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57)

희녕 10년 8월 초, 연달아 며칠 내린 비가 드디어 그쳤다. 깨끗이 씻은 듯이 맑은 경성의 하늘엔 아름다운 태양과 하얀 구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날씨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용상에 앉은 황제는 그렇지 못했다. 며칠 동안 연달아 들어온 안 좋은 소식에 초조 불안한 그는 해가 어렴풋이 밝아 올 때 벌써 조당에 나와 있느라 밖에 날씨가 어떤지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 

“열이레, 황하가 조촌을 크게 휩쓸었다고 합니다. 스무엿새, 서주에서 상주서를 올리길, 황하가 남으로 내려가 양산박, 장택박에서 만난 뒤 두 갈래로 갈라져 남은 정하로 흘러들어가고, 북은 청하로 흘러 바다로 향했답니다. 어제 정주 영택에서 황하가 범람했다는 소식과 북하에 큰비가 내렸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수심이 이 장(丈)이나 된다는 보고입니다. 하양은 물이 불어 물난리가 났고, 창위하도 수위가 높아져 물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시어사(侍御史) 채확(蔡确)이 바닥 가득히 쌓인 상주서를 들고 온건한 목소리로 아뢰는 내용이 조당에 울려 퍼지고, 그 충격이 위로는 황제, 아래로는 조정 백관의 심장을 매섭게 때렸다.

“피해는 얼마나 되는가?”

황제가 이마를 부여잡고 물었다. 즉위 이래 최악인 황하 범람 소식에 표정이 심각해졌고, 안 그래도 시름시름 앓는 얼굴이 더 안 좋아졌다. 

“폐하, 현재 벌써 마흔다섯 현성이 물에 잠겼으며 피해가 30만 묘입니다. 수만 민가가 흔적도 없이 휩쓸려 내려갔으며, 수재민이 70만 민가가 넘어 피해 인원이 300만에 달합니다. 사망 인원은 아직 헤아리지 못했으나, 신이 가늠한 바로는 적어도 수만은 되리라 여깁니다.”

공부 상서가 서둘러 나와서 아뢰었다. 벌써 가을로 접어든 날씨에도 관복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다. 긴장해서인지 근심 때문인지, 목소리가 확연히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 말에 놀라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조당에 가득해졌다. 작년 가뭄 피해에서 회복하기도 전에 이렇게 대규모 수해가 또 일어나다니, 정말로 하늘이 대송을 보우하지 않는 것인가. 

물론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고, 황제가 문책하기 전에 누군가 먼저 나서서 추궁하기 시작했다. 공을 세우려고 수리(水利)를 펼친다고 각지 도로를 보수하고 수로를 개설한 바람에 국고를 낭비하고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채확을 선두로 한 신법 지지 당파에 칼끝을 겨누자, 안 그래도 성격이 좋지 않은 채확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채확이 누구인가? 언관이자, 무고한 옥사를 여러 번 일으킨 사람이었다. 이번 물난리는 원래라면 어사대 사람인 그가 나와서 보고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하, 장하, 어하(御河)의 물길을 준설하고, 농전수리법 등 왕안석이 제정한 신법 중 이 항목을 추진한 사람이 바로 채확이었다. 이번 물난리로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것이 망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조정 율령에 부적절한 부분이 있는 걸 알면서도 확실히 상주서를 올리지 않고 주관 부서에서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채확의 말에 반대파 대표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채확이 그쪽을 향해 물었다. 

“내 물어봅시다. 거짓 보고가 있다는 걸 알면서, 어째서 일찍 상주하지 않았소!”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저 녀석은 끝났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채 대인이 얼마 전에 바로 그 말로 한때 전우였던 심괄 동지를 쫓아냈다. 황제는 지금 왕안석이 막 조정을 떠나자마자 신법에 손을 대려는 사람을 가장 꼴 보기 싫어했다. 

