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옛 부부, 결국 아무런 말 없이 돌아서다
8월 말, 황하 홍수가 지난 뒤 날씨가 며칠 동안 맑았다. 안개가 자욱한 정주성, 성벽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홍수가 휩쓸고 간 흔적뿐이었다. 이미 여러 번 치웠지만, 잡초와 짐승 시체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며칠 햇볕이 쨍쨍한 날이 이어지자, 썩은 내가 진동했다. 남루한 의상에 얼굴이 누렇게 뜬 백성들은 코를 틀어쥘 기운조차 없었다. 정주 성문 네 곳에 모두 피난소를 설치해서 식량을 나눠주고 쉴 곳과 진료받을 곳을 제공하자, 재해를 입은 백성들이 모여들었다.
천둥소리와 함께 점점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도움을 청하러 온 사람들에게 갈 곳을 마련해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투덜거렸다.
“하늘님, 제발 인제 그만요!”
그러나 하늘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 멀지 않아 콩알만 한 큰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제방을 높였으니 다시 물에 잠기진 않겠지?”
깡마른 병졸 하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두려움과 서글픔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의 집은 강변이라 제방이 무너지고 홍수가 몰려오는 기세를 직접 겪었었다. 식구 열몇 명이 절반은 그 홍수에 휘말렸다. 병졸 자신은 재빠르게 동생 한 명을 끌고 큰 나무에 올라가면서 목숨을 건졌다.
“새로 오신 나리가 이레 동안 지키고 계셨어. 돌아온 사람 말이 이제 홍수가 다시 와도 별 탈 없을 거라 했네.”
곁에 있는 병졸이 그 어린 병졸을 위로했다. 그리고 서로 부축하며 성에서 나와서 멀어져가는 백성들을 가리켰다.
“저것 보라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아. 가을 농사를 지어 조금이라도 곡식을 얻으려고 말이야.”
“이런 상황인데 곡식을 지킬 수 있겠어요? 다 물에 잠겼었잖아요?”
어린 병졸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나이 든 병졸이 천천히 걸어와서 성문에 기대서는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종일 소리 높여 외치느라 입이 다 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새로 온 대인이 어디서 오셨는지 네가 몰라서 그러지. 성안현이다! 하늘이 청렴결백한 관리를 보내주셨으니, 정말이지 감읍할 일이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성 밖에서 말들이 질주해 들어왔다. 선두에 선 주문청은 두립을 쓰고 도롱이를 걸치고 있었다. 맨발로 바지는 무릎까지 말아 올렸고, 뒤따르는 사람들은 도롱이도 걸치지 않아서 옷이 흠뻑 젖어있었다.
“대인께서 돌아오셨다!”
주문청을 알아본 병졸들이 재빨리 줄을 정돈하고 주문청이 관리들을 거느리고 성문 안으로 질주하는 걸 바라봤다.
이날 또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불안해했다. 부잣집에서는 장신구를 간단히 정리해서 다시 달아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여러분, 모두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진정시키고, 반나절 후에 다시 주(州) 관아에서 모이게!”
말고삐를 당기며 지시한 주문청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멀어져가는 걸 바라봤다.
주문청 일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주 관아로 돌아온 그를 맞이했다. 신중한 정실부인은 눈물을 닦고 있었고,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모는 그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아들, 며느리, 손자는 한 방에 모여있고, 시첩들은 바삐 차를 나르고 갈아입을 옷을 내왔다.
“오늘 제방을 손보아서 홍수가 다시 오지는 않을 게다. 그 이야기를 해주러 왔다. 다들 안심하고 집에 있고, 함부로 나가 돌아다니지 말아라. 민심이 흐트러진다.”
뜨거운 탕을 마시니 주문청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듯해졌다.
“노야, 걱정하지 마세요.”
주 부인은 서둘러 식사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정주로 온 이래 드디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하는 것이었다.
“조가 대낭자는? 어째 보이지 않아?”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둘러보던 주문청이 문득 물었다. 사람들은 주저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데, 결국 주 부인이 입을 열었다.
“노야, 안 그래도 물으려던 참입니다. 그날 노야와 함께 나간 이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주문청은 몹시 놀라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호위와 함께 돌려보냈는데?”
온 가족이 한순간 난리가 났다. 조 대낭자가 벌써 사흘째 무소식이니 온 가족이 놀라 자빠질 일이었다. 재해를 겪은 뒤라 세상이 매우 혼란스러워서 도적도 날뛸 텐데, 행여 납치라도 됐다가는 큰일이었다. 그렇게 허둥대는데 밖에 있던 병사 하나가 듣고는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대인, 소인이 깜빡했습니다. 며칠 전에 장이랑이 소식을 보냈습니다. 대낭자와 함께 유임향 일대에 있다고요. 소인 줄곧 성 밖에서 식량을 배부하느라 부인께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습니다.”
일가는 그제야 안도했다. 병사를 한바탕 혼낸 후에야 식사를 시작하는데, 주문청은 여전히 의문이 남은 얼굴이었다. 그걸 본 주 부인이 얼른 위로했다.
“오는 내내 지켜본 바로는 대낭자는 무턱대고 움직일 사람이 아닙니다. 매우 영리하고요. 장이랑 일행이 지키고 있다고 하니 분명 무탈할 겁니다.”
“어찌 됐든, 아낙네 아니오. 유임향 일대는 피해가 심각한데, 큰 재난이 지난 자리엔 큰 병이…….”
“쯧쯧쯧. 의관(醫館)을 이미 설치하지 않았느냐. 각 사원에 의술을 아는 승려도 내보냈고. 지금 정주에 살아있는 자는 곡식을 얻었고, 병든 자는 의원을 보내고, 죽은 자는 장례를 치렀거늘, 큰 병이라니! 젊은 사람이 헛소리나 하고, 얼른 침 뱉어라!”
주 노부인이 혀를 차며 하는 말에 온 가족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문청도 이미 할아버지가 된 사람인데, 어머니에겐 젊은 사람이란 소리를 들을 뿐이다. 주문청은 어머니가 안심하도록 퉤퉤퉤, 침을 뱉었고, 분위기가 드디어 화기애애해졌다.
이렇게 지체된 바람에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경성 대인들이 도착했다고 병사가 들어와 고했고, 주문청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마중하러 갔다. 주 관아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친 기색으로 앉아 있는 일곱 대인을 보고 얼른 다가가 인사하고 때마침 잘 오셨다는 등등 인사치레를 했다.
“대인, 예를 갖출 것 없네. 어서 성 밖 순시 나가세.”
도수감 대인이 그렇게 말하자, 주문청이 식사는 하셨는지 물었다. 도수감이 손을 저으며 오는 길에 먹었다고 대답하자 주문청은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일정을 생각해 보면 이 대인들은 적어도 보름 후에나 도착할 예정이었고, 도착했더라도 일단 배불리 먹고 마신 다음에 순시를 나가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평소와 다르게 구나 싶었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체할 수 없어서, 재빨리 통판과 참군(參軍)을 소환했다. 주 관아의 크고 작은 관리들이 부름에 따라 착착 당도하는 걸 보고 경성에서 온 관리들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자, 대인, 길 안내하게. 일단 제방부터 살피고 난민을 만나보겠네.”
도수감 대인이 도롱이와 두립을 걸치고 말에 올라탔다. 다른 이들도 황급히 따라 말에 올라 성 밖으로 향했다. 대인들을 슬쩍 훑어본 주문청은 그 사람이 보이지 않자 웃으며 물었다.
“대인, 우리 고장 밭이 심하게 훼손됐습니다. 유 대인은 언제 오실지요?”
소식에 따르면 유문장 대인은 어딜 가든 큰 환영을 받고 어디에서든 쉽게 보내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 바람에 너무 느리게 움직인다고 하니, 가을 농사 시기가 곧 지나려고 하는 참이라 주문청의 속이 타고 있었다. 임새옥을 못 믿는 게 아니라, 임새옥의 기술이 모두 유소호에게 가르침 받은 것으로 알고 있어서 그랬다. 제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사부가 직접 오는 게 더 안심할 수 있지 않겠는가.
“유 대인은 벌써 도착했네.”
누군가의 말에 주문청은 매우 놀라고 또 기뻤다.
“도착했습니까? 그런데 왜…….”
“유임향에 당도했을 때, 재난 상황이 심각한 걸 보고 허례는 됐다고 거기 남아 밭을 살피기로 했고, 우리만 이쪽으로 와서 대인을 만나기로 한 것이네.”
공부 대인이 감탄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같이 오면서 그 애송이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어서, 그렇게 착실하고 능력 있는 젊은이이니 황제의 성총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주문청은 아하, 하면서 그럼 더 잘됐다고 안도하는데, 갑자기 심장이 철렁해서 “큰일 났다!”고 외치고 말았다.
빗방울이 때론 급하게 때론 느리게 내리치느라 두립과 도롱이를 쓰고 입고 있어도 금세 옷자락이 젖었다. 서늘한 바람에 임새옥이 재채기를 하자 곁에 있던 병사들이 걱정스레 말했다.
