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57)

희녕 10년 6월 말, 때마침 내린 비가 며칠 내내 후덥지근했던 경성의 더위를 식혀 주었다. 재상의 저택은 모두 황제가 하사한 것으로, 경성에서 가장 좋은 구역에 있었다. 집채가 겹겹이 놓이고, 정자, 누각, 꽃, 나무, 바위가 가득했으며, 정원의 만발한 꽃들이 나비를 불러 모았다. 

곱게 단장한 한창나이의 일고여덟 여인들이 웃고 떠들며 회랑을 거니는 모습은 그야말로 산들바람에 꽃가지가 파르르 흔들리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 여인들은 모두 재상가의 시녀들로, 막 오후가 지난 때라 노부인 낮잠 수발들러 가는 길이었다. 시녀들은 아원이 밖으로 나가는 걸 멀리서 보고 입 모아 그녀를 불렀다. 

“언니, 어딜 가요? 노부인 거처에서 바둑 둘 건데 같이 가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니. 요 수다쟁이들, 얼른 신발 천 만들어내지 못해?” 

아원이 웃으며 하는 말에 시녀들이 까르르 웃으며 일제히 말했다. 

“언니 욕심쟁이 아니에요? 심 부인이 경성을 떠나기 전에 그렇게 큰 가택을 남겨주었잖아요. 이제 언니도 작은 부호인 셈인데, 어디 내놓을 수준도 안 되는 우리 신발 천을 아직도 욕심내요? 나중에 언니 집에 가서 술 몇 항아리는 비울 거예요!” 

아원은 그저 웃기만 하고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대체 어디 가는 거예요? 미리 말해두는데, 혼인하기 전엔 낭군을 만나면 안 돼요!”

아원은 그 말에도 상대하지 않고 후원을 벗어났다. 안쪽 서재를 지나니 정원에 자미화가 활짝 피었고, 꽃필 시기가 지난 석류나무에 몇 송이 남은 붉은 꽃은 비에 젖어 더 농염해 보였다. 

“아원아!” 

서재에서 일상복을 입고 앉아 있던 재상 왕규가 창가에서 시권(詩卷)을 읽고 있다가 아원이 지나가는 걸 보고 손짓하며 불렀다. 아원이 재빨리 다가가 예를 갖췄다. 

“대인.”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재상이란 고위 관직에 16년이나 있으면서, 취지(取旨), 영지(領旨), 득지(得旨) 하는 삼지상공(三旨相公)이라고 조롱받는 왕규 대인은 집에 있을 때도 조정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수가 적고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었다. 

(※삼지상공三旨相公: ‘성지를 얻으려고(取) 조당에 나가고, 가서 성지를 받아서(領) 성지를 손에 넣는다(得)’는 의미로, 결정은 모두 황제에게 맡기는 무능한 신하라고 비꼬는 의미)

왕규 대인이 자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심 대인 일가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떠나기 전에 가서 만나보아라.” 

송나라 율법으로는 관리가 지방에 부임할 때 식솔들은 따라갈 수 없는데 심괄이 선주로 좌천된 후에 부인 장씨도 따라가 한동안 함께 있었다. 황제가 그저 잠시 화가 났을 뿐이라고 여겼으나, 반년이 지났는데도 조정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심괄은 좋은 말 몇 마디 해주길 바라며 조정에서 목소리가 가장 큰 사마광에게 몰래 사람을 보냈었다. 그런데 만나지도 못하고 ‘일이 생기면 이리저리 변절하니, 그 됨됨이를 무시할 수밖에.’라는 한마디만 돌아왔다. 의기소침해진 심괄은 선주에 계속 있을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였고, 아무리 화를 내도 뾰족한 수가 없자 심 부인은 홧김에 경성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해 돈을 마련하고 물건을 정리해서 심괄의 고향, 항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아원은 경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경성 토박이였다. 부모는 세상을 떠났지만, 친지는 모두 경성에 있었다. 나이가 찬 걸 본 친척들이 나서서 혼인 상대 몇 집을 선봤고, 그중에 아원이 서생 하나를 점찍었다. 빈한한 집이지만, 가족들이 착하고 성실했다. 각자 작게 장사하는 그 부모도 아원이 곱상하고 영리한 걸 보고 좋아했다. 양측이 모두 마음에 들었으니 7월에 혼인하기로 날을 잡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심 부인은 호탕하게 집안의 가택 하나를 아원에게 혼수로 주었다. 그 소식이 퍼진 뒤, 아원은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녀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주인에게도 꽤 이쁨받는 재상가의 시녀였다. 옛 주인 심 부인이 이토록 호탕하니 새 주인도 체면 때문에라도 딸 혼인시키듯 큰돈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들었습니다, 대인.”

아원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허리를 숙이고 물러갔다. 대문에 도착하자, 의자에 앉아 수다 떨던 문지기들이 그녀가 오는 걸 멀리서 보고는 모두 일어나 싱글벙글 웃으며 문을 열어 주었다. 

“대저아, 외출해요?”

“이 누이에게 선물 주는 것 잊지들 마라.”

아원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하는 말에 사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선물을 달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은 그들을 핍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높이 사주는 것이었다. 그렇게 후한 선물을 받고도 자신들을 기억해 주니, 정과 의리가 깊지 않은가. 

다들 어깨가 으쓱해져서 큰 소리로 웃으며 아원을 배웅했다. 

밖으로 나간 아원은 마차를 타지 않고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지나는 길에 간식 가게가 보여서 먹을 것도 좀 샀다. 외진 곳에 있는 유가 대문 앞에 도착했을 땐 옷이 다 땀으로 젖어있었다. 그녀는 손수건으로 살며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문을 바라봤다. 대문은 굳게 닫혀있고, 안에선 사람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걸 보고 입술을 비죽이며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아원 왔니?”

여전히 대문을 지키는 장사가 기척을 듣고 곧바로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기쁜 표정이었다. 

“큰 경사가 있다면서. 축하해야겠구나.” 

장사에 대한 인상은 좋은 편이라, 아원도 웃으면서 대답했다. 

“고마워요. 꼭 와서 술 한잔해야 해요.”

장사가 고개를 저으며 안쪽을 살며시 가리켰다. 

“여길 비울 수가 있어야지……. 사람이 아무도 없어. 나까지 신경을 안 쓰면…….”

아원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쌤통이라고 말하고는, 문턱에 발을 비비며 말을 이었다. 

