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싫은 소리를 들은 조 대저, 답답해서 울다
6월 말의 날씨는 강녕부에 있는 임새옥에겐 유난히 무덥고 답답하게 느껴졌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진 걸 보고 문에 붙어서 문틈으로 내다보니 밖을 에워싸던 사람이 보이지 않자 살금살금 문을 열었다. 막 마당으로 나가는데 별안간 재채기가 나왔다.
“어느 천벌 받을 놈이 내 말하는 거야!”
임새옥은 그렇게 꿍얼거리며 코를 문지르고 부엌에 있는 항아리에서 물을 퍼서 마당에 뿌려 열기를 식혔다. 고개를 들어 조롱박 덩굴을 올려다보니, 털이 보송보송한 열매가 열렸길래 아궁이에서 재를 쓸어다가 조롱박 뿌리에 부었다. 그때 밖에서 동동 발걸음 소리가 울리자 화들짝 놀라 덩굴 아래로 몸을 숨겼다.
“대저아, 저예요. 숨지 말아요.”
영아가 문을 열고 들어와 깔깔 웃으며 말하고는 물 항아리로 달려가 물을 한 바가지 퍼서 꿀꺽꿀꺽 마셨다.
“찬물 마시지 마. 안에 끓인 물 식혀 놓았잖아.”
임새옥은 재 묻은 손을 털며 조심스럽게 밖을 살폈다. 농사일을 마친 마을 사람들이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찍 밥 먹는 집은 그릇을 들고 마을 입구 커다란 연못 앞에 쭈그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안개가 가득한 산으로 돌아가는 까마귀도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루가 또 지났네.”
불을 지피고 밥을 하던 영아가 듣고 웃으며 일어났다.
“대저아, 요즘 하루하루 고생이네요. 대저아, 솔직히 말해 봐요. 노야들이 그렇게나 많이 찾아오는데, 그중에 마음에 드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다른 건 몰라도 황 노야 댁 대공자는 괜찮은 것 같던데요.”
임새옥은 얼굴이 붉어져서 혀를 찼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너 밀전 한 봉지 받고 이러는 거잖아. 겨우 밀전에 넘어가서 좋은 말 해주는 거니?”
요즘 임새옥은 생활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관씨현 등 몇몇 곳 현령들의 의도가 드러난 뒤, 강녕현뿐만 아니라 상원현, 심지어 강녕부 관할 모든 현이 떠들썩해졌다. 특히 강녕현은 아예 방을 붙였다. 빈한한 가문에 열여섯에서 스물여섯 사이의 미혼 혹은 처를 잃고 재가하지 않은 아들이 있는 집은 모두 현아에 와서 등록하라고 하고, 사람을 우르르 몰고 와서 임새옥에게 선을 보였다.
임새옥은 놀라서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의 행적은 금세 알려졌고, 다들 집으로 오는 게 아니라 아예 밭에서 기다렸다. 우연히 만났다가 몇 번 되돌려 보낸 뒤로는, 임새옥은 밭에도 못 나가고 집에 숨어만 지냈다. 누가 와도 문도 열어 주지 않고 나가고 없는 척했다.
그렇게 며칠 지내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이 줄긴 했다. 두고 보다 못한 반산 노인이 강녕부에 한마디 해서 이 미친 맞선 촌극이 그제야 진정되었다. 사상 대인에게 질타를 받은 강녕부는 화를 내긴커녕 오히려 기뻐했고, 신이 나서 그 기회로 여기에 눌어붙어 돌아가지 않는 현령들을 내쫓았다. 다만 관씨현의 황주는 강녕부에서 집을 샀고 여행 중이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돌아가지 않았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명성이 안 좋은데, 이 난리가 났으니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며 마당에 앉아 빨래를 했다. 영아가 국수를 밀면서 대답했다.
“대저아, 그건 아니죠. 태후 마마의 뜻인걸요. 다들 저아를 신선처럼 떠받들지 못해서 안달인데, 누가 안 좋은 말을 하겠어요. 설사 있다고 해도…….”
영아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자, 임새옥이 눈을 부릅떴다.
“거봐, 안 좋은 말도 있지? 뭐라든? 넌 매일 돌아다니잖아. 어서 말해 봐.”
영아는 샐샐 웃으며 앞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슥슥 문지르다가 가루를 얼굴에 묻히면서 대답했다.
“따지고 보면 대저아 탓도 아니에요.”
알고 보니, 태후가 빈한한 집을 찾으라고 한 데다가 조 대저가 첩을 들이려는 지아비에게 반대하다가 내쫓긴 걸 다들 알고 있어서, 알아서 성심을 추측한 모양이었다. 조 대저는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는 질투 많은 여인인데, 지금 빈한한 가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중에 시첩, 시녀 한둘 없는 집은 없었다. 그런데 그런 항목이 있으니 처음에는 다들 혀를 내두르며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은을 얻어 올 수 있는, 황제의 하사품을 받은 적 있는 농신 낭자를 포기하자니 아까웠다. 그래서 모진 마음을 먹고 시첩과 시녀를 내쫓는 사람이 늘어났다. 더 심한 집은 아이를 낳은 이낭까지 끌고 가 팔아 버린 집도 있었다. 한둘이 그런 짓을 하면 감출 수도 있겠지만, 다들 한둘 따라 하기 시작해서, 한순간 강녕 각지 거간꾼의 장사가 크게 좋아졌다. 쫓겨난 여인들은 물론 울며 호소했고, 인명 사건까지 일어나는 등 일이 커졌다. 거기에 원래 조건에 부합하는 진짜 빈한한 집들도 억울하니 관아를 찾아가 따졌다. 그런 소식들이 신속하게 퍼지니, 임새옥을 안 좋게 이야기하는 소리도 뒤따라 생긴 모양이었다.
“이건 다 그런 짓을 한 비열한 사람들 문제지,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영아는 반죽을 탕탕 썰며 그렇게 이야기하고 한참 기다려도 임새옥이 대답이 없자 뒤돌아봤다. 임새옥이 양손이 젖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 성큼성큼 다가가 “대저아, 대저아!” 하고 불렀다.
임새옥은 코가 찡하고 가슴에 솜이 꽉 찬 듯이 답답하기만 했다. 영아가 부르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고개를 숙였지만, 그 사이 눈물이 대야에 뚝뚝 떨어졌다.