“대낭자, 날씨가 흐려집니다. 돌아가시지요.”
병사 중 수장인 장이랑이 설득했다. 임새옥은 마음 아파 죽겠다는 얼굴로 논 안에서 축축한 논벼를 세우고 있었다. 주변에 서 있는 농부들이 눈시울을 붉히고 있는 걸 보고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모종기였다면 구제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뽑아야 해요.”
주변에 있던 농부들 모두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들이기 싫어서 그렇지,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임새옥의 말이 이어졌다.
“이웃 마을에 이미 어떻게 물을 빼고 땅을 고르는지 알려줬어요. 거기 가서 살펴보세요. 가장 빨리 자라는 곡식을 사고요. 녹두 같은 것으로요. 다만 녹두는 껍질이 단단하고 물을 잘 먹지 않아서 싹이 잘 자라지 않아요. 뿌리기 전에 불리는 거 잊지 말고요. 그리고 밭을 깊게 갈아야 해요. 지금 땅이 젖어있어서 잘못하면 뿌리가 썩어요. 비료 주고 물기를 잘 말려야 해요. 빈 밭이 있으면 채소를 심으세요. 송채, 비름, 목이채, 쑥갓, 파채처럼 빨리 자라는 겨울 채소로요.”
사람들은 눈물지으며 그녀가 자세히 설명해주는 내용을 꼼꼼히 기억했다.
“대낭자, 우리가 심는 걸 보고 떠나주세요.”
누군가 하는 말에 임새옥은 가슴이 쓰라렸다. 위기에서 벗어나 살아난 사람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을 본 장이랑이 물 주전자를 건넸다. 임새옥은 누가 입을 댄 건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받아서 몇 모금 마셨다.
“얼마나 더 남았을까요? 서둘러야겠어요.”
장이랑은 한참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대낭자, 며칠 저희와 있는 동안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었습니다. 매일 천막에서 재난민들과 함께 끼어서 자고, 견딜 수 있겠어요? 돌아서 며칠 쉬다가…….”
임새옥은 홍수에 휩쓸렸었던 땅을 바라보며 먹먹한 듯 말했다.
“적어도 우린 먹을 게 있고, 잘 곳도 있지만…….”
임새옥의 말에 다들 서둘러 말에 올라 길을 서두르면서 자루에서 건량을 꺼내 나눴다. 임새옥은 길가에 굶주린 이재민들이 있는 걸 봤지만, 기운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못 본 척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매일 건병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고, 이건 무슨 일이 있어도 선심만으로 내어줄 수 없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며 보이는 곳곳이 허물어지고 엉망이 되어 있었다. 담이 허물어지고, 나뭇가지가 꺾이고, 짐승의 사체가 가득한 황폐한 마을을 연달아 뒤진 후에야 겨우 인가 흔적을 찾아냈다. 비는 갈수록 크게 내리고, 두립과 도롱이로 더는 비를 막지 못해 옷이 젖어갔다. 빗물이 모두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타고 흘렀다.
“대낭자, 아무래도 날씨가 이상합니다. 어서 성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이곳은 성 안쪽만큼 견고하지 않아서 홍수라도 오면……. 소인들의 목숨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대낭자의 귀한 몸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됩니다.”
장이랑이 혼란스럽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임새옥은 그의 마지막 말에 웃음이 터졌다.
“귀한 몸이라니요. 다 같은 겉가죽을 쓴 사람일 뿐인데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확실히 상황이 안 좋아서 모두와 함께 말을 재촉해 돌아가기로 했다.
임새옥은 며칠 전에 겨우 말타기를 배운 것이라서, 천천히 갈 땐 괜찮았는데 빠르게 달리니 이리저리 흔들렸다. 당장에라도 고꾸라질 것 같은 모습에 병사들은 너무 초조했지만, 그렇다고 같이 타고 가자는 말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난처한 상황에 저 앞에 연달아 서 있는 막사가 보였다.
“조정에서 설치한 피난처다!”
장이랑이 크게 기뻐하며 고함쳤다. 이때 임새옥의 말이 진흙 속에서 미끄러지듯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장이랑의 말에 병사들은 단숨에 달려가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누군가 임새옥의 말 궁둥이에 채찍을 내리쳤다. 놀란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그길로 막사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무엄하다! 누가 감히 조정 관리가 있는 곳에 함부로 달려드느냐!”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막사를 지키던 관병 십여 명이 미쳐 날뛰는 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일제히 고함치며 장창을 휘둘렀다.
“우린 주 관아 주문청 주 대인의 수하입니다. 대인들, 사정을 좀 봐주십시오!”
사고 친 병사들이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말을 쫓아왔다.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임새옥이 탄 말은 이미 나뒹굴었고, 말에 탄 작은 몸도 따라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지푸라기 멍석 위에 떨어져서 데굴데굴 굴러 진흙탕에 빠졌는데 창끝이 일제히 그녀를 겨누었다.
임새옥은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등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장이랑 등이 고함치는 소리가 귀에 울렸다. 병사들이 요즘 예민해져서 사납다는 걸 알기에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강도로 몰릴 수 있고, 이 자리에서 목이 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힘껏 손을 치켜들었다.
“저는, 저는 정주 관아에서…….”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유 대인, 유 대인은 막사 안에 계십시오!” 하면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흙이 잔뜩 묻어서 원래 어떤 색인지 알아보기 힘든 장화가 눈앞에 나타났다. 고개를 들었지만, 미친 듯이 내리는 빗물에 시선이 가려 상대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귓가에 애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당신이 왜 여기에…….”
막사 안에 작은 화로를 놓고 숯불을 지피자, 임새옥의 젖은 옷이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났다. 막사 위로 큰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덕분에 다행히 그녀의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묻혔다. 마른 바닥은 이미 온통 젖어있었다.
“갈아입을 옷도 없고, 이러다간…….”
임새옥이 옷을 짜고 또 짰지만, 여전히 짤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드리워진 휘장 너머로 밖을 내다보니, 가끔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어서 옷을 벗어서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아무래도 사내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짚으로 엮인 허름한 막사 사방에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바람과 함께 들이친 빗발에 몸이 쉴 새 없이 떨려서 뜨거운 주전자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데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은 장이랑이 얼굴을 내밀며 들어왔다. 다른 사람 옷을 벗겨서 입은 것인지 건장하고 튼실한 장이랑이 입으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임새옥은 거북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더 거북했다. 장이랑이 얼굴을 돌린 채 찻주전자를 더듬더듬 내밀었다.
“대낭자, 뜨거운 차입니다.”
그러고는 아무렇게나 놓고 서둘러 돌아서 나갔다. 여인의 홀딱 젖은 모습을 볼까 봐 두려운 것처럼.
임새옥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비에 젖은 옷차림을 내려다봤다. 흰 웃옷이든 치마든 모두 몸에 딱 달라붙어서 제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집에서 자주 입던 조금 더 두꺼운 무명 치마를 입을 걸 하고 후회했다.
몸에서 몇 방울쯤 물방울을 떨어뜨리면서 걸어가서 뜨끈뜨끈한 찻주전자를 가지고 돌아와 큰 그릇에 따랐다. 화로 곁에 앉아서 홀짝홀짝 마시니 열기가 김과 함께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덕분에 뜨거운 김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가려주었다.
문 앞에서 주저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순간, 임새옥은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밖에서 “유 대인!” 하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멈추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기절할 것 같은 그때, 휘장이 젖히더니 진흙이 잔뜩 묻은 관복 차림으로 유소호가 들어왔다. 임새옥은 옷자락을 쥔 채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유소호의 흙 묻은 장화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췄다. 사방에서 들리는 빗소리와 함께 그의 거칠고 다급한 숨소리가 들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면서 임새옥의 발치에 옷 보따리가 떨어지고. 순간 임새옥은 무심결에 사내의 신발을 쳐다보았다. 검은 신에 비뚤비뚤 수 놓인 문양이 자기 솜씨라는 걸 한눈에 알아보는 순간, 목이 타는 듯이 따가워졌다. 말소리는 들리지 않고,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던 발이 휙 돌아서서는 나갔다.
밖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말이 들렸다.
“비가 한동안 더 올 것 같습니다.”
“다행히 전방을 살펴본 사람이 돌아왔는데 물이 불진 않았다는군요. 물이 빠져나갈 구멍을 낸 모양입니다.”
유소호의 살짝 쉰 듯한 목소리도 들렸다.
“그럼 다행이군. 성 안에 계신 대인들께 소식을 전하게. 그래야 걱정하지 않으시지.”
그 말에 누군가 대답하고는 멀어졌다. 뒤이어 발걸음 소리, 옷이 스치는 소리가 멀리 사라졌다.