“제가 왔다고 좀 전해줘요. 노부인이 병이 났다던데, 어찌 됐든 한때 주인으로 모셨으니 찾아봬야죠.” 

장사가 문을 닫으며 대답했다. 

“그냥 들어가라. 노부인은 아마 주무시고 있을 게다. 그분은 집에 없으니 그냥 들어가면 돼. 난 뒤에 가서 사람 불러오마. 차 한잔 대접해야지.”

아원은 장사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느릿느릿 후원으로 향하는 걸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유씨 거처로 향했다. 회랑 아래 놓인 화분에 꽃이 시들시들했다. 6월 말, 한창 무더운 때에 문과 창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을 열자마자 약 냄새, 지린내가 코를 찔러서 움찔하다가 뒤로 넘어질 뻔했다. 

“세상에! 사람 죽겠네!” 

아원은 손수건을 휘두르며 숨을 고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그래도 깔끔한 편이었다. 다만 배치된 가구가 예전보다 낡아 보였다. 다른 걸 볼 겨를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가 창문 네 짝을 죄다 열었다. 밖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 다행히 코를 찌르는 방 안의 괴상한 냄새를 몰고 갔다. 

“누구? 누가 온 것이냐?”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기척과 함께 나이 든 여인의 뻣뻣한 목소리가 안쪽 침상에서 들렸다. 

아원은 대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대소변 통, 가래 통이 모두 침상 앞에 쌓여 있는데, 뚜껑도 덮지 않아서 악취가 심했다. 침상 가에 놓인 낮은 탁자 위에 접시, 그릇, 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아까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온 벌레와 파리가 그 위를 맴돌았다. 창문 바로 가까이에 놓인 낮은 침상엔 침구도 깔려 있지 않았다. 시선이 침상 위 유씨에게 향했다. 

고작 몇 달 만에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쉰도 안 된 나이건만, 유씨는 팽팽하던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했고, 흰 머리가 섞인 머리카락은 빗지도 않아서 부스스했다. 몸엔 고작 홑옷 하나 걸쳤는데, 그 옷 위엔 가래, 침 자국이 묻어 있었다. 유씨는 너무 밝은 방이 적응되지 않는 듯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들어오기 전까지 원망이 가득하던 마음도 이런 장면을 보고 있으려니 원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쓰라림만 가득해졌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간식 상자를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우선 대소변 통, 가래 통을 들고 나가고, 사용했던 그릇들을 문밖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돌아와서 선반에서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수건을 꺼내 아직 물이 반쯤 남은 대야에 넣고 적셨다. 유씨 앞에 있는 탁자를 깨끗이 닦고 정리하고 있는데 밖에서 시녀 하나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는 것들 가지고 가서 깨끗이 닦아!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손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때릴 테니까!”

시녀는 머리를 들이밀다가 누가 안에 있는 건지 제대로 보기도 전에 호통 소리 먼저 듣고는 목을 움츠렸다. 너무 놀라서 누군지 물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하러 달려갔다. 

겨우 밝은 방에 적응한 유씨는 넋이 나간 얼굴로 아원을 바라봤다. 아원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안팎에서 바삐 움직이더니 눈 깜빡할 사이에 방 안을 새로운 모습으로 바꿔 놓았다. 지금은 빗자루를 휘두르며 파리를 쫓아내고는 창문 한 짝을 닫았다. 

아원은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이제야 살 만해졌다고 생각하며 손을 털고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섰더니 유씨가 침상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원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져서 한참 동안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세요?” 

“아원, 나는, 나는 그 아이 한번 만나보고 싶다.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

유씨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였다. 아원은 한참 동안 서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나긴 뭘 만나요! 노부인과 고작 몇 개월 같이 있었고, 마음이 독한 나도 이런 모습을 보니 못 견디겠는데, 그분이 어떤 성격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굳이 마음 아프게 하셔야겠어요?”

유씨는 그저 울기만 했다. 슬프게 우는 노인의 모습에 아원은 손에 든 손수건이 꾸깃해지도록 움켜쥐었다. 

“모르고 계시겠지만, 태후께서 친히 의지(懿旨)를 내리셨어요. 좋은 사람 찾아서 혼인시키라고요. 보리 재해를 구제한 재주는 접어두더라도, 지금 각지, 각 부, 각 현에서 관리 나리들까지 앞다퉈서 그분을 자기 관할로 모시려고 안달이에요. 잘하면 우리 둘이 같이 혼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부인이 노부인을 잘 모신 걸 생각해서, 그냥 놓아주세요.”

유씨는 이제 울지도 못하고 경악한 얼굴로 아원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후께서 의지를 내려? 태후, 마마는 화가 난 거 아니셨나…….”

“쯧, 노부인, 양심에 손을 얹고 말씀해 보세요. 부인 같은 분에게 정말로 화를 낼 사람이 있을까요? 생각해 보니까 웃기네. 그때 부인이 몽둥이를 휘두른 거, 다 유씨 가문을 위해서라는 걸 다른 사람은 다 아는데, 어째서 이 집안에선 오히려 모를까요? 그런데도 잊지도 않고 마음에 담아 두고 있어요? 무슨 염치로요? 하지만, 노부인과 노야를 탓할 수는 없겠네요. 관리가 되어 본 적도 없는데 법도를 어찌 알겠어요. 저, 아원이 비록 하찮은 시녀지만, 관리 나리들이 뜨고 지는 걸 자주 봐왔네요. 다른 건 접어두고, 승상 왕안석 대인의 아우만 봐도, 밖에서 기녀를 끼고 술을 마신 일로 누군가 무절제하다고 상주서를 올렸죠. 관가께서도 지방으로 내치셨고요. 

노부인, 노야한테 한 번 물어보세요. 조정에 노야를 탄핵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라고요. 적처의 동의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첩실을 집에 들인 일로 상주서를 올린 대인이 있는지 없는지 물어보세요. 제가 그때 충고드렸었죠? 그걸 안 듣고 부인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그 여인을 집으로 끌어들이셨잖아요! 노야에게 물어보세요, 첩을 총애해서 처를 내쫓은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위인이라고 질타한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말이에요! 

