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3/57)

四. 실의에 빠진 사람이 실의에 빠진 사람을 마주하다

붉은 촛불에서 춤추는 불꽃 두 개가 온 방 안을 붉게 물들였다. 경성에서 옮겨온 붉은 나권(羅圈) 휘장이 드리워진 금박 침상도 붉은색이고, 탁자, 의자도 붉은색이었다. 침상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도 붉었다. 춥고 외로운 밤바람도 이곳의 붉은 따스함이 부러운 듯 자꾸만 창틀 사이를 파고들어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불어오는 바람에 붉은 촛불이 파르르 춤을 추고, 사람들이 즐겁게 웃는 소리도 실어 왔다. 

“나가서 술 마시지 않아도 돼요?”

임새옥은 자기와 딱 붙어 앉은 사내를 웃으며 바라봤다. 문득 이 사내의 생김새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남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생겼었나요?”

“우리 처음에 만났을 때, 당신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지.” 

소금남도 웃었다. 그 웃음에, 조금 어색한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풀어졌다. 군살이 살짝 박힌 손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동안, 남자는 가슴이 저릿저릿했다.

“난 예쁘지도 않고 치장할 줄도 몰라요. 농사일 말곤 할 줄 아는 것도 없어요. 거기에 쫓겨난 사람인데, 세상에 여인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내가 마음에 들었어요? 다른 사람이 데려가지 않아서 불쌍해서 그런 거죠?”

임새옥은 손을 거두고 침상에 비스듬히 기댔다. 소 노부인이 강녕에서 옮겨온 이불인데, 보들보들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만지작거렸다. 

“차라리 솜이 나을 텐데…….”

그렇게 꿍얼거리다가 화들짝 일어나 앉았다. 

솜! 구해서 심어 볼 때가 되었어! 

갑자기 코가 아팠다. 소금남이 톡 친 것이다. 소금남이 나직이 웃는 소리도 들렸다.

“또 무슨 생각하는 거지?” 

고개를 들자마자, 따듯한 입술이 맞닿았다. 너무 가깝게 붙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요.”

임새옥은 숨이 막히기 전에 겨우 숨을 내쉬었다. 

붉은 휘장이 붉게 흔들리는 촛불의 불빛을 가리고. 

귓가에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만 들렸다. 

“우리 행복하게 삽시다…….”

겨울이 되면 스산해지는 작디작은 성안현과 달리 경성의 겨울은 여전히 번화했다. 성 밖에 가봐도 겨울 풍경을 감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변하 강변에 있는 좋은 장원 한 곳은 이용이 가을에 사들인 곳으로, 화원에 물을 끌어들일 수 있다 해서 산 것이었다. 장원 안 이곳저곳에 누각을 설치해서 여름에 더위를 피할 때 쓸 생각이었다.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에서 차를 품평하고 글을 쓰면 얼마나 자유로울까. 

그런데 지금 그곳을 오가는 사람은 전혀 편안하지 않았다. 하나같이 조심조심,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사방이 온통 쉽게 깨지는 보물인 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발길을 멈췄다가 목을 움츠리고 호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누각을 피해서 돌아갔다. 

침향색 긴 겹옷을 입은 동연낭은 월낭이 건넨 뜨거운 차를 받아들다가 안에서 들리는 쨍그랑 소리를 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노야 괜찮은 거죠?”

백능 겹옷을 입은 월낭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물었다. 

“괜찮을 리가 있겠나?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어디 있다고.”

동연낭이 빙긋이 웃으며 돌아서자 월낭이 재빨리 부축했다. 동연낭은 치맛자락을 끌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면서 말을 이었다. 

“우린 노야와 비교하면 행복한 거지. 적어도 우린 저이 곁에 있잖아. 마음은, 상관없지…….”

월낭도 싱긋 웃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시녀 하나가 당황한 모습으로 달려오더니 털썩 무릎을 꿇었다. 

“부인, 저 좀 살려주세요.” 

“또 무슨 일이냐.” 

동연낭이 담담하게 묻자 시녀가 서신 한 통을 바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노야에게 서신을 전해달라고 해서요. 부인, 부디 자비를 베풀어서 저 대신 노야에게 전해 주세요…….”

누가 머리를 베기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조아리자, 월낭은 웃고 말았다.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동연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받아들자, 시녀는 감읍한 모습으로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달아났다. 

“이건 또 누가 보낸 걸까.”

서신을 슬쩍 살펴본 동연낭은 서명이 없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이번엔 우리가 제대로 온 모양일세. 서신 전하는 노비 노릇을 하게 되었어.”

기분이 좋아 보이는 동연낭을 보며 월낭도 빙긋 웃었다. 

“형님이 자비로운 거죠.” 

그러면서 그녀를 부축해서 왔던 길로 돌아가 누각 앞에 섰다. 이제는 좀 지쳤는지, 집어던지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동연낭은 문을 열고 난장판이 된 바닥을 못 본 체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월낭은 문밖에 서서 안을 들여다볼까 하다가 엄두가 나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다. 동연낭이 바닥을 밟고 걷는 소리가 들리더니 뒤이어 이용의 호통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몸서리치면서 곧바로 달려 들어갔는데, 동연낭은 멀쩡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무슨 염치로 구해달라는 것이야! 퉤! 천한 년!” 

이용은 이 한겨울에 명주옷 한 겹만 입고서 머리도 틀지 않고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월낭은 그의 안색을 똑바로 볼 엄두가 나지 않아 바로 고개를 숙였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도자기 잔이 또 깨졌다. 

“가지고 오라고 했더니! 미친 것이냐, 얼빠진 것이야? 감히 제 뜻대로 해? 죽고 싶으면 곱게 죽을 것이지, 감히 내 일을 망쳐? 나더러 구해달라? 구해달라?!” 

이용이 포효하듯 외치더니 갑자기 음산하게 웃으며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그래, 좋다. 구해주마! 그리 쉽게 곤장 맞고 죽게 둘 수는 없지! 그리 쉽게는 안 되지!” 

동연낭과 월낭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이용이 고함치자 가복 하나가 들어왔고, 이용이 지시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내 명첩을 가지고 가서……. 옥에서 꺼내라……. 홍등가에 팔고……. 어멈에게 모든 방법을 다 쓰라고 전해라…….”