“대저아, 제가 허튼소리를 했네요. 다른 이야기나 할 것이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니.”
영아가 당황해서 제 입을 탁탁 때렸다.
“맞는 말이야. 그런 생각을 품어선 안 되는 거였어. 법도를 어지럽히고, 사람들의 살길을 끊어놓았잖아.”
임새옥은 눈물을 훔치고 힘껏 빨래를 치댔다. 영아가 원래 별로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라서 뭐라고 달래야 할지 몰라서 입만 내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얼어있다가 겨우 먹먹하게 입을 열었다.
“대저아, 이 지역 사람들 별로예요. 우리를 아내로 맞고 싶다고 해도 혼인하지 말기로 해요.”
임새옥은 쓴웃음을 지으며 빨래를 짜서 다른 대야에 옮겼다.
“지금은 혼인하면 내 잘못, 혼인하지 않으면 더 큰 잘못이야.”
영아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얼떨떨해하다가 솥에 물이 끓는 걸 보고 허둥지둥 면을 삶으러 갔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임새옥은 오래된 낡은 옷을 입고 틀어 올린 원보빈에 비녀 하나만 꽂고 천 신발로 갈아신은 후 괭이를 들고 마당을 나섰다. 북으로 가는 상단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영아에게 소정가를 불러서 숨겨둔 장신구, 옷감을 십방촌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영아는 후루룩 죽을 마시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임새옥이 천천히 나가는 걸 바라봤다.
소가의 밭은 모두 마을 중심 3, 4리 밖에 있었다. 임새옥은 일찍 일어나 일하는 농부들과 인사를 나누며 그리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 오래 걷지 않았을 때, 소금남이 나귀를 끌고 뒤를 따르는 사환과 함께 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뜻밖이었다. 소 노부인이 찾아와서 한 번은 난리를 부리고, 또 한 번은 귀찮게 하고 간 뒤로 소금남은 마치 세상에서 증발한 것처럼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왜 여기서 날 기다리는 거지? 그동안 겪어 본 바로는, 유난히 내 언행을 신경 썼는데……. 부녀자들이 예절을 지키지 않는 걸 제일 싫어하던데, 성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듣고 피하는 건가?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서러워지고 말았다.
“대낭자, 운대를 곧 심어야 하는데, 다른 집은 다 밭을 고르지 않았습니까. 제가 원래 드리려던 그 밭은 다 척박한데, 다른 곳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녀가 다가오는 걸 본 소금남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옷자락을 당기며 시선을 피하느라 여인의 안색이 이상한 걸 깨닫지 못했다.
“밭이 좋으면 수확도 좋다던가요? 그야말로 웃기는 소리네요. 운대는 원래 야생 식물이에요. 기름진 밭에 모시듯 심으면 뿌리부터 썩어요.”
임새옥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상대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소금남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제 앞을 지나가는 여인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봤다. 잠시 주저하다가, 사환에게 천천히 따라오라고 지시하고는 서둘러 여인을 뒤쫓았다. 한참 동안 말도 걸지 않고 느릿느릿 따라가기만 하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황당한 일을 해서, 찾아갈 면목이 없었습니다. 직접 찾아가 사과했어야 하는데…….”
임새옥은 코끝이 찡해져서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당하긴요. 황당한 건 나죠. 다들 절 멀리하는 게 좋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창피하게 눈물이 멈추지 않고 떨어져서 손을 들어 쓰윽 닦았다.
소금남은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는 순간 어쩔 줄 몰랐다.
어머니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어서 화를 내는 것 같긴 한데 또 그게 다는 아닌 것도 같고. 그럼 내가 제때 사과하지 않아서? 그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날 그렇게 신경 쓰는 걸까?
생각해 보면 이씨도 이렇게 툭하면 눈물을 흘렸다.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울기만 해서 어리둥절했었다. 그래서 모친을 찾아가서 한바탕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우는 일이 더 많아지고, 싸울 일도 또 많아지고.
아니면, 다시 가서 어머니와 한바탕 더 해? 그런데 시녀들이 저마다 떠들어대던 이야기로 그날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이 여인은 사람이 좋은 것 같아도 절대로 손해 볼 성격이 아니라서 어머니가 상대도 되지 못했을 텐데? 게다가 성지가 온 걸 보고, 뭐라고 할 겨를도 없이 달아났다고 들었는데.
소금남은 초조해져서 입을 열었다.
“그, 무슨 일입니까? 혹시, 내가 뭘 잘못한 거라면, 그냥 말해요. 나는……. 혹시 누가 눈치 준 거면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밤새 가슴만 끓이던 임새옥은 탁 트인 야외에서 울고 나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는데, 소금남이 뒤에서 황급하게 하는 말에 그가 오해한 걸 알고는 울다 말고 웃음을 터트리며 눈물을 닦았다.
“대관인 문제가 아니에요. 내 마음이 그래서 그래요.”
그녀가 웃자 소금남은 한시름 놓으며 그녀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눈시울은 살짝 붉은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찌푸린 미간에는 수심이 남았다.
“여인네들은 툭하면 울고, 실로 마음을 짐작하기 어렵군요.”
임새옥이 고개를 살짝 들어보니, 소금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어쩌면 좋을지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흔 노인처럼 항상 무표정한 얼굴일 때가 많지만, 사실 이 대관인은 올해 고작 스물예닐곱이었다.
“우리 여인들은 꽃을 봐도 울고 풀을 봐도 울고, 좋아도 울고 화가 나도 울어요. 마음이 열 개 있어도 짐작으론 알아내지 못할걸요?”
소금남은 그 말에 웃음 짓다가 여인에게서 나는 조협(皂莢: 쥐엄나무. 비누 재료) 향이 코를 간질이자 서둘러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울어요.”
소금남이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했더니 여인이 웃으면서 “이러니 말이 안 통하죠!” 하고는 경쾌하게 걸어갔다. 소금남도 천천히 따라가는데 그의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길 양옆으로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이맘때쯤엔 이른 아침에만 살짝 시원할 뿐이라서, 한참 걷다 보니 둘 다 옷이 젖어서 은근히 끈적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탁 트인 야외고 한쪽에 고목이 늘어서 있어서 그늘이 많았다.
