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57)

二. 유소호, 집안일로 핏대를 세우다 

경사스러운 이씨 가문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유가 저택의 분위기는 확연히 침울했다. 유씨 거처엔 유씨가 콜록거리는 소리와 함께 약 냄새가 짙었다. 운아라고 불리는 어린 시녀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바느질 바구니를 들고 휘장을 젖히고 나왔다. 

“매일 바느질이나 하고. 실 꿰느라 죽겠네. 이렇게 궁상맞게 사느니 차라리 다른 집에 팔려 가는 게 낫겠어.” 

운아는 너무 급하게 가다가, 맞은편에서 오는 녹옥을 미처 보지 못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녹옥이 손을 치켜들어 운아의 뺨을 내리쳤다.

“이 몹쓸 것! 눈이 멀었니?” 

속이 답답했던 녹옥은 또 손을 치켜들어 운아를 내리쳤다. 가만히 맞고 있을 리가 없는 운아가 큰 소리로 울면서 녹옥을 밀쳤다. 뒤로 밀린 녹옥은 막 이쪽으로 오던 홍옥의 치맛자락을 밟았고, 깜짝 놀란 홍옥이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뒤에서 오던 송옥루와 부딪쳤다. 그렇게 주인과 종복 세 사람이 바닥에 나동그라지자, 운아는 울음도 멈추고 그들을 가리키며 웃음을 터트렸다. 

바닥에 쓸려 소매가 찢어진 걸 본 송옥루는 화가 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송옥루가 저 망할 년을 잡으라고 연신 고함치자, 녹옥과 홍향은 굼뜨게 움직였다가는 자기가 맞을까 봐 두려워서 기어 일어나서 소매를 걷어붙이고 운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운아가 멍청이처럼 그 자리에 서서 매를 기다릴 리가 있나. 운아는 돌아서서 “노부인, 살려주세요!” 하고 외치면서 유씨 거처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송옥루에게 맞을까 두려운 홍향과 녹옥은 유씨의 거처인 걸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 들어가서는, 유씨의 침상으로 파고드는 운아를 끌어내서 찰싹찰싹 때렸다.

“이게 무슨 난리냐!”

막 약을 먹은 유씨는 이 광경에 놀라서 먹던 약을 다 게워낼 뻔했다. 세 사람이 한데 엉겨 붙어 바닥을 구르자 참지 못하고 약 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세 사람이 그제야 놀라서 떨어졌다.

“노부인! 얘들이 절 때려요.”

운아는 바로 유씨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녀의 다리를 붙들고는 펑펑 울어댔다. 홍향과 녹옥은 예도 갖추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입을 열었다. 

“노부인, 허튼소리 듣지 마세요. 저 망할 년이 부인과 부딪치고는 잘못했단 말도 없이 달아났어요.” 

운아가 흔드는 바람에 어지러워진 유씨는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나라고 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송옥루가 이마를 짚고 들어오길래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아가야, 단속 좀 할 것이지. 치장에 정신이 팔려서, 집안 꼴이 이게 무엇이냐!”

송옥루가 눈시울을 붉히며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찢어진 소매를 본 유씨가 아까워하며 말을 이었다.

“새로 지은 옷이 또 이렇게 된 것이냐? 그러게, 귀한 옷감은 오래 못 입는다고 말했거늘. 곧이듣지 않는구나.” 

송옥루는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말씀이 옳아요. 명심할게요.”

유씨가 홍향과 녹옥을 가리키며 혼을 냈다. 

“종일 치장이나 하고! 손톱을 저리 길러서 무슨 일을 하겠어! 먹을 것 다 먹고, 부엌어멈을 욕하는 게 아니면 집안에서 싸움이나 하고. 인제 운아도 때리는구나. 반년이나 되었는데, 둘이 합해서 신발 천 한 쌍도 만들지를 못해!” 

두 시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밤이 되어, 송옥루는 밥도 먹지 않고 머리를 빗고는 침상에 누워있었다. 홍향이 “노야 오셨어요!”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소호의 대답이 들렸다. 녹옥이 휘장을 젖혀 올리자, 물씬 풍기는 술 냄새에 송옥루는 눈살을 찌푸렸다. 

“낭자, 왜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유소호가 웃으며 비틀비틀 다가가 송옥루의 몸 위로 쓰러졌다. 송옥루는 무게에 눌려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를 밀어내고는 일어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봤다. 

“매일 밖에서 술 먹고 즐겁게 지내면서, 내가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눈앞의 여인이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꽃 같던 얼굴이 지친 것을 바라보던 유소호가 피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고 달랬다. 

“낭자, 지금 내가 냉대했다고 나무라는 건가요? 그럼, 사과해야지요. 아니면 다음에 낭자를 데리고 연회에 참석할까요. 우리가 그날처럼…….”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옥루가 눈물을 철철 흘렸다. 

“지금 예전에 내가 연회에 나갔었다고 날 타박하는 거죠. 사사건건 그걸로 놀리잖아요. 어머니가 그러시는 건 넘어가겠지만, 당신까지…….”

유소호는 자기 말이 또 어디가 잘못된 건지 몰라서 얼떨떨해하며 서둘러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을 세게 붙잡힌 송옥루는 아파하면서 손을 뺐고, 유소호는 다시 급하게 잡으려다가 손에 난 상처를 보았다. 

“어쩌다가 이런 거요?”

송옥루는 아무런 말 없이 손을 잡아뺐고, 마침 간식을 가지고 들어오던 녹옥이 입술을 내밀며 대답했다. 

“노야, 부인이 오늘 저녁을 직접 만드셨어요.” 

유소호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호호 불었다. 

“당신이 그런 걸 어떻게 한다고. 금을 켜던 손으로 어찌 부엌칼을 쥐어요.” 

그리고는 녹옥이 들고 온 간식을 힐끔 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음식도 안 해본 사람이, 잘못 먹고 배탈 나는 건 아니고요?”

송옥루가 이불을 덮어쓰고 울기 시작했다. 

“형님하고 비교할 수 없는 거 알아요. 난 치장이나 하고 돈을 허투루 쓰기나 해요. 쓸모없고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이에요. 어머니 혼자 거기에 계신 것도 마음 아픈데, 짐 싸서 대명부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요.”

유소호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파서 손을 힘껏 쥐었다. 연회석에서 사람들이 조롱하던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조씨……. 이용……. 조씨……. 성지……. 강녕부…….

송옥루는 한참 울어대도 유소호가 달래주지 않자, 의아해하며 알아서 몸을 일으켰다. 유소호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파랗게 질려 있는 걸 보고 놀라서 이름을 부르며 몸을 흔들자, 정신을 차린 유소호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옥루, 내 마음을 잘 알지 않아요. 괜한 소리 하지 말아요.” 

송옥루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교태를 부리며 유소호에게 안겼다. 

“이랑, 힘들죠? 공무가 그렇게 바빠요? 중요한 일 많은가요? 그래도 본인을 잘 챙겨야죠.”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한 듯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이랑, 언제 날 잡아서 대명부로 돌아가요. 우리 밭에 천막…….”

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모를까, 유소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옥루, 대명부에 땅을 왜 그리 많이 샀어요? 지금은 보리를 곧 수확할 때인데, 보리밭을 망치면 안 돼요.” 

송옥루가 겁먹은 듯 고개를 숙였다. 

“이랑. 나, 나는 그냥 집에 쓸 돈을 벌려고……. 십방촌의 땅은 형님에게 주었고……. 어머니가 매일 일 하셔서……. 나, 나는…… 도움이 되고 싶어서…….”

꽃 같은 얼굴로 애잔하게 하는 말에 유소호는 마음이 약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품에 안고 위로하려고 하다가 연회에서 사람들이 하던 말이 떠올라 가슴이 쿡 쑤셨다. 갈수록 가슴이 답답해져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자고 있어요. 어머니에게 다녀올게요.” 

그러고는 송옥루가 대답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가버렸다. 멍하니 문을 바라보던 송옥루는 눈물을 거두고 이불을 움켜쥐며 녹옥을 불렀다. 

“노야가 혹시 밖에 망할 계집을 둔 건 아닌지, 가서 알아봐라. 어째서 매일 정신이 빠져서 저러는 것이야!” 

녹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이제 쉬실 거냐고 묻자, 송옥루가 혀를 차며 욕을 퍼부었다. 

“쉬긴 개뿔이! 노야가 거의 열흘 가까이 내 몸에 손도 대지 않는데, 일찍 쉬라고? 네가 여우처럼 치장하고 있는데 마음이 놓이겠니?” 

녹옥은 고개를 조아리며 꿇어앉아 가당치 않다고 연신 외쳤다. 송옥루도 때릴 기운이 없어서 혀를 차며 고함쳤다. 

“썩 꺼지지 않고 뭘 해. 가서 노야를 망할 노인네 거처에서 불러오란 말이야! 조금이라도 늦으면 네 껍질을 벗겨 버릴 거다!” 

녹옥이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유씨 거처엔 여전히 예전부터 쓰던 낡은 사등이 걸려 있었다. 사등 아래 앉아서 살피던 유소호는 유씨가 약을 먹자 물을 건넸다. 

“어머니, 등을 바꿔야겠어요.” 

그러다가 침상에 놓인 바느질거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어머니, 이런 것 그만 하세요. 몸이 못 견딥니다.” 

한숨을 내쉬며 유소호를 살피던 유씨는 취한 듯 어두운 그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입이 열 개나 되는데, 네 봉록, 하사품으로 되겠니? 장원 땅도 열몇 묘 샀지, 네 처는 먹고 마시고 치장하는 걸 좋아하지.” 

그 이야기가 나오자 울화가 치민 유씨가 유소호를 잡아당겼다. 

“한 달에 옷을 일고여덟 벌이나 지었다. 새 옷도 그저 기름이 조금 묻었을 뿐이야. 빨아도 지지 않는다고 바로 버리더구나. 집에도 있지 않고, 매일 꽃구경, 거리 구경한다고 밖을 나돈다. 시녀 둘까지 꼴이 말이 아니다. 멀쩡한 죽을 두고 매일 무슨 우유를 먹는다고. 부엌어멈도 너덧이나 바꿨어. 직접 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신발 천을 만들라고 했더니, 입으로는 알겠다고 하고는 지금까지 바늘 드는 꼴을 못 봤다…….”

유씨가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조 대저가 게으르다고 매일 뭐라고 했다만, 그 아이는 우리 일가의 생활을 다 돌봤다. 달마다 신발 천 하나는 지어서 내놓았어. 지금 이 며느리는, 매일 할 일도 없으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손을 뿌리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앞으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유씨는 얼떨떨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들을 바라봤다. 유소호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화가 난 듯 말했다. 

“어머니, 그 돈 몇 푼 없다고 못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옥루는 원래 그런 것 못해요. 살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뭐 하러 매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강요하십니까. 그리고 왜 자꾸 그 여인과 비교하십니까?” 

말하다 보니 마음이 아파서 가슴을 들썩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왜 쫓아내셨어요.” 

유씨는 가슴이 턱 막혀서 한참 동안 유소호를 바라봤다. 

“내가 쫓아내? 내가 쫓아댔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옥루를 집에 들이겠다고 우기지 않았으면, 며느라기가 떠났겠니? 인제 와서 나를 탓하는 것이냐? 그때 대체 네 처한테 그렇게 한 사람이 누군데…….”

“며느라기, 며느라기! 그 여인은 이미 어머니 며느리가 아닙니다! 제 처도 아니고요!” 

유소호가 갑작스럽게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앞에 있던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벽에 부딪히고는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분노에 유씨는 겁에 질려 부르르 떨고는, 유소호가 소매를 휘두르며 나가는 걸 눈 뜨고 보고만 있었다. 힘껏 젖혀진 대나무 발이 심하게 흔들리고, 거칠게 닫힌 나무 문이 콰앙 하고 울렸다. 그 바람에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방 안의 사등이 거세게 흔들렸다. 

유씨는 바닥에 흔들리는 제 그림자를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바라보다가, 숨이 쉬어지지 않아 그대로 침상 위로 쓰러졌다. 

그때, 시녀 운아는 부뚜막 앞에 앉아 부엌어멈 세 명과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었다.

유소호는 영문 모를 울화가 치민 상태로 밤바람을 일으키며 거처로 돌아갔다. 송옥루는 허리춤에 얇은 이불을 반쯤 두르고, 새하얀 피부를 드러낸 채 붉은 원앙 배두렁이만 걸치고 자는 듯 아닌 듯 누워있었다.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붉고 하얀 그녀를 보자 온몸에 열이 올랐다. 

유소호는 옷만 대충 풀어 헤치고는 휘장도 내리지 않고 촛불을 끄지도 않고는 이불을 젖히고 몸을 숙였다. 열흘 가까이 몸을 겹치지 않은 여인은 견디지 못하고, 하지 말라고 낮게 애원했다. 유소호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여인의 두 다리를 치켜들고 힘껏 충격을 가했다. 양손으로 온몸을 주무르자, 지나간 자리마다 울긋불긋한 흔적이 남았다.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여인이 아프다고 고함쳤다. 유소호의 커다란 입이 가슴 앞에 멈추는가 싶더니, 젖가슴을 꽉 깨물렸다. 여인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몸에 힘을 주며 아프다고 외쳤다. 뜨끈한 액체가 몸을 적시더니, 유소호가 힘이 풀린 듯 옆으로 넘어가고 곧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 기분에 송옥루는 유소호가 안쪽에서 발가벗은 채 자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불을 휙 잡아채 뒤집어쓰고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천둥소리와 함께 비가 후두둑 내렸다. 바람이 휘몰고 온 빗방울이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들이치자, 깊이 잠든 유소호가 부르르 떨며 깨어났다. 발가벗은 나신, 그리고 바람이 불어 온몸에 소름이 돋은 걸 보고 고개를 돌렸더니, 송옥루가 자기는 이불을 둘둘 말고서 단잠을 자는 걸 보고 화가 치밀었다. 유소호가 거칠게 이불을 잡아챘다. 

하지만 침상 앞에 놓인 사등 불빛 아래, 온몸에 멍이 가득한 여인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게 갑작스럽게 드러나자 분노가 일시에 사라졌다. 그 대신 망연함이 몰려오는데, 송옥루가 마침 이때 눈을 떴다. 그녀는 유소호와 눈을 마주치고는 부르르 떨더니 금세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유소호는 황급히 이불로 두 사람을 감싸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옥루, 나는, 미안해요. 내가 아프게 했어요. 술을 마셔서…… 내가…….”

송옥루는 그의 가슴에 기댄 채 낮게 흐느끼면서 거친 정사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이랑, 조정에 괴롭히는 사람이 있나요?”

한참 울던 송옥루는 유소호의 미안함이 진심인 걸 느끼고 조금은 서러운 마음이 줄어들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유소호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는데 뜻밖에도 손 끝에 눈물이 닿았다. 화들짝 일어나 앉은 여인의 가슴이 눈앞에서 흔들렸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할 뿐이에요.” 

유소호가 웃으며 그녀의 봉긋 솟은 가슴을 어루만지자 송옥루가 순간 교태를 부리며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고, 송옥루가 그의 품에 바짝 안기면서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정에 사람이 많잖아요. 게다가 당신은 어전시의 수장인데, 일이 있어도 아랫사람을 시키면 되지, 굳이 직접 한다고 해요. 본인은 지치고, 나는 독수공방하고.”

유소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농사일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지, 듣기만 해서 되겠어요?” 