역시나, 분노한 황제가 그 자리에서 그자에게 보따리 싸서 지방으로 내려가라고 명했다.

“경은 속히 수재 지역의 지방 관리의 이름과 관직을 보고하고, 도수감(都水監: 수리 공정 계획, 시공, 관리를 담당한 기관)에게 명하여 그 일대의 수리를 실지 조사하게 하라. 짐은 관련된 관리가 직무를 다 하지 못한 벌을 반드시 묻겠다.”

서른 안 된 젊은 황제는 평소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날카로운 목소리, 시퍼레진 안색, 모든 언행에 황가 특유의 서슬 퍼런 살기가 느껴졌다. 채확, 그리고 공부 상서, 도수감을 비롯한 사농시 관리 모두 입 모아 대답했다. 

그때 신임 시랑 이용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신이 생각하기에 급선무는 재난 구제입니다. 이제 곧 겨울인데 농민들의 생활이 문제입니다. 게다가 논밭의 손실이 지나치게 큽니다. 어떻게 구제하고 해결할 것인지, 고명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

도수감의 벗들이 몰래 고마움을 표시하는 걸 겉눈으로 바라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금세 감췄다. 조정일에서 딱히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에게 유리한 일을 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황제는 용상에 기댄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재난 구제가 문제였다. 몇만 농민, 몇백만 묘의 땅. 지금은 본디 논벼를 한창 수확해야 할 시기인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중신들을 훑어본 황제는 하나같이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자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가 조정 대신들 뒤에, 조정 대신 같지 않고 오히려 재난민처럼 깡마른 청년에게 시선이 향했다. 황제는 정신이 번뜩 들어서 그를 불렀다. 

“유 경!” 

“신, 여기 있습니다.”

유소호는 조정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자기에게 향하는 걸 느끼면서 앞으로 나섰다. 거의 한 달 만에 조정에 나온 것이라, 저마다 의도를 품고 바라보는 이런 시선이 어딘가 적응되지 않았다. 

“짐이 듣기에, 경이 7월에 휴가를 청한 이래 장서를 읽고 지방을 돌아다니다가 최근에 돌아왔다던데, 어디를 다녀왔는가.”

황제는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청년을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피부가 많이 탔고 살도 빠졌지만, 향촌 분위기를 풍기며 새로운 기운이 넘쳐 보이는 그의 모습에 울적한 기분이 조금 풀렸다. 

“신, 태화(泰和)로 가서 도룡(屠龍)옹을 뵈었습니다.”

“도룡옹?”

황제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에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는데, 등관이 앞으로 나섰다. 

“폐하, 6년에 강주 사마에 있었던 자입니다.” 

그 말에 바로 떠올린 황제가 알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벼슬을 하지 않겠다고 시를 지어 올리고 농사지으러 떠난 그자?” 

“예, 바로 그자입니다. ‘소매를 뿌리치며 관직에서 물러나네, 수많은 관원 중에 밭으로 마음 향한 사람 몇 있으리. 누가 두립을 쓰고 저 하늘 밖으로 가는가 물으니, 옛 성현을 따르려는 미친 서생 도룡이 있네.’ 이 시를 지은 증안지(曾安止)입니다.”

황제는 시를 좋아하지만, 이 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를 지은 사람도 별로 유념하지 않았던지라, 유소호가 그를 어찌 아는지 궁금해졌다.

“유 경, 그와 아는 사이인가?”

“신, 범인 시절 오월 지역에 갔을 때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이 농사에 정통하여 도열병에 대해 가르침 받은 적 있습니다.”

“아, 그럼 그 사람도 농사에 재주가 뛰어난가? 어째서 벼슬을 하지 않았지?”

황제의 물음에 유소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씁쓸한 듯 천천히 대답했다. 

“선생 말이, 농사는 정치보다 중요한 것으로 농사에 집중하려면 다른 곳에 마음 써서 안 된다고…….”

“아.”