“대관인, 여기에 앉아 계세요. 타겠어요.”
임새옥은 돌아서서 나무 밑을 가리키며 생긋 웃고는 자기는 해를 가릴 것이 하나도 없는 밭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에 이미 시든 풀을 뽑아서 쌓아놓았었다.
소금남은 그늘에 서서 그녀가 민첩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멱리라도 좀 쓰지 않고!”라고 하려던 말을 삼켰다. 등 뒤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걸 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서는 팔을 뻗어 나뭇가지를 잔뜩 꺾어서 기억을 더듬으며 서툴게 엮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시든 풀을 완전히 정리한 다음에 소매로 땀을 닦았다. 괭이를 들고 밭을 매면서 때때로 소금남에게 이러쿵저러쿵 말을 걸었다. 전가아는 잘 있느냐고 묻는 말에 소금남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모권(帽圈: 꼭대기는 없고 테두리만 있는 모자)을 들여다보며 외할머니댁에 갔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일어나 밭으로 걸어갔다.
“조금 있으면 더 볕이 쨍쨍해집니다.”
모권을 건넨 소금남은 여인의 살짝 놀란 듯한 시선에 순간 겸연쩍어졌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이렇게 만드는 것 같던데, 잘 만들진 못했죠.”
임새옥은 다소 느슨한 나뭇가지 챙을 보고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세심한 배려에 감격하면서 재빨리 받아서 머리에 쓰고는 고개를 치켜들고 소금남을 향해 웃어 보였다.
“돈을 세는 그 양손으로 이 정도가 어디예요.”
그녀는 챙에 다 가려진 얼굴을 치켜들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울어서 살짝 부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있는데, 그게 왜 그렇게 가슴이 뛸 정도로 보기 좋은지. 소금남의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챙을 건네느라 닿았던 여인의 손가락의 열기가 팔을 타고 심장까지 이른 느낌이었다.
요 며칠, 누가 선을 보자고 그녀를 찾아갔네, 누구는 또 뭘 보냈네, 누구 집 공자는 그녀와 이야기를 길게 나눴네, 하는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었다. 점포에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처럼 괴로웠다. 어떨 때는 찾아가 시원하게 물어볼까 싶어서 밖으로 나가다가, 또 자기 처지에 무슨 자격이 있을까 싶어서 걸음을 멈췄다.
상인 가문에, 상처했고, 자식도 있고.
모친이 찾아가 난리를 부린 적도 있고.
당당한 6품 부인 자리도 내려놓고 마다한 사람인데, 상인의 후처가 될 리가 있나.
그 생각을 하자, 마음속의 열기가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식었다. 그는 억지로 웃어 보이고는 서서히 돌아서서 나무 그늘로 돌아갔다. 갑자기 안색이 변하는 걸 본 임새옥은 빙긋 웃으며 장난도 못 치냐고 생각했다. 소금남이 옷자락을 펼치며 큰 나무 아래 털썩 앉는 걸 보고는 그래도 화를 내며 돌아간 건 아니라서 안도했다. 그녀는 다시 하던 일을 하며 가끔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올해 수확이 어떨지, 비는 얼마나 내릴지, 뭘 심으면 좋을지, 이런 말들이었지만, 소금남은 서늘해진 마음이 서서히 다시 포근해져서 진지하게 들었다.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어서 가끔 질문도 했다. 임새옥은 더 흥이 나서 괭이를 짚은 채 대답했다.
“사실 농사일은 간단해요. 밥 짓는 거랑 같죠. 익히는 건 다 할 줄 아는데, 제대로 하는 건 어려워요. 요즘 사람들은 따라 하는 걸 참 좋아하죠. 운대로 기름 짤 수 있다고 하면 우르르 심잖아요. 하지만 내년 수확은 그렇게 많이 늘진 않을 거예요. 땅마다 결과가 다를 거니까요. 여기 강녕은 5월에 온도가 높아서 운대가 너무 빠르게 여물 거예요. 많은 양을 심었지만, 다른 지방 수확량보다 안 좋을 수도 있어요. 대관인, 날 믿으면 내 말 들어요. 여기서 기다리고 있지 말고, 타지 상인이 들어오면 대관인은 타지로 가요. 분명 큰 수확을 얻을 거예요!”
소금남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농신 낭자인데, 방비할 방법은 없고요?”
임새옥이 힐끔 흘겨보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이 신선에게 절 한 번 하면 방법을 알려드리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금남이 정말로 일어서자, 임새옥이 다급하게 괭이를 내던지며 손을 저었다.
“저기요! 진짜로 여기지 말아요! 수명 줄겠네.”
그런데 소금남은 그저 옷을 툭툭 털더니 옆으로 살짝 옮겨서 다시 앉았다.
“커다란 벌레가 있어서 깜짝 놀랐네.”
임새옥은 멈칫했다가 곧바로 농인 걸 깨닫고 괭이를 들어 올리며 깔깔 웃었다. 여인의 얼굴에 울적함이 싹 사라진 걸 본 소금남도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성 밖 모처에 있는 소씨 가문의 커다란 가택은 오로지 피서를 위해 지은 곳이었다. 정원에 석가산, 인공 폭포, 정자, 누대가 있고, 높이 자란 큰 나무가 하늘을 가리며 넓은 그늘을 만들었다.
지금은 사면에 진주 발을 드리운 비취헌(翡翠軒) 안에서 꽃처럼 단장한 시녀들이 소 노부인과 함께 쌍륙 놀이를 하고 있었다. 사방에 만개한 꽃이 놓여 있고, 시녀 두어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작은 주전자를 들고 물을 주고 있었다. 소 노부인은 그걸 보고는 손은 멈추지 않고 입으로 당부했다.
“얘들아, 허튼짓하지 말아라. 한창 더울 때 꽃에 물을 주면 안 된다. 그거 너희 고내내가 효도한다고 일부러 가지고 온 해외에서 온 보물이다. 말려 죽이면 분명 찾아와서 돈 물어내라고 난리를 부릴 게다!”
시녀들이 까르르 웃는데 저 멀리서 사환 하나가 큰 소리로 고함치며 달려왔다.
“노부인, 돌아오셨습니다!”