그러다가 어두워진 얼굴로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절강으로 내려갔을 때, 얻은 바가 많았어요. 그때도 고되긴 했지만 지금보다 훨씬 나았고. 차라리 난 관직에서 물러나서…….”

“이랑! 그게 무슨 말이에요!” 

송옥루가 질겁하며 그의 입을 막자, 유소호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늦었어요, 이제 어서 자요.”

그런데 송옥루의 작은 손이 몸 아래로 꿈틀꿈틀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등불 아래 복숭아꽃 같은 그녀의 얼굴이 추파를 던지고 있었다. 처음 겪는 이런 야릇한 일에 유소호는 순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신음했다. 송옥루가 별안간 이불을 젖히더니 몸을 숙이며 야릇하게 웃었다. 

“이랑, 소첩이 제대로 모실게요.”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는 여인의 모습이 유소호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한창 달아오르는데, 누군가 쾅쾅 문을 두드리더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서, 송옥루는 아차 하다 침상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밖에 있는 홍향이 일어서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밖에 큰비가 내려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뒤이어 운아가 목소리를 높여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 났어요! 노야! 노부인이 죽었어요!” 

순간 놀란 유소호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다. 송옥루가 말리지 않았다면, 벌거벗은 채 밖으로 달려갈 뻔했다. 무슨 일인지 물으며 옷을 입는데, 홍향이 등불을 들고 들어왔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시녀가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한 걸 본 유소호는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조금 전에, 제, 제가, 노부인이 바닥에 누워서, 움직이지도 않고…….”

운아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턱을 덜덜 떠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 했다. 부엌어멈들과 수다를 떨던 운아는 유씨가 성격도 좋고 비도 오고 하니 급히 돌아갈 것 없다고 생각했다. 돌아가 봐야 또 붙들려서 끝도 없이 바느질이나 하느니 차라리 이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는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쌍륙(雙陸: 인도에서 유래한 장기 비슷한 놀이)으로 돈내기하다가 한밤중에 유씨 처소로 돌아간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유씨가 바닥에 쓰러진 걸 보고는 혼비백산해서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리고 엉금엉금 기듯이 후원으로 온 것이다. 

“그게 언제냐?”

옷을 챙겨입은 유소호가 우산을 쓸 겨를도 없이 밖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솔직히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운아는 그저 벌벌 떨며 조금 전이라고만 반복했다. 

“쓸모없이 망할 년. 노부인께 무슨 일이 생기면 너도 같이 묻어 버릴 거다.” 

옷을 갈아입은 송옥루가 대번 운아의 뺨을 내리치며 욕설을 퍼붓자, 질겁한 운아가 그대로 넘어졌다. 홍향이 우산을 들고 송옥루와 허둥지둥 앞뜰로 간 뒤에, 옷을 챙겨 입고 나온 녹옥이 운아를 걷어차며 호통쳤다.

“어서 가지 않고 뭐 하니? 죽여줄까?”

운아는 그제야 우왕, 울면서 녹옥을 따라 앞뜰로 향했다. 제발 제 편을 들어 달라고 녹옥에게 빌면서,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도록 울어댔다. 

막 거처 앞에 당도해보니, 홍향이 뜨거운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나와서 주변을 살피지도 않고 뿌렸다. 녹옥이 화들짝 놀라 피하는데, 안에서 유소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골목 입구 의원을 모셔와라. 어머니, 어머니, 괜찮으세요?”

송옥루도 몇 걸음 만에 달려 나와 그녀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안 가고 뭐 해!” 

안에서 유씨가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자, 운아는 유씨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알고는 공을 가로채려는 듯 후다닥 달려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호 의원을 데리고 돌아왔다. 유씨는 벌써 정신을 차렸지만, 말을 하지도 못하고 사람도 몰라보는 것 같았다. 호 의원이 진맥하고 안색을 살핀 다음에 입을 열었다. 

“울화가 치밀어서 그러시는 겁니다. 기와 혈이 상충해서 맥이 실조했습니다. 약을 잘 달여 먹고, 울화를 풀어주면 어느 정도는 나을 겁니다.”

유소호는 자기가 한 말 때문에 유씨가 이렇게 됐다는 걸 알기에 장이 뒤틀릴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그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자, 송옥루가 곁을 지키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유소호는 호 의원이 처방을 써주자 운아, 홍향에게 장사와 함께 약을 지어오라고 명하고는, 호 의원을 배웅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침상 가에 앉아 유씨의 손을 잡고 눈물만 흘렸다. 송옥루가 할 수 없이 녹옥과 함께 직접 의원을 배웅하고 돌아왔다. 

“이랑, 슬퍼하지 말아요. 날이 밝으면 태의를 모셔와요.”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약을 달여오자, 직접 먹이고 밤새 꼬박 곁을 지켰다. 다음 날, 유씨가 기운을 어느 정도 차린 걸 보고서야 조당에 나가 휴가를 받고 태의를 모셨다. 태의가 하는 말도 호 의원과 다르지 않아서 마찬가지로 약 처방을 해주었다. 

유소호는 그날부터 매일 밤 유씨 곁을 지키며 약을 먹였고, 송옥루조차 대신하지 못하게 했다. 처음엔 매일 곁을 지키던 송옥루는 이삼일 만에 온 방에 진동하는 약 냄새와 오줌 냄새에 기겁해서는 그 다음부터는 정원에 나가 앉아서 물이나 약 시중만 들었다. 

그 김에 유씨의 장부와 은자 함을 꺼내서 맛있는 것, 보약을 잔뜩 사들이다가, 지나치게 보약을 먹은 유소호가 열기가 올라 코피를 흘리고서야 그만두었다. 

그날 잠시 장부를 들여다본 송옥루는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돈을 이렇게나 많이 모았을 줄은 몰랐다고 생각했다. 오시가 되자 신이 나서 유씨의 거처로 가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유소호가 나지막이 하는 말이 들렸다. 

“어머니, 뭐가 필요하세요? 제가 바로 가서 사 오겠습니다.” 

유씨는 요 며칠 몸이 꽤 좋아져서, 앉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렸다. 다만 눈이 흐린 것이 기운이 영 없었다. 열 마디를 물으면 한 마디 대답할까 말까였고,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았다. 송옥루는 신경 쓰지 않았고, 유소호는 어릴 때부터 유씨가 병이 나면 그랬던 것처럼 곁에 앉아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건넸다. 오래된 옛일부터 최근에 일어난 새로운 일까지 줄줄 읊어대는데, 갑자기 유씨가 며느리가 보고 싶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송옥루는 멈칫하다가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며느리? 유씨가 보고 싶다는 며느리가 제가 아님을 너무나 잘 알았다. 

유소호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알겠다고 하고는 잠시 서성거리다가 밖으로 나와서 꽃과 풀이 잔뜩 자란 연못가에서 발을 걷어찼다.

이때 강녕의 날씨는 이미 더워지기 시작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십여 가구가 흩어져 있는데, 모두 울타리로 에워싸고 벽을 하얗게 칠한 흙집이었다. 마을 밖에 흩어져 있는 논에서 사내와 여인들이 허리를 숙이고 연근을 뽑고 있었다. 

남색 무명옷을 입은 임새옥은 한창 우협을 먹고 있는 전가아의 손을 잡고는 눈앞에 갈수록 쌓여 가는 연근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두립을 쓴 소작농들이 분주히 오가며 연근 더미를 마을 밖으로 보낼 마차에 가져다 실었다. 

“대저아! 연근 두 번 심었는데, 이번엔 뭘 심으면 좋을까요?” 

젊은 사내가 두립을 벗으며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예전에 십방촌에 연근 재배를 배우러 왔던 젊은이였다. 이름은 수생(水生), 올해 막 아비가 되어서 어딜 가든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임새옥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뭘 심었죠?” 

“헤헤. 대저아 말대로 논벼를 심었죠.”

“연근은 얼마나 남겨 두었어요?” 

임새옥이 갓 캐낸 연근을 바라보며 다시 묻자, 수생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연근 소요량이 많아서, 3분의 2는 캤죠.”

“그럼 수생 채소를 심는 게 좋겠어. 등등채(藤藤菜: 공심채)나, 아고(芽菇: 벌씀바귀) 같은 거요. 그럼 묵은 연근 수확할 때 같이 수확할 수 있어요. 논벼 농사에 영향도 주지 않고요.” 

그녀는 전가아의 손을 잡고 논으로 들어가서 그중 몇몇 곳을 가리키며 알려주었다. 

“이곳엔 농사짓지 말고 물고기 길러요. 내년 봄에 다시 심고.”

수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의 재주를 잘 아는 그는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바로 가서 장두(莊頭: 소작농의 우두머리)에게 말할게요.” 

임새옥은 수생이 멀어지는 걸 바라보며 연잎을 꺾어 전가아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전가아, 겨울이 되면 물고기 잡자. 할 수 있겠어?”

전가아가 우협을 다 먹고 손가락을 핥다가 다 핥은 손가락을 옷에 닦으며 대답했다. 

“해. 더 먹을래.”

임새옥이 입술을 내밀며 옷의 기름 자국을 가리켰다. 

“그러게, 이렇게 좋은 옷 입지 말라니까. 이건 빨아도 안 진단 말이야! 앞으로 옷에 손 닦으면 안 돼! 음, 깨끗이 핥기만 해.” 

전가아가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뭐가 무서워서. 더러워지면 버리면 되지!”

임새옥이 전가아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쳤다. 

“그렇게 낭비하다가 다음 생에 거지로 태어난다!” 

그러고는 먼저 가버리자, 전가아가 뒤에서 입술을 내밀고 따라갔다. 빨라졌다가 느려졌다가 하는 임새옥의 걸음을 따라가느라 두 다리가 아팠다. 바닥에 앉아 버리고 싶었지만, 다시 들판에 버려질까 봐 이를 악물고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 멀리 가지 않아서 곧 작은 집에 도착했다. 다른 집과 마찬가지로 울타리 담을 두른 집 마당에서는 암탉 몇 마리가 먹이를 찾아 조롱박 덩굴 아래를 돌아다녔다. 길고 울창한 조롱박 잎이 구불구불 잔뜩 얽혀 있어서 그 아래 시원한 그늘이 생겼다. 다른 구석엔 화분 일고여덟 개가 놓였고, 풀과 들꽃이 들쭉날쭉 자랐다. 어떤 건 아직 진흙이 젖은 걸 보아 얼마 전에 심은 듯했다. 

본채 두 칸 옆에 낮은 방 두 개가 붙어 있었다. 하나는 쇠스랑, 괭이 등 농기구가 걸린 창고, 또 하나는 부엌이었다. 솥엔 뭐가 끓는지 몰라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향긋한 냄새가 퍼졌다. 

마당에 들어선 전가아는 숨을 몰아쉬며 더는 모르겠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옷에 붙은 고기 부스러기에 닭들이 다가와 쪼아댔고, 화들짝 놀란 전가아가 손을 휘저어 쫓아냈다.

전가아가 기겁하고 튀어 오르자, 임새옥이 또 깔깔 웃었다. 

“하하하, 쌤통이다! 함부로 손을 닦으니까 그렇지! 눈, 쪼아 먹힐라, 조심해야지!” 

전가아가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못됐어! 아버지한테 말할 거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금남이 밖에서 물었다. 

“뭘 말한다고?” 

전가아는 불쑥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자 멈칫했다. 푸른 장삼을 입은 소금남이 웃음을 머금고 마당으로 들어오자 엉거주춤 발을 비비면서 아버지, 하고 부를 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임새옥이 웃으면서 ‘너, 의리 있구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고는 문가에서 구리 대야에 손을 씻었다. 

“대관인, 마침 잘 오셨어요. 종자(粽子: 쫑즈. 찹쌀, 멥살, 쌀가루, 대추, 팥, 고기 등 재료를 댓잎, 연잎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싸서 쪄먹는 요리) 쪄뒀어요. 입맛에 맞는지 한번 드셔보세요. 전가아, 이 물 버리고, 다시 받아서 손 씻어. 깨끗하게 안 씻으면 군침만 흘릴 줄 알아.”

소금남은 마당에 서서 꽃처럼 활짝 웃는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은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종자를 꺼내고 있었다. 이따금 제 뜨거운 손가락을 귓불에 대고 열기를 식히면서. 작달막한 전가아는 낑낑대며 곁에 있는 항아리에서 물을 떠서 스스로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작은 손을 열심히 비벼 씻었다. 한순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임새옥은 조롱박 덩굴 아래 사람을 시켜 새로 만든 네모난 작은 탁자를 내놓았다. 전가아가 의자를 들고 와서 막 혼자 앉으려는데 임새옥이 눈을 부릅뜨자, 겸연쩍어하면서 소금남 옆으로 의자를 밀었다. 

“아버지, 앉으세요.”

소금남은 너무 놀라 못난 모습을 보일 뻔했다. 며칠이나 지났다고, 성격이 괴팍하던 내 아들이 맞는가? 

임새옥이 따끈따끈한 종자를 담은 광주리를 들고는 발로 네모난 의자를 차면서 이쪽으로 오자, 소금남이 서둘러 광주리를 받았다. 임새옥이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의자 하나를 더 내왔다. 세 사람은 그렇게 조롱박 덩굴 아래 둘러앉았다. 

소금남은 오색 실이 묶인 종자를 보고 조금 머뭇거리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느새 종자 하나를 들어서 날렵하게 실을 풀고 호호 불어서 전가아에게 건넸다. 

“천천히 먹어. 뜨거워.”

그러고는 눈 깜빡할 새에 하나를 눈앞에 건네더니 웃었다. 

“대관인, 드셔보세요. 사실 저는 단 걸 좋아하는데, 남방 사람은 짠 걸 좋아하더라고요. 입맛에 맞으시겠어요?”

소금남은 임새옥이 건네는 종자를 재빨리 건네받았다. 사실 단 걸 좋아하지 않지만, 새하얀 찹쌀에 붉은 대추가 올라간 걸 보니 저도 모르게 군침이 돌아서 한입 베어 물었다. 임새옥과 전가아는 벌써 하나를 다 먹고 두 개째 연잎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이번엔 전가아가 직접 연잎 껍질을 벗겼다. 평소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아이가 지금은 서툴게 잎을 벗기고 있었다. 입가에 부스러기를 잔뜩 묻힌 걸 본 소금남이 무심결에 손수건을 꺼내 닦아주려고 했는데, 전가아가 다 먹으면 씻을 거라고 말하면서 얼굴을 피했다. 

“많이 먹으면 질리니까 그만 먹어요.” 

임새옥이 손을 털며 광주리를 들고 일어나면서 알아서 씻으라는 듯이 전가아를 향해 고갯짓했다. 

“대관인, 댁에 계신 분도 맛보게, 가실 때 몇 개 가지고 가세요.”

소금남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이 어느새 민첩하게 한 봉지 담아서 주었다. 세수를 마친 전가아가 구석에 주르륵 놓인 화분 앞으로 달려가 쭈그리고 앉는 걸 보고 소금남도 다가갔다. 

“전가아, 네가 심은 것이냐?” 

“응.” 

전가아가 작은 삽을 들고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화분의 흙을 뒤집었다. 임새옥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되게 똑똑해요. 밭에서 옮겨 온 화초를 다 살렸어요.” 

소금남은 마음에서 우러나 미소 지었다. 정신없이 바쁜 아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과감하게 시선을 그 여인에게로 옮겼다. 문득 예전에 노아촌에서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모습이 떠올랐다. 겁먹은 듯한 눈빛 말고 다른 건 이미 희미해졌다. 

