못 본 듯이 계속 밥을 먹는 걸 보며 “어머니!” “이랑!” 하고 불렀다. 그러면서 대홍색 궁수포를 벗자, 그 안에는 녹색 비단 겹옷이 드러났다.
시녀가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지 않은 걸 보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망할 년, 눈이 삐었니? 굶어 죽으라는 거니?”
시녀가 겁에 질려 후다닥 달려나가자, 송옥루가 다시 소리쳤다.
“죽은 됐다. 우유 데워 와라!”
“또 잃었나?”
유소호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담담히 묻자, 송옥루가 멈칫하다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이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녀자들끼리 재미로 하는 것뿐이에요. 따고 잃을 게 뭐가 있어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에게 뺨을 맞고 의자에 나동그라졌다.
“처음엔 장신구를 팔더니, 이젠 시녀도 팔았으니, 나중엔 나도 팔 셈인가?”
유소호가 싸늘하게 말했다. 송옥루는 화끈화끈한 통증에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부여잡고 벌떡 일어나더니, 탁자 위의 찻잔을 집어던지며 날카롭게 고함쳤다.
“당신이 그렇게 대단한 줄 알아? 값이 얼마나 나간다고? 먹고, 입고, 살기 위해서 시집가는 것인데, 지금 내가 어떤 꼴인지 좀 봐! 날 때려? 감히 날 때려?”
송옥루가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오자 유소호가 몸을 틀어 피했고, 송옥루는 그대로 기둥에 부딪히고는 머리를 부여잡고 울음을 터트렸다.
“할 일이 없어도 그렇지, 정초부터 싸움질이냐!”
유씨가 화가 나서 부르르 떨면서 손가락질했다.
“둘 다 썩 나가라! 안 보는 게 속 편하겠다!”
“쳇, 뭐 좋은 곳이라고. 나라고 여기 있고 싶은 줄 알아요?”
송옥루는 이제 울지도 않고 혀를 차며 밖으로 나갔다. 마침 뜨거운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시녀와 부딪친 바람에 뜨거운 우유가 온몸에 튀자 비명을 질렀다.
“천한 노비 년! 날 죽일 셈이냐? 다리를 부러뜨릴 테다!”
송옥루가 입구에서 시녀를 잡고 마구 두들겨 패자 시녀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저 악독한 여인을 봤나!”
유소호가 송옥루를 한 손으로 잡아채서 문 앞에서 확 밀쳤다.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진 송옥루는 청석 바닥에 쓸려서 새로 지은 옷이 찢어졌다.
“아하, 언제 또 이 망할 년하고 사통을 했대? 어쩐지, 내가 안 보이는 것처럼 굴더라니. 매일 서재에서 죽은 듯이 자더니, 이 망할 년 몸에서 죽은 듯이 잤구나? 말해! 나 몰래 몇 번이나 그랬어?”
송옥루가 일어나더니 곧바로 손을 치켜들고 시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왜? 이제 새 사람이 생겼으니 나는 잊은 건가? 잘 들어, 그렇게는 안 돼! 음탕한 연놈 뜻대로 하겠다? 나 죽은 다음에나 그렇게 해!”
몇 대 얻어맞은 시녀는 견디지 못하고 머리로 들이박고 달아났고, 때릴 사람이 없어지자 송옥루는 유소호에게 달려들어서는 산발을 한 채 신발로 마구 때리며 울고 욕했다.
유소호는 낯선 사람처럼 구는 여인을 바라보며 지금 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잊었다. 불어온 북풍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날, 눈앞에서 슬프게 울던 이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가 싶더니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유소호는 자기를 때리는 여인을 확 잡아채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번 물어보자, 그날, 작정하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이야?”
안 그래도 울화가 치민 송옥루는 손목까지 아프게 잡아챈 채 버둥거려도 벗어날 수 없자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왜? 지금도 내가 당신 앞에서 나긋나긋하게 굴었으면 좋겠어? 아이고, 나리, 지금 어떤 신세인지 좀 생각하시지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소호에게 손목을 잡힌 채 처마까지 끌려갔다. 유소호는 말 채찍을 집어 들더니 다짜고짜 휘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날 속여? 어떻게!”