노부인, 관리 집안의 규범은 시골에서 살던 이 댁이랑 달라요. 마음대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관리 집안의 부인은 다 명부랍니다. 명부의 체면을 깎은 건, 조정의 체면을 깎은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아원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단숨에 말을 내뱉고는 유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걸 바라봤다. 뭐라고 말을 잇기도 전에 뒤에서 누군가 웃는 듯 마는 듯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음? 아원, 말끝마다 찾는 부인이라는 게 어느 댁 부인이지? 난 왜 못 알아듣겠지?” 

아원이 휙 돌아보니 송옥루가 서 있었다. 현색 직금 배자에 청남빛 운단 치마, 높이 틀어 올린 머리에 은비녀를 잔뜩 꽂은 채였다. 귓불에 옥이 박힌 금귀걸이를 달랑거린 채 문에 기대어 서서 손톱을 길게 기른 손으로 비단부채를 들고 흔드는데, 손목에 찬 황금 팔찌 세 개가 햇살 아래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원, 왔구나? 운아는? 아원에게 차도 내주지도 않고, 이 망할 것이 어디로 간 거야. 주인 시중은 제대로 안 들고 매일 몰래 나가서 입이나 놀려대고. 홍향, 가서 찾아와! 찾아서 그 입을 찢어버려!” 

송옥루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눈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홍향은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같이 맞을까 두려워서 곧바로 돌아서서 나갔다. 아원은 화도 내지 않고 송옥루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부인, 화려하게 치장하셨네요. 이러고 연회에 앉아 있으면 천만 명도 이기겠어요.” 

송옥루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나를 부인이라고 부르는 건가? 내가 감당할 수 있겠니?”

아원이 하, 하고 웃으며 재빨리 대답했다. 

“말씀 한번 잘하셨네요. 제 처지는 아시네요, 송 낭자.” 

시녀 아이가 이런 식으로 말할 줄 몰랐던 송옥루는 긴 손톱을 문에 긁으며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내 처지가 왜? 내가 어떤 처지인지, 너 같은 천한 노비가 입에 올릴 수 있는 거니? 네가 재상댁을 오간다고 잊은 모양인데, 너야말로 노비라는 걸 잊지 말아야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원이 혀를 차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내가 노비라고요? 오줌 갈기고 얼굴이나 비춰보시죠? 관아에 가서 호적 조사해 볼까요? 누가 진짜 노비인지 말이에요. 퉤! 정말 재수 없네, 오늘. 난 배은망덕한 몹쓸 놈과 달라서 좋은 마음으로 일부러 옛 주인을 만나러 왔을 뿐이고,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 왜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뜨끔해서 그러시지요? 거리에서 웃음 팔며 사내들 사이를 오가면서 남의 사내를 노린 사람이, 남의 아내를 내쫓은 사람이, 집에 아픈 사람을 내버려 두고 주루 행수처럼 치장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그걸 내버려 두다니, 이 댁 사내는 마음도 좋네요. 왜요? 이제 나까지 잡아먹으려고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나 아원은 눈 똑똑히 뜨고 있거든요. 잘 생각하고 시도하시죠?” 

송옥루가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사람을 언제 만나봤을까. 정곡을 콕콕 찌르는 한마디, 한마디에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쓰러질 것 같아서 문틀을 붙잡고 서 있는데, 방 안에 유씨는 넋이 나간 듯이 꿈쩍도 하지 않고 그저 중얼중얼할 뿐이었다. 

“우리가 잘못한 거라고? 어째서 우리가 잘못한 것이 된 거냐?” 

송옥루는 눈시울을 붉히며 몇 걸음 만에 다가가 유씨를 흔들어댔다. 

“어머니, 어머니, 왜 이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면서 일어나서 붉어진 눈으로 아원을 노려봤다. 

“아원! 나한텐 뭐라고 해도 돼. 그런데 어떻게 어머니까지 이 지경으로 만들어? 얼마나 약을 올렸길래 정상이 아닌 것처럼 구셔?” 

아원은 쳇 소리를 내고는 손수건을 흔들며 헤실헤실 웃었다. 

“송 낭자, 잘못 말한 거 아닌가요? 제가 무슨 재주로 약을 올려요? 향기가 너무 좋아서 그런 거 아니고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환자에겐 향기가 안 좋다네요.” 

그 말에 송옥루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면서 침상 가장자리를 내리쳤다. 

“재상댁은 그 식솔들도 7품 관리라더니, 아원, 그걸 믿고 사람 핍박하는 거 아니다! 대인 앞에 고발하면 혼나는 건 너야!” 

아원은 아이고, 하며 겁먹은 표정을 짓다가 불현듯 말했다.

“아, 참. 그러네요. 맞아요. 이용 대인이 중서성에 들어가셨죠. 그분께 고발하진 마세요. 소인 너무 무섭네요. 바로 사과할게요, 송 낭자.” 

말로만 그럴 뿐 몸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찔리는 게 있는 송옥루는 이용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이용을 안 만난 지 오래됐는데,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할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느라 정신없는데, 송옥루의 표정을 본 아원도 살짝 놀랐다. 설마, 이 여인, 정말로 이용과 뭐가 있나?

그날 아원은 그저 송옥루가 이가 여인 둘과 함께 있는 걸 봤을 뿐이고 왜 같이 있었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아보긴 했지만, 사람 상대로 장사하는 주루가 어디 그렇게 쉽게 소식을 퍼트리겠나. 이용이 남의 아내를 탐하는 습성이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오늘 겁을 줘 본 것뿐인데, 이 여인이 정말로 안색이 변할 줄은 몰랐다. 조금 더 캐내 보려고 하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장사가 노야가 돌아왔다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송옥루는 몸에 힘이 풀린 듯 침상 곁에 엎드려서 슬프게 울었다. 

“사과라니, 가당치도 않아. 다만 부탁이니, 제발 어머니 앞에서 형님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다오. 벌써 서신을 여러 번 보냈는데, 전혀 답신이 오지 않아. 안 그래도 어머니가 밤낮없이 그리워하시는데, 굳이 와서 이렇게 마음의 병을 건드리니…….”

아원은 안으로 들어오는 유소호를 쳐다보지도 않고 송옥루를 향해 한마디 내던졌다.

“퉤! 역겨워 죽겠네.” 

그러고는 바로 돌아서는데, 유소호가 대뜸 잡고서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여기엔 왜 온 것이냐? 어머니가 저리된 걸 보니, 기쁘냐?”

아플 정도로 손목을 붙들린 아원은 바로 유소호의 무릎을 걷어찼다. 유소호가 아파서 바로 손을 놓았다. 