요즘 돌아다녀서인지, 얼굴색은 경성에 살던 때처럼 뽀얗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탔지만 발그레한 것이 건강하면서도 생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시골 사람들이 가장 즐겨 입는 푸른 무명옷만 입고 아름다운 목덜미를 드러낸 채, 전가아가 뭘 잘못했는지 갑자기 허리를 숙이더니 팔을 내밀어 집어 주었다. 순간, 손목에 낀 은팔찌가 드러났다. 

시선이 은팔찌로 향한 소금남은 갑자기 번쩍이는 빛에 눈을 찌푸렸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라보고는 믿을 수가 없어서 제 눈을 비볐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다가 멈칫했다. 이 여인이 밖을 돌아다니고 있지만, 사내를 대할 땐 지극히 예를 갖추는 걸 잘 알았다. 절대로 사내와 단둘이 있지도 않았다. 그 역시 몇 번 이곳에 오긴 했지만, 잠시 있다가 돌아갔을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놀라고 의아해도 함부로 여인의 손목을 잡을 수는 없었다. 

“대관인?”

소금남의 안색이 조금 이상한 데다 시선이 자기 손목에 닿은 걸 본 임새옥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불렀다. 소금남은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은팔찌를 가리켰다. 

“이거, 이거, 참 잘 만들었군요.”

임새옥이 피식 웃으며 손목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대관인, 그래도 집안일을 잘 챙기시는데요? 이게 소씨 가문 물건이라는 걸 알아보시다니 말이에요.” 

“대낭자에게 주었었군요. 어쩐지 찾아도 없더라니. 함께 묻어줄 생각이었었는데.” 

소금남이 뜻밖이라는 듯이 하는 말에 임새옥은 다시 팔찌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중요한 거라면 돌려드려야죠. 사실 전 장신구를 즐겨 하지는 않아요.” 

임새옥이 팔찌를 빼려고 하자 소금남이 다급히 말렸다.

“혜낭이 준 걸 제가 어찌 돌려받습니다. 마다하지 않으면, 제가 더 기쁘죠.” 

소금남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 팔찌에 새겨진 글자, 그리고 조금 전에 자기가 한 말을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이곳에 더 있기가 거북해졌다. 

“며칠 출타합니다. 수고스럽지만, 전가아를 부탁합니다.” 

갑자기 이상하게 구는 소금남의 모습에 임새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어서 그저 웃기만 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요. 수고랄 것도 없어요. 심부름도 해주는걸요?” 

그러고는 일어나라고 전가아를 툭툭 쳤다. 

“아버지 가신대. 안녕히 다녀오시라고 볼에 입 맞춰 드려.” 

“난 그런 거 안 해. 난 사내야.” 

전가아가 자기를 무시하냐는 듯 힐끔 보고는 일어서서 소금남을 향해 제법 그럴싸하게 공수했다.

“아버지, 서둘러 다녀오십시오.” 

전가아의 모습에 임새옥과 소금남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대뜸 시를 지어내던 농부 노인에게 소식을 들은 그날 이후, 임새옥은 강녕에서 1년 머물기로 결정을 내렸다. 운대를 심어 소금남에게 빚을 갚으려는 것과 바다 가까운 이곳에 방대한 해외 운수 선박 상단이 있어서였다. 어쩌면 중국이 원산지가 아닌 신기한 종자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급히 돌아갈 이유도 없고, 가능하다면 배를 타고 바다 멀리 나가보는 것도 꽤 괜찮을 듯했다. 

정말로 좋은 생각 아냐? 나, 한때 영어 좀 했다고. 어찌어찌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혼자 음흉하게 웃는데, 영아가 입술을 내민 채 보따리를 뒤지며 입을 열었다. 

“대저아, 우리 돈도 없는데 집 안 옮겨요?” 

그 말에 임새옥도 바로 현실로 돌아왔다. 배 타고 나가기는 무슨. 묵을 만한 저렴한 곳을 찾기만 해도 좋겠는데.

임새옥은 이 대관사를 통해서 소금남에게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렇게 종산 근처 소씨 가문의 장원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장원주는 지금 주로 조숙 연근 재배를 맡아서 했고, 장원에 임새옥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임새옥은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소 대관인, 정말 세심한 사람이었구나!

이곳으로 옮겨온 지 사흘 후, 소금남이 전가아를 데리고 놀러 왔다. 임새옥이 울타리 밖에 채소밭을 가꾸는 걸 본 전가아가 유난히 흥미를 보이며 넋이 나가서 놀다가, 돌아가자고 하니 울고불고 난리가 나서, 임새옥이 지금까지 전가아를 데리고 있게 되었다. 

임새옥은 마치 양치기가 양을 방목하듯이 풀어주는 것 같아도 버르장머리 없는 전가아의 무례한 나쁜 습관을 서서히 고치고 있었다. 전가아는 감히 툭하면 자기 엉덩이를 두들겨 패는 이 여인이 밉고 무섭지만, 그녀의 현란한 말재주, 그리고 갖가지 놀이, 음식에 홀렸다. 그래서 첫날 밤에 난리를 부린 것 말고는 재미있게 지내고 있었다. 

이틀 동안 추적추적 비가 내리다가, 오늘 드디어 해가 떴다.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담장에 햇볕이 내리쬐자 임새옥은 방 안에서 뛰쳐나와서 마당에 빨랫줄 두 줄을 걸었고, 영아가 옷을 담은 커다란 대야를 들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곧바로 뛰쳐나왔다. 

“오늘도 널지 못했으면 곰팡이 슬었을 거예요! 고작 몇 벌 남은 옷인데!” 

영아는 하늘에 욕을 하며 서둘러 옷을 털고 빨랫줄에 널었다. 임새옥도 손을 놀리며 빙긋 웃었다. 

“미안, 미안. 강녕은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운 곳이야. 비도 많이 오지만, 햇볕도 풍족하지. 총체적으로 날씨가 괜찮다고. 게다가 농작물 재배에 유리해. 하늘 욕하면 안 돼.”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방 안에서 전가아가 쉬할 거라고 큰소리로 외쳤다. 원래 늦게 일어나는데 어제 물을 많이 마셨으니 소변이 급해서 깬 듯했다. 임새옥과 영아가 대답하면서 후다닥 안으로 달려갔지만, 늦었다. 전가아는 고함치는 동시에 발가벗은 몸으로 일어나 바닥에 오줌을 쌌다. 

“아이고!” 

영아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전가아의 발가벗은 궁둥이를 찰싹 때렸다. 

“이 계집애가! 감히 나를 때려!”

전가아도 지지 않고 발가벗은 채 펄쩍 뛰었다. 영아는 상대도 하지 않고 아궁이 재를 치우러 나갔다. 임새옥은 기도 차고 우습기도 해서 전가아를 붙잡고 혼내면서 옷을 입혔다. 알아서 세수하라고 한 다음에 휘장을 젖히고, 창문을 열고, 영아와 함께 쓸고 닦았다. 

“냄새 나 죽겠네! 밤엔 혼자 여기에서 자요!”

영아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옷을 말리면서 말했지만, 전가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당에 앉아서 양손에 우협을 들고 신나게 먹었다.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져서 마당 안에 닭들이 죄다 모여들었다. 

전가아는 이 소란스러운 시녀가 이젠 전혀 두렵지 않아서 얼굴이며 손에 고기 부스러기를 잔뜩 묻히며 보란 듯이 신나게 먹었다. 아궁이에서 뜨거운 죽을 데우던 임새옥은 그저 웃기만 했다. 

“깨끗하게 먹어요! 흘리지 말고! 이렇게 음식 낭비하면 이틀 굶길 거예요!” 

영아가 허리춤에 손을 대고 고함치는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어머, 소리가 들렸다. 

“이게 누군데 감히 우리 소야한테 이렇게 말하지?”

그 소리와 함께, 울타리 담장 밖에서 꽃무늬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걸어들어왔다. 스물예닐곱쯤 되어 보이는데, 꽃처럼 화려하게 생긴 얼굴에 항주산 비단을 팔에 걸치고 금영롱 머리 장식과 금으로 만든 얼레빗을 꽂고 있으니 햇살 아래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손에 움켜쥔 금박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그 여인 뒤로는 열너댓 살로 보이는 시녀가 바짝 붙어서 종이 양산으로 해를 가려주고 있었다. 

차림을 보니 부귀한 집 여인이고, 전가아를 ‘우리 소야’라고 부르는 말에 여인이 대충 누구인지 짐작한 임새옥이 웃는 얼굴로 맞이했다. 

“소가의 대낭자신가요? 이 더운 날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기 조롱박 덩굴 밑이 시원해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인은 힐끔 그녀를 바라보곤 아무런 말도 없이 임새옥을 지나쳐서 여전히 신나게 먹느라 시선도 주지 않는 전가아를 향해 곧장 다가갔다. 

“세상에, 우리 전가아 꼴이 이게 뭐니.”

그녀는 마음 아파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손수건을 꺼내 전가아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러면서 전가아 손에 들린 우협을 빼앗아서 불똥에 데인 듯이 바닥에 내던졌다. 

“이런 더러운 걸 함부로 먹으면 안 돼!”

여인이 시비를 걸러 왔다는 걸 깨달은 임새옥은 입가를 휠 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아가 옷을 툭 대야 안에 던지고는 곁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여인이 있는 쪽으로 바닥을 쓸었다. 

“어디에서 온 미치광이야. 남의 집에 들어와서 무슨 깨끗 타령인지. 가요, 가.”

이런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 여인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닭똥이 섞인 흙먼지를 뒤집어쓴 여인은 화들짝 놀라 전가아를 안고 뒷걸음질 치며 고함쳤다. 

“여긴 우리, 우리 소가 땅이다! 이 미친 여인네들 같으니, 너흰 누구냐?” 

영아가 혀를 차며 빗자루를 벽에 세워두고는 눈을 치켜떴다.

“멀쩡한 사람 꼴 하고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 하지 말아요! 1년 치 방세를 냈어요! 그러니 이 집은 1년 동안 우리 거죠! 소 대관인이 온대도 우리 허락 받고 들어와야 하는데요. 주인도 노비도 아닌 여인네가 어딜 함부로 쳐들어와 행패예요!”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그 여인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며 전가아를 안고 나가려고 했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호랑이 굴에 들어온 거네. 이러다 우리 소야 죽겠네.”

여인은 한창 신나게 먹다가 우협을 빼앗긴 전가아가 화가 난 것도 모르고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화가 나 있던 전가아는 갑자기 들어 올려져 안기자 다짜고짜 여인의 얼굴을 긁으며 고함쳤다. 

얼굴을 긁힌 여인은 날카롭게 비명을 지으며 얼굴을 감싸느라 전가아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고, 갑자기 넘어진 전가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목소리를 높여 울어댔다. 여인은 그제야 당황했지만 평소에 이 아이한테 당한 게 생각나서 다가갈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임새옥이 옆에서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여인은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전가아를 달래보려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전가아가 요 며칠 온순해져서 그렇지, 원래 포악하고 건방진 아이였다. 임새옥이 아이의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다른 것으로 꼬셔서 난리를 부리지 않았을 뿐이지, 지금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흥이 깨졌는데 성질을 참을 리가 있나. 

아이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여인과 시녀를 쫓으며 때리고 욕하고 난리가 났다. 평소에 전가아에게 당해왔던 여인과 시녀는 체면 불고하고 후다닥 달아났다. 영아는 아직도 울고불고 난리가 난 전가아를 붙들고 사람들이 사라진 방향으로 혀를 찼다. 

“전가아, 할 말이 있으면 말로 하라고 했지? 누가 이렇게 성질부리래?”

임새옥은 마당에서 울며불며 의자를 던지고 걷어차는 전가아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우협 먹을 거야! 쟤가 날 던졌잖아! 그러니까 때려야지!”

전가아는 들고 있던 의자를 임새옥에게 던지진 않고 억울한 듯 고함쳤다. 임새옥은 아이를 끌어당겨 얼굴을 씻기러 가면서 말했다. 

“그럼 말로 해야지. 말로 이야기해야 네 기분을 안다고 말했지? 울고불고할 줄만 알고. 넌 그것밖에 못 해?”

전가아는 입술을 내민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다시 씻겨주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영아는 탁자와 의자를 다시 세워놓고, 채소죽을 푸고 우협과 하엽병을 한 접시에 담아서 나왔다. 

“그걸 뭘 말로 해요! 때려야죠!” 

영아의 말에 임새옥이 살짝 노려보고는, 와구와구 먹는 전가아에게 물었다.

“전가아, 저게 누구니? 누군지 알아?”

“할머니가 양 이낭이라고 부르랬어. 아버지는 안 된대. 매일 안으려고 해. 냄새나서 머리 당기며 놀았어.”

전가아가 먹느라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임새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소씨 가문과 별 교류가 없긴 하지만, 그 정도 되는 집안에 시첩이니 이낭이 없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골치 아픈 일에 엮인 것 같아. 그러니까 혼인한 남자를 함부로 상대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게 여기서 살면 안 된다고 했잖아. 분명 오해했을 거야.” 

임새옥이 죽을 먹으며 꿍얼거리자 영아가 투덜거렸다.

“이 세상에 저희가 묵을 집이 없겠어요? 저희가 집세를 안 낸 것도 아니고, 밥을 달라는 것도 아닌데, 왜 개나 소나 찾아와서 욕을 해요? 또 오기만 해 봐. 관아에 끌고 갈 거예요. 현령 앞에 가도 그 여인이 억지 쓰는 거라고 할걸요. 대저아, 뭐가 무서워서 지레 겁먹어요!”

“말 한번 잘하네. 못 이기겠다. 아, 소정가 앞에선 말조심해. 놀라서 혼인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떡해.”

“진지한 이야기 중인데 이상한 소리 하실래요?”

영아는 순간 얼굴이 붉어져서 후다닥 죽을 먹고 치우기 시작했고, 임새옥은 깔깔 웃었다. 

“넌 오늘 집에 있어. 난 전가아 데리고 그 어르신, 운대 수확했는지 보러 갈게.” 

“흥, 제가 언제는 매일 밖을 돌아다녔나요. 외출해도 다 먹을 거, 쓸 거 사러 간 거잖아요…….”

하지만 영아의 말끝이 자신 없는 모양으로 흐려지자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맞다. 나도 알아.”라고 했다. 영아는 얼굴을 붉힌 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릇을 닦았다. 

초여름이라 날씨가 맑고 좋았다. 강녕 일대는 논이 아닌 밭엔 거의 보리를 심었다. 전가아를 데리고 시골길을 걷다가, 보리밭에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걸 보고 한 움큼 뽑아 비벼서 보리알을 꺼내 전가아에게 먹였다. 전가아는 달콤하게 먹고 신이 나서 더 달라고 졸랐다. 임새옥은 처음에는 농부가 고생한 이치를 읊다가 전가아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나중엔 눈을 부릅뜨며 늙은 고양이, 여우, 요괴까지 꺼내 협박했다. 전가아가 그제야 고분고분해졌다. 

전가아가 어려서 걸음이 늦고 쉽게 지쳐서 가다 서다 하느라, 두 사람은 한참 만에 산비탈 유채밭에 도착했다. 길가 큰 나무에 앉아 있는 두 사람과 주변에서 느긋하게 풀을 뜯는 나귀가 저 멀리서 보였다. 강녕에 묵은 이래 벌써 여러 번 이곳에 다녀갔지만, 주인을 만나는 건 처음이라 서둘러 전가아를 데리고 다가가 예를 올렸다. 