여인은 피하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러다가 죽겠다 싶을 때, 채찍이 돌연 멈췄다. 유소호가 이번엔 자기 몸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순간 얼굴에 핏자국이 생긴 걸 본 송옥루는 제 아픈 것도 잊고 일어서서 달아났다.
“미쳤네, 미쳤어. 여기서 못 살아!”
유씨가 방 안에서 다리를 끌고 다급하게 나왔다.
“이랑, 이랑!”
유씨는 초조하고 화도 나서 한겨울에 땀을 흠뻑 흘리며 문을 잡고 헐떡였다. 고함소리에 놀란 장사가 열이 나는 몸을 끌고 문간방에서 비틀비틀 나오더니, 미친 것처럼 자기 몸을 내리치는 유소호 손에서 채찍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도 손에 쥔 채찍을 죽어라 놓지 않았다.
“이랑!”
유씨가 드디어 다리를 끌고 밖으로 나와서는,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유소호를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랑, 언짢은 네 마음, 이 어미가 잘 안다. 저 아이, 내쫓아 버리자꾸나.”
유소호는 모친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유씨를 일으켜 세웠다. 몸은 타들어 갈 듯 아파도 울화는 훨씬 풀려서 조금 웃음도 나왔다.
“어머니를 놀라게 하다니, 제 잘못입니다. 네, 그렇게 해요, 내쫓아 버려요, 어머니.”
말이 끝나자마자, 송옥루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고치고 나오다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날 내쫓아? 꿈도 크시네. 세상에 그리 좋은 일이 있을까. 공으로 1년 동안 나랑 잔 건 어쩌고? 그래, 내쫓아. 대신 이 집에 있는 돈은 하나도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말고. 집도 내 거야. 모자 둘이 보따리 싸서 썩 꺼져!”
유씨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고, 유소호는 장사 손에 들린 채찍을 빼앗으며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고함쳤다.
“꺼져! 이 창부! 감히 재산을 달라니…….”
송옥루는 두려워하는 것 하나 없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비웃었다.
“대인, 말씀 조심하셔요. 그 창부랑 잔 사람이 누군데, 목이 달아나면 어쩌시려고.”
유소호는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 오히려 날 협박해? 내가 두려워할 것 같으냐?”
그러면서 채찍을 휘두르려고 하자, 유씨가 유소호를 덥석 끌어안았다.
“이러다 네가 죽는다, 어미 혼자 둘 셈이냐? 우리 집안의 대가 끊기면 안 된다.”
“그러게요, 관인, 집에서 기다리셔요. 후손 생각하셔야지요.”
송옥루가 까르르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유소호의 작은 마당이 이렇게 떠들썩하다 보니, 골목 어귀에 멈춰 선 검은 마차에까지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방탕해 보이는 공자가 마차의 휘장을 젖히고 얼굴을 내밀었다.
“어느 댁 여인인지 참으로 가련하게 우는군.”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문이 열리더니 대홍색 배자를 입고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젊은 여인이 뒤에 곱상한 시녀를 거느리고 나왔다. 야살스럽고 요염해 보이는 모습으로 가까워지더니, 누가 자기를 주시하는 걸 느꼈는지 소매를 들고 얼굴을 반쯤 가렸다.
그 여인은 소매 너머로 힐끔 그쪽을 쳐다보고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잘생긴 사내인 걸 보고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는 담벽에 기대어 지나갔다.
골목 어귀에 자주 타고 다니는 마차가 이미 와 있기에, 송옥루는 치맛자락을 들고 마차에 오르면서 슬쩍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사내가 자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보자 웃고 있던 입술을 부채로 가렸다.
“저건 또 어느 집 교양 없는 사내람.”
송옥루는 발그레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휘장을 내리라고 녹옥에게 소매를 휘두르고는 길을 서둘렀다.
외출한 송옥루는 곧장 마행가로 향했다. 정월이라 거리엔 사람이 더욱 넘쳐흘렀다. 사방에 있는 점포는 붉고 푸른 띠 등으로 장식했고, 가설 누각엔 머리 장식, 장신구, 의복, 꽃송이, 혜말, 장난감 같은 것들이 잔뜩 진열되어있었다. 지금은 내기 도박이 성행하고 곧 명절이라 이 가설 누각은 모두 내기 도박판이 되었고, 오가는 사람 모두 박매(扑賣)하는 장사꾼이었다.