황제는 그자 역시 몸을 낮추고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에 곧 흥미를 잃고,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눈앞의 일로 관심을 돌렸다. 

“물난리가 막 마무리됐고, 이제 가을 농사를 지을 시기인데, 유 경, 좋은 대책이 있나?” 

유소호는 잠시 생각하다가 숨을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물에 장시간 잠겨 있어서 수확이 없을 밭엔 녹두를 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녹두는 제철이 아니지만, 아직은 심을 수 있습니다. 물에 잠겼던 논은 우선 물을 빼내고 흙을 갈면 가을보리 파종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겁니다.” 

유소호가 술술 대답하자 황제도 한시름 놓았다.

“그렇다면, 유 경, 자네가 도수감과 함께 순시 나가서 각지의 가을 농사를 지도하게.”

유소호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하고는 미처 물러나기 전에, 이용이 옆에서 하는 말이 들렸다. 

“폐하, 지금 성안 조씨가 이미 성안현으로 돌아갔습니다. 경성과 멀지 않으니 불러와 유 대인과 협력하도록 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에 멈칫한 유소호는 다소 굳은 동작으로 돌아서서 이용을 바라봤다. 황제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유 경, 자네 뜻은 어떤가?”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황제 본인이 다 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번 물난리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병이 급하면 닥치는 대로 의원을 찾아간다고, 체면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유소호가 휙 돌아서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천천히 대답했다.

“폐하, 이번 수재로 논벼 수확이 전혀 없지만, 아직 가을 파종 때가 되지 않아서 가을보리, 콩, 채소 농사만 잘 지으면 내년 식량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닙니다. 신이…… 신들이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황제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그러라고 하고는 유소호가 대열로 돌아가는 틈에 이용을 향해 눈짓했다. 영리한 이용은 곧바로 눈치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시가 되어 드디어 조회가 끝나고, 배가 등에 붙을 정도로 허기진 대신들은 일제히 집으로 달려갔다. 

유소호는 등관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붙들려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랫사람들도 하나같이 “대인, 이번 공무는 실로 백성을 이롭게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잘 마무리하고 오면 분명 승관을 하고 상을 받을 겁니다.” 하며 알랑거렸고, 유소호는 웃기만 하고 별말 없이 모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 물러가려 했다. 그러자 등관이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바로 돌아간다니, 안 되지. 술 한잔해야지! 이대로 돌려보낼 수 없네!” 

사람들이 모두 호응하자, 유소호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지 오래라 아들 된 자로서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양해해 주십시오. 이번에 다녀오면 반드시 거나하게 한잔하며 고마움을 전하겠습니다.” 

노모가 병석에 있는 걸 잘 아는 사람들도 더는 만류하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궁문 밖으로 함께 나갔다. 유소호가 퇴청하는 조정 대신들을 훑어보는데, 이용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는 말에 올라탄 후 채찍을 크게 휘둘러 미친 듯이 질주했다.

황하에서 큰 재난이 일어났다지만, 경성 사람들에겐 별 영향 없는 일이었다. 그저 오가는 배가 더 많아지고, 교두, 거리에 거지가 많아졌을 뿐. 중추절이 가까워질 시기라 온 거리에 채루가 가득했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유소호는 말을 끌고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주변 주루에서 풍기는 새로운 술의 향긋한 냄새에 술을 좀 사고 시장에 나온 참게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문 앞에서 꽃등을 달던 장사가 그를 보고 다급히 맞이했다. 

유소호가 옷을 툭툭 털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며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부인은 집에 있는가?”

“막 간식을 사서 돌아오셨습니다.”

장사가 뒤에서 대답하길래 고개를 끄덕인 유소호는 유씨 거처로 향했다. 

유씨는 중당(中堂)의 장탑(長榻)에 걸터앉아 잘 돌아가지 않는 오른손으로 신발 천을 그리다가 유소호가 들어가자 다급히 내려놓고 웃어 보였다. 

“늦었구나?”

