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57)

날씨가 쌀쌀해진 10월 중순, 십방촌 천막 밖에 있는 땅은 모두 고르게 펼쳐져 있었다. 유채도 갈수록 푸르러져서, 겨울이 가까워져 스산한 이 땅에 생기를 더해주었다. 전보다 한가해진 농부들은 두어 명이 밭에 비료를 뿌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삼삼오오 쭈그리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을 아이들은 둥근 뭉치 같은 것을 굴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가장 어린 전가아는 처음에 마을에 왔을 때보다 훨씬 튼실해졌지만, 마을 아이들보다는 아니라서 아차 하다 발랑 넘어졌다. 그 모습에 마을 여인들이 깔깔 웃었다. 

“서둘러, 서둘러! 가서 소 몰라니까, 말 안 듣고 왜 이거 가지고 놀아!” 

금단은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소야 차림을 하고서 소매로 콧물을 스윽 닦았다. 그러더니 전가아를 잡아끌고서 저쪽에 웅성웅성 소를 모는 아이들을 가리켰다. 전가아는 입을 삐죽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대저아가 산에 길을 내두었어. 우리 거기 가서 놀자!” 

전가아는 아이들을 부르고는 우우 소리를 내며 둥근 뭉치를 차면서 마을 밖으로 달려갔고, 그 말에 아이들이 따라서 뛰어갔다. 금단은 자기 대신 놀이 방법을 정하는 사람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투덜대며 따라갔다. 

흰 비단 웃옷에 남색 치마를 입은 임새옥이 천막에서 돌아오다가 그걸 보고 바쁘게 소리쳤다. 

“천천히 가! 넘어진다, 전가아, 오늘은 일찍 돌아와. 네 할머니 집에 돌아가야지!” 

그래도 아이들이 대답도 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자 뒤쫓으며 소리쳤다. 

“나뭇가지를 꺾기만 해봐! 때려줄 거야!” 

마을 입구에 쭈그리고 있던 농부들이 실실 웃었다. 

“대저아, 걱정하지 마라. 아이들이 널 얼마나 무서워하는데. 절대로 못 그런다.” 

임새옥 역시 빙긋 웃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대숙들, 오후에 별일 없으면 과일나무 심게 산에 땅 좀 파줄 수 있어요?”

“뭘 그리 체면을 차려. 안 그래도 한가해서 몸이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대저아가 아니었다면 과일나무가 그렇게나 많은지도 모를 뻔했지. 고맙다, 대저아. 우리 집에 심은 그 대추나무, 내년엔 분명 대추가 잔뜩 영글겠더라. 돈이 꽤 되겠어.” 

마을 사람들이 웅성대며 말했다. 임새옥은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엔 시녀 둘이서 한창 외할머니 옷을 빨고 있다가 그녀를 보고 인사했다. 

“부인과 노야는 대저아 혼수 준비한다고 성에 가셨어요. 오후에나 오신대요.” 

임새옥은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새로 단장한 저택을 바라봤다. 벽은 새로 칠했고, 마당 구석에 만들다 만 가구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보름 동안 일어난 일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정주에서 소금남과 이야기를 마치고 십방촌으로 돌아온 이래, 보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슬슬 불안해지고, 혹시 소가 노부인이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혼사를 허락하지 않은 건가 의심스러웠다. 

노씨에게 알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일단 기회를 봐서 소가 점포에 찾아가 봤다. 그런데 문이 닫혀 있었다. 재해 때문에 소가의 장사 방향이 바뀌어서 여기 점포는 쓰지 않는다나. 

순간 얼떨떨해지고 화가 치밀었다. 

내가 강남으로 직접 찾아가면 되지, 무서울까 봐! 

그런데 출발하기 직전인 10월 초, 강녕에서 온 사람들이 우르르 나타나더니 집으로 들이닥쳤다. 선두엔 놀랍게도 소 노부인이 서 있었다. 

“대낭자, 기다리느라 초조했지?”

소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들어왔다. 들어오라는 말도 없는데 알아서 어슬렁어슬렁 들어와서는 마당에 있는 팔걸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 노인네가 강녕에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심정을 너도 느껴 보라고 그랬지. 그러게 누가 신용 없이 굴랬나! 내가 강녕에서 얼마나 목 빠지게 기다렸는지 아는가!” 

임새옥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 되었다. 온 마당을 차지한 울긋불긋한 사람 중에 소금남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훑어보는 걸 본 소 노부인이 팔걸이를 내리쳤다. 

“그만 보게. 안 왔네. 혼인하기 전에 만나는 거 아닐세.” 

그러면서 곁에 있는 시녀에게 말했다. 

“얘야. 근래 좋은 날이 있는지 말해 보아라.” 

곁에 있는 경단처럼 동글동글하니 어여쁜 시녀가 생글생글 대답했다. 

“노부인, 이미 봤는데요, 근래엔 좋은 날이 없어요. 내년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갑자기 화려한 차림을 한 귀인들이 잔뜩 나타난 걸 본 노씨와 조삼랑은 그저 어느 댁 나리의 식솔인 줄 알고 조심스럽게 듣고 있다가 한참 만에 뭔가 이상한 걸 깨닫고는 임새옥을 잡아끌고 물었다. 

“어느 댁에서 오신 거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임새옥은 그제야 얼굴을 붉히며 소금남과의 일을 이야기했고, 시녀들과 함께 마당에 널어둔 조롱박을 쳐다보고 있는 소 노부인을 가리키며 누군지 알려주었다. 노씨는 당장 안색이 변해서는 조심스러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후다닥 달려가 시녀 아이를 잡아당겼다. 

“저리 가라, 저리 가. 어디에서 온 큰 인물인가 했더니, 혼인 말 넣으러 온 거로구먼.” 

노씨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며 모두를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그럴싸하게 차려입고는, 어째서 법도도 모르실까? 빈손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노씨의 말이 끝나기도 소 노부인이 손을 저었다. 시녀 네댓이 손목, 머리에서 화려한 장신구를 빼내 들었다. 금비녀, 취매화 비녀, 진주 비녀, 금목걸이, 금반지, 금팔찌, 보석 반지, 콩알만 한 진주를 산처럼 쌓아서 노씨 앞에 놓았다. 말주변이 좋은 시녀 하나가 향긋한 향낭을 풀어서 생글생글 웃으며 건넸다. 

“급하게 오느라요. 대낭, 타박만 하지 마셔요.” 

노씨는 휘황찬란한 물건에 눈이 다 아른거렸다. 코를 찌르는 향긋한 냄새, 나긋나긋한 음성에 화가 어느새 다 풀려서 싹 날아갔다. 요즘은 그녀도 돈이 꽤 있는 편이지만, 이런 장신구를 본 적이 있어야 말이다. 속으로 이중에 아무거나 가져다 팔아도 그녀 돈통에 있는 만큼 돈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받고서 눈이 휘어라 미소 지어 보였다. 

“그러게, 이런 댁에서 실례될 일을 할 리가 있나!” 

그러고는 돌아서서 한쪽에서 넋을 놓고 있는 시녀를 불러 차를 내오게 했다. 시녀 둘이 식겁해서 부엌으로 달려갔다. 

임새옥은 이 두 사람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누구 할 것 없이 똑같이 창피했다. 

문밖엔 사람들이 잔뜩 몰려있었다. 천막 채소 덕에 요즘 마을에 오가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사실 다들 사내이고, 설사 여인이 오더라도 마을 여인과 비슷하게 투박한 심부름꾼 어멈이었다. 그림에서 나온 듯한 선녀 같은 여인들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시녀들의 용모는 둘째치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옷, 휘황찬란한 머리 장식만 봐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신선도 이런 차림은 아닐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시녀들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장신구를 빼서 노씨에게 주는 걸 보고는 더더욱 난리가 났다. 노씨가 쫓아가 사람들을 내쫓고 문을 닫은 후에야 사방이 조용해졌다. 

노씨는 자기 시녀가 옮겨온 다른 팔걸이 의자에 앉아서 소 노부인과 마주 앉았다. 그리고는 평소에 자주 봤던 지주 아내를 흉내 내며 입을 열었다. 

“댁이 어떤 가문인지 나는 모르겠고, 어찌 됐든 내 딸을 달라고 온 것이니, 제대로 이야기해 봅시다.” 

노부인 곁에 둘러선 시녀들은 노씨의 기름 자국이 진 옷, 어울리지 않는 옷 색깔을 바라보며 입을 가리고 웃었다. 노부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들이 담장에서 긁어온 해바라기 씨를 깔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얼마면 되겠나?” 

임새옥은 하마터면 시녀에게서 차를 빼앗아 노인네 얼굴에 뿌릴 뻔했다. 시커메진 얼굴로 헛기침하며 노씨에게 눈치를 주었지만, 노씨가 상대할 리가 있나. 노씨는 근질근질한 손가락을 부여잡고 입을 열었다. 