가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자, 동연낭과 월낭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서로의 눈빛 저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다. 본 적은 없지만, 가끔 들은 적은 있었다. 홍등가에서 여인들을 처벌할 때 쓰는 수단. 그야말로 죽는 게 나을 일이었다.

그 청아인가? 동연낭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했다. 전가아를 안고서 소 관인 뒤를 바짝 따르며 마음을 드러내던 그 시녀 아이? 내가 나설 것 없다, 나설 것 없어. 굳이 왜! 

“자형에게 선물은 보냈소?”

이용이 갑자기 묻는 말에 동연낭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보냈어요. 아주버님 것 하나, 대낭자 것 하나.” 

뒤이어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고, 방 안은 섬뜩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노……야.” 

문 밖에서 들리는 떨리는 목소리 덕분에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말해라!” 

이용이 포효하자, 털썩 무릎 꿇는 소리가 들렸다. 

“노야, 노야, 손 대인이 사람을 보내서 하는 말이, 유 대인이 술에 취해 주루에서 노야를 욕하고 있답니다. 손 봐줄지 묻습니다만…….”

‘유 대인!’이라고 짓씹듯 내뱉은 이용이 무슨 욕을 하더냐고 물었다. 사환은 곧 죽을 듯이 얼굴이 창백해져서 대답했다. 

“그, 그, 노야가 양심이 없다고……. 그것이, 유 대인의 부인에게…… 저속한 짓을…….”

말이 끝나기 전에 방 안에서 의자가 뒤집히는 소리가 들리자 사환은 납작 엎드렸다. 그런데 예상처럼 물건이 날아오진 않고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사실 그 사환이 매우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금량교 아래 주루의 가장 큰 독채에 앉아 있는 유소호는 지금 술잔을 든 채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죽일 듯이 이용을 욕하고 있었다. 

양심이 없다 정도는, 정말이지 우아한 표현이었다. 

“개돼지만도 못한 천것 같으니, 그러니 자식 하나 없지. 어미가 중놈과 눈 맞아 태어난 놈 같으니!”

처음으로 사람을 그렇게 욕하는 유소호는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에 은근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유소호가 의자에서 일어나서 욕하며 웃어대자, 술에 취해 해롱거리던 사람들은 술까지 다 깨서 멀뚱하니 유소호를 바라봤다. 반응이 빠른 사람 중엔 벌써 줄행랑친 사람도 있었고, 그와 사이가 좋은 사람은 일어서서 말리기 시작했다. 

“아우, 취했군. 어서 돌아가세. 데려다주겠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랑에서 발걸음 소리가 크게 들리더니, 금칠을 한 미닫이문이 대번 걷어차여 날아갔다. 

“내가 자식이 없다고? 그러는 네놈은 공짜로 얻은 자식이 참으로 많겠구나?”

창의를 걸친 이용이 넋이 나간 사람들을 지나쳐서 쉴 새 없이 욕을 퍼붓는 유소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평지에 광풍이 이는 듯했다. 

옛말에 섣달 초이레, 초여드레는 턱이 빠질 정도로 춥다더니, 어제까지만 해도 싸늘한 가을 같던 날씨가 눈 깜짝할 사이 한겨울이 되었다. 섣달은 경성 사람들에게 아마도 1년 중에 가장 바쁜 달이리라. 섣달에 들어서자마자 온 거리에 불화(佛花: 종이나 천으로 만든 부처님께 바치는 꽃)니 구황(韭黃: 겨울에 키우는 누런 부추)이니 호두 등 물품을 파는 점포가 가득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초여드레가 가까워지자 온 거리에 납팔죽(臘八粥: 음력 12월 8일에 죽을 쑤어서 부처에게 바치고, 서로 나누어 먹던 풍속에 따라 쑤는 죽) 냄새가 진동했다.

오늘은 춥긴 해도 모처럼 좋은 날이었다. 섣달이 된 이래 공무가 한가해졌고, 그동안 심신이 고됐던 공부나 어전시 등등의 관리들이 섣달 초여드레 전날 술 약속을 잡았다. 

유소호는 요즘 더 이상 술자리에 초대되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이 애송이는 요즘 휴가를 청하고 조정에도 나오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서 빈둥빈둥 돌아다녔다. 그럼에도 황제가 캐묻지 않자, 유 소상공이 황은을 입고 기세가 등등해서 그러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성심을 잃어서 그런 것으로 냉담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 됐든 연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유 소상공이 지금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길이라도 가다가 유소호를 만나게 되면 당연히 술자리에 초대할 수밖에. 그게 악몽의 시작이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용이 문을 걷어차고 들어옴에 따라, 매우 은밀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공개되고, 거의 동시에 사람들이 우르르 문 앞으로 몰려들어 방 안을 구경했다.

취한 듯 아닌 듯하던 유소호는 단번에 상대를 알아보고는 술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멱살을 잡아당겼다. 

“죽일 놈!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꼭꼭 숨어지내더니, 찔리는 것이라도 있었냐!” 

하지만 유소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용의 주먹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다가 뒤에 있는 탁자에 부딪히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말로 하세, 말로 해. 체통을 지켜야지!” 

누구는 이용을 붙잡고, 누구는 유소호를 붙잡으며 어지럽게 외쳐댔다. 

이용이 혀를 차며 유소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체통? 오입진 네놈 신분 주제에 체통이 가당키나 해! 봐주느라 너와 입씨름하지 않은 것이다. 이 자식아, 너와 관련된 일 중에 내가 모르는 게 있는 줄 아느냐?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봐주었더니, 먼저 욕을 해? 천지 분간 못 하는 멍청이가!” 

유소호는 바닥에 앉은 채 사람들이 손을 뻗어 가로막고 있는 이용을 올려다보았다. 세가 출신에 잘난 용모, 관을 쓰지 않고 꽃을 꽂지 않아도, 그저 지극히 평범한 창의를 입고 있어도, 고귀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철철 넘치는 사내. 자기 같은 빈한한 가문의 자제는 평생 흉내 낼 수 없는 기품. 이런 사내라면 분명 여인들이 줄줄 따르지 않겠나.

“내 신분? 그래, 나는 빈한한 가문 출신이다. 그래도 조상의 덕으로 지금 자리에 오른 너보다 훨씬 낫다! 네가 화류에 정신이 팔려 온갖 문제는 다 일으키고 다닌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을까. 경성에서 널 경계하지 않는 집안이 있나? 너와 나는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인데, 감히 내 내자에게 손을 대려 해!”

