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5권) (31/57)

一. 분명히 말한 송 낭자, 이용에게 경고하다

소북(蘇北: 강소성) 중심에 위치한 회양 부두는 조운(漕運) 역사상 요충지로 불리는 곳이었다. 남쪽으로 한구(邗溝: 중국 대운하의 일부), 장강을 잇고, 북으로 통제거(通濟渠: 변하)에서 황하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9성(省)의 팔달대로’, ‘남선북마(南船北馬)가 만나는 곳’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지금 임새옥의 눈앞에는 번화한 경성에 비견할 만한 부두였다. 저 멀리 십 리에 달하는 긴 거리가 이어지고, 거리엔 점포가 빼곡했으며, 사람들이 비집을 틈도 없이 오갔다. 부두에는 들고나는 배들이 쉴 새 없이 오갔고, 크고 작은 영차영차 소리가 끊임없이 울렸다. 

소정가는 배가 부두에 닿기 무섭게 뛰어내려서는 놀라면서 반가워하며 소리쳤다. 

“대관인! 어쩐 일로 여기에 오셨습니까!” 

소금남의 시선이 소정가를 따라 내려온 푸른 홑옷과 살굿빛 치마를 입은 여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웃으며 바라보는 여인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불똥에 데인 듯이 놀라서는 화들짝 시선을 피했다. 

“대관인, 오랜만이에요.” 

임새옥이 사람들을 비집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웃으며 예를 갖췄다. 소금남도 답례하면서 저도 모르게 여인을 살폈다. 조금 말랐고, 긴 여행에 지친 기색이지만 경성에 있을 때보다 기운이 넘쳐 보여서 내심 안도했다. 사방에 바쁘게 물건을 배달하는 사람들이나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소정가와 사환들이 주위를 막고 있어도 이리저리 부딪쳐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대낭자!” 

누군가 급하게 달려오다가 급히 소금남을 들이받자, 소금남이 그대로 밀려서 엉겁결에 임새옥 몸 앞에까지 가까워졌다. 당황해서 옆으로 피하려던 소금남이 한쪽으로 넘어지려고 하자, 임새옥이 재빨리 손을 내밀어 붙잡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풀잎의 청향이 바람을 타고 코를 간질였다. 

“조심하세요, 대관인.” 

임새옥이 양손으로 재빨리 그를 붙들고는 누가 경솔하게 민 건지 언짢은 얼굴로 노려보았다. 감색 직철을 입은 이 대관사가 어딘가 짓궂은 얼굴로 예를 갖췄다. 

“농신 마마, 절받으시지요.”

“이 관사, 놀리지 마세요.”

임새옥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자 이 관사가 빙그레 바라보고는 슬쩍 소금남을 바라봤다. 소금남은 어느새 임새옥과 멀찍이 서 있다가, 그가 바라보자 눈을 부릅떴다. 이 관사가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곳은 이야기 나눌 곳이 못 됩니다. 대낭자께서 이 먼 길을 오셨는데, 제가 음식을 대접할까 합니다. 대낭자, 제게 그런 영광이 있겠습니까?”

어째서인지 말은 임새옥에게 하는데 이 관사의 시선은 소금남을 향해 있었다. 그의 시선에 소금남도 당황했다. 이 관사가 명목상 소가의 장궤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소금남의 은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소금남이 어려서 소가의 사업을 물려받은 후로, 줄곧 곁을 따르며 세심하게 그를 가르쳐왔다. 스승이자 벗 같은 사이로, 다른 사람들은 소금남의 냉정한 모습에 함부로 말도 잘 못 걸지만, 이 관사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 이 관사의 시선에, 안 그래도 뜨끔하던 소금남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임새옥이 상단과 함께 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던 소금남은 며칠 전에 갑자기 경성에서 온 이용의 서신을 받았다. 막 시가에서 내쫓긴 여인을 불순한 의도로 불렀느니, 누이의 마음을 저버렸느니,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옛사람을 잊었느니 운운하는 신랄한 말과 함께 전가아를 데리고 간다고까지 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람을 보내 알아보고서야 임새옥이 강녕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고는, 대체 어디가 잘못된 건지 얼떨떨한 사이에 계획보다 일찍 회음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장사를 살피러 온 것이지만, 속으로는 그 여인을 한번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이 관사의 눈빛에 제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서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졌다. 

임새옥은 감사하다고 하며 바로 승낙했다. 이 관사는 앞장서서 부두 밖으로 안내했고, 영아도 두리번거리며 뒤를 따랐다. 이 관사는 임새옥이 영아를 데리고 마차에 탄 걸 보다가 곁에 서 있는 소금남을 보고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관인, 배의 화물을 살피신다더니요? 어째서 함께 가시려는 겁니까?” 

소금남은 순간 얼굴이 붉어져서 이 관사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미 마차에 올라탄 임새옥도 그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내밀고 소금남을 바라봤다. 소금남이 평생 이토록 궁색한 적이 있던가. 이를 악물고 돌아서려는데 이 관사가 벌써 웃으며 그를 붙잡았다. 

“대관인, 쩨쩨하게 굴지 마십시오. 대관인이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대접하겠습니까. 대관인, 도망가지 마십시오. 오한루에 세 사람 자리를 예약해둔걸요.” 

이 관사는 사람들을 데리고 거리를 지나 번화한 회음 성 안으로 들어갔다. 

술을 세 주전자 비우고 갖가지 음식을 맛보면서 이 관사와 임새옥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시중도 필요 없어서, 곁에 작은 탁자를 더해서 영아가 따로 먹도록 술안주와 과일을 내어주었다. 소금남은 한쪽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며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술을 몇 잔 마시고 얼굴이 발그레해진 이 관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낭자, 북부 몇 곳의 보리 병충해를 구제하다니, 역시 재주가 대단하십니다. 조정에서 대낭자에게 상을 내려야 마땅하거늘, 어째서 유문장의 공이 된 것인지 제가 다 억울합니다.” 

“아니에요. 과찬이세요, 대장궤. 전 일개 부녀자랍니다. 그저 몇 마디 한 것뿐이고, 마침 공교로웠던 것뿐인데 공이라니요.” 

이 관사가 끌끌거리다가 불현듯 소금남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리 겸손하다니요. 대낭자 같은 분은 드물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대관인?” 

안 그래도 찔리는 소금남은 아무리 들어도 말속에 뼈가 있는 것 같아서 헛기침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셨다. 이 관사는 실실 웃으며 더는 상대하지 않고 임새옥을 다시 쳐다봤다. 

“대낭자, 대낭자는 훌륭한 여인입니다. 유가에서 그 복을 누릴 팔자가 아닌 게지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누구와 혼인하든 그 유가보다 만 배는 나을 겁니다.”

임새옥도 빙긋이 웃었다. 이 관사와 꽤 가까운 편이고, 호의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았다. 마음이 찡해져서 고개를 숙여 감정을 감추며 웃어 보였다. 

“대장궤, 또 놀리시네요.” 

“아니요. 놀리는 게 아닙니다. 어찌 감히요. 마침 제게 좋은 혼사가 있어서 말씀드리려는 참이었습니다.”

이 관사가 말을 자르며 하는 말에, 진심일 줄 몰랐던 임새옥은 경악하고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술을 마시던 소금남도 그 말에 목이 걸려서 연신 헛기침했다. 임새옥은 대관인의 등을 두드려 주라고 영아를 부르면서 다정하게 괜찮은지 물었다. 소금남은 어색한 얼굴로 이 관사를 노려봤다. 이 관사는 화제를 거두고 껄껄 웃기만 했고 임새옥은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다른 쪽, 경성의 운봉루에도 난처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송옥루는 자기를 맞이하러 나온 동연낭과 그림자 같은 월낭을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웃어 보였다. 

“아이고, 언니. 어쩌다가 조심하지 않고 넘어져서 얼굴을 다치셨어요.” 

동연낭은 껄끄러운 감정을 감추고 마지못해 웃으며 얼굴의 멍 자국을 가렸다. 

“저택을 새로 고쳤는데, 미끄러워서 실수로 넘어졌지 뭡니까. 부인, 못난 꼴을 보였네요.” 

송옥루가 빙긋이 웃었다. 누가 봐도 손바닥 자국이었다. 

이 가련한 사람 같으니. 이 꼴로 얻어맞고도 눈 질끈 감고 나와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니. 

송옥루는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또 내심 다행스러웠다. 예전에 이용에게 잠시 품었던 마음을 즉시 잘라내서 망정이지, 그 집으로 들어갔다가는 호랑이 소굴에 들어간 꼴이리라. 