“어르신, 종자 수확하러 오셨어요?” 

그 노인은 오늘 무명 홑옷을 입었고, 곁에 앉은 사람도 마찬가지로 무명 홑옷에 짚신을 신고 있었다. 사내는 노인을 공경하는 표정이었고, 두 사람 모두 발면병(發面餠)을 반쪽씩 들고 기분 좋게 먹고 있었다. 여러 번 와 본 전가아는 유채엔 이미 관심 없었고, 맛있게 먹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발면병을 가리키며 자기도 먹겠다고 했다. 

(※발면병: 밀가루를 발효시켜 부풀린 다음에 기름을 넣고 굽는 전병. 부자되라는 의미로 집들이 때 자주 먹는 음식)

“집에 가서 만들어 줄게.” 

임새옥이 손등을 찰싹 치며 나지막이 말해도 전가아는 말을 듣지 않았다. 노인이 껄껄 웃으며 한 조각 찢어 아이에게 건넸다. 

“이놈, 딱딱하다고 타박하진 마라.”

“어서 할아버지께 감사드려.”

임새옥은 받자마자 덥석 한 입 베어먹는 전가아를 툭 치며 가르쳤고, 전가아는 내키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고분고분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저쪽에 있는 나귀를 보고는 또 관심이 생겨서 달려가 곁을 맴돌았다.

“가까이 가지 마, 걷어차인다.”

임새옥이 다급히 말하는데, 사내가 벌써 일어나 다가가서는 나귀에게 먹이라고 가르치며 풀을 건넸다. 

“낭자, 이 운대, 이제 수확해도 되겠나?” 

노인은 마지막 한입을 먹고 손을 털고 일어나며 물었다. 임새옥은 그의 시선을 따라 밭을 바라봤다. 벌써 노랗게 변한 한 밭 가득한 운대를 만져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날이 맑고 좋으니 수확하기 좋은 때예요. 며칠 지나서 비가 많이 오면 잘못될 수 있어요.” 

“그래. 그럼 내일 사람들을 데리고 수확해야지. 그런데 수고스럽겠지만, 어찌 기름을 짜는지 알려 줘야지 싶은데.”

안 그래도 실험해 보고 싶던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묻자,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딱히 이름을 부를 건 없고 반산(半山) 노인이라고 부르면 되지. 낭자는 이름이 무언가?” 

“성이 조가입니다. 첫째라 조 대저라고 부르시면 돼요.” 

반산 노인의 얼굴에 이상한 기색이 스치더니 임새옥을 유심히 살폈다. 

“조 대저? 성안현 사람인가?” 

임새옥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어르신, 제가 어디 사람인지 어찌 아세요?”

반산 노인이 껄껄 웃으며 다시 임새옥을 살폈다. 

“음, 하는 걸 보면 명성이 괜히 난 건 아니군.”

임새옥이 의문이 풀리지 않아서 더 물어보려는데, 노인은 벌써 손뼉을 치며 저쪽에 있는 종복을 불렀다. 

“아복, 늦었다. 이만 돌아가자. 내일 다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운대 씨를 수확하자꾸나.” 

그는 나귀에 올라타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임새옥을 보고는 웃었다. 

“낭자가 이곳에 머물 게 된 건 실로 우리 강녕의 복이군. 그럼, 기름 짜준다는 약속 잊지 말게.” 

임새옥은 반산 노인이 관씨현 재난 구제 때문에 자신을 아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때 보리 재해는 북부 여러 곳에만 생겨서 하늘에서 내려온 농신 낭자 이야기는 남방까지는 아직 퍼지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면 이 노인은 보통 사람이 아닌 건가? 어쩌면 관리 출신인가? 그래서 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가?

“저는 어르신이 칭찬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임새옥이 웃으며 예를 갖추고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돌아가는 걸 배웅했다. 그리고 전가아를 업고 천천히 돌아가는데, 막 마을로 들어서자 몇몇 여인이 허둥지둥 달려오면서 손짓해 부르는 게 보였다. 

“대낭자! 드디어 돌아왔네! 댁에 영아가 노부인을 화나게 해서 지금 맞고 있어요, 어서요!” 

임새옥은 머리가 쾅 울려서 전가아를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를 봐달라고 당부하고는 집으로 내달렸다. 

대문 앞에 구슬을 드리운 큰 가마 네 대, 그리고 작은 가마 다섯 대가 서 있는 것이 저 멀리서 보였다. 종복 열댓 명이 말을 끌고 시커멓게 문을 에워싸고 있었고, 장원 사람들도 잔뜩 서 있었다. 다들 초조하게 밖에 서 있다가, 그중에 눈썰미 좋은 사람이 임새옥을 보고 손뼉을 치며 “대낭자가 드디어 오셨다!”고 외치며 달려왔다. 

임새옥은 그들을 상대할 겨를 없이 사람들을 헤치고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하는 말이 귓가에 들렸다. 

“……노부인하고 고내내들이에요. 대낭자, 제발 조심해야 해요…….”

들어서자마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마당에 가득 서 있었다. 누군지 제대로 볼 겨를도 없이, 어멈 몇이 영아를 누르고 있는 게 보였다. 얼굴을 때리려는 걸 보고 목소리를 높이며 창고로 달려가 괭이를 들고나와 어멈들을 향해 휘둘렀다. 

“이것들이! 감히 우리 집에 와서 사람을 때려? 너희를 때려죽이지 않으면 내가 임씨가 아니다!”

마당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바람처럼 달려온 여인의 모습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사납게 괭이를 들고 달려오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멈들이 후다닥 달아났지만, 그중 하나는 자루에 걸려서 바닥에 넘어지면서 모질게 두들겨 맞고는 꽥꽥 고함쳤다. 

“대저아!”

영아도 우앙, 하고 울더니 사람들을 밀쳐내고 창고로 달려가 쇠스랑을 들고 달려왔다. 

“어디서 온 도둑놈들이 대낮에 남의 집에 와서 허튼짓이야?”

임새옥은 물러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괭이를 바닥에 콱 찍었다. 방 안쪽을 바라보니, 한 노부인이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들에게 둘러싸여서 임새옥이 얼마 전에 새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작은 키에 살짝 통통한 몸매, 쉰쯤 된 나이, 흰머리가 섞인 머리카락을 높이 틀어 올린 노부인은 금옥 관에 금색 구름무늬 비단 자수 치마를 입고 있었다. 단정하고 장중한 눈매, 높은 콧대, 살짝 쳐진 얇은 입술, 온몸에 부유하고 귀한 티가 흘렀다. 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엔 금옥 팔찌를 서너 개 차고 있었다. 

노부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곁에 서 있는 마흔 남짓한 늘씬한 여인이 날카롭게 물었다. 

“네가 바로 사내를 유혹하는, 내력 모를 방탕한 것이냐?”

사람들은 그제야 갑자기 고함치며 나타난 이 흉악무도한 여인이 어떤 모습인지 똑똑히 알아차렸다. 나이가 어려 보이는 여인은 틀어 올린 원보빈에 머리 장식도 꽂지 않고 고운 피부에는 연지도 바르지 않았다. 버들가지 같은 눈썹, 살구 눈, 오뚝코, 얇은 입술, 중간쯤은 가는 봐줄 만한 생김새인데, 치맛자락에 흙이 묻어서 점수가 약간 떨어졌다. 그런 그녀가 호의적이지 않은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화가 난 임새옥이 괭이를 휘두르며 고함쳤다. 

“개똥 같은 소리!”

순간 눈앞에 서 있는 여인들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아침에 왔었던 그 여인이 뒤에서 비집고 나와서 노부인을 향해 말했다. 

“저것 보세요, 노부인. 저런 저속한 것이, 전가아를 시켜서 저까지 때리더라니까요.” 

“이런 고얀 것. 간도 크구나, 감히 내 아들을 노려서…….”

노부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하늘을 흔들 것처럼 징, 북, 폭죽 소리가 울리면서 말이 잘렸다. 이어서 문 앞이 시끌벅적해지면서 마당 안에서의 모든 소리를 뒤덮어 버렸다.

“노, 노, 노부인, 지부 대인, 현령 대인, 대인…… 들이 다 왔습니다.”

굴러굴러 허둥지둥 달려들어온 종복이 더듬더듬하는 말에 온 마당의 여인들의 안색이 변해서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노부인도 벌떡 일어나서 다른 사람의 부축도 받지 않고 스스로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냐? 우리 장원에서 무슨 사고라도 친 것이냐?” 

징, 북, 폭죽 소리가 갈수록 가까워졌다. 

“대낭자, 조 대낭자! 어서! 서두르게! 성지가 왔네!” 

관복 차림의 야위고 키가 큰 사내가 비틀거리며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온 마당에 가득한 화려한 옷차림의 여인들을 보고는 친한 척하려던 사내는 순간 넋이 나갔다. 

이곳에 혼자 사는 게 아니었나? 대체 이중에 누가 조 대낭자야? 

사내는 강녕현 현령이었다. 강녕부 관할 내엔 상원현과 강녕현, 두 현이 있었다. 전직 승상 왕안석 대인이 귀향한 이래, 거주한 저택이 마침 상원현 관할이었다. 그래서 강녕현 현령도 조정에서 끊임없이 오가는 각종 성지와 위로하는 하사품엔 진작 익숙했지만, 직접 받을 기회는 없었다. 

이날 강녕부에 갑작스러운 긴급 통보가 떨어졌다. 성지가 당도했으니 길 안내를 하라고. 강녕 현령은 승상 대인이 집을 옮긴 줄 알았다. 승상 대인이 성 안에 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자기 관할인 종산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산다는 이야기를 가끔 듣긴 했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그런 곳에 누가 오래 살겠나 싶어서.

강녕 현령은 어리둥절해서 지부 관아로 갔다. 지부 관아 안에는 벌써 사람들이 새카맣게 서 있었다. 지부 대인이 웃는 얼굴로 공손하게 대하는 황성에서 온 준수하게 생긴 관리 말고, 북부의 작은 현에서 온 현령도 몇 명 있었다. 언제부터 성지 전달에 이런 법도가 생겼을까?

“강녕 현령, 성상과 태후께서 조씨에게 친히 상을 내리셨네. 중서성 이 대인이 친히 성지를 내리러 오셨네. 조씨에게 은혜를 입은 현령 대인들도 직접 감사하고 싶다고 찾아왔고. 어서 모시고 가게.” 

지부 엽균(葉均)이 싱글벙글 말했지만, 강녕 현령은 여전히 오리무중이 되었다. 조씨요? 그게 무슨 씬데요? 

다행히 영리한 참모 하나가 그의 의문을 알아보고는 재빨리 다가와서 “관씨현, 농신 낭자가 종산 자락에 산답니다.” 하고 속삭였다.

농신 낭자가 관씨현을 구제한 전설은 관리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다들 관씨현 현령의 시운에 정말이지 놀라고 부러워하면서 어느 날 자기에게도 이런 개똥 운이 찾아오길 꿈꿔왔다. 

강녕 현령은 농신 낭자의 전설을 알게 된 후 더 들떠서, 자신의 강녕현은 관씨현보다 더 일찍 농신 낭자의 은혜를 입었다고 온 천지에 떠들고 다녔다. 그들 강녕현이 얻은 ‘연근지향’이라는 칭호가 바로 농신 낭자 덕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장에 나온 조숙 연근 8할 이상이 강녕현 소가 논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중 절반은 곧바로 황궁에 들어간다. 그 덕분에 첫해엔 황제가 내리는 상을 받았다. 다만 그때는 소가 주인이 말해 주어서, 이 기술이 성안현의 조씨 손에서 나왔다는 것만 알았지, 그 조씨가 후에 농신 낭자로 칭송받은 사람인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농신 낭자와 깊은 친분이라도 있는 것처럼 수시로 ‘농신 낭자’를 입에 올리고 다녔는데, 진짜 농신 낭자가 자기 관할에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정말이지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고 싶어서 속으로 소금남을 원망했다. 

소금남, 네 이놈, 이렇게 큰일을 숨기고 말을 안 해?

“대낭자? 조 대낭자?” 

강녕 현령은 가마를 타고 흔들리며 온 데다가 마음이 너무 들떠서 땀이 송골송골 흐르고 있었다. 그는 다소 낭패스러운 꼴로 여인들을 하나하나 훑으며 확신 없는 말투로 불렀다. 현령이 그래도 다행히 영리한 사람이라, 그렇게 부른 다음 마당을 가득 채운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저기 괭이를 들고 서 있는 촌부에게 꽂히는 걸 알아차렸다. 

“대낭자! 어서 향안을 내오고 성지 받을 준비하시게! 성상과 태후마마의 하사품이 곧 당도하네!” 

강녕 현령이 크게 기뻐하며 달려갔다. 차림새만 봐도 이 사람이 농사일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임새옥은 넋이 나가서 영아와 눈빛을 주고받을 뿐, 꼼짝을 하지 않았다. 

배 불리 먹고 할 일 없는 황가 사람들이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인 거지? 

“아이고, 대낭자!” 

이 여인이 오히려 멍하니 그 자리에 굳은 걸 보고 강녕 현령은 애가 타서 발을 굴렀다. 그리고는 저 구석으로 달아난 화려한 여인들을 향해 고함쳤다. 

“뭘 멍하니들 보고 있는 거요! 어서 향안을 찾아오시오!” 

현령 대인의 말에 벌써 놀라서 넋이 나간 소씨 가문 사람들은 한순간 당황해서 어서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관리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아역들이 물 샐 틈 없이 문을 막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울타리 옆으로 물러서 있었다. 그러나 임새옥의 이 집은 너무나 작아서, 여인들은 뜨거운 솥에 올라간 개미처럼 당황할 뿐이었다. 

자신들은 안채 여인일 뿐이고, 평소에 집 밖으로 나가 꽃구경, 연극 구경은 자주 해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 여인들은 관료 집안의 여인들과 달랐다. 그저 돈은 많지만 지위는 없는 상인 가문 여인이라서 관아 사람도 거의 만날 일이 없는데, 성지는 어떻겠나. 

간이 작은 여인들은 벌써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는데, 현령 대인의 일갈에 아까 불손하게 굴었던 양 이낭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맞다, 맞아. 향안을 찾아라! 내가 찾아오마!” 

딸들에게 부축을 받고 서 있던 소가 노부인은 세상 물정에 통달한 능구렁이 아니랄까 봐, 그 말에 바로 정신을 차리고 고함쳤다. 그러고는 아무에게도 부축받지 않고 밖으로 달려가더니 날렵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역들을 비집고 나갔다. 남은 사람들도 바로 뜻을 깨닫고 순간 썰물처럼 우르르 달려갔다. 화들짝 놀란 아역들이 미처 막을 틈도 없었다.

“물러서라, 물러서! 꿇어라, 흠차 대인 납신다!” 

여인들이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혼란스러워지자, 화가 난 아역들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나가지 못하고 남은 몇몇 여인들도 울타리 쪽으로 몰려가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아서 파르르 떨며 조용해졌다. 

“조 대낭자,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귀를 찌를 듯한 징, 북, 폭죽 소리와 함께, 붉은 관복을 입고 은어대(銀魚袋)를 찬 이용이 지부 대인과 관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으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제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던 강녕 현령과 임새옥이 정신을 차렸다.

