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57)

五. 황 대랑, 달빛 아래 혼인을 묻다

사실 이날 그들은 아직 멀리 가지도 않았고, 심지어 임새옥은 눈을 감고 셋을 세기도 전에 황주가 고함치는 소리에 놀라서 일어난 참이었다. 

“아이고, 큰길을 두고 굳이 우리 쪽으로 비집고 오다니.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가?”

황주가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흥분해서 마차를 두들기며 고함쳤다. 성격 좋은 황옥생도 그다지 좋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두 아우는 벌써 주먹을 쥐고 있었다. 

“대관인?” 

임새옥이 뜻밖이라는 듯 그를 불렀다. 커다란 말을 타고 마차 앞에 서 있던 소금남은 그녀가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돌아서서 웃어 보였다. 

“전가아를 데리러 경성에 가려던 참입니다. 마침 대낭자와 가는 길이 같군요.” 

그 말에 임새옥이 참다못해 얼굴을 찡그렸다. 

원래 가려던 거면 왜 어제 미리 말하지 않고요? 

어쩔 수 없이 황가 부자와 함께 가게 되었잖아요. 내 명성이 좋지 않아서 싫은 거였어요? 

그 생각에 서러워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린 마차도 말도 군색해서 대관인의 일정에 맞추지 못할 거예요. 혼자 가세요.” 

그러고는 임새옥이 휘장을 내리자 황주가 신이 나서 껄껄 웃으며 손을 휘둘렀다. 

“멈춰라, 멈춰. 우린 잠시 멈추고 대관인 먼저 보내드려라.” 

소금남은 그녀의 말과 살짝 붉어진 눈시울에 조금 얼떨떨해졌다. 그는 황주를 상대하지도 않고 말을 몰고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데 꺼낼 수는 없어서 그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보내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그러다가 입을 다물고 고삐를 쥐고 돌더니 호위들을 불러서 대낭자를 호위하라고 하고는 먼저 달려갔다. 호위들이 일제히 대답하는 우렁찬 소리에 깜짝 놀란 마부는 자기를 고용한 황주 나리의 안색을 살필 겨를도 없이 서둘러 채찍을 휘둘러 다그닥다그닥 앞으로 달렸다. 

원망스럽고 서글프던 임새옥은 소금남이 밖에서 한 말을 듣고는 가슴이 뛰어서 후다닥 일어나 앉았다. 

무슨 뜻이야? 

여름날의 뜨거운 바람이 어젯밤 내린 비로 축축해진 진흙 냄새와 함께 불어왔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니까 저 말은…… 나 때문이라는 거야?” 

천천히 그 말을 중얼거린 임새옥은 온몸이 불타는 것 같고, 귓가에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대관인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이고, 대저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보따리를 뒤지다가 대수롭지 않게 묻던 영아는 문득 임새옥의 모습을 보고는 꽥 고함쳤다. 

“매일 밭에 나가고, 오늘은 이 뙤약볕에 길을 떠나서 얼굴이 다 타서 벌게졌네요. 경성에 그 여인이 보면 얼마나 비웃겠어요. 원래 대저아 피부가 훨씬 좋았는데!”

영아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차 휘장을 재빨리 내리며 하는 말에 찬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끓는 물처럼 달아오르던 마음도 돌연 식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느리게 뛰었다 하는 바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텅 비고 ‘그 여인’이라는 말만 귓가에 울렸다. 

“아이고, 대저아! 더위 먹은 거 아니지요?”

영아가 보따리 몇 개를 쌓아서 바람에 마구 휘날리는 마차 휘장을 막았지만, 뜨거운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 대신 마차 안이 더 답답해졌다. 영아는 보따리를 다시 뒤져 금박 부채를 꺼내 펼쳐서 임새옥에게 건넸다. 그런데 임새옥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 듯 양손으로 제 목을 움켜쥔 걸 보고는 혼비백산해서 소리를 질렀다. 양손을 마구 휘두르며 아까 쌓아둔 보따리를 밀치자 보따리가 온 바닥을 뒹굴었다. 휘장이 다시 제멋대로 펄럭이면서 7월의 타는 듯한 뜨거운 바람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 괜찮아. 실수로, 목이 막혀서…….”

정신을 차린 임새옥이 다시 고함치려는 영아를 재빨리 말렸다. 고함에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물을까 봐 후다닥 영아를 잡아서 자리에 앉히고는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 

“잠깐 자면 돼. 깨우지 마.” 

임새옥은 고개를 돌리고는 크고 작은 보따리가 몸에 배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누워버렸다. 

“고급 계화떡인데…….”

영아는 꿍얼거리다가 임새옥이 진짜로 너무 피곤한 듯이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고 그녀 아래 깔린 보따리는 건드리지 못했다. 그녀는 향긋하게 퍼지는 좋은 냄새에 코를 킁킁거리면서 다른 보따리를 정리했다. 