그제서야 임새옥은 그릇을 들었다. 뜨거운 차는 바람을 쐬어 식어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발치에 떨어진 옷과 신발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입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젖은 옷을 타고 흐른 빗물이 금세 퍼져서 유소호가 던진 낡은 옷자락을 적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빗소리가 잦아들더니 천둥소리가 들리고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입은 옷이 어느새 반쯤 말라서 더는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릇을 내려놓고 뒤를 말리려고 돌아앉았다. 그 순간 발걸음 소리가 갑자기 들리더니 휘장이 젖혀졌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서 부르르 떨며 돌아보다가 유소호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해 보면 유소호의 눈과 그녀의 눈이 조금 닮았다고 할까. 둘 다 살구씨 같은 눈이 크지도 작지도 않고 새카맣고 밝았다.
벌써 못 본 지 반년이 지났던가. 친숙하던 사람인데 왜 이렇게 낯설기만 할까. 천둥 치는 소리에, 넋을 잃고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시선을 피했다. 임새옥이 당황해서 치맛자락을 놓았더니 비단 치마에 불똥이 튀어서 타는 냄새가 났다. 그녀는 허둥대며 뒷걸음치며 발로 꾹꾹 밟았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자신에게 머문 시선이 느껴졌다.
“서생은 사흘 만에 만나도 괄목하게 된다더니, 과연 그렇군.”
빈정거리는 싸늘한 목소리가 갑자기 들렸다. 임새옥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서 유소호를 바라봤다. 시퍼레진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미소를 지은 유소호의 시선이 그녀 발치에 있는 옷으로 향했다.
“이제는 법도를 잘 지키는군. 얼어 죽더라도 남이 주는 옷은 입지 않을 모양이지?”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는 치맛자락을 서서히 들어서 화로 위에 쬐었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할 시선이 줄곧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고, 뭐라 말 못 할 거북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더 이상 눈이 시리지 않았고, 차를 한 사발이나 마셔서인지 타는 듯이 따갑던 목도 나아졌다. 옷이 점점 말라감에 따라, 젖은 옷이 주던 중압감에서도 벗어났다.
비가 드디어 멈췄는지 막사 위에 남은 빗물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로 굴러떨어지면서 똑똑똑, 듣기 좋은 소리가 울렸다. 밖에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말이 바닥을 긁고 투레질하는 소리도 들렸다.
“대인을 방해했군요.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바깥의 기척에 임새옥은 안도하며 고개를 들고 유소호를 바라봤다. 그녀는 반쯤 마른 옷을 털고 젖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면서 유소호를 지나쳐 밖으로 향했다. 장이랑을 부르려고 하는데, 유소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안 그래도 말에 떨어진 바람에 온몸의 뼈가 쑤시는데, 손목이 잡히자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 통증이 임새옥의 신경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따듯한 손바닥이 그녀의 피부에 닿는 순간, 열기가 바늘처럼 그녀의 모든 숨구멍을 뚫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녀는 통증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휙 잡아빼면서 낮게 소리쳤다.
“더러운 손 치워!”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임새옥은 참지 못하고 아프다고 외쳤다. 몸은 어느새 유소호 곁으로 끌려가서 거의 얼굴이 닿을 듯했다.
“어째서 귀신처럼 내 곁에서 맴도는 거지? 내가 뭘 더 어쩌라고? 이제 멋진 시를 지을 줄 알고, 태후마마께서 중매를 서고, 만인의 칭송을 받는 농신 낭자가 되었잖아. 유명하고 재능이 뛰어난 조 대낭자, 명성이 혁혁해졌으면서 뭘 더 바라? 어째서 날 핍박하고 놓아주지 않아? 왜 사사건건 나와 맞서는 거야? 왜 나와 관련된 일은 모두 나서서 가로채려 하는 거지? 난 당신 상대가 아니야. 난 당신이 무서워. 제발 부탁이야. 멀리 꺼지라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유소호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를 갈며 나직이 소리쳤다. 잡아챈 여인의 손목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처음에 당황해하던 여인의 눈이 아파서인지 커다래지는 게 보였다. 까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해지는가 싶은데,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정강이를 차여서 엉겁결에 손목을 놓고 뒷걸음질 쳤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그 여인이 나무 막대기를 집어 드는 걸 보고 무심결에 몸을 낮춰 피했다. 막대기가 빗발처럼 몸에 떨어졌다.
“내가 귀신처럼 곁에서 맴돌아? 내가 귀신처럼 곁에서 맴돌아?”
여인은 날카롭게 고함치더니 곧 울먹였다. 또렷하던 목소리가 뒤이어 웅얼웅얼 뭉개졌다. 갈수록 흐느끼는 소리가 커지더니 막대기가 계속해서 등, 어깨, 팔, 다리에 떨어졌다. 모두 온 힘을 다해 내려치는 것이라 마음까지 아팠다. 처음엔 손을 들어서 막으면서 막대기를 뺏으려고 했지만, 여인의 눈물 가득한 얼굴, 서러운 울음소리에 심장이 틀어 쥐인 것처럼 괴롭고 칼로 벤 것처럼 아파서 천천히 몸을 낮추고 때리는 대로 맞았다.
“날 저버린 건 당신이지! 분명 약속해놓고, 약속해놓고…….”
여인은 기운이 다했는지 점점 때리는 힘이 약해졌다. 유소호도 그녀가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눈물이 앞을 가릴 듯 차올랐다. 그가 벌떡 일어나서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았다. 품에 안으려는 바로 그때, 밖에서 기척을 들은 사람들이 드디어 숙고를 끝내고 ‘하나, 둘, 셋’을 외치며 안으로 일제히 달려 들어왔다.
안에 있던 사람, 밖에서 들어온 사람, 그 순간 모두 넋이 나갔다. 누군가 “아이고, 대낭자, 적당히 하세요.” 하는 말에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에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유소호를 자신들 쪽으로 당기고 있었다. 그 여인과 자기를 떨어뜨리려는 행동들, 사방에서 들리는 웅성대는 소리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무심결에 임새옥의 손목을 꼭 잡고 사람들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놓지 않았다.
“아이고, 할 말 있으면 말로 하세요. 말로 하세요. 때리지는 마세요. 그럴 일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유소호를 당겼고, 누군가는 법도고 나발이고 임새옥을 당겼다. 임새옥은 이리저리 밀리다가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잡고 나무 막대기를 빼앗아 갔다. 몸은 뒤로 넘어가는데 손목은 단단히 쥐인 채라 아파서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과 함께, 그녀를 잡은 힘이 별안간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바람에 그녀는 다시 멍석 위로 넘어졌다. 안 그래도 튼튼하지 않은 짚 멍석은 비까지 젖은지라 곧바로 흐트러졌다. 이미 말랐던 옷이 다시 젖었고, 말에서 떨어진 바람에 욱신욱신하던 온몸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쏟아졌다.
막사 안에 고함이며 위로하는 소리며 말리는 소리가 뒤섞였다. 유소호는 이리저리 밀리면서 당황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의 모습이 혼란스럽게 움직이는 사람들 뒤로 사라지더니 갈수록 시선을 가리는 사람들에 가려 결국엔 보이지 않았다.
“비켜라!”
유소호가 숨을 크게 들이켜며 버럭 고함치자 웅성대던 사람들이 순간 조용해졌다. 다들 멍한 얼굴로 유 대인을 바라봤다. 유 대인은 몽둥이에 맞아 시퍼렇게 멍이 든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막사 휘장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서 임새옥을 에워싸고 괜찮은지, 부축해야 할지 묻고 있는 정주 아역들을 밀쳐냈다.
“어딜 부딪혔어? 어디 아파?”
유소호가 여인을 부축해 일으켜 앉히고는 소맷자락으로 그녀 얼굴의 빗물, 눈물을 닦아주며 나직이 물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불어온 바람에 넘어지면서 찢어진 옷자락이 팔락이며 새하얀 옆구리 살이 드러나자, 다들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유 대인의 나직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긁혔군. 괜찮아, 괜찮아. 뼈는 다치지 않았고?”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리고, 유 대인이 약을 가지고 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개를 숙인 사람들의 시선을 스치고 진흙 묻는 옷자락이 반쯤 남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코를 찌르는 약술 냄새가 천막 안에 퍼지자, 임새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곧 누군가가 발목을 세게 누르자, 아파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오른손으로 한쪽에 놓인 빈 그릇을 들어 올려서는 자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 숙인 채 발목을 문지르는 유소호를 내리치려다가 허공에서 손이 멈칫했다. 유소호는 그녀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도 고개도 들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때려. 그 정도로는 사람이 죽지 않아…….”
뚝뚝 떨어진 눈물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적셨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눈앞의 젊은이를 바라봤다. 그는 약술을 내려놓고 곁에 있는 낡은 옷을 끌어당겨 이로 쫙쫙 찢어냈다. 옷으로 그녀의 상처를 묶어주는 동안 줄곧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바라보지 않았다. 조심스럽고 느린 동작으로 양쪽 발목을 감아준 다음, 손목을 감기 시작하고서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헤어졌을 때보다 훨씬 그을린 모습이었다. 고작 스물 남짓한 사내의 얼굴에 피로감이 가득했다. 고생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변함없이 깨끗하게 빛났다. 자신이 휘두른 막대기에 맞아서 광대뼈 근처가 시퍼렇게 멍이 들었지만.
