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아원, 단념시키기 위해 유가의 일을 감추다
새벽닭 울음소리와 함께 변경 성문이 서서히 열렸다. 성문 아래서 기다리던 행상들이 분분히 소금을 짊어지고 일어나서 하루의 생계를 시작하기 위해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더 먼 곳에서, 짐을 메고 수레를 민 사람들이 잇달아 몰려왔다. 혼잡한 인파 속에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새벽을 알리는 두타가 ‘묘시(卯時: 오전 5시~7시), 날씨 맑음!’ 하고 외치는 소리가 저 멀리 변경 성 안까지 퍼져나갔다.
소씨 시종이 모는 마차는 인파를 피해서 관로를 따라 성 서쪽으로 향하더니, 2리를 못 가서 한 저택 앞에 멈췄다. 휘장이 젖히고 영아가 가장 먼저 뛰어 내렸다. 그녀는 푸른 담벼락의 삼진(三進) 사합원을 살펴보고는 임새옥을 부축하고 내리는 아원을 향해 혀를 내둘렀다.
“아원 언니, 부자 됐구나!”
아원은 웃기만 하고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고, 영아도 뒤따라 달려 들어갔다. 커다란 가림벽을 지나자 아원이 입을 열었다.
“나도 여기에 사는 게 아니라서 정리하지 않았어요. 오후에 이불을 보내드릴게요. 오래 머물 필요도 없을 거예요. 오늘 바로 유가에 가면 곧 영아의 노비 문서를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야 빨리 소 대관인이랑 같이 돌아가죠.”
임새옥이 저택을 둘러봤다. 정갈한 뜰 정면에 상방(廂房: 사랑채) 다섯 채가 있고, 뜰엔 커다란 나무가 녹음을 짙게 뿌리고 있었다. 그녀는 아원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다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쩨쩨하긴. 희주도 안 먹여주고?”
아원은 소씨 가문 시종들을 지휘해서 임새옥의 짐을 내려놓으면서 대답했다.
“술이요? 오늘 밤에 와서 같이 마셔드려요? 제가 있으면 그게 희주지, 날짜가 뭐가 중요해요?”
시종이 물건을 내려놓는 걸 보고 또 그 시종에게 당부했다.
“대관인께 여긴 걱정할 것 없으니 볼일 보시라고 전해드려. 다른 일 없으면 내일이면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 시종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임새옥을 향해 예를 갖추고 물러갔다. 곧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멀어져가는 게 들렸다.
임새옥은 아원을 붙잡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물어보고 싶은데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랐다. 아원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사방을 마구 돌아다니는 영아를 붙잡았다.
“얼른 나랑 같이 가. 그 집 사람들이 다 있을 때 얼른 이야기하고 얼른 돌아오자.”
영아는 내심 겁이 나서 임새옥을 바라보며 아원을 향해 잘 보이려는 듯 웃었다.
“아원 언니야. 대저아가 오랜만에 온 건데 좀 가보면 어때서.”
임새옥이 다른 쪽 소매 끝을 잡고 천천히 일어나는데 아원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가? 무슨 꼴 보겠다고 가? 부부는 화목하고 고부는 다정하고, 말도 못 하게 잘 사는데 굳이 가서 흥을 깨려고? 분위기를 깨뜨리려고?”
그러면서 임새옥을 힐끔 보자 임새옥이 웃으며 다시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나는…… 당연히 안 가지…….”
영아는 입술을 내밀어도 소용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배고픈데,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아원이 영아를 대뜸 잡아서 밖으로 끌고 나갔다.
“가서 마차 타. 아직 아침 시장 안 끝났어. 가서 뜨끈뜨끈하고 향긋한 함병(餠餡: 소를 넣은 떡) 사줄게. 여기서 식은 떡 먹는 것보다 훨씬 나을걸?”
그러면서 벌써 마당 중간까지 가서는 임새옥이 따라 나온 걸 보고 말했다.
“대저아, 후원에 부엌 있어요. 그런데 쌀 같은 건 없으니 떡 데워서 드세요. 오후에 맛있는 거 대접할게요.”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 사람이 가림벽을 돌아가려 하자 아원, 하고 불렀다. 아원이 눈을 부릅뜨며 걸음을 멈췄다.
“왜요? 할 말 있으세요?”
임새옥이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가서 좋은 말로 하고 싸우지 마……. 영아의 연분 때문이니까, 그렇게 모질게 굴진 않을 거야. 그런 사람들은 아니야…….”