그러고는 방을 정리하고 있는 새로 들인 시녀에게 식사 준비해 오라고 지시했다. 유소호가 참게를 건네자, 시녀가 받아서 부엌으로 향했다. 유소호는 잠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는 다시 지방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했다. 

“괜찮다. 자리에 있으면 직무를 다해야지. 나랏일에 전념하거라. 난 이미 좋아졌으니 밖에서 마음 쓰지 말고.”

유씨가 웃으며 손을 잡아당겨 토닥여주다가 멈칫하고는 말을 이었다. 

“다만 네 처가 언짢아하겠구나. 잘 위로해주어라.”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오리고기, 옥수수 면, 장미 소를 넣은 증병(蒸餠)과 뜨거운 죽을 가지고 오자 유소호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병자와 죽만 먹으면 된다고 말했다. 부인이 일부러 남겨둔 거라고 하자, 다른 말 없이 고기 두어 점을 먹고는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유씨가 신발 천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수재민이 많이 생겼다면서? 경성으로 도망쳐 온 사람도 많다더구나. 장사가 그러는데, 이웃들도 다 돈이며 물건을 내놓았다고 하더구나. 우리도 조금 낼까 싶다.” 

그러고는 손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도망 다녀 보지 않았느냐. 그 괴로움, 나도 안다.”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이 안 좋아져서 멈칫했다. 유소호가 젓가락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걸 보니, 자기처럼 그 아이를 떠올린 걸 알고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송옥루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사, 대문 제대로 지켜. 지금 성에 거지가 넘쳐나는데 들여보내기만 해!”

송옥루는 대추와 배를 담은 쟁반을 들고 휘장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중추절이 다가오지만, 날씨는 아직 조금 더웠다. 송옥루는 흰 비단 상의에 노란 치마만 입고 은사 비녀 몇 개를 꽂고 연지도 바르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치켜뜨고 들어오다가, 유소호가 있는 걸 보고 금세 생글생글 웃으며 큰 배와 붉은 대추가 담긴 쟁반을 내밀었다. 

“술 마시러 갈 줄 알았더니,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요?”

유소호가 웃으며 그녀에게 앉으라고 했다. 

“한동안 집에 없는 바람에 당신 고생시켰는데, 명절에 어떻게 밖에 나가겠어요. 낭자를 위로해야죠.”

“이랑이 내게 화만 내지 않으면 좋겠어요.”

송옥루가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으며 속삭이는데, 유씨가 목을 가다듬고 말을 꺼냈다. 

“안 그래도 할 말이 있다. 물난리가 났으니, 우리도 공덕을 쌓을 겸 돈을 좀 내야겠구나.”

송옥루의 안색이 굳더니 주저하며 물었다. 

“어머니, 얼마나 내시려고요?”

유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소호를 바라봤다. 

“다른 조정 관리들과 비교할 순 없어도, 어찌 됐든 이랑이 관직에 있으니 아무리 그래도 이백 냥은 내야겠지?”

이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유소호는 대추 하나를 집어 들고 먹으며 어머니가 알아서 하라고 했다. 송옥루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유씨가 담담하게 물었다. 

“어찌, 그 정도 돈을 낼 형편도 안 되는 것이냐?”

송옥루가 서둘러 웃으면서 대답했다. 

“있어요. 있어요. 아무리 돈이 없어도 어머니 공덕 쌓을 돈은 내놓아야죠. 오후에 바로 보낼게요.” 

유씨는 더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발 천을 들어 올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유가 후손을 위해서, 너도 조금은 내라.” 

송옥루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파래졌다가 다채로워졌지만,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곁에서 차를 따르고 물을 나르며 조심스럽게 시중들었다. 유씨가 지쳐 보이자, 유소호는 유씨를 부축하고 안으로 들어간 다음 시녀에게 잘 모시라고 당부한 후에 문을 닫고 나갔다. 