(※당 고종 시대부터 궁궐 출입할 때 확인용으로 5품 이상은 어대를 달았다. 3품 이상은 보라색 관복에 금어대, 5품 이상은 붉은 관복에 은어대, 6품 이하는 녹색 관복에 어대를 달지 않았다.)

어째서 이 사람이? 

임새옥은 눈을 비비다가, 사람들이 들고 들어온 명황색 함을 보고는 어서 이웃에게 향과 초를 빌려오라고 영아에게 지시했다. 영아는 이 사람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니 두려워할 것도 없이 곧바로 달려 나갔다. 농촌 아낙 셋을 따라 향안, 향, 초를 들고 돌아왔더니, 임새옥은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용이 낭랑한 목소리로 ‘만백성을 아끼는 마음’이니 ‘출중한 재능’이니 읊는 걸 고개를 숙인 채 듣던 임새옥은 ‘품행과 덕행을 겸비했다는 말은 하지 않네.’라고 생각하며 내심 웃었다. 황제가 하사한 품목을 다 듣고 나니, 놀랍게도 뒤에 조 태후의 하사품도 있었다. 임새옥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면서, 조 태후에 대한 원망도 조금은 누그러뜨렸다. 그 어른이 속 좁고 어리석은 여인은 아닌가 보다고 하면서.

“조 대낭자, 어서 성지를 받고 감사 올리게.” 

이용이 빙긋 웃으며 말하자, 임새옥이 세 번 고개를 조아리고 감사 인사를 하고 일어났다. 마당 안으로 들어온 이래, 드디어 이 여인을 제대로 보는 순간이었다.

임새옥은 다소 조심스럽게 일어나서는 몰려든 낯선 이들을 향해 웃으며 답례하고는 영아를 불러 차를 끓이게 했다. 밖을 에워싸고 있던 촌 여인들은 원래 거리낌이 없는지라, 상황을 보고는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거들었다. 누구는 탁자, 의자를 옮겨오고, 또 누구는 물을 끓여 가지고 왔다. 좋은 차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한순간 비좁은 임새옥의 작은 마당에 사람이 바글바글하고 몹시 떠들썩해졌다. 

“대낭자가 인복이 있군.” 

자리에 앉아 화기애애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강녕 지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을 분들이 심성이 좋으셔서 부족한 것 없이 보살펴주고 있습니다.” 

임새옥은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직접 차를 들고 와서 우선 이용에게 건네고 지부 대인에게 건넸다.

바쁘게 움직이던 마을 아낙들에게 매우 기분 좋은 말인지라 하나같이 미소를 짓더니, 개중에 간이 큰 여인 하나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대낭자,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 마음도 살로 이뤄진 거라고, 대낭자가 우리한테 잘해주는데, 우리도 잘해야지 어떡해.” 

그 말에 현령 대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속으로 소금남을 원망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성 안에 이미 저택을 마련해 두었으니 옮기고 싶으면 언제든 옮기면 되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조 대낭자가 과연 근면하다고 여길 것이고,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안배한 강령 현령을 칭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령 대인이 지부 관아에서 한 행동을 모두 보았던 터라,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중에 몇 없었다. 현령 대인의 말에 다들 몰래 웃었다.

“저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 생각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요. 여기에 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대인.”

강녕 현령이 다시 자기 공적을 자랑하기 전에, 관씨현 등 재해를 겪었던 현의 현령들이 공수하며 나왔다. 

“백성들을 대신해서 대낭자에게 감사드리오.” 

임새옥이 허둥지둥 답례하며 가당치 않다고 손을 저었다. 

“다 대인 여러분이 항상 백성을 생각하고 적시에 고명한 판단을 내려 곳곳에 연락한 공 덕분입니다. 오히려 제가 백성들과 함께 대인들께 감사 올려야지요!” 

한참 이야기를 나눈 후, 밖에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몰려들고, 여인이 점점 지쳐가는 걸 본 지부 대인이 서둘러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그러는 동안 이용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부신 관복 차림, 준수한 용모, 기품 넘치는 행동거지는 모든 사람의 주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런 인물을 처음 보는 마을 아낙들은 쉴 새 없이 이용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전 일로 아직도 가슴이 떨리는 임새옥은 제대로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사내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서 몹시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다행히 이용이 특별히 무슨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으니, 까닭 없이 걱정했던 마음도 잠시 내려놓았다. 

“대낭자!” 

이용이 공수하며 눈부시게 미소를 짓자, 주변을 에워싼 여인들이 일제히 넋이 나갔다. 

“이 대인, 먼저 나가세요.”

임새옥은 이제야 고개를 들고 이용을 힐끔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재의식인 열등감 탓인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화려하게 아름다운 얼굴만 보면 남자든 여자든 이유 없이 가까이하기 껄끄러웠다. 

이용은 그녀가 예를 갖추는 걸 말린다는 핑계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속삭였다.

“그것참 이상하지. 대낭자, 어째서 늘 날 무서워하는 겁니까? 내가 요괴처럼 생겼나요?” 

여인이 놀라서 고개를 들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서 입을 달싹이며 뭐라 말하려 하자, 이용이 말하지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러고는 주변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뒤로 넘어갈 만한 미소를 활짝 짓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임새옥은 대인들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집으로 들어갔다. 이런 큰 경사가 생겼으니, 집에 숨겨놓은 폭죽을 꺼내서 터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바람에 아직 진정되지 않은 작은 마을에 경사스러운 기운이 넘쳐흘렀다.

“저기요. 안 가요? 여기서 밥 먹으려고요?” 

영아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달아나지 못해서 아직 구석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가 여인들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여인들은 서로 부축하며 일어나더니 어색한 얼굴로 임새옥을 향해 “축하해요, 대낭자.” 하고는 후다닥 달아났다. 

임새옥은 아까 도와준 모두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정오가 지났음을 깨닫고 식사하고 가라고 붙잡았다. 당황한 사람들은 허둥지둥 인사하고 돌아갔다. 사람들을 배웅한 영아는 밥도 하지 않고 마당에 서서 하사품을 뒤적이며 놀라고 좋아서 중얼중얼했다. 

“마음에 드는 거 있니? 혼수로 줄게.” 

임새옥이 놀리자 영아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렇다고 멈추진 않고 오히려 중얼거리면서 비단 한 필을 가리켰다. 

“대저아, 이거, 제 옷감으로 주어도 아깝지 않으시겠어요?” 

임새옥은 풋 웃고 말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말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말발굽 소리와 길게 우는 말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소금남이 전가아를 안고 그녀를 부르며 달려 들어왔다. 그러다가 조용한 마당에 임새옥과 영아 단둘뿐인 걸 보고서야, 초조, 걱정, 분노한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진 기색이었다. 움켜쥐었던 주먹도 서서히 풀렸지만, 몸은 여전히 살짝 떨고 있었다. 

임새옥과 영아 모두 전가아를 안고 들어온 소금남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 마음 좋은 마을 사람들이 가서 알렸나보다 생각하며 입을 열려고 하는데, 소금남이 전가아를 안고 휙 돌아서더니 나가버렸다. 서둘러 따라 나가 봤더니, 벌써 말을 몰고 저 멀리 사라졌다.

“대신 화내주려고 가신 걸 거예요!” 

영아가 옷감 등을 힘겹게 껴안고 방 안으로 들고 가면서 기쁜 듯이 외쳤다. 임새옥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별일 당한 건 없는데. 괜히 소란 피우면, 오히려, 음, 오히려 안 좋은데.” 

하지만 이 일은 이미 제 손을 떠난 후였다. 그녀는 더 생각하지 않고 영아와 함께 물건을 정리했다. 

새하얀 은자에 주인과 종 모두 조금은 두려워졌다. 

“밥 먹고 소정가한테 가봐. 가서 이 은자 둘 곳 있는지 물어봐.”

임새옥이 나지막이 물었다. 이 시대쯤엔 ‘교자(交子)’라는 화폐가 생겼을까 생각하면서.

“밥을 먹기는요, 바로 다녀올게요.” 

영아가 곧바로 나가려고 하자 임새옥이 그녀를 잡으며 다시 나지막이 말했다.

“이 옷감이랑 장신구, 팔아도 되는지도 물어봐. 태후에게 불경한 거 아니겠지?”

“대저아, 제 옷 만들 옷감은 남겨두셔야 해요!” 

영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 신을 신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웃음이 나왔다. 

“옷뿐만 아니라, 장신구도 골라!” 

임새옥은 영아가 헤실헤실 웃으며 나간 다음에, 마당에 한참 앉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너무 긴장했고, 고대 문장을 알아듣지도 못해서 지금 생각해 봐도 무슨 이유로 상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관씨현 재해를 구제한 것으로? 

생각해 보니 부끄러워서 진땀이 났다. 그때는 이렇게 큰 규모 재해일 줄 정말로 몰랐고,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마디 해준 것뿐이었다. 굳이 공을 따지자면, 제때 조정에 보고한 관리들의 공이 클 것이다. 그 관리들 덕분에 조정에 적시에 재해가 보고되었고. 조정에서도 잘 수습해서 각 현에 방안을 하달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통하달(上通下達)이었다.

“그 사람, 잘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성장했구나.” 

임새옥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앉아 있다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일어나서 대충 밥을 먹었다. 

해가 서서히 지고, 넓게 펼쳐진 노을이 작은 마을에 눈부신 옷을 입혔다. 조롱박 덩굴을 정리하면서 영아가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지 걱정하는데 나귀차가 마을 입구에서 빠르게 달려왔다. 나귀차 옆에 소정가가 말을 타고 오길래 서둘러 나가서 맞이했더니, 나귀차가 제대로 멈추기도 전에 영아가 배시시 웃으며 폴짝 내려왔다. 

“조심해.”

소정가가 따라서 말에서 내리며 나무라자, 영아는 샐샐 웃고는 임새옥 앞으로 달려왔다. 

“이야기 끝냈어요. 이 대숙이 바로 처리해주시겠대요.” 

그러고는 소정가를 향해 고갯짓했다.

“자, 방 안에 있어. 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옮겨.” 

그러더니 자기 볼 일을 생각하고는 먼저 후다닥 안으로 들어갔다. 

“애가 좀 덤벙대.” 

임새옥이 웃으며 소정가를 힐끔 바라봤다. 소정가는 마음을 들킨 듯이 얼굴을 붉히더니 머쓱해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덤벙대도 괜찮아요. 괜히 서로 잴 것 없이 말을 확실히 하는 게 좋죠…….”

그래놓고 더 이상해졌다는 생각에 함께 온 동료들을 부르며 고개를 돌렸다. 

임새옥은 웃음을 참으며 안으로 갔다. 영아는 어느새 금반지 세 개를 골라놓았다. 양손에 금장식 비녀, 취매화 비녀를 들고 망설이다가 소정가에게 말했다. 

“은자만 보관해 줘. 다른 건 일단 내가 가지고 있을게. 며칠 있다가 북으로 가는 행렬이 있으면 그때 보내줘.”

소정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람들을 데리고 은자를 옮겼다. 영아는 조금 미안한 듯 임새옥에게 물었다. 

“대저아, 은자 바꿔서 땅 안 사고요?”

임새옥도 대충 상자 안을 뒤적이면서 웃으며 대답했다. 

“그 정도 은자면 우리 뒷산, 반은 살걸? 땅은 일단 안 급해. 과일나무를 심어서 팔고 그걸로 다른 데 가서 좋은 땅을 살 거야. 너도 언젠가 혼인할 건데, 언니가 되어서 어떻게든 위풍당당하게 보내줘야지. 금단도 아내를 맞아야 하고. 삼저아도 언젠간 혼인하는 날이 오겠지. 시중에 있는 건 돈 주면 살 수 있지만, 궁에서 하사한 것만큼 영광스럽지 않잖아”

그러자 영아가 당장 달려와 머리를 임새옥의 어깨에 비비며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저아, 대저아도 재가해야죠. 대저아가 혼인하지 않으면 저도 줄곧 곁에 있을 거예요.” 

임새옥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이며 웃었다. 

“애 같은 소리 하기는. 너도 적은 나이가 아니야. 시간 좀 흐르면 가서 네 노비 문서 가지고 와서 양민 호적으로 바꿔줄게. 그리고 좋은 중매쟁이를 골라서 소정가 집에 혼담을 넣어야지.” 

막 거기까지 이야기하는데, 안으로 들어오던 소정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하려던 말도 까먹고 쭈뼛대는 모습에 임새옥이 웃음을 터트렸다. 영아는 얼굴을 붉히고는 머리를 이불 안으로 들이밀지 못해 안타까워했다.

영아는 소정가가 돌아간 후에야 방에서 나왔다. 해가 이미 진 시간이라, 사립문을 닫고 사람들을 시켜 새로 만든 흔들의자를 옮겨와서 임새옥에게 앉으라고 하고는 자기는 작은 의자를 가지고 와서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과일을 잘라 먹으며 마당에서 더위를 식혔다. 그렇게 아직은 그리 무덥지 않은 바람을 맞으며 고요하고 느긋한 시간을 누렸다. 

그리고 같은 시각, 소가 저택의 분위기는 분노하며 들어온 소금남 때문에 후덥지근하기 짝이 없었다. 

소 노부인은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한참 누워있은 다음에야 정신을 좀 차렸다. 곁을 지키는 친딸 셋도 나을 것이 없었다. 시녀, 어멈들이 안신탕을 가지고 들어오자 후다닥 달려가 앞다퉈 마셨다. 소 노부인은 자기도 마실 거라고 침상을 두드리며 고함치는데, 어멈이 없다고 하자 화가 나서 베개를 집어 던졌다. 

“양심 없는 것들. 네 어미가 놀라서 혼이 다 빠진 게 보이지도 않느냐? 너희들만 먹으면 그만이냐?”

시녀, 어멈을 내쫓은 소 노부인이 딸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혼냈다. 연사 상의에 비취색 비단 치마를 입은 큰딸이 그 말에 가슴을 두드리며 대답했다. 

“어머니, 저는 거기에 놔두고 사람들이 다 어머니를 따라 나갔잖아요. 전 못 나가고 하마터면 거기서 놀라 죽을 뻔했다니까요. 그런데도 우릴 원망하시는 거예요?” 

“언니, 성지 내리는 걸 옆에서 듣다니, 운도 좋네요. 어서 내게도 좋은 운을 나눠줘요!” 

동생 둘이 웃으며 다가오더니 여기저기 만져대면서 그 김에 금옥 귀걸이를 빼내며 재잘재잘 떠들고 웃었다. 

“너희 둘! 이러니까 우리 관인이 너희와 어울리지 말라고 하는 거지! 좋은 건 다 빼앗아 가고, 나쁜 건 다 내게 미루고! 분명 내가 맨 앞에 있었는데, 누가 날 걷어차더라? 덕분에 몽둥이를 몇 번이나 맞았잖아!” 

대저아는 수치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서 두 사람을 밀치고는 노부인 앞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제 옷을 젖혀 보여주었다. 

“어머니, 이게 다 어머니를 위하다가 다친 거예요. 2층에 있는 진주 한 상자, 저 주세요. 그래야 어머니 사위한테 욕이라도 안 먹죠.” 

소 노부인이 나른하게 대꾸했다. 

“진주 한 상자가 뭐라고. 가져가서 아이들 주어라. 네 아우가 비단 몇 필 들여왔더라. 보고 마음에 들면 잘라가고.” 