유소호가 벌떡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밀치고는 이용에게 달려들었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있던 이용은 울화가 조금은 가라앉기도 했고 유소호가 계속해서 난리를 부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대로 턱을 얻어맞고 말았다. 입술이 찢어지고 흘러내린 피에 안에 입은 흰 명주 겹옷이 붉게 물들었다. 

피를 봤구나! 

싸움을 말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누렇게 뜨기 시작했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이용이 유소호를 깔아뭉개고 주먹을 휘두르며 고함쳤다. 

“이런 미친놈이 내 명성을 더럽혀? 닥쳐라! 네 여인! 사창 일 하던 네 여인! 내가 그 여인을 거들떠보기라도 할까 봐? 너처럼 눈먼 놈이나 보물처럼 여기는 것이다! 가서 수소문해 보아라! 영두항의 송 낭자를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사창가를 오가는 사내에게는 유명한 여인이다! 그 음란한 여인을 모르는 사내가 있는 줄 아느냐? 하룻밤이라도 사내 없이는 못 사는 년이란 말이다. 너같이 눈먼 멍청이나 조강지처를 내쫓고 봉황알이라도 얻은 듯이 떠받들고 사는 것이다! 내가 너였다면 진작 밧줄로 목 졸라 죽였을 것이다! 그래야 가문이라도 깨끗이 지키지!” 

유소호는 속이 터질 것 같아서 이용을 붙잡은 채 바닥을 뒹굴며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네가 얻지 못하니 그리 말하는 것이지! 너야말로 똥 뒷간의 돌덩이다! 똥 같은 소리나 내뱉고! 남의 아내를 더럽히는 너 같은 나쁜 놈을 오늘 관아에 보내지 못하면 나, 유소호, 차라리 관복을 벗고 말겠다!”

시끌벅적하게 싸워대는 소리에, 주루 안팎의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었고, 재빠른 사람은 고변하러 곧장 관아로 달려갔다. 이 자리를 소집한 사람은 중서성의 한 관리로, 다른 사람은 기회를 보아 달아날 수 있다 해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꼴로 싸우고 내뱉는 말 역시 체통이고 뭐고 없어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사람들을 불러 엉겨 붙은 두 사람을 떼어냈다. 

“두 분 대인! 조정 요직에 있는 두 사람이 어떻게 이리 서로 모욕하며 다투는 것이오! 오해가 있어도 점잖은 사람답게 앉아서 이야기로 풀 것이지! 이러다가 어사에게 감찰받고 상주서가 올라갈 것이오!” 

그 말에 주위에 있던 관리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밖에 몰려드는 인파만 봐도 이 일이 위로 올라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관리들은 이제 두 사람을 뜯어말릴 겨를도 없이 우르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 아직도 속고 있다니. 가엾게 여기고 사실을 알려주마! 네 그 봉황알, 출신은 양민이나 사창이었다! 솔직히 말하마, 나도 아는 사이였다. 한때 시 대작하며 술도 마시고 금 연주도 듣는 사이였다고! 부탁하러 찾아왔기에, 옛정을 생각해서 그 지저분한 과거를 내가 지워주었다. 어멈이며 손님이며, 다 내가 쫓아 보냈다. 멀리 보내지 않았으니, 그들과 회포 풀고 싶거든 이 나리가 지금이라도 찾아오마! 

생각해 보면 나야말로 서로 간절히 원하던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준 은인이거늘! 

그래, 다행히 나는 공을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아니니 그 공을 알아달라고 하진 않아!”

이용이 껄껄 웃으며 일어나서 곁에 있는 둥근 의자를 들어 올려 유소호를 향해 집어 던졌다. 그 얼굴엔 웃음기 하나 없었다. 얼굴이 시퍼레져서 이를 악물고 한 번, 또 한 번 의자를 내리치며 또박또박 외쳤다. 

“너 같은 멍청이가 잘 지내는 걸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다! 너 같은 멍청이가 잘 지내면 안 되지! 내가 조상 덕을 본다고? 제기랄, 그럼 너는 누구 덕을 본 것이냐? 오월 지역 재난 구제?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망할 놈, 너도 잊은 것이냐? 오월에서 보름을 허비하면서 네가 한 것이 무엇이야! 조 대낭자가 보낸 서신에 적힌 방도대로 한 것이면서! 그 덕분에 네 지금 명성을 얻은 것 아니냐! 그게 아니면 너 같은 멍청이가 어찌 관리가 돼! 아, 그래 소관(小倌: 전문 교육받은 남창)이면 또 모르겠구나. 조 낭자가 그런 너를 따랐는데 귀히 여기지도 않고! 그래, 멍청이 놈이 눈깔만 있고 보는 눈은 없어서 어쩌면 다행이다! 밖에서는 재능이 없고, 집에서는 모친을 학대하는 처를 방관하고, 재능도 없고 덕도 없는 놈이 어디서 허세를 부려! 내게 이치를 논해? 이치를 논해? 제기랄, 살길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지 않아!” 

화가 잔뜩 난 이용이 온 힘을 다해 의자를 휘둘렀고, 안 그래도 취한 데다가 본디 몸이 약한 유소호는 아까까지만 해도 비슷하게 싸우다가 이제는 술기운까지 올라와서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이용이 휘둘러대는 대로 맞고만 있었다.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아까는 입으로 욕이라도 했건만, 이제는 서서히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꼴불견이로구나! 이러다가 인명 문제라도 나면 다들 탄핵으로 끝나지 않아! 평생의 관직 생활이 여기서 결딴나리라. 잘못하면 소중한 목숨도 휘말리겠구나!

그래서 대부분 도망갔고, 몇 명 남지 않은 관리들이 이용에게 우르르 몰려갔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얻어맞을까 걱정할 겨를도 없었다. 허리를 안고, 팔뚝을 잡고, 바닥에 엎드려서 유소호를 밖으로 끌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이 길게 남았다. 