그 생각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래도 하늘이 나, 송옥루를 어여뻐하는 게지. 돌고 돌아 이렇게 훌륭한 인연을 주셨잖아! 

“유 부인, 기분 좋아 보입니다!” 

이용이 격간 문을 열고 들어왔다. 능라주단을 입은 여인의 뿌듯해 보이는 얼굴에 화가 울컥 치밀어서는 냉랭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 위 술잔을 집어 들어 벌컥 술을 마셨다. 송옥루는 이용의 안색에 흠칫 놀랐다가 곧 마음을 가다듬고 곁에 천천히 앉아서 스스로 술을 따랐다.

“바람이 불고 날이 건조합니다. 열증이 오르신 것 같으니 배 물을 자주 드세요, 이 대인.”

이용은 탁자 위에 술잔을 탁 내려놓고 싸늘하게 웃었다. 

“부인, 요즘 호사스럽게 살며 겉가죽을 가꾸고 있으니 원래 어떤 꼴이었는지 잊은 모양입니다?” 

안 들었으면 모를까, 이용이 원래 모습 운운하자 화가 치밀어서 그녀 역시 술잔을 탁 내려놓았다. 

“이 대인, 집안에서며 조정에서며 승승장구하시는 분이 어째서 일개 부인을 못 봐 넘기시는지요. 제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적절한 일을 하긴 했으나, 지금은 시댁을 잘 섬기는 안채 여인으로 살려는 일념뿐입니다. 속담에 절을 부술지언정 혼사는 망치지 않는 법이라 했습니다. 그만큼 남의 혼인을 망치는 것이 절을 부수는 것보다 죄가 많다는 뜻이지요. 이 대인, 대체 왜 제 숨통을 조이는 겁니까?” 

그 말에 이용이 손바닥을 문지르며 웃었다.

“하! 참으로 능란한 말솜씨로군요. 부인, 말씀 잘하셨습니다. 절을 부술지언정 혼사는 망치지 않는다? 그 혼사가 어찌 온 것인지는 잊은 모양입니다?”

“대인, 지금 대인이 마음에 품은 그 여인 대신 불평하는 겁니까? 그건 제 탓이 아니지요.”

송옥루도 하, 하고 웃으며 말을 골라 대답하고는 고개를 젖혀 술을 마셨다. 

“저 송옥루, 하늘에 맹세합니다만, 조 대낭자의 혼사를 망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마다한 것이지요. 이 대인, 말씀 조심하세요. 제가 원래 명성이 좋지 않아서 이런 죄명은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렇긴 하지.”

이용은 별안간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뿌듯해 보이는 송옥루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시댁에 성상의 총애가 가득한데, 하찮은 9품 관리인 내가 어찌 감히 밉보일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일어서서 술잔을 들고 다가가 입꼬리를 차갑게 끌어올렸다. 

“부인, 사죄의 뜻으로 올리는 제 술을 드시지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옥루가 공들여 정리한 머리를 잡아채서 고개를 젖히고는 콧구멍을 향해 술을 흘려 넣었다. 송옥루가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피하지는 못하고 켁켁거리며 숨을 헐떡였다. 

“부인? 네 주제에 부인? 체면을 세워줄 때 알아서 해야지. 내가 치워버려서 그렇지, 너와 잠자리 한 사내를 네 집 앞에 줄을 세울 수 있다! 음탕한 것. 왜? 내가 인제 너를 어쩌지 못할 것 같으냐? 설사 이 자리에서 널 때려죽여도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다!” 

이용이 술잔을 집어던지자 송옥루가 손을 들어서 막고는 날카롭게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그래. 때려. 때려죽여! 한번 해 보지 그래? 고작 등사랑 주제에. 내가 예전에 뭐였든, 지금은 당당한 6품 명부야. 날 때려죽여? 그럴 수 있으면 가상하게 봐주지!”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대인, 예전 일로 위협하지 마세요. 있는 대로 말씀드리지요. 우리 이랑에게 직접 찾아가 말해도 안 믿어요. 이랑은 나만 믿어요! 나쁜 짓은 다 남이 한 거라고요!” 

이용이 표정이 변해서는 송옥루를 힘껏 끌어당겨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송옥루가 바닥에 앉은 채 화도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대인, 알아요, 속이 답답해서 나한테 화내는 거. 그러니 나도 따지지 않겠어요. 하지만, 진작 말했죠? 사람은 내가 쫓아내도, 먹을 수 있을지는 나와 상관없다고, 내 탓이 아니라고 했지요?”

송옥루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따지고 보면 퇴짜 맞는 것도 당연하지, 그 조 대낭이 당당한 정실부인 자리를 두고 몇 번째인지도 모를 첩이 되겠어요? 말도 안 되는 우스운 일 아닌가요?”

이용은 그녀의 말에 기가 차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내게 땅문서를 주고는 돌아서자마자 사람을 쫓아내다니, 내가 우스우냐? 

퇴짜? 설령 내가 원한다고 쳐도, 송 낭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고는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에 송옥루는 가슴이 철렁했다. 움켜쥔 주먹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말로는 강한 척해도, 정말로 이 흉악한 사내에게 두들겨 맞으면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에게도 절대로 말 못 할 일이었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그건,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에요. 그때 빨리 달려갔으면, 그녀의 은인이 됐을 거 아니에요. 난 당신을 도우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주먹이 어깨에 떨어졌다.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데, 이용이 이를 갈며 하는 말이 귓가에 들렸다. 

“날 도와? 거참 고맙구나!” 

주먹에 맞아 쓰러진 송옥루는 거대한 충격에 바닥에 주저앉아서 무심결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한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다시 몰려왔다. 노름 좋아하던 아비, 돈 내놓으라고 찾아왔던 사내들, 하마터면 억지로 당할 뻔했던 위기, 죽어라 감싸다가 얻어맞고 두 눈에 피를 흘리던 어미. 

“감히 날 때려? 감히 날 때려? 죽여버릴 거야! 아무도 다시는 나 송옥루를 다치게 하지 못해!” 

송옥루가 날카롭게 고함치며 닥치는 대로 의자를 집어던졌다. 이용은 갑자기 미쳐 날뛰는 여인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피했다. 제때 피해서 다행히 어깨만 스치고 날아간 의자가 구석에 놓인 큰 화병에 부딪혔다.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사람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이용!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 여인은 이제 우리 유가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먹든 삼키든 재주껏 알아서 하라고. 날 찾아와 화풀이하지 마!”

송옥루는 옷깃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조용해진 방 안.

그녀는 깊이 숨을 고르고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는 이용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매무새를 가다듬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 대인은 똑똑한 분이시죠. 다른 사람을 해치자고 자기가 다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 송옥루는 좋은 날, 힘든 날 다 살아왔답니다. 아무리 못해도 사내에게 기대서 살아갈 수 있어요. 이 대인, 여인 하나 때문에 앞날을 망치고 싶진 않으시겠지요?”

이용은 이 여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 느낌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부인의 말씀, 염두에 두지요.”

송옥루가 비녀를 다시 꽂으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대인, 제 미리 말씀드립니다만, 조 낭자는 대인 댁 여인들과 다릅니다. 그 여인 앞에서 체면을 잃었다면 댁에 있는 여인들이나 잡으시고 이제 더는 절 찾아오지 마세요. 저, 송옥루, 대인의 은혜를 입었지만, 오늘 맞은 것으로 갚았습니다. 앞으로 제 갈 길 가고 얽히지 말아요.” 

이용도 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로 되돌아가 앉았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 깨진 도자기 조각이 아니었다면, 조금 전 그 장면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얼굴에도 봄바람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물론 알지요.” 

이미 문가로 갔던 송옥루가 돌아보며 슬쩍 냉소했다.

“아, 부인은 싫고 첩이 되길 바라는 사람이었나 보네요? 그렇다면 그야말로 대인의 좋은 배필이군요.”

이용은 그녀의 비아냥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 여인의 마음은, 송 낭자 같은 천한 사람은 평생 가도 모를 겁니다. 그녀가 원하는 건 이겁니다.” 

그는 가슴을 탁탁 두드리고는 길고 아름다운 제 눈을 쓰다듬었다. 

“진심.”

송옥루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축하드려요. 이 대인의 마음이 어떤지 분명 쉽게 알 수 있겠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문을 열고 살랑살랑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동연낭과 월낭이 옆 칸에서 서둘러 나왔다. 가슴속 가득 화가 치민 송옥루는 조심스럽게 따라 내려오는 두 사람을 보더니, 별안간 돌아서서 동연낭의 턱을 치켜들었다. 