“언젠가 노야가 옥에 갇히는 걸 봐야 기쁘지요.”

아원이 욕을 하고는 휑하니 달아나는 걸 본 유소호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랑, 어머니 좀 봐요. 제정신이 아니신 것 같아요.” 

송옥루는 눈물을 닦으면서 곁에 물그릇을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유씨에게 먹였다. 

“어머니, 물 좀 드세요.”

유씨는 며칠이나 그곳에 뒀는지 모를 그 물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받아마셨다. 갑자기 밖에서 시녀가 소리를 지르며 우는 소리가 들리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큰일이구나! 가산 몰수하라고 성지가 내려왔단다!”

유씨가 헛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혼절하자, 송옥루가 기겁해서 물그릇을 던지고는 몸을 피했다. 유소호가 달려가 유씨의 인중을 꼬집자 유씨가 겨우 숨을 돌렸다. 

“뭐 하는 거요? 또 싸우고 욕하고! 대체 집안 단속을 어찌 하는 거요!” 

유소호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는 송옥루를 향해 고함치고는 일어서서 창가로 다가갔다. 창 너머로 홍향이 정원에서 운아를 붙들고 때리고 있었다. 운아도 만만하지 않아서 바닥을 구르며 두 사람이 한데 엉겨 붙어 싸웠다. 분노가 치민 유소호는 침상 가의 낮은 의자를 대번에 걷어차고는 송옥루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제 몸은 번쩍번쩍 치장하고, 어째서 집안은 단속하지 않아!” 

그러고는 문 앞에 서서 고함쳤다. 

“장사! 거간꾼을 불러서 쓸모없는 노비들을 싹 팔아버려라!” 

정원에서 구르며 싸우던 시녀 둘이 겁에 질려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넋이 나간 얼굴로 웬만해선 화를 내지 않는 남주인을 바라봤다. 송옥루는 바로 훌쩍훌쩍 울면서 후원으로 돌아갔다. 

여주인이 울면서 뒤로 가는 걸 본 홍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따라가면 화풀이한다고 죽을 때까지 때리는 거 아니야? 

그 생각에 이를 악물고 고개를 조아렸다. 

“소인 미천하여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노야, 제발 저를 팔아주세요.”

홍향을 보고 있던 운아도 안 그래도 지긋지긋하던 차라 고개도 조아리지 않고 벌떡 일어나 안채로 달려 들어갔다. 

“세상에, 드디어 나가네. 바로 정리해서 나갈게요.” 

유소호는 화가 나서 몸이 흔들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장사가 문가에 서 있는 걸 보고 고함쳤다. 

“안 가고 뭐 하나!” 

장사는 유소호를 힐끔 보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느릿느릿 돌아섰다. 홍향도 일어서서 물건도 챙기지 않고 대문 곁에 먼저 가서 기다렸다. 

유소호는 넋이 나가서 정원을 바라봤다. 이 무더운 날에, 온몸이 서늘해졌다. 

“이랑, 이랑.” 

유씨가 안에서 부르는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둥지둥 들어간 유소호는 유씨가 몸을 일으키는 걸 보고 후다닥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이불에 기대게 했다. 

“이랑, 요즘 마음 고생하느라 이렇게 말랐구나.” 

유씨는 숨을 고르고는 더 퀭해 보이는 유소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코끝이 찡해서, 잘 돌아가지 않는 혀를 굴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요즘 많이 좋아졌다. 밤에 곁에 있을 것 없으니 서재로 가서 푹 쉬어라.” 

유소호는 마음이 너무나 씁쓸해서 눈물을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다 아들 탓입니다. 어머니가 나으실 때까지 곁에 있겠습니다.”

유씨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달싹이는데, 유소호가 먹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 그 사람, 집에서 어머니를 잘 모십니까?” 

그 말에 유씨가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유소호는 더는 참지 못하고 유씨의 품에 고개를 묻고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리며 우는 아들이 마음 아파서, 유씨는 눈물을 닦고서 그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이랑, 내가 미안하다. 관리 노릇이 이렇게 힘든지 몰랐다. 우리는 다른 집과 다른 것을. 넌 아비도 일찍 잃었고, 도움받을 인맥이라곤 하나도 없는걸. 이렇게 젊은데, 어미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는구나.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다니. 이랑, 네가 얼마나 고된지, 이 어미도 안다. 참느라 밖을 돌아다니며 술로 풀지 말고 집으로 오너라. 어미 곁에서 울어라. 웃지 않으마. 탓하지도 않으마.” 

유소호가 유씨의 허리를 끌어안고 더 크게 울었다. 유씨의 먹먹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대저아에게 서신 그만 보내라. 어미가 어찌 됐었던 모양이다. 마음 써주어서 고맙다.”

대저아, 대저아. 

이제 이렇게 부르시는 건가. 유소호는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 가슴이 막혀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랬다. 그 여인은 지금 대저아라고 불렸다. 곧 어느 가문의 조씨라고 불리게 될 것이고. 무엇이라고 불리든, 그들 유씨 집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었다. 

“어머니, 저는, 저는 싫습니다…….”

유소호는 유씨의 품에 안긴 채 앞뒤가 이어지지도 않고, 아무도 못 알아들을 말을 웅얼거렸다. 아들의 온몸의 뼈가 울고 있는 것만 같아, 유씨는 밀물처럼 몰려오는 눈물을 삼키며 아들의 등을 토닥였다. 

그때 밖에서 장사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노야!” 

“왜 여기 있는 것이냐. 너도 나가겠다고 빌러 온 것이냐?” 

유소호가 흐르는 눈물을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열었다. 유소호의 호통에도 장사는 아무것도 못 보고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늘 그랬듯이 아뢰었다.

“노야, 관가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입궁하시랍니다.” 

그러고는 문밖을 가리켰다. 정원에 서 있던 붉은 옷을 입은 내시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에 보따리를 든 운아와 홍향이 곁에 아무도 없는 듯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원수처럼 싸우던 두 사람이 친자매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드디어 이 집을 떠나게 되었다, 기루로 팔려 가도 여기보다 나을 것이다, 등의 말이 내시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그러니 저렇게 난감해 보이지. 

유소호가 숭정전으로 달려갔을 땐, 이미 많은 이가 서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간 유소호는 어쩐지 그들의 눈빛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거북할 정도로 바라보는 시선에, 혹시나 하고 등관을 바라봤다. 그런데 등관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유소호의 시선은 곧바로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향했다. 먼길을 달려온 행색인데 변함없이 기운 넘쳐 보이는 신진 6품 관리 이용이었다. 