아원은 콧방귀를 뀌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걸음을 뗐다. 임새옥이 또 부르자 참지 못하고 팩 돌아서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눈을 치켜떴다.
“또 무슨 할 말이 있으세요? 그날은 시원스럽게 떠나더니, 오늘은 무슨 말이 이렇게 많으세요?”
아원의 호통에 임새옥은 입을 다물고 시선을 내리더니,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서서히 돌아섰다. 아원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쉬우면 그날 참았어야죠. 그날 안 참았으면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고요. 하늘로 통하는 탄탄대로가 있는데, 뭐 하러 막힌 길을 죽을 때까지 걸으려 해요. 예전에 아무리 좋았다고 해도 이제 서로 상관없는 남이에요. 대저아, 대저아는 영리한 사람이잖아요! 내가 무시할 일 좀 하지 말아요! 이 세상 사람들이 무시할 일도 하지 말고요! 지금 대저아는, 위로는 태후마마와 관가께서 보호해주고, 아래는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있어요. 백성을 구제하고 돕는 그 좋은 능력이 있으면서 왜 마음을 닫고 눈을 가리는 거예요. 꼭 가까운 사람들 마음 아프게 하고, 원수를 기쁘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
“아이고, 언니. 말을 이렇게 길게 하는데 왜 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영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 말에 임새옥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는 돌아섰다.
“아원, 고마워. 나도 알아. 그냥 한마디 묻고 싶어서 그래.”
그녀가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줘. 유 노부인…… 그리고 그 사람, 다 잘 지내지?”
아원은 한숨을 내쉬며 여인의 얼굴을 보고 또 봤다. 정말로 담담해 보이고 당황한 기색이 없는 것 같아서 안도하며 눈을 내리깔고 돌아섰다.
“자기들이 고른 건데, 당연히 잘 지내죠…….”
아원은 영아를 끌고 가림벽을 돌아서 사라졌다. 빗장 소리가 들리고 마차가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멀어진 뒤 임새옥은 천천히 다가가서 문을 당겨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원이 밖에서 빗장을 걸어 버렸다. 임새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도 알아. 당연히 내려놓았지. 그저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래…….”
마차가 끼익끼익, 왔던 길을 따라 성으로 돌아갔다. 마차 안에 앉은 아원은 평소와 달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영아는 언제나 그녀를 무서워하곤 했지만 오늘은 마음이 더 조마조마해서 계속 재잘거렸다. 눈살을 찌푸리고 입을 내밀면서 보내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아원 언니 꼭 도와줘야 해, 운운해도 아원이 상대도 하지 않자 영아는 더 자신이 없어져서 거의 울 듯이 말했다.
“차라리 대저아를 불러 줘. 노부인은 대저아를 제일 좋아하시니까, 대저아 말이라면 분명 들어주실 거야…….”
아원이 크게 화를 내며 그녀의 손을 찰싹 때렸다.
“이런 망할 계집. 자기밖에 생각하지 않기는! 대저아가 어떤 성격인지 몰라? 어떻게 여길 데리고 와! 네 혼인 때문에 대저아의 앞날을 버려놔야겠어?”
영아는 겁에 질려 큰 소리로 울었다. 대체 뭘 잘못한 건지 알지 못했다. 전에도 항상 혼냈지만, 이렇게 사나운 적은 없었다. 아원이 욕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양심 없는 것은 진작 팔아버렸어야 해.”
“아원 언니, 내가 잘못했어. 이번만 봐줘. 다시는 대저아를 꼬드겨서 나 때문에 동분서주할 일 없게 할게.”
영아는 겁에 질려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고, 아원은 숨을 헐떡이며 벽을 몇 번 내리치고서야 겨우 울화를 억눌렀다. 영아가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했다고 하는 걸 보고 더는 욕하지 않고 잠시 조용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잘 기억해. 오늘 유가에서 본 모든 것, 절대로 대저아에게 말하면 안 돼. 단 한마디라도 해 봐. 나, 아원은 널 팔아 버릴 능력 있는 사람이야. 평생 좋은 인연이 뭔지 다시는 생각하지도 못하게 해줄 거야!”