“나는 촌부라 말을 돌릴 줄 모릅니다. 우리 대저아는 돈도 많이 벌었고, 밭도 다 사들였어요. 저 아이 명의로 된 재산이지만, 댁네가 가난하든 부자든 아무것도 못 가져가요!” 

노씨가 이 조건을 한두 번 입에 올리는 게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눈앞의 노부인 역시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고 손을 저었다. 

“난 이 아이 건 필요 없네. 내 것도 남아도는걸. 더 큰 걸 말하게.” 

처음으로 노씨의 속셈을 들은 임새옥의 얼굴이 구겨졌다. 

“어머니, 그건 내 거예요. 왜 어머니가 달래요? 내 건 아무도 건들지 못해요!” 

그러고는 소 노부인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노씨를 밀어냈다. 

“식구 굶어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저리 가요. 내 일은 내가 이야기해요.” 

하지만 노씨는 꿈쩍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덩치를 임새옥이 어떻게 밀어내랴. 노씨가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네가 이야기해? 네가 뭘 이야기해? 말주변도 없는 것이! 한번 망했으면 됐지, 두 번 망하려고?” 

임새옥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계속 이러면 나 혼인 안 해요. 난 친정으로 돌아온 여인네 신분이고, 억지로 혼인시키는 법도는 없어요!”

그 말에 노씨는 아무렇지 않은데 소 노부인은 뜨끔했다. 

저 여인 둘 다 몽둥이처럼 융통성 하나 없어 보이는데, 진짜로 틀어지면 안 되지! 그랬다간 큰 난리가 나는데! 

소 노부인이 다급하게 시녀를 불러 대저아를 앉히라고 하고는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해야지, 해야 해. 내 아들놈과 이야기했다지만, 어미인 나하고도 이야기해야지.”

임새옥은 소 노부인의 놀리는 듯한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시녀가 들고 온 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런 얘긴 아직 그 사람하고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제가 정한 거예요. 오늘 노부인과 확실히 이야기하는 게 낫겠어요. 나중에 괜히 내가 모자 사이 이간질했다고 원망받고 싶지 않아요. 조건은 하나예요, 혼인한 후에도 난 강녕부에 안 가요. 난 여기서 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 노부인이 벌에 쏘인 듯이 벌떡 일어섰다. 노씨마저 눈을 부릅뜨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우리 집은 좁아서 너희 부부가 못 산다! 알아서 집 사서 나가라!” 

“이런 속이 시커먼 여인네 같으니라고!”

소 노부인은 지팡이도 내팽개치고 펄펄 뛰며 임새옥을 향해 삿대질했다. 

“내가 고생고생해서 키운 자식을 홀랑 가로채려고? 이런 며느리를 미쳤다고 들일까!”

그러고서 휙 돌아서서 나가는데 임새옥은 앉아서 잡지도 않았다. 노씨만 당황해서 잡으려다가 노부인이 뿌리치는 소매에 얻어맞고는 노부인이 밖으로 나가는 걸 바라보며 후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갔던 사람들이 씩씩대며 우르르 들어오길래 웃으며 반기기도 전에 시녀들이 아까 줬던 장신구를 들어 올리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달랄 수도 없어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개야, 고양이야 욕해대는 사이 밖에 있던 마차들이 우르르 떠나버렸다. 

“이 망할 계집!” 

노씨는 손에 거의 들어왔던 보물들이 온기를 채 느껴 보기도 전에 날아가 버리자, 답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서 임새옥의 머리를 쿡쿡 찔렀다. 

“만날 집에서 불효하는 것도 모자라서, 감히 그런 불효막심한 말을 해! 이야기하더라도 나중에 사위 붙들고 이야기하면 되지! 목석같이 멍청한 것아!” 

임새옥은 머리가 아파서 화다닥 피하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야기 안 끝났어요. 아예 안 간다고 한 것도 아니고요. 과수원을 만들 건데, 아직 나무 하나 못 심었다고요. 어떻게 두고 가요. 그 깊은 저택에 가서 지루한 여인들이랑 수다나 떨라고요?” 

그렇게 설명해도 노씨는 연달아 사흘 욕을 해댔고, 질린 임새옥은 아예 산으로 옮겨갔다. 

산에서 돼지와 닭, 오리를 기를 거라서 정주로 가기 전에 사람을 시켜 세 칸짜리 작은 집을 지어두었는데, 그 바로 옆에 새끼돼지가 뛰어노는 돼지우리가 있었다. 마을에 혼자 사는 여인이 시어머니와 함께 거기 묵으면서 새로 사 온 새끼돼지를 돌보고 있어서, 임새옥도 밤에 무섭진 않았다. 

“대저아, 나도 예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녀 봤고, 과수원도 본 적 있지만, 안에 짐승 기르는 건 또 처음이네.”

여인은 성이 오가요, 올해 마흔 몇 살이었다. 아들도 딸도 없이 힘들게 사는 형편이라 반 칸짜리 초가집뿐이었다. 젊었을 때는 재가하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홀로 사는 시어머니 생각에 그냥 곁에 남았다. 우직하고 성실한 사람이라 임새옥은 전부터 그녀가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산에서 집을 지키도록 했다. 돈도 좀 주고 그래서, 오씨가 입에 혀처럼 납작 엎드렸다. 

그런 임새옥이 산에 살러 오자 조상님 받들 듯이 모실 생각이었는데, 하필 임새옥은 뭐든 직접 하는 데다가 음식 솜씨도 좋아서 도우려야 도울 것이 없었다. 오씨는 오늘 날씨도 좋은 김에 그녀의 이불을 꺼내 볕에 말리면서 돼지우리에서 한창 바쁜 임새옥과 이야기를 나눴다. 

임새옥은 돼지우리에서 나와서 직접 만든 장화를 벗었다. 냇가에 손을 씻었더니 산에서 흐르는 물이라 뼈가 에이도록 손이 시렸다. 그녀는 부르르 떨며 손을 탈탈 털었다. 

“별거 아니에요. 표준적인 무공해 과수원엔 반드시 나무에 등불 하나, 벌레 주머니 하나를 걸어두고, 나무 아랜 풀을 잔뜩 깔고, 정원 안에 돼지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 있죠.” 

그 말에 오씨는 어리둥절해져서 너털웃음을 지었다.

“대저아는 아는 것도 참 많네. 나는 처음 듣는 얘긴데.” 

임새옥은 자신도 웃으면서, 들어봤다면 그게 더 이상할 거라고 생각했다. 햇볕 아래 앉아 땀을 말리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누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손갓을 만들고 바라봤더니, 새것으로 보이는 회색 장포를 입고 두건을 쓴 사람이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오씨도 보고는 손갓을 만들고 바라봤다. 

“낯선 얼굴인데.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대낭자를 찾아온 거 아닐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임새옥이 웃으면서 치맛자락을 들고 뛰어 내려갔다. 가까워진 그 사람의 얼굴을 봤더니 그 훤칠한 사내였다. 오씨도 저 사내가 소문이 파다한 대저아의 정혼자인 걸 알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어쩐 일이에요?” 

임새옥이 빙긋이 웃으며 묻고는 손을 옷에 닦았다. 급하게 올라왔는지 사내 콧등의 땀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여인이 자신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반기는 것처럼 보이자, 소금남의 입가에 감추지 못한 미소가 피어났다. 산 위에 어렴풋이 보이는 다른 여인의 모습, 그리고 산을 오가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서 여인의 손을 잡고 헤어져 있는 동안 쌓인 그리움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노부인한테 혼났어요?” 

임새옥은 그가 입술만 달싹이는 걸 보고는 웃으면서 그를 산 위로 인도했다. 

“혼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겠죠.”

소금남이 빙긋 웃더니 여인의 머리에서 지푸라기 하나를 떼어냈다. 여인은 머쓱한 듯 혀를 낼름 하더니 그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고는 흔들었다. 

“막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냄새 나나 볼래요?” 

군살이 살짝 박힌 자그마한 손이 제 눈앞에서 흔들거리자 애가 탄 소금남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서야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냄새는요. 향긋하기만 한데요.” 

임새옥이 얼굴을 붉혔다.

“이런 말도 할 줄 알아요?” 

그렇게 작은 집에 도착하자, 어느새 의자를 준비한 오씨가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샘물로 물을 끓여 차를 내어주고는 문 앞에 앉아 신발 천을 꿰맸다. 안팎에 있는 사람에게 모두 그녀가 보일 테니, 사내와 여인이 단둘이 있다는 오해를 피할 수 있었다. 

“서두르지 말고 어머니께 잘 이야기해요. 이 과수원에 2~3년은 사람이 있어야 해요.” 