임새옥의 손과 팔뚝에 벗겨지고 긁힌 상처가 가득하자, 유소호는 우선 그녀가 꽉 쥐고 있는 그릇을 한쪽에 내려놓고 진흙이 잔뜩 묻은 그녀의 소매를 들췄다. 그가 은팔찌를 손목 위로 올리면서 그의 손바닥이 그녀의 피부를 스쳤다. 손바닥 가득한 군살에 임새옥이 고개를 숙이고 그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 상처가 가득했다. 밭에서 나뭇가지 등 잡다한 것에 스친 흔적이리라. 임새옥은 자기 왼손을 들어 그것과 비슷한 흔적을 바라봤다. 그때 유소호가 팔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천으로 감쌌다. 얼마나 조심스럽고, 얼마나 진지한지. 상처를 감싸는 게 아니라 공예품을 공들여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끝내기까지 기껏해야 차 한잔 마실 시간.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임새옥은 긴 의자에 앉아서, 제 앞을 서성이는 유소호를 바라봤다. 유소호가 임새옥 앞에 멈춰서더니 허리를 숙이고 장삼을 걸쳐주었다. 이번엔 매우 가까웠다. 누군가 밖에서 들어와 이 모습을 봤다면, 분명 포옹하고 있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앉아 있는 임새옥의 바로 앞에 그의 가슴이 닿았다. 들판의 흙냄새와 옅은 땀 냄새가 나고 빠르고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머리 위로 느껴지자 몸이 저절로 파르르 떨렸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유소호도 이 여인의 전율을 똑똑히 느꼈다. 그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여인의 어깨에 멈춰서는, 호흡이 가빠졌다.
하지만 부드럽지만 힘찬 두 손이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 손길에 입가에서 오랫동안 맴돌던 말을 거친 호흡과 함께 삼키고 말았다. 고개를 숙였더니, 그 여인이 살짝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봤다. 맑은 눈빛,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다.
유소호는 옷을 잘 걸쳐주고 손을 떨어뜨리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임새옥은 여전히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말발굽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유소호의 지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날이 갰으니, 속히 다음 장소로 갑시다.”
“예!”
혼란스러운 움직임이 들리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심장 뛰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그녀의 고막을 울렸다.
“대낭자.”
수군대는 소리와 함께 장이랑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임새옥은 숨을 들이마시고 소매로 얼굴을 닦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던 아역들이 모두 한시름 놓으면서 여인을 감싸고 있는 사내의 장삼에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성으로 돌아가요. 주 대인이 걱정하시겠어요.”
임새옥이 눈앞의 여섯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낭자,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유 대인이, 유 대인이 마차를 구하러 가셨습니다.”
장이랑이 머쓱하게 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빨라도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생각하며 돌아보는데, 마차가 아니라 누군가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말에 탄 사람은 도롱이와 두립 차림이라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낭자!”
말이 가까워지고, 그 사람이 말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다가왔다. 두립을 벗자 초조함과 기쁨이 뒤섞인 준수한 얼굴이 드러나는데 놀랍게도 소금남이었다.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무심결에 눈을 비비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빽빽하게 뻗은 넝쿨을 지나, 주문청의 부인이 노모를 부축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약을 따르던 시녀가 두 사람을 보고 서둘러 일어나 문안을 여쭈자, 주 노부인이 손을 저어 말리며 나직이 물었다.
“정신은 차리고?”
“한 번이요. 약 드시고 바로 잠드셨어요.”
시녀 아이가 하는 말에 노부인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주 부인을 잡고 내실로 들어갔다. 붉은 휘장이 젖혀진 침상에 임새옥이 누워있었다. 붉은 비단 이불을 덮고 있어서 유난히 핼쑥해 보이는 얼굴로 두 눈을 꼭 감은 채 거친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주 노부인은 아미타불을 읊으며 며느리를 향해 나직이 말했다.
“의원은 뭐라고 하더냐? 약은 얼마나 먹어야 하고?”
여인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주 부인은 그녀가 푹 잠들지 못한 걸 알아차리고 시어머니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갔다.
“타박상은 큰 문제가 없답니다. 다만 지나치게 근심하며 고생한 데다가 비까지 맞아서 기혈이 순조롭지 않대요.”
“쯧. 근심하고 고생해서 그렇기는. 내 보기에 지나치게 속을 앓아서 그런 것이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하필 그 사람을 만나서.”
방 안에 피어오르는 안신향 연기가 주 노부인의 말을 휩쓸어갔다. 창밖엔 푸른 대나무가 가득하고 산들바람에 꽃향기가 불어왔다. 고부 두 사람이 잠시 침상 앞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는데 시녀가 밖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노부인, 부인, 소 대관인이 대낭자를 보러 들어와도 되느냐고 물으셔요.”
두 부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고, 잠시 주저하다가 노부인이 입을 열었다.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이다만, 하지만…….”
조 대낭자가 바로 그 소 대관인에게 안겨서 집으로 들어오던 장면이 떠올랐다.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해하던지. 자신들도 다 겪어온 일이라 사내와 여인의 정분을 몰라볼 리가 없었다.
“어머니, 홍수의 위험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비를 무릅쓰고 대낭자를 찾아다닌 성의를 봐서라도 들어오게 해야겠지요.”
주 부인이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일어서자 노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 일어났다. 며느리를 붙들고 밖으로 나가서 앉으며 모시고 들어오라고 하자마자, 소금남이 어느새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췄다.
노부인은 사내의 창백한 얼굴에 비를 맞아서 풍한이 든 걸 알고 다정하게 괜찮은지 물었다. 소금남이 다시 예를 갖췄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부인. 약도 먹었고 해서, 인제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시선은 저도 모르게 내실로 향했다. 주렴에 시야가 가려져서 어렴풋이 붉은 휘장만 보였다. 주 부인은 빙그레 웃으며 뒤에서 노부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노부인이 헛기침하자 소금남이 시선을 거두고 정색하며 자리에 섰다.
“대관인, 이 늙은이는 그저 안채 여인일 뿐이라서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지만, 이 대저아는 우리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라 마땅히 명성을 지켜주어야 하네. 나와 대저아는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속이 훤하게 보이는 여인이란 걸 잘 아네. 속셈 같은 건 없어. 시가에서 버림받은 여인의 몸인데 지금은 또 밖을 떠돌고 있지. 백성의 생계를 위한 일이라지만, 손가락질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걸세. 대관인은 상인 집안 출신이지만, 엄한 집안이라고 들었네. 그런데 어찌 이리 황당한 일을 하는가?”
노부인은 노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진중한 표정으로 천천히 말했다. 고개를 숙인 소금남은 자책하는 기색이었다. 노부인이 왜 이런 식으로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어제 그 여인이 쓰러질 것처럼 기운 없는 걸 보고 마차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직접 안고 말을 타고 성으로 돌아왔다. 오는 내내 본 사람들이 있을 테니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돌았을 것이다. 그때는 초조해서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여인의 명성을 더럽혔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사내가 후회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걸 본 주 부인은 마음이 약해져서 시어머니의 소맷자락을 다시 살며시 당겼다.
“사람 살리려는 마음이 급급했던 대관인의 정성을 봐서 이번 일은 넘어가겠네. 대인에게 말해서 유언비어는 알아서 막을 테니, 들어가 보시게.”
주 노부인은 그의 간절한 표정에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소금남이 예를 갖추더니 돌아서서 그대로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주 노부인이 다급하게 불러세웠다.
“어딜 가는가? 대저아를 만나러 온 것 아닌가?”
소금남은 멈칫했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하루 꼬박 눈도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실에 의원과 시녀가 쉴새 없이 오가는 걸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그 여인이 안에서 상처를 치료받는 중인 걸 알면서도 감히 들어가지도 못하고, 날이 밝기만 기다리다가 찾아온 것인데 노부인의 한마디에 후회스럽고 자책이 되어 차마 그 여인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서 들어가 보게.”
사내의 얼굴은 그래도 되는지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주 부인이 참지 못하고 시녀를 시켜 휘장을 들어 올리게 했다. 이불을 덮고 누운 작은 몸을 휘장 너머로 바라본 소금남은 더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두 부인에게 인사를 한 다음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봤더니, 얼굴에 혈색이 없고 콧김이 일정치 않은 것이, 제대로 잠들지 못한 듯했다. 가까이 가서 보고 싶어도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눈치 빠른 시녀가 재빨리 둥근 의자를 침상 앞에 가져다 놓았다.
“대관인, 앉으셔요.”
시녀 아이는 소금남이 자연스럽게 다가가 앉는 걸 보고는 빙긋 웃으며 재빨리 돌아서서 나왔다. 뭐든 해서 이 사내에 대한 호감을 표시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기뻤다.