“언니, 언니 같은 사람은 어딜 가든 보물 대접을 받을 텐데, 어째서 이런 대우를 받나요? 쯧쯧. 솔직히 말해서 명분밖에 없는 정실부인이라니, 청루의 기녀보다 못하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겉가죽이 아깝습니다.”

동연낭과 월낭의 안색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럼에도 동연낭이 배웅하러 따라가는데 월낭이 동연낭을 붙잡고서 생긋 웃어 보였다. 

“송 낭자는 겉가죽을 참으로 잘 쓰지요. 우리 같은 어리석은 사람과 어찌 비교하겠어요.” 

송옥루가 그녀를 흘겨보다가, 지나가는 사람이 많은 걸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재수 없다고 혀를 차고는 새파래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많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이고는 허둥지둥 다가온 홍향과 녹옥을 잡고 살랑살랑 돌아갔다. 

동연낭은 그녀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색은 이미 평소처럼 돌아온 상태였다. 월낭이 동연낭의 뒤를 따르며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부인, 저 천것이 한 말…….”

“월낭, 저런 사람이 한 저런 말을 내가 왜 마음에 담아 두겠나. 괜한 생각이야.”

동연낭이 생긋 웃으며 손등을 토닥이며 하는 말에 월낭도 마음을 놓았다. 동연낭을 부축해서 위로 천천히 올라가는데, 맞은편에서 누군가 급하게 내려오다가 어깨를 부딪쳤다. 서둘러 난간을 잡지 않았다면 굴러떨어질 뻔했다. 

“뭐 하는 거냐. 눈 없니?” 

속이 복잡하던 월낭이 눈을 치켜뜨며 고함쳤다. 석류홍 대금 상의, 백능 치마를 입고 머리는 양 갈래로 올린 채 금엽(金葉) 귀걸이를 드리운 옥처럼 하얗고 눈매가 아름다운 여인이 두 사람을 흘겨보고 있었다. 

월낭은 멈칫해서는 이 여인을 어디에서 봤던가, 생각했다. 바로 생각이 나진 않는데, 차림이 비범하지 않았다. 월낭의 말에 깜짝 놀란 동연낭은 그녀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월낭이 평소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서둘러 그녀를 끌고 몸을 돌려 계단 위를 올라갔다. 그 여인이 웃는 듯 마는 듯 묘한 말투로 하는 말이 들렸다. 

“정말 눈이 삐었었네. 자비로운 보살인 줄 알았더니, 원래는 요괴였군.” 

동연낭과 월낭 모두 멈칫하고 그 여인을 다시 보았다. 여인은 어느새 쿵쿵 아래로 내려갔고,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는데 위에서 화려하게 차려입은 여인 몇 명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원은 왜 저렇게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네. 이러니까 노부인이 시집도 안 보내려 하시지.” 

웃으며 사라지는 여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뒤에 남은 동연낭과 월낭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저 아이, 뭘 들었을까요?”

월낭이 쿵쿵 뛰는 가슴을 달래지 못하며 나지막이 물었다. 동연낭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를 토닥였다. 

“방이 떨어져 있었잖은가. 우리도 못 들었는데, 어찌 알겠어. 우리가 송씨와 같이 있는 걸 보고 화가 나서 마음대로 지껄인 게지.”

그러고는 더는 지체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계단을 올랐다.

청명이 지난 후, 날씨가 하루하루 달라졌다. 특히 남쪽에 있는 임새옥은 날씨 변화를 더 잘 느낄 수밖에 없었다. 회음에 도착해 배에서 내릴 때만 해도 겹옷을 입었는데, 사흘이 지나 강녕부에 오자마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삼으로 갈아입은 걸 보고 서둘러 영아와 보따리를 뒤져 얇은 옷을 꺼내입었다. 돈이 얼마나 남았는지 물었더니, 영아가 불퉁하게 투덜거렸다. 

“어딜 가든 남의 밭 농작물을 함부로 뽑는 바람에 엉뚱한 돈을 많이 썼잖아요.”

그러고는 신발과 옷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신발은 다 낡아서 터지고, 옷은 나뭇가지에 긁혀서 구멍 났고. 이 꼴로 나가면 얼마나 비웃음 사겠어요. 갖고 온 옷도 너무 빨아서 색이 다 바랬어요. 새 옷 좀 지어요.” 

임새옥은 보물처럼 여기는 표본을 잘 챙기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친척댁 방문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시골에 가는 건데 잘 입어서 뭘 하게. 오히려 그게 더 웃길걸.”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사환이 밖에서 고함쳤다. 

“대낭자, 마차 준비됐습니다. 이제 가십니까?” 

임새옥은 빠르게 대답하고는 영아를 끌고 밖으로 나가면서 지금 묵고 있는 마당을 둘러보았다. 하얀 벽, 검푸른 기와, 들쑥날쑥 올라간 봉화산장(封火山墻: 가옥의 지붕과 담벽의 조합 형식. 지붕보다 높은 계단 모양으로, 담벽이 화재 확산을 막는 데 효과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회랑에 꽃무늬 창이 달린 강남풍 민가였다. 

그녀는 어쩐지 마음이 조마조마해져서 사환에게 물었다. 

“저기, 이 저택, 세가 제법 비싸겠지?” 

“며칠밖에 안 묵으시니 조금 비싼 겁니다. 1년 치 한 번에 내시면 조정할 수 있지요.” 

사환이 돌아서서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혀를 내두르며 전대에 있는 돈을 어름 잡아 보았다. 집을 구해달라고 소금남에게 부탁했던 걸 조금 후회했다. 소금남처럼 부귀한 사람이 싼 곳을 어떻게 알까. 다행히 돈은 충분한데, 이런 곳에 쓰는 건 아까웠다. 소가의 배가 북으로 가려면 열흘 이후가 될 테니 이 거처를 무르기로 결정 내렸다. 

어차피 강녕성 외곽을 돌아다닐 생각이니, 발길 닿는 곳에 거처를 마련하면 되지 않을까. 마을 사람들이 후덕하고 선량하니 돈을 주지 않아도 여인 둘은 재워줄지 모르고. 아낄 수 있으면 아껴서 씨앗을 사거나 돌아가서 땅을 사는 게 나을 테다.

“대저아도 참. 소정가 집에 빈 집채가 많다는데, 끼어서 좀 살면 어때서요. 그걸 괜히 거절하고 돈을 쓰시면, 안 아까우세요?”

영아는 신발과 옷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에 갈수록 불만이 생겨서 집세만 해도 일고여덟 냥이라 옷 몇 벌은 만들 수 있다고 꿍얼거렸다. 임새옥은 영아를 노려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난 집에서 쫓겨난 여인이야. 시골을 돌아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어떻게 사내 집에 묵어? 나야 괜찮지만, 그쪽 생각도 해야지. 그리고 너, 자꾸 점포로 찾아가서 소정가 귀찮게 하지 마. 나야 네가 먹을 것에 욕심 나서 가는 거 알지만,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 

영아는 얼굴을 붉히며 아무런 말 없이 임새옥 뒤에서 제 옷자락만 만지작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오히려 임새옥이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평소에 지치지도 않고 되받아치더니 오늘은 웬일로 가만히 있는 건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으응? 그러고 보니까, 소정가가 네게 제법 잘하더구나. 정혼했는지 모르겠네?” 

영아는 고개를 거의 옷 안으로 묻을 듯이 움츠리고는 뭐라고 꿍얼거렸다. 

거처에서 나온 두 사람은 떠들썩한 골목에 도착했다. 골목 이름도 참 재미있는 것이, 일인항(一人巷)이었다.

일인항을 지나자 공방 거리에 도착했다. 하늘이 막 밝았을 시간이지만, 어깨를 드러낸 장정들이 벌써 시뻘건 화로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공방 밖엔 작게는 침구(針灸)에 쓰는 침, 바느질용 수침에서 크게는 솥, 농기구, 날카로운 칼까지 놓여 있었다. 

호기심에 다가가서 본 임새옥은 그 농기구들이 이미 후대의 것과 비슷한 모습인 걸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영아가 등 뒤에서 쿡 찌르고는 실실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대저아, 사내들을 왜 뚫어져라 보는 거예요?” 

임새옥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영아에게 꿀밤을 먹였고, 영아는 깔깔 웃었다. 영아의 웃음 소리가 아침 햇살과 함께 자수방 앞에 막 내놓은 아름다운 포목 위를 스치더니, 그 너머에 있는 종이 공방까지 날아갔다. 공방 앞에 가득 놓인 그림을 많은 이가 에워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어머, 어머. 대저아. 저거 보세요. 저 선녀도(仙女圖), 소관인도 저걸 사서 새 부인 방에 걸어 놓았어요. 그런데 저것처럼 예쁘지는 않았어요.” 

