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한 해 가을이 3년 봄보다 더 바쁘다고 했고, 십방촌은 그 옛말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 물난리로 물가가 폭등하고 채소, 곡식이 부족해지니, 조가 천막(예전 유가 천막) 채소 가격이 끝도 없이 올라갔다. 그래도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나날이 높아지는 가격에 흥분한 노씨는 자기네 식구 몫까지 죄다 내다 팔았다. 조육아가 한창 논에서 바쁘게 일하는 임새옥을 제때 찾아가서 망정이지, 새로 싹이 자란 어린싹도 싹 다 캐서 팔 뻔했다.
“어머니, 누가 여기에 오랬어요?”
임새옥이 손에 낫을 든 채 머리카락엔 벼 지푸라기, 발엔 진흙을 가득 묻히고 다가갔다. 주변에 물건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길래 눈을 찌푸리고 훑어봤더니 대부분 주루의 구매 담당이고 향신 집안의 구매 담당 사환도 있었다. 임새옥은 조육아를 비롯한 채소 수확 담당 소작인들을 둘러봤다.
“조육아의 허락 없인 아무도 채소 수확하지 말라고 진작 이야기했을 텐데요?”
노씨를 에워싸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아났고, 노씨는 얼굴이 시퍼레져서 부끄럽고 화가 나는 듯 고함쳤다.
“너는 내 딸이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상관 안 해!”
임새옥은 노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장부를 가지고 와서 살폈다. 마을의 의원이 기록한 장부라 글씨가 제법 훌륭했다. 임새옥은 장부를 훑어보고는 조육아에게 건넸다.
“수확할 수 있는 건 다 땄네요. 조롱박은 더 기다려야 해요. 오늘 것까지만 팔고 인제 그만 팔아요.”
임새옥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체면을 세워줄지 몰랐던 조육아는 들떠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촌 사내라 말주변도 좋지 않아서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지막 채소라도 사 가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대낭자, 조금 더 심지 그러나. 무슨 보리니 벼는 왜 심어? 채소 판 돈으로 곡식 사 먹을 돈은 될 텐데, 천막 채소 지을 수 있는 특권을 괜히 낭비하지 말고.”
평소에 가깝게 지내는 손님들이 웃으며 말했다. 대저아의 성격이 좋은 것도 알고, 땅이 아까워서 하는 말이었다. 자기들에게 이 천막 채소 재배 허가만 있었다면 땅이 남는 대로 잔뜩 심었을 것 아닌가.
임새옥은 노씨를 밖으로 밀어내다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간이 작아서요. 돈이 있어도 곡식을 사 먹지 못하는 날이 올까 봐 무서워요. 역시 스스로 농사짓는 게 마음이 놓여요.”
자꾸 등을 떠밀리자 짜증이 난 노씨는 팔을 휘둘러 뿌리치고 투덜거리며 알아서 걸어갔다.
“팔이 밖으로 굽는 것 같으니라고. 좋은 마음으로 관리해줬더니, 망신이나 주고. 좋은 사람을 내버려 두고 혼인도 안 하고. 누구나 보배로 여기고 인연 맺고 싶어 하는 집안인데, 주제도 모르고 집에 눌어붙어서는, 그 돈이 얼마나 된다고 끌어안고 있겠다는 거냐!”
“어머니 것도 있으니까, 집에서 안심하고 지주 부인 노릇이나 하세요, 어머니.”
임새옥이 웃자, 노씨도 그제야 마음을 놓고 신이 나서 말했다.
“알면 됐다! 너 먹이려고 돼지머리 고아놨으니 어서 벼 베고 돌아와라! 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뭐 하러 직접 내려가는 거냐! 복을 즐길 줄도 모르지, 쯧.”
그러다가 조삼랑이 볏짚을 운반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사람 키 반만 한 높이의 볏짚을 지고 마을 어귀 타곡장으로 가는 걸 보고는 혀를 쯧쯧 차며 ‘저놈의 팔자’라고 투덜거렸다.
임새옥은 땀을 훔치고 논 쪽으로 향했다. 내년에 심을 논벼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수확을 마쳤고, 이제 말려서 알맹이를 꺼내면 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타곡장에 갔고 여인네 몇 명만 논에 남아 있었는데, 임새옥이 벼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걸 보고 웃으며 놀렸다.