여인들이 순간 기뻐하며 우르르 몰려들어서는, 누구는 머리 장식을 달라고 하고, 누구는 새 침상을 사자고 하며 떠들썩하기 짝이 없는데, 밖에서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어멈 하나가 “노야 돌아오셨어요!” 하고 크게 외쳤다. 세 사람이 깜짝 놀라 허둥대며 뒤로 가서 숨으려고 하는데, 채 숨기도 전에 소금남이 휘장을 거칠게 젖히며 들어왔다. 

“금가아, 왔니? 우린 온 지 한참 되어서 이제 가 보려던 참이다.” 

누이 세 명이 바쁘게 웃으면서 소금남을 맞이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다가, 소금남의 싸늘한 눈빛에 놀라 서로 부딪히고 말았다.

“왜, 밥도 안 먹고 갑니까?” 

여인들은 하하 웃으며 집에 바쁜 일이 있니, 아이가 찾니, 하며 어수선하게 밀쳐대며 후다닥 달아났다. 방 안의 시녀, 어멈도 눈치 빠르게 물러갔고, 커다란 방 안에 모자 두 사람만 남았다. 

아들의 눈빛에 온몸이 거북해진 노부인은 목을 가다듬으며 일어나 앉았다. 

“오늘 돌아온 것이냐? 밥은 먹었고?” 

소금남은 소매 안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법도대로 모친에게 문안을 올렸다. 그러고는 앉지도 않고 노부인을 지긋이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님, 오늘 기운이 넘치시는군요.”

노부인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에 엎드려서 “아이고, 아이고!” 하며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하려던 말이 목에 걸린 소금남은 화를 참으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푸르락붉으락했다. 밖에 있던 어멈들은 노부인의 말을 듣고 신호라도 받은 듯이 우르르 몰려들어 가서 “노부인!”, “어서 의원을!” 하며 소란을 피워댔다. 

“시끄럽다! 썩 나가라!” 

소금남이 탁자 근처 바닥에 놓인 큰 꽃병을 걷어찼다. 쨍그랑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에 있는 사람의 고막을 파고들었고, 시녀 몇 명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난리구나, 난리야.” 

노부인은 놀라서 튀어 오를 뻔했다. 방 안 가득한 파편, 황급하게 도망치듯 나가는 시녀, 어멈의 모습에 부들부들 떨며 소금남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이제 컸다고 이 어미 앞에서 성질부리는 게냐?” 

그러면서 침상을 내리치며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이고, 노야. 왜 그렇게 일찍 가셨습니까. 왜 나만 남겨 놓아서 이 불효자식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하십니까. 내가 소가를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데요. 여기저기 부탁하고 빌면서 무릎을 얼마나 많이 꿇었는데. 그렇게 얻은 돈으로 겨우 집안을 일으킬 은자를 모았더니, 이제 집안이 거창해졌다고 이 노인네는 쓸모없답니다. 아들 눈치나 봐야 하고, 죽는 게 낫겠습니다.”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외치느라 기운이 빠진 노부인이 하는 말을 시큰둥하게 듣던 소금남이 별안간 물었다. 

“어머님, 예전에도 혜낭에게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신나게 울던 노부인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멈칫해서는 혀를 찼다. 

“멀쩡히 죽은 사람 이야기는 왜 하느냐!”

그 바람에 어디까지 울며 이야기했는지 잊어버렸는데, 소금남이 싸늘하게 하는 말이 들렸다. 

“저는 지칩니다. 어머님도 힘을 아끼세요.” 

“너, 너!” 

아들이 언제나처럼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하지 않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노부인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러다가 더 중요한 일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훔치며 침상에서 뛰어 내려서 소금남을 불렀다. 

“금가아, 금가아.” 

소금남이 뒤를 돌아봤더니, 노부인이 얼굴 가득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소금남이 의외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부인이 그의 소매를 붙잡는가 싶더니 바로 물었다.

“금가아, 어미가 좋은 날을 골라 올 테니, 어서 그 대낭자를 집에 들이면 어떻겠니? 멀쩡한 아녀자가 매일 밖을 돌아다니면 되겠니?”

예전에 이럴 때는 언제나 노부인의 울음소리, 화내는 소리, 그리고 그릇을 때려 부수는 소리로 끝나곤 했는데, 갑작스러운 모친의 태도와 조금 전과 전혀 이어지지 않는 말에 소금남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잠시 생각한 후에야 무슨 뜻인지 깨달은 그는 부끄럽고 화나는 마음에 소매를 휘둘렀다. 

“어머님, 멀쩡한 사람의 청백을 더럽혔다고 누가 상주서 올려서 관아에서 찾아오는 게 무섭지 않으시거든 마음대로 말씀하십시오.” 

말을 마치고는 잠시도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전가아를 안은 청아, 화려하게 치장한 양 이낭이 회랑 저쪽에 나타났다. 

“노야!” 

임새옥 집에서 다리를 삔 양 이낭은 걸을 때 조금 다리를 절었는데, 소금남을 보고 기쁜 나머지 청아가 비아냥거리듯 웃고 있는 것도 모르고 다리가 아픈 것도 잊고 화단을 둘러 빠르게 다가왔다.

자신을 본 소금남이 갑자기 활짝 웃자, 양 이낭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다 날 것 같았다. 그녀는 소금남의 소매를 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노야, 양옥이 벌써 반년 동안 노야를 못 뵀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이 허공에 떠 있는가 싶더니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데 소금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관사, 거간꾼을 불러다 내다 팔아라.” 

양 이낭은 천둥이 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원 문 쪽에 소금남의 푸른 옷자락만 보였다. 

소 노부인은 청아가 전가아를 안고 온 걸 보고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잰걸음으로 달리듯이 다가가 전가아를 품에 안았다. 

“착한 내 손자,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단다. 1년에 아홉 달은 밖에서 살다니. 불효자식인 네 아비가 제 어미를 이런 식으로 대한단다. 착한 손자야, 너도 자라면 그렇게 해주렴! 네 아들을 다른 집에 맡겨 버리렴! 절대로 보여주지 마라!” 

그러면서 얼굴에 입맞춤해대자, 전가아가 눈살을 찌푸리고 내려가겠다고 버둥거렸다. 그렇게 좋아라 하고 있는데, 밖에서 양 이낭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려 들어왔다. 

“노부인, 살려주세요, 양옥 좀 살려주세요. 노야가 절 팔아버리신대요…….”

노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전가아의 귀를 막으면서 말했다. 

“착하지, 이상한 소리 듣는 거 아니다.” 

그러고는 큰소리로 호통쳤다. 

“다 죽었느냐? 어서 끌고 나가지 못해?” 

관사는 아까부터 밖에서 어멈들을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양옥이 어릴 때부터 노부인 곁에서 자라서 정이 깊으니, 노부인께 말씀 잘 드리면 어쩌면 남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울면서 호소해 보라고 양옥을 들여보낸 것이다. 그런데 저런 소리를 들을 줄이야. 사람들은 물론 더는 지체하지 않았고, 어멈 몇이 다가와 팔다리를 누르며 입에 더러운 천을 물리고 끌고 나갔다. 

겁에 질린 양옥의 눈빛을 본 청아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손자를 안고 웃음꽃이 핀 노부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양 이낭은…….”

노부인은 콧방귀를 뀌며 그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싱글벙글 전가아를 품에 안고 둥가둥가했다. 

“전가아, 네 아비와 귀인을 혼인시키면 어떻겠느냐?”

청아는 한기가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퍼지는 기분이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또 그 여인이야! 또 그 여인 때문이야! 

이날 얼마나 많은 이가 잠을 못 이뤘든지, 의외의 재물을 얻은 임새옥은 밤새 달게 잤다. 다음 날 아침햇살이 창틀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이미 밥을 먹고 정리한 다음 외출할 준비를 끝냈다. 영아는 아궁이에 재를 부어 불을 끄고 발로 몇 번 밟은 다음에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보세요. 티 나요?”

요 녀석이 밤새 아궁이 밑에 구덩이를 파서 장신구 상자를 묻은 걸 아는 임새옥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옷감은 어디에 뒀니?” 

영아가 손사래를 치면서 죄지은 도둑놈처럼 달려와 속삭였다. 

“큰 소리 내지 마세요! 창고 선반 위에 감추고 풀을 덮어 놨어요.” 

임새옥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됐어. 넌 남아서 집이나 지켜. 난 어르신 밭에 가보고 올게. 해가 진 후에야 돌아올지도 몰라. 기름 짜는 이야기해야 하거든.” 

영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이 밖으로 나가려는데 작은 가마 세 대가 문 앞에 서더니 사내 둘, 여인 하나가 내렸다.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사람들은 임새옥과 영아가 입구에 서 있는 걸 보고 그중 하나가 재빨리 공수하며 인사했다. 

“대낭자, 또 이렇게 찾아왔네.” 

임새옥은 그제야 어렴풋이 이자가 관씨현 현령임을 알아보았다. 그 뒤에 서 있는 키 작고 뚱뚱한 사내는 부티 나는 차림새로 공손하게 웃고 있었다. 임새옥의 시선을 느낀 사내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 몰라보겠나? 관씨현에서 자네에게 가르침 받았던 향신일세. 황가, 이름이 주일세.”

임새옥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대충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을 마당 안으로 모셨다. 영아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고, 관씨 현령과 한참 한담을 나누면서 무슨 일로 찾아온 건지 생각했다. 어르신과 한 약속이 있어서 저절로 조바심이 났다. 

차 두 잔을 마시는 사이, 관씨 현령은 임새옥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진작 알아봤고, 황주도 재차 눈짓을 보내고 있어서 드디어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대낭자, 내가 대낭자에게 중매 하나 설까 하네만.” 

차를 마시며 조바심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던 임새옥은 갑작스러운 말에 하마터면 찻물을 그대로 내뿜을 뻔했다. 그녀는 제 귀를 의심하며 무슨 말씀이냐고 다시 물었다.

이번엔 관씨 현령이 입을 열기 전에 황주가 곁에 있는 여인을 팔꿈치로 찔렀다. 여인은 곧바로 눈웃음치며 임새옥에게 예를 갖추고 손수건을 휘두르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의 소문은 익히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보니 과연 신선 같은 분이시네요. 사실 다른 댁도 아니에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인가 봐요. 여기 황 대인이 대단히 부귀영화를 누리는 건 아니지만, 우리 관씨현에서는 그래도 손에 꼽히는 부자랍니다. 집에 좋은 밭도 백 묘가 있고요. 성 안에 저택이 두 채 있습니다. 안주인은 재계하고 염불 외우는 선한 분이고요, 쓸데없는 법도 같은 것도 없답니다. 집에 아들이 셋 있는데, 하나같이 용모며 재능이며 뛰어납니다. 대낭자가 한창때고 재주와 덕이 훌륭하다고, 이 늙은이더러 혼담을 넣어 보라고 해서 이렇게 왔습니다.” 

임새옥과 영아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침을 튀기며 말하는 여인을 바라봤다. 숨도 채 돌리기 전에 황주가 여인을 밀치고 다급하게 말했다. 

“우리 큰애가 스물일곱인데, 며느리가 작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네. 자식을 남기지 못했어. 둘째가 올해 스물, 아직 혼인하지 않았네. 대낭자, 혹시 어려도 괜찮으면, 우리 셋째가 열여섯이네. 나이는 어려도 제 형들과 비교해서 뒤처지지 않아. 내 이번에 셋 다 데리고 왔네. 성 안에 묵고 있으니 언제든 가서 만나도 되네. 혹시라도 그중 하나가 마음에 들면…….”

관씨 현령은 도저히 못 들어줄 말을 늘어놓는 황주를 잡아채서 머리부터 밭에 내다 꽂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이지 후회가 돼서 미칠 것 같았다. 대체 뭘 잘못 먹고 황주의 돈에 현혹되어 몰래 와서 중매쟁이 노릇을 하고 있는 건지. 잘 되어도 좋을 게 별로 없고, 돌아가면 현의 다른 가문에게 죽어라 미움받을 것이 아닌가. 또 잘 안 되면 대낭자 앞에서 체면이 크게 구겨지는 것이고. 

임새옥은 안색이 붉어졌다 하얗게 질렸다가 했고, 영아는 아예 대놓고 깔깔 웃었다. 그러다가 안 그래도 임새옥의 혼사가 걱정스러운지라 다급하게 어디서 묵는지 물었다. 

임새옥이 영아의 등을 철썩 때리는데, 황주가 기뻐하며 하는 말이 벌써 들렸다. 

“진회하 변에 있는 저택에…….”

그러고 잠시 멈췄다가 서둘러 다시 덧붙였다. 

“솔직히 말하겠네만, 우린 그렇게 부자가 아니라서, 그냥 집 한 채만 빌렸네.” 

임새옥은 헛기침을 하면서 일어섰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라서 “저기, 대인께서 저를 이렇게 잘 봐주셔서…….” 하고 입을 여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또 마차 소리가 들리더니 너덧 명이 달려 들어왔다. 보아하니 같이 온 건 아닌 듯한 사람들이 앞다퉈 마당 안으로 들어왔고, 그중 하나는 서둘러 오다가 모자가 떨어졌는데 줍지도 않았다. 

“이런 관씨현 놈들!” 

들어온 사람 중 하나가 헐떡거리면서 관씨 현령과 황주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눈을 부릅떴다. 

“대낭자가 고를 수 있도록 다 같이 오자고 약속해놓고, 이렇게 몰래 찾아와?” 

임새옥과 영아는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일제히 공수하더니, 대명현이니, 진정현이니, 구현이니 어쩌고 하면서 어수선하게 제 소개를 늘어놓았다. 어렴풋이 생각해 보니 성지를 받던 날 이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긴 했다. 웅성대는 소리에 골이 다 윙윙 울렸다. 

“대인들, 설마 다들 제 중매 서겠다고 오신 건가요?”

임새옥이 직접 사람들이 관씨 현령에게 따져대는 걸 자르고 나섰다. 집에 남은 의자도 없고, 차 대접할 생각도 없어서 그냥 큰 소리로 물었다. 

“그렇지, 그렇지. 대낭자, 우리가 사람을 선별해 왔네. 가문, 사주팔자, 다 써 왔어. 대낭자, 한 번 보게.” 

누군가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서 임새옥 손에 쥐여주려고 했다. 그러자 다급해진 황주가 앞을 가로막으며 나섰다. 

“대낭자, 글자 같은 걸 보고 뭘 알겠나. 일단 성으로 가서 내 자식들을 보고 말하세.” 

알고 보니, 조씨에게 적당한 사람을 찾아 재가하게 하라는 태후의 말이 떨어지자, 효심 지극한 황제가 그날로 소식을 전한 것이다. 황제가 성안 현령에게 조씨가 평생 밖을 떠도는 일 없도록 적당한 사람을 고르라고 지시했는데, 소식이 다른 현에까지 금세 다 퍼진 것이다.

조씨가 누구인가? 조씨는 농신 낭자다. 누가 말해 줄 필요도 없이, 밑바닥 관리 생활을 해 온 이들은 그녀 덕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출세하고 승진했는지 모두 봐왔다. 그러니 이득을 몽땅 성안현에 빼앗길 순 없지 않은가! 조씨가 성안 관할의 어느 가문의 며느리가 됐든, 앞으로 천재지변, 충해가 뭐가 무서울까?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하고, 천막 채소 재배에 성공하면, 생활이 좋아질 테니 당연히 명성도 따라온다. 승진, 돈벼락이 문제일까?