송옥루의 마차는 이곳에서 멈추지 않고 큰길을 지나 어느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어느 담장 높은 저택 앞에 멈췄다.
녹옥이 내려서 문을 두드리자, 마흔 넘은 여인이 꽃을 달고 문을 열고 나왔다. 여인은 녹옥인 걸 보고 분을 진하게 바른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부인 오셨구나? 오늘은 안 오시는 줄 알았더니.”
이미 마차에서 내린 송옥루가 그 말을 듣고 입을 열었다.
“어찌, 딴 사람만 되고, 잃은 사람은 오면 안 되는가?”
“제가 말주변이 없어 말을 잘못했네요. 방정맞은 주둥아리네요. 대인이 집에 계셔서 못 나오실 줄 알았지요. 호 이저(二姐)는 가서 부인을 모셔 오라고 재촉했는데 제가 가지 말자 했지요. 젊은 부부의 흥을 깨지 말자고요. 호호호.”
송옥루는 콧방귀를 뀌며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나지막이 “그 사람이 어디 날 인간으로 봐야 말이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마흔 넘어 보이는 여인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마차도 골목 어귀에 멈췄다. 안에서 녹색 융의를 입은 서른 남짓한 사내가 머리를 내밀고 두리번거리더니 웃으며 안쪽을 향해 말했다.
“여긴 호 낭자의 사택이군요.”
부채로 젖힌 휘장 너머로 지극히 잘 관리한 부귀하고 고상한 얼굴이 드러났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사내가 금옥관을 쓰고 백여우 갖옷을 입고 허리엔 운룡(雲龍) 금대(金帶)를 차고 있었다.
“아, 도박장을 연, 호 이저 말이냐?”
처음 말을 꺼낸 사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얕잡아 볼 곳이 아닙니다. 얼마나 비밀스러운지 모릅니다. 판돈도, 우리 공주께서도 엄두를 못 낼 값입니다.”
“그럼 있는 집 여인이란 말이냐? 흠, 그럼 쉽지 않겠는걸.”
사내가 아쉬운 얼굴로 부채를 흔들며 휘장을 내려놓았다.
“부마, 급할 것 없습니다. 소인이 수소문했는데, 사는 곳을 보면 분명 있는 집 여인은 아닐 겁니다.”
마차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마차 안에서 나직이 나누는 담소 소리도 멀어졌다.
시간이 유유히 흘러갔다. 송옥루는 내쫓으라는 유씨의 말을 들은 이래 더더욱 이 집에 있고 싶지가 않았다. 그녀는 종일 소란을 피우다가 갑자기 집을 팔겠다고 난리를 부렸다.
“안 그래도 봉록을 삭감당했는데, 인제 직책까지 떨어졌느니 집에 먹을 것도 없어요. 내 장신구를 팔아서 먹고살 생각이에요?”
송옥루는 방 안에 서서 유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께서 하사한 저택은 당연히 못 팔더라도, 이 집은 팔 수 있잖아요. 해도 지났으니 거길 정리해서 얼른 옮겨요. 여기에 액운이 잔뜩 끼어 있는데, 터라도 바꿔 봐야지요.”
“어딜 감히!”
유소호가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옷엔 눈발이 가득하고 신발은 진흙투성이였다.
“아이고, 어느 년 품에서 돌아온 거예요? 제대로 된 밀회 장소도 없나 보지? 온몸에 흙 묻은 것 좀 봐요. 이제는 지위 낮은 관리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관리인데 체면 생각하셔야지요.”
송옥루는 손가락을 깨물며 조롱하다가 유소호가 손을 치켜들자 후다닥 뒷걸음질 쳤다.
“휴서를 써두었으니 그만 떠나.”
유소호가 손을 내리고는 성큼성큼 유씨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송옥루라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는 듯이 오늘은 뭘 드셨는지, 기분은 어떤지 물었다. 유씨는 유소호의 얇은 옷깃이 마음 아팠다.