영아는 놀라서 고개를 들고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 유가에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유가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 오늘 유가엔 정말로 아무런 일이 없었다. 유소호가 등청한 다음에 장사는 정원 안팎을 청소했다. 곧 중원절(中元節: 음력 7월 15일)이라, 다른 집에서 우란분(盂蘭盆: 아귀도에 떨어진 망령을 위해 지내는 불사佛事)을 만드느라 높이 세운 대나무 막대기를 힐끔거리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장씨는 후원에서 송옥루가 나왔다는 걸 알고는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장씨, 오후에 가서 세수화(洗手花: 계관화, 맨드라미의 별칭) 사와요. 노부인이 사 오래요.”
시녀 녹옥이 다가와서 하는 말에 장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녹옥이 빠르게 달려가더니 막 치장을 마친 송옥루와 함께 유씨의 거처로 들어갔다. 머지않아 창이 열리더니, 녹옥이 코를 틀어막고 대소변 통을 들고 나와서 후원 우물로 씻으러 갔다. 여인이 안에서 부드럽게 하는 말이 들렸다.
“어머니,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이진탕 어때요?”
유씨의 대답은 들리지 않고, 송옥루가 나오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여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어머니, 저 나가서 연잎 사 올게요. 어멈을 불러다 놓을 테니 심부름시키시겠어요?”
유씨가 대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휘장이 흔들리고 송옥루가 웃는 얼굴로 살랑살랑 걸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봐도 녹옥이 보이지 않자 “망할 년, 잠깐만 한눈을 팔아도 어디 가서 자빠져 자는지 안 보여!” 하고 욕하다가 서둘러 입을 가리고 창가로 가서 유씨를 살폈다. 그러고 다시 돌아서다가 장사가 한쪽에서 구부정하게 몸을 굽히고 정원 청소하는 걸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후원에 장작 없어. 가서 장작 좀 패. 개 한 마리면 집을 지키는데, 괜히 공밥 먹이고 있네.”
장사가 못 들은 척하고 허리를 구부린 채 후원으로 가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여인 목소리가 들렸다.
“장씨, 문 열어요.”
목소리를 알아들은 송옥루는 순간 얼굴이 변해서 날카롭게 소리쳤다.
“대낮부터 귀신이 와서 문을 두드리네! 녹옥! 부엌에 가서 재 가지고 나와서 뿌려!”
말이 끝나자마자 쿵 소리가 나더니 닫혔던 문이 활짝 열렸다. 아원이 허리춤에 손을 댄 채 서 있고, 영아가 뒤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아이고, 함부로 남의 집에 쳐들어와? 장사, 관아에 끌고 가!”
송옥루가 몇 걸음 만에 계단에서 내려와 싸늘하게 말하는데, 아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 송 낭자, 화가 많이 나셨네요?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단정했던 옛 모습은 어디로 갔지요? 조심해요, 누가 볼라. 관리 부인의 체면을 생각해야지요.”
저 망할 년이 입만 열면 화가 나서 숨이 쉬어지지 않네!
송옥루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안 그래도 며칠 동안 쌓인 울화를 풀 곳이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 욕을 퍼부으려는데, 유씨가 방 안에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원이 왔니? 어서 데리고 들어와라.”
“노부인, 누가 왔는지 보세요.”
아원이 유씨의 말에 대답하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영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씨가 넘어졌는지 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누가 왔냐고 더듬더듬 묻자, 당황한 아원이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는 훨씬 깨끗했다. 다만 우중충하고 생기 하나 없는 건 변함 없었다. 유씨는 역시나 침상 아래 넘어져 있었다. 곁에 있던 작은 탁자에 물그릇도 쓰러져서 바지 반쪽을 적신 채 침상을 붙잡고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아이고, 노부인!”
갑자기 유씨의 이런 모습을 본 영아는 너무 놀라서 아는 척도 못 하고 비명부터 질렀다. 유씨가 오른손을 덜덜 떨고 오른발을 질질 끌며 애써 일어나려 하자, 영아는 결국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영아가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 입을 열었다.
“노부인, 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신 거예요!”
아원은 유씨 대문 앞에서 몇 번이고 절하는 영아를 끌어당겨 일으켰다. 장사가 아직 문 앞에서 목을 빼고 바라보고 있는 걸 보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저아에게 입은 은혜를 갚으려고 여기 있는 거지, 어딘들 갈 곳이 없겠어.”
마차가 다그닥다그닥 좁은 거리를 지나갔다. 영아는 지금 제 바람을 이루고도 기쁘지 않았다. 그녀는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콧소리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노부인 병, 못 고치는 거야? 노야가 궁에서 좋은 의관을 모시고 오면 안 돼?”