유소호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저 자식, 고향에 돌아가 조상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태감 대신 강녕에 성지를 내리러 갔다고 했지!

“애경, 어서 와 보게.” 

서안 앞에 안은 황제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탁상 위에 놓인 그릇을 가리켰다.

유소호가 의문스러운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반짝거리는 기름이었다. 이해할 수 없어서 황제를 바라봤다. 황제가 입을 열기 전에, 언제 곁으로 다가온 건지 이용이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인, 이것은 운대 씨 기름입니다.” 

유소호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가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색깔이 매우 좋은 걸 보니 분명 맛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쉰여덟인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소송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맛은 호마유에 못 미치지만, 많이 뽑을 수 있어서 귀한 것입니다. 운대는 재배하기도 쉽지요.” 

그러고는 다른 뜻이 있는 듯 유소호를 힐끔 바라봤다. 

“유 대인도 심어 봤으니 물론 알 테지요.” 

황제는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는 유채 기름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사상 대인이 직접 짠 것으로, 특별히 이 대인에게 들려 보냈지. 사상 대인이 귀향한 후 민간 백성들이 기름 살 돈이 없는 걸 보고, 운대 씨로 기름을 짤 수 있다고 소 대인이 예전에 말했던 걸 떠올리고는 직접 운대를 재배해서 기름 열 근을 백성들과 나눴다는군.”

황제가 그렇게 말하니 사람들은 물론 허리를 숙여 사상 대인을 찬양했다. ‘사상 대인이 만민을 근심하는 마음이 있으니 실로 백성의 복’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소송은 왕안석과 불화는 있었지만, 그 노인이 자기가 한 말대로 기름을 짠 걸 보고 뿌듯함을 감추지 못했다. 노인네가 결국은 고개를 숙인 걸 보면 사과하는 셈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에서 우러나서 다시 한 번 칭찬했다. 

“이것은 운대 재배, 수확, 그리고 기름 채취할 때 주의 사항입니다. 조 대낭자가 말한 것을 신이 직접 적은 것입니다.” 

이용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상주서를 꺼내다가 실수로 손수건을 흘렸다. 떨어진 손수건이 마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소호 앞에 팔랑팔랑 떨어졌다. 이용은 알아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사상 대인 역시 조 대낭자의 말대로 한 것입니다. 지금 강녕 모든 백성이 이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조 대낭자? 

그 이름이 나오자 대전 안의 사람들이 놀라서 수군거렸다. 황제도 읽던 상주서를 내려놓고 이용을 바라봤다. 

“어찌, 이 일도 또 조 대낭자와 관련된 것인가?”

이용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마침 조 대낭자와 사상 대인이 가까이 살았습니다. 사상 대인의 운대를 보고 조 낭자가 지도하였고요. 그렇게 된 연유를 말하자면, 또 유 대인의 원망을 사게 되겠군요. 유 대인, 나무라지 마시지요.”

이용이 유소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유소호는 이용의 말을 못 들은 듯이 멍하니 제 발치만 바라봤다. 삐뚤빼뚤 수 놓인 연꽃 한 송이만 덩그러니 있는 비단 손수건이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바라본 이용이 어이쿠, 하면서 서둘러 손수건을 주워서 제 소매 안에 넣었다. 갑자기 손수건이 사라지자, 그대로 고개를 든 유소호는 그 손수건이 이용 소매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는 얼굴이 순간 시퍼레져서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나갔다. 

“이걸 어찌…….”

그러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떠올리고는 억지로 입을 다물고 이용을 노려봤다. 이용은 유소호가 한 걸음 다가왔다는 건 모르는 척, 그저 사람들 앞에서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이 난감한 듯 헛기침했다.

“어서 말하게, 어서. 그런 은밀한 정표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소송이 재촉하는 말에 황제를 포함한 모든 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어렴풋이 수줍은 표정을 짓는 이용과 얼굴이 창백해진 유소호는 예외였다. 

“이러합니다. 작년 어전에서 운대를 재배한 것은 어전시 모두가 기억하리라 믿습니다.” 

이용은 헛기침하며 주의를 끌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당시 유 대인이 타지에 나가고 없을 때, 조 대낭자가 운대를 재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그 바람에 의견이 분분했지요.” 

그러면서 뒤쪽에 서 있는 어전시 사람들을 바라보자, 어전시 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희의 식견이 좁았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자신들이 일부러 유 대인을 난처하게 하는 건 아니었다.

황제가 그래? 하면서 의외라는 생각에 유소호를 바라봤다. 유소호는 얼이 빠진 듯이 이용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용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대낭자는 당시 경성에서 운대 싹을 구하지 못하자, 한 상인에게 부탁해 운대 싹을 남쪽에서 구해왔습니다. 감사의 뜻으로 장차 운대를 수확한 후 기름을 짜게 되면 모두 그에게 팔겠다고 약조하고요. 그런데…….”

이용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유소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내 허탈한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유소호를 향해 예를 갖추면서 말을 이었다. 

“그 상인은 강녕부 사람이었는데, 마침 이번에 그곳에 가게 된 대낭자가 그 일을 떠올리고는 미안한 마음에 그곳에 남아 한 철 동안 운대를 심기로 했답니다. 그때 우연히 사상 대인을 만난 것입니다. 대인, 제 말이 대인에게 실례가 된 것을 나무라지 마십시오.” 

대전 안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한쪽에 고립된 유소호를 태워 죽일 듯했다. 유소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주변의 모든 것을 일절 보지도, 듣지도 않고 오로지 이용의 소맷자락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소매 끝에 보일 듯 말 듯이 드러난 손수건 자락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한 가지 질문을 반복했다. 

밤새 수 놓았던 손수건이다. 무슨 꽃이 좋으냐고 묻길래, 우리가 함께 연근을 심었으니 연근에서 피는 연꽃으로 하자 했다. 이어진 연밥처럼 평생 변치 말고 살자 했다. 

그래서 연꽃을 수 놓은 것인데……. 완성하지 못한 줄로만 알았는데…….

어째서 이자의 손에? 어째서 이자에게 준 것이지? 어째서 이자에게 준 것이지?

드디어 지음을 만나 억울했던 지난날을 뒤집게 된 소송이 살짝 떨면서 말했다. 