영아는 거의 마차에서 일어날 듯이 임새옥을 흔들며 흥분해서 외쳤다. 임새옥의 안색이 살짝 변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다행히 그 가게는 눈 깜빡하는 사이 지나쳤고, 영아의 관심은 금세 고소한 냄새가 나는 유병(油餠) 가게로 향하더니, 이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임새옥은 영아의 한마디에 눈앞의 화려한 광경도 잊고 끝도 없는 적막함에 빠져들었다. 

이랑, 그녀에게 참 잘해주는구나. 

마차는 화려한 거리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 강녕부 동쪽으로 흔들흔들 다가갔다. 저 멀리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였다. 

성문을 몇 리 벗어나자 인적이 드물어지고, 임새옥은 영아를 데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작은 괭이를 들고, 영아는 자루 하나를 메고 흙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주변은 대부분 황야였고, 오래된 소철목, 상수리나무, 참나무, 풍나무, 굴피나무 같은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가끔 보이는 평탄한 곳은 밭으로 개간되었고, 그 밭에 무릎보다 높게 자란 푸른 보리가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추위로 피해를 봐서 북부보다 늦게 싹이 텄는데 이 정도로 자란 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네.”

임새옥은 보리밭 가에 웅크리고 앉아서 괭이로 땅을 파보다가 주변에 보는 사람이 없자 보리를 한 줄기 뽑아내서 유심히 관찰했다. 

“한 달만 있으면 비가 많이 올 텐데, 꽃 피는 데 영향받겠어.”

자루를 내던지고 나비를 쫓아다니던 영아가 웅덩이 몇 개를 지나더니 흥분해서 돌아보며 손짓했다. 

“대저아, 대저아! 어서 오세요! 여기 꽃이 잔뜩 피었어요!” 

임새옥이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봤더니, 영아는 벌써 아래로 내려가고 없었다. 그녀가 손을 털고 괭이와 자루를 들고 천천히 걸어가서 언덕을 올라갔다. 딱 봐도 인공으로 개간한 드넓은 밭에 유채꽃이 만개해 있었다.

“강녕은 여름 농작물을 재배하기 적당하지. 볕도 충분하고, 기온도 높고. 이것 봐, 유채가 얼마나 잘 자랐니.”

임새옥은 조심스럽게 밭을 지나가면서 중얼거렸다. 그러다 영아가 유채꽃을 한 움큼 뽑아 신이 나서 머리에 꽂는 걸 보고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안 돼! 이 좋은 농작물을 버리다니!” 

영아가 화들짝 놀라서 의아한 듯 물었다. 

“이거 들꽃 아니에요? 농작물이라니요? 어디에 쓰는데요? 꽃을 먹어요?” 

“이게 바로 운대 꽃이야.” 

임새옥이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이고는 경성 방향을 바라보며 쓸쓸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경성에 아직 있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노부인을 모시고 어전에 가서 구경했을 거야. 거긴 더 많이 심었으니, 여기보다 훨씬 예쁠 텐데.” 

영아는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양손으로 뒷짐을 지고 청백색 직철을 입은 노인은 유채꽃이 핀 걸 보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왔더니 꽃이 피었군. 잘 되었어. 그자가 말한 대로 기름을 짤 수 있는지 해봐야겠어.” 

그러고는 영아 손에 들린 꽃을 보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 녀석, 그 정도만 머리에 꽂아도 충분하다. 더 따진 말아라.” 

영아가 혀를 낼름하며 임새옥 뒤로 숨었고, 임새옥은 죄송하다고 말하면서 예를 갖추고는 슬쩍 노인을 살폈다. 지천명은 지난 것 같은데 얼굴이 발그레하고 시골에서 자주 보는 노인보다 품위가 있어 보였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탓하는 건 아니다, 아니야. 그냥 사람들 구경이나 하라고 내키는 대로 뿌린 것뿐이다.”

노인의 서글서글한 성품이 마음에 든 임새옥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르신께서 씨뿌린 운대는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달만 지나면 기름을 많이 짤 수 있어요.”

이미 느릿느릿 두 사람을 스쳐 지나가던 노인은 그 말에 걸음을 멈추고는 임새옥을 위아래로 살펴보았다. 청아하고 소박한 것이 차림새며 치장이며 촌부 같지 않아서 흥미로운 듯 물었다. 

“너도 운대로 기름을 짜는 걸 아느냐?”

‘도’라는 말에 임새옥 역시 조금 놀랐다. 요즘 그녀는 먹는 기름을 신경 쓰고 있었고, 가게의 점원에게 물어서 현재 기름 종류가 다양하고 지역마다 특성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소정가는 어리지만 돌아본 곳이 많아서, 어느 날 그에게 물었더니 흥이 나서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연안부에서 살구씨, 울금향 씨, 만청자 기름을 보았고요, 관씨현에서는 창이자 기름을 주로 먹습니다. 집에선 대마유 말고도, 노부인은 멀구슬열매 기름을 좋아하시고, 이방(二房) 나리 댁은 오구 열매를 좋아하십니다. 대관인은 얼마 전에 바다에서 어유(魚油)도 가지고 오셨는데, 낭자들 몇몇만 좋아하고 대부분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죄다 낭자 댁에 보냈습니다.’ 

잔뜩 이야기해도 운대씨 기름 이야기는 나오지 않아서 지금은 아직 아는 사람이 없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골에서 우연히 만난 노인이 운대씨 기름을 안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르신도 아세요? 그래서 이렇게 많이 심으셨군요.” 

“하하하, 나도 몰랐다. 누가 말하길래 할 일도 없으니 심어 본 것일 뿐이지.” 

그러고는 임새옥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말씨를 들어보니 경성에서 온 모양이로구나.”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 현세 모두 북쪽에서 태어나 하남 경계와 가까운 곳에 살았다. 

“경성에서도 작년에 운대를 심었어요. 얼마 있으면 따서 기름을 짤 수 있어요. 그럼 어르신 말을 입증할 수 있겠죠.” 

노인이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꽤 식견이 있구나. 자용(子容: 소송의 자)과 같은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아쉽게도 경성에 심은 운대는 벌써 경성 사람들 배 속으로 들어갔단다.” 

임새옥은 멈칫하더니 놀라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먹었다고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맑은 강변, 따듯한 날, 흔들리는 갈대가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개지 같구나.”라고 중얼거리고는 돌아서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왕안석이 어느 역참을 지나다가 흥이 일었는지 시 두 줄을 쓰고는 더 쓰지 않고 미완의 시로 남겨 두었다는 일화가 있다. ‘창주 초가집에 나부끼는 주점 깃발, 오후에 외롭게 피어오른 밥 짓는 연기. 맑은 강변, 따듯한 날, 흔들리는 갈대가 마치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개지 같구나.’)

임새옥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이 시가 되는 이 ‘노인 농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가 전한 소식이 너무 놀라울 뿐이었다. 

고심해서 재배한 운대를, 먹었다고?

소금남도 분명 들었겠지? 그녀가 그에게 수고를 끼쳐서 옮겨 온 운대 싹이었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돈을 몇 배로 벌어서 갚겠다고 약속했는데, 유소호가 있는 어전시에서는 본전만 줬을 것이다.

임새옥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부끄럽고, 화도 났다. 

어째서 말을 듣지 않아?

“대저아, 우리 집에도 심을 수 있어요? 돌아가서 우리도 심어요. 정말 예뻐요.”

영아가 계속해서 머리에 꽃을 꽂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임새옥은 그 말에 마음이 동해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큰 빚을 지고 어떻게 편안하게 살겠어.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이곳의 토양, 날씨도 운대 심기에 적합하잖아. 그 사람 집도 마침 여기고, 이곳에서 심어서 이득을 돌려주는 게 가장 좋아.” 

그러고는 영아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영아, 우리 여기서 1년 사는 게 어때?” 

영아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좋다고 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럴 돈이 있나요?” 

임새옥이 웃으며 괭이를 들어 올렸다. 

“시골에서 살 집 하나 못 구할까 봐? 돈 얼마 안 들어.”

갑자기 차가운 물방울이 콧등에 떨어지는가 싶더니, 영아가 소리를 질렀다.

“어머, 비 와요! 대저아, 어서 가요!”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가득해진 먹구름이 빗발을 뿌렸다. 임새옥은 자루를 뒤집어쓰고 영아를 따라 왔던 길로 후다닥 되돌아갔다. 기다리다 못한 마차꾼이 기름종이 우산을 가지고 달려와서, 다행히 둘 다 완전히 젖진 않았다. 

“산에도 가보려고 했는데 아쉽네.”