밖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그걸 보고 화들짝 놀라서 “사람 죽는다!”고 외치며 허둥지둥 달아났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개봉부 아역들은 이리저리 밀려 비틀거렸다. 경성에 요은기의(廖恩起義)가 일어난 줄 알고 순간 큰 적을 맞이한 듯이 임전 태세를 취하며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는 바람에 온 주루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요은기의: 북송 요은이 군공을 세웠는데 조정에서 내린 상에 불만을 품고 희녕 10년에 거병한 일)

준의교(浚儀橋) 서쪽, 변하 강변에 있는 개봉부.

추관(推官: 주로 형벌 같은 사법 업무를 관장하는 관리) 한 명이 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시선이 수시로 문밖 계비(戒碑: 경고 문구가 적힌 비석)에 적힌 글귀로 향했다. 

‘너의 봉록은 백성의 고혈이며, 백성을 괴롭히면 하늘이 다 보고 있다,’

그 한 문장을 보고 있으니 복잡한 심경이 진정되지 않았다. 누구라도 평온치 않을 일이었다. 지금 그의 옥에 말썽을 일으킨 무리가 잡혀 왔기 때문이었다. 이 못난이들이 하나같이 종6품 이상 조정 관리인 게 문제였다. 내일 조정이 얼마나 떠들썩할지, 눈에 선했다. 

희녕 10년 말, 섣달 초여드레가 지나고 입동 이래 가장 맑은 날을 맞이했다. 날씨는 여전히 매서웠지만, 햇살이 비춰서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전(紫宸殿)에 서 있는 대신들은 전혀 그 포근함을 느끼지 못했다. 용상에 앉은 황제의 싸늘한 시선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몸 안팎으로 퍼지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등관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이고서 이정이 쏟아내는 살벌한 말을 듣고 있었다. 

“반복되는 언사 모두 남을 헐뜯는 말이었고, 순박한 용모로 간악한 마음을 품었으며……. 먼저 사창을 즐긴 죄가 있으며, 후에 처를 축출한 죄, 어미를 학대한 혐의에 이어 법도를 실추하는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부정하게 출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으며…… 유문장은 덕을 잃고, 예를 잃었으니 율법에 따라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폐하, 부디 파직하십시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대인, 그 말은 잘못된 것이오. 유문장은 그저 술김에 실언한 것이고, 먼저 주먹을 쓴 것은 이용이요. 지금 유문장은 아직 치료 중이오. 이용은 유문장의 처를 능욕한 것도 모자라 다치게 했소. 그 수모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소. 

신은 율법에 따라 중벌해야 하는 것은 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유 대인은 자극받아…….”

“유가 송씨는 사창이오. 관리 가문에 처로 들어온 것 자체가 악행이오. 용서할 수 없는 죄란 말이오. 이 대인이 무엇을 잘못하였소? 유 대인이 그 일로 먼저 욕했다 하지 않소. 사정을 모르는 것이오, 아니면 일부러 덮으려는 것이오?” 

이정이 매섭게 말을 자르며 그 대신을 위아래로 살피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형부(刑部) 걸 받았소? 어젯밤에 마차 열 몇 대가 성에서 분주하며 각 저택을 왔다 갔다 하더라고 하더니, 대인은 어느 집 걸 받았소?” 

쉰이 다 되어가는 시랑은 순간 얼굴과 목이 시뻘게져서 이정의 얼굴에 침이 튈 듯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고함치고는 거의 울 듯이 황제를 바라봤다. 

“폐하, 신, 동지간원(同知諫院) 이정이 허튼소리로 모함하는 것을 상주합니다. 이정은 신의 결백을 더럽혔습니다. 신, 소싯적에 진사가 된 이래 지금까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황제가 서안 위의 상주서를 집어 던졌다. 주위의 내시들과 대신들이 겁에 질려 끽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대전 안이 고요해졌다.

“나라에 재해가 잇달아 일어났고, 구제하지 못한 백성이 무수하다. 경들이 처리해야 할 큰일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이런 사사로운 일을 대전까지 끌고 오다니! 어사! 어사는 지금 이 정도로 한가한 것인가!”

황제가 벌떡 일어서서 아래에 서 있는 대신들을 내려다봤다. 얼마나 분노했는지 말소리가 덜덜 떨렸다. 

“폐하, 이건 결코 사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용의 말에 따르면, 유가 송씨는 사창이 맞습니다.” 

이정은 전혀 굽히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계속해서 말했다. 등관이 이때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숙였다. 

“폐하, 고정하소서. 어사대가 풍문을 근거로 간언이나 탄핵하는 것은 본디 일의 대소를 자세히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이정의 체면을 생각해준 말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이정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등관이 이어서 말했다. 

“신은 이 일이 그저 술김에 나온 과한 말이지, 사실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관련된 자들을 모두 압송한 일로 백성들이 수군대고 있습니다. 크게 퍼트릴 일이 아니니 조용히 하나씩 심문하는 것이 옳을 줄 아뢰옵니다.” 

그 말에 이정이 불복했을 뿐만 아니라, 채확도 사람들을 거느리고 앞으로 나서서 싸늘하게 말했다. 

“중승 대인,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립니까. 이용, 유문장이 저자에서 일을 벌인 바람에 지금 온 경성에 소식이 파다합니다. 소식을 감추려 하기보다 차라리 결단을 내리고 사실을 직시하세요!”

몰래 황제를 힐끔 바라본 등관은 식은땀을 훔쳤다. 싸늘한 시선, 아래로 처진 입꼬리.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성심을 추측하긴 어려워 보였다.

대전 안엔 또 의견이 분분해졌다. 대부분 이용 편이었고, 일부는 유문장을 동정했고, 더 많은 이는 불구경하듯이 남의 다리 긁는 말만 떠들어댔다. 

이때, 아무런 말 없이 대열 맨 앞에 서 있던 두 재상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오충이 심각한 얼굴로 나직이 물었다. 

“대인,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묻긴 해도 이 늙은이 입에서 쓸모 있는 말이 나오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왕규가 오늘은 웬일로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문장이 사창을 처로 들였는지 아닌지는 접어두고, 어미를 학대했다는 혐의가 있고, 예법을 실추한 일이 있으니 이건 대신들의 체통이 걸린 일이오. 더는 조정에 있어선 안 될 것이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 목소리는 곁에 있던 사람, 그리고 용상에 있는 황제에게까지 잘 들렸다. 대세를 따르고 자기 뜻을 표명하지 않는 삼지상공이 그렇게 말하자 다들 깜짝 놀랐다. 