사환이 하는 말을 들은 소 노부인은 웃음을 참고 있는 시녀들을 바라보다가 쿡쿡 찌르며 입을 열었다.
“들었느냐? 내 그 어리석은 아들놈 좀 봐라. 언제까지 방에 처박혀 있을 건지 두고 보고 있었더니, 모처럼 가서 하는 짓 좀 보게. 글공부하는 수재 같지 않으냐! 온 성 사람들이 대놓고 혼인 말을 넣는데, 꾸물거릴 겨를이 어디 있다고! 아무래도 이 늙은이가 나서야겠다. 이러다 다른 집에 뺏기지. 저러다가 저놈이 홧김에 배 타고 나가버리면, 이 늙은이 임종 때도 곁에 없겠구나!”
그 말에 시녀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개중엔 살 떨렸던 그 날을 기억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시녀 하나가 노부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노부인, 그 대저아, 성격이 무섭던데, 정말로 들이시려고요? 나중에 며느리 구박받으면 어쩌시려고요?”
소 노부인은 콧방귀를 뀌며 시녀 아이 머리를 콕 찍었다.
“어린 것이 뭘 알아! 전에 있던 아이는 성격은 좋은데, 열 마디 물으면 두 마디 대답할까 말까고, 그중에 진심은 하나도 없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터졌지. 그러게, 대갓집 규수는 싫다고 했거늘. 우리 집에 와서는 콧대를 세우고 눈을 치켜뜨고, 모욕당한 것처럼 굴지 않았어! 흥, 날 불편하게 하는데, 나라고 편하게 두겠느냐? 관리댁 여식이라도 내 앞에서는 며느리인걸! 반평생 산 늙은이가 모진 시어미라는 명성이 두렵겠느냐? 멀쩡히 좋은 날, 죽은 사람 이야기는 왜 하는 거냐!”
그 자리에 있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랬군요. 그 대저아의 괭이질에 노부인 마음이 흔들리셨군요!”
그 말에 소 노부인도 웃었다.
“요 녀석들, 내가 제 발등 찍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그렇게 한창 왁자지껄한 가운데 노부인이 문득 전가아를 떠올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전가아는? 그 아이를 이용해야겠다. 같이 나가게 데리고 와라.”
“며칠 동안 밤마다 울어서, 청아가 외할머니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어제 데리고 상경했어요.”
누군가 대답하는 말에 노부인이 화를 내며 판을 엎었다.
“그 애 아비를 불러와라! 내가 안중에 있긴 한 것이냐! 외할머니는 무슨, 오히려 친할머니처럼 구는구나! 내가 남이 되었어!”
당황한 사람들이 서둘러 달래도 노부인은 꽥꽥 고함쳤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임새옥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일을 멈추고 괭이를 끌고 나무 그늘로 갔다. 소매로 땀을 닦으려는데, 소금남이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는 조금 겸연쩍은 듯이 웃어 보이고는 주저하다가 받았다. 땀을 닦다가 그늘에 잔뜩 자란 목이버섯을 보고는 생긋 웃으며 괭이를 소금남에게 넘겨주고 다가가 따기 시작했다.
“이런 이끼 같은 걸로 무얼 하려고요.”
소금남이 재빨리 고개를 내밀어 보니, 임새옥은 어느새 잔뜩 따서는 옷으로 싸서 웃으며 일어섰다.
“대관인, 다른 일 없으면 집에 와서 식사하실래요?”
임새옥은 옷으로 감싼 목이버섯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집에 돼지고기도 있어요. 볶아 드릴게요. 새로운 거, 맛보실래요?”
그러면 너무나 좋지만…….
소금남은 이 여인의 명성에 좋지 않을까 봐 주저하다가 말했다.
“귀찮게 할까 봐…….”
“그럼 괭이를 들고 가주세요. 그 답례인 셈 쳐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이 손을 저으며 말하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영아도 곧 돌아올 거예요.”
그 말에 소금남은 싱긋 웃고는 정말로 괭이를 짊어지면서 저쪽에서 나귀 풀 먹이던 사환을 불렀다. 나귀에 타라고 했는데 임새옥이 손을 저으며 그렇게 지치지 않았다고 걸어가면 된다고 거절하자 더 강요하지 않았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를 따라가는데, 여인은 가는 내내 재잘재잘 떠들었다. 소금남은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듣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대낭자, 언짢은 게 있으면,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내게 말해요.”
앞에서 걸어가던 여인이 멈칫하더니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는 알겠다고 대답하는 것 같더니, 돌아보지도 않고 잠시 더 걷다가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대관인.” 하고 나지막이 하는 말이 들렸다. 낮고 부드러운 그 목소리에, 소금남은 누가 양손으로 제 목을 움켜쥔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소금남은 사환이 나귀를 문 앞에 매어둔 걸 본 다음에 임새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있는 조롱박 덩굴 아래 의자와 작은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엔 도자기 병도 놓여 있는데, 들꽃이 꽂혀 있는 걸 보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임새옥은 목이 버섯을 대야에 불리고 손을 씻은 다음에 소금남에게 편하게 앉아 있으라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흰색 갈옷을 입고 깨끗한 신을 신고 나왔다. 무슨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밖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울타리 너머로 큰 말, 작은 말, 두 마리가 문 앞에 와서 서는 게 보였다. 소정가가 영아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작은 말에서 내리는 게 먼저 보였고, 다른 말에서도 푸른 옷을 입은 사내가 뛰어내렸다. 얼굴이 하얗고 청수한 사내를 유심히 본 임새옥은 전에 한 번 봤던 황 대공자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봤다.
그동안 무슨 방법을 쓴 건지, 영아가 황 대공자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나갔다 돌아오면 무심결인지 어떤지 자주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임새옥도 사내의 이름이 황옥생이고, 올해 스물여섯, 글공부해서 글을 알고 목공 일을 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영아에게 공을 들이곤 있어도, 제 아비와 다른 사람처럼 무례하게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온 적은 없었다. 그래서 임새옥도 나쁜 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찾아왔을까?