어제 이 사내가 흠뻑 젖은 대저아를 안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 시녀들 눈엔 이 사내가 전혀 꼴사납거나 무례해 보이지 않았다. 하나같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부러운 듯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가 정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자기를 이렇게 대해주는 사내가 있다면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행복하기만 하리라 생각했다.
소금남은 그립고 애타는 마음으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제 소식을 듣고 놀랐던 두려운 감정이 아직도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는 듯했다. 정말이지 공교로운 일이었다. 마침 정주성에 들어 왔는데 새로 온 대인을 칭찬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성안현에서 농신 낭자도 모셔왔으니 분명 농 재해의 위기에서 벗어날 거라고 하는 걸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이레나 여드레는 있어야 다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늘 당장 만날 수 있다니 말이다.
그런데 갑자기 큰비가 내리면서 정주성 사람들은 당황해서 다시 비가 넘치겠다고 걱정했고, 소금남은 재차 숙고한 끝에 정주 관아로 임새옥을 찾아갔다. 그런데 대낭자가 지금 강변에 있는 유임향에 있다는 말을 들을 줄이야. 물에 휩쓸려갈 거라고 소란을 피우는 관아 사람들의 말에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갈 것 같아서 가슴을 부여잡았다. 숨이 도통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를 잃는다고? 그녀를 잃는다고? 이 세상에 앞으로 그녀가 없다고? 소금남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그 밤으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었다. 죽어야 끝날 그런 고통이었다.
또 한 번 그런 고통을 겪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정말로 죽는다면, 차라리 함께 가야겠다 생각했다. 밀물처럼 성 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헤치고, 하늘에 구멍이 날 듯 쏟아지는 비를 헤치고 조금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며 말을 달렸었다.
주 노부인이 가볍게 찻잔을 놓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소금남은 거칠거칠한 제 얼굴을 비비고는 주저하며 손을 내밀었다. 깊이 잠든 여인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자, 잠든 여인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불자락을 꽉 쥐며 웅얼거렸다.
“……싫어. 다른 사람을 품었던 가슴은…… 싫어…….”
소금남은 여인이 움켜쥔 작은 주먹을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제 살을 파고들었다.
“품지 않았어요. 아무도 품지 않아요…….”
그는 나직이 여인의 말에 대답하면서 어제 비가 잠시 그쳤을 때 만났던 관리들을 떠올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다급한 얼굴로 부하를 다그치던 젊은 관리는 바로 유소호였다.
‘없다고? 다시 찾아라! 다시 찾아!’
젊은이는 처음 보는 초조한 모습으로 고함치고는 채찍을 휘두르며 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소금남은 몸을 비틀어 길을 비켜주었다. 재해 순시를 나온 조정 관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관리들은 불안한 얼굴로 귓속말을 하며 지나갔다. 아무도 비에 흠뻑 젖은 곤경에 빠진 행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러게 그렇다고 했잖아…….’
‘부부가 둘 다 마음이 있으면서, 이게 무슨 일이람.’
‘허허, 입 다물어 입 다물어.’
나지막한 수군거림, 가끔 들리는 웃음소리, 의미심장한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차츰 멀어졌다.
잠이 든 임새옥은 그의 손길에 잠시 웅얼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소금남은 그녀의 작은 손을 잡고 고민에 빠졌다. 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밖에서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여기까지가 주 노부인이 참아줄 수 있는 한계라는 걸 알고 몸을 일으키며 여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여기 당신 곁에 있으니까. 기다릴게요.”
주렴이 살짝 흔들리는 소리에 서둘러 손을 놓고 자세를 바로 가다듬었다. 돌아섰더니 주 노부인이 며느리 손을 잡고 들어오기에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대관인, 거처는 어디인가. 내게 알려주게. 그래야 대낭자가 일어나면 감사 인사를 전하지.”
주 노부인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소금남은 축객령임을 알아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생은 화물을 가지고 남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노부인께서 대낭자를 잘 보살펴 주실 테니 저는 마음 놓고 떠나겠습니다.”
주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치레를 몇 마디 더 했다. 사내는 천천히 걸어가더니 곧 안채 밖으로 나갔다.
“어머님, 왜 내쫓으셔요. 좋은 인연인 것을.”
주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조금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노부인은 그녀의 손등을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안다, 나도 알아. 좋은 인연이 되려면 안 좋은 말이 떠돌면 안 된다. 안심해라. 대저아가 일어나면 물어보고 내가 중신 서면 된다.”
주 부인은 그제야 안도했다. 시선을 돌리니 임새옥이 이미 눈을 뜨고 조금 얼떨떨하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 부인이 기뻐하며 “대저아, 깼군요!” 하고 외쳤다.
닷새 후, 9월 초, 정주 강변에 높이 세운 제방이 마지막 홍수를 막아내면서, 큰 물줄기는 수로를 따라 흘러내려 갔다. 주 대인은 조정 흠차 대신들과 함께 제방의 진흙 흔적을 바라보며 크게 안도하고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비볐다.
“됐다. 되었어. 난관을 드디어 넘었다!”
“서주에서도 좋은 소식이 왔습니다. 큰 물줄기가 모두 황하 고도(古道)를 따라 들어가서 서주도 위기에서 벗어났답니다. 이번 수재,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제방 위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주 대인은 한 달 넘게 이어진 근심과 고생을 털어내듯이 두립을 털었다.
“대인들, 여기 오신 이래 아직 제대로 된 식사 한번 못하셨지요. 오늘 제가 집에서 연회를 마련하겠습니다. 성 안에서 유명한 요리사도 모셨으니, 부디 제 체면을 세워주시지요!”
그 말에 모두 흡족하게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경성에서 나온 이래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인제 큰 걱정을 내려놓으니 다들 군침이 돌아서 정주의 유명한 음식을 입에 올리며 떠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돌아갔다.
“주 대인, 유 대인 일행이 아직 성 밖 재해 입은 밭에 있소. 잊지 말고 모셔 오시오. 고생한 걸 따지면 우리는 유 대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지 않소.”
도수감 대인이 그렇게 말하며 성 남쪽을 가리켰다. 주 대인은 얼른 물론이라고, 직접 사람을 보내 모시고 오겠다고 대답하고는 병사들을 집으로 보내 주연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성 남쪽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다가와 나지막이 물었다.
“저기, 성안현 조 대낭자가 대인의 저택에 있지 않습니까?”
주문청은 조금 껄끄러운 얼굴로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일이 어느새 조용히 퍼져나갔다. 빗속에서 뜻밖에 만난 유 대인과 전처 조 대낭자가 처음엔 크게 싸우더니 뒤이어 애틋해졌다고 들었다. 서로 손을 맞잡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말도 못 하고 바라보던 장면이 어느새 소식에 밝은 주루, 다관을 통해 퍼져나갔고, 벌써 여러 가지 이야기로 각색되어서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다행히 저자에 아직 퍼지지 않아서 백성들이 모르고 있어서 망정이지, 주문청이 큰 골치를 앓을 뻔했다.
“아하, 그거요. 하하. 안채 여인들이 알아서 돌보고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조금 주책맞은 이 관리도 자기 물음이 적절하지 않은 걸 깨닫고 하하 웃으며 알아서 물러갔고, 주문청은 상대할 기분이 아니라서 더는 거론하지 않고 유소호를 마중하러 갔다.
주 관아 후원, 여자 식솔들의 거처에서 임새옥은 침상 위에 앉아 시녀와 실 뜨개를 하며 시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저희도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못 먹었네요. 대인께서 매일 밖에서 분주하시니, 노부인과 부인은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루셨고요. 노부인 말씀이, 오늘 후원에도 식사 자리를 마련하실 거라고 하셨어요. 요리사를 모셨으니 얼마나 맛있는 음식을 내놓겠어요. 아까 부엌에서 언니가 오면서 고기를 좀 가져다줬어요.”
생긋 웃으며 듣던 임새옥도 군침이 돌아서 실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우리도 어서 서두르자. 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시녀가 까르르 웃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주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왔다. 서둘러 다가가 맞이하자, 노부인이 그녀를 붙들고 유심히 살폈다. 동심빈으로 새카만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고 조금 낡은 하얀 대금 홑옷에 자초취문(紫綃翠紋) 치마를 입고 분을 바른 모습을 보며, 기쁜 듯이 안색이 좋다고 말하면서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며느리 젊을 때 입던 건데, 자네에게도 잘 어울리는군.”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따라 고개를 숙였다.
“부인의 좋은 옷을 더럽힐까 봐 걱정이에요.”
노부인이 그녀를 툭 치며 나무랐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신선 같은 사람이 우리 집에 같이 사는 게 얼마나 큰 복인데!”