거처로 돌아간 다음, 송옥루는 한마디 말도 없이 곧장 침상에 가서 누워 버렸다. 할 수 없이 녹옥이 용기를 내서 유소호가 옷을 갈아입는 걸 시중 든 후 재빨리 물러났다.

“왜 그래요? 혼자 집에 두었다고 마음이 안 좋아요?” 

여인이 침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길래 다가가 봤더니, 손수건을 들고 두 눈이 새빨개질 정도로 울고 있었다. 유소호가 옆에 앉자 임새옥이 더 크게 울어댔다. 

“내가 돈 관리를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 힘드실까 봐 한 건데, 어머니는 내가 뭘 하든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좋은 음식을 만들면 낭비한다고 하고, 음식이 안 좋으면 어른을 잘 모시지 못한다고 하고. 부인들이 초대만 해도 집을 지키는 여인네 같지 않다고 하시고, 새 신발만 신어도 반나절은 잔소리하세요. 

나는 아무리 해도 형님만큼 집을 잘 돌보지 못한다고 했을 때 굳이 집에 들이시더니, 지금은 아이를 못 낳는다고 구박하시네요. 당신이 한 달에 스무날은 집에 없는 걸 어쩌라고요! 내가 무슨 재주로 아이를 낳아요! 알이라도 낳아요?” 

마지막에 말에 유소호가 웃음을 터트리자, 송옥루는 더 크게 울었다. 송옥루가 대명부로 돌아갈 거라고 소리치자, 유소호가 어쩔 수 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달랬다. 

“예전에 가난하게 살다 보니 무서워서 그래요. 지금은 몸도 좋지 않고 마음도 언짢아서 괜히 하는 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송옥루가 손수건을 들고 듣고 있다가 눈을 치켜뜨더니 다시 눈물을 철철 흘렸다. 

“듣기 좋은 말로 달랠 생각하지 말아요. 어머니 마음에 형님뿐인 거 모를 줄 알아요? 내가 뭘 하든 다 미워하시지…….”

그러면서 유소호를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아마 당신 마음속에도…….”

그 말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 유소호가 여인을 확 밀쳐냈다. 

“그렇게 따지면, 내가 집을 비우는 것도 그 여인 때문에 당신을 냉대하려고 그런다는 건가? 설사 내가 그 여인 때문에 당신을 냉대한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이 난리를 부려야겠어요? 전에 내게 뭐라고 했나요? 여인네는 사내를 따라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내가 아끼는 여인은 그게 누구든 신줏단지 모시듯 모신다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신줏단지는 둘째치고 질투만 하고 있지 않나요? 어머니를 의심하고, 이렇게 이간질하고, 내가 화가 나서 어머니 욕을 해야 후련하겠어요?”

송옥루는 수치스럽고 다급해져서 다시 눈물을 터트렸다. 

“내가 왜 형님을 원망하겠어요? 형님을 원망하는 건 오히려 당신이랑 어머니죠. 형님이 두 사람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미운 거잖아요.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하지 말아요! 당신이 설득할 수만 있다면, 내가 무릎을 꿇어서라도 형님을 데리고 올 거예요!” 

유소호의 안색이 바로 변해서는 침상 옆의 탁자며 의자를 걷어찼다. 탁자 위에 놓인 화병이 흔들리더니 떨어지면서 쨍그랑 소리가 났다. 

휘장을 젖히고 밖으로 나가는데 멀리서 송옥루가 뭐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쥐새끼처럼 속은 좁아서, 내가 뭐라고 했다고 화풀이야! 낮에는 노인네 수발들고, 저녁엔 독수공방하는데, 말도 못 해? 이럴 거면 뭐 하러 나를 집으로 들였어!”

방 안의 기척을 듣고 있던 녹옥은 겁에 질려 온몸을 부들부들 떨 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유소호는 겉옷을 걸치더니 밖으로 나갔고, 송옥루가 안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다 때려 부수는 소리가 나자 더 겁에 질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문 앞에 서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씨의 시녀가 밖에서 달려왔다. 