임새옥은 코를 간질이는 달콤한 계화 향기를 맡으며 보따리에 고개를 묻었다.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렸다. 길 떠나 나온 뒤로 지금 이 순간이 되어서야 자기가 어디에 가려는 건지, 누구를 만나게 되는지 의식했다. 

푹푹 찌는 날 움직인다는 건, 뚱뚱한 황주로서는 매우 괴로운 일이었다. 3리만 가도 온몸이 물에 빠진 듯이 축축해졌다. 뜨거운 바람이 두렵지만, 후덥지근한 마차는 더 견딜 수 없어서 마부 옆으로 나가 앉았다. 부채를 휙휙 부쳐대며 쉴새 없이 흐르는 땀을 소매로 닦아댔다. 저 앞에, 이 더운 날씨에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어도 변함없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는 소금남을 보고는 울화가 치밀었다. 

“정말 재수 없군! 눈에 거슬리는 인간이 뜬금없이 왜 나타나! 이 더운 날에 경성으로 가려면 배를 타고 갈 것이지, 배가 없는 것도 아니고 뭐하러 우리 가난뱅이처럼 육지로 가? 돈은 아껴서 구더기 키울 건가?”

꿍얼꿍얼 욕을 퍼부은 황주는 마차 안에 있는 두 아들이 덥다고 옷을 벗고 어깨를 내놓고 있는 걸 보고는 또 욕을 해댔다.

“무른 진흙은 벽을 못 바른다더니! 여기가 집이냐! 며칠이라도 점잖은 척 좀 해라! 네 아비가 이번에 은자를 얼마나 썼는지 아느냐! 다 물거품이 되겠다!” 

두 아들은 화를 내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실실 웃기만 했다. 

“인제 형님이 앞길을 막는 것뿐만 아니라 큰 부자가 떡하니 있잖습니까. 어차피 우리 둘에겐 기회가 올 것 같지 않은데, 뭐하러 그런 고생을 합니까.” 

황주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시선을 소금남에게 돌리고는 울상을 지었다. 

“너희들도 저 부자에게 속셈이 있는 것 같으냐?” 

황가 이랑, 삼랑은 한창 마차에서 신나게 노름 중이었다. 삼랑은 끗발이 좋아서 돈을 따고는 기뻐하며 일어나서 이랑 목에 걸린 새하얀 옥패를 벗겼다. 

“드디어 이걸 따냈네!” 

이랑은 운이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그는 황주가 하는 말을 듣고는 웃는 얼굴로 돌아봤다. 

“아버지, 눈먼 사람도 알아볼걸요?”

황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마차 뒤에서 따라오는 황옥생 쪽으로 몸을 내밀고 손짓하고는 저 앞, 그리고 뒤쪽 마차에 탄 임새옥을 번갈아 가리켰다. 

“대랑, 정신 차려라! 저놈이 대낭자에게 들러붙지 못하게 해라!”

“아버지, 두 사람이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뭘 어쩌겠습니까.” 

황옥생이 빙그레 웃으며 하는 말에 황주의 안색이 잿빛이 됐다. 가슴을 부여잡고 “내 돈!” 하고 외치며 뒤로 넘어가자, 세 아들이 식겁해서 부축했다. 황옥생이 “반드시 정신 차리겠다!”고 몇 번이나 말한 다음에야 황주가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부터 황옥생은 임새옥 마차 곁에 딱 붙어서 물을 건네고, 음식을 전하고, 심심하지 않도록 말을 걸었다. 

소금남은 임새옥이 기운 없어 보이는 데다가 자기가 돌연 내뱉은 그 말도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황옥생이 조심스럽게 정성을 쏟는 걸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7월 초이레 그날이 되었을 때, 일행은 하남부 경내로 들어와서 언릉현을 지나고 있었다. 온 거리에 가득한 걸교절을 축하하는 분위기에, 임새옥도 다른 날보다 훨씬 기운이 있어 보였다. 황 대공자가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소금남도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려고 작은 선물을 사서 건넸다. 

“이게 곡판인가요?” 

임새옥이 손을 내밀어 받았고, 영아도 얼굴을 내밀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나무 판에 흙을 깔고 새싹을 심어놓았다. 나무로 만든 작은 집도 있고, 손가락만 한 사람도 있었다. 눕거나 앉아서 웃고 떠드는 모습이, 그야말로 축소판 농장이었다. 어찌나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저절로 웃음이 났다. 호기심에 새싹을 당겨보면서, 이렇게 재미있는 명절이 왜 나중엔 사라졌을까 탄식했다. 

그녀가 소녀같이 웃음 짓자, 소금남도 봄바람이 가득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가서 일일이 짚으며 설명해 주었다. 흥이 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곁에 있던 황옥생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파로 붐비는 이 복잡한 곳에서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조용히 멈춘 그림 같았다. 황옥생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아우들이 재촉하는 소리에 두 사람을 부르려고 했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어서 손에 남은 화과를 천천히 입가에 가져다 대고 먹고는 말을 끌고 앞질러 갔다. 