임새옥이 신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면서 안개비 뒤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산봉우리를 가리키자, 마차 모는 사환이 싱긋 웃었다. 

“종산(鍾山)에 가시려거든 좋은 날 가셔야죠. 그래야 자색 구름을 볼 수 있습니다.” 

임새옥은 빙긋 웃으면서 속으로 종산이 어느 산인지 생각했다. 

남경에 자금산(紫金山)이 있는 건 아는데, 그 산은 아니겠지? 그저 산이 기이하고 아름다워 보여서 어떤 식물이 무성하게 자란 건지 보고 싶은 거지, 풍경은, 어차피 감상할 안목도 없어서 안 봐도 그만이지.

일행이 천천히 강녕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비는 여전히 보슬보슬 내렸다. 저 멀리 대문 앞 큰 나무에 말이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누구지? 소정가인가?”

임새옥이 웃으며 말하는데, 영아가 바로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제대로 서기도 전에 머리를 감싸고는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제가 먼저 옷 갈아입고 나오겠다고 외치고는 쪼르르 달려가는 모습에 임새옥은 깔깔 웃고는 사환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내일 약속을 정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주인 장 어멈이 웃는 얼굴로 그녀를 맞이했다. 

“저 녀석, 뭘 저리 뛰어간답니까. 대낭자를 부축하지도 않고요.” 

올해 쉰 남짓한 장 어멈은 아들도 딸도 없이, 남편이 남긴 집 하나로 먹고살고 있었다. 소금남이 집을 빌리러 왔길래, 큰돈을 벌게 된 줄 알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데 가난한 낭자 둘이 잠시 빌린다고 해서 얼마나 실망했는지. 다행히 임새옥이 오늘 아침에 며칠 후엔 떠난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길게 빌려주는 것에 지장이 없다 싶어져 웃는 낯을 보이는 것이었다. 

임새옥이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고 누가 말을 밖에 묶어 놓은 건지 물으려 하는데, 소금남이 전가아를 안고 밖으로 나왔다. 임새옥은 얼떨떨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어머, 전가아!”

임새옥은 몇 걸음 만에 다가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목에 금목걸이를 건 아이는 그새 또 자랐다. 아이는 임새옥이 다가가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소금남이 안색이 싸늘해져서 바로 손을 치켜들자, 임새옥이 재빨리 막으며 전가아를 안았다. 아이는 눈을 흘기며 노려보면서 두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전가아!” 

임새옥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기도 웅크리고 앉았다. 

“아버지 말씀을 들으니, 전가아는 똑똑하고 귀여운 아가라던데, 아버지가 거짓말하신 건가?” 

임새옥이 얼굴을 굳히며 하는 말에, 전가아는 잘 알아듣지 못한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말을 잘하지 않…….”

소금남이 옆에 서서 주저하며 입을 여는데, 임새옥이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막고는 계속해서 전가아에게 말을 걸었다. 

“전가아, 이모 싫어? 싫으면 큰 소리로 말하면 되지, 침을 뱉으면 어떡해? 침 뱉는 아이는 미워요. 늙은 미치광이한테 끌려간다고!”

전가아가 놀라서는 소금남 다리 쪽으로 몸을 기대니, 소금남이 못 말린다는 듯 임새옥을 바라봤다. 아이를 놀라게 한 임새옥은 뿌듯해서 빙긋 웃었다.

“나갈 때 우산을 챙겨야 합니다. 이곳은 날씨가 수시로 변해요.” 

소금남은 전가아를 안으려다가 여인을 힐끔 바라봤다. 축축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치마며 신발이며 온통 진흙이 묻어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조금도 낭패스럽지 않고 오히려 생동감이 넘쳐 보였다.

임새옥이 팔뚝으로 소금남을 쿡 치면서 전가아가 아직 걷지 못하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다가온 여인의 모습에 소금남은 움찔했다. 비 냄새와 흙 냄새가 코를 간질이자, 안 그래도 긴장했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피했다. 사내 앞에서 어쩌면 이리 당돌하냐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자신을 향한 신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느낌이 혀끝을 맴돌았다.

에효. 이런 아이는 전생에도 있었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재가하고, 친척들 손에 커서 성격과 심리 상태가 완전히 뒤틀어진 아이. 친척들의 의도는 좋았다고 해도 말이다. 

“전가아, 전가아, 이리 와. 화 이모랑 들어가자. 좋은 거 보여줄게.” 

임새옥은 아버지가 안아주길 기다리며 팔을 뻗는 전가아를 향해 손짓하며 손을 내밀었다. 

전가아는 얼떨떨해하더니 안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소금남을 힐끔 보고는 결국 임새옥에게 손을 내밀었다. 감히 제게 겁을 주는 눈앞의 이 여인을 향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한 것이다. 

“어머나, 전가아는 손이 참 예쁘구나. 내 손보다 더 예뻐!” 

임새옥이 싱긋 웃으며 전가아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갔고, 소금남은 그 뒤를 따랐다. 여인의 거처에 들어갔더니, 영아는 옷을 다 갈아입고 정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소금남을 보고는 실망했는지 입을 내밀며 인사하고는 임새옥에게 빨래하게 옷 갈아입으라고 했다. 

소금남이 황급히 전가아를 안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얼마 후에 영아가 나오고 문이 열린 걸 본 전가아는 누가 부르기도 전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뒤에서 소금남이 불러도 소용없었다. 

“전가아, 이리 와. 문제 내 봐야겠다. 이게 뭔지 알겠니?”

임새옥이 안에서 웃으며 하는 말이 들리자, 소금남도 그제야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검은 대금 웃옷, 하얀 도선 치마를 입고 원보빈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채, 바닥에 펼친 종이를 전가아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풀이야!”

하나하나 살펴보던 전가아는 종이마다 붙어 있는 갖가지 푸르고, 누런 뿌리, 잎, 줄기 중에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저렇게 말했다.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손뼉을 쳤다. 

“전가아도 아는구나, 대단한데! 역시 네 아버지, 거짓말하지 않으셨네!”

전가아의 굳어있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임새옥은 이건 보리, 이건 깨, 시금치, 숭람, 길경(桔梗: 도라지) 하며 다른 것도 보라고 했고, 전가아는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이게, 먹는 쌀?” 

전가아가 벼이삭을 가리키며 묻고는 손으로 만졌다.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가아, 너 몰랐니? 아이, 창피해.” 

전가아의 작은 얼굴이 조금 구겨지자 서둘러 덧붙였다. 

“전가아, 나중에 시간 나면 화 이모랑 같이 쌀 심으러 갈래? 물놀이, 흙 놀이할 수 있어. 전가아는 해봤어?”

물론 전가아는 해보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진흙 한 방울도 만져보거나 묻힌 적도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은 미지의 것이 가장 끌리는 법, 전가아는 순간 들뜬 표정을 짓다가 다시 얼굴을 흐리더니 임새옥을 바라봤다. 

“화 이모, 거짓말쟁이!” 

임새옥은 얼떨떨해졌고,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던 소금남의 얼굴도 바로 구겨졌다. 

“전가아!” 

“거짓말, 거짓말했어. 전가아랑 안 놀고! 숨었어!” 

전가아가 갑자기 주먹을 움켜쥐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임새옥은 그제야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이 아이,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거야? 

조금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변경에 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약속한 게 맞아서 그녀는 서둘러 웅크리고 앉았다. 코끝이 찡해졌다. 

“전가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거짓말했네.” 

임새옥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이 아이, 세는 나이로 다섯 살이지? 그런데 말이며 행동이며 아기 같아. 어머니가 없는 걸 아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내향적인 거고?

“다 거짓말쟁이. 다 거짓말. 다 전가아를 버렸어!” 

전가아가 갑자기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다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작은 주먹을 임새옥을 향해 휘두르자, 소금남이 잡아당기려는데 임새옥이 가로막았다. 

“전가아, 이모한테 말해 봐. 누가 널 버렸어?” 

임새옥은 표정을 가다듬고 전가아의 손을 힘껏 잡으며 아이를 바로 세웠다. 전가아가 처음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갑자기 우왕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니가 날 버렸어. 난 어머니가 없어. 어머니가 날 버렸다고 했어!” 

임새옥도 따라 눈물을 흘렸고, 소금남도 나을 것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돌아서서 감정을 추스르면서 동시에 주먹을 꾹 쥐었다. 

어느 경을 칠 것이 함부로 입을 놀린 걸까.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일까? 내가 전가아 혼자 그 어둡고 추운 곳에 두었기 때문인 걸까? 

“전가아, 어머니가 너처럼 착한 애를 왜 버리겠어?” 