“이랑, 왜 자꾸 밭에 가는 것이냐. 한겨울에 곡식도 없는걸. 풍한 걸릴라. 열심히 하려는 마음은 안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도움이 될 텐데. 혼자 이렇게 애쓰지도 않았을 것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옥루가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휴서? 포기하시지! 날 쫓아내려고? 태후의 교지를 받아오지 않는 이상 꿈도 꾸지 말아요!”
그러고는 모자 두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가슴 속에 솜이 꽉 들어찬 것처럼 가슴이 턱턱 막혀서 아무 나무 의자나 걷어찼는데 하필 엇맞아서 발만 아팠다.
“부인, 부인!”
녹옥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부르자, 송옥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고함은 왜 쳐! 나 아직 안 죽었어!”
“부인, 호 낭자가 보낸 청첩이에요.”
녹옥이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건네자, 송옥루는 의아한 듯 서신을 받았다.
“응? 그 방탕한 년이 무슨 일로 날 떠올렸대? 돈 좀 빚졌다고 때려서 쫓아내더니? 마음이 참 빨리 변하기도 하지!”
서신을 보니 정말로 자신을 초대하는 내용이어서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손이 근질근질하기도 했다.
어째서인지, 경성 귀부인들이 연회를 열 때 그녀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참석할 연회가 없어지니, 당연히 같이 내기 도박을 할 사람도 없어졌다. 화가 난 송옥루는 그저 유소호가 좌천된 까닭이라고 여기며 관리 부인들도 그 박정한 천것들과 똑같다고 한바탕 욕을 했다. 그래도 소용이 없으니 답답하게 집에서 며칠 지내다가 손이 근질근질해 미칠 것 같아서 거리에 있는 평범한 내기 장에 찾아갔었다. 그런데 사내들이 많은 곳이라 실로 불편했고, 노는 법도 눈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개로 호 이저의 집을 알게 되었고, 거긴 관가 부인들보다 훨씬 호탕하게 논다는 걸 알게 되었다. 몇 번 찾아간 뒤로는 저택만 세 곳을 얻었다. 그런데 유소호의 액운이 옮겨왔는지, 저택을 팔고 들어온 은자를 만져보기도 전에 물 흐르듯 사라져버렸다. 돈을 잃고 눈이 시뻘게져 있는데, 빚을 지고도 갚지 못했다고 호 이저에게 쫓겨났으니 포기될 리가 있나.
“부인, 가도 될까요?”
녹옥이 조심스럽게 묻자 송옥루가 눈을 부릅떴다.
“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그 방탕한 년이 으스대는 걸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하지만 돈이…….”
녹옥이 울상을 지었다. 문득 송옥루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는 것만 같아서 고개를 들어보니 저를 보며 빙긋이 웃고 있었다.
“녹옥, 너 꽤 예쁘장하구나.”
녹옥은 그 말에 순간 온몸이 서늘해져서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 제발 절 팔지 마세요. 제대로 시중들게요.”
“일어나. 대낮부터 울긴 왜 울어? 재수 없게!”
송옥루가 혀를 차며 후원으로 향하자, 녹옥도 눈물을 닦고서 재빨리 쫓아갔다.
녹옥은 백방으로 조심하며 수발을 들었다. 옷을 갈아입히고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린 다음, 자주 차던 금팔찌는 이미 팔아서 은팔찌 두 개를 골라 끼워줬다. 마지막으로 향분을 향긋하게 뿌리고 호 이저 집으로 향했다.
그 호 이저는 사실 마흔 가까운 여인이었다. 온화한 얼굴에 화장도 진하게 하지 않아서 거리에서 만나면 누구나 단정한 여인으로 여기겠지만, 수단이 악랄한 여인이었다. 호 이저는 송옥루가 온 걸 보고는 웃으며 맞이하더니, 우선 사과부터 하고는 오늘 치장을 칭찬했다.
“언니, 듣기 좋은 말로 달랠 거 없어요. 어디 무서워서 언니가 하는 말을 믿겠어요?”
눈을 흘긴 송옥루는 안에서 시끌벅적한 기척이 들리자 안 그래도 오금이 저려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지라 더는 여인을 상대하지 않고 돌아섰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튀어나온 사람과 부딪치고 말았다.
“아이고, 대낭자, 미안하오.”