특히 이미 그 덕을 본 관씨현은 이번에 제일 민첩하게 반응했다. 관씨현에 소식이 들어 온 바로 그날 밤, 황주 아내의 할머니의 오라버니의 사촌 형수의 여동생인 현령 부인은 곧바로 그 소식을 황주에게 전했다. 황주는 혼삿말을 넣어달라고 하면서, 반드시 뜻을 이루겠다는 작정으로 아예 아들 셋을 싹 다 데리고 돈을 싸들고 온 것이다.

그렇게 강녕부에서 만났는데, 감사 인사한다는 명목으로 이곳에 온 게 관씨현뿐이 아니지 않은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눠 보니, 각자의 의도가 훤히 보였다. 그래서 꼴사납게 난리가 날 것을 피하려고, 밤새 군자 협의를 했었다. 나중에 다 같이 조 낭자에게 찾아가서, 각자 후보자를 전하고 대낭자가 직접 고르게 하자고. 

그런데 관씨현 황주가 너무 긴장한 나머지 관씨 현령을 꼬드겨서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한 틈에 먼저 달려올 줄이야. 안 그래도 관씨현의 행동에 크게 불만이었던 사람들은 아들들까지 죄다 데리고 왔다는 말에 당연히 진노할 수밖에. 

대명 현령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고함쳤다. 

“황충! 내가 너를 모를 줄 아느냐! 태후마마께서 말씀하셨다. 대낭자에게 평범한 집안을 찾아주라고 하셨어! 너희 집이 자격이 되느냐!” 

황주는 자신이 없지만, 변함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반박했다.

“우리 집엔 돈이 없습니다! 보기에 그럴싸해도 속은 텅텅 비었습니다!” 

“속이 비어? 그런데도 진회하 변에 세 칸짜리 그 저택을 샀단 말이냐!” 

다른 현령은 거의 소매를 걷어붙일 듯했다. 

정말이지, 너무하는군. 누군 눈이 없는 줄 아는 건가! 

시끄럽게 싸워대는 소리 덕분에 임새옥도 대충 상황을 눈치챘다. 

태후가 처음에는 제 인연을 찢어놓더니, 인제 붉은 실을 엮어줄 모양인가 보네. 태후가 한 말 때문에 이 사람들이 혼사를 들고 온 거로구나?

“여러분, 여러분!” 

임새옥이 웃으며 손뼉을 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말렸다. 

“대인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다만, 저는 당분간 재가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고는 그들이 뭐라고 하기 전에 서둘러 덧붙였다. 

“제가 오늘 선약이 있어요. 농부 어르신 한 분을 도와드리기로 해서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영아, 대인들께 차 대접하고 잘 배웅해드리렴.”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한마디도 듣지 않고 치맛자락을 들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행여 뒤에서 쫓아올까 봐 무작정 나가는데, 마찬가지로 다급하게 들어오던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고, 대낭자!”

강녕 지부가 임새옥을 부축하고는 연신 사과했다. 임새옥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대인, 대인도 중매 서려 오신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강녕 지부는 고개를 들다가, 임새옥의 마당에서 쫓아 나오는 현령 여럿을 보고는 무슨 일인지 깨닫고 바로 얼굴을 구겼다. 

이놈들이 찾아온 의도가 이상하다 했었다! 역시나! 내 구역에 와서 사람을 가로채 가려고 해? 이놈들을!

눈을 부릅뜨던 지부는 일단 이 일은 접어두기로 하고, 웃으면서 소매에서 서신을 꺼내 건네주었다.

“대낭자, 경성에서 온 서신일세.”

“제게 온 서신이요? 경성에서요?” 

임새옥은 얼떨떨해졌다가 혹시 아원이 혼인하는 건가 싶어서 미소를 지으며 서신을 받았다. 

그리고는 겉봉에 찍힌 유씨 가문 인장에 가슴이 철렁했다. 

유가에서 보낸 서신? 

임새옥은 서신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 영아가 안에서 나오자 뜨거운 감자라도 넘기듯이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강녕 지부에게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허둥지둥 가버렸다. 지금은 예법이니 뭐니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난감한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일 뿐.

마을을 벗어나 종산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까지 줄곧 달리다가, 그제야 다리가 아프다는 걸 깨닫고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길가에 자란 들풀을 뽑아서 걸어가면서 화관을 만들어서 머리에 썼다. 답답한 기분을 잠시 풀고 싶었다. 

혼인? 정말로 생각하지 않은 문제였다. 

“혼인, 음, 혼인이라. 지금은 돈이 있으니까, 산을 살 수 있겠지. 요즘은 우유, 양유(羊乳)도 일정한 시장이 있고, 돼지고기는 저급하다 하지만, 그래도 판매량이 많지. 과실은 귀한 것이든, 아닌 것이든 다 필요하고. 십방촌에 과수원을 세우려면, 도로, 수리, 비료가 필요한데…….”

임새옥은 금세 자기가 생각하려던 문제에서 벗어난 다른 문제를 생각하면서 하나둘 손을 꼽았다. 돈이 생겨서 들떴던 마음도 차츰 진정됐다. 아무리 계산해도 규모를 갖추려면 투자금도 적잖게 필요했다. 

이곳에 창업 기금 지원 정책 같은 게 있으려나.

“대낭자? 이 좋은 날에 웬 한숨입니까?” 

별안간 들린 목소리에 임새옥은 놀라서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버드나무 새싹 색을 닮은 비단옷의 이용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나귀 한 마리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사환 하나도 봇짐을 메고 곁에 서 있다가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임새옥은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대낭자, 지금 어딜 가려고요?” 

이용은 가까이 오지도 않고 손을 흔들며 물었다. 그러고는 임새옥이 대답하기도 전에 저쪽 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대낭자, 저기 가는 겁니까? 나도 마침 갑니다만. 저 산은 우리 고장에서 경치로 유명한 곳이지요. 한번 볼 만합니다. 나도 이 지역에 있을 때 며칠에 한 번씩 가곤 했지요.” 

임새옥은 이용의 겸손한 태도, 예의 바른 행동에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아직 못 가봤어요. 지금 저 앞에 농부 어르신 밭에 가는 중이에요. 운대 수확하는 날이거든요.” 

이용은 아하, 하며 쥘부채를 탁 접었다. 

“운대요? 소 대인이 말하던 그 운대? 기름을 짤 수 있다던? 대낭자, 나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소 대인이 하는 말은 자주 들었는데,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말이지요.”

임새옥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앞장섰다. 이용도 나귀를 타지 않고 사환에게 천천히 끌고 오라고 넘겨주고는 자기도 천천히 걸으며 지내기 괜찮은지 물었다. 임새옥은 웃으며 대답하고는 승관을 축하했다.

“하, 그건 대낭자에게 감사할 일이지요.” 

이용은 쥘부채를 두드리며 웃더니, 이야기를 핑계로 몇 걸음 더 다가와서 놀리듯 말을 이었다. 

“대낭자, 성지에 뭐라고 쓰였는지 몰랐던 모양이군요?”

정곡을 찔린 임새옥은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헤헤 웃으며 인정했다. 이용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군요, 까닭을 아직 모르고 있었군요. 우리가 다 대낭자 말씀 덕분에 이런 큰 영광을 얻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용이 그간의 일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지금 조정에서 천막 일로 어떻게 다투는지, 소금남에게 어떻게 슬쩍 이 일을 흘렸는지, 어떻게 소금남의 서신을 받았는지, 어떻게 상주서를 올리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들은 임새옥은 그제야 이 모든 것이 자기가 그날 소금남에게 했던 말 때문임을 깨달았다. 정말이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 공이라니요, 아닙니다. 저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한 말인걸요. 대인이 고명하지 않았다면 어찌 조정에 그 이야기가 들어갔겠어요. 결국엔 항간의 잡담으로 끝났겠지요. 제가 온 세상을 대신해서 대인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그 말에 이용이 크게 웃으며 그녀가 예를 갖추려는 걸 막으려다 그녀의 손이 닿고 말았다. 여름이라 옷이 얇아서 닿자마자 이 여인의 보드라운 피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흰 무명 상의에 옥빛 치마를 입은 여인이 푸른 산 하얀 구름이 가득한 들판에 서 있었다. 여러 번 빨아서 낡아 보이는 옷이지만, 경성에 가장 새롭게 나온 귀한 의상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새카맣게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지런하게 빗어 올리고, 은빗 하나만 꽂고 분과 연지도 바르지 않고 빙긋이 웃고 있는 여인. 마음에 봄바람이 부는 듯, 말로 설명하지 못할 평온함이 느껴졌다. 이대로 저 보드라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고 싶지만, 지금은 이 여인에게 작은 무례도 범할 수 없는 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알아채고 피하기 전에 먼저 손을 거뒀다. 

“아, 또 하나. 십방촌의 땅과 저택은 여기 오기 전에 대낭자의 부모께 전해드렸지요. 그 저택으로 옮기는 걸 보고 성안현을 출발한 참이었습니다. 다들 평온하니 걱정할 것 없다고 전해달라더군요.”

이용은 살짝 공허해진 마음을 달래려고 부채를 펼쳐서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부쳤다. 또 한 번 벌어진 예상하지 못한 일에, 임새옥은 한참 주저하다가 물었다. 

“이것도 대인 덕분인가요?” 

이용은 그저 웃으며 “하는 김에 한 일이니, 예의 차릴 것 없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임새옥은 대답을 듣고도 대체 이용이 자기 재산을 되찾아준 건지 아닌지 분명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리던 일 하나를 드디어 내려놓게 되어 홀가분하긴 했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지출할 돈이 크게 줄어서 산을 반은 살 수 있어!’

임새옥은 신이 나서 그런 생각만 했다. 

이용은 느긋하게 걷다가 수시로 걸음을 멈췄다. 길가에 신선한 풀을 탐내는 나귀를 돌봐야 해서였다. 경성에서 시골로 와서, 시골 분위기에 젖는 사내를 위해 임새옥도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늦췄다. 다행히 이용은 예의가 바르면서 재미있었다. 꼴 같지 않던 처음 그 모습이 아니라서 바짝 긴장했던 임새옥도 차츰 마음을 놓았다. 심지어 이용이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화관에 호기심을 나타내자, 직접 풀을 꺾어 화관 하나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백옥으로 만든 관보다 낫군요. 고맙습니다, 대낭자.” 

이용은 화관을 바로 머리에 쓰고 임새옥을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이리 의젓하고 화려한 공자가 풀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으니 유난히 우스꽝스러워서 임새옥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운대 꽃 필 시기를 놓쳐서 아쉽네요. 운대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머리에 꽂았으면, 분명 온 성을 뒤흔들었을 텐데요.”

임새옥은 웃으며 그렇게 말해 놓고 곧바로 결례라고 생각하고는 다급하게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이용이 아이고, 하면서 조금 수줍은 듯 “대낭자, 그리 놀리지 말아.”라고 하자, 자기가 기억하는 이용과 천지 차이가 나서 참지 못하고 다시 웃고 말았다.

“대낭자, 따지고 보면 우리도 옛 친분이 있고, 지금 대낭자는 황상께 상까지 받은 몸인데 대인이라고 부르니 감당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이야라고 불러요.” 

이용은 임새옥이 다 웃길 기다렸다가 살짝 정색하며 천천히 말했다. 제 앞에 있는 이 여인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입가에 미소를 살짝 짓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는 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그 바람에 매끄럽고 보드라운 목덜미가 보여서, 뒷짐 진 채 부채를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여인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찌 그래요. 대인은 대인이죠. 제가 어찌 감히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해도 말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확연히 부드러워졌다. 그래서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서두를 것 없다, 서두를 것 없어. 조용히 기다리자.

그러고 또 잠시 걸었더니, 거의 무르익어 가는 보리밭이 들쭉날쭉 있는 게 보였다. 임새옥이 손가락질하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보세요, 대인, 저기가 바로 운대 밭이에요.”

왜 이렇게 빨리 왔을까! 

이용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다. 그곳에 네댓 마을 사람이 모여서 밭에서 수확하고 있었고, 허리 높이 정도 오는 누런 짚이 다발, 다발 묶인 채 예닐곱 다발 놓여 있었다.

“운대도 보리처럼 길게 자라나 보군요.” 

이용이 놀라서 묻는데, 임새옥이 발을 구르더니 “아이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는 서둘러 달려갔다. 그녀가 두립을 쓴 노인을 붙잡고 이것저것 알려주자, 노인이 즉시 일을 멈추고 사람들을 모이라고 불러서는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벌써 해가 쨍쨍한 시간이었고, 이 지대엔 해를 가릴 그늘도 없어서 푹푹 찔 정도로 더웠다. 하지만 이용은 길가에 서서, 탐욕스러운 얼굴로 넋이 나가서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 아래, 여인의 온몸에서 눈부시게 빛이 났다. 조금 가까이 다가갔더니, 여인의 온화하지만 맑고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운대는 끝이 잘 갈라져서 씨가 흩어지기 쉬워요. 반드시 저처럼 해야 해요. 자, 다들 보세요, 이렇게. 살며시 갈라서, 살며시 놓고, 살며시 두드리고…….”

그 여인이 칼을 들고 밭에 서서 서서히 움직이는 모든 동작이 이용의 눈에는 궁정 무희의 춤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렇게 눈과 마음이 즐겁게 감상하고 있는데, 노인이 갑자기 허리를 세우느라 제 시선을 가렸다. 언짢아져서 몇 발짝 다가가는데, 노인이 두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여인에게 말했다.

“다 베고 나서 대낭자에게 가르침을 청할까 했더니, 운대 수확하는 데도 이렇게 많은 이치가 있었군.”

임새옥은 그저 빙긋 웃으며 돌아서서 농부들이 운대를 묶는 걸 바라봤다. 이용은 깜짝 놀라서 다급하게 몇 걸음 더 다가갔다. 노인의 단정한 용모, 온화하면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 ‘여기가 이분의 땅이었나.’ 하고 생각하고는 서둘러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예를 갖췄다. 

“하관, 이용. 사상 대인을 뵙습니다.”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 노인이 위아래로 이용을 살펴보았다. 

“이가의 이랑인가? 이 노야를 꽤 닮았구나.” 

“예, 맞습니다, 소생입니다. 사상 대인이 여기 계신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청력이 좋아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된 임새옥은 깜짝 놀라 돌아보고는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다가 별안간 손뼉을 쳤다. 

“나 바보 아니야? 반산, 반산, 다른 반산이 또 있겠어?”

그러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가 예를 갖췄다. 

“식견이 좁아 태산을 보고도 몰라뵀습니다. 대인, 용서해 주세요.” 

그녀의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반산 노인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은 자네와 나, 모두 시골 사람인데 이런 허례가 무슨 필요가 있나. 그보다 내 운대 씨 돌보는 일에 집중하세! 지금은 저것이 대장이네!” 

그러고는 다발로 묶어 놓은 운대를 가리키자, 임새옥이 다시 후다닥 달려가서 길가의 나무 그늘로 조심스럽게 옮겼다. 

“젊은이, 도와주겠나?”

반산 노인도 옮기려고 따라가다가 웃는 얼굴로 이용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이용이 거절할 리가 있나. 재빨리 겉옷을 벗고 소매를 묶은 다음 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소생의 영광입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임새옥을 흉내 내며 운대를 옮기기 시작했다. 