임새옥은 전가아를 무릎에 안아 올리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네 어머니는 말이야. 하늘의 신선이야. 일이 있어서 하늘로 돌아가셨어. 분명 다시 돌아올 거야. 넌 어머니가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는 줄곧 널 보고 있는데? 우리 전가아가 이렇게 착한데, 어머니가 어떻게 널 버려. 못 버려.” 

한참 울던 전가의 울음소리가 차츰 줄어들었다. 

그런가? 

아이는 고개를 들고 반신반의하듯 물었다. 

“어머니가 신선이야? 신선은 어디 살아?” 

임새옥이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대답했다. 

“하늘에 살지. 높고 높은 하늘에. 고개를 들면 보여.”

전가아가 바로 무릎에서 튀어 내려오더니 밖으로 달려가서 비 오는 바깥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임새옥과 소금남도 따라 나갔다. 아이는 벌써 비에 얼굴이 다 젖어 있었다. 임새옥은 눈물을 참으며 아이를 처마 밑으로 안아와서 소매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전가아, 너무 멀어서 안 보여. 지금 너무 어려서 못 봐. 크면 볼 수 있어. 하지만 어머니는 언제든 널 볼 수 있거든. 그러니까 착하게 굴어야 해. 말하는 거 잘 배우고, 스스로 걷고, 스스로 밥 먹고. 무럭무럭 자라야지. 튼튼하고 훌륭하게 자라야 해.” 

“정말?”

그렇게 묻던 전가아는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꽉 쥔 주먹을 풀었다. 눈이 붉어진 소금남이 더는 지켜보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전가아가 묻는 말이 들렸다.

“우리 어머니 돌아와?”

“응. 반드시 돌아오셔. 다만, 모습이 변해서 돌아오실 거야. 하지만 우리 전가아한테는 변함없이 아주, 아주, 아주 잘해 주실 거야. 전가아, 그때 어머니를 몰라보면 안 돼.”

임새옥은 잠든 전가아를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소금남은 잔뜩 미안한 얼굴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놀러 데리고 가는 중이었는데, 그게, 마침 지나가다가 한번 와보았습니다. 폐를 끼쳤군요. 고맙습니다.” 

임새옥은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며 휘장을 내려놓고는 차를 내올 테니 앉으라고 말했다. 

“이런 일은 아이한테 감추지 못해요. 감추느니 일찍 말해주는 게 나아요. 아이는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이랑 같아요. 너무 조심스럽게 보호하기만 해선 안 돼요. 힘이 부족해서 잘 못 자라요.”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소금남은 겸연쩍은 듯 헛기침했다. 그러고는 말을 잇지 않고 차를 마시며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어디에 갔느냐는 물음에 운대를 떠올린 임새옥이 미안한 듯 대답했다. 

“운대 이야기, 이제야 알게 됐어요. 기름을 짤 수 없게 되어서 손해 보셨죠?”

“아닙니다. 유 대인이 충분히 주셨습니다.”

소금남이 웃으며 대답하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수확이 나쁘지 않아서 관가께서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럼 됐네요.”

임새옥은 애써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잠시 침묵했다. 조용한 분위기에 어색해진 소금남은 머릿속으로 재빨리 할 말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다 장사 이야기라 이 여인이 관심을 가질 것 같지 않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배어났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입을 열었다. 

“대낭자, 경성에 있는 용가가 서신을 써서 경사를 알려주더군요. 조정에서 민생을 위해 천막 채소를 전국에 널리 알린다고 합니다. 저도 땅 몇 묘를 내놓을 생각이니, 잘 가르쳐 주시지요.”

임새옥이 눈살을 찌푸렸다.

“천막 채소요? 지금은 때가 아닌데요.” 

소금남은 뜻밖이라고 생각하며 얼떨떨하게 물었다. 

“그건 왜입니까? 천막 채소는 판로가 넓습니다. 지금 성안현과 경성에서만 성공하자, 각지에서 저마다 상주서를 올리고 있습니다. ……유 대인이 재배 방법을 지도하고, 황상에게도 그 뜻을 올렸고요. 황상께서도 허락하셨는데, 어째서 안 됩니까?”

“흠. 대관인은 모르시겠지만, 천막 채소는 새로운 것이니까 소규모로 심는 건 괜찮은데, 대규모로 널리 보급하려면 비닐……, 아, 그러니까 좋은 재료가 없으면 힘들어요. 땅을 보온하고 채광을 유지하지 못하면 수확에 영향을 주게 돼요. 게다가 지금 천막 채소로 얻는 이득이 크니까 심으려는 사람이 떼지어 몰리는 거고요. 그렇게 되면 생산량은 늘고 가격은 내려가죠. 게다가 그렇게 되면 병충해를 대대적으로 유발할 거예요.” 

거기까지 이야기한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을 좀 많이 봤어야 말이다. 가장 이르게는 목화의 교훈이 있고, 최근엔 그녀의 과수원이 그랬다. 그녀의 과수원이 거대한 이익을 본 후, 근처 이웃들이 모두 밭을 밀고 과일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상상한 돈을 벌지 못했을뿐더러, 대규모로 병충해를 초래했다. 너도나도 과일을 심으니 판매가 부진하고, 그녀의 과수원까지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다행히 진작 대비하여 여러 가지 재배 방식을 채택해서 손실을 겨우 만회했다. 

“시절을 거스르면 요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옛사람의 말을 들어야 해요.”

임새옥은 소금남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천하 창생들이 밥을 배불리 먹는 것도 힘들잖아요. 배를 채우지도 못하는데 채소, 과일 심을 땅이 어디 있어요. 날씨가 좋지 않아서 추위 피해를 겪으면 어떡해요. 병충해가 발생해서 수확이 없으면 어떡해요. 고서에서 말하길, 곡식을 심으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를 섞어 심어서 재해를 방비해야 한다고 했어요. 제 생각엔, 단기 효과와 수익을 내는 천막 채소를 보급하느니, 차라리 어전에서 재배에 성공한 벼를 대대적으로 보급하는 게 나아요.” 

소금남이 벌떡 일어나며 천천히 말했다. 

“대낭자, 역시 농신 낭자란 칭호를 들을 만합니다.” 

한참 이야기한 끝에 이런 칭찬을 들은 임새옥은 얼굴이 붉어졌다. 

“대관인까지 절 놀리시다니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농사라는 게 쉬워 보여도 위험한 일이거든요.”

이야기하다 보니 한숨이 나와서 생각이 저 멀리 경성으로 두둥실 향했다. 그 사람, 내가 아니었다면 보기엔 위풍당당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될 텐데.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돼요.” 

이야기하는 사이, 밖에 내리는 비가 서서히 그치고 처마에 매달린 물방울이 똑똑똑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침상 위에 전가가 웅얼거리며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자, 임새옥이 서둘러 다가갔다. 소금남은 방 안에 서서 아까 들은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천막 채소를 지금처럼 높은 가격으로 유지하는 것이 천하 만민에게 가장 좋은 일인 걸까? 사고를 바꿔보면, 임새옥의 말을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다음 날, 임새옥의 유람이 계속되는 동안, 소금남의 서신 한 통이 빠른 속도로 경성을 향해 날아갔다. 그 서신은 조정에서 폭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또 그 서신으로 인해 유소호도 관리 인생 처음으로 질의를 받게 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희녕 10년 5월, 경성은 이미 추위를 완전히 떨쳐버렸고, 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뜨거운 여름을 곧 맞이할 준비를 했다. 황제는 궁 안의 작은 헌당(軒堂)에 앉아 창가에 흐드러지게 핀 해당화를 바라보았다. 꽃에 이끌려 날아온 꿀벌이 맴돌고, 나비 두 마리도 꽃 사이를 오가며 춤추고 있었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은은한 꽃향기가 실려 왔다.

하지만 지금 황제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태어난 황자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서 많은 기쁨을 주었지만, 불행히도 조 태후가 지난달에 풍한에 걸렸다. 한 달 동안 약을 먹어도 좀처럼 낫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조 태후가 올해 예순하나, 병치레가 잦아질 나이였다. 

황제는 한숨을 쉬고 자세를 바꿨다. 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맞은 편에 있는 정자 누각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래도 교지(交阯) 남벌을 떠났던 곽규가 곧 승리를 거두고 돌아올 것이다. 악당 이건덕(李乾德)을 생포하진 못했지만, 황제로서 울분은 풀었으니 상을 내릴지 고려하라고 추밀원에 지시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또 순간 언짢아졌다. 어째서 내 이 황제 자리는 이토록 힘겨운 것인가. 

“중서성 오충(吳充), 왕규(王珪)를 들라 하라.”