커다란 두 손이 송옥루를 잡아끌었다. 사내의 우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더니, 훤칠한 얼굴이 보였다. 송옥루는 어쩐지 눈에 익기도 하고 또 잘 차려입은 걸 보고는 바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는 그를 지나쳐서 안으로 들어갔다.
호 이저는 그 사내를 향해 빙그레 눈짓하고는 그가 천천히 송옥루를 뒤따라 가는 걸 바라봤다.
“왕 부마도위의 눈에 들었다니, 저 음탕한 여인만 좋은 일 생겼네요.”
문을 열었던 여인이 나지막이 말했다.
호 이저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물론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양고기는 못 먹고 비린내만 잔뜩 묻히겠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고 바라봤더니, 송옥루 뒤에 있던 사내가 무얼 봤는지 손을 뻗어서 무언가 알려주는 모습이었다. 송옥루는 수줍은 듯 고개는 숙였지만 피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호 이저가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똑똑한 사람이라면 돌아서서 갔겠지. 그랬으면 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호 이저의 저택은 깊숙한 삼진(三進) 구조로, 겹겹의 중문은 모두 닫혀 있어서 방해할 사람이 없는 청정한 곳이었다. 여름엔 온 정원에 꽃이 활짝 피고 푸르른 녹음이 우거졌다. 다만 지금은 겨울이라 고목과 바위뿐이라 어쩐지 조금 험악해 보였다.
그리고 이때 강녕, 어느 대저택
높이 뜬 태양이 햇살을 포근하게 내리쬐는 덕분에 거대한 정원이 한겨울에도 따듯했다.
날씨가 좋아서 임새옥도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두꺼운 방석을 깐 의자를 회랑에 옮겨놓고 다리를 꼬고 해바라기 씨를 까먹고 있으니 그제야 명절을 보내는 느낌이 났다. 강녕에 돌아와 열흘 정도 보내는 동안 그녀의 다리는 무릎을 꿇다 꿇다, 이제는 끊어질 것만 같았다. 매일 잘 알지도 못하는 늙고 젊은 여인들을 마주하고 웃어 보이느라 근육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대고낭 오셨어요!”
마당 입구에서 한 음정 높은 옥매의 목소리가 들리자, 임새옥은 후다닥 자세를 바로 하고 옷자락을 털었다. 구슬 영락(纓絡: 하단에 구슬 장식을 늘어뜨린 목걸이)을 차고 장화(妝花) 비단 치마를 입은 큰 시누이가 들어왔다.
느긋한 오후, 차 시간이 끝나고 말았다.
“형님 오셨어요.”
임새옥이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났다. 소금남의 큰누이인 이 여인은 올해 서른다섯으로 같은 성에 있는 돈이 많은 대갓집 아들과 혼인했다. 두 아이를 낳고도 몸매가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돈도 많으면서 열흘에 여드레는 소 노부인 곁에 있으면서 집안 물건을 몽땅 제집에 옮겨가지 못하는 게 한인 듯 굴었다.
임새옥은 시녀들이 나누는 한담을 통해 첫째 시누가 외향적으로는 소 노부인 젊은 시절과 꽤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만 식견이 좁은 탓인지, 뭐든 가지고 싶어 하는 것치곤 귀중한 걸 쏙쏙 골라가는 둘째 시누와 셋째 시누만큼 똑똑하지 못해서 늘 별 가치 없는 물건으로 쉽게 만족한단다.
친정에 온 이래, 임새옥의 거처를 몇 바퀴 돌면서 이것저것 달라고 했는데 임새옥이 어리바리한 척하며 몽땅 거절하는 바람에 은근슬쩍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대낭자, 참 한가하네.”
소 대저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마당이 좀 작아. 내 말 듣고 지난번 낭자가 살던 그 거처로 가서 살아. 거리낄 게 뭐가 있어. 좋은 거처를 괜히 낭비하지 말고.”
그러면서 곁에 있는 해바라기 씨를 먹고는 잘 볶았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 주게 나도 좀 줘.”
“별로 많지 않아요. 노부인께 가서 얻어가셔요.”
“손님이 오셔서 여기에 와 본 거지.”