임새옥과 영아가 명절 분위기를 좋아하는 듯하자, 오늘 밤엔 성에서 머무르기로 했다. 깨끗한 가게를 찾아 일찍 밥을 먹고, 마당에 채루(彩樓: 경사가 있을 때 뜰에 만들어 세우는 단청 누각)를 세워뒀길래 임새옥은 영아와 함께 가서 구경했다. 영아는 마갈락(磨喝樂: 석가모니의 아들. 칠석에 우랑[견우], 직녀에게 제사 지낼 때 놓는 흙 인형), 수박, 술과 음식, 벼루, 실, 바늘도 사서 가게 마당에 늘어놓고 웃기만 하는 임새옥을 끌고 향을 피우고 제를 올렸다. 

“대저아, 다른 건 몰라도 이건 꼭 빌어야 해요. 요 반년 동안 바느질 솜씨가 더 안 좋아져서 신발 천 하나도 못 만들잖아요!” 

임새옥은 웃기만 했고, 황옥생은 상자 하나를 들고 와 임새옥에게 건넸다. 

“대낭자, 어서 거미 잡아 오세요. 내일 결과를 봐야지요.”

(※한나라 때부터 내려온 풍습. 칠석에 직녀성을 향해 바느질 솜씨가 좋아지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리는데, 거미를 잡아서 상자에 가두고 거미줄이 얼마나 촘촘한지 보고 솜씨가 좋아질지 점을 봄.)

임새옥이 갈 리가 있나. 그녀가 웃으며 손을 내젓자 결국 영아가 달려갔다. 영아가 회랑에서 거미를 한 마리 찾아내고는 임새옥의 손을 잡고 상자에 직접 집어넣게 했다.

“밤에 자지 말고 달을 보고 바늘 꿰세요!”

영아가 정색하고 당부했다. 

소금남은 거처 입구에 서서 담담하게 웃으며 그쪽을 바라봤다.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쓸쓸한 기색으로 ‘난 쓸모없어서 신선도 도와주지 못해.’라고 하는 듯했다. 여인은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소금남의 마음이 아플 수밖에.

달빛이 한쪽으로 기울 때까지 저 밖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잦아들지 않았다. 임새옥은 침상에서 몸을 뒤척였다. 영아가 때때로 코를 골아서 더 잠이 오지 않았다. 아예 일어나서 옷을 걸치고 창가로 다가갔다. 뜰에 달빛이 환하게 비친 걸 보고 잠시 주저하다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탁자 앞에 서서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천천히 실, 바늘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달빛이 아무리 밝아도 대낮만큼은 아니었고 손도 떨려서 한참 만에야 겨우 실을 뀄다. 미신인 건 알지만, 그래도 설렜다. 뒤에서 누군가 안도하는 듯 한숨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됐습니다, 대낭자! 분명 바느질 솜씨가 좋아질 겁니다.” 

임새옥은 황옥생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웃으며 돌아봤다. 

“그렇게 된다면 대공자의 덕담 덕이겠네요.” 

말을 마치고 인사하고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걸음을 떼기도 전에 황옥생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아내가 없는 사람입니다. 감히 묻습니다만, 대낭자, 내 아내가 되어줄 마음이 있습니까?”

이 늦은 시간에 아직 낯선 사내가 이런 걸 물으니, 혼인한 적이 있어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황옥생이 터놓고 이야기할 생각이라는 걸 알기에 더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목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 고마워요. 저는 그럴 마음이 없어요.” 

눈을 살짝 들어 바라봤더니, 황옥생의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스치더니 뒤이어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드디어 그 녀석을 저버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 한마디에 임새옥은 부끄러움이 싹 사라지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었다. 

“마음에 담은 사람이 있으면서, 왜 또 나를 기만한 거죠?”

황옥생을 가리킨 손가락이 떨리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아니네요. 다른 사람 자리를 차지한 건 난데, 어떻게 당신 탓을 하겠어요.”

임새옥을 알게 된 이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셈이었다. 살구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분노하면서도, 여인의 눈빛은 또 처량하고 서글퍼 보였다. 순간 당황한 황옥생은 남녀유별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대낭자. 그야 내가 체면이 안 서서 한 말 아닙니까! 그게 왜 당신을 기만한 건지…….”

그러면서 다급히 말을 이었다. 

“대낭자, 내가 마음이 급해서 말이 헛나온 거지, 대낭자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정을 나눈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되겠다고 했으면 당연히 당신 뜻을 따라서 다른 여인은 두지 않았을 겁니다. 

다만 그 시녀 아이가 오래 내 곁에 있어서, 보기가 미안했어요. 대낭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니, 명분을 줘도 되지 않을까 한 겁니다. 나이가 먹었는데 기댈 곳 없게 둘 순 없으니까요. 그 아이에게 약속부터 하고 대낭자를 찾아온 건 절대로 아닙니다.” 