“언니, 돈 준비 됐는지 물어보래서 왔어요. 상국사에 보내라고 하시는데…….”

시녀는 안에서 무슨 일이 났는지도 모르고 떠들어댔다. 녹옥이 서둘러 입을 막아도 이미 늦은 후였다. 송옥루가 안에서 시녀의 말을 듣더니 창문을 열고 눈을 치켜떴다. 

“그 높은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신발 가게보다 돈도 못 벌고, 매일 밖에 돈을 버리기만 해? 어렵게 천막 농사를 지었길래, 식구들 씹을 거리라도 생기나 했더니, 그것도 다 말아먹어서 이래저래 벌금 천 냥 가까이 내놓고? 재촉하지 말라고 노부인께 말씀드려! 며칠 멀건 죽만 먹다 보면 잇새를 긁어서 은자를 쥐어짤 수 있겠지! 그때가 되면 반드시 그 유민들 구제할 돈을 낼 수 있을 거라고 해! 정 안 되면 내가 머리 장식이라도 팔아서 유가 체면은 지킨다고 해!” 

손가락을 깨물고 있던 시녀가 겁에 질려 달아나더니, 녹옥이 말릴 새도 없이 유씨 앞으로 달려가 들은 대로 말했다. 

유씨는 눈앞이 시커메질 정도로 화가 났다. 유소호가 거처에 있는 줄 알고 바로 불러오라고 하다가 말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겉과 속이 다른 속 좁은 여인이다. 이랑을 불렀다가는 또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고, 뒤에서 무슨 이간질 할지 모를 일이다. 됐다, 됐어. 뭐 하러 그런 꼴을 볼까.” 

그러고는 자기가 모은 돈을 꺼내 시녀에게 주어 상국사로 보내도록 했다. 그래도 다 내려놓지는 못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리는데, 밤이 되어도 유소호가 찾아오지 않자 더 속이 상했다. 

어려운 게 있으면 그 자리에서 이야기할 것이지, 이 어미가 억지를 쓴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할 말이 있으면 어미 앞에서 하면 될 것을, 뒤에서 며느리가 제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 두는 게냐. 모자로 지낸 지 십여 년인데, 어미가 몇 달 같이 지낸 며느리보다 못한 것이냐.

유씨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잠 못 들고 뒤척이기만 했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서 열도 올라서 잠결에 이랑만 외쳐대자, 시녀가 놀라서 송옥루에게 가서 이야기했고, 송옥루는 애써 화를 누르고 장사를 보내 호 의원을 불러왔다.

약을 먹고 기운을 조금 차린 유씨가 눈을 떴을 땐 송옥루만 앉아 있는 데다가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씨가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지도 않자, 화가 잔뜩 난 송옥루 역시 유씨가 깬 것만 보고 시녀에게 맡기고는 거처로 돌아가려고 방을 나섰다. 

송옥루가 계단 위에서 봉선화를 잡아 뜯고 있는데 장삼이 유소호를 찾아서 돌아온 모양이었다. 송옥루는 서둘러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는 유씨 앞에 꿇어앉아 울면서 이거 드시겠냐, 저거 드시겠냐 물어댔다. 

“어머님!” 

술 냄새를 가득 풍기며 돌아온 유소호는 숙취가 가득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송옥루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유씨의 수발을 드는 걸 보고는 미안해져서 다독여주려고 하는데, 그녀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멀찍이 떨어져 섰다.

유씨는 눈을 감은 채 별일 아니라고, 쉬면 된다고 말하고는 두 사람이 여기에 있는 게 싫어서 서둘러 내보냈다. 혼자 조용히 쉬고 싶다는 모친의 말에 유소호는 유씨의 울화병도 모르고 그저 지쳐서 그런 줄만 알고 더는 바느질하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방을 나왔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함께 거처로 돌아가자마자, 송옥루가 팩 돌아서더니 침상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낭자, 옥루 누이.” 