아원은 지금 기분이 매우 좋아서, 시끄럽게만 느껴지던 거리의 장사꾼 목소리도 꾀꼬리 소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녀가 차창에 기대서 말했다.
“의원은 병을 고치지 팔자는 못 고쳐. 하늘님을 모셔와도 못 고쳐.”
그녀는 마차가 반루자 거리로 들어가는 걸 보고 유락(乳酪: 치즈)을 파는 가게 간판을 가리키며 마부에게 저쪽에 세우라고 했다.
중원절이 가까워져 오는 때라 점포에는 사람이 전보다 많았다. 경성 동쪽의 거리는 모두 좁은 편이라 몇 번 시도해도 마차가 들어가지 못했다. 아원은 곁에 세우라고 한 다음 울상인 영아를 끌고 내렸다.
“잘 돌봐야 해서 그렇지, 죽을병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 집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무슨 걱정이니. 넌 마음 놓고 혼인이나 하렴.”
아원이 빙그레 웃으면서 영아의 머리를 토닥이고는 사람들 사이로 끌고 들어갔다. 유락 가게의 사환이 알아보고 손을 흔들며 불렀다.
“아원 대저아, 오셨어요? 뭘 드릴까요? 제가 바로 가서 포장해 오겠습니다!”
“새로 나온 백미갱(百味羹) 두갱(斗羹), 신법암자갱(新法鵪子羹), 그리고 자소어(紫蘇魚), 합리(蛤蜊), 백육협면자(白肉夾麪子), 이할육(茸割肉) 주고, 서천 유당(西川乳糖), 사자당(獅子糖), 상봉아(霜蜂兒)는 한 근씩 싸줘. 그리고 청풍루 옥수(玉髓) 한 주전자도 좀 부탁해.”
(※ 송나라 맹원로 <동경번화록, 음식과자>에 소개된 음식들)
그녀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자, 사환이 익숙한 듯 일일이 반복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어느 집 저아가 저렇게 영리하냐, 하면서 그쪽을 바라봤다.
사환은 아원이 던져주는 은자를 받고 신이 나서 안으로 들어갔고, 처음으로 이런 곳에 오는 영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리저리 구경하기 바빴다. 4층 가게에 손님과 하인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입구 쪽엔 푸른 꽃무늬 수건을 허리춤에 달고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여인, 그리고 푸른 꽃무늬 수건을 두른 어린 소년이 백자 항아리를 짊어진 채 수시로 머리를 내밀었다. 입구 쪽 사환이 고함치며 그들을 내쫓느라 한창 혼란스러운데, 아원이 달라는 것이 다 준비되자 아까 그 사환이 직접 들고나와 배웅했다.
“대저아, 이거, 새로 들어온 동죽 조개랑 신선한 게예요. 대저아에게 드리는 선물이에요!”
사환이 웃으며 포장을 건네자 마차에 오르던 아원이 돌아보며 웃었다.
“입만 살았지, 정말 쩨쩨하네. 겨우 이거야?”
“대저아만 괜찮다면, 그날 우리도 다 댁에 찾아가서 술 한 잔 얻어 마셔도 되겠어요? 대저아가 좋아하는 욱압(燠鴨: 찐 오리)를 직접 가지고 갈게요!”
거리에서 나온 뒤, 영아는 마차 가득한 먹을거리에서 나는 코를 찌를 듯한 냄새에 침을 꼴깍 삼켰다.
“언니 정말 잘사나 봐요.”
“내가 잘사는 거겠니? 내가 모시는 집이 잘사는 거지.”
아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신송문(新宋門)을 지나 성 밖으로 나간 마차는 줄곧 동쪽으로 달렸다. 변하 방죽을 지날 땐 이미 정오였다. 실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로, 기분까지 맑아져서 웃음이 저절로 났다.
“얘, 좀 물어보자. 대저아 말이야, 그 대관인에게 예물은 받으셨니?”
영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물이요? 대저아가 왜 대관인에게 예물을 받아요?”
영아의 반응에 아원은 얼떨떨해졌다. 새신랑이 된 것처럼 대관인 눈에 꿀이 가득하고 얼굴에 봄바람이 살랑 불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아직도 뜻을 전하지 않은 모양이지? 소금남에 관해 잘 모르는 아원은 영아를 붙들고 자세히 묻다가 ‘죽은 아내 이씨는 경성에 있는 높은 관리 이용의 누이’라는 대목까지 듣고는 얼굴을 구겼다.