등관은 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 늙은이, 유문장을 좌천하자는 말인가? 아니면, 파직?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왕규를 바라봤다. 

유문장이 언제 저자에게 밉보인 것인가? 그래서 이런 모진 말을 하는 걸까?

황제는 지금 이 순간 분노보다 서글펐다. 조정 가득한 대신을 둘러보아도 유문장을 위해 한마디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사창을 처로 들이고 어미를 학대했다는 이정의 말을 귀로 들으며, 시선은 바닥에 흩어진 상주서로 향했다. 그중에 개봉부 심문 기록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당시 싸우며 오간 말이 적혀 있었고, 그 글자에 두 눈이 따갑게 아팠다.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황제는 기운이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날 대전 안에 들어서던 소년이 쭈뼛대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였던 것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이 일은 술 취해 보인 추태일 뿐이다. 풍문으로 조정 대신을 입에 올리는 것은 옳지 않아. 중서성에서 확실히 조사하고 다시 상주서를 올리도록 하라.” 

황제는 지친 듯이 손을 저으며 조정 대신의 논의를 끊었다. 중서성이 급히 황제의 뜻을 받았고, 등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시운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유문장을 아직은 감쌀 생각인 듯했다. 

그리고 개봉부 옥에 갇힌 사람들은 그들을 기다리는 판결이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오늘 조정이 떠들썩했으리란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딜 가든 번쩍번쩍하게 차려입는 이 관리들이 하옥된 것도 처음이었다. 주위의 옥에서는 식사와 뒷일 처리를 같은 자리에서 하면서, 공기 가득 지린내, 썩은 내가 풍겼다. 개봉부에서 그들을 예우한다고 따로 모셔두기는 했으나, 다른 옥에 갇힌 죄수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그들은 코를 틀어막고 조심스럽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돈을 보냈는가? 어째서 아직 소식이 없지?” 

누군가 나직이 주고받는 말에 한숨이 터졌다.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술 마시고 싸움이 나서 추태를 부린 것일 뿐인데, 정말로 심문하진 않겠지?”

그 말에 또 누군가 한숨을 내쉬었다.

“추태? 어제 싸우면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잊었는가?” 

“내가 퍼트린 게 아닐세! 난 못 들은 체할 걸세!” 

사람들은 귀를 잘라서 숨기고 싶은 심정으로 웅성댔다.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뭘 해! 개봉부 아전이 보릿자루인가? 벌써 다 조사했을 걸세. 조정에도 보고했을걸?” 

중서성 관리가 그렇게 말하고는 축축한 벽에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복이나 빌게.” 

그 말에 다들 혼란스러워져서 우르르 문 앞으로 달려가 식솔을 불러달라면서 아역들을 불렀다. 전 재산을 탕진해서라도 뇌물을 바쳐야 할 곳에 바쳐야 했다. 지금 이 순간, 제 일이 아닌 듯이 조용히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유소호는 개봉부 의원에게 실려 가 진료를 받았다. 근골이 부러졌지만 다른 큰 문제는 없어서 상처를 잘 감싸고 약을 먹은 후 다시 옥으로 실려 왔다. 개봉부에서 그를 예우해서 특별히 나무판자 침상을 내어주었기에, 유소호는 두꺼운 이불이 깔린 침상에 엎드릴 수 있었다. 얼굴을 안으로 돌리고 있어서 자는지 깨어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용은 새 옷으로 갈아입기는 했으나 얼굴이 울긋불긋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유소호가 있는 침상 바로 앞에서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유소호의 다리가 미세하게 움직이자 혀를 차며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군. 어떻게 저런 멍청이가 있을 수 있지?”

그러더니 또 자조하듯 웃었다. 

“하긴, 나처럼 운 나쁜 놈도 있는걸. 남 좋은 일 하려고 그 모든 일을 했으니.” 

유소호가 고개를 돌리더니 큭큭 웃었다. 

“그런 걸 보고 좋은 일은 좋은 끝을 보고, 나쁜 일은 나쁜 끝을 본다고 하는 거다. 온갖 수단을 다 부려도 결국은 수포가 되지 않았어.” 

유소호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이용이 다리를 내리친 것이다. 이용이 싸늘하게 말했다.

“다 수포가 되면 어때서? 나는 아직 얻을 수 있지만, 너는 평생 다시 얻지 못한다. 네 그 창기나 끼고 살아라. 그러고 보니, 너의 그 죽고 못 사는 안사람은 어찌 한 번 찾아오지도 않는 것이냐? 혹 새 손님을 받으러 간 건 아니겠지?” 

그 말에 유소호가 이를 갈았다. 일어나려고 버둥거리자 이용이 멱살을 잡아 일으켜서 주먹을 겨눴다. 그런데 유소호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 여자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이용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다가가 쿡쿡 찔렀다. 너 죽은 거 아니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유소호가 먹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들 갈대는 부드럽고 질기다 하나, 겨우 반나절뿐이구려…….” 

(※ 蒲葦一時, 便作旦夕閒

동한말東漢末, 3대 사랑가라고 전해지는 ‘공작동남비孔雀東南飛’ 중에서)

이용이 일어나서 소매를 뿌리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옛일은 됐으니, 앞으로 다시는 날 건드리지 마라.” 

사흘 후, 중서성의 판결이 내려왔다. 술을 마신 데다가 일전에 내기 도박으로 돈을 잃은 일로 분쟁이 일어났다고 다들 입 모아 주장할 뿐, 그 오고 간 욕설은 아무도 거론하지 않았다. 중서성도 ‘술에 취해 뱉은 헛소리, 홧김에 서로 욕을 주고받은 것’이라는 한마디로 결론 지었다. 황제는 조정에 몸담은 몸으로 사람들 앞에서 추태를 보였으니 각각 관직을 한 등급 내리고, 이용과 유문장은 봉록 1년 삭감, 나머지는 반년 삭감하는 것으로 비준하고 일을 마무리 지었다.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사람들은 다행스러워한 다음엔 유소호에게 불만을 품었고, 행여 또 화가 미칠까 봐 다시는 술 마시자고 부르는 사람이 없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유소호는 정신을 잃고 잠들었다가, 옆에서 징징 우는 소리에 짜증 내며 깨어났다. 송옥루가 머리도 빗지 않고 누렇게 뜬 얼굴로 울다가 그가 눈 뜬 걸 보고 더 심하게 울었다. 