“대저아, 벼가 꽃보다 더 좋아? 하루에 세 번이나 들여다보고 질리지도 않나 봐.”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볕에 그을린 여인들과 몇 마디 농을 나누다가 금단과 아이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밭에서 뛰어다니는 걸 보고는 서둘러 다가가서 그중에 눈에 띄게 작은 한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전가아, 조심해야지. 여기서 놀다가 여기저기 찔린다.”
며칠 전 소금남이 잠시 이곳에 들렀었다. 아무래도 속마음을 털어놓은지라 다시 만나니 몹시 거북했다. 혼인할 건지 말 건지 다시 물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 조삼랑 부부와 몇 마디 하고는 바로 전가아를 안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금단이 밖에서 재미있게 뛰어노는 걸 보고는 전가아가 자기도 놀겠다고 하더니, 그렇게 저녁까지 놀고도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대관인, 어디 가려던 길이었어요?”
“그리 멀지 않고 바로 근처입니다. 피해를 입은 현에 물건이 체류되어서, 살펴보러 가는 길에 만나러 왔죠.”
임새옥이 묻는 말에 소금남은 대답하면서도, 자기 시선이 이 여인을 쫓을까 봐 두려워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람 상대하는 게 서투른 조삼랑은 낯선 사람 앞이라 위축되어서 문 앞에 나가 쭈그리고 있었고, 노씨가 웃는 얼굴로 두 사람 사이에 앉아 차를 따라주고 간식을 권했다.
“이 더운 날 전가아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면 어떡해요.”
임새옥이 불만스러운 듯 흘깃 보자, 소금남이 머쓱해하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집에 있지 않으려 해서. 같이 가겠다고 우기는 걸 이길 수가 없어서…….”
그 말에 노씨가 냉큼 끼어들었다.
“부잣집 아이라 얼마나 귀해요. 저 보송보송한 것 좀 봐요.”
하늘이 어두워져서 더 있을 수가 없게 되자, 소금남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을 아이들과 새를 잡으려 뛰어다니는 전가아를 붙잡아 왔다. 전가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부리자, 임새옥이 서둘러 잡아끌었다.
“여기에 두고 가요. 일 끝내고 와서 데리고 가면 되죠.”
그렇게 십방촌에 남은 전가아는 집 생각난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이 매일 금단을 쫓아 마을에서 뛰어놀았다.
전가아는 무명옷을 입고 흙바닥을 마구 구르며 종일 노느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임새옥을 상대도 하지 않고 금단만 쫓아다녔다.
금단이 큰 나뭇가지를 말 삼아 타고 노는 걸 보고 달라고 폴짝대도, 금단은 노느라 정신이 팔려서 상대도 하지 않고 쿵쿵대며 달렸다.
처음 겪는 설움에 전가아는 바닥을 구르며 울어냈다. 노비 어쩌고 하며 욕을 하자, 그 말을 들은 금단의 추종자 하나가 “금단, 저 녀석이 네 욕한다!”고 일제히 일러바쳤고, 나리 놀이에 한창 열중인 금단은 즉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법도를 모르는 아이를 혼내주겠다고, 대부대가 전가아 앞에 들이닥쳤다.
“이 가난뱅이들! 아버지에게 말해서 싹 사들일 거다! 돌아가서 내 말로 삼아서 탈 거야!”
아이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며 혼나던 전가아가 펄쩍펄쩍 뛰며 욕을 했다. 싸움을 말리려던 임새옥은 전가아의 말을 듣고는 즉시 손을 거두고 한쪽에 조용히 있었다. 역시나, 화가 난 아이들이 전가아를 붙들고 두들겨 팼다.
“잘못했다고 해! 이 못된 놈아!”
한 아이가 전가아 몸에 올라타고 나뭇가지를 휘두르며 고함쳤다. 전가아는 나이가 어리고 성격도 좋지 않지만, 꽤 오기가 있는 편이었다. 바닥에서 발버둥 치더니 침을 뱉으면서 큰 노비니 작은 노비니 욕해대는 걸 들은 밭에서 일하던 여인들이 서둘러 다가와 자기 아이를 부르고는 임새옥에게 사과했다.
“대저아, 우리 애가 철이 없어서 소야 비위를 거스른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러고는 아이들을 나직이 훈계하고는 아이들을 데려갔다.