임새옥이 차를 권하면서 말하자 소금남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요. 이미 말했고. 화는 벌써 풀리셨어요. 다만 체면 생각에 어쩌지 못하시는 것뿐이지. 당신이 먼저 숙이고 들어가면 어머니도 아무 말 안 하실 겁니다. 지금도 봐요, 나더러 가보라고 하도 재촉해서 이리 왔잖아요.” 

그 말에 임새옥은 기분이 좋아졌다. 

“더 기다리지 않으시게, 지금 바로 가는 게 낫겠어요.”

그러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향분을 바르고 나왔다. 이곳을 더 둘러보고 싶은 소금남은 내일 가도 된다고 말하는데, 성격 급한 임새옥이 기다리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산에서 내려왔다. 

“이렇게 급하기는…….”

나직이 웃던 소금남은 임새옥이 얼굴을 붉힌 채 노려보자 입을 다물었다. 이 여인이 부끄러움이 많은 걸 알기에 더는 말하지 않았다. 

소 노부인 일행은 예전에 소금남이 살던 노아촌 그 저택에 묵고 있었다. 임새옥이 도착했을 때, 노부인은 잔소리를 퍼부으며 사람을 시켜 문을 닦고 있었다. 서까래가 썩었네, 지붕이 무너졌네,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절 같네, 우중충한 것이 좋은 기운이 하나도 없네, 하는 모습에 임새옥은 웃으며 다가가 인사했다. 소 노부인도 얼버무리지 않고 웃으며 답례했다. 

“노부인, 억지로 반가운 척하실 것 없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노부인이 뒤에 서 있는 소금남에게 눈짓하는 걸 본 임새옥이 웃으며 말하자, 소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얼굴을 구겼다.

“네가 뭘 잘못해서! 내 아들 앞에서 내 욕하지나 말게!” 

임새옥도 굳이 옥신각신하지 않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세히 말해주었다. 장차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산에 사계절 모두 향긋한 과일이 자라고 나무 아래 닭과 오리가 떼를 이룰 거라고 이야기하자, 소 노부인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부러운 표정이었다.

“벼슬아치들은 돼지고기가 저속하다고 여기고 안 먹는다는데, 노부인처럼 시원스러운 분은 그런 거 안 믿으시겠죠?” 

임새옥이 의자를 노부인 앞으로 끌어당기며 묻자, 노부인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족발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런데 전에 그 며느리가…….”

그러다가 소금남의 안색이 안 좋아지고 임새옥도 흠흠 거리자 콧방귀를 뀌면서 입을 다물었다.

“제 과수원에서 기르는 돼지는 육질이 좋아서 나중에 돼지머리를 야들야들하게 삶으면, 아유, 얼마나 맛있을까요.” 

임새옥은 그렇게 말하고는 침을 닦는 소 노부인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렇게 설득한 끝에, 드디어 밖에서 2년 동안 따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충분히 만족한 임새옥은 노부인에게 인사하고 나왔다. 소금남은 집으로 데려다주며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결국은 집에 묶여 살게 하는군요…….”

임새옥은 생긋 웃으면서 잔뜩 눈살을 찌푸린 사내를 바라봤다. 

“이왕 당신과 혼인하는 건데, 당연히 당신 집에 살아야죠.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날 가두지 않은 이상, 아무도 날 가두지 못해요.” 

다음 날, 소 노부인이 매파를 데리고 찾아왔다. 노씨와 한바탕 흥정한 끝에, 임새옥이 탁자를 엎기 전에 겨우 날짜를 정했다. 

“이번 달 스무나흘에 납채하고, 11월 초이틀에 영친하시죠.” 

각자 음양력을 뒤적이던 두 노부인이 매파의 단 한마디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렇게 잠시 조용해졌다가, 정말로 인색한 건지 아니면 남과 입씨름하는 걸 좋아하는 건지, 소 노부인이 이번엔 예물과 혼수로 노씨와 논쟁을 벌였다. 임새옥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서 아예 집에서 나갔다. 

멍하니 있던 임새옥은 까마귀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옷에 새똥이 튄 걸 본 시녀 하나가 몽둥이를 들고 새를 쫓다가 나무 위의 까마귀를 놀라게 한 것이다. 시녀는 연신 침을 뱉으며 재수 없다고 욕하고는 사라졌다. 

“모레네.” 

임새옥은 중얼거리다가 문득 얼굴이 달아올라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대저아! 어머니가 시어머니와 싸운다!” 

누군가 밖에서 고함치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달려나갔더니, 노씨와 소 노부인이 마을 어귀 큰 나무 아래서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여편네’라니, ‘늙어서 할 말 못 할 말 못 가리는 노인네’라니 하면서 당장 머리채를 잡을 듯이 말싸움하고 있었다. 

임새옥은 골치가 지끈지끈했다. 소 노부인이 여기에 온 이래, 노씨와 전생의 원수처럼 싸워댔다. 사흘은 좋았다가 이틀은 싸웠다가, 따지고 보면 하나같이 하찮은 일이었다. 

어르신! 어서 강녕으로 돌아가세요! 임새옥은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면서 성큼성큼 다가갔다. 

주위에서 구경하는 마을 사람은 많은데, 평소에 노씨가 무식하게 싸우는 데다가 말리는 사람도 봉변당하기 일쑤라 행여 불똥이 튈까 봐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소 노부인 곁에도 시녀들이 서 있었지만, 끽소리 내지 않았다. 말릴 생각은 더더욱 못하고 그저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임새옥이 다가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싸늘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노씨와 소 노부인이 또 한바탕 서로 욕을 퍼붓는 바람에 임새옥은 귀가 다 따가워졌다. 알고 보니 전가아와 금단이 싸움이 났는데, 마침 마을로 오던 소 노부인이 보고는 손자를 감싸다가 자연스럽게 금단을 욕한 것이다. 하필 노씨도 그때 성에서 돌아오다가 그걸 보았고, 금단이 혼나는 걸 보고 있을 리가 있나, 그 자리에서 소매를 걷어붙였다. 안 그래도 툭하면 싸우던 두 사람은 이렇게 불이 붙었고, 사태의 발단인 금단은 전가아와 진작 화해하고 저쪽으로 굴러가 놀고 있었다. 

“아이들 일에 두 분이 왜 끼어들어요! 정말 창피해서 못 살겠다고요!” 

임새옥이 씩씩대며 노씨를 끌고 가면서 전가아를 데리고 오라고 사람을 보냈다. 어서 할머니 집으로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와서 놀라고. 

그러고 있는데 말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뒹굴듯이 말에서 내린 종복이 소 노부인 앞에 가서 엎드렸다. 

“노부인, 큰일 났습니다. 대관인이, 관아 사람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혼비백산했다. 다들 믿을 수가 없어서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날씨가 쌀쌀해짐에 따라, 저기 경성에 계신 황제의 마음도 조금은 울적해졌다. 태황태후가 병을 앓은 후로 몸이 줄곧 좋지 않았다. 태의들도 최선을 다했지만, 천천히 요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친할머니가 아니지만 이 태후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황제는 그 결론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바탕 화를 내도 별수가 없으니 부지런히 문안할 뿐이었다. 

요 며칠 조 태후가 꽤 기운을 차리더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 가마를 타고 화원 구경을 갔다길래 황제는 기분이 좋아서 막 대전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그때 통진은대사(通進銀臺司)가 어사대에서 올린 상주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대명부의 관리들이 위법 판결을 내렸으니 모든 관리를 파직하고 엄중히 죄를 물으란 상주서였다.

황제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서서히 넘기다가, 내용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농신 낭자 조씨와 관련된 사안인 걸 보고 다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상주서를 유심히 살폈다. 

발단은 강녕부 강녕현이었다. 관아가 주둔하는 현이라 다른 곳보다 태평했고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북이 원래 석 달에 한 번 정도 울렸는데, 올해 10월 말엔 그 관례가 깨지고 말았다. 강녕현 현령이 현 내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을 처리하고 후택으로 돌아가 쉬기도 전에 큰 북이 다시 쿵쿵 울렸다. 

“누가 북을 치는 것이냐? 무슨 억울한 일이 있어서? 속히 말해라.” 

강녕 현령이 아래쪽을 쳐다보며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당 앞에 무릎 꿇은 것은 웬 젊은 여인이었다. 능라 주단을 입은 자태가 아름다운 여인이 훌쩍이는 것이 더욱 가냘프고 가련해 보였다. 

“대인께 아뢰옵니다. 노비 청아는 소씨 가문의 가노입니다. 소가 대노야, 소금남을 고발하러 왔습니다.” 

여인이 눈물을 닦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비처럼 떨어지는 얼굴에 멍든 자국이 보였다. 

소씨 가문이 강녕현에서 유명한 거상 가문임을 당연히 잘 아는 강녕 현령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노비 얼굴에 상처를 달고 있는 걸 보니 소가에서 따로 형을 가했을 뿐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에서는 강녕 현령을 매우 공경하고 순종했고, 때마다 선물을 착착 바쳤다. 얼마 전엔 관아 보수하는 데도 큰 공헌을 했다. 강녕 현령은 이런 상황을 정말 보고 싶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을 물으면서 주인을 함부로 모함하면 안 된다고 넌지시 말했다.