소 대저가 그녀 곁에 앉아서 어느 친척이 왔네, 갔네, 누구는 가지고 온 선물이 군색하네, 또 누구는 매일 공밥만 먹고 가네, 늘어놓는 통에 임새옥은 눈꺼풀이 가물가물해졌다. 어차피 밥 먹을 때까지 버텼다 갈 걸 알아서 따분하게 듣고 있는데 옥매가 시녀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대낭자, 이노부인께서 이 간식 가져다드리래요.”
열서너 살쯤 된 영특해 보이는 아이가 상자 두 개를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임새옥이 그 아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자, 소 대저가 해바라기 씨를 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자네는 모르지? 숙모 곁에 있는 아이야. 오늘은 어쩐 일로 통 크게 구신대? 뭘 보냈는지 내가 좀 보자.”
그러면서 뚜껑을 열었더니 상자 가득 든 과함, 계피병이 향긋한 냄새를 내뿜는 걸 보고는 냉큼 집어 들었다.
“경성에서 가지고 온 건가? 대낭자 혼자 다 못 먹으니까, 내가 몇 개…….”
임새옥은 헛기침하고는 그녀 어깨를 잡는 김에 상자를 가지고 왔다. 그중 하나를 꺼내 손이 민망해진 소 대저에게 맛보라고 건네주고는 뚜껑을 닫고 상자를 옥매에게 건넸다.
“전가아 돌아오면 먹이렴.”
그러고는 시녀 아이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신경 써주셔서 고맙다고 말씀드려. 옥매, 데리고 들어가서 간식 먹으렴.”
소 대저는 얼떨떨해져서 손에 쥐어진 간식 하나를 바라봤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임새옥이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언짢아졌다.
“쩨쩨하기는. 상자 가득하더구먼. 상하면 어쩌려고.”
임새옥은 못 들은 체하며 옥매를 불러 그 시녀에게 돈을 주어 보내게 했다. 소 대저가 손수건을 흔들며 일어서는데 임새옥이 “식사하고 가세요!” 하고 불렀다. 소 대저는 더 울컥했다. 알겠다고 하자니 체면이 안 서고, 싫다고 하자니 또 신경 쓰이고, 결국 대답도 하지 않고 곧장 소 노부인에게 갔다.
소 노부인은 일가의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시녀들이 한 줄로 늘어서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 대저가 온 걸 보고 다들 일어서서 인사하며 휘장을 젖혀주었다.
“아직 있었냐?”
소 노부인이 힐끔 보고 별 뜻 없이 물었는데, 아픈 곳이 제대로 찔린 소 대저는 의자에 축 처져서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머니까지 날 쫓아내려는 거예요? 이러니까 집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딸은 버린다고 다들 그러지.”
그 말에 소 노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노려봤다.
“또 무슨 헛소리냐!”
그러자 옆에 있던 친척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다고. 누굴 차별하겠니.”
그러자 소 대저는 말문이 터져서 줄줄 늘어놓으면서, 성지를 받아도 출신은 안 변한다며 ‘해바라기 씨를 바닥 가득 까먹었더라’, ‘걸음걸이가 얌전하지 못하더라’ 어쩌고저쩌고하는 바람에 소 노부인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그걸 본 동서들이 곁에서 달랬다.
“빈한한 집 아이니 차차 가르치면 되지요.”
“큰외숙모, 모르셔서 그러세요. 누가 가르치겠어요. 밖에서 2년 살다 온대요. 새해라고 잠깐 돌아온 거예요. 말이 좋아서 그렇지, 야산에 과일나무 몇 그루 심은 게 무슨 돈이 되겠어요. 밖을 떠도는 게 습관되어서 그렇지. 며느리가 아니라 혼인해서 내보낸 우리 집 딸 같아요.”
소 대저가 혀를 차며 하는 말에 방 안 가득한 사람이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라 했다. 안 그래도 그게 불만이던 소 노부인은 자기 딸이 사람들 앞에서 말해버리자 더 체면이 구겨져서 콧방귀를 뀌었다.
“허튼짓하게 내버려 둘 수야 없지.”
소 노부인이 마음이 움직인 것 같자, 소 대저가 얼른 불을 붙였다.
“어머니, 큰소리치지 마세요. 금가가 끼고 돌잖아요. 괜히 며느리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마세요. 전에 아이가 있을 때 얼마나 소란스러웠어요. 이번엔 조용히 지내세요.”