“쳇! 겁쟁이. 믿는 건 집에 돈뿐이지?”
금단이 혀를 차고는 손을 휘둘렀다.
“상대하지 말고 산에 올라가 전투하자!”
그러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우르르 사라지자 임새옥이 쫓아가며 고함쳤다.
“나무 부러뜨리지 마! 한 그루라도 가지가 꺾이면 껍질 벗겨 버릴 거야! 나무 아래 콩 새싹도 뽑으면 안 돼!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임새옥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심어놓은 것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숙였더니 전가아가 바닥에 누운 채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울고 있었다. 아버지를 부르며 집에 가겠다고 외치는 아이를 그녀가 안아 올려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럼 내일 사람을 성에 보내 아버지를 불러올게.”
전가아는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고 임새옥에게 안긴 채 산으로 올라갔다. 가면서 들판의 열매도 따고, 풀로 토끼도 만들면서 그새 즐거워져서 까르르 웃었다.
십방촌에 있는 산은 완전한 의미의 산은 아니고, 엄격히 말하자면 그저 낮은 언덕 수준이었다. 과수원을 세우기 가장 적합한 곳이라서 원래 주인이 예상보다 높은 가격을 불렀을 때도 망설이지 않고 사들였다. 노씨는 지금까지 거지 같은 산에 꽃을 심느라 재산 절반을 썼다고, 이렇게 낭비하는 법은 없는 거라고 잔소리를 해댔다.
“여기는 경사가 모두 25도 밑이거든? 과일 심기에 적당하고 나무 심기에도 좋은 땅이야. 정말이지 보기 드문 땅이란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과수원보다 훨씬 좋아.”
임새옥은 전가아의 손을 잡고서 다른 손으로 흙을 파면서 웃으며 말했다.
“토질도 딱 좋아. 석회도 뿌릴 필요가 없어서 돈을 많이 아낄 수 있어.”
전가아는 더러워하는 것도 없이, 줄지어 다리 밑을 지나는 개미를 손으로 쿡쿡 찌르며 신이 나서 놀았다. 임새옥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듣지도, 알아듣지도 못했다.
언덕 위엔 이웃 마을에서 고용해온 농부들이 임새옥이 그린 그림대로 길 양쪽에 배수구를 파고 있었다. 임새옥이 나타나자 다들 웃으며 인사하고는 산 위를 가리켰다.
“대저아, 나무를 지키는 사람이 있으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아이들도 규칙을 잘 지키고 함부로 만지지 않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금단이 아이들을 이끌고 소리를 지르며 아래로 내려왔다. 손에 모두 온갖 나뭇가지를 들고 있었고, 그중엔 나무판자를 들고 있는 아이도 있었다. 임새옥이 발을 구르며 고함쳤다.
“이 녀석들이! 어서 내려놔! 누가 돼지우리에 쓸 판자 가지고 오래!”
아이들이 겁에 질려 판자를 내려놓고 우르르 달아나자 전가아는 재미있어 보이는지 아까 맞은 것도 다 잊고 따라 내려갔다. 금단이 뭐라고 했는지, 어느 아이가 전가아에게 나뭇가지를 내어주었다. 다들 나뭇가지로 말을 타고 이럇, 이럇 외치며 달아났다.
“싸우면 안 돼! 일찍 집에 가서 밥 먹어! 금단 네가 형이니까 전가아 잘 돌보고!”
임새옥이 연달아 소리쳤지만, 금단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벼 무르익는 향기가 가득했다. 힘들게 일한 후에야 진정으로 편안함을 느낀다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처음부터 가사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고, 꿈에서나 들은 듯한 제목도 잊은 선율이었다.
“비 내린 다음 푸른 하늘,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산 안에 우는 새소리를 듣네. 밭에서 일하는 농부가 벼를 수확하며 땀을 말리며 굽은 허리를 펴네. 나는 이 농촌의 품 안에 오래 살길 바라네. 이곳엔 도시의 번뇌란 절대로 없지…….”
(※대만 가수 비옥청費玉淸의 ‘전원지가田園之歌’ 가사 중 일부)
임새옥은 그렇게 흥얼거리며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밤의 장막이 내리고, 십방촌 타곡장에 둘러앉아 하루의 피로를 풀며 아내가 가져다준 밥을 먹던 사내들은 어두워진 하늘의 엄호 아래 상의를 벗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벌레 소리가 때때로 들리는 가운데, 누군가 갑자기 ‘조 대저다!’ 하고 고함치자 한순간 당황해서 그릇을 엎으며 허둥지둥 옷을 걸쳤다. 임새옥이 등불을 들고 자그마한 전가아와 금단을 데리고 타곡장 밖에 나타났다.