“대인, 노비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다. 소씨 가문에서 노비를 처로 들이려고 하기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청아는 또 고개를 조아렸다. 강녕 현령은 넋이 나갔다. 며칠 전에 그 역시 소가에서 온 가족이 출동하여 성안현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 농신 낭자 조씨를 맞이해 오려고 한다기에 안 그래도 좋아하고 있던 차였다. 다른 곳에서 서로 맞이하려고 다투고 있는데, 강녕 현령인 자신은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고 대낭자를 자기 고장에 들이게 되었으니, 생각만 하면 동료들이 부러워하며 바라볼 생각에 우쭐해했었다. 그런데 웬 노비가 이런 말을 하니 넋이 나갈 수밖에. 

노비가 또 한 번 같은 말을 하자 현령은 경당목을 두드렸고, 양쪽에 늘어선 아역들이 위세를 떨치며 호통을 쳤다.

“무엄하다! 소 대관인이 맞이할 사람은 조씨다. 노비를 처로 들이려고 한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이렇게 주인댁을 능멸해? 여봐라, 이년을…….”

강녕 현령이 얼굴을 구긴 채 바로 형을 내리려고 했다. 이런 악한 노비를 어찌 가만히 둘 수 있을까! 

매우 치라는 말이 나오기 직전, 시녀가 종이 한 장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더니, 조급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목소리로 느긋하게 말했다. 

“대인, 이것이 조씨의 노비 문서입니다.”

그 한마디에 강녕 현령은 겁에 질려 털썩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막료 하나가 그 종이를 받아서 건네자 덜덜 떨면서 종이를 받았다. 

접힌 자국이 가득한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입출 문서. 

대명부 성안현 십방촌 친부 조삼랑, 올해 농사를 배불리 짓지 못해 큰딸 조화, 십삼 세, 11월 스무여드레 진시(辰時)생, 을 기꺼이 강녕부 소금남의 노비로 팝니다. 이 거래 이후, 소가 남녀 세대를 주인으로 모실 것입니다. 양측이 원한 일이며, 후회 없을 것입니다. 영원히 증거로 남깁니다. 현금 은자 다섯 냥으로 거래합니다. 말로는 증명하지 못하니 이 증서를 남깁니다. 

- 매매인, 모(母), 노씨. 매매인, 부(父), 조삼랑’

현령은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손이라도 덴 것처럼 종이를 서안 위로 내던졌다. 너무나 당황해서, 당 아래 시녀가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웃고 있는 걸 보지 못했다. 

“사람 팔자는 다 정해진 거야. 네가 아무리 수완이 뛰어나면 뭘 해. 어차피 우린 같은 팔자인데, 내게 없는 걸 네가 갖겠다고?”

관아에서 나온 청아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는 검은 현판이 높게 걸린 엄숙한 관아를 쓰윽 쳐다봤다. 코웃음 치다가 얼굴에 상처가 당겨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면서 상처를 쓰다듬었다. 여드레는 지났는데 아직도 얼굴이 부어 있었다. 그녀는 가슴속 가득한 원한을 감추지도 않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강녕 현령은 그 고발장을 받은 이래 겁에 질려 잠도 자지 못했고 걱정에 잘 먹지도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본 애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노야도 참. 그 높은 자리에 있는 분이 이런 하찮은 일로 걱정하십니까? 조화는 성안현 사람이고, 지금 소씨 가문 사람들도 성안현에 있으니, 사안을 성안현으로 넘겨 버리면 그만이지요! 뭐 하러 이것 때문에 골치를 앓으셔요!”

앓던 이가 빠진 강녕 현령은 첩실을 안고 소중한 보물이니, 귀인이니 하며 한참 쓰다듬었고, 첩실은 그 틈에 새 옷 몇 벌을 얻어갔다. 미룰 만한 일이 아닌지라, 강녕 현령은 그날 밤에 바로 그 사안을 성안현으로 보냈다. 성안 현령 역시 화들짝 놀라서 발을 구르며 능구렁이네, 협잡꾼이네 하며 강녕 현령을 욕하고는 그대로 되돌려보냈다. 그렇게 서너 번 왔다가 갔다가 하다가, 성안 현령이 할 수 없이 이 사건을 대명부로 올려보냈다. 

대명부에서도 조씨의 명성은 익히 알지만, 소홀히 넘길 사안이 아니라서 사람을 보내 소금남을 잡아와서 자세히 묻기로 했다.

대명부 객잔에 앉아 있던 소 노부인은 자초지종을 듣고는 화가 나서 탁자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그 망할 년이 이런 일을 저질렀단 말이냐? 그 착실한 손가 부부에게서 어찌 그리 악독한 년이 나왔을까. 우리 소가 시녀 중에 귀한 규수처럼 키우지 않은 아이가 있더냐? 그런데 이런 배은망덕한 것이 나오다니.” 

“무슨 일로 노야를 거슬렀는지, 호되게 두들겨 맞더니 한을 품은 모양이에요.” 

한 시녀가 하는 말에 노부인이 발을 동동 굴렀다. 

“몹쓸 것, 몹쓸 것. 너희들 중에 크면서 맞지 않고 자란 아이도 있더냐? 그년처럼 주인을 고발한 것이 어디 있더냐? 내가 눈이 삐었지. 그런 악독한 년인지 몰랐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몽둥이로 때려죽였을 것을! 그랬어도 어미, 아비가 고발하지도 못했을 것을!” 

온 방 가득한 시녀들은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소식을 듣고 각지에서 달려온 관사들도 밖에 모여 수군거리고 있었다. 노부인이 목소리를 듣고 그들을 불러들였다. 

“노부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톡톡히 물건을 바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대관사가 모두를 대표해서 한 말에 노부인이 다시 탁자를 내리쳤다. 

“반나절 궁리한 결과가 그거란 말이냐! 그걸 말로 해야 알아? 돈 몇 푼 쓰는 일 가지고, 내게 물으러 온 것이냐!” 

관사들은 허둥지둥 돌아갔고, 대저아는 어쩌고 있는지 물으니 한 시녀가 대답했다. 

“부(府) 관아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계세요. 사람들이 설득해도 돌아오지 않으세요.” 

노부인이 벌떡 일어나서 욕설을 퍼부었다. 

“꼴 좋다! 인연이 아닌 게지! 하나같이 어리석어서는! 노비 문서를 어찌 허투루 여기고 지금까지 신경도 쓰지 않은 게야! 인제 잘 되었구나!” 

그 말에 노부인의 대시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건 정말 두 분 잘못이 아니에요. 부인이 갑자기 병이 심해져서 가버린 바람에, 허둥대다가 다들 잊었지요. 줄곧 부인의 개인 상자에 넣어두었었고, 대저아는 며칠 전에도 노야에게 물었는걸요. 노야도 부인이 태웠을 것이라 알고 계셨는데, 아직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하필 그 청아 년이 기억했다가, 우리 없을 때 뒤져서 훔쳐낼지 어찌 알았겠어요.”

“흥. 운이 나빴다고 하늘을 탓할 수 있겠느냐! 애초에 기억했어야지! 이제 얼마나 골치 아프게 되었느냐! 혼사고 뭐고 관두라 해라!” 

시녀들은 노부인을 말리려 진땀을 뺐다. 

며칠 뒤, 관아 밖에서 여인이 며칠째 무릎을 꿇은 데다가 소가에서 사방으로 애쓴 덕분에 여론이 소금남과 조화 쪽으로 기울었다. 대명부 역시 소가의 돈을 받아서가 아니라, 정확히 말하자면 지주와 향신들, 그리고 정주 관아 주문청을 대표로 한 관리들의 청원을 이기지 못했고,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조 낭자에게 벌을 내리면 내년은 흉년이 될 거라는 말까지 퍼진 바람에 기겁해서 눈 질끈 감고 사건을 종결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잠시 심부름할 시녀로 들인 것이고, 조삼랑이 돈을 더 받고 싶어 해서 문서를 쓴 것이지 실로 그럴 마음은 없었다 운운하는 소금남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데 대명부에서 조마조마하며 보낸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서, 어사대에서 문책 공문이 내려왔다. 입에 올리지도 못할 정도로 분노한 말로, 법규대로 이 혼약을 무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소금남을 2년 형에 처하는 동시에 벌을 제대로 내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명부 모든 관리를 파직하라는 탄핵 상주서를 올렸다. 대명부에서도 승복할 리 없으니, 상부에 진술하겠다고 상주서를 올리면서 그 김에 백성을 위한 조씨의 공을 거론하며 사면을 청했다. 