임새옥은 서둘러 몇 걸음 걸어가 문기둥을 짚으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난 모르겠어요. 당신 마음에 그 여인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하고 혼인할 수 있죠? 다 같은 마음인데, 왜 나는 한 사람밖에 담지 못하는데, 당신은 둘을 담을 수 있죠?”

그 말에 황옥생이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임새옥을 이리저리 살피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대낭자, 대낭자 마음에 내가 있습니까?”

임새옥은 순간 진저리쳤다. 수줍어할 때가 아니라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내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공자가 한 말, 그 의미 말이에요…….”

말을 하면 할수록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서 난감했다. 그런데 황옥생이 푸하하 웃으면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애처로운 시늉을 했다.

“대낭자, 슬프게 했다가 기쁘게 했다가, 제 애를 태우시는군요!” 

그가 크게 웃고 마니, 임새옥도 껄끄러운 마음을 조금 내려놓고 훌쩍이며 먹먹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내들이란……. 누가 그렇게 마음이 오락가락하래요.”

황옥생은 머리를 긁적였다. 부친이 이 일을 몰아세우는 동안, 임새옥에 관한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다 알게 되었다. 지아비가 첩을 들이는 걸 거부하고, 지아비를 모질게 두들겨 팬 바람에 내쫓긴 대목은 부친에게 귀가 닳도록 듣고 훈계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 들어보니 그 첩은 몰락한 가문의 노래꾼 여인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여인이 집에 들어오면 감읍해서 고분고분 순종하며 그녀를 모실 것이다. 하물며 그 여인의 출신도 괜찮다고 들었다. 청루에서 구르다가 나온, 어디 내놓지 못할 사람도 아닌데, 어째서 이 지경까지 난리를 부리고 집에 들이지 않으려고 한 건지, 이 여인의 마음을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드디어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하, 대낭자. 언젠간 그런 사람이 꼭 나타날 겁니다. 하하하.”

황옥생이 머쓱한 듯 웃었다. 사내가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무래도 편치 않았다. 

“나 같은 여인은, 당신 같은 사내들에겐 억지로 보이겠지요?” 

임새옥이 답답한 듯 물었다. 안 그래도 민망해서 대충 둘러대려던 황옥생은 임새옥이 자신을 신뢰의 눈빛으로 바라보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낭자, 너무 급합니다. 마음을 좀 더 쓰고, 고민을 자세히 그…… 흠, 그 누구냐…… 흠, 그 사람에게 털어놓으면, 제 생각엔, 대낭자 같은 사람을 놓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우리 형제도 단순히 부친의 말 몇 마디에 아무 생각 없이 왔겠습니까…….”

정말이지 처음으로 누구에게, 그것도 여인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도 말을 더듬지 않은 자신이 대단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임새옥은 넋이 나간 모양새였다.

“내가 급했다고요? 내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고요?”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또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마음에 그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을 좋아하는데, 내가 할 말이 뭐가 있어요.” 

황옥생은 순간 식겁했다. 이 늦은 밤에 이 여인을 찾아와 혼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다고 내심 후회했다. 하필 이 여인이 수심 가득한 날인 것을. 이걸 누가 보기라도 했다가는 호색한이라는 악명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 달아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비처럼 흐르는 땀에 옷 반쪽이 다 젖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겉옷을 걸친 소금남이 마당 문 앞에 나타난 걸 본 황옥생은 보살이라도 본 듯이 쪼르르 달려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소금남은 주먹부터 휘둘렀다. 임새옥이 저기에 서서 얼굴을 가리고 우는 걸 보고 역시 꿈이 아니었구나 하는데, 황옥생이 당황한 얼굴로 후들후들 달려오는 걸 보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황옥생은 피할 겨를도 없이 생으로 주먹을 얻어맞고는 아파서 씁씁 대면서도 소금남의 팔을 붙잡았다. 

“대관인, 마침 잘 오셨습니다. 얼른, 얼른, 대낭자 좀 설득해 보세요. 대낭자가, 대낭자가 관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고는 발밑에 바람이 아는 듯이 줄행랑쳤다. 

소금남은 멈칫하다가 황옥생이 흔적도 없이 달아난 걸 보고는 반신반의하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여인과 다섯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처마 밑에 꼿꼿이 선 채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양어깨가 쉴 새 없이 떨렸다. 달빛을 걸친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외롭고 서글퍼 보였다. 소금남은 양손에 힘을 꾹 쥐고 물었다. 

“저자가 무례를 범한 겁니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할 수 없이 몇 걸음 다가갔다. 여인이 훌쩍이며 중얼거리는 말이 희미하게 들렸다. 

“난 예쁘지도 않고, 집도 가난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옷도 못 입고, 치장도 못 하고, 머리도 빗을 줄 몰라요. 사람과 교류할 줄도 모르고, 듣기 좋은 말도 못 해요. 그 여인하고 비교가 안 되잖아요. 아무것도 비교가 안 돼요. 이랑, 그래서 날 버린 거지, 그렇지? 내가 그녀보다 못해서.”