임새옥이 잔뜩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조롱박 덩굴 아래 앉아 있던 소금남도 벌써 일어나 있었다. 영아와 소정가부터 훑어보던 시선이 마지막엔 따라 들어온 젊은 사내에게 향했다. 그도 아는 사람이었다. 요즘 자주 자기 점포에 와서 물건을 사는 사내. 물론, 보통은 영아가 소정가를 만나러 올 때였다. 같은 북방 사람이라서인지, 영아는 그가 하는 말도, 내주는 먹거리도 아주 좋아했다. 서서히 영아의 입에서 이 황 대공자의 이름이 나오는 빈도가 높아졌다. 심지어 하루는 소금남도 있는 자리에서 이 관사가 ‘조 대저가 저 공자를 점찍은 것이냐?’고 영아에게 묻기까지 했다. 심장 박자가 어긋나는 느낌이었다.
‘음, 대공자는 좋은 분이에요. 제 생각엔 대저아도 마음 들어 하실 거예요. 여기 사람들은 다 너무 나빠요. 대저아가 왜 여기서 살겠어요!’
‘하, 그럼 영아 너도 따라서 돌아가겠구나. 우리 남쪽 사람인 소정가도 필요 없겠구나?’
이 관사가 손뼉을 치고 웃으며 물었었다.
입에 가득 먹을 걸 넣고 오물거리며 말하던 영아는 먹던 게 목에 걸려서 콜록거리다가 ‘그만 좀 놀려요!’ 하고 꿍얼거리면서 콩콩대며 돌아갔다.
영아와 소정가의 경사가 다 된 밥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정가의 부모도 이미 만났고, 몹시 흡족해해서 이제 영아가 노비 문서를 돌려받고 양민 신분으로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아이고, 아이고 역시 착실한 사람이군.’
이 관사가 소금남 곁을 맴돌며 중얼거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마음이 번잡하던 소금남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대관사, 한가한가? 선박이 내일 도착하는 거 아닌가?’
소금남이 장부를 든 채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거꾸로군요.’
대관사가 헛기침하며 하는 말에 소금남은 영문을 몰라 하다가, 이 관사가 웃으며 손가락질할 때야 제가 장부를 거꾸로 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평생 그렇게 부끄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지금, 황 대공자는 임새옥을 향해 공수하며 안부를 물었고, 임새옥은 영아가 엉엉 울며 달려오는 바람에 그가 왜 찾아왔는지 가늠하는 걸 잠시 멈추었다.
“대관인, 여기 계셨군요.”
황 대공자는 시선을 소금남에게 옮기고 웃으며 예를 갖췄다. 얼굴이 하얗고 청수한 황 대공자의 얼굴에서는 문인과 농민의 기질이 동시에 느껴졌다. 말하자면 청수하면서도 순박하고, 우아하면서도 호쾌함이 느껴지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인품도 겉모습처럼 좋다면, 보기 드문 좋은 짝이라고 봐도 좋았다. 소금남은 입 안에 퍼지는 씁쓸함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뒤이어 영아가 울며 하는 말에 모든 이의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대저아, 날 놓아줄 생각이 없으니 돌아오라고 하면요? 난 돌아가기 싫어요.”
영아는 계속 울었는지, 목소리가 다 쉬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울지 말고 제대로 이야기해 봐.”
임새옥은 영아를 진정시키려고 어깨를 두드려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아는 우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전혀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할 수 없이 소정가를 바라봤다. 소정가도 마찬가지로 울상이었다. 소정가가 눈살을 찌푸린 채, 어떻게 관아 사람을 만났는지, 유가 소식을 어떻게 들었는지 설명했다. 영아더러 당장 경성으로 돌아오라고, 집에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소식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할 사람이 왜 부족해?”
임새옥은 눈살을 찌푸렸다. 화가 났다.
유가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 웃기는 소리! 아무나 사면 될 것을, 굳이 영아더러 돌아오라고? 무슨 속셈이야!
자기 서신을 보냈는지 소정가에게 물었더니, 소정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진작 보냈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안주인에게 직접 건넸으며 심부름 값도 받아서 돌아왔더라고 말했다.
“심부름 값?”
임새옥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사는 게 팍팍한데, 유씨가 서신을 전한 사람에게 심부름 값을 줄 리가 없었다.
“누구한테 전했대? 젊은 여인? 아니면 나이가 좀 있는 사람?”
“음, 젊은 분입니다. 잘 차려입고 통도 컸답니다. 걱정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했답니다.”
“이게 무슨 짓인 거야!”
임새옥은 순간 화가 나서 영아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울지 마. 바로 경성으로 가자. 내가 직접 가서 받아올게. 안 준다고 하면, 돈 내고 사 오면 돼.”
“죽어도 안 된다면요.”
영아가 코를 훌쩍이며 말하자, 임새옥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진 않을 거야. 설사 오기를 부리는 거라고 해도, 그래, 부리라고 해. 화 풀릴 때까지 부리라지.”
임새옥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영아는 그제야 마음이 놓여서 임새옥에게 등 떠밀린 채 얼굴을 씻으러 갔다. 그때 황 대공자가 곁에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바로 가서 마차를 빌려서 제가 직접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곁에 있던 소금남도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황 대공자에게서 떨어져 임새옥에게로 향했다. 임새옥은 미간을 문지르며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의아한 눈빛으로 황 대공자를 바라봤다.
“황 대공자셨죠?”
서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티를 내는 그녀의 태도에 황 대공자가 다시 공수하며 웃어 보였다.
“예, 맞습니다. 강녕은 아는 사람도 없고 낯설어서 가볼 만한 곳을 찾느라 종종 영아 대저아에게 도움받았습니다. 오늘도 마침 만났는데 울면서 경성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길래 까닭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낭자의 의중을 여쭤보려고 일부러 온 것입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송구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예를 갖췄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게다가 영아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또 오늘은 왜 찾아왔는지 두어 마디로 설명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접근할 생각으로 엉큼하게 일부러 영아에게 잘 보인 게 아님을 암암리에 드러내는 그 말에 임새옥도 서둘러 답례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소금남을 힐끔 돌아봤다. 의중을 묻는 듯한 그녀의 시선을 갑자기 마주한 소금남은 가슴이 철렁했다. 입을 떼려는데, 또 그 황 공자가 먼저 가로챘다.
“대낭자, 내일 출발하면 어떻겠습니까?”
임새옥은 머리를 긁적였다. 눈이 팅팅 부은 영아, 그리고 눈시울이 붉어진 소정가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수고 끼칠게요, 황 대공자…….”