“요즘 날이 건조해서 불나기 쉬우니까, 다들 밤에 조심해요.”
“예, 예. 대저아, 안심해요.”
전가아와 금단이 각각 도자기통을 들고 다가와서는 앳된 목소리로 “새로 우린 차예요!”라고 말하며 건네자, 다들 허둥지둥 다가가 받으면서 감사 인사했다.
하루 종일 고단하고 힘들게 일한지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다. 특히 임새옥은 요즘 어느 때보다도 훨씬 복을 누리고 있었다. 지주 부인의 부귀한 생활을 누리기 급급한 노씨가 성에서 사 온 시녀 둘을 부리고 있어서 임새옥이 직접 빨래, 밥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보름을 보내며 과일나무를 심고, 벼를 수확한 어느 날, 늦잠을 자려는데 노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대저아! 조정에서 사람이 오셨다! 어서 일어나라!”
임새옥은 너무 놀라 잠이 확 깨서 후다닥 일어나고 말았다.
아니, 조정에서는 어째서 이 하찮은 여인을 못 잊고 이러는 거냐고!
임새옥은 조정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에 당황해서 서둘러 일어나 경대 앞에 앉았다. 머리카락을 빗고 한참 동안 옷을 뒤진 끝에 자주 입지 않는 좋은 옷을 꺼내 입고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웬걸, 마당엔 무명옷 차림으로 온 주문청 혼자 노씨와 이야기 나누고 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주 대인!”
임새옥은 서둘러 다가가며 노씨를 흘겨봤다. 노씨가 씨익 웃으며 조정에서 주 대인이 오셨다고 대답했다.
“아니오, 아니야. 오늘은 관복을 입지 않고 왔잖소. 정무로 온 게 아니야.”
주문청이 껄껄 웃으면서 임새옥을 살펴봤다. 비취빛 비단 치마를 입은 여인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틀어 올리고 은빗도 하나 꽂았다. 평소엔 항상 흙투성이로 밭에 있거나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언덕에 있던 여인이 오늘은 사람이 변한 듯해서, 길에서 만나면 몰라볼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설마 이 여인이 유가에 있을 땐 치장도 하지 않았었나 싶었다. 이렇게 치장했다면 버림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주 대인, 어서 들어가세요.”
임새옥이 웃으며 안쪽을 가리키는데, 주문청은 어느새 마당 큰 나무 아래 청석을 손으로 쓱쓱 닦고 앉았다. 여기면 된다는 말에 조삼랑이 헤헤 웃으며 두 시녀를 시켜 차를 대접했다. 주문청은 거절하려다가 이진탕인 걸 보고 받아서 마셨다.
“대낭자와 작별 인사하러 온 거네.”
임새옥은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그를 바라보며 웃으며 예를 갖췄다.
“높은 자리에 가신 걸 축하드려요.”
주문청은 역시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껄껄 웃었다. 오래 기다렸던 전임 명령이 며칠 전에 드디어 내려왔다. 조정에서 이번 물난리 책임을 엄중히 조사함에 따라,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렸던 지방 관리들이 파면에, 하옥에, 자리가 많이 비었다. 그래서 평소에 정무에 근면하던 훌륭한 관리들이 발탁되어 조정을 위해 피해 재건에 힘쓰게 되었다.
“대인,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정주일세.”
노씨가 묻는 말에 주문청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조삼랑 일가는 아하, 하면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노씨가 현령보다 높은 자리냐고 다시 물었다. 주문청은 찻물에 목이 걸려 켁켁대다가, 지금 앞에 있는 것이 일반 백성 중에서도 일반 백성이라는 걸 떠올리며 임새옥을 힐끔 바라봤다. 한때 관리 부인이었으니 알겠거니 하고 바라봤으나, 그 여인도 망연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걸 보고 서둘러 설명했다.
“현령보다 높지. 정주 판사, 종5품일세.”
“아하!”