임새옥이 빙긋 웃는 사이, 주 노부인은 시녀를 흘깃 바라봤다. 시녀 아이는 얼른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고, 방엔 두 사람만 남았다. 주 노부인은 그녀를 경대 앞으로 데리고 가서 머리 장식을 골라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대저아, 이 늙은이,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주 노부인이 금영롱 비녀를 임새옥의 머리에 꽂아주면서 입을 열었다. 그녀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걸 진작 눈치챈 임새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부인, 하실 말씀이 있으면 편하게 하세요.”
임새옥이 웃으며 돌아보자, 주 노부인도 웃으며 말을 꺼냈다.
“대저아, 내가 중매를 설까 하는데, 재가할 생각 있는가?”
머리에 꽂힌 떨잠이 흔들리고, 그녀의 얼굴도 밝아 보였다. 임새옥은 전혀 수줍은 기색 없이 조금 짓궂은 눈빛으로 노부인을 바라봤다.
“어느 댁이길래요?”
정주 관아는 대단히 호화롭진 않지만, 예전의 성안현 관아와 비교하면 주루와 노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얗게 칠한 담장이 관아를 두 공간으로 나누었다. 우선 엄숙한 살기가 가득한 조정 관아, 그 뒤쪽은 바로 큰 나무가 우거지고 꽃이 만개한 가택이었다. 내원 뜰엔 커다란 계수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지금 한창 월계화가 만개했다. 비단처럼 아름다운 온갖 꽃이 활짝 핀 뜰 중간에 있는 대당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관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흥을 돋웠고, 시녀들이 줄지어 오가며 금잔, 옥배를 늘어놓고 향긋한 술을 따랐다.
“주교(州橋)에서 나와 주작문 밖으로 나가면 왕가네 들여우 고기, 매가네 오리, 닭, 토기가 있지. 조가네엔 무슨 선전백양장(旋煎白羊腸), 포자계피(包子鷄皮), 비절양두(批切羊頭), 세분소첨(細粉素簽)……. 별별 음식이 다 있지!”
술을 몇 잔 마신 후, 경성에서 온 뚱뚱한 관리 하나가 흥이 나서 시뻘게진 얼굴로 일어나 침을 튀며 하는 말에, 사람들은 침이 온 얼굴에 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넋을 놓고 빠져있었다.
“그게 뭐 대단하다고! 나는 매화 포자(包子: 소가 들어간 찐빵)가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네!”
다른 사람이 침을 닦고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탁자에서 찰고(炸糕: 튀긴 떡)를 들어 올려 크기를 가늠하며 설명했다.
“크기가 이만하고, 생긴 건 매화 같거든. 먹을 때 혀끝으로 우선 껍질을 톡 터트린 다음에, 쪽 빨아당기면…….”
사내가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탁자를 내리치며 웃어댔고, 관기들도 입을 가리며 웃었다.
“나리들 하시는 말씀에 배가 꼬르륵거립니다. 저희 같은 시골 사람들은 그렇게 맛있는 건 들어본 적도 없어요.”
그러자 누군가 관기의 흐드러진 허리를 꼬집으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이 나리가 오늘 배불리 먹여주마.”
그 말에 또 웃음이 터지고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도 들렸다.
그 뒤로도 먹는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누구는 조 어멈네 육병 점포 이야기를 하고, 누구는 송문 밖 점포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측문까지 퍼졌다. 유소호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오던 주문청은 안에서 들리는 떠들썩한 소리에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다들 정말로 고생하셨소이다.”
주문청이 웃는 얼굴로 모두를 향해 일일이 공수해 보였다.
“백성과 비교하면 고생도 아니지요.”
유소호의 담담한 말에, 주문청에게 체면치레를 하려 했던 관리들은 급히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주문청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유소호를 바라봤다.
“대인, 괜찮으면 후당에 가서 옷을 갈아입겠소?”
고개를 숙여 더러운 제 관복을 본 유소호는 공수하며 감사 인사를 하고 주문청을 따라 이진문(二進門) 안으로 들어갔다. 맑은 시냇물, 정자와 누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현 관아와 비교하면 확실히 별천지군요.”
주문청이 그를 서재로 안내하며 웃어 보였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은 바뀌지 않소이다.”
직접 병사에게 명령해 유소호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오게 한 주문청은 관복과 관혜를 벗겨준 후에 나가서 창가에 서 있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있어도 마음은 이곳에 없었다. 머지않아 실내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길래 돌아봤더니, 자흑색 장포에 옥 허리띠를 찬 유소호가 새로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고 나왔다. 낭패스럽고 피곤한 기색이 가신 그 얼굴엔, 경성 황제 앞에서 단련된 사람 아니랄까 봐 기개가 범상치 않았다. 한순간 눈앞에 서 있는 이 사람과 그 옛날 밭에 서 있던 초라한 소년을 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인?”
주문청이 자기를 바라보며 살짝 넋을 놓은 걸 본 유소호가 살며시 웃으며 그를 불렀다. 주문청은 정신을 차리고 수염을 쓰다듬었다.
“몇 년 못 본 새에 많이 장성했군요.”
유소호는 주문청이 옛일을 떠올린 것을 알고 빙긋 웃었다. 주문청이 느릿느릿 하는 말이 이어졌다.
“대인이 밭에 있는 걸 보고 이 늙은이, 예전에 대인이 조 대저와 함께 밭에서 모종을 던지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지금 생각해 보면 바로 어제 일 같건만…….”
유소호는 멈칫하더니 맑던 눈빛이 서서히 흐려졌다. 귓가에 모두가 즐겁게 웃던 소리가 메아리치고, 그땐 아직 소녀 치장을 하고 있던 그 여인이 큰 소리로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손에 든 모종을 연달아 던지던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던 그 모습이.
“흠, 유 대인, 우리가 예전부터 알아 왔던 정을 생각해서, 내 뭐 하나 묻겠소이다.”
주문청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유소호가 정신을 차렸다. 주문청이 정색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생에 인연이 없다지만, 그래도 한때 부부의 인연이 있는데, 어찌 대낭자를 이토록 핍박하는 게요. 내가 대인과 일부러 맞서려고 그 조 지보를 가둔 게 아니요. 대인의 행사가 하도 실망스러워 그리한 게지.”
유소호는 다소 망연한 듯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제가 그녀를 핍박해요? 제가 언제……. 오히려 그녀가 저를 핍박하는데…….”
주문청은 언짢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을 구겼다.
“대인, 대낭자의 성품을, 대인이 모르오? 기껏해야 질투가 많은 것뿐인데 못 견디겠으면 휴처해 버리면 그만이지, 가산을 한 푼도 나눠주지 않을 건 또 뭐요? 여인네가 시가에서 내쫓긴 것만으로 고향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터인데, 그 악인을 종용해서 대낭자가 멀쩡한 집을 두고도 사방을 떠돌아다니게 할 것은 또 무엇이요. 대인, 이 늙은이, 대인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걸 믿고 하는 말이네만, 이건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아니지요. 어찌 그저 몇 번 얼굴 본 인연뿐인 이 대인보다 못할 수가 있소이까! 이 대인이 제 재산을 들여 대인의 땅과 집을 사서 대낭자에게 주었지 않습니까. 그래야만 했소이까?”
어리둥절해서 듣던 유소호는 곧 경악해서 주문청을 바라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손님을 접대하는 대당으로 가는 청석길에 아른아른 비추던 해그림자가 바람이 불어오자 신이 난 듯 몸을 흔들어댔다. 또 한 번 불어온 바람에 대당의 여인들이 금을 타며 간드러지게 노래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곱게 단장한 보드라운 얼굴, 긴긴 눈썹. ……. 화려한 잔치에 춤과 노래가 흐르니 유난히 경쾌하고 아름답구나. 비단 휘장 안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은 촛대 아래 유심히 바라보니 모든 것이 아름답네…….”
(※ 류영柳永의 시, <양동심兩同心>에서)
“대인?”
고개를 돌린 주문청은 유소호가 따라오지 않자 서둘러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유소호가 길 중간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그림자를 바라보는 걸 보고 조금 전 일로 이 젊은이가 크게 타격받았음을 깨달았다. 유소호는 둘째치고, 자신도 놀랐다.
일의 진상은 그동안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그 중간에 자신도 얽힌 게 있을 듯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언짢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되돌아가서 유소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건, 대인이 비웃을 수도 있지만, 이 세상 여인네는 원래 겉과 속이 다른 법이오. 내 처도 겉으로는 대범한 척해도 내가 첩을 찾아갈 때마다 얼굴을 구깁디다. 어떻게든 첩을 혼내줄 기회를 찾아내고는…….”
그래놓고 적절한 비유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얼굴을 붉혔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젊은이를 바라보는데, 젊은이의 얼굴이 창백하고 눈빛이 멍한 걸 보고 까닭 없이 마음이 시려서 큰 손으로 유소호의 등을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여인이 저를 원망하는 게 당연하네요…….”
등을 몇 번 두드리자, 유소호가 그제야 말을 내뱉었다. 안 그래도 피로해서 올라왔던 울화가 이 순간 모두 쏟아져나왔다. 목이 타는 듯 아파서 목소리가 더는 나오지 않았다.