그러면서 천천히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쓰러지는 그녀의 모습에 소금남은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소금남이 성큼 다가가 여인을 부축했다. 여인은 덜덜 떨면서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품에 안겨서 중얼거렸다. 

“난 비교가 안 돼요. 미련을 버려야 해요. 그런데…… 왜 어딜 가든 당신 생각이 나지? 처음에 날 보고 웃던 모습, 잘해주던 모습만 생각하면…….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모두 준 걸 생각하면, 나는, 나는 괴로워서 눈물이 나. 그런데 울 수가 없어……. 아버지, 어머니가 보면 마음 아파할 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비웃을 테니까……. 울면 안 돼. 숨어서 울어야 해. 그런데 숨을 곳이 없어……. 죽어야 끝나는 걸까?”

소금남은 누가 마음을 쥐어짜는 듯이 아팠다.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 기억이 끊어졌다가 이어지면서 다시 떠오르는 듯했다. 밤이고 낮이고 다시는 떠올릴 엄두가 나지 않는 그 기억이. 

양옥 그 시녀가 밤에 술을 가져다주러 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모친이 첩으로 들이라고 강요했다. 첩으로 들이지 않겠다고 하니 울고불고 죽네, 사네, 했다. 소식을 들은 혜낭은 문 앞에 서서 말도 없이, 울지도 난리를 부리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 가슴이 타는 듯이 아팠다. 

‘관인, 당신이 다른 여인에게 웃어줄 걸 생각만 해도, 다른 여인에게 나긋나긋 말하는 걸 생각만 해도, 나는, 나는……. 내가 죽어야 더는 마음이 아프지 않겠지요…….’

그녀는 그 말을 마치고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렇게 피를 토한 바람에 산욕열이 심각해졌고, 결국엔 약을 써도 고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니요, 아니에요.”

소금남은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참으며 이 여인을 흔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그런 것 아니에요. 내 말 들어요. 그가 잘해줬던 것, 기억해요. 잘해줬던 것 기억하고, 안 좋은 건 잊어요. 돌아보지 말아요. 돌아보지 않으면 아프지 않아요.”

“그가 잘해줬던 것, 기억하라고요…….”

어렴풋이 그 말을 들은 임새옥은 따라서 중얼거렸다. 글썽이는 눈앞에 여기저기 기운 옷을 입은 소년이 다시 나타났다. 소매를 걷은 그 소년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다가와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화, 참새 잡아먹지 마라.’

눈물이 샘처럼 솟구쳤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데……. 어째서, 마지막까지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죠? 분명, 그러기로 해놓고……. 왜, 그 사람이 아닐까요?”

오늘 같은 밤엔 수많은 이가 기척을 듣고 창틈으로 훔쳐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금남은 그걸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 여인을 품에 더 꼭 끌어안고서 아이를 어르듯 나긋나긋, 느릿느릿 말했다. 

“그건 그 사람이 복이 없어서예요. 그 사람이 복이 없어서. 소화와 함께 나이 들어갈 복이 없는 거죠. 정말 불쌍한 사람이네요. 우리 소화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모를 테니. 하지만, 소화, 소화는 잘 살아야 해요…….”

흔들흔들 달래는 동안, 안고 있는 여인이 흐느끼는 소리가 잦아드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숙여 보니, 그녀는 어느새 지쳐서 잠들어 있었다. 달빛 아래 보이는 얼굴에 눈물이 가득했다. 옥처럼 하얀 이 얼굴을 낮엔 한 번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눈물로 세수한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눈 밑이 거뭇했다. 오랫동안 마음을 끓인 모양이었다. 애틋하기도 하고, 어여쁘기도 해서 손을 내밀어 살며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보드랍고 매끈한 피부였다. 

마침 먹구름이 옮겨와, 온 마당을 비추는 달빛을 가려주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살며시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 복을 내게 줘요. 내가 당신과 함께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마차가 벽돌이 매끈하고 가지런하게 깔린 관도 위를 다그닥거리며 질주했다. 관도 주변엔 모두 거대한 회나무가 자라서, 나무의 울창한 가지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밭에서 불어오는 열풍을 식혀 주었다. 

정오인 이때, 매미 소리가 짙게 들렸다. 임새옥이 드디어 마차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깨어났다. 바람이 휘장을 열어젖히자, 나뭇가지 너머로 내리쬐는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어른거렸다. 눈앞이 아른거려서 손을 들어 눈을 가리는데, 공기에 옅은 꽃 냄새가 느껴지길래 나직이 중얼거렸다. 

“벌써 회꽃이 핀 건가.” 

다른 쪽 창가에 기댄 채 떡을 우물거리며 경치를 보던 영아가 기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대저아. 어쩌면 이렇게 오래 잘 수가 있어요? 의원을 불렀는데 피곤해서 잠든 거라고 해서 망정이지, 출발도 못 할 뻔했어요.”

눈을 떴더니 눈꺼풀이 뻑뻑하고 눈이 부어서 괴로웠다. 목도 쉰 것 같아서 멍하니 한참 생각한 뒤에야 어젯밤 일이 떠올라서 화들짝 일어나 앉았다. 