내용을 다 읽은 황제 역시 난처한 얼굴이었다. 법규대로라면 대명부가 분명 잘못한 것이었다. 황제는 머리를 짚으며 내일 조정에서 논의하기로 했다. 조정에서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면 황제도 할 말이 있을 테니까.

이 일이 황제에게까지 전해졌을 때 조정 대신은 이미 다 알고 있고, 또 의견이 분분한 이 일에 저마다 관점이 있음을 황제는 모르고 있었다. 

입동이 지나고, 천막 채소 공급을 늘린 경성엔 예전처럼 겨울 채소를 많이 비축하지 않아도 되어서, 채소를 실은 마차와 말이 거리를 차지하는 상황은 훨씬 줄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겨울에 나는 신선한 채소를 모두가 살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니 말이다.

이날은 날씨가 맑아서 거리에 사람이 더욱 많았다. 송채를 운송하는 크고 작은 대열도 인파에 섞여서 가격 흥정 중이었다. 올해 물난리로 가격이 폭등해서 송채 값도 훨씬 비싸졌다. 

검은 주단 장포를 입은 사내 몇 명이 말을 타고 그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친지를 방문하거나 오락거리를 찾아서 돌아다니는 인파를 지나 떠들썩한 구역을 벗어난 그들은 유가의 대문 앞에 당도했다. 시녀 하나가 마침 문 앞에서 과일 파는 행상과 관박(關撲: 내기 도박)을 하고 있었다. 시녀는 품에 과일을 잔뜩 안고 있고, 행상꾼은 울상을 하고서 돈을 던지고 있었다. 

“떽!” 

시어사 장 대인이 말에서 내리며 호통치자 시녀가 화들짝 놀라서 따놓은 과일도 챙기지 않고 줄행랑쳤고, 행상꾼은 그 과일을 잽싸게 바구니에 넣고 쪼르르 달아났다.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장 대인이 고개를 젓는데, 곁에 있는 동료 둘이 “과연 그 주인에 그 종이로군!” 하면서 실실 웃었다. 장 대인이 휙 돌아서서는 눈을 부릅떴다. 유 대인의 부인이 노름을 즐긴다는 건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일이었다. 통도 커서, 시어머니를 학대한 일로 관리 명부들과 거리가 멀어졌다가 지금은 내기 도박으로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고 하던가.

문지기 장사가 기척을 듣고 통보하자, 유소호가 협포(夾袍: 허리띠가 없는 장포)만 입은 채 직접 나와 맞이했다. 서로 예를 갖춘 후 유소호가 서재로 안내하자 사람들은 감사 인사한 후 따라 들어갔다. 가는 길에 정당에서 휘장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정향색 운주 웃옷과 청남색 큰 폭 치마를 입고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진주 비녀를 꽂은 여인이 나오다가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는 황급히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곧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녹옥, 좋은 차를 내가거라.” 

서재로 들어가 주객이 자리 잡고 앉아 날씨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시녀 녹옥이 차를 들고 들어왔다. 

“대인께서 재난을 구제한 공으로 봉상(封賞)을 받게 되신 걸 축하 드립니다.” 

여러 대인이 일제히 공수하며 축하를 건넸다. 10월 중순에 조정으로 복귀한 이들은 모두 상을 받았고, 그중에 유소호가 가장 큰 상을 받았다. 재해 입은 농작물이 살아났다고 각지에서 보고가 올라온 덕이었다. 올겨울에 배를 채울 콩 같은 곡식이 있어서 유민의 수도 훨씬 줄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며 유소호에게 저택을 하사했다. 그러다가 어사대의 방정맞은 주둥이 이정이 제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탄핵 상주서를 올렸지만, 상관인 등관이 상주서를 억류하면서 이에 화가 난 이정은 휴가를 청하고 며칠 등청하지도 않았다. 

“대인, 언제 옮기실 겁니까?” 

누군가가 호로록 차를 마시며 묻자 유소호가 그저 담담하게 웃었다 

“모친이 몸이 불편하시니, 내년 봄에 다시 생각하렵니다.” 

유소호는 대인들이 찾아온 이유를 대충 가늠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모두 대명부 일을 들으셨겠지요?”

장 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안 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인, 듣자 하니 어사대에서 대인도 불러 물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여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등 대인은 그저 그 방탕한 공자가 하도 성가시게 하니 체면 세워주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대인이 불려간대도 그저 형식이니 다녀오면 됩니다.”

유소호의 얼굴이 더 흐려졌다. 이들이 말하는 방탕한 공자는 물론 이용이었다. 사실 대명부 사안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각지엔 매일 안건이 올라오고 시간이 흐르면 잠잠해진다. 누가 그런 걸 일일이 주목할까. 그런데 하필 이용이 어디서 그 사안을 들었는지 곧바로 황제 앞에 끌고 왔다. 한창 세력이 커진 데다가 사교에도 능한 자라 곁에 아첨하며 들러붙는 사람이 많아서 어사대에도 물론 그와 친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어사대에서 이 사안을 황제에게 올린 것이다. 

“그 사람은 원래 양민이고 집이 가난해서 노비가 된 것이지 죄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주인이 이미 양민으로 풀어준 것이지 도망간 것도 아닌데 이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유소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장 대인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깨달은 표정이었다. 유 대인이 전처를 못 잊었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맞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좌간의대부 소 대인도 그리 말씀하십니다. 다만, 어찌 됐든 정실로 맞진 못할 것이고, 첩이 된다면…….”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소호에게로 향했다. 

“첩이라…….”

유소호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호의로 찾아온 대인들을 배웅한 후, 유소호는 모친과 이야기하려고 유씨의 처소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녀가 문 앞에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모친이 잠들었음을 알고는 다시 자기 뜰로 돌아갔다. 뜰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송옥루가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렸다. 

“……처음부터 그 팔자가 아닌 것을. 괜히 형님이라고 불렀네…….” 

그 말에 유소호는 순간 화가 치솟아서 문을 걷어차고 들어가 송옥루가 일어서기도 전에 뺨을 때렸다. 시녀는 기겁하며 무릎을 꿇었고, 그가 이때 들어올 줄 몰랐던 송옥루는 그 자리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유소호가 이야기를 다 들었다 해도 시녀 앞에서 이렇게 체면 없이 때릴 줄은 몰라서 울며 소리쳤다.

“모처럼 집에 있는 날엔 아내를 때리는군요!” 

유소호는 시녀를 쫓아내고 싸늘하게 말했다. 

“쫓아내지 못해서 안달이었고, 쫓아내고는 기뻐하는 줄 몰랐군. 내가 결국 매일 꾸며낸 그 얼굴에 속은 거였어.” 

송옥루는 일어서지도 않고 바닥에 앉은 채 듣다가 싸늘하게 웃었다.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요? 자기가 노비 신분을 속인 것을요! 내쫓아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지금 어사대에 끌려간 건 이랑 당신이었다고요! 그런데도 감싸요? 당신과 그녀가 얼마나 애절했었는지, 온 도성에 소문이 파다해요! 사람들이 얼마나 날 비웃는 줄 알아요? 그렇게 못 잊겠으면 하루라도 빨리 데리고 돌아와요! 그래야 내가 덜 손가락질 당하지. 내가 언제 막았어요? 그 여인 때문에 화가 난 걸 왜 나한테 풀어요! 미안한 짓을 한 게 나인가요? 이 집에 들어온 이래 독수공방하며 시어머니 수발드는 건 나예요! 그런데도 부족해요? 이래도 당신 마음이 안 풀리냐고요! 그런데 나를 때려요? 그냥 내쫓아요! 내쫓고 마음에 드는 여인을 들이라고요!” 

송옥루가 고함치며 머리를 들이밀자 유소호가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화가 난 유소호는 얼굴이 시퍼레져서 그녀를 끌어올리며 매섭게 고함쳤다. 

“미안한 짓을 하지 않아? 물어보자, 시골에 있는 저택과 땅이 왜 이용 손에 들어간 거지?”

그러고는 다시 송옥루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송옥루는 몹시 놀랐다. 원만히 끝난 일 아니었나? 어째서 이야기가 퍼진 거지? 

마을에 나쁜 사람이 그 여인을 쫓아냈니, 우리가 준 땅으로 다른 사람이 인정을 베풀었니, 하며 이어진 유소호의 말에 송옥루는 자신이 이용에게 속은 걸 깨닫고 기가 차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어이없고 이가 갈려서 목 놓아 울었다. 

“그때 그자 아내가 찾아와서 형님과 옛정이 있느니 어쩌니 하면서 대신 보내준다고 하길래 나는 마침 바쁠 때였으니 그러기로 한 거죠. 이런 일을 할 줄 내가 알았겠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놈이 속셈을 품은 걸 알면서도 왜 말 안 한 거지? 왜 날 속였어? 매일 내 앞에서는 대범한 척, 데리고 와라, 모셔 와라, 하더니. 누이, 어떻게 나를 속일 수가 있지?” 