“폐하, 폐하, 대낭자가, 대낭자는 처음부터 기름을 짜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억울해하며 황제를 힐끔 보았다. 소송의 시선에 황제는 조금 겸연쩍어졌다. 운대 절반을 제 배 속에 삼켰으니 말이다. 기름을 몇 근은 짤 양이었다. 먹어 치운 잎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것이고. 저도 모르게 불만이 치솟은 황제가 헛기침을 했다. 

“그때 말을 하지 않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용이 허탈하게 웃으며 유소호를 힐끔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제야 그때 대낭자가 자기 할머니의 뜻에 따라 쫓겨났음을 떠올리고는 더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설마 불만을 품고 그 사실을 짐에게 감춘 것인가?”

이용이 고개를 숙이고 공수했다. 

“그건, 신도 모릅니다.” 

황제는 순간 잘못됐음을 깨닫고 후회하고 말았다. 

저를 추궁하듯이 바라보는 조정 대신들의 시선, 그리고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유소호.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을까. 

어느 쪽도 미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황제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소송이 먼저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의 일 처리를 보아 분명 그런 속 좁은 소인배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다시 유소호에게 향했다. 

그 여인이 아니면 남은 것은 하나 아닌가! 

황제까지 거북해져서는 헛기침하며 갑자기 큰 소리로 불렀다. 

“그, 그, 사농시 어디에 있는가?” 

별안간 높아진 소리에 다들 부르르 떨었고, 새로 임관한 사농시 관리가 허둥지둥 나왔다. 

“가지고 가서 각지에 전하라. 운대를 잘 재배해서, 음, 기름을 짜게.” 

이용의 상주서를 받은 사농시 관리가 좋아하는 걸 본 황제는 그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관리가 나서서 재배하면 중벌을 내리겠다!” 

관리는 겁에 질려 부르르 떨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사농시 관리 품 안의 상주서를 주시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았다. 

요즘 세상에 꿍쳐둔 재산 없는 사람도 있나! 자기 명의로 무턱대고 땅을 점거할 정도로 아둔한 멍청이를 제외하고!

역시나, 천막 재배 기회를 놓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폐하, 대명부에서 다시 상주서가 올라왔습니다. 유 대인의 식솔이 백성의 땅을 점거하는 것을 유 대인이 모르는 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바람에 보리 농사를 망친 십여 민가가 유민이 되어 갈 곳을 잃었다고 합니다.”

유소호의 위기를 자신이 영리하게 모면하게 해주었다고 기뻐하던 황제는 좋아하기도 전에 그 말에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이번엔 체면 문제가 아니었다. 

황제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유소호를 바라봤다.

“짐, 해명을 듣고 싶군.” 

유소호가 천천히 몸을 낮추며 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 죄를 지었습니다.” 

변경의 번화함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드러난다. 요즘은 날씨가 한창 더울 때라서, 뙤약볕이 산 뒤로 넘어간 시간엔 종일 집에 갇혀 있던 남녀노소가 우르르 거리로 몰려나와서 온 성 구석구석에 있는 주루나 다관을 빼곡히 채웠다. 변하 강가엔 거리의 등롱, 배의 등롱이 바람에 흔들렸다. 백성들의 웃음소리, 피리, 금의 가락, 잔을 들어 호탕하게 마시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사람 마음을 흔드는 화폭이 되었다. 천하를 가진 황제가 이 그림을 본다면, 아마도 궁 밖 백성들의 밤 생활을 부러워하리라.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마행가(馬行街). 

거리에 환하게 켜진 불빛이 거리 전체를 대낮처럼 비추었다. 이 시간엔 사람을 괴롭히는 모기도 등유가 무서워서 마행가를 피해 다닌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더더욱 기쁘게 했다. 그야말로 인간 세상의 극락이라 할 만했다. 

이때, 이 인간 세상의 극락에 한 무리 관리가 우르르 나타났다. 공무를 마치고 관복을 갈아입기 전이라 유난히 눈에 띄었다. 

“북산자 다관으로 가세! 내가 한턱내겠네.” 

무리의 중앙에 있는 제일 눈에 띄는 키 크고 훤칠한 공자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들 우르르 앞으로 몰려갔다. 

“유 대인, 자네도 갈 텐가?” 

맨 뒤에서 걷던 오 대인이 안색이 엉망인 유소호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물었다. 유소호와 이용 사이에 살(煞)이 끼었다는 건 아무리 바보라도 알아볼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용이 일부러 유소호를 공격한다고 하기엔 그런 것 같진 않았다. 그의 출발점은 모두 민생을 위한 것이고, 하는 말도 다 일리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어쩌면 그렇게 모든 것이 정곡을 찌르듯이 사사건건 유소호의 기를 죽이는 건지. 

“가야지요. 왜 안 갑니까? 날이 이렇게 밝은데 집에 가면 무슨 재미가 있다고요.”

유소호가 갑자기 웃었다. 등불 아래 그의 창백한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시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용에게 꽂혀있었다.

“이랑, 요즘 몸도 안 좋은데, 가서 술은 적당히 마시게.” 

오 대인은 족히 자기 아들을 삼아도 될 나이인 젊은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이, 반년 동안 참 많이 변했어. 모든 게 처를 내쫓고 후처를 들인 뒤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젊은이, 휴, 안타깝게 되었군. 

오 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들이 다관에 도착하자, 주인은 신선을 영접한 듯이 기뻐했다. 이용은 커다란 대청 두 칸을 사서 유수석(流水席: 자리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먹고 즐기는 연회)을 열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제 자리를 잡은 뒤, 옷과 신발을 벗고 눕거나 앉아서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불려온 행수 여남은 명도 하나같이 화사하게 차려입고 한껏 치장하고 향긋한 향기를 풍기면서 연회석을 오가니, 이곳이 바로 신선의 저택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들어가자, 저마다 잘 아는 행수를 끼고 앉아서 이야기 나누는 사람, 패를 치는 사람으로 시끌벅적해서, 저쪽에서 노래하고 연주하는 소리가 이쪽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오라버니, 술 한잔해요. 왜 저쪽에 있는 언니만 계속 바라봐요?” 