“그, 돌아가서 부인에게 다시 물어보는 게 좋을 게요. 어쩌면 오해가 있을지도 모르고…….”
주문청이 그를 토닥이며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말로 못 푸는 것이 어디 있겠소. 부부 사이에 틈이 벌어지면 안 되지요.”
거기까지 이야기하는데, 대당 후문에서 몇몇 술 취한 관리가 우르르 쏟아져 나오더니 하이고, 하며 달려왔다.
“여기 도망쳐 있었구먼! 주인이 술을 더 마셔야지! 숨는 법이 어디에 있소!”
주문청은 표정을 가다듬고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들은 두 사람의 팔짱을 끼고 밀고 당기고, 비틀거리며 걷다가 막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과 부딪혔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소금남이 몸을 비켜주면서 피하다가, 옆으로 밀린 유소호를 부축하며 인사했다. 소금남인 걸 본 유소호는 멈칫하고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으려다가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안색이 변해서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너도 그 마음을 품은 것이냐! 너도 그 마음을…….”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문청이 잡아채서 하하 웃으며 앞으로 끌고 갔다. 다른 관리들은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저 자색 비단 장포를 입은 훤칠하게 잘생긴 청년이 안채로 가는 걸 보고는 그저 주문청의 아들이겠거니 했다. 그러다가 유소호도 성안현에서 왔으니 서로 아는 사이겠구나 하면서 유소호를 잡아당겼다.
“아는 사람을 만났대도, 우선 들어가서 우리와 술 한잔해야 하네!”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끌고 가자, 유소호는 사내들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끌려 들어갔다. 소금남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안채 문을 지나서 들어가는데, 큰 나무 아래 바위에 앉아서 그쪽을 기웃거리던 시녀가 그를 보고 기쁜 얼굴로 손을 저었다.
“대관인 오셨어요!”
시녀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주 부인이 시녀 몇을 데리고 처마 밑에 서서 기다리는 걸 본 소금남은 걸음을 서둘러 다가가 예를 갖췄다.
“대관인, 어서 오세요. 오래 기다렸습니다. 더 늦었으면 감사주를 저희가 다 마셔버릴 뻔했어요.”
주 부인의 대시녀가 재치 있게 웃으며 말하면서 소금남을 안으로 안내했다.
세 칸 크기의 방에는 중앙에 목조 사녀도(仕女圖) 병풍이 놓여 있어서 공간을 둘로 나누었다. 그것 말고는 가구도 간단했다. 이쪽으로 옮겨온 지 한 달 만에 재해가 터져서인지, 대부분 지난번 판사가 남기고 간 가구를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벽에 산수화가 걸려 있길래 슬쩍 바라봤더니, 모두 대가의 그림이었다. 주 부인이 규중 여인이지만 서화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진작 들은 터라, 소금남은 지니고 온 비단 상자를 내밀었다.
“후생, 연회에 초대해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웃으며 비단 상자를 받아든 주 부인이 그 자리에서 펼쳐 보니 산수화였다. 대가 이성(李成)의 작품인 걸 알고 크게 기뻐하며 이런 큰 선물은 못 받는다고 사양했지만, 소금남이 몇 번이고 권한 끝에 겨우 잘 거둬두라고 시녀에게 명했다.
(※이성: 송나라 초기 산수화 대가. 동원, 범관과 함께 북송 삼대가라고 불린다.)
술을 석 잔 비운 주 부인이 웃으며 시녀를 불렀다.
“어서 노부인과 대저아를 모셔와라. 손님이 오셨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소금남은 벌떡 일어나 가당치 않다고 했고, 시중을 들 측근 시녀 둘만 남고 다른 시녀들이 웃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주 부인은 음식을 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빙그레 웃으며 운을 뗐다.
“대관인, 듣자 하니 대관인이 상처한 뒤 재취하지 않았다지요? 내 중매를 서고 싶은데, 괜찮을지요?”
소금남은 멈칫하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후생, 부인의 호의에 감사합니다. 다만, 다만…….”
주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캐물었다.
“다만, 무엇인가요? 마음에 둔 사람이 있습니까?”
소금남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내심 후회했다. 역시 그 여인이 보고 싶다고 무턱대고 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강제로 중매 서겠다고 나서는 사람을 한두 번 만난 게 아니었다.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핑계를 대고 자리를 뜨려는데 주 부인이 생글생글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렸다.
“아이고, 정말 아깝게 되었네요. 조 대저에게 그 복이 없다니, 정말 아까운 일이에요.”
소금남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대관인, 고려해 보지 그러세요? 대저아를 대관인도 잘 알지 않습니까. 어떤가요, 내가 이 중신을 서도 되겠습니까?”
주 부인이 표정을 가다듬고 힐끔 뒤를 살폈다. 창가에 진주 비녀를 꽂은 올림머리가 힐끔 보였다. 주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는 발걸음이 이미 멈춰 있었다. 주 부인은 빙긋이 웃으며 소금남을 바라보다가 살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얼굴에 전혀 기쁜 기색이 없이 오히려 근심 가득한 모습이었다.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중신, 정말로 안 될 일입니다.”
소금남이 표정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부인은 잔뜩 의외인 표정으로 서둘러 따라 일어났다.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방 안에 그림자가 지고 임새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해를 등지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싸늘한 목소리만 들렸다.
“대관인, 인제 보니 그간 저를 희롱한 것이로군요.”
그 여인이 밖에서 듣고 있을 줄 몰랐던 소금남은 벌떡 일어났다. 딱 봐도 자기 것이 아닌 의복을 입은 여인이 머리를 높게 틀고 반짝거리는 비녀를 잔뜩 꽂고서 안으로 들어왔다. 뒤엔 주 노부인이 있었고, 주 부인이 서둘러 다가가 맞이했다.
두 사람이 탁자 앞에 앉은 다음에야 소금남은 이 여인이 화장을 했음을 깨달았다. 가느다란 눈썹, 옅게 바른 연지, 붉은 입술, 화를 내니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려서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이 여인이 이토록 진하게 화장한 걸 언제 본 적 있어야 말이다.
“대관인이 했던 그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벌써 변하셨나 봅니다.”
임새옥이 조금 새침한 기색을 띠며 천천히 말했다. 소금남은 주 노부인, 주 부인 그리고 시녀들이 일제히 노려보는 통에 온몸이 거북스러워서 주저하다가 공수하며 입을 열었다.
“소생, 무례하지만, 대낭자와 둘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주 노부인이 눈을 부릅떴다.
“마음도 없다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나! 우리 대저아의 명성을 더럽히지 말게! 자네가 다른 사람과 혼인하든지 말든지 나는 모르겠고, 우리 대저아는 혼인해야 하네!”
소금남이 연신 사과하면서도 같은 말만 반복하자, 주 부인이 일어서서 노부인을 잡아끌었다.
“어머님, 이야기하게 나가셔요. 대저아가 확실히 깨달아야 할 일이에요.”
“나도 확실히 깨달아야겠다!”
주 노부인은 투덜거리며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가, 며느리의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 사내와 여인 단둘이 있는 것이라, 문은 닫지 않았고 시녀들도 삼삼오오 계단 아래 앉아서 해바라기 씨를 까먹었다.
그렇게 혼자 남은 임새옥은 예전처럼 법도를 지키지도 않고 팔짱을 낀 채 소금남을 빤히 바라봤다. 어색해진 소금남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대관인, 할 말이 뭔가요?”
임새옥이 물었다.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고 있었고, 몸도 조금 삐딱하게 뒤로 기댔다. 소금남 눈엔 실로 부인의 덕에 어긋나는 자세였다. 소금남은 천천히 자리에 앉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대낭자, 대낭자를 향한 내 마음은, 시종일관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더 깊어졌고요.”
임새옥이 헛기침을 하면서 소금남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얼굴도 조금 붉어졌다. 어찌 됐든,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럼 오늘 제가 승낙했는데, 당신은 왜…….”
“대낭자, 승낙한 이유가, 혹시 그 사람에 대한 마음을 접기 위해선가요?”
소금남이 그녀의 말을 자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 안에 들리던 톡톡, 소리가 뚝 그쳤다. 한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밖에서 시녀들이 나지막이 웃고 떠드는 소리만 때때로 들려왔다. 창틀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임새옥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날도 이야기했듯이, 두 사람, 이 지경까지 될 일도 아니죠.”
소금남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여인의 얼굴을 맴돌았다.
“당신의 성격을 잘 압니다. 실로 불꽃 같다 할까요. 하지만 어떤 것은 말로 하지 않고 속에만 담아두죠.
두 사람, 어린 나이에 부부가 되었으니 얼마나 연분이 깊겠습니까.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있는 법, 뜻대로만 될까요. 그 사내도 어려서 마음이 흔들릴 수 있었겠죠. 게다가 그 여인이 중간에 있었지 않습니까. 고작 열몇 살 사내였습니다, 어째서 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까? 옛정 때문에 그 여인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인데, 결발 부부인 두 사람의 정을 어찌 잊겠습니까. 당신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지도 않으니, 그도 대답하지 않고 잡지 않은 것이겠지요. 마음을 억누르고 그 깊은 정을 생으로 끊어낸 것 아니겠습니까. 남인 내가 봐도 마음이 아픕니다.