“그 사람하고 관계가 있었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아원은 영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는 대관인의 어머니가 우리 집에 와서 난리를 부렸네, 우리가 빚이라도 진 것처럼 대저아더러 꼭 강녕으로 돌아오라고 했네, 하는 건 더 듣지도 않고 손등을 두드렸다.
“돌아간 다음에, 어서 돌아가자고 대저아 재촉하지 말고 대저아가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
영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뭇거리며 쭈뼛쭈뼛 “노부인이 그 꼴인데…….” 하고 말했다가, 입을 열자마자 아원에게 머리를 맞았다. 순간 겁에 질려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목을 움츠리는데 아원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한 글자라도 뱉어봐. 내가 이 경성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너도 아까 봤지? 길에서 아무 장정이나 불러와도 널 팔아 버릴 수 있어. 하늘이 지킨대도 소용없다고, 알아?”
“안 그래, 절대로 헛소리하지 않을게.”
영아가 머리를 감싸고 그렇게 말한 뒤, 마차 안은 조용해졌다. 밤새 길을 달리느라 심하게 지친 마부는 마차 안에서 아원이 하는 말에 식겁해서 진저리를 쳤다.
역시 천자께서 사는 곳에 사는 사람은 달라. 새초롬하고 어여쁜 여인이 어쩜 저리 독하지.
그런 생각에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정신을 백 배로 차렸다. 돈을 벌고서 집에 돌아가지 못하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런데 자기는 정신을 차렸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말이 미쳤는지 하마터면 부딪칠 뻔했다. 쌍욕을 퍼부어도 상대는 아랑곳도 하지 않고 곧장 사라졌다.
“환생이라도 하러 가냐!”
꿍얼대던 마부는 곧 중원절이라는 걸 떠올리고는 목덜미가 서늘해져서 ‘아미타불’을 외치며 길을 달렸다.
그리고 환생이라도 하러 가듯이 질주해서 성으로 들어간 마차는 거리와 골목을 지나 담벼락 높은 이씨 저택으로 곧장 들어갔다. 허둥지둥 말에서 내린 마부는 샛문으로 후다닥 들어가서 좁은 길을 지나 상방을 너머 ‘벽초헌(碧草軒)’이라고 적힌 세 칸짜리 대청 앞에 도착했다. 뜰에 주르륵 서 있는 시녀들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고 있었고, 대청 앞에 있던 시동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허둥지둥 물었다.
“방삼, 어떻게 됐어요? 찾았어요?”
방삼이라고 불린 사람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시종들이 모두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이용이 안에서 화난 목소리로 “썩 굴러들어오지 않고 뭐 해? 이 몸이 나가서 모셔와야 들어와?” 하고 외치자 방삼이 후다닥 굴러 들어갔다.
방 안엔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가득했다. 방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밟고 들어가 허리를 조아렸다.
“대인, 알아냈습니다. 성 밖 양원에 있는 심 노야의 옛 저택에 묵고 있습니다.”
이용은 그제야 웃는 얼굴로 일어섰다. 옷걸이에 있는 겉옷을 잡아채서 미처 걸치기도 전에 “이야, 이야!” 하고 부르는 당황한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청아의 목소리라는 걸 아는 이용은 사람들을 물리고 그녀를 들였다.
“이야, 우리 노야께서 오찬도 드시지 않고 바로 가신대요. 노부인이 잡아도 소용이 없어요.”
안으로 들어온 청아가 예를 올릴 겨를도 없이 말하자, 이용이 새파랗게 질려서는 이를 악물었다.
“오늘 내가 재수 옴 붙었군.”
그러고는 옷도 걸치지도 않고 큰 병풍을 지나 후문을 통해 내원으로 들어갔다.
“외출하시는 거 아닙니까? 어딜 가세요?”
맞은편에서 새로 만든 겉옷을 들고 걸어오던 동연낭이 황급히 묻다가, 이용이 밀치는 바람에 진흙을 된통 밟고 말았다. 주변에 있던 시녀들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였다.
“형님!”
뒤에서 달려온 월낭이 그녀를 부축해서 청석길로 데리고 가서는,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는 시녀들에게 꺼지라고 고함쳤다. 후다닥 사라지면서 ‘안주인이라고 해도 장식일 뿐’이라고 속삭이는 소리에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연낭은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로 신발에 묻은 진흙을 돌 위에 비비며 털어냈다.