“그럼…… 황가 사람들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아가 입을 비죽이며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털며 말했다. 

“정말 이상하죠. 우리를 경성까지 데려다준다고 약속해놓고, 갑자기 벼 농사지어야 한다잖아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나. 이른 아침에 가버렸어요.” 

임새옥은 싱긋 웃으며 몰래 혀를 낼름거렸다. 황옥생하고 나눈 말이 생각났다. 아마 식겁했겠지? 

“시기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아. 농사일을 지체하면 안 되지!”

그러면서 직접 배웅하지 못했다니 정말 결례라고 자책하자 영아가 작은 입을 비죽이며 투덜거렸다. 

“하이고. 실례요? 됐습니다. 대저아, 주무시길 잘했어요. 황가가 억지 쓰는 걸 봤으면 기절했을걸요? 대저아, 그거 아세요? 그 말을 딱 하더니, 다른 말은 하지도 않고 마부를 우리 앞으로 밀면서 우리더러 돈 내라잖아요.”

“하하하. 그것도 맞지. 우리가 내는 게 맞지.” 

임새옥은 웃음을 터트리며 속으로 역시 황충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어찌 됐든 적잖게 손해 봤겠지? 마음 아파 죽으려고 하겠네. 

영아가 제 다리를 치면서 말을 이었다.

“그게 다가 아니에요. 황충이 또 뭐라고 한 줄 아세요? 대관인더러 자기들 여비도 다 내래요. 뭐 이상한 말을 하던데, 전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대관인도 참, 마음도 좋으시지, 진짜 줬지 뭐예요! 화가 얼마나 나던지. 제가 저 멀리까지 쫓아가서 욕하고 왔다니까요?” 

임새옥은 배를 잡고 웃다가 대관인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어제 소금남도 곁에 있었던 것 같아서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영아, 나 어젯밤에, 음,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어?”

영아가 소매로 입을 쓱 닦고 손을 털면서 흡족한 듯 말했다. 

“역시, 잠을 너무 많이 주무셨네요. 거리에서 채루 구경하고 돌아가서 잤잖아요.” 

임새옥은 안도하긴 했지만 어쩐지 미심쩍었다. 영아가 참빗을 꺼내고 거울을 비춰주며 머리카락을 빗겨주었다. 자느라 눈도 붓고 얼굴도 부은 모습에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못났다.” 

“정말이네요!” 

영아도 까르르 웃고 있는데 소금남이 밖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대낭자 일어나셨느냐?”

영아가 황급히 휘장을 젖혔고, 임새옥은 얼굴을 보여줄 엄두가 나지 않아서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꼴이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래도 어제 추태를 보인 것 같아서였다. 

“깨셨어요. 배도 고프고요.” 

“그러면 조금만 더 가다가 멈출 곳을 찾아 잠시 쉬자.” 

소금남은 그렇게 말하고는 저도 모르게 여인을 힐끔 바라봤다. 여인이 얼굴을 튼 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어젯밤 일로 민망해서 그런 걸 알고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말을 재촉해서 앞으로 갔다. 

작은 마을에 도착한 뒤, 소금남이 거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가보았지만 죄다 살펴봐도 마음에 드는 점포가 없는 듯했다. 마차 창에 기대서 지켜보던 임새옥과 영아는 도저히 못 참고 입을 모아 그를 불렀다. 

“대관인, 그냥 깨끗한 곳이면 돼요. 또 밥 먹을 것도 아니고요.” 

소금남은 그제야 마음을 바꿔서 깨끗한 다포(茶鋪)를 찾았다. 정오를 지나 한창 더울 때라, 사람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에 있어서 다포엔 쉰 넘은 노파 하나뿐이었다. 낡은 옷차림을 한 노파는 의자에 기댄 채 꾸벅꾸벅 졸면서도 수건은 쥐고 있다가 마차 소리가 들리자 놀라서 깼다. 고급 청사견 장포를 입은 사내가 커다란 말에 탄 채 점포 앞에서 의복이 단정한 시종을 거느리고 서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라서 허둥지둥 맞이하러 나왔다. 

“관인, 차 드릴까요?” 

서둘러 수건으로 의자 몇 개를 닦는데 마차에서 두 여인이 뛰어내렸다. 둘 다 하얀 비단옷을 입고 분을 바르지 않은 얼굴이 피곤해 보여서 자세히 보려는데 대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한 차를 내오게.” 

노파는 재빨리 대답하고 안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진하게 우린 총차(蔥茶) 열 몇 잔 들고나와서 나눠주었다.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데 여인이 등 뒤에서 얼굴 좀 씻을 수 있겠냐고 묻길래 돌아봤더니, 마르고 키 큰 여인이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살짝 붉고 부은 두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예, 예. 낭자, 따라오세요.” 

노파는 대답하고는 허둥지둥 그 여인을 데리고 뒤로 걸어갔다. 