마지막 말은 괴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말투였다. 송옥루 역시 다급해져서 그를 밀치고 일어서서 울며 말했다. 

“이용이 날 핍박한 거예요. 내가 나약한 여자라고, 날 차지하려고 했다고요! 내가 따르지 않으니 사사건건 괴롭혔어요. 내가 당신과 혼인한 걸 알고 날 협박했죠. 당신을 해치겠다고 하고, 또 제 처를 보내 꼬시는 바람에 믿고 넘긴 거예요. 나중에 수소문해 보니 형님 일가가 그 집으로 옮겼다고 하길래 그런 줄 알았지, 이런 일이 있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아무리 물어도 그 말만 반복하자 유소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그녀를 잡아끌고 노려봤다. 

“그렇다면 같이 가서 물어봅시다. 그자가 당신을 핍박한 게 맞다면 내가 갚아주지!” 

송옥루가 갈 수 있을 리가 있나, 안 간다고 울고불고, 그렇게 난리를 부리는데 유씨가 기척을 듣고 시녀를 보냈다. 유소호는 유씨가 알게 되면 속상할까 봐 일단은 싸움을 멈추고 돌아섰다. 

집에 남은 송옥루는 그가 정말로 이용을 찾아갈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이미 이용과는 사이가 틀어졌고, 예전 이야기가 나와도 이용이 자기를 손에 넣지 못해서 모함한 거라고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다. 어차피 악명이 자자한 사람이니 유소호도 자기를 믿을 것이고, 어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시녀를 불러 단장하고는 옷 갈아입고 내기 도박하러 나갔다. 

“부인, 며칠 전에 따 온 저택을 팔았어요. 돈도 받았고요.” 

녹옥은 송옥루가 기분이 좋은 걸 보고는 맞을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서 재빨리 은자를 건넸다. 송옥루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은자 몇 개를 꺼내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이건 내 거야. 녹옥, 사람을 불러 대명부로 보내.” 

녹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송옥루는 상자에서 장신구들을 챙긴 후 서둘러 마차를 불렀다.

11월 초, 며칠 연달아 눈이 섞인 비가 내린 다음 경성에 이른 겨울이 찾아왔다. 그러나 조정은 날씨가 바뀌었다고 해서 분위기가 바뀌지는 않았다. “폐하 납시오!”, “대신들은 대전에 드시오!” 하고 외치는 찬예관(贊禮官: 행사, 제사를 주관하는 관직) 목소리에 따라 교방(敎坊: 음악, 무용, 배우, 잡희 등을 관장하는 곳)에서 악기 소리가 울리고, 참배 후 오늘 조회가 시작되었다. 

문무백관이 자리하고 대신들이 사안을 보고하며 가장 먼저 재난 지역 곡식 세 감면 문제를 논의했다. 이 조항은 논쟁 여지가 없어서 금방 끝났다. 이어서 누군가 앞으로 나왔다. 심괄을 조정에서 몰아낸 자로, 무고로 사람을 하옥시키기로 유명한 지잡어사(知雜御事) 채확이 며칠 전 상주한 대명부 뇌물 사건을 들고나왔다. 

조정 대신들은 채확의 세세한 설명으로 상황을 더 상세히 알게 되었다. 

채확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사건을 접수한 대명부는 관련된 여인이 조씨라는 걸 알고 소가 측을 예우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어사대가 이 사건을 뇌물 사건으로 여긴 것이다. 

그리고 대명부는 ‘조씨를 처로 들인 게 아니라 예물을 과하게 한 것뿐이며, 그것만으로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소 노부인의 말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명부에서 ‘불화가 있는 사람의 주장은 증거로 할 수 없다.’라는 율법을 들며, 처음부터 죄를 고변한 시녀가 고변할 자격도 없었음을 주장하면서 이 사건은 처음부터 수리할 필요가 없었다 운운하면서 어사대에서 율령을 모르고 있었음을 암암리에 비난했다.

그렇게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불현듯, 조씨를 마음 쓰던 사람들은 이 사건의 중점이 조씨의 혼사가 아니라, 대명부가 뇌물을 받았는지 여부에 달렸다는 걸 깨닫고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이 사건을 어사대로 넘기시길 주청합니다!” 

채확의 말에 한쪽에 서 있던 유소호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막 어사대에서 돌아온 그는 날카롭게 추궁하던 어사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선했다. 황제가 허락한다면, 주모자인 소금남은 오랏줄에 묶이고 칼을 쓰고 옥으로 끌려가 심문받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괴로운 형벌을 받게 되면, 그 여인이 분명 마음 아파하겠지. 

유소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마음이 씁쓸해졌다. 맞은편에 있는 이용에게 시선을 돌렸더니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순간, 송옥루의 말이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폐하, 대명부 소가 사건은 지극히 억울한 사안입니다. 뇌물 같은 건 없었습니다. 조씨가 여러 차례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고, 태후마마께서 애틋이 여기시고 재가를 명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명부에서 조씨가 노비 신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증인도 많습니다. 그 당시 확실히 양민으로 내보내 주었고, 도망 노비가 아닙니다. 전 안주인이 병으로 급하게 세상을 떠난 바람에 노비 문서를 잃어버린 것인데, 악랄한 노비가 그것을 훔쳐 협박한 것입니다. 어사대 채확이 그 소송 사건을 지나치게 파고들고 일을 키운 것이니 부디 하명하여 바로 잡으시길 바랍니다, 폐하.” 

연로한 좌간의대부 소송이 앞으로 나와서 살짝 떨리는 몸으로 그렇게 말하자 사람들이 일제히 맞장구쳤다. 

황제는 그렇게 나서는 사람이 있어서 매우 기뻤다. 거기에 정주 주문청이 올린 상주서를 아뢰는 사람도 있었다. 조씨가 재해를 어떻게 구제했으며, 장기적인 과로로 병에 걸렸었다는 것 등등의 내용이었다. 이미 궁에도 퍼진 이야기였다. 물론 궁에 퍼진 판본으로는, 여인이 장기적인 과로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역시나 많은 이의 시선이 유소호에게로 향했다. 유소호는 이미 익숙한 듯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유 경, 그 조씨가 처음에 그대도 속이고 혼인한 것인가?” 

황제가 모두에게 경고하듯 헛기침을 하면서 물었다. 

“폐하, 아닙니다. 신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소씨 가문이 급히 떠나는 바람에 노비 문서를 받지 못했을 뿐, 양민으로 풀어준다는 구두 약조는 받았습니다.” 

유소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뜻밖이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역시 유 경이 선량하군. 이 기회에 발목을 잡아 끌어내릴 수도 있을 텐데. 사실은 황제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 조씨를 아직 못 잊은 것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물론 물을 수 없는 말이었다. 

황제는 더 말하려는 채확을 저지하고 결정을 선고했다. 우선, 조씨와 소가에서 그 사정을 전혀 모르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태후께서 애틋이 여기시니 조씨가 양민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특별히 윤허하는 것으로 이 사건을 종결짓기로 했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대명부 관리들이 어찌 됐든 법을 거스른 것이니 봉록을 반년 삭감하기로 했다. 

채확은 그다지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어찌 됐든 적어도 대명부가 벌을 받았으니 고분고분 대열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중 이용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마주하고는 얼굴이 굳었는데, 다시 바라보니 이용은 어느새 평온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비록 신분을 양민으로 회복은 시켜주었지만, 황제는 법도를 어기면서까지 조씨가 정처 신분으로 출가하는 걸 허락할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이 일을 거의 잊어갈 무렵, 저 멀리 강녕에 있는 전 재상 왕안석이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 이 일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비준해 주지 않은 황제를 원망했다. 

조씨가 ‘선량한 여인으로 영특하고 농사일에 정통하여 천군만마가 세운 공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는 말에 황제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재상이 이 여인을 천군만마보다 더 대단하다고 평가할 정도라니. 생각해 보면 황제는 줄곧 그 여인이 유소호의 지도를 받고 농사일을 조금 할 줄 아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 여인이 대체 어떤 일을 해왔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동안 딱히 마음에 두지 않았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성안현 유가에서의 높은 벼 생산량, 매우 이르게 시장에 나온 연근, 성안현 조씨 덕에 빠르게 진정된 보리 재해, 운대로 기름을 짤 수 있다고 말한 조씨, 재난 입은 밭을 갈고 콩을 심게 한 방법 등등…….

“짐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인가?”

손에 든 서신을 내려놓은 황제는 천천히 눈을 찌푸렸다. 

경성에서 고민 중인 황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성안현 이야기를 해보자.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당초 얘기되고 있던 혼례는 그 자리에서 물거품이 되었다.

11월 말, 날씨는 매우 추워졌다. 십방촌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집에 숨는 대신, 삼삼오오 마을 입구에 서서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조삼랑의 집에선 노씨가 우는 소리가 또 들려오자, 다들 식겁해서 목을 움츠리고 달아났다. 