조삼랑 일가는 현령보다 높다는 것만 듣고 이미 충분해져서 일제히 다시 축하 인사를 했다. 그 사이 노씨가 임새옥을 잡아끌고는 “그 유가 망할 놈보다 높으냐, 하옥시킬 수 있는 자리냐.”라고 나지막이 묻는 바람에 임새옥은 심하게 당황했다.
“몰라요. 어머니, 헛소리하지 말아요. 다 조정 사람이에요.”
“그건 그렇구나. 조정 사람들이야 서로 팔이 굽겠지. 믿을 수 없지.”
노씨는 중얼거리고는 어서 식사 준비하자고 두 시녀를 다그치며 일어났다.
“사실 부탁이 있어서 대낭자를 찾아온 걸세.”
차를 석 잔 마신 다음, 주문청이 본론에 돌입했다.
“대낭자도 알겠지만, 이번 수재로 정주의 피해가 막심하네. 밭도 천 묘나 훼손되고, 집을 떠나는 백성도 생겼다더군. 어서 곡식을 심어 거두지 못하면 내년 봄엔 우는 소리가 온 천지에 울릴 것일세.”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청의 얘기를 들었다. 고대는 생산력이 떨어져서 먹고사는 게 모두 하늘에 달렸다. 10년이면 9년은 흉년이 드는데 올해는 봄, 여름에 보리 재난을 벗어났다 했더니 수재가 찾아왔다. 그 바람에 얼마나 많은 이가 배곯는 대열에 들어가게 될지. 앙상하게 마른 여인이 허기에 얼굴이 누렇게 뜬 사내애를 데리고 애절한 얼굴로 문 앞에 나타났던 장면이 다시 불현듯 떠올랐다. ‘대저아, 적선을 베풀어 남은 밥 좀 주련.’ 하던 모습이 떠올라 눈시울이 붉어져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닦았다.
“대낭자가 마음이 너무 착해서 그러지.”
주문청은 그녀가 재난민 생각에 마음 아파 그런 것으로만 알고 그렇게 칭찬했다. 부엌에서 나오던 노씨는 얼핏 듣고도 바로 알아차리고는 샐샐 웃으며 다가왔다.
“그렇지요, 그렇지요. 백성들이 참으로 딱합니다. 우리 십방촌엔 대인이 계셔서 참으로 다행이었지요. 덕분에 가까스로나마 밥을 먹고 삽니다. 아니었으면 그 부자들처럼 우리도 돈을 냈을 겁니다. 대저아가 무슨 산을 산다고, 집에 돈을 다 탕진했지 뭡니까!”
주문청은 껄끄러워졌지만, 임새옥은 흘려들었다. 앞으로 과수원에 돈 들 일도 별로 없으니 형편 되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 안 되면 조 태후가 내린 상을 변통해도 되고.
“대인, 편하게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할게요.”
주문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더니, 강적을 맞이한 듯 경계하는 노씨를 힐끔 보며 공수했다.
“대낭자와 함께 정주에 잠시 다녀오고 싶네. 그곳에 땅을 되살릴 길이 있을지 궁금해서 말일세. 겨울, 내년 봄 백성들의 배를 채울 수 있게 뭐라도 심을 수 있을지 봐주었으면 하는데, 가능하겠나?”
노씨는 안도하며 큰 부담을 내려놓고서 작은 의자에 앉았다.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집에서 할 일도 없는 아이예요. 편한 대로 부리셔요.”
임새옥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웃어 보였다.
“대인,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전생에서도 농재해가 발생하면 국가에서 알아서 처리한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이 시대도 조정 관리들이 벌써 조사하고 있을 것이다. 일개 백성인데다가 또 여인이 관여할 일이 뭐가 있을까. 괜한 참견이나 될 터인데.
“물에 젖은 논벼는 분명 지키기 어려울 테니, 차라리 얼른 물을 빼내고 배 채울 수 있는 콩 같은 걸 심는 게 나아요. 다른 방법도 딱히 없으니 제가 가도 뾰족한 수는 없을 거예요.”
주문청은 조금 실망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조정에서도 사람을 보내긴 했지. 다만 재난을 입은 현성이 너무나 많은지라 마음이 다급하네. 땅을 잃고 헤매는 백성들의 마음을 대낭자의 명성으로 위로하고 싶은 걸세.”