임새옥은 노파의 대야를 빌려 얼굴을 씻고, 작은 거울을 비추며 간단하게 분을 발랐다. 그래도 부은 티가 나자 잠깐 생각하다가, 자기를 몰래 살피고 있는 노파를 바라봤다. 

“대낭, 달걀 두 개만 따끈하게 쪄서 줄 수 있어요?”

“예, 예. 여긴 분다점(分茶店)이라 갖가지 음식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낭자,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로 삶아 올게요.”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여인이 얼굴을 씻고서 피로가 가신 얼굴로 생긋 미소 짓는 걸 보고, 이제야 단정하고 대범해 보이는 것이 저 관인 하고 잘 어울린다고 내심 생각했다. 

임새옥이 가게 뒤쪽에서 나가보니, 영아가 소금남과 같은 탁자에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까르르 웃고 있었다. 같이 가서 앉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데 영아가 보고는 어서 와서 앉으라고 손짓해서 어쩔 수 없이 다가갔다. 

“이틀이면 경성에 도착합니다. 대낭자에게 이야기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여인이 의자를 빼서 맞은편에 살며시 앉는 걸 본 소금남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가다듬었다. 여인이 눈을 들고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는 걸 보고 민망해서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자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들은 건가? 그 생각에 얼굴이 뜨거워져서 말하는 것도 잊고 그 여인을 바라봤다. 

“대관인, 무슨 이야기요?”

탁자에 놓인 과자를 먹으면서 얘기를 기다리던 영아는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자 소금남을 바라보다가, 그가 임새옥을 바라보고 있는 걸 보고 투덜거렸다. 

“대저아는 왜 보셔요? 얼굴을 깨끗하게 안 씻으셨나?” 

영아가 얼굴을 들이밀면서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자, 임새옥의 뺨이 더 붉어졌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숙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행히 노파가 뜨끈뜨끈한 달걀을 들고 다가왔다.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서 받고 감싸서 눈에 대고 빙글빙글 돌렸더니 영아가 궁금해서 난리였다. 

“어머나, 정말로 좋아졌네.” 

달걀을 내려놓으니 임새옥의 눈 밑에 푸르스름한 빛도 한결 가셨다. 영아는 손뼉을 치며 손수건 째 가지고 가서 눈에 올리고 가지고 놀았다. 

“대관인, 하려던 말씀이 뭔데요?”

임새옥은 마음대로 놀라고 내버려 두고 소금남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금남의 시선이 영아에게 향한 걸 보고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그날, 돌려드린다는 게 깜빡했네요. 대관인, 빨아서 돌려드릴게요.”

손수건 가지고 다니는 습관이 없어서 그날 밭에서 소금남의 손수건을 받아서 땀을 닦은 이래 어쩌다 보니 줄곧 지니고 있었다. 소금남이 저렇게 바라보니 더 어색해졌다. 

“그건, 괜찮습니다.” 

소금남은 목을 가다듬고 이 여인을 바라봤다.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새초롬해 보였다. 그날 한 말을 분명 들었을 거란 생각에 기분 좋은 느낌이 마음속에 퍼졌다. 이건…… 허락인 건가?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는데 여인이 소리 높여 “대관인?” 하고 불렀다.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는 여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뜨겁게 닳아 오른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우 대답했다. 

“내가 하고픈 말은, 영아가 혼인하려는 사람이 내 사람이니, 차라리 내가 영아를 데리고 유 노부인을 찾아가 부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래야, 결례가 아닐 것 같아서. 어찌 생각하나요?”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그의 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유가 사람을 만나서 언짢아질 일을 피하게 해주려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되겠네요. 그럼 부탁드려요, 대관인.” 

바로 받아들일 줄 몰랐던 소금남은 놀라서 그녀를 바라봤다. 마음이 복잡한 것 같긴 해도, 웃는 걸 보니 마음이 놓여서 기뻐하며 대답했다. 

“영아를 데리고 나오면 바로 전가아도 데리고 와서 더 머무를 것 없이 강녕으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 

임새옥은 그의 배려가 고마웠다. 하려던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다가 결국 삼켰다. 

차를 마신 다음, 다들 뙤약볕을 견디며 계속해서 길을 서둘렀다. 다행히 가는 길에 나무 그늘이 계속 있어서 덜 고생스러웠다. 

며칠 날씨가 심하게 무더워서, 줄곧 집에 있지 않던 이용도 평소와 달리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매일 자기 집 화원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또 수많은 친지와 벗을 초대하고 성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행수를 불러서 웃고 떠들며 유유자적 보냈다. 

노래꾼을 불렀고 사내 손님도 온지라 집안 여인들은 내원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자니 하나같이 안절부절못하는데, 오로지 동연낭과 월낭 두 사람만이 회랑에 앉아서 조용히 바둑을 뒀다.

“모처럼 노야가 집에 계시는데, 밖에 계실 때보다 얼굴 보기가 힘드네.” 