황제는 서안 위에 상주서 하나를 흔들면서 곁에 있는 내시에게 명했다. 내시가 서둘러 밖으로 나가는 걸 보고 일단 그 상주서는 한쪽으로 밀어둔 다음 다른 상주서를 들어서 넘겼다. 이정의 상주서가 있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래도 참을성 있게 열어 보았다. 역시나였다. 

‘유문장이 업무를 장관한 이래, 해온 모든 일이 시기와 상리를 위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처를 내쫓고 첩을 들이는 등 집안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천막 농사를 짓겠다고 경성 내외의 둔전을 들쑤시니, 청묘법을 시행하는 데 있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신, 사악하고 간교한 자를 탄핵하는 직책에 있는 자로서 어찌 묵과하겠나이까. 실정을 조사하시어 어전사 유문장을 파직하시길 엎드려 청하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유소호가 처를 내쫓고 첩을 들인 일로 이러는 게 아닌가! 더 멀리 보면 이 젊은이가 한때 의기양양하게 사마 대인을 만난 일이 문제인 것이고! 

황제가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아니고 모를 리가 있을까. 몇 달 동안 유소호를 탄핵하는 상주서가 끊이지 않았다. 특히 이정은 뼈다귀를 물고 놓지 않는 늙은 개처럼 물고 늘어졌다. 황제는 다소 화가 나서 상주서를 집어 던졌다. 

어째서 남 잘못만 염두에 두는 것인가. 유소호가 하북 동로의 보리 재난을 힘겹게 구제한 것은 어째서 보지 못하는 것인가! 그건 몇만 백성의 목숨이 걸린 큰일 아닌가! 

“당쟁 싸움이지! 소인배 행실이지!” 

황제는 구시렁거리고는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심괄의 상주서를 떠올리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인사보다야 낫군!” 

승상 왕안석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변법을 지지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모두 이상해졌다. 다들 눈을 부릅뜨고 시시각각 조정의 동향을 지켜보는 듯했다. 하는 말마다 치우침 없는 공정한 말 같아도, 실제로는 흐름을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왕안석이 사직한 지 고작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왕안석이 지극히 중용했던 심괄마저 신법을 규탄하는 상주서를 올리지 않았는가.

황제가 다른 이들의 상주서를 뒤적이고 있는데, 재상 오충, 왕규가 내시를 따라 저 멀리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신, 폐하를 뵙습니다.” 

오충과 왕규가 동시에 절을 했다. 황제는 일어나라고 하고는 다른 말 없이 바로 심괄의 상주서를 건넸다. 

“이것 좀 보게. 어떻게들 생각하는가.”

오충과 왕규 모두 벼슬 생활을 오래 한 여우들인 만큼 황제의 불만스러운 말투를 금세 읽었다. 왕규는 먼저 읽으라는 듯 오충을 힐끔 봤다. 어찌 됐든 수보(首輔)인 오충은 속으로 꿍얼거렸다. 

‘능구렁이 같은 왕규 이놈, 정무를 논의할 일만 있으면 무조건 듣기만 하고 의견은 내지 않지. 설사 의견을 낸다고 해도 대세를 따를 뿐이라서 두들겨 맞을 일은 전혀 없지 않아!’

오충은 상주서를 들고 읽다가 놀라서 숨을 들이마셨다. 다 읽고는 왕규에게 건네는데 황제가 다시 물었다. 

“애경,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왕규는 당연히 또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오충은 왕안석의 사돈이지만, 신법을 지지하지는 않았다. 조정에 들어온 후 오히려 사마광 대인을 복귀시키라는 상주서를 줄곧 올렸다. 그러나 그런 오충 역시 심괄의 일 처리가 뜻밖이긴 했다.

“역법(役法: 병역법)은 이미 추진하고 있어서 갑자기 고치는 것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치는 부분이 많지 않지만, 과정이 복잡하고 다난하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말을 마친 오충은 왕규를 힐끔 보았다. 그러나 왕규는 그저 따라서 몇 마디 웅얼거릴 뿐이었다. 하나 마나 한 그 말에 황제는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서안을 바라봤다. 마침 상주서 하나를 넘기던 참이었다. 물 흐르듯이 수려한 글씨체에 크게 관심이 생겨서, 두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곧바로 펼쳐 보았다. 

‘……지금 폐하께서 백성을 위해 천막 재배를 널리 보급하는 것은 실로 만민의 복입니다. 다만 만물은 기(氣)의 영향을 받습니다. 기로 인하여 생명이 발생합니다. 

역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보아도 흉년이 있습니다. 7년 황충 재난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작금에 보리 재난이 생겼습니다. 백성들이 아직 배불리 먹지 못하였는데, 맛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천막 채소의 수확량이 풍부하다 하여 저마다 뒤따르고 있는데, 그러다 보면 우선 논밭이 황폐할 것이고, 또 하나 채소 생산량이 증가하여 가격이 내릴 것입니다. 또한 신이 듣기에 농사는 반드시 다섯 가지를 심어야 하고, 물건이 모이는 곳엔 벌레가 생긴다 합니다. 

신, 백성을 아끼는 폐하의 마음을 잘 압니다. 지금 유 대인이 논벼를 풍성하게 수확했으니, 간청하옵건데, 당분간 논벼 재배를 널리 퍼트려 굶주린 백성의 배를 채울 수 있게 하시고 그다음에 맛있는 천막 채소를 보급하소서…….’

“좋구나!”

단숨에 상주서를 읽어 내려간 황제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며 절묘하다 외쳤다. 이 상주서는 내용은 둘째치고, 글씨체만 보아도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보고 있으면 마음이 기쁘고 속이 후련한 느낌이었다. 원래 서예를 좋아하는 황제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글씨체를 따라 써 보고 있었다. 

고개를 늘어뜨리고 한참 동안 기다리던 오충과 왕규는 황제가 말이 없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마침 황제가 좋다고 외치니 얼떨떨할 뿐이었다. 오충은 아까 제가 너무 모호하게 이야기한 것이 아닌가 속으로 후회하는데, 왕규는 여전히 태도 변화가 없었다. 

오충이 슬쩍 보니 황제는 다른 상주서를 보고 있었다. 가까이 서 있던지라 한눈에 상주서의 필적을 확인했고, 곧바로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등사랑의 서예에서는 채양(蔡襄)의 풍모가 느껴지는군요.” 

채양의 글씨체는 가히 송나라 제일이라 꼽힌다. 오충의 말에 황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등사랑을 염두에 두면서 웃어 보였다. 

“보아하니 짐이 등사랑을 얕보았군. 왕안국 대인의 풍모가 있을 뿐만 아니라 채양의 풍모도 갖추었어. 재상이 될 인재로군.” 

그 말에 오충과 왕규 모두 얼떨떨해졌다. 

이게 어디 보통 칭찬인가!

오충은 조금 언짢아졌다. 기껏해야 글씨를 잘 쓰는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칭찬할 것이 있나. 

그래서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본말이 전도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랫사람은 너도나도 따라 합니다. 미치는 영향이 너무 큰 법입니다.”

황제는 화를 내지 않고 껄껄 웃으며 상주서를 건넸다. 

“얼마 전에 유 애경이 천막 재배를 보급하겠다고 하더군. 재상 대인,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천막 재배 보급 건은 유소호가 3월에 조정에 상소를 올린 이래 안팎으로 매우 시끄러운 주제였다. 경성에 부유하고 권세 있는 사람 중에 천막 채소의 가격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소식을 듣고 하나같이 땅을 차지하려 다투었고, 구파와 신파는 그 일을 도화선으로 서로 공격하며 싸우고 있었다. 특히 어사대는 등관과 이정을 선두로, 두 파로 나뉘어서 조당에서도 밖에서도 치열하게 다투어댔다. 심지어 경성 주루에서 구타 사건까지 일어나 개봉부에 상주서가 올라왔고, 거기에 휘말린 조정 대신도 한둘이 아니었다. 

오충은 이 일에 딱히 별생각이 없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동안 어느 편인지 드러내지 않았으며, 당파가 없던 등사랑까지 자신의 관점을 표명한 듯했다. 그 생각에 오충은 상주서를 받아들면서 입을 열었다. 

“신의 생각엔 이 일은 백성을 위한 일이고, 지금으로서는 부당한 점이 떠오르지 않아 숙고 중입니다.” 

오충이 상주서를 받자, 왕규도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고개를 내미는데 황제의 말이 들렸다. 

“일단 등사랑의 상주서를 읽어 보시오. 짐은 얻은 바가 많소!” 