“이랑, 나 때문에 이런 고생을…….”

유소호는 아무런 말 없이 멀뚱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에 송옥루는 머리털이 주뼛 섰다. 주루에서 있었던 일이 어느 정도는 밖으로 퍼진 터라 조마조마해하면서 얼른 짐을 싸서 대명부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유소호가 풀려났다. 고작 한 직급 내려갔을 뿐이고, 여전히 조정에 높은 자리에 있는 걸 보고는 우선 그의 마음을 얼른 돌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당신이 잡혀간 후로 여기저기서 다 목이 잘릴 거라고 그래서, 여인네인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우리는 친척도 없고, 할 수 없이 부인들을 찾아갔어요. 여기저기 돈을 보내느라 당신한텐 장사만 보냈어요. 나는 시녀를 데리고 창피한 걸 무릅쓰고 그 관사의 안사람까지 찾아갔고…….”

“어머니는 모르시지?”

유소호가 말을 자르며 묻자 송옥루가 멈칫했다.

“그냥 지방에 갔다고만 했어요. 어떻게 말씀드려요…….”

계속 이야기하려는데 유소호가 얼굴을 안쪽으로 돌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피곤하니까 당신도 그만 가봐요.” 

송옥루는 얼떨떨해하다가 일어나서 살금살금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고, 세밑의 매서운 바람이 문틈으로 불어왔다. 저녁이 가까워진 시간이라 방 안이 어두컴컴했다. 바람이 불어 창밖의 나무가 스산하게 울부짖더니, 지붕을 휘감고는 거리 쪽으로 날아갔다.

임새옥은 장화단(妝花緞)으로 만든 대홍색 긴 소매 겹옷의 옷깃을 여미면서 한 손으로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연둣빛 비단 치맛자락을 잡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계단으로 올라갔더니, 두 시녀가 기척을 듣고 휘장을 들어 올렸다. 방 안의 열기가 얼굴에 훅 불어왔다. 

“아유, 추워라, 추워.”

임새옥은 방 안에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시녀가 내민 뜨거운 차를 받아서 마시고서야 몸이 좀 녹았다. 안에서 쿵 소리가 나더니 이어서 탁탁 소리가 마구 들렸다. 

“아이고, 또 무슨 일이야?” 

임새옥은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화항에 앉아 글을 쓰던 전가아가 탁자에 놓인 종이, 붓, 벼루를 마구 던지고 있었다. 쏟아진 먹이 이불에 다 묻은 걸 보자 저절로 고함이 나왔다. 

“맞아야겠네! 이게 무슨 짓이야!” 

화들짝 놀란 전가아는 화가 잔뜩 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손가락질했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내 아버지를 해치려고 온 나쁜 사람!” 

임새옥은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휙 돌아서서 두 시녀를 노려보자, 두 사람이 어색한 얼굴로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임새옥은 시녀를 부를 겨를 없이 전가아에게 다가가서 눈물은 흐르지도 않는데 엉엉 소리만 내는 아이를 달랑 들어 올려서 화항 위에 앉혔다. 

“울지 마! 계속 울면 늙은 요괴를 불러올 거야! 다시는 아버지 못 만나!” 

당과보다 효과적인 말이라, 기겁한 전가아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울분에 찬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며 임새옥을 노려봤다. 

임새옥은 콧방귀를 뀌고는 일단 바닥부터 정리했다. 대가족이 여기에 눌어붙어 있으면 문제가 생길 줄 진작 알았다고 툴툴거렸다. 그런데 소 노부인은 작정이나 한 것처럼 먹이고 입히면서 친척들을 붙잡아서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어렵게 달래서 다 돌려보냈더니, 어멈, 시녀를 잔뜩 남기고 갔다. 이것들이 하나같이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꼴에 속이 시끄러웠다. 

“전가아, 너, 내가 싫어졌어?” 

정리를 마친 임새옥은 전가아 곁에 앉아서 정색하고 물었다. 전가아는 뻣뻣하게 서서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임새옥은 다그치지 않고 해바라기 씨를 한 움큼 쥐어서 먹으면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난 또, 우리가 엄청 친한 줄 알았지. 알고 보니 넌 벌써 내가 싫어졌구나.” 

해바라기 까먹는 소리에 전가아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절대로 자기를 달래주지 않을 여인의 수다가 이어졌다.

“……예전에는 누이, 누이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더니. 얼마나 좋았어! 맛있는 거 주지, 놀아 주지, 너랑 편 먹고 싸움도 했잖아. 며칠이나 됐다고, 이렇게 변하다니…….”

“누이가 아니잖아! 계모잖아! 사람들이 그랬어! 계모는 나쁜 사람이래!” 

못 참겠다는 듯 돌아보고 쏘아붙이던 전가아의 눈가가 그렁그렁했다. 임새옥은 해바라기 씨를 내려놓고 아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표정을 풀고 말했다. 

“전가아, 그럼 대답해 봐. 너한테 잘해주던 누이는 나지? 네 계모가 된 사람도 나지? 둘 다 난데, 왜 갑자기 내가 나쁜 사람이 되었어? 네 아버지가 널 이뻐하고, 나도 널 이뻐해. 널 이뻐하는 사람이 많아진 건데 싫어? 넌 네 아버지가 좋고, 나도 네 아버지가 좋아. 네 아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진 건데 싫어?” 

전가아에겐 조금 어려운 질문이었다. 전가아가 눈을 깜빡이는 걸 보고 임새옥은 손뼉을 짝짝 쳤다. 

“나랑 노는 게 싫어졌대도 뭐, 괜찮아. 나중에,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닌 거 같으면 그때 다시 놀자.” 

그러면서 하늘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밥은 먹어야 해.” 

임새옥은 붉은 비단 겉옷을 들어 올리고 전가아의 손을 잡은 후 밖으로 나갔다. 그 기척에 시녀 둘이 밖에서 휘장을 젖히며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준비가 다 됐어요. 안 그래도 나오시라고 하려던 참이에요.”

노아촌 저택은 예전과 변함없었다. 다만 소금남이 두 사람의 거처를 오른쪽 마당으로 옮겼다. 예전에 이씨와 산 곳은 왼쪽으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았다. 