유소호가 침상 곁에 앉아서 손을 잡고 다정하게 불러도 송옥루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유소호가 더 다가가서 품에 안으며 달랬다. 

“내가 잠시 어떻게 됐었나봐요. 밖에서 화난 일을 낭자에게 푸는 게 아니었는데. 마음 아팠죠?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줘요.” 

“잘못 찾아왔어요. 나는 질투나 하고 남 욕이나 하는 속 좁은 여편네에요. 내가 무슨 대인배라도 돼요! 돌아왔으니 됐어요. 난 짐 챙겨서 대명부로 돌아갈래요.”

송옥루가 밀치는데도 유소호는 놓아주지 않고 품에 안으면서 모두 제 잘못이라고 어르고 달랬다. 유소호가 마음을 돌렸음을 눈치챈 송옥루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하고는 사내의 품을 파고들었다. 있는 말 없는 말 보태서 서러운 마음을 한바탕 털어놓자, 유소호가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미안해했다. 

사내의 모습에 여인의 춘심이 또 동했다. 유소호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워서 겨우 스물 남짓한 여인이 오랫동안 독수공방을 해야 했다. 어젯밤에 제대로 회포를 풀 생각이었는데 하필 싸우느라 못했으니, 당연히 지금이라도 유소호를 침상으로 이끌어야 했다.

여인이 춘심이 동한 것 같지만 대낮이라 환하게 밝은 밖을 바라보며 유소호가 주저했다.

“며칠은 집에 있을 거요. 이따 밤에…….”

하지만 결국 여인에게 이끌려 침상에 누웠다. 여인이 새초롬하게 입술을 내밀면서 맨 살결을 드러내며 말했다. 

“아직 다 따지지 않았다고요. 어제 비 내리는 좋은 밤에, 다른 밭을 적신 거 아니에요? 자기 밭은 이렇게 비워두고!” 

그 말에 유소호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바로 옷자락을 풀고 여인과 함께 환락을 즐겼다. 

이때부터 유씨는 더 이상 집안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송옥루도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유씨가 기부 건도 거론하지 않으니, 송옥루도 자연스럽게 깨끗하게 잊고서 그 돈을 가지고 노름하러 나갔다. 유소호가 또 집을 비워야 한다는 걸 알기에 언짢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 사내가 있는 틈에 밤낮없이 붙어서 즐거움을 탐할 수밖에. 

그러나 지나친 환락 끝엔 비극이 찾아온다고, 혹은 세상에 새지 않는 벽은 없다고 해야 할지, 유소호가 묻지 않고 유씨가 입에 올리지 않으니 송옥루는 제가 그날 한 욕을 다 잊고 살았다. 그녀야 애초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시녀 아이가 그날 자기가 했던 욕을 남들에게 말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유씨가 또 몸이 안 좋아진 걸 알게 된 유소호와 관계가 좋은 관리들이 식솔을 보내 병문안을 하게 했는데, 그중에 오 부인은 임새옥과 가까웠던 데다가 원래 유씨를 꽤 신경 썼던지라, 노부인이 마음의 병이 있는 듯이 수심이 가득한 걸 보고는 유씨 시녀를 떠보았던 것이다. 결국 자초지종을 알게 된 오 부인은 순간 화가 나서 찻잔을 내던지고는 인사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며칠 되지 않아 안채 부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때도 유소호는 이 일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매일 도수감, 공부 사람과 함께 수재 지역을 조사하느라 사흘돌이로 경성을 비웠다.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은 이상하다는 걸 곧 깨달았다. 이번에 경성을 비울 때 배웅하러 나온 사람이 꽤 줄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가까웠던 오 대인 역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전별주를 마신 유소호는 말을 타고 제자리를 몇 바퀴 맴돌며 등 뒤의 번화한 성을 바라보다가 왠지 모를 초조함을 억누르고 말을 재촉해서 길을 떠났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