백성들이 줄지어 이재민이 된 이 상황에, 새로 부임하는 주문청은 벌써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원래 정주 판사는 하옥됐다고 하고, 남은 관리들은 자기 앞날 걱정만 하느라 재난 구제 작업이 엉망이라고 들었다. 곡식을 나눠주는데도 사람들이 몰려서 짓밟고 무너지는 사건이 벌써 여러 번 발생했다고.
“사사로운 정으로 대낭자에게 부탁하러 와서 난처하게 했군. 대낭자, 마음에 두지 말게.”
주문청은 웃으며 말하고는 일어서서 인사했다.
저택 문 너머로 맞은편 산비탈의 푸르름과 적지 않은 농가가 보였다. 농부들이 농기구를 들고 웃으며 문 앞을 지나가고 마을 안에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개와 닭 짓고 우는 소리가 들리자, 주문청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깊은 골목에서 개가 짓고, 뽕나무 꼭대기에서 닭이 우는구나.”
(※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향시 ‘귀원전거歸園田居’ 중 한 구절.
저 멀리 마을이 아스라이 보이고,
마을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네.
깊은 골목에서 개가 짓고,
뽕나무 꼭대기에서 닭이 우네.
뜰에는 더럽거나 잡스러운 것이 없고
방 안에 한가로움이 가득하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왔다네.)
금단과 전가아가 일어나서 발가벗은 엉덩이를 내놓은 채 튀어나와 구석 조롱박 틀 아래 오줌을 쌌다. 노씨가 보고는 행여나 조정 관리의 기분을 거스를까 봐 욕하며 쫓아냈는데 주문청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임새옥은 주문청이 읊은 시에 옛 생각이 났다. 예전에 실업자가 되어 가난하게 지내면서 울분이 쌓였을 때였다. 처음에 산에서 창업했을 때, 물질적으로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정신적 압박이 더 컸다. 매일 나뭇가지를 들고 산에서 미친 듯이 쓰던 시 한 수가 있었다. 바로 도연명의 이 시로 울적함을 달랬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마지막 시구를 읊었다.
“오랫동안 새장 속에 갇혀 있다가,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왔다네.”
주문청이 환하게 웃었다.
“전에 대낭자가 지었다는 시를 다들 읊을 때, 솔직히 대낭자의 솜씨라는 걸 믿지 못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대낭자를 얕본 모양일세.”
임새옥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주문청이 웃고 있어도 미간을 여전히 단단히 찌푸리고 있는 걸 보면 앞으로 맞이할 상황이 여간 걱정이 아닌 듯했다. 한숨을 내쉬고 몰래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앞으로 대엿새면 타작한 곡식은 창고에 넣을 것이고, 종자를 거두려면 열흘은 걸릴 것이다. 산에 나무는 이미 물과 비료를 다 주어서 당분간은 손댈 것이 없었다. 주 대인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절실한 것도 그렇고 그동안 예우해준 걸 봐서, 돈을 내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밭을 둘러보고 민심을 도닥여주라는데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대인, 언제 출발하세요? 저도 맞춰 준비할게요.”
낙담했던 주문청은 그녀가 갑자기 허락하자 크게 기뻐했다.
“정말 고맙네, 대낭자.”
“고맙단 말씀은 제가 드려야죠, 대인.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하고, 미력한 힘이나마 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새옥이 예를 행하며 마음을 담아 하는 말에 주문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이 촌부가 말주변이 없다고 했나. 벼슬 생활을 한 사람조차 이렇게 눈시울이 붉어지게 하는 것을. 거짓 하나 없이 얼마나 진심이 느껴지는가 말이다.
돌아서서 노씨와 조삼랑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더니 두 사람의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껄껄 웃으며 인사치레를 주고받고 출발 날짜를 정하고 인사하고 나오려는데, 임새옥이 무언가 떠오른 듯 허둥지둥 말했다.
“대인, 참, 누가 와서 물어보던데, 조대산은 언제 풀려나나요?”
그 말에 노씨의 얼굴이 당장 흐려졌다.
“그 망할 여편네가 또 찾아와서 울더냐? 귀싸대기 때리고 돌아가라고 하지 그랬어! 상대하긴 무얼 상대해!”
제가 옥에 가둬둔 조대산을 까맣게 잊고 있던 주문청은 얼떨떨해하다가 불현듯 깨닫고는 빙그레 웃었다.