그 말에 노부인이 펄쩍 뛰더니 어서 며느리를 불러오라고 시녀를 채근했다.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 고분고분 있으라고 오늘 당장 말해야겠다고 하자, 방 안 가득한 사람들이 서둘러 말리는데 오히려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었다.
한창 시끄러운데, 이방(二房)의 시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타났다.
“노부인, 사람 좀 빌려 갈게요.”
안 그래도 속이 시끄러운 소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굴 빌려 가!”
시녀는 무서워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손님이 오셔서요. 조 어멈 데리고 가서 음식 좀 하려고요. 내일 아침에 돌려보낼 거예요.”
노부인의 안색이 굳어지자, 시녀가 냉큼 말을 이었다.
“저희 노부인 말씀이, 딱 한 번 빌리는 거니까 꼭 체면 세워주시래요.”
노부인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모두 쳐다봤고, 소 대저가 해바라기 씨를 먹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 부엌어멈이잖아요. 보내면 될걸, 뭘 며느리처럼 쩨쩨하게 구세요.”
그 말에 노부인이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했다.
“쓸 만한 어멈 둘 보낸다고 말씀드려라. 조 어멈은, 갔다.”
“예? 조 어멈이 죽었다고요? 언제요? 아이고…….”
시녀가 깜짝 놀라서 하는 말에 노부인이 혀를 차며 말을 잘랐다.
“죽은 게 아니라 팔았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새옥이 들어오더니 방 안 가득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소 노부인이 그쪽을 가리켰다.
“조 어멈을 달라고 하려거든, 저 아이에게 달라고 해라.”
임새옥은 소 대저가 와서 부추겼으리라 생각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갑자기 얼굴을 모르는 시녀 아이가 자신을 향해 예를 갖추더니 조 어멈을 불러서 음식을 하고 어쩌고 하길래 옥매를 슬쩍 바라봤다. 옥매가 나지막이 귀띔해 주는 걸 듣고서야 조 어멈이 지난번에 전가아에게 헛소리한 어멈이라는 걸 알고 싱긋 웃었다.
“집에 일이 생겨서 내가 팔았어. 네가 괜히 허탕 쳤구나.”
시녀 아이는 머쓱해져서 소 노부인을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조 어멈은 저희 노부인 곁에 7, 8년 있던 사람인데, 잘못을 했더라도 좀 참아주시지…….”
말이 끝나기 전에 임새옥이 말을 끊었다.
“그래,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이노부인을 곁에서 모시는 대시녀 입장에서 이런 대우는 처음인지라 깜짝 놀라긴 했지만, 자신의 말이 과했던 걸 알기에 순간 얼굴을 확 붉히며 잘못했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소 대저가 아이고, 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이제 한가해지시겠어요. 집안 단속할 며느리가 생겼네요.”
“쯧, 넌 네 집으로 돌아가라. 매일 여기서 헛소리나 하고. 그럴 겨를 있거든 네 지아비나 단속해라. 화류 거리에 그만 들락거리라고 해.”
아픈 곳을 찔린 소 대저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며느리한테 뺨 맞고 저한테 화풀이하는 거예요?”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나서서 그녀를 달랬다. 임새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어머니,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 어멈이 전가아와 절 이간질하잖아요. 계모라서 저를 싫어한다는 말에 전가아가 얼마나 울었는데요.”
그 말에 나이 많은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고로 계모는 힘들지. 그 어멈, 실로 괘씸하군. 대낭자, 잘했네.”
그러면서 소 노부인도 설득하자, 소 노부인의 안색도 그제야 조금 누그러지기는 했다.
“흥, 켕길 일을 안 하면 헛소리도 두렵지 않은 법이다. 전가아에게 잘해주면 그 어멈이 무슨 말을 한들 뭐가 두려우냐! 집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일일이 입을 다 막으려고? 정 그러면 아예 싹 쫓아내라. 시중드는 사람이 없어야 조용하고 좋지.”
임새옥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먼저 말씀하시네요. 제 거처엔 시중들 사람 그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허드렛일 할 어멈 두어 명, 시녀 두어 명에 옥매만 있으면 돼요.”