“그렇게 내외하지 마십시오. 그럼 바로 가서 준비하지요.”
황 대공자가 웃으며 곧바로 돌아서자, 임새옥이 허둥지둥 쫓아나갔다.
“마차만 알아봐 주시면 돼요. 우리끼리 돌아갈게요. 대공자에게 수고 끼칠 수 없어요.”
황 대공자는 말 위에서 싱긋 웃기만 하고는 대답도 하지 않고 말을 재촉해 돌아갔다. 답답해진 임새옥이 느릿느릿 돌아서는데 소금남이 벌써 사환을 부르고 있었다.
“대낭자,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요. 그……, 소정가에게 시키면 되니까.”
임새옥은 이마를 짚으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음식 대접하려고 했는데, 다음에 해야겠네요.”
소금남도 웃으려고 억지로 입꼬리를 실룩여 보는데, “며칠이면 돌아와요.” 하는 임새옥의 말에 어쩐지 서러워지고 말았다. 그래요, 하고는 고개를 숙인 채 나귀도 타지 않고 성큼성큼 나와서는 한참 멀어진 후에야 뒤돌아볼 엄두가 났다. 어느새 밤안개가 뒤덮은 작은 집에 노란 불빛이 보였다. 길가의 버드나무를 주먹으로 내리쳤더니 나무에 있던 새가 놀라서 꽥꽥대며 푸드덕 날아갔다.
7월 초이틀, 어제 내린 반가운 비로 오늘은 날씨가 꽤 서늘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임새옥은 큰 보따리, 작은 보따리를 마차에 올리고 있는 소정가의 모친 설씨를 다급하게 말렸다.
“대낭, 됐어요. 며칠이면 도착할 건데 뭘 이렇게 많이 가져가요.”
올해 서른 남짓한 설씨는 강남 물의 고향 여인 특유의 마른 몸매였다. 얼굴이며 손에 거친 일을 한 흔적이 없었다면 몇 살 더 어려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두 사람을 경성으로 쫓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미안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임새옥의 손을 잡았다.
“대낭자, 영아는 흠잡을 게 없는 아이예요. 정말이지……. 대 낭자, 그러니까…….”
임새옥은 마음 놓으라는 듯이 웃어 보이며 잘 안다고 대답했다.
시간도 이르지 않고, 말을 탄 황 대공자, 그리고 얼굴에 기름기 번질번질한 황주가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여 돌아가게, 돌아가. 우리가 직접 배웅하는데, 우리가 대낭자를 굶기기라도 할까 봐?”
황주가 하는 말에 분위기가 껄끄러워지려는데, 다행히 황 대공자가 곧바로 황주를 말리고는 쓸데없는 말 하지 못하게 마차로 밀어 넣었다.
“됐다. 얼른 다녀오자.”
임새옥은 소정가와 손을 잡고 마주 보며 눈물 흘리고 있는 영아를 향해 헛기침했다. 설씨가 재빨리 다가가 영아 손을 잡고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아무거나 먹지 말고, 주인을 보면 고개를 조아리고 빌라고 당부하며 마차에 밀어 넣었다. 친딸처럼 대하는 모습에 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대낭도 너무 힘들게 일하지 마시라고 당부하는 영아를 보며, 임새옥도 코가 찡해져서 마차에 타려고 돌아섰다. 황주가 사 온 시녀 셋이 다가와 부축하려고 하길래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가서 노야 시중이나 들어.”
곁에서 그 말을 들은 황옥생이 말을 몰고 다가왔다.
“대낭자는 조용한 걸 좋아하시니 너희들은 뒤쪽 마차에 가라. 부르면 그때 와서 시중들고.”
시녀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갔다. 임새옥은 이들이 굳이 동행한다고 우기는 게 몹시 불만이었다. 하지만 여인네 둘이 길 떠나는 것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좋아해야 할지 언짢아야 할지 모를 마음으로 서 있으니, 황옥생이 그 마음을 알아보고 싱긋 웃었다.
“대낭자, 제가 괜한 참견했다 싶은 거지요? 단둘이 보낼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대낭자, 언짢으면 소생을 대놓고 욕해도 됩니다.”
결국 임새옥도 웃고 말았다. 시원시원한 사람 같고, 솔직히 말하고 나면 들러붙어 억지를 부릴 것 같지 않아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하면 제가 어린애 같잖아요.”
문틈 새로 바라보던 황주는 얼굴 살이 떨릴 정도로 웃으며 곁에 있는 두 아들을 쿡쿡 찔렀다.
“봐라, 네 큰형이 유능한 사람이라고 했지? 네 형과 재산 다툼할 생각하지 말아라. 너희들은 집안이나 말아먹지.”
그 말에 아들들이 모두 웃었다.
“그야 아직 모르지요. 형님이 매일 우리는 못 나가게 했잖습니까. 함께 가다 보면 얼굴 마주칠 기회도 많을 거고, 대낭자가 누굴 마음에 들어 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황주가 헤헤 웃으면서 줄줄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대낭자가 누굴 마음에 들어 하든 상관없다. 너희 셋 중에 하나면 돼.”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늘을 뒤흔드는 거마 소리가 들렸다. 마차 바닥까지 흔들릴 정도의 기척에, 마차에 탄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휘장을 젖혔다. 말들이 달려오고 있는데, 그중엔 호화로운 큰 마차도 있었다. 다행히 땅이 젖어있어서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지는 않았다. 마차가 가까워지자, 임새옥을 비롯한 모두가 눈을 찌푸리고 바라봤다. 마차에서 화려한 장식, 눈부신 옷차림의 시녀 네댓 명이 훌쩍 뛰어내리더니, 진주관을 쓰고 붉은 비단옷을 입은 소 노부인을 부축했다.
“아이고, 노부인 오셨네.”
상대가 누군지 확인한 설씨가 허둥지둥 맞이하러 갔다.
점잖으면서도 화려하게 치장한 노부인이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려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걸 본 임새옥은 주저하다가 결국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임새옥은 꽤 뒤끝 있는 성격이었다. 특히 이 노부인을 볼 때마다 ‘방탕한 것’이라는 말이 떠올라서 생각할수록 이가 갈렸다. 물론, 이 미움의 일부는 이씨를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사리 밝은 미인이 시어머니에게 핍박받아 가출까지 했으니,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도 시어머니 구박 때문일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소 노부인이 손을 휘두르며 날 듯이 튼실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대낭자, 꼭 돌아와야 하네. 우리에게 빚진 운대를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난감해했고, 임새옥은 숨이 턱 막혀 콜록거릴 뻔했다.