왼쪽 마당처럼, 이쪽 거처에도 양쪽에 상방이 있고 객방 세 칸, 초간(梢間: 집채 맨 바깥쪽에 있는 방으로 장작이나 짚을 두는 곳) 한 칸이 있었다. 

지금은 객방을 내실로 고쳤고, 초간을 찬청(餐廳: 식당)으로 개조했다. 임새옥이 기거하는 곳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데 집에서처럼 마당에서 먹을 수는 없어서였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녀 네댓 명이 찬청 입구에 서 있다가 임새옥 등이 다가오자 웃으며 맞이했다. 임새옥은 “부인, 안녕하세요.”, “소야, 안녕하세요.” 하는 소리가 성가시기만 했다. 전가아를 데리고 들어가 보니 시녀들이 우르르 접시를 들어와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물러가, 물러가.” 

임새옥이 손을 휘저었다. 시녀들이 의아한 듯이 바라보자, 다 먹으면 다시 와서 시중 들면 된다고 말했다.

시녀들이 서로 얼굴만 마주 보더니, 그중에 나이가 좀 많은 아이가 단정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부인, 노부인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부인은 시원스러운 분이라고 하셨어요. 저희가 잘못한 게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어색하지 않게 모실게요.” 

힐끔 쳐다봤더니, 소 노부인 곁에 있던 대시녀였다. 이름이 뭐더라…….

“옥매예요.” 

“난 사람들이 잔뜩 에워싸고 있는 게 싫어서 그래. 물러가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던 옥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옥매가 재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큭큭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사그라졌다. 

임새옥은 꿍얼거리다가 전가아가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걸 보고 밥을 담아 주었다. 

“먹자.” 

전가아가 입을 내밀고 있는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혼자선 못 먹는다는 말 하지 마. 손도 발도 있는 애가 그것도 못 해?” 

그녀는 탁자 가득한 음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금단은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거야. 금단이 있었으면 싹 먹어 치웠을걸?”

“그럼 오라고 하면 되지! 난 대낭이 구운 병자 먹을 거야!” 

전가아가 진하고 향긋한 죽, 은사어, 정교한 달걀 박병(薄餠: 얇은 밀가루전)을 짜증스러운 듯 바라보며 꿍얼거렸다. 

“돼지머리 먹을 거야!” 

임새옥은 웃음을 터트리며 전가아의 머리를 콕콕 찍었다. 

“산해진미를 두고 그런 걸 먹고 싶어 하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면서 내일 대낭 집에 데리고 가준다고 달래고는 자기도 마음껏 먹었다. 배불리 먹어도 음식이 반이나 남은 걸 보고 전가아에게 더 먹으라고 하려는데, 전가아가 폴짝 의자에서 내려가더니 저쪽에 가서 옷을 젖히고 볼록 나온 배를 두드렸다. 

“안 먹어! 이미 익었어!” 

금단이 볼록한 배를 때리며 놀리던 걸 보고 배운 모양이었다. 얼마나 웃긴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밥을 다 먹고 옥매를 불렀더니 옥매가 웃으며 들어왔다. 뒤에 시녀가 뜨끈뜨끈한 놋쇠 대야와 수건을 들고 들어왔다. 임새옥은 직접 손을 닦고, 밖으로 달아나려는 전가아를 끌고 와서 닦였다. 시녀들이 밖에서 정리하는 걸 보고 물었다. 

“옥매, 돈을 얼마나 썼는지 이야기해 보렴.”

“시녀들 월전까지 해서 백 냥이에요.” 

“백 냥? 그 돈을 누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새옥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자 옥매가 참지 못하고 풉 웃었다. 그러고는 금세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노부인과 고내내를 비롯한 친척들이 드시고 쓴 돈은 포함하지 않았어요. 노부인께서 내셨죠. 그러니 나머지는 당연히 부인이…….”

이런 제길!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 많은 사람이 내 피를 빨아 먹고 있었어! 바로 쫓아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옥매는 그녀의 놀란 모습에 역시 노부인의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참았다. 

“부인, 분부하실 일이 있나요?”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곧 웃어 보였다. 

“없어. 이만 물러가. 장부 정리해서 가지고 오고.” 

옥매는 직접 휘장을 젖혀서 임새옥과 전가아를 배웅했다.

겨울은 해가 짧아서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바람은 멈췄는데 여전히 서늘했다. 

“참, 아버지는 언제 돌아오셔?”

전가아가 임새옥의 손을 잡아당기며 묻자, 옥매가 듣고 바로 대답했다.

“소야, 부인께 불경하면 안 돼요. 어머니라고 불러야죠.” 

임새옥은 웃으며 별말 없이 몰래 전가아의 손을 쥐었다 놨다.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사람이 모르는 비밀이 생겼다는 사실에 전가아는 조금 들떠서 코웃음 칠 뿐 옥매를 상대하지 않았다. 

“부인, 전가아가 어려서 그래요. 제가 잘 가르칠게요.” 

“괜찮아.” 

옥매가 허둥지둥하는 말에 임새옥은 웃어 보이고는 소금남이 돌아올 날을 셈했다. 

“내일, 모레, 늦어도 사흘 뒤엔 오시겠다.” 

방으로 들어가자 시녀 둘이 재빨리 다가와 옷을 벗기려고 했다. 임새옥은 두 사람을 내보내고는 전가아와 잠시 실 뜨개 놀이를 하다가 달래서 일찍 재웠다. 종이와 붓을 들고 탁상 앞에 앉아 집안일, 과수원 일을 생각하는데 옥매가 밖에서 살며시 하는 말이 들렸다. 

“부인, 늦었어요. 일찍 쉬세요.” 

그 말에 뻐근한 목을 주무르던 그녀는 옥매를 불러서 종이를 건넸다. 

“옥매, 부엌어멈에게 전하고 이대로 하라고 해줘.” 

“소인이 글을 조금 알아서 다행이에요.” 

등불을 내려놓은 옥매는 웃으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끼니마다 준비할 음식의 수량, 종류가 적힌 걸 보고 싱긋 웃으며 아무런 말 없이 물러가겠다고 인사했다. 그때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일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 집 지킬 사람 둘만 남기고 다 나랑 어디 좀 가자.” 

옥매는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들고, 머리카락을 풀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부인……. 어디에…….”