금단이 문을 열고 나와 후다닥 달아나자, 항상 같이 노는 아이들이 쫓아갔다. 

“금단, 네 어머니 또 울어?” 

꼬마 동료가 다정하게 묻자, 금단이 코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있지도 못하겠어. 나랑 같이 산에 가자. 누이가 거기 있어. 병자를 구웠는데, 엄청 맛있어.” 

먹는 이야기가 나오자 아이들은 크게 흥미를 보이면서, 자기네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는 내던지고 금단을 따라 후다닥 산으로 올라갔다. 

온통 누렇게 변한 산 위의 날씨는 좋지 않았다. 아직 앙상한 묘목 사이로 회오리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흰색 겹옷을 입은 임새옥이 얼굴에 잿가루를 묻힌 채 작은 나무통에 백회를 바르고 있었다. 오씨는 다른 쪽에서 그녀를 따라 움직이며 수시로 안색을 살폈다. 

“대저아, 이만 가서 쉬어.” 

오씨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임새옥은 그저 웃기만 했다. 

“먼저 돌아가세요. 난 조금 더 하고요. 오늘 다 끝날 거예요. 내일 쌀뜨물을 가지고 와야겠어요. 돼지 사료가 떨어질 것 같아요.” 

오씨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위로하고 싶어도 뭐라고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대저아, 상심하지 말아.” 

임새옥이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상심하지 않아요…….”

여인이 억지로 하는 말을 차마 들을 수 없어서 황급히 돌아서는데, 산 아래에서 누군가 비단 옷자락을 휘날리며 서둘러 올라오는 게 보였다. 오씨가 “대관인 오시네요!” 하고 소리치자, 임새옥의 손이 멈칫했다.

사내는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소 노부인이 혼인 전에 만나서 사달이 난 거라고 혼을 내서, 안건이 종결된 후에도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열흘은 되었을까. 사내는 티 나게 마르고 눈이 푹 꺼진 것으로 보아 그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했다. 

“며칠 뒤엔 떠납니다.”

소금남이 천천히 말했다. 슬픔을 감추지 못한 사내의 눈빛이 여인의 얼굴에서 맴돌았다. 이별 앞에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임새옥은 아무런 말 없이 눈물을 참았다. 작은 나무통을 든 손이 살며시 떨렸다. 

“어머니가 또 당신을 찾아왔었죠? 들을 것 없어요. 당신이 원한대도 내가 동의하지 않으니까. 당신이 늙는데도 내가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함께 늙어갈 테니.” 

여인의 눈빛에 비친 아쉬움과 절망에, 소금남은 바람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넘겼다. 

“걱정 안 해요. 나는 내가 먹여 살리는데요. 나중엔 당신도 내 덕에 먹고 살 텐데요?” 

씨익 웃으면서 말하는데도 임새옥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던 오씨는 벌써 눈물을 줄줄 흘리다가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하늘님, 어찌 이러십니까.” 

여인이 눈물을 흘리자, 소금남이 살며시 닦아주었다. 두 사람은 그저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귓가엔 울부짖는 바람 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산 아래서 들렸다. 마주 보던 두 사람은 놀라서 떨어졌다. 

시녀 여러 명이 소 노부인을 에워싸고 낑낑대며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대관인! 대낭자! 하고 부르면서 올라오는 그들을 본 소금남은 안색이 싹 변해서는 소 노부인을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어머님! 굳이 대낭자를 아프게 해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 노부인이 헐떡대며 걸음을 멈췄다. 

“아니, 그게 아니다. 어서, 어서 대낭자를 데리고 내려가서…… 내려가야…….”

아무리 건강해도 노인이었다. 산에 오르느라 헐떡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다행히 관사가 곁에서 말을 이었다. 

“어서요! 대관인! 성지 받으러 가세요! 그리고 대낭자도요! 얼른! 기다리고 있답니다!” 

임새옥이 멈칫한 사이, 소금남이 벌써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성지란 말에 놀라서 넋이 나갔다. 

이번엔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쓴웃음이 났다. 

불어오는 바람에 눈발이 섞여 얼굴을 때리고 있었다.

임새옥은 목을 움츠리며 제 손을 꼭 쥐고 앞서가는 소금남을 바라봤다.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어차피 명분이 없다면, 평생 이 마음만 있어도 충분했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관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성안 현령을 제외하면 대부분 낯선 얼굴이었다. 

“아이고, 대낭자! 우리 또 만났군요!” 

조금 기괴하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순간, 다시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예전에 입궁하라는 태후의 전교를 들고 왔던 그 태감 아닌가? 그때처럼 붉은 망의, 삼산모 차림에 변함없이 미소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화아!” 

그녀가 이상한 걸 눈치챈 소금남이 다급히 불렀다. 

“대낭자, 날 모르겠소?” 

장 태감이 껄껄 웃으며 묻다가 여인의 얼굴에 스치는 서글픔을 보았다. 궁에서 굴러먹는 능구렁이라 곧바로 무슨 일인지 깨닫고 웃어 보였다. 

“대낭자, 오늘 안색이 좋군요! 몰라볼 뻔했습니다!” 

임새옥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예를 갖췄다. 

“대인, 과찬이십니다.”

태감의 성이 뭐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이고, 쓸데없는 말은 그만합시다. 서둘러 왔는데도 대낭자의 좋은 날을 지체했군요!” 

장 태감이 웃으며 손에 든 성지를 쫙 펼쳤다. 

“강녕부 소씨의 자 소금남, 성지를 받으라.” 

향안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소 노부인이 즉시 소금남과 임새옥을 데리고 마을 입구에 무릎을 꿇었다. 장 태감이 느릿느릿 성지를 읊었다.

“……항상 효과적으로 근면히 일했으며, 들르는 모든 곳에서 백성들의 고난을 해결해 주었다. 겸손하고 순종적이며, 백성에게 이로운 일을 행했다. 

짐은 이 점을 친히 명을 내려 확인했고, 태후마마의 바람도 있기에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명한다. 

처란, 집안일을 물려주고, 제사를 전승하는 자이다. 성안 조씨는 빈곤으로 노비가 되었을 뿐, 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다. 선행을 많이 하고, 만민을 이롭게 했으니, 소가의 큰 며느리로 발탁한다…….”

사실은 이렇게 된 일이었다. 말하자면 공교로운데, 황제는 왕안석의 서신을 받은 이래 줄곧 마음이 불편했다. 거기에 조 태후의 병세가 심해졌다는 말을 듣고 문안을 올리러 갔는데, 태의들이 불확실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약을 쓰는 걸 보고 더 울적하고 상심했다. 그때 정신을 차린 조 태후가 황제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를 위로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조 태후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듣자 하니, 그 조씨가 처가 되지 못한다고요? 좋은 상대를 찾아도 첩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던데요?” 

황제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조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 태후의 표정이 안 좋으니 황제도 더 마음이 안 좋은데, 그렇게 한참 침묵하다가 조 태후가 입을 열었다. 

“관가, 애가가 한 번도 관가에게 부탁한 적이 없지요? 설령 선조의 법도를 바꾼 왕안석을 중용할 때도 애가가 그러지 말라고 강요하던가요. 하지만 이번 일은 꼭 애가 뜻대로 해주면 안 되겠습니까.” 

황제는 멈칫했다. 조 태후가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짐작이 되었다. 뜻밖이었다. 그 여인과 단 한 번 만났을 뿐이고, 또 벌을 주기까지 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시는 걸까. 황제가 재빨리 승낙했더니, 과연 짐작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던 황제는 바로 응했다. 

“마마, 그 조씨를 어찌 그리 마음 쓰십니까.”

황제가 참지 못하고 궁금함을 드러냈다. 조 태후가 씁쓸하게 미소 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가가 한때 충동으로 조씨의 인연을 망쳐놓았지요. 그 바람에 유가까지 해롭게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황제는 더 어리둥절해졌다. 조 태후는 그의 손을 두드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것도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황제의 둘째 누이 서국(舒國) 장공주가 조 태후의 병세를 듣고 입궁했다. 이 공주도 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안채 여인들의 모임에서 그 송옥루와 몇 번 내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 공주의 손속이 좋지 않아서 처참하게 졌다. 도박은 운에 따른 것이라 남을 원망하면 안 되지만, 공주는 내기 품행이 좋지 않아서 따면 기뻐하고 잃으면 언짢아했다. 더 공교롭게도 최근에 내기에서 연신 지던 송옥루는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바람에 공주의 체면을 세워줄 여유가 없었고, 염치도 없이 굴어서 내기에 진 공주의 기분이 더 언짢아졌다. 

하필 곁에 있던 부인 차림의 젊은 여인이 그걸 보고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송옥루가 원래 간사해서 남을 잘 속인다느니, 집에서 시어미를 구박한다느니, 밖에서 가정 있는 사내와 정을 통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에 공주는 속이 후련해졌다. 