내가 착각한 거였어? 배웅하러 온 게 아니라, 빚 받으러 온 거였어!
설씨가 벌써 다가가서 공손한 모습으로 상경하는 연유를 설명했지만, 소 노부인은 다 듣기도 전에 손을 저었다.
“그런 건 난 모르겠고! 대낭자, 이 늙은이는 다른 사람이 하는 말 절대로 안 믿네. 미리 말해두는데,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임새옥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한 말은 당연히 기억합니다!”
소 노부인을 에워싼 시녀들도 저마다 노부인 편에 서서 재잘거리는 바람에 임새옥은 머리가 윙윙 울렸다. 어음을 쓰자는 사람, 문서로 남기자는 사람, 달아나지 못하게 자기가 따라가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임새옥은 울어야 좋을지 웃어야 좋을지 몰랐다.
이 사람들, 이거 진심이야, 농담이야?
정색하고 소 노부인을 바라봤더니, 노부인도 진지한 얼굴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는 씨익 웃었다.
“아니면, 대낭자, 이 늙은이에게 문서 하나 남겨주고 가겠나?”
영아가 바로 콧방귀를 뀌며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소리쳤다.
“꿈도 크시네요! 우리 대저아가 빚진 것도 없는데 무슨 문서를 남겨요! 아예 노비 문서를 쓰자고 하시죠?”
“어머, 말주변 좋은 것 봐.”
“설 대낭, 대낭 며느리가 될 아이죠?”
“아이고, 이러다가 소정가 잡혀 살겠네.”
소가 시녀들이 금세 일제히 떠들어댔다. 영아를 상대하는 게 아니라 설씨와 소정가를 놀리는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얼굴이 시뻘게졌고, 화가 난 영아도 입을 잔뜩 내밀 뿐 더 뭐라고 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겁에 질려 심장이 쿵쿵대던 황주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뚱뚱한 몸을 흔들며 달려 나왔다.
“운대 몇 묘 아닌가. 기름을 뭐 얼마나 짠다고. 대낭자, 근심거리도 아니네. 내가 우선 돈을 드리지요. 기름값은 충분할 겁니다! 쩨쩨하게 대낭자를 붙잡지 마시지요.”
황주가 그러고는 옷을 더듬더니 커다란 붉은 전대를 꺼내 소 노부인 앞에 흔들었다. 소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더니 체면도 차리지 않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더 좋지. 황금 열 냥이네.”
황주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머릿속으로 전대 안에 든 돈을 가늠해 보았다.
“이 노부인이, 무슨 미친 소리를 합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시녀들은 꾀꼴꾀꼴, 지지배배, 가느다란 손가락을 흔들어댔다.
“아이고, 이 촌사람.”
“우리 노부인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에요!”
“황금 열 냥이 어때서요? 내 손에 낀 이 반지가 그보다 더 값나가는걸요? 본 게 없으니 이상한 게 많을 수밖에!”
황주는 식은땀이 줄줄 나서 펄쩍 뛰며 욕을 하려고 하다가 노부인의 차림을 살폈다. 그녀 뒤에 옹골지고 커다란 말들, 모두 명마였다. 커다란 마차, 네 자락에 드리운 보석 장식,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생각에 자신이 없어졌다.
황옥생이 그때 앞으로 나서며 제 아비를 뒤로 당기고는 노부인을 포함한 모두를 향해 공수했다.
“양해해주십시오. 우린 시골 사람이라 귀한 것을 몰라보고 소 노부인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임새옥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시녀들을 노려봤다.
“나, 조 대저, 돌아온다면 돌아와요! 소 노부인, 마음 놓으세요!”
“마음이 안 놓이는데 어쩌지?”
소 노부인이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같이 가시던가요!”
소 노부인이 빌빌 웃으며 힘껏 때리는 바람에 임새옥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농담한 걸세. 대낭자, 진짜로 여기지 말게. 믿지, 암, 믿지.”
임새옥은 정말이지 할 말이 없어져서 씩씩대며 돌아섰다.
“가자, 가. 괜히 시간 낭비했어.”
그녀가 곁에서 같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영아를 잡아당기자, 황주가 재빨리 맞장구쳤다.
“그러게, 그러게. 늦으면 더 더워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 노부인이 노려보자 합, 입을 다물었다. 이런 노부인을 본 적이 있어야 말이다. 그동안 만나본 관리(현령 대인)보다 훨씬 매서운 그 눈빛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몇 걸음 만에 마차에 올라탔다.
“대낭자, 조심해서 가게. 꼭 돌아와야 하네.”
소 노부인이 손을 흔들며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임새옥은 하려던 말을 꿀꺽 삼키고 영아를 따라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출발하는데, “저 사람들이!” 하는 황옥생의 목소리가 들려서 밖을 내다봤다. 소 노부인을 따라서 명마를 타고 온 사람들이 마차 주변에 흩어져서 따라오고 있었다. 모습을 보니 함께 가려는 듯했다.
“거기 젊은이, 대낭자는 여인네인데, 이 늙은이가 어떻게 사내들과 함께 보내겠나. 남녀가 같이 다니다가 대낭자의 명성에 누 끼치면 어쩌려고!”
소 노부인이 황 대공자를 노려보며 하는 말에 성격 좋은 황옥생은 못 말린다는 듯 웃을 뿐 더는 따지지 못했다. 소 노부인은 머리를 내밀고 있는 임새옥을 향해 웃으며 손을 저어 보였다.
“대낭자. 무서워할 것 없네. 저들은 다 우리 소가의 호위일세. 대낭자를 편히 모실 걸세. 얼른 돌아오게. 돌아오지 않으면 저들이 따라다닐 걸세!”
임새옥은 고맙던 마음을 다시 접고서 휘장을 휙 내렸다.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저 노부인, 강도 출신 아니야? 어쩌면 말이며 행동이며 이렇게 괴이해? 정말, 정말…… 재미는 조금 있네.