“8할 익으면 온전히 수확할 수 있어요. 이 운대는 아직 완전히 익은 게 아니라서 볕에 말리면 안 돼요. 잘못하면 쭉정이가 되거든요. 지금 이 지대는 높은 편이라서 물이 잘 고이지 않으니까, 쌓아두기 좋네요.” 

그리 넓지 않은 밭이라서, 임새옥의 말대로 하느라 조심스럽게 수확해도 정오 전에 일이 모두 끝났다. 임새옥은 다발로 묶은 운대를 일일이 쌓으면서 설명을 계속했다.

“쌓을 때, 밑에 물이 차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밑에 장작을 깔아도 돼요. 그래서 아까 열매 쪽을 위로 하고 두드리라고 한 거예요. 그래야 씨앗이 곰팡이 슬지 않아요. 그리고 줄기 부분은 밖으로 내놓으세요. 후숙하기 편해요…….”

사람들 뒤에 서서 진지하게 듣던 반산 노인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넋을 놓고 보고 있는 이용을 보고는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젊은이, 이 늙은이가 자넬 며칠 더 붙잡아둬도 되겠나?” 

헛기침 소리에 겸연쩍어진 이용은 겉으로 드러난 감정을 서둘러 감추고 허리를 숙였다. 

“무엇이든 분부하십시오, 대인.” 

그러면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노인이 냉큼 경성으로 돌아가라고 할까 봐 정말로 걱정했었다. 며칠이 아니라 1년 있으라고 하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안색을 가다듬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황상의 성은을 받는 이 사상 대인이 무슨 분부를 하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임새옥은 설명을 끝내고 농부들이 자기 말에 따라 직접 움직이는 걸 지켜봤다. 이들은 모두 경험 많은 노련한 농부였고, 거창한 이치는 잘 모를지 몰라도 농사일은 척이면 척이었다. 임새옥은 이용과 반산 노인이 이야기 나누는 걸 보고 눈치 있게 한쪽으로 피해 있었지만, 반산 노인이 하는 말이 어렴풋이 들렸다. 

“……잘 들어두었다가, 돌아가서 관가께 말씀드리게. 이 노인이 관가께 드리는 선물인 셈이야. 그리고 자용 그놈도, 삼사인(三舍人), 다 내려놓으라 하고…….”

(※삼사인三舍人: 희녕 3년, 신종이 수주 판관 이정을 감찰어사로 발탁하려고, 송민구, 소정, 이대임 3인에게 조서 초안을 잡으라고 명했다. 세 사람은 초안 작성을 거부하며 이정을 발탁하는 것을 반대했다. 결국 신종은 이 세 사람을 파직했고, 버려진 세 사람을 삼사인이 부른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이었다. 고개를 숙이니 발치에 잘 자란 풀이 보여서 웅크리고 앉아 건드리며 놀았다. 풀 안에 작은 메뚜기 떼가 놀라서 튀어 오르자, 덥석 잡고는 신이 나서 한 마리, 한 마리 풀로 엮었다. 

“가지고 가서 튀겨 먹어야지. 영아와 전가아가 좋아하겠네.”

그러다가 소금남이 전가아를 데리고 간 게 떠올랐다. 

그 집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난리가 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있는데 그림자가 어른거려 후다닥 고개를 들었다. 

“이건 왜 잡아요. 더럽게.”

이용이 코를 찡그리면서 말하자, 임새옥은 불현듯 겁을 주려고 메뚜기 꿰미를 그의 얼굴 앞에 흔들었다. 

“먹으려고요. 대인, 드셔보실래요?” 

이용은 정말로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손을 저었다. 

“이런 것도 먹는다고요? 놀리지 말아요. 그대보다 많이 알진 못해도, 이게 황충인 건 안다고요.” 

곁에 있던 반산 노인이 그걸 보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젊은이, 정말로 맛이 좋다네. 황충 재난 때 농민들이 많이 잡아서 나도 먹어 보았지.”

“맞아요. 위를 따듯하게 하고 가슴막을 강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요. 비장을 튼튼하게 해주고 소화를 돕죠. 기침을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답니다.” 

임새옥이 웃으며 말했지만 이용은 코를 움켜쥐고 멀리 떨어졌다. 임새옥이 대인께서는 먹을 복이 없으시네요, 하며 빙긋 웃고는 더럽지도 않은지 메뚜기 꿰미를 허리춤에 달고서 반산 노인을 바라봤다. 

“어르신, 닷새 후엔 씨가 떨어져 나올 거예요. 날씨 좋은 날을 골라서 여기를 정리하고 펼쳐서 바짝 말린 다음에 두드려서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털어내면 기름을 짤 수 있어요.” 

반산 노인이 설명을 유심히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호마유 짜는 것과 같은 방법인가?”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운대는 기름이 많긴 하지만, 짜기 쉽진 않아요. 잊지 말고 쌀겨를 좀 섞으세요, 어르신. 그리고 기름을 짜내고 남은 찌꺼기와 운대 줄거리, 쌀겨를 버무려서 다시 짜면 기름을 더 얻을 수 있어요.”

반산 노인은 알았다고 하고는 이용을 힐끔 봤다. 이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삐 기록하고 있었다. 노인은 운대를 지켜보라고 사람들에게 지시한 후 시간이 이르지 않은 걸 보고 입을 열었다. 

“젊은이, 자네 대단한 부자 아닌가. 자네가 이 노인네 대신 대낭자에게 한턱 내게.” 

“그야 물론입니다. 어찌 대인께서 돈을 쓰시게 하겠습니까.”

이용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임새옥을 바라봤다. 하지만 임새옥은 곧바로 사양했고, 예의 바른 그녀를 보며 반산 노인도 더는 강요하지 않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반산 노인은 가복 한 명,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왔고, 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나절 동안 고되게 일했으니, 이용이 먼저 임새옥에게 나귀를 타라고 했다. 임새옥이 사양하자 반산 노인이 자기도 걸어가겠다고 고집부렸다. 나이도 있는 노인이 반나절 동안 밭에 서 있던 걸 생각해서, 임새옥은 그제야 이용의 나귀를 탔다. 그제야 반산 노인도 나귀에 올라탔다. 이용이 직접 나귀를 끌어주자, 임새옥은 당황해서 튀어 내리려고 했다. 

“대낭자, 그래도 되네. 설령 내가 나귀를 끈대도 지나치지 않아.” 

반산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얼굴이 빨개져서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하고 중얼거렸다. 정말로 왕안석이 나귀를 끌어줄까 봐 두려웠다. 

목숨이 줄어들 일 아닌가. 그러니 할 수 없이 이용이 끌고 가도록 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반산 노인은 꽤 흥이 오른 상태였고, 자루에서 병자를 꺼내 나귀에게 먹이기도 했다. 

“그 나이에 6품 관리가 되었다니, 부친과 형님이 살아있다면 매우 기뻐했겠군.” 

그 말에 이용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임새옥은 이용의 집안일은 전혀 모르고 있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데 반산 노인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누구나 이가 대랑을 알지만, 이가에 이랑도 있는 걸 몰랐지. 자네 부친 탓이기도 해. 자네 형을 너무 추켜세웠어.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추켜세웠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반산 노인도 기운이 없어 보이더니, 주름에 서글픔이 느껴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늘이 영재를 시기한다더니. 지나치게 출중하면 하늘이 살려두지 않아.” 

이용과 임새옥 모두 노인이 아들을 떠올렸음을 깨달았다. 

임새옥도 왕안석의 아들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매우 총명한 사람인 건 알았다. 그녀의 어렴풋한 기억에 의하면, 그 아들은 어릴 때부터 영민했고, 몇 살 때던가, 벌써 ‘어느 것이 노루이고 어느 것이 사슴이냐.’ 같은 문제에 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어린 나이에 진사에 급제해서, 분명 이런저런 관직에 올랐을 것이다. 이런 아들이니 부친의 보물일 수밖에.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 일찍 병사했다. 왕안석이 결연하게 두 번째 사직을 청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소생은 차라리 지금껏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형님이 건재하길 바랍니다.” 

이용이 반산 노인의 슬픈 감정을 돌리려고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했다. 반산 노인은 싱긋 웃고는 저 먼 산을 바라보며 자신이라면 평생 출사하지 않는 것과 아들이 건재한 것을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걷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왔다. 임새옥은 이용이 부축해 주기 전에 재빨리 뛰어내려서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마을로 달려갔다. 이용은 멀어져 가는 그 여인의 고운 뒷모습을 바라봤다. 여인은 가끔 뒤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손을 저으면서 서서히 푸른 산, 하얀 구름을 배경과 하나가 되어갔다.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반산 노인이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만 바라보게. 자네와는 어울리지 않아.”

이용의 가슴이 철렁했다. 누군가 심장을 꺼내 간 것처럼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다. 한참 침묵하며 마음을 가다듬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대인의 주량이 좋다고 들었는데, 오늘 한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반산 노인은 껄껄 웃으며 나귀 등을 두드렸다. 

“젊은이, 따라오게.” 

나귀가 깜짝 놀라 다그닥다그닥 앞으로 가더니 금세 이용을 훌쩍 앞서갔다. 이용은 자신의 나귀에 올라타다가 불현듯 아까 그녀가 여기 타고 있었음을 떠올렸다. 나귀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그녀는 작은 손으로 나귀의 갈기를 줄곧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그 생각에 마음이 따스해져서 나귀 목덜미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인 하나 때문에 이렇게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걸, 이 나이 먹고 처음 알았다. 어찌 됐든 문언, 서예, 금, 그림, 인지상정, 권력 투쟁, 세상 물정, 이런 것들보다 훨씬 복잡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기쁨도 더 크다는 생각에 피식 웃고는 나귀를 몰아 노인 뒤를 쫓았다.

마을로 돌아온 임새옥은 우선 멀리서 집 앞을 보니 가마가 없는 듯해서 한시름 놓았다. 신이 나서 집으로 들어갔더니, 영아가 닭장 옆에서 달걀을 꺼내며 입으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겨우 하나야? 다른 집 좋은 일 한 건 아니지?” 

그러면서 닭장에서 햇볕을 쬐는 하얀 암탉 두 마리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말해! 또 연못가에서 알 낳고 온 거 아니지? 그 집 수탉 꼬시러 간 거 아니야? 내가 못 본 줄 알아?” 

임새옥은 배가 아플 정도로 웃으면서 “말로 알아낼 수 있겠어? 현장을 잡아야지!” 하고 말했다.

그녀가 돌아온 걸 본 영아는 옷을 털면서 일어나더니 까르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대저아 드실 밥도 지어둬서 다행이에요.” 

임새옥은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손과 얼굴을 씻고 영아와 함께 조롱박 덩굴 아래 앉아서 밥을 먹었다. 두 사람의 식사는 매우 간단했다. 두 가지 요리, 탕 하나. 영아가 쌀을 잘 먹어 보지 못해 입맛에 맞지 않아서 성에 가서 소맥분을 사 와서 만두, 병자를 만들어 먹었다.

밥을 다 먹은 임새옥은 그릇을 정리했고, 영아는 그녀가 벗어놓은 옷을 빨려고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금세 메뚜기 두 꿰미를 들고나와서 흔들었다. 

“구워 먹을까요?” 

임새옥은 웃으며 그러라고 했다. 

문득 부뚜막에 금이 간 것이 보여서 임새옥이 물을 길어 진흙을 바르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더니, 영아가 마당에 불을 지피고 메뚜기를 굽고 있었다. 암탉들도 뭘 아는지 후다다닥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부뚜막에 진흙을 다 바를 때쯤, 마당에서 영아가 아이고, 하더니 “서신, 서신!”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닭 우는 소리가 들리고, 영아가 불을 끄려고 빗자루를 휘두르는 기척이 들렸다. 

“왜 그래?”

임새옥이 손을 씻을 겨를도 없이 나와서는, 불더미 안에서 서신이 타는 걸 보고는 손이 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꺼내서 발로 비벼 불을 껐다. 

“가지고 있었는데, 아차 하다가 떨어뜨렸어요.”

겁이 난 영아는 반쯤 남은 서신을 들어 올려 재를 후후 불어 털어내고 임새옥에게 건네주었다. 

“읽을 수 있겠어요? 누가 쓴 거예요?”

고작 얇은 종이 하나였고, 안에 적힌 글씨도 아마 종이의 반을 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지금은 반만 남은 종이에, ‘부탁한 일을 반드시 들어주길 바람.’ 한 줄밖에 남지 않았다. 

“부탁이라니, 무슨 일이지.”

임새옥이 중얼거렸다. 유소호의 글씨체였다. 그날 빗장을 휘두른 후로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보지 않았다. 

분명 죽이고 싶게 밉겠지. 무슨 일로 악독한 전처에게 서신을 썼을까? 

“대저아, 제가 일을 망친 거죠?” 

영아도 그녀 옆에서 까치발을 하고 읽었지만, 글씨도 모르고 임새옥의 표정도 좋지 않아서 다급하게 물었다. 자책하는 마음에 메뚜기도 먹지 않고 발로 짓밟았더니 닭들이 온 마당을 뛰어다녔다. 

“괜찮아, 괜찮아. 서신을 보내 무슨 일인지 다시 물어보면 돼. 마침 네 노비 문서도 달라고 하면 되겠네.”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영아는 그제야 안도하며 안으로 들어가 지필묵을 들고나왔다. 아까 밥 먹던 작은 탁자를 깨끗이 닦고는 임새옥이 어색하게 붓을 쥐고 있다가 천천히 종이에 글씨 쓰는 걸 지켜봤다. 

“대저아, 글씨 잘 쓰시겠죠? 꽃처럼…….”

그 바람에 손이 떨린 임새옥은 몇 글자를 뭉개고 말았다.

다 쓰고 보니 종이 한 장을 꽉 채웠지만, 사실 전할 말은 몇 마디 없었다. 글자가 너무 크고, 또 먹물을 떨어뜨린 바람에 한쪽 자리를 차지해서 꽉 차 보이는 것뿐. 임새옥은 종이를 손에 들고 몇 번이고 읽고는 글자가 잘 보이고 내용도 확실히 썼으니, 됐다 싶었다. 그녀는 서신을 잘 말린 다음에 영아더러 소정가에게 전해주고 보낼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도저히 직접 관아에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 얼렁뚱땅 혼인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영아가 밖으로 나간 다음, 임새옥은 쉴 틈도 없이 마당에 앉아서 옷을 빨고 며칠 동안 진흙이 묻은 신도 닦았다. 신발 바닥에 구멍이 몇 개 났길래,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없으니, 차라리 짚신을 엮을까 싶었다. 어차피 손님을 만날 것도 아니고, 실례가 될 일도 없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밖에서 소리가 나더니 가마 한 대와 말 세 마리가 다가왔다. 골치가 아파왔다. 

화와 복은 잇달아 온다더니, 정말이었구나! 은자가 생겼더니, 이런 골칫거리가! 

사람들이 어느새 문 앞까지 다가왔다. 말을 탄 세 사람은 모두 낯선 젊은 사내로, 셋 다 고상해 보였다. 젊은 사내 셋은 말에서 내리더니 안쪽을 두리번거리는 것 하나 없이 한쪽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리고 곧 황주가 가마에서 내렸다.

임새옥은 속으로 제길, 하고 외치면서 무기력하게 손을 털고 일어서다가, 대야에 속옷을 담가놓은 걸 떠올리고는 허둥지둥 집 안으로 들고 들어갔다. 대야를 내려놓기도 전에 황주가 밖에서 “대낭자, 대낭자!”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