노부인이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저, 저것 좀 들어보게. 저게 무슨 말이야! 제 배가 부르면 남 배고픈 줄 모른다더니, 남 시중받고 싶다고 꿈꾸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 모두 웃으며 맞장구치며 그런 법은 없다고 설득하자, 임새옥도 웃으며 대답했다.
“전 어릴 때부터 습관 되어서 시중받는 게 거북해요. 꼭 시중받는 게 좋은 것도 아니고요. 제 외조모도 시중받는 게 익숙한 분인데, 제가 보기엔 힘들어 보이거든요.”
“흥! 우리도 다 네 외조모랑 같은데, 전혀 힘들지 않다만!”
노부인이 하는 말에 임새옥은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했는데, 방 안의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자 더는 있지 못하고 서둘러 일어나서 물러났다.
“대낭자는 두 번이나 황가에서 하사품도 받았고, 집안에 땅도 있으니 분명 풍족하겠지요. 다만 검소해서 그럴 뿐인 겝니다. 형님, 이건 복이에요. 집안 말아먹는 것보다 낫잖아요.”
그 말에 방 안에 웃음이 터지고 소 노부인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찌 됐든 황가에서 상을 내리는 건 온 가족 몇 대를 통틀어도 없는 일이라, 금세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를 마치고 손님을 배웅한 뒤, 소 노부인이 시녀들과 쌍륙 놀이를 하는데 전가아가 동동 뛰어왔다. 아이가 요즘 성격이 온순해져서 노부인은 더더욱 예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품에 안고 이것저것 먹이고, 뭘 하고 놀았는지, 밖에서 맛있는 걸 먹었는지 묻고 있는데 소금남이 뒤따라 들어와 한쪽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노부인은 그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걸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어서 네 거처로 가라. 괜히 내 앞에서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소금남은 싱긋 웃고는 몇 마디 더 하더니 전가아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전가아가 임새옥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던 걸 아는 시녀들은 거기서 뭘 먹고 무슨 놀이를 했는지 물었고, 전가아가 드문드문 대답했다.
“대저아 외조모는 매일 무얼 하느냐? 곁에 시녀는 몇이든? 할미보다 많더냐?”
소 노부인이 웃으며 물었지만, 조삼랑 집에 가본 적은 있어도 외조모인지 누군지를 신경 쓴 적이 있었어야 말이다.
“외할머니요? 몸을 못 움직여서 침상에 누워있어요. 시중드는 사람 많아요. 제가 밥도 먹인 적 있는 걸요?”
전가아가 쌍륙을 마구 쌓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느라 순간 굳어버린 소 노부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리숙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어리숙한 아이가 다 있을까!”
소 노부인이 이를 악물며 나직이 말하는데 방 안 가득한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고 있자, 자기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임새옥이 재채기하고는 코를 문질렀다.
“분명 당신 어머님이 내 얘기 하시는 걸 거예요.”
서안 앞에 앉아서 뭔갈 쓰던 소금남이 웃으며 물었다.
“뭐라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바보다, 멍청이다, 하시겠죠, 뭐. 다 노비 문서 때문이지 뭐예요!”
임새옥이 일어나 앉더니 성큼성큼 그의 곁으로 다가가 목을 끌어안았다.
“다 당신 때문이잖아요. 태웠다면서요!”
소금남이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서 돌아봤다.
“예, 제 잘못으로 낭자의 명성에 누를 끼쳤습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속죄의 뜻으로, 소인 오늘 제대로 시중들겠나이다, 낭자.”
임새옥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빼려 했다.
“사람들 앞에선 인간 세상의 때라곤 하나도 묻지 않은 사람처럼 굴면서, 알고 보니 당신도 행실이 진지하지 않네요.”
소금남이 그녀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럼 진지한 이야기 합시다, 며칠 뒤에 나와 함께 어디 좀 다녀옵시다.”
“어딜요?”
임새옥이 손을 빼고 그의 미간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와 함께 성안현에 있어 주려고 요즘 날마다 정신없이 일하는 중이라 고맙고 또 마음이 아팠다.
“흥화.”
소금남은 이 작은 손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딴 데로 간 사람처럼 대답했다.
<고대 지주> 7권에 계속
고대 지주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