결국 임새옥이 웃음을 터트리는데, 영아는 밖을 향해 투덜거렸다.
“저 노인네, 무슨 생각이래요. 우리가 도와주는 건데, 빚진 것처럼. 도둑 취급하네.”
임새옥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휘장을 열었다. 점점 멀어져가는 소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 아니야. 호의로 그러는 거야.”
황가 부자와 비교하면 지금 주변에 나타난 사람들이 더 낯선데, 어째서인지 오히려 막 길을 떠났을 때보다 더 마음이 놓였다.
내가 소가 사람들을 가족처럼 여기는구나. 정말 뻔뻔하다!
임새옥은 저 자신에게 혀를 찼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비스듬히 누워서 마차가 흔들리는 걸 따라 서서히 눈을 감았다.
소 노부인은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던 표정을 거두고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노부인, 우리 사람을 받았잖아요. 안심하세요.”
한숨 소리를 들은 측근 시녀가 웃으며 달래자, 소 노부인이 콧방귀를 뀌며 돌아서서 손가락질했다.
“다들 봐라, 내 그 멀쩡한 아들놈 좀 보라고. 매일 날 찾아와서 따질 때는 기세등등하더니, 다른 사람 앞에서는 꿀 먹은 듯이 입 다물고 있는 모양이지! 며느리를 데리고 집 나가던 기세는 어디로 가고? 요즘은 매일 집에서 술이나 마시지 않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 쪽에서 바람을 몰며 달려온 검은 말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대로 지나치는가 싶더니 말에 탄 자가 급히 고삐를 당겨서 돌아왔다.
소 노부인과 시녀들은 갑자기 불어닥친 뜨거운 바람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는 한참을 기침해댔다.
“어머님, 다들 왜 여기에…….”
하얀 비단 장삼에 눈에는 안의(眼衣)까지 쓴 소금남이 얼굴을 굳히며 말하다가, 곁에 서서 문안 여쭙는 소정가를 보고는 모친이 여기에 온 까닭을 곧바로 깨달았다. 조금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시커멓던 얼굴이 조금 붉어져서는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저는, 전가아를 데리러 갑니다. 아무리 그래도 생일은 집에서 보내야지요…….”
소 노부인은 콜록거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곁에 시녀가 내미는 지팡이로 검은 털이 반질반질한 준마를 툭툭 쳤다.
“진지한 일에 잔소리가 많구나. 언제 출타할 때 이야기한 적 있더냐? 항상 화분 아래 서신을 끼워두었으면서! 돌아가면 알아서 볼 것을! 뭘 여기서 길게 늘어놓아!”
노부인의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준마가 발굽을 치켜들며 길게 울었다. 다행히 소금남이 고삐를 꽉 잡은 데다가 어릴 때부터 길들인 말이라 떨어지지는 않았고,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앞으로 튀어 나가서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얘들아, 마차를 준비해서 임안에 놀러 가자꾸나!”
기분이 좋아진 소 노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싱글벙글해서 하는 말에 시녀들이 손뼉 치며 좋다고 외쳤다. 노부인을 마차에 부축해 태우는데 당부하는 말이 들렸다.
“고내내 셋도 잊지 말고 불러라. 괜히 집에 남겨두었다가 점포에 가서 소란 피울라.”
시녀들은 일제히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신분에 따라 자기가 탈 마차를 타고 떠들썩하게 성으로 들어갔다. 마부가 긴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재촉했다. 길 가던 행인들이 일제히 마차를 피하다가 휘장이 활짝 열린 틈 사이로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이 선홍빛 손톱을 드러내며 거침없이 웃고 떠드는 걸 보고 멈칫했다. 저 멀리서 성으로 들어오던 행인들이 저마다 이러쿵저러쿵 물어대자, 누군가 듣더니 비웃듯이 이렇게 말했다.
“촌스럽기는! 우리 강녕에서 해외에서 들여온 큰 진주를 마차에 달 사람이 몇이나 되겠소? 진주를 흙처럼, 금을 철처럼 여기는 건 소가뿐이오! 그리고 그 댁 노부인이나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마차를 달리는 걸 좋아하시지!”
지금은 걸교절(乞巧節: 칠석)이 가까워진 시기라서 오가는 방물장수 모두 과등(瓜燈)을 짊어지고서 바글바글한 인파를 따라 번화하고 부귀한 강녕부로 향했다.
경성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임새옥 역시 같은 광경을 보는 중이었다.
“대저아, 이것 드시겠습니까?”
말을 끌고 마차 곁을 걷던 황옥생이 요술을 부리듯이 화과(花果) 두 개를 꺼내서 건넸다.
마차 창문 밖으로 거의 허리까지 몸을 내민 영아는 아까부터 과실을 파는 노점을 가리켰다. 벌꿀을 덮은 붉은 열매가 다양하게 꽂혀있는 모습에 군침이 돌아 침을 꼴깍 삼키면서.
임새옥은 거리를 뒤덮을 듯이 널린 오색 천막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나무 천막도 있고 삼대를 엮은 천막도 있고, 크기도 저마다 달랐지만, 모두 색색이 칠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보니 알록달록한 것이 몹시 예뻤다.
임색옥이 ‘중국에 이렇게 떠들썩한 명절도 있었구나.’ 하고 중얼거리느라 군침 삼키는 영아를 거들떠볼 겨를이 없었는데 황 대랑이 화과를 건네자 재빨리 받은 영아는 벌써 한입 크게 먹고는 입가에 벌꿀을 잔뜩 묻히고 있었다.
“계속 먹어대면 새끼돼지처럼 포동포동해질 거야. 그래도 소정가가 좋다고 할까?”
임새옥이 손수건을 건네며 영아의 이마를 톡톡 쳤다.
“대낭자도 맛보세요. 살쪄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황 대랑이 힐끔 바라보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농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를 노려보려고 눈을 치켜들다가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 사내에게 아무런 마음이 없지만, 저도 모르게 뺨이 붉어졌다. 뭐라고 해야 좋을지도 몰라서 그냥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소금남이 곡판(谷板: 송나라 칠석에 민간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장식품)을 들고 사람들을 비집고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녀가 바라보자, 평소와 다르게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는 모습에 임새옥은 식은땀이 삐질 흐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