“오늘은 또 뭐가 거슬려서 아침부터 부수고 던지고 난리실까. 월낭, 너도 그렇지. 어째서 나이가 들수록 성격이 거칠어져. 시녀들에게 화낼 일이 뭐가 있다고.”
월낭은 숨을 고르고서야 시선을 내리고 동연낭을 부축하며 천천히 내원으로 걸어갔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걸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사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신이 나서 그 사람을 맞이하러 갔는데, 누군가에게 선수를 빼앗겨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대요.”
동연낭은 얼떨떨해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누가 또 그렇게 순정이래?”
그 말에 따라 웃던 월낭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우리도 아는 사람이에요. 형님, 지금 재상 댁에 있는 아원, 기억하시죠?”
동연낭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 아원 말고 그럴 사람이 없지. 듣자 하니 그 아이, 부자라던데? 가택만 두어 채 있다던데.”
“그러니까요. 우리 그 아주버님에게도 배웅하지 말라고 했다고 하고 아는 하인들은 다 점포로 보내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낸 다음에야 겨우 찾은 거잖아요.”
두 사람은 비단처럼 아래로 드리워진 해당화 가지를 헤치며 안마당을 지나 샛문으로 들어갔다. 집채가 겹겹이 이어진 내원으로 걸음을 옮기자, 목소리도 갈수록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졌다.
어린아이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좁은 길, 소금남이 꽃다발을 치켜든 전가아를 안고 내원에서 걸어 나왔다. 이 노부인이 눈물을 닦으며 바짝 따르며 배웅했다.
“내 새끼, 생일 보내거든 꼭 다시 와야 한다.”
노부인은 잔뜩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청아를 토닥이며 말을 이었다.
“저아, 잊지 말고 그 늙은이에게 전해라. 우리 보배가 살이 조금이라도 빠지면 그 집안을 때려 부술 거라고!”
청아는 대답을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어서 어색하게 있다가, 소금남이 못 들은 것처럼 가버리자 노부인의 손을 피해 쫓아갔다.
“외숙, 외숙!”
전가아가 천천히 따라오는 이용을 향해 손을 저으며 웃어 보이자, 잔뜩 흐려졌던 이용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용은 전가아 곁으로 몇 걸음 다가가 전가아가 내민 손을 잡고 흔들며 천천히 말했다.
“전가아, 착하지. 곧 만나러 가마. 네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들여도 두려워할 것 없다.”
소금남이 얼굴이 굳어서 이용을 힐끔 바라봤다. 이용이 싸늘한 얼굴로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길래 뭐라고 하려는지 기다리는데, 이용은 이내 시선을 돌리더니 그의 품에서 전가아를 안고 밖으로 걸어갔다.
“용가아, 그 사람이 전가아를 홀대할 리가 없다. 너도 알다시피…….”
소금남이 뒤따라가면서 입을 여는데, 이용이 휙 돌아보았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날카로운 표정에 소금남은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네가 여기에 웬일이야!”
청아가 별안간 목소리 높여 고함치자, 입구까지 걸어간 소금남과 이용 모두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제 얼굴에서 감정을 감췄다. 갈래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가 보따리를 안고 얼굴을 찌푸린 채 문 앞에서 시종 몇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
“영아? 받아오지 못한 것이냐? 대낭자는? 혹시 거기에…….”
소금남이 가슴이 철렁해서 성큼성큼 다가가다가 옆에 임새옥이 보이지 않자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에요. 대저아가 저는 대관인하고 같이 강녕으로 돌아가래요. 대저아는 성안현으로 가신대요.”
영아가 누가 봐도 운 것 같은 눈을 비비며 코를 훌쩍였다. 그 천둥 벼락같은 말에, 한 사람은 미친 듯이 기뻐하고 두 사람은 놀랐다. 영아는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 광풍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동시에 말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옆에 있던 소금남과 이용 모두 사라지고 없었고 전가아를 안은 청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아, 우리 집에 시집온다며? 우리가 참 인연이 있구나.”
소 노부인 때문에 소가 여인들에게 전혀 호감이 없는 영아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입술을 비죽였다.
“네 집? 네 집이 어디일지 아직 모르는 거 아니니?”
영아가 청아를 위아래로 살피며 말을 이었다.