유소호 곁에 앉은 기녀는 올해 겨우 열다섯이었다. 처음 이런 자리에 나오는 것이라 아는 사람이 없어서 유소호 곁까지 밀려와 앉게 되었다. 대인들 곁에 기대고 앉아서 입으로 술을 먹이는 언니들을 따라 하려고 했는데, 유소호는 고개를 숙인 채 연거푸 술을 비우거나, 아니면 멍한 눈으로 맞은편 자리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소호의 시선을 따라 바라봤더니, 그쪽에 앉은 사람은 바로 자매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통이 크고 또 다정한 대관인이었다. 대관인은 지금 이 집에서 가장 총애받는 두 기녀를 양쪽에 끼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고 있었다. 두 기녀가 대관인이 달고 있는 좋은 장신구를 푸는 걸 보다가 자기 옆에 앉은 사내를 바라보니 온몸에 장신구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젊고 잘생긴 얼굴뿐이라서 저절로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유소호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옆에서 웃고 있는 기녀를 바라봤다. 아직 머리를 올리지 않은 동그란 얼굴에 분을 옅게 바르고 살구눈을 동그랗게 뜨고 앳된 모습으로 웃는 걸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서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 바람에 기녀는 놀라서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이용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걸 곁눈으로 본 유소호는 기녀의 손에 들린 술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는 일어서서 비틀비틀 따라 나갔다.

이 기녀가 처음으로 손님을 맞는 걸 아는 다른 기녀 하나가 혹시 이 아이가 제대로 접대하지 못할까 봐 고개를 내밀며 한마디 하려고 하자, 기녀가 가슴을 살짝 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 사람 어딘가 좀 이상해요. 홍저아, 녹저아가 마음에 든 건지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네가 저 재주를 배우면 분명 다들 너만 볼 거다.”

기녀들끼리 서로 밀며 한바탕 놀려댔다. 

자리를 떠나 손을 씻으러 간 이용 이야기를 해보자. 이 다관은 새로 다리를 놓고 석가산, 인공 호수에 오색 등불을 걸어놓아서 한껏 신선이 사는 분위기가 가득했다. 그래서 느릿느릿 걸어가 한쪽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데, 어느 댁 여인들인지 마침 다리 위를 건네며 까르르 웃어댔다. 그중에 흰 상의에 옥색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를 본 이용은 그대로 넋을 잃고 말았다. 마음은 어느새 강녕부로 날아갔다. 사상 대인이 등 떠밀지 않았으면 이렇게 빨리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사내들이 벌떼처럼 그 여인의 집에 찾아가 들러붙을 걸 생각하며 고양이에게 할퀸 듯이 가슴이 아팠다. 그 여인을 꽁꽁 묶어서 마차에 싣고 데리고 돌아와 버리고 싶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기회를 봐서 그 여인을 달래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떠미는 느낌이 들었다. 술에 취한 이용이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넘어질 뻔하다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유소호가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 대인, 유 대인도 바람 쐬러 나왔나? 듣자 하니 대인의 주량이 갈수록 좋아진다던데, 오늘 한 번 겨뤄보려고?”

이용이 활짝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려는데, 유소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한쪽 손으로 그의 팔을 잡고는 다른 손을 그의 소매 안에 집어넣어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고는 대답도 없이 돌아섰다. 

화가 난 이용은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냥 이대로 보낼 리가 있나. 단숨에 유소호의 어깨를 잡아채서 당겨왔다. 

“내놔.” 

취기가 오른 유소호는 손수건을 손에 꼭 쥐고서는 그 김에 돌아서서 이용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남의 아내만 골라서 노리는 이 오입쟁이가!” 

이용이 호락호락 맞을 리가 있나. 그는 옆으로 살짝 몸을 피하더니 단번에 유소호를 걷어차서 눕히고는 주먹을 휘두르면서 나직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썩을 놈이, 너야말로 오쟁이 진 사내지! 네 아내 같은 천것이 내게 가당키나 할까. 네 아내와 그 짓을 한 자를 찾으려면 홍등가에 가서 수소문해보아라. 네 아내의 고마운 손님들이 널 기다릴 것이다. 어디 예서 허튼소리로 내 명성을 더럽히는 것이냐? 그 음탕한 천것을 보물로 여기는 건 너 같은 눈먼 멍청이밖에 없다!”

바닥에 깔려서 온몸이 화끈하도록 두들겨 맞은 유소호는 몸을 휙 뒤집으면서 머리로 이용을 들이박고는, 허리를 붙든 채 그대로 같이 바닥을 굴렀다. 이용의 바위 같은 주먹이 온몸을 내리치는 대로 다 맞으면서 나지막이 욕을 퍼부었다. 

“그 여인은 내가 잘 안다. 사내 곁은 한 걸음도 다가가지 않는 여인이야. 그런 여인을 어찌할 생각이면 내가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이용은 맞진 않았지만, 옥신각신하는 것이 짜증이 났다. 다행히 어두운 곳이고 둘 다 목소리를 낮춰서 아직은 사람들에게 발각되진 않았다. 안 그래도 짜증이 났던 이용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갈기며 싸늘하게 웃었다. 

“네가 뭔데? 지금 그 여인 눈에 넌 어느 사내보다 못해! 평생 인연이 없다고! 네가 날 가르쳐? 네가 무엇인데?”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다가가 이를 악물며 말을 이었다. 

“난 너 같은 인간이 제일 싫다. 아무런 재주 하나 없는 놈이 운만 좋아서. 재능이면 재능, 용모면 용모를 다 갖춘 내가, 어째서 출세하면 안 되는 것이냐? 어째서 공을 세우고 업을 이루면 안 되는 것이야? 다른 사람은 모를 수 있어도, 스스로도 모르냐? 넌 속 빈 강정일 뿐이다. 그 여인 없이 쌍놈 네가 뭘 할 수 있어서? 왜? 이제야 후회가 돼? 퉤! 주제 파악하고 썩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내가 가는 길을 막아 보아라. 이 나리가 네 집을 몰살시키고 감옥에 처넣어 버릴 테니까!”

그 말에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유소호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소리를 지르면서 이용을 끌고 일어서서 주먹을 휘둘렀다. 진작 방어하고 있던 이용이지만 워낙 마구잡이라 몇 대 두들겨 맞고 말았다. 너무 아파서 숨을 들이마시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유소호의 가슴을 걷어찼다. 유소호는 그대로 걷어차여서는 가까스로 난간 손잡이를 잡았다. 손잡이가 높아서 망정이지, 분명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유소호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서 들고 있던 손수건을 놓치고 말았다. 손수건이 팔랑팔랑 아래로 떨어졌다. 