자신이 질 수밖에 없지. 원래 사기 치는 여인을 어찌 이길까! 

그렇게 그 얘기를 마음에 품고 있다가 궁에 들어와 태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그런 사람을 제일 못 마땅해하는 조 태후는 바로 누군지 물었고, 유문장이 조씨를 내쫓고 처로 맞이한 송옥루라는 걸 듣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이번엔 바로 믿지 않고 사람을 궁 밖으로 보내 사실인지 아닌지 조사하게 했다. 궁인은 며칠 수소문한 끝에 다른 증거는 찾지 못 했지만 유씨가 집에 몸져누운 것은 확실함을 알아 왔다. 송옥루가 저번에 했다던 말도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자, 조 태후는 병든 몸으로도 이 일을 용서할 수 없었다. 

“몹쓸 것. 어찌 이리 악랄한 여인이 있어! 온순하고 현숙하다더니? 행실이 어찌 이러하냐! 여봐라, 유문장을 들라 해라!” 

황제는 그 자리에서 안색이 변해서 일어서서 고함쳤다. 하지만 조 태후가 뒤에서 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관가, 옛말에 청백리라도 집안일은 다스리기 어렵다 하지 않습니까. 내가 괜히 참견하지 않았으면 유가가 그 지경까지 되었겠습니까? 관가, 진정하세요.”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일단 이 일을 덮었다. 그리고 곧바로 성지를 내렸다. 조씨를 보상한다고 했지만, 사실 본인도 마음의 위로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임새옥은 이런 사정은 전혀 모르고, 어리둥절하게 마지막 한마디만 알아들었다. 아직 얼떨떨한데, 소 노부인과 소금남이 어느새 큰절을 올리고 성지를 받는 걸 보고 재빨리 따라 고개를 조아렸다. 장 태감은 얼른 부축하라고 명하고는 껄껄 웃었다. 

“대관인, 축하합니다. 부인, 축하합니다.” 

뒤에 서 있던 어린 시종이 옥 한 쌍이 놓인 쟁반을 들고 왔다. 

“제가 좀 궁색해서 선물이 변변찮습니다. 대관인, 부인, 웃으며 받아주시지요.”

당황한 소금남이 매우 감사해하며 재빨리 선물을 받았다. 

성지 이야기가 벌써 퍼졌는지 누군가가 폭죽을 터트렸다. 머지않아 온 십방촌에 폭죽 소리가 이어졌다. 

‘태후마마, 망극합니다’, ‘폐하, 망극합니다’, ‘태후마마, 고명하십니다.’, ‘폐하, 고명하십니다.’ 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장 태감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섣달 초사흘, 십방촌의 세밑에는 경사스러운 기운이 넘실거렸다. 진홍색 금박 장포를 입은 노씨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정원 중간에 서서 꽃등을 걸고 탁자, 의자를 놓으라 지휘했다. 정원 안에 설거지하는 사람, 채소 다듬는 사람이 어지럽게 오가며 고기며 채소를 후원에 잔뜩 쌓아두었다. 사내들은 마차를 끌고 나갔다가 속속 돌아왔고, 마차에서 먼 친척, 가까운 친척 할 것 없이 우르르 쏟아져 내려왔다. 다들 새 옷을 입고서 당황스럽고 또 부러운 표정으로 쭈뼛쭈뼛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안채 정중앙에 붙은 ‘어사(御賜: 황제의 하사품)’ 두 글자와, 여기저기 가득 쌓인 혼수를 보고는 간이 작은 사람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도 했다. 거의 끌려가듯이 부축을 받으면서 객청에 들어간 후 창문에 달라붙어서 내다보니, 쉴 새 없이 물건이 안으로 들어왔다. 죄다 붉은 띠를 두른 홍목(紅木) 상자로, 그 상자가 들어올 때마다 십방촌에서 목청이 가장 좋은 방물장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관씨현, 은 노야와 부인이 보낸 하례요. 주단 여덟 필, 비취 장식 여섯 상자!”

“성안현…….”

“경성 사농시 오 대인…….”

“경성 옛 노비 아원…….”

“시랑 대인…….”

“강녕 반산 노인…….”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소란스러운 전원, 중당을 지나 후원까지 퍼져나갔다.

임새옥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홍색으로 단장하고 경대 앞에 앉아 있었다. 희낭(喜娘) 몇 명이 축하 인사를 전하며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희낭들은 전원에서 쉴 새 없이 들리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다가, 이미 화장한 신부가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는 놀라서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대저아, 이렇게 거창한 혼례는 평생 희낭 노릇한 나도 처음 본다우.” 

희낭은 열심히 말을 골라서 조심스럽게 위로하며 분을 들고 눈물 자국을 세심하게 덮어 주었다. 

“대저아, 울려거든 이따 집 떠날 때 울어요. 지금은 울면 안 돼.” 

그 말에 임새옥은 가만히 웃으며 조금 뻐근한 목을 흔들었다. 

“이렇게 예물이 많이 왔을 줄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기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눈이 또 시렸다. 밖에서 북 소리니 징 소리가 울리는 걸 보니 노씨가 부른 놀이패가 온 모양이었다. 

이 혼례는 조정까지 뒤흔든 데다가 태후의 하사품까지 받은지라 성안현에서는 잘 보이려고 난리였다. 소가에서도 놀란 마음을 달래려 애썼고, 덕분에 노씨는 마음껏 돈을 써댔다. 어차피 자기 돈도 아니니 물 쓰듯 뿌려도 그만이었다. 

소가의 영친 대열이 쇄납(嗩呐: 태평소) 패거리 뒤를 따라왔다. 희전(喜錢: 혼례에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돈)을 나눠주는 종복만 여남은 명이고, 성안현 길을 쭉 따라 족히 두 바퀴를 돌았다. 도중에 하늘을 찌르는 폭죽 소리가 끝도 없이 터져서, 혼례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귀가 다 먹먹해졌다. 구경하는 사람, 앞다퉈 돈을 담는 사람, 이날 소가에서 뿌린 돈만 몇천 냥이고, 당과는 몇 포대를 뿌렸다.

온 성 사람이 출동할 만한 이런 혼례는 성안현 백성들이 평생 잊지 못할 경사였다. 

안팎을 새로 단장한 노아촌 소가 저택의 문밖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 거기에 끝도 없이 몰려드는 축하 행렬에 근처 백성들도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쉴 새 없이 오가는 친지와 벗들은 하나같이 번쩍번쩍 차려입고 씀씀이도 컸다. 소 노부인은 원래 혼사를 강녕에서 크게 치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이 생기자, 울분을 풀 생각에 저 멀리 강녕에 사는 친척들을 죄다 초대해서 성안현에서 크게 열었다. 

그 바람에 소가 친척들은 황급히 길을 서둘렀고, 몇 날 며칠 잠도 못 자고 달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엔 관리도 꽤 있었고, 소가는 주루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멀리서 온 친지를 대접했다. 나름 식견이 넓다 할 만한 성안현 현령, 심지어 대명부 지사마저 혀를 내둘렀다. 

소가가 이렇게까지 부자였구나! 

임새옥은 대청 앞에 도착해 소금남과 나란히 섰다. 소 노부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사람들이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막대기 모양의 기저(機杼)로 머리쓰개를 들추었고, 임새옥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번엔 의식이 훨씬 복잡했다. 사의(司儀: 혼례를 주관하는 사람)의 인도하에 소씨 가문의 조상 위패와 바글바글 들어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절을 올리고 나자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어서 동심결(同心結: 납패에 쓰이는 매듭)을 함께 잡고서 싱글벙글 웃음꽃이 핀 소금남과 함께 방으로 향했다. 

“이 정도로 끝난 걸 다행인 줄 알아요.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죠. 원래는 더 있는데.”

그녀의 피곤한 기색에 소금남이 나직이 웃었고, 그런 소금남을 보며 임새옥도 빙긋이 웃었다. 기쁨이 지나친 소 노부인은 원래 두 사람더러 성을 세 바퀴 돌라고 했는데 겁에 질린 소금남과 임새옥이 한참 동안 알랑거린 끝에 겨우 그 생각을 접게 했다.

“그래, 좋다. 오늘은 너희들도 지쳤으니, 강녕에 가서 다시 한번 하자!”

소 노부인이 껄껄 웃으며 하는 말에 그 자리에 있는 친지들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신방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쓰개를 벗고, 머리를 올리고, 합환주를 마시고, 꽃을 따고, 단추를 풀고, 술잔을 내던진 후에야 신방에 두 사람만 남았다. 

“아이고 어머니, 힘들어 죽겠네!” 

임새옥은 곧바로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옆에 한 명이 더 앉았다. 소금남의 청명한 웃음소리를 듣자 금세 또 긴장되었다. 

이제, 합방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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