“보아하니 혼인할 나이가 된 것 같은데, 꼴을 보니 기껏해야 애송이가 어울리겠구나. 우린 달라.”
그러면서 소매에서 노비 문서를 꺼내 자랑하듯이 흔들어 보였다. 청아는 기가 막혀서 힘껏 혀를 차고는 전가아를 안고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임새옥은 벌써 변경에서 나와 3, 4리까지 간 후였다. 날씨가 무더워서 마차의 창을 열었다. 바람이 열기를 완전히 식혀주지는 못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쐬며 마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길에는 끊임없이 행인이 오가는데, 다들 중원절 제사에 쓸 물건을 들고 있었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이고, 길가의 봉분에 새 흙이 덮여 있었다.
임새옥이 수고가 많다고 감사 인사를 하자, 마부는 그 대저아가 따로 준 돈을 가늠하며 마차를 서둘러 몰면서 대답했다.
“대낭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일로 밥 벌어 먹고사는데, 마땅히 본분을 지켜야지요.”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본분을 지킨다라. 맞는 말이네요.”
그러고는 고개를 내밀어 끝도 없이 펼쳐진 밭을 바라봤다. 보리는 이미 수확했을 때이고, 밭에는 논벼와 대두가 한창 자라 있었다. 이 무더운 날에도 밭에서 바삐 움직이는 농부들이 많았다.
“집에도 분명 벼를 심었겠지. 지금이 바로 생산량을 결정짓는 결정적 시기야. 돌아가서 비료를 추가로 뿌리고 발을 고르고 나면 한동안 수월하겠지. 그때 산을 사도록 하자. 음……. 대숙, 혹시 과일나무 묘목을 어디서 사는지 알아요?”
혼잣말하던 임새옥은 흥이 일어서 마부에게 물었고, 마부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과일을 어디에서 파는지는 압니다만, 어떻게 자란 건지는 모릅니다.”
임새옥도 자기가 물을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에 가볍게 웃었다.
별안간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갈수록 가까워졌다. 길을 서두르는 것 같은 기색에 저도 모르게 돌아봤더니, 소금남과 이용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쫓아오길래 어서 멈추라고 했다.
“이 대인, 대관인.”
임새옥은 두 사람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마차에서 내려서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췄다. 갑작스럽게 고삐를 잡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그녀를 한참 지나친 다음에야 겨우 멈춰섰다.
“왜 성안현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소금남은 말머리를 돌릴 겨를도 없이 말에서 뛰어 내려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이용 역시 다가와서 바로 말을 하려다가, 초조해 보이는 소금남을 보고는 웃는 얼굴로 표정을 바꾸어서 임새옥을 바라봤다.
“대낭자, 경성에서 며칠 더 놀다가 가지 그래요. 사농시 관리들이 대낭자 가르침을 받고자 학수고대 기다리고 있는데.”
임새옥이 웃음 지으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대인, 농담도 참. 제가 어디 가당키나 한가요.”
그러고는 소금남을 향해 말했다.
“대관인, 강녕 떠나기 전에 운대 재배하는 방법은 다 알려주고 왔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핵심만 짚어주면 바로 깨달을 수 있어요. 기름 짜는 법도 다 적어서 영아에게 건넸고요. 그래도 어찌 됐든 약속을 어긴 건데……, 양해해 주세요, 대관인.”
소금남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여인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여인이 허리를 곧추세우더니 살짝 미소 짓는데, 고민을 다 내려놓은 듯한 후련한 모습이 강녕에 있었을 때 우울하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그는 붙잡으려던 말을 애써 삼켰다.
“대낭자, 마음에 담아둘 것 없어요. 원래 빚진 것도 아니고…….”
임새옥은 미안한 듯이 그에게 예를 갖추고 다시 환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대관인께 폐를 끼칠 것 같아요. 잘 부탁드려요, 대관인.”
소금남이 애써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해요, 대낭자.”
이때 이용이 싱글벙글 다가와 물었다.
“대낭자,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좋은 생각이 뭐가 있겠어요. 집으로 돌아가 농사지으며 입에 풀칠하며 지내야죠. 대인, 놀리지 마세요.”
임새옥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두 사람을 향해 예를 갖췄다.
“배웅하러 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이만 길을 떠날게요. 나중에 성안현에 오면 꼭 집에 와서 차 한잔하고 가세요.”
이용이 껄껄 웃으며 소금남의 어깨를 쳤다.