임새옥이 웃는 듯 마는 듯 자길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며칠 동안 바람 불던 날씨는 맑아졌지만 건조하고 추웠다. 옥매는 시녀와 어멈들을 데리고 정원에 서 있었다. 임새옥은 담비 갖옷을 걸쳤고, 팔길상(八吉祥) 모자를 쓰고 붉은 창의를 걸친 전가아가 폴짝폴짝 뒤따라 나오는 걸 보고 다들 고개를 숙였다.

“노부인이 남아서 날 도우라고 하셨다니, 오늘은 일을 좀 시켜야겠어.”

임새옥이 웃으면서 옥매에게 마차는 준비됐는지 물었다. 옥매가 고개를 끄덕이자, 임새옥이 전가아를 데리고 앞장을 섰다.

“그럼 다들 마차에 타. 우리, 과수원에 갈 거야.” 

먼저 마차에 올라타는 그녀를 보며, 다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서 얼굴만 번갈아 봤다. 

“언니, 뭐 하시려는 걸까요?” 

나이 어린 시녀 아이가 다급하게 옥매에게 물었다. 

“가보면 알겠지.” 

옥매가 웃으며 하는 말에 다들 물어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시녀와 어멈들은 마차 세 대에 나눠타고 임새옥의 큰 마차를 따라 십방촌으로 향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노씨는 어머니를 정원에 데리고 나와 앉혀두고 곁에서 시녀들이 닭 모이 주는 걸 보고 있다가 임새옥이 마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서둘러 맞이하러 나갔다. 

“사위는 아직 안 돌아왔고?” 

노씨가 의자를 내어주며 물었다. 밖에 마차 세 대가 더 서 있는 걸 보고 궁금한 듯 고개를 내밀었다. 

“네 어미를 거덜 낼 생각이냐? 전가아 하나도 못 견디겠는데, 집안사람을 다 데리고 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가아가 폴짝 뛰어오면서 재빨리 팔을 내미는데 “대낭, 낙병(烙餠: 라우빙. 밀가루, 마유, 다진 파, 소금, 달걀, 깨, 청고추로 구운 떡)이랑 돼지머리 먹을 거예요!” 하고 꽥꽥거리자 찰싹 팔을 때렸다. 

“대낭이라니! 이제 외할머니라고 불러야지!” 

금단이 기척을 듣고 뒤쪽에서 달려 나오자, 전가아가 버둥대며 노씨 품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뭐라 뭐라 이야기하더니 후원으로 가버렸다. 

“돈 드릴게요.” 

임새옥이 전대를 건네자 노씨가 전대 무게를 가늠하면서 대답했다. 

“낙병이야 채소만 조금 볶으면 금방 되지. 과수원으로 보내마. 응? 어디서 불러온 사람들이냐?”

노씨가 웃으며 묻는 말에 임새옥이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집에서 노는 사람들이에요. 먹기도 많이 먹고 돈도 많이 써요. 일이라도 시켜야지, 아니면 손해게요?” 

그 말에 노씨가 깔깔 웃었다. 

“맞는 말이다. 너 다 쓰고 나면 나도 좀 쓰자. 아직 정리 못 한 방이 있다.”

“돈 줄 거예요?” 

임새옥의 말에 노씨가 흥흥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임새옥은 곧 마차를 타고 사람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겨울엔 말이야. 나무가 휴식기에 들어가. 과수원을 정리하고 월동, 방충 준비를 해야 해. 다들 알다시피, 우리 집엔 큰 천막도 있고, 소작농은 별로 없어서 너무 바빠. 노부인이 일부러 남겨주고 가신 거니까, 집안일, 농사일도 다 똑같이 해야지.” 

임새옥은 과수원에 서서 막 마차에서 내려서 두리번거리는 어멈과 시녀들을 모아두고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집에 불이 난 듯이 어수선해졌다. 임새옥이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뭘 잘못했어? 너희를 부리면 안 되나?”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는데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중 한 어멈이 용기 내서 물었다. 

“소인, 해본 적이 없는 일이라서, 잘못하다가 부인의 나무를 망칠까 봐…….”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어려운 거 없어. 평소처럼 하면 되지. 수다 떨면서 할 수 있는 일이야.”

그 말에 다들 목을 움츠렸다. 다들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임새옥은 임의로 사람들을 나눴다. 나이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을 짝지어주어 모두 세 조로 나누고 일일이 일을 분배했다. 

“너희는 잘라낸 나뭇가지, 낙엽을 쓸어 모아서 공터에 가서 태워. 너희는 나무 아래 흙을 모아주고, 너희는 나무에 물을 주면 돼.” 

이야기하고 있는데 산 아래서 소작인들이 쇠스랑 같은 도구를 가지고 와서 자기들과 다른 차림새인 이 사람들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시녀, 어멈들은 민망해져서 다른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시킨 대로 일하러 갔다. 

“대저아. 이런 일은 우리가 하면 되는데요.” 

소작인들은 그 어색한 동작,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대저아 말대로 나무를 다듬어두고, 과수원을 정리하는 데 하루 이틀이면 될 것을…….”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그들의 말을 잘랐다. 

“괜찮아요. 어차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에요. 한가해서 병이 나느니 움직이면 몸도 튼튼하고 좋잖아요.”

소작인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한가한데도 병이 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임새옥이 말을 이었다.

“연말엔 어찌 됐든 강녕에 다녀와야 해요. 빨라도 봄이나 되어야 돌아올 테고. 과수원 정리하고 나면 별일은 없어요. 날씨가 좋아지고 날이 빨리 풀리면 잊지 말고 흙을 갈고 돼지우리에 먹이도 줘야 해요. 싹 트면 물도 주고. 다른 건 내가 돌아와서 하면 돼요.”

소작인들은 열심히 기억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은 사람들을 보내고 오씨 거처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과수원에 들어가 함께 일했다.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었고, 그렇게 연달아 사흘 일하다 보니, 귀하게 살아온 소씨 가문의 시녀, 어멈들은 사람 꼴이 아니게 되었다. 

이날 정오, 밥을 가져다준 노씨가 오씨 거처에서 임새옥과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멈 하나가 털썩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부인, 제가 잘못했습니다.” 

노씨와 오씨는 화들짝 놀라는데, 임새옥은 태연하게 병자를 씹으면서 느긋하게 물었다. 

“어멈, 자네가 무슨 잘못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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