“아, 잊고 있었군. 바로 풀어주겠네. 대낭자의 체면을 당연히 세워줘야지.”
임새옥이 웃음을 참으며 다시 감사 인사를 했고, 온 가족이 주문청을 배웅했다. 주문청이 사환을 불러서 나귀를 타고 느릿느릿 돌아갔을 때, 마당엔 이미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금단과 전가아가 누가 죽을 빨리 먹나 내기하느라 입가를 타고 흐른 죽이 아이들의 옷깃을 적셨다. 노씨가 성큼성큼 다가가 행주로 두 아이를 마구 닦아주고는 등 한 대씩 때리고 병자와 달걀을 각자 쥐여주었다.
“나가서 놀아, 요놈들.”
“뛰지 마! 다 먹고 뛰어!”
두 아이가 폴짝폴짝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임새옥이 서둘러 덧붙였다. 노씨는 어느새 먹을 걸 정리해서 외할머니 수발들러 후원으로 향했다.
“대저아, 어서 드세요.”
시녀들이 의자를 닦으며 그녀를 불렀다. 임새옥은 자리에 앉아 병자에 파를 싸서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아버지, 잊지 말고 산에 올라가 보세요. 아이들이 풀 뽑지 못하게 하시고요. 돼지우리는 잘 덮어두세요. 나간 김에 새끼돼지 사 올게요.”
맞은편에 앉은 조삼랑에게 당부하자 조삼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틀 후, 임새옥은 보따리를 들고 주문청 일가의 마차를 타고 정주로 향했다.
임새옥이 떠난 지 사흘 후, 화려하면서도 저속하지 않은 행렬이 십방촌 입구에 나타났다. 타곡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말 위에 탄 공자가 오색 꽃수 비단 장포에 영모를 쓰고 금영롱 뒤꽂이를 하고 나타나자 여인들이 하나같이 넋이 나가서 중얼거렸다.
“세상에, 6월에 성에서 열리는 법회에서 본 이랑진군(二郞眞君)보다 백 배는 잘생겼네.”
(※ 도교에서 추앙하는 신. 치수를 관장하는 무신으로 주로 삼첨창을 들고 화려한 갑옷을 입은 강인한 장수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사람들이 일제히 지켜보는 가운데, 그 훤칠한 공자가 조가 저택을 향해 다가갔다.
“또 선보러 온 건가? 저런 지아비라면 설령 두 번 내쫓긴다고 해도 아깝지 않겠어.”
누군가 침을 흘리며 부러워하는 걸 뒤에 있던 남편이 듣고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내리쳤다. 순간 화가 난 여인이 돌아서서 맞받아쳤다. 수건이 날아가고 욕설이 난무하고, 부부가 다투는 모습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어댔다.
막 밥을 먹고 두 시녀와 함께 어머니를 정원으로 옮겨서 볕을 쪼이게 하던 노씨는 문밖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용이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는 당황해서 달려가 맞이했다.
“대인, 어쩐 일로 오셨어요?”
노씨가 어서 어머니를 데리고 돌아가라고 손짓하자, 두 시녀는 투실투실한 노인을 젖 먹던 힘을 쥐어짜서 들어 올려서 뒤로 달아났다. 그 소란에 놀란 닭들이 푸드덕댔다.
“공무로 온 것이 아니라 오래 있지 못하네. 대낭자를 잠시 만나러 들렀네.”
이용이 웃으며 마당을 둘러봤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마당 가득 생기가 도는 모습인데, 한쪽에 있는 빨랫줄에 임새옥이 즐겨 입던 하얀 치마가 걸린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가 잔뜩 피어났다.
노씨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이 하나가 “외숙!” 하고 불렀다. 이용이 화들짝 놀라 돌아봤더니, 전가아가 까르륵 웃으며 펄쩍 뛰어와 안겼다.
“네, 네가 어째서 여기에 있어?”
이용이 몹시 놀라서 물었다. 시골 아이 같은 전가아에게 옥 같은 고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전가아는 이용의 옷에 얼룩덜룩한 자국을 마구 남기며 씨익 웃었다.
“아버지가 데리고 왔지요.”
이용이 놀라움에서 깨어나기 전에 노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저아는 외출했는데요.”
또?
이용은 움켜쥔 두 손으로 바닥을 내리치고 싶었다.
하늘이시어, 날 조롱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