“물론이죠. 요즘 유 대인이 서책에 단단히 빠진 데다가 긴 휴가를 받아서 밖을 떠돌고 있어서 사농시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군요. 내가 대낭자와 안면이 있는 편이라는 거 알고 다들 내게 대낭자를 소개해주길 바라고 있더군요. 그때 내 체면 좀 세워줘요, 대낭자.”
임새옥은 ‘서책에 단단히 빠져 밖을 떠돌고 있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잠깐 멍해졌다가 이내 미소 지었다.
“대인, 무슨 그런 말씀을. 높이 사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예를 올리고 마차에 올라탔는데, 창 너머로 소금남의 우울한 표정이 마음에 걸려서 다시 마차를 멈추고 손짓했다.
이용이 담담하게 웃더니, 넋을 놓고 있는 소금남의 어깨를 치며 속삭였다.
“감사 인사가 아직 남은 모양입니다. 얼른 가서 받으세요.”
등이 떠밀린 소금남이 앞으로 걸어가는 사이 임새옥이 마차에서 내렸다. 소금남은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대관인, 고마워요.”
임새옥은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침묵하던 소금남은 여인을 바라보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고마울 것 없어요. 내가 한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내켜서 한 것이고 다 기꺼이 한 것이니까. 그러니 고맙단 인사는 필요 없죠.”
목소리가 조금 딱딱하고, 언제나처럼 예의 바른 말투도 아니었다. 임새옥은 잔뜩 낙담한 것 같은 사내의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못 보일 모습도 아니고, 말 못 할 것이 뭐가 있나 싶어서 그저 “저도 알아요.” 하고 나지막이 대답했다.
마음이 더 가라앉을 곳도 없이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던 소금남은 여인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왕 안다니, 대답해줄 수 있겠습니까?”
속으로 생각하던 말인데 실제로 내뱉고는, 역시나 얼굴을 붉히는 여인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다. 누가 목을 움켜쥐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임새옥은 조바심 나고 불안해졌다. 타는 듯한 시선에 난처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이게 고백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전생의 그녀는 평범한 외모에 가난한 집안이었고, 학교 다닐 때도 공부만 열심히 했다. 자신의 청춘을 치장할 기분도, 그럴 돈도 없었다. 누가 자신을 주목이나 했을까. 촌티 폴폴 나는 시골 여자애를 누가. 캠퍼스에 넘치는 커플들을 바라보며 한때는 그녀도 꿈을 꿨었다. 언젠가, 키 크고 멋진 남자가 그녀 앞에 서서, 왕자처럼 허리를 숙이고 손을 내미는 모습을. 그러나 그녀는 공주가 아니었다. 신데렐라도 아니었고. 꿈같은 캠퍼스를 떠나 외진 고향으로 돌아가서 곤란한 현실을 마주한 이래 다시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다.
이곳으로 온 뒤, 그 사람이 자신을 품에 안고 고개를 끄덕이며 평생 잘해줄 것이라고 했을 때, 꿈이 이뤄진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런 일을, 다시 시도해야 하나?
임새옥은 갑자기 가슴이 욱신거렸다. 눈물이 한 방울씩 발치에 떨어지면서 흙먼지가 튀었다.
여인의 눈물에 소금남은 놀라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마음 아픈 옛일을 떠올리게 한 건가? 내가 너무 다그쳤나? 당황하고 두려워서 가까이 다가갔다.
멀리서 지켜보던 이용도 뭔가 잘못됐음을 깨닫고 미소를 지우고 다가와서 말했다.
“감사 인사하다가 울긴 왜 울어요.”
임새옥은 허둥지둥 돌아서서 마차로 올라가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소금남을 향해 웃어 보였다.
“대관인, 시간 좀 주시겠어요?”
그 말이 소금남의 귀에는 천둥 벼락처럼 들렸다.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고개를 들었더니, 마차는 어느새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인이 너른 소매를 내밀고 손을 저었다. 손목의 은팔찌가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이용이 소금남 곁으로 다가갔다. 여인이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지만, 항상 변함없던 소금남의 얼굴이 달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
아니, 아니지. 한 번 봤지. 아주 오래전, 아직 애송이였던 소금남에게 제 누이의 서신을 전해 주었을 때. 만개한 목근 나무 아래 서 있던 흰옷의 소년, 그 소년의 얼굴이 바로 나뭇가지 가득 활짝 피었던 목근꽃보다 더 환하게 눈부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