시첩 하나가 봉선화로 손톱을 물들이며 투덜거리고는 회랑에 앉아 있는 정실부인을 흘깃 바라봤다. 

“다들 성격이 좋다고 하는데, 좋은 게 아니라 죽은 거지. 지금까지 아이도 못 낳고도 초조하지도 않은지. 정말이지 절에 사는 보살 같네. 향불 먹고 살 건가?”

옆에서 쟁반을 들고 떨어지는 즙을 받던 다른 시첩이 그 말에 울분을 토하며 나직이 속삭였다. 

“너도 그만 만족하고 살아.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안 하고 사는데 그만하면 됐지, 뭐가 불만이니? 괜히 말 한마디 잘못해서 염라대왕을 거슬렀다가는 몇 대 맞는 걸로는 안 끝난다. 눈물 쏙 뺄 거야.” 

그 말에 그 시첩이 부르르 떨며 막 물들인 손가락으로 파초잎 아래 조용히 앉아 있는 두 낭자를 가리켰다. 

“다들 봤어? 머리카락으로 덮고 있잖아. 얼마나 때렸는지,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그때 선홍색 배자, 도선 치마를 입은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화랑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그 시첩이 여인 쪽을 손가락질하면서 말했다. 

“그저 노야가 저 애랑 이야기하는 걸 봤다는 이유로 말이지…….”

누군가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부채를 흔들며 천천히 걸어가던 청아가 걸음을 멈췄다. 잎이 겹겹이 자라고 뻗어있는 포도나무 덩굴 너머에 화려하게 차려입고 반짝거리는 장신구를 꽂았지만 외로운 여인들이 있는 걸 보고는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언젠간, 너도 저렇게 될 거야…….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져.”

그렇게 혼잣말하고는 화랑(畫廊)을 이리저리 따라 걸어가 화원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었더니 이용이 얇은 비단 장포만 걸친 채 대홍색 옷을 입은 행수를 정자에 눕혀놓고 입에 정향을 물고 혀로 주고받으며 뒤엉켜 있었다. 재빨리 옆으로 피한다 했는데, 이용이 보더니 행수를 내버려 두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점포 사람 말이, 내일이면 각자문(角子門)에 도착한대요.” 

청아가 샐샐 웃으며 말하다가 이용의 흐트러진 매무새, 드러난 반쪽 가슴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애를 들이면 이제 이런 즐거움을 못 누리실 텐데요. 이야, 뭐 하러 이런 골치 아픈 일을 하려고 하세요?”

이용이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웃었다. 

“그 여인만 있으면 기꺼이 다 버린다. 그럴 가치가 있어.” 

그러더니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청아를 싸늘해진 얼굴로 바라봤다. 

“네가 무슨 방법으로 네 대관인 침상에 올라갈 건지 상관하지 않겠다만, 더 늦어지면…….”

그러면서 뒤쪽을 가리켰다. 행수 네댓 명이 사내 손님들과 시시덕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너도 저런 날을 보내게 될 거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청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손에 쥔 손수건을 찢어져라 비틀었다.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이용이 어느새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사라졌다. 

하늘이 밝아오기 전, 쉴 새 없이 흘러가는 변하엔 이미 배가 빼곡하게 오가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뱃사공들이 입을 모아 영차영차 외치며 힘껏 노를 저으며 화물을 가득 실은 배를 저 멀고도 가까운 경성을 향해 실려 보냈다. 넓은 강가, 고요한 편인 큰길에 임새옥 주종을 태운 마차가 느긋하게 달리고 있었다. 

얼마 후면 이 여인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소금남은 지치지도 않고 말을 재촉에 맨 앞에서 달렸다.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하는 호령 소리와 함께, 꿈을 꾸며 잠든 임새옥이 때때로 미간을 찌푸렸다. 꿈에 갇혀서 안개가 자욱한 곳을 마구 달리고 있었다.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더니, 사람들이 오고 가는데 그녀는 발가벗은 채 큰길에 서 있었다. 

“대저아, 대저아! 가위눌렸어요!”

영아가 얼굴을 찰싹찰싹 때리자, 임새옥이 화들짝 눈을 떴다. 온몸이 땀에 젖었고, 양손은 옷자락을 꼭 쥐고 있었다. 

“성에 안 들어가. 안 들어가. 나 집에 갈 거야!” 

임새옥은 벌떡 일어나 앉아서 초조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마차 벽을 두드리며 고함쳤다. 영아는 깜짝 놀라서 휘장을 젖히고 대관인을 불렀다. 한 번 부르고는 다시 임새옥을 잡고 마구 흔들며 고함쳤다. 

“대저아! 저기 봐요! 저기 봐! 아원이 우릴 마중 왔어요!” 

임새옥은 어질어질해서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눈을 뜨고 밖을 바라봤다. 어렴풋한 아침 안개 너머로 역시나, 밝고 아름다운 도화홍색 상의를 입은 아원이 청남빛 치맛자락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고대 지주> 6권에 계속

고대 지주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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