구르고 때리느라 기척을 일으킨 바람에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차렸다. 싸움 났다는 소리와 함께 다관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굳게 닫혀있던 별채의 문이 동시에 열리고 흥분한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용의 접대를 즐기던 사람들도 소리를 듣고 달려 나왔다. 다들 술을 마셔서 비틀비틀하면서 행수들과 함께 달려오다가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남의 앞길을 막고, 한순간 웃음소리, 욕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유소호가 없어진 걸 가장 먼저 발견한 오 대인은 이용도 자리에 없는 걸 보고 큰일 났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처 나오기도 전에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 방에서 가장 먼저 뛰어나왔었다. 두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2층 난간을 넘어가더니,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다관 1층에 있는 연못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아이고, 물에 뛰어 들어갔다!” 

모든 이가 손뼉을 치며 시끄럽게 외쳤다. 진작 달려와 있던 다관 사환들이 두셋씩 짝지어 두 사람을 하나씩 건져 나왔다.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내밀고 보던 사람들은 연못에서 나온 사람이 이용과 유소호인 걸 보고 허둥지둥 달려 내려갔다. 이용을 에워싸는 사람도 있고, 유소호를 에워싸는 사람도 있었다. 흠뻑 젖은 낭패스러운 두 사람을 보고 있으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셔요!”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가운데 이용과 사이 좋은 행수들이 벌써 몰려와서 손수건으로 허둥지둥 닦아댔다. 이용이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는 물을 뱉고는 곁에 흠뻑 젖은 유소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유 대인이 취해서 물에 빠진 걸 보고 급히 당기려다가 나도 빠졌지 뭐요.”

그 말에, 다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유소호를 바라봤다. 유소호는 이를 딱딱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손에 손수건을 꼭 쥔 채 이용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맞소. 고맙소, 고맙소, 이 대인.” 

아하, 그랬구나. 사람들은 안도하고는 껄껄 웃으며 유소호의 주량을 놀렸다. 사환들이 어느새 깨끗한 옷을 사 와서 두 사람을 에워싸고 옷 갈아입으시라고 각각 다른 방으로 들여보냈다. 더 볼 것이 없어진 구경꾼들도 우르르 사라졌다. 

다음 날, 이 이야기가 다른 주루나 다관으로 전해질 때는 다음과 같은 판본으로 바뀌어 있었다. 두 사내가 하늘에선 비익조, 땅에선 연리지가 되길 바라며 서로의 마음을 표시하려고 다관에서 얼싸안고 물에 빠지는 진한 감동의 이야기 어쩌고저쩌고. 

이후로 한동안 변경성 이야기꾼이 ‘단수지애(斷袖之愛)’를 이야기하고 노래하는 풍조가 이어졌다. 

(※단수: 동성애. 한나라 애제가 신하인 동현과 정을 통했는데, 애제가 일어날 때 동현이 자는 걸 깨우지 않으려고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다음 날 잠에서 깬 유소호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코가 막히고 목구멍이 타듯이 따가웠다. 물을 달라고 입을 여는 목소리가 버석했다. 

“이랑, 괜찮아요? 일어나지 않아서 의원을 부르러 가려던 참이에요.” 

눈이 부은 송옥루가 덥석 품에 안겼다가 서둘러 그를 부축해서 물을 먹이고는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유소호는 어두컴컴한 방 안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고 어젯밤 일을 되짚어 보았다. 어떻게 돌아온 건지도 떠오르지 않다가, 갑자기 손수건을 떠올리고는 벌떡 일어나 앉아서 옷을 더듬었다. 

“손수건은?”

송옥루는 손에 든 찻잔을 깨부수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일어서서 선반에서 깨끗이 빨아 말린 주름 하나 없는 손수건을 꺼내서 건넸다. 

“이랑, 이거 말이에요? 어제 돌아왔을 때 손에 꼭 쥐고 있더라고요. 더러워졌길래 빨아놓았어요.”

유소호는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 하나를 내려놓고 손수건을 받아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 손수건이 맞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온몸에 힘이 빠져서 다시 침상에 누웠다. 

“됐다. 이거면 됐어. 그 여인의 명성을 더럽히면 안 되지.”

중얼거리는데 송옥루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화장이 번진 얼굴에 부은 눈, 그 초췌한 모습에 걱정된다기보다 그저 우는 소리가 성가시고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며 손을 들었다. 

“누이, 울지 말아. 그날은 노비 때문에 화가 나서 욕한 것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어떻게 치장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대신 어머님은 몸져누웠고 나도 사나흘을 집을 비우는데, 내 얼굴을 봐서라도 집안일에 조금만 신경 써요. 직접 돌보는 게 싫으면 좋은 시녀를 구하고. 그렇게라도 나 대신 효도해 줘요.” 

송옥루는 반쯤 놀라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더 슬프게 울었다. 

“이랑, 내 잘못이에요. 운아를 믿는 게 아니었어요. 앞으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게요. 다시는 어머니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게요. 내가 다시 외출하면 마차에 부딪혀 다리가 부러질…….”

“왜 그런 맹세를 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유소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입을 막으면서 말을 끊었다. 그녀는 그 김에 그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며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이랑, 싸웠어요? 오 대인은 그냥 술 취해서 넘어진 거라고만 하던데. 어째서 몸에 멍이 잔뜩 들었어요?”

유소호가 대답하지 않자 송옥루가 이를 악물고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이랑, 주루에서의 습관은 나도 알아요. 혹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럼, 그럼 데리고 와요. 나도…….”

“그런 것 아니에요!” 

유소호가 짜증스러운 듯 그녀를 밀쳤다. 이 시간까지 잠을 잤더니 허기가 졌다.

“부엌어멈에게 담백한 죽을 내오라 해줘요.”

송옥루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녀라곤 녹옥 하나 남았는데, 유씨 거처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그러니 직접 가서 말할 수밖에. 몇 걸음 걸어가던 송옥루는 갑자기 뭔가 떠올리고는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이랑, 이건 어때요. 시녀를 새로 사지 말고, 차라리 속속들이 잘 아는 애를 데리고 와요. 영아가 형님한테 있잖아요. 어머니 시중도 제법 잘 들었고, 그 애를 불러오면 어떨까요?”

그래놓고 유소호를 힐끔 보며 쭈뼛쭈뼛 말했다. 

“다만, 형님을 힘들게 할 테니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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