대낭자, 내 마음이 식어서가 아닙니다. 난 진심으로 당신이 행복하길 바라요. 당신 바람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나 소금남은 다음 생에 당신과 함께 한 대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대낭자, 혜낭의 마음의 병도 다 내가 못 견디고 이낭을 들여서 생긴 겁니다. 그땐 나도 어려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도 꾹 참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대낭자, 그래서인지 두 사람이 참 닮았더군요. 다만 당신은 유 대인에게만 그렇고 다른 사람에겐 매우 시원시원하지요.”
여기까지 이야기한 소금남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혜낭은, 누구에게도 똑같았습니다. 아무리 원하지 않아도 겉으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본래 여인이고, 배를 지휘하는 재상도 아니면서, 스스로 다치는 것 말고 무슨 좋은 점이 있다고 그랬는지……. 나도 너무 어렸습니다.
울화가 병이 되어 고칠 수가 없게 되었을 때, 그제야 그 여인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소금남의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임새옥은 느릿느릿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관아의 안채 후원으로 시선이 향했다. 9월에 접어든 때라 날씨가 제법 선선했다. 임새옥의 시선이 미인초(美人蕉: 칸나)로 향했다. 막 이곳에 왔을 땐 한창 곱게 피어있었는데, 가을비가 몇 번 내린 지금은 벌써 꽃이 지고 잎이 떨어졌다. 그리고 정원에 풀들도 조금 누렇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대관인, 대관인이 한 말, 저도 며칠 동안 생각했어요. 나와 그 사람은 정이 남았어도 이제 지난 일이에요. 그때 혼인을 피하려고 무턱대고 혼인할 상대를 구했고, 그는 의리로 날 받아줬어요. 우리가 어린 부부가 된 그 과정은 당황스럽고 단순했어요. 서로 마음을 털어놓기도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요.”
임새옥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그래요, 내 잘못도 있어요. 기다리지 않고, 말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이야기하는데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바랄 수가 없고, 기다릴 수가 없었어요. 그러기 싫었어요.”
소금남은 일어나서 다가가 손수건을 건넸다. 여인은 손수건을 받아들더니 눈물을 닦고는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대관인, 부인이 말도 잘 하지 않고 감정도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했죠. 장사하다 보면 주루, 청루에 갈 일이 많았을 텐데, 다른 사람에게 마음 흔들린 적이 있나요?”
소금남은 얼떨떨해졌다. 여인은 기운 없이 웃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이 얼마나 길어요. 유혹은 또 얼마나 많겠어요……. 나와 그 사람은, 정이 부족했을 뿐이에요.”
그 말이 끝나고, 방 안은 다시 침묵에 빠졌다. 불어온 바람과 함께 전원에서 즐겁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전해왔다. 은근히 들리는 ‘그가 밉소, 그가 밉소, 마음을 다하지 않은 그가 밉소. 애초에 진심을 보이지 말 것을. 인제 후회하네…….’ 하는 노랫가락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난 그제서야 그 마음을 내려놓았어요. 대관인, 내가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고 자꾸 의심하지 말아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도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 마음엔 부인이 없나요?”
소금남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야기하고 싶지만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몰랐다. 속으로 계속해서 ‘지금 허락한 건가? 내게 허락한 건가?’ 하는 생각만 떠올랐다. 여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 말한 대로, 우리 모두 좋았던 것만 기억해요. 어찌 됐든, 살아가야 하잖아요.”
임새옥이 지금 고개를 들었다면, 소금남의 열정 가득한 두 눈을 봤을 것이다. 감정을 드러내는 걸 잊고 살던 사내가 지금은 마치 처음 만난 소년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고개를 숙인 채 매끄러운 목덜미를 드러낸 여인을 바라보면서, 과감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갑작스럽게 선을 넘는 그의 행동에 임새옥도 화들짝 놀랐다. 얼굴은 더더욱 붉어졌다. 손을 빼진 않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잃었는데 당신까지 놓칠까 봐 걱정했어요. 다행히, 당신이 날 기다려줬네요.”
두 사람이 아무런 말이 없이 그저 손만 잡고 있을 때, 쿵쿵 발걸음 소리와 함께 주 노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극 하나 다 끝나가는데, 대관인, 이야기 끝나셨는가?”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놓고 제자리에 섰다. 임새옥은 창틀에 활짝 핀 국화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주 노부인과 주 부인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게 느껴졌다.
“대관인, 이야기 다 했겠지요?”
주 노부인이 심각하게 묻는 말에 소금남이 그제야 다 했다고 대답했다. 소금남은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그렇다면, 손님 배웅해라!” 하는 말에 난감해져서 무심결에 임새옥을 바라봤다. 임새옥도 마침 그를 보고 있다가 두 눈이 마주치자,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 눈치채고 곁에서 보고 있던 주 부인은 입을 가리고 몰래 웃으며 시어머니의 옷자락을 당겼다. 주 노부인이 며느리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소금남이 머쓱해하며 입을 열었다.
“그, 아까 부인께서 하신 말씀이…….”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주 부인이 빙긋이 웃으며 되묻고는 임새옥을 바라봤다.
“대저아, 인제 그만 그 꽃을 놓아줘요. 대저아의 노야가 경성에서 특별히 사 온 것이에요. 겨우 이만큼 피었는데, 대저아가 다 뽑겠어요.”
그 말에 임새옥이 발을 구르며 소금남을 노려봤다.
“어서 가요. 난 바로 십방촌으로 돌아가요. 가서…… 매파를 기다릴게요.”
소금남은 싱긋 웃어 보이고는 무례인 걸 아랑곳하지 않고 주가 고부에게 공수하고는 허둥지둥 사라졌다. 그의 모습에 시녀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님, 이 중신이라는 게 참으로 간단하네요. 제대로 말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결정을 짓지 뭐예요.”
주 부인은 입을 가리며 웃었고, 시녀들은 임새옥을 에워싸고 자세히 말해 보라고 졸라댔다. 임새옥은 얼굴이 빨개져서 밥도 먹지 않고 달아났다.
안채의 웃음기 가득한 분위기는 잠시 접어두고, 전당 이야기를 해보자. 전당의 연회는 이미 끝나서, 사람들은 거나하게 취한 채 역참으로 돌아가려고 인사하는 참이었다. 친위병 둘이 유소호를 부축하고 있는 걸 본 주문청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다가가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이미 가마에 올랐던 유소호가 갑자기 비틀거리며 나오더니 주문청의 손을 붙잡았다.
“대인…… 대인…… 부탁입니다…….”
거나하게 취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유소호의 모습에 주문청은 대충 대꾸하며 어서 가서 쉬라고 달랬다. 유소호는 주문청을 붙잡고 놓지 않더니 덥석 끌어안으면서 울었다.
“대인……. 대신 물어 봐주십시오. 대신 물어봐 주세요. 돌아와 줄 수 있는지……. 부탁 좀 해주십시오.”
주문청은 순간 깜짝 놀라서 허허 얼버무리며 그를 몸에서 떼어내 친위병에게 맡겼다.
“대인께서 술에 취했다. 어서 부축해라. 사람을 보내 방을 지키고.”
친위병은 술에 취해 웅얼거리는 유소호를 가마에 앉히고 사람들을 불러 데리고 가게 했다. 주문청은 잠시 생각하다가 친위병을 붙잡고 나직이 당부했다.
“네가 직접 지켜라. 술 취해서 하는 말을 절대로 남이 들어선 안 돼.”
주문청은 친위병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 후에야 놓아주었다.
임새옥은 새로 보수한 제방 앞에서 맑은 하늘과 멀리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주씨 일가와 작별했다. 인제 그만 돌아가라고 하자, 편한 복장을 한 주문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 며칠 더 머물지 않고. 아직 농사짓지 않은 땅이 남았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말을 자르자, 쉰이 다 되어가는 사람이 아이처럼 멋쩍게 웃어 보였다.
“대인, 유 대인이 계시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번에 잘 처리하는 걸 보니 확실히 많이 성장했더군요.”
주문청은 하하 웃다가 문득 어딘가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제자가 사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사부가 제자를 평가하는 말 같다고 할까. 붙잡는 말도 더는 하지 못하는데, 이미 시각이 이르지 않아서 주 노부인 고부가 임새옥을 붙들고 재차 당부하는 걸 보고 서둘러 마차에 태웠다.
“납채한 후에 꼭 이야기하게. 내 반드시 돌아가서 술 한 잔 마셔야겠네.”
노부인이 손을 흔들며 당부했다. 임새옥이 휘장을 젖힌 채 얼굴을 붉히며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하고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그렇게 멀어진 그녀는 길디긴 제방과 하나가 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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