상주서를 읽던 두 사람 모두 안색이 조금 변했다. 이용이 구구절절 천막 추진을 반박하고 있음을 두 사람 모두 알 수 있었다. 천막 추진을 반대하고 있으나 구구절절 민생을 살피는 내용이었다. 경전을 인용했지만, 통속적이라 이해하기 쉬웠다. 정리에 맞는 간곡한 내용이라 실로 좋은 글이라 칭할 만했다. 

대세의 기준을 깨달은 오충은 예를 갖추며 감격한 듯 입을 열었다. 

“폐하! 하늘이 폐하를 보우하심입니다!” 

그러자 왕규도 따라 절하며 말했다.

“신들의 식견이 좁은 것이야말로 본말전도였습니다!” 

요즘 내내 울적하던 마음이 싹 사라진 황제는 껄껄 웃으면서 상주서를 다시 한번 읽었다. 

“승상 대인, 내일 조회에서 낭독하시오. 등사랑을 제대로 포상하여야겠소!” 

줄곧 병색이 느껴지던 황제가 이날 조회에서는 유난히 기운 넘치는 것을 느낀 관리들은 조금씩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참으로 편치 않은 나날이었다. 

대신들은 조정일을 순서대로 논의했다. 황제는 우선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곽규를 어떻게 치하할지부터 물었다. 딱히 논쟁거리가 없을 이 일은 뜻밖에도 재상 오충과 추밀원 부사 왕소(王韶: 북송의 명장군)의 논쟁을 유발했다. 조정 대신 모두 오충이 왕소를 무시하는 걸 알고 있었다. 쌓인 게 많았던 왕소도 유감없이 퍼부으면서 곽규가 공은 없고 죄만 있다고 지적하는 바람에 오충이 난처해졌을 뿐만 아니라, 황제도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논쟁하던 두 사람이 케케묵은 희하(熙河) 일도 물고 늘어지자, 황제가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중서성, 추밀원, 모두 일단 곽규의 처분을 논의하고 다시 오게.”

일단 두 사람에게 물러날 여지를 준 셈이었다. 왕소가 언짢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데, 그때 보문각(寶文閣) 시제(侍制) 이승지(李承之)가 다급하게 나와서 말을 잘랐다. 연주(延州)의 재난 문제를 거론하며 감세를 다시 요청하자, 황제가 바로 허락했다. 그러고는 등사랑의 상주서를 다시 떠올리면서 ‘식량의 중요성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고 탄식하면서 등사랑의 상주서를 낭독하라고 내시를 불렀다. 

조당 맨 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서 있던 이용은 처음엔 황제가 무엇을 읽으라고 하는 건지 잘 듣지 못했다. 하지만 상주서의 내용을 몇 마디 알아듣고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내시가 날카롭고 높은 음성으로 내용을 낭독하자, 조당에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제각각 달라졌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안색이 안 좋은 것은 다름 아닌 보급 계획서를 들고 있는 유소호였다.

“짐은 그해 황충 재해가 연달아 발생하여 양강, 양절 지역에서 수확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 특히 기억난다. 아사한 백성이 열에 대여섯이고, 쌀값이 금은처럼 뛰었지. 지금 또 연주의 재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구나.”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내시가 건넨 상주서를 받아들고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등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이용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신, 여기 있습니다.” 

“등사랑 이용을 보문각 시제 겸 중서성 문하 검정제방공사(檢正諸房公事)로 발탁한다.”

황제가 웃으며 하는 말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몹시 놀랐다. 보문각 시제라면 상관없었다. 그 자리는 시종관이며 명예직, 한직으로, 오로지 문화 조예를 위해 기용한 사람을 위해 만든 자리였다. 이용이 글씨 재주가 뛰어나니, 어찌 됐든 그 자리엔 오를 자격은 있다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서성은 조정일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6품 관직이었다. 조정 대신 눈에 이용은 재학이 있고 예법에 구애되지 않고, 술과 시를 좋아하고, 곁에 여인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과연 이 젊은이가 그 관직에 오를 자격이 있을까? 

조당은 한순간 깊은 침묵에 빠졌다. 이용마저 넋이 나갔다. 

이, 이렇게 정6품 관리가 되었다고? 아버지가 평생 꿈도 꾸지 못했던 관직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놓지 못하고 꿈꾸던 관직을 이렇게 간단하게 손에 넣었다고? 

“이 대인, 어서 은혜에 감사하시게.” 

누군가 귀띔해주는 목소리에 이용은 허둥지둥 무릎을 꿇으며 누가 상기시켜준 건지 힐끔 바라봤다. 놀랍게도 어사중승 등관이었다. 

과연 소인배라는 명성에 걸맞게 주판을 빨리도 튕기는구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용은 마음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때, 천막 재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로 갈라졌던 각 당파도 이 틈을 타 논쟁을 시작했다. 당사자인 유소호와 이용은 그렇게 논쟁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아무런 말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문장, 저자의 말도 일리가 있네. 지금으로서는 논벼 농사가 가장 적당해.” 

등관은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유소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그러면서 어서 황상의 말대로 하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 논벼는 자네가 심은 것 아닌가. 다른 사람이 그 공을 주워가게 두면 안 되지.” 

조당에 서 있는 유소호는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내가 하는 게 싫은 거겠지! 내가 무엇을 하든지 싫은 것이야! 성은 하나로 이 자리에 오른 농관인 나를 얕잡아 보는 것이지!’ 

고개를 들다가, 심각한 얼굴로 천막 재배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이정을 보고는 순간 화가 화르륵 타올랐다. 분명 저 인간의 생각이다! 

“폐하, 논벼는 이미 풍부한 수확량을 얻었습니다. 모종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오늘 당장 각지에 배포할 수 있습니다.” 

유소호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논쟁중이던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고 시선을 그에게 돌렸다. 유소호가 허리를 숙인 채 상주서를 들고 있었다. 

“천막 재배는 이 일과 상충하지 않습니다. 신, 이미 내용을 정리해두었으니, 폐하, 살펴봐 주십시오.” 

황제는 유소호가 고집을 피우는 것이 뜻밖이라는 듯이 멈칫하다가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했다. 

“애경, 지금은 좋은 밭이 많지 않은데, 논벼를 심으면, 천막 채소는 어찌 심는단 말인가? 차라리…….”

등관은 등에 식은땀을 주르륵 흘리며 유소호를 살며시 끌어당겼다. 

황제가 이렇게까지 뜻을 드러내는데 이 녀석, 더는 고집을 피우지 말아야 할 텐데. 

“폐하, 가을 추수만 가능한 논벼와 달리 천막 재배는 사계절 내내 가능합니다. 폐하, 숙고하여 주십시오.” 

유소호는 넌지시 알려주는 등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한 듯이 손에 든 상주서를 다시 들어 올리며 허리를 굽혔다. 

언제나 유소호의 행동을 편드는 등관은 지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 대인을 비롯한 사농시 관리들이 나서서 이정의 말에 반박했다. 유 대인은 어전에 재산을 넣었으며, 운대를 수확해 국고를 채웠고, 다른 수입 하나 없이 농재해를 구제했는데 어째서 이익을 탐낸 것이냐고 반박했다. 

“흥, 유 대인의 처가 대명부에서 대대적으로 토지를 사들이고 보리밭을 밀어내고 있소. 그 바람에 백성들이 애원하며 고발하고 있거늘, 그것도 조정에 큰 이익이란 말이오?”

이정이 싸늘하게 웃으며 소매에서 상주서 몇 개를 꺼내 손에 들고 등관을 바라봤다. 

“어사 대인, 귀인은 건망증이 심하다더니, 이 상주서를 보지 못한 것이오?” 

“이정! 감히 조정 문서를 사적으로 열람해?”

등관은 화가 나서 안색이 변해 손가락질하더니,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고명한 판단을 내려 주십시오. 신이 이미 사람을 보내 조사한 바로는 대명부 지방 권세가들의 소행입니다. 유 대인에게 덮어씌운 것이지, 유 대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용상에 앉은 황제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골치가 아파서 이마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세.” 

그때, 줄곧 아무런 말 없이 서 있던 신진 정6품 관리 이용이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왔다. 

“폐하, 신이 생각하기엔 유 대인의 말대로 해도 된다고 봅니다.” 

그 말에 모두 놀라고 의아해했다. 

이 녀석도 갈대였나? 

유소호마저 처음으로 이용을 직시했다. 

“음? 말해 보게.”

황제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이용의 수려한 용모와 대범한 자태를 보아하니 시시비비가 많을 수밖에 없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폐하, 천막 재배는 실로 백성에게 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이익 문제가 있어, 재배하려는 사람이 벌떼처럼 몰려들 것입니다. 또한 그로 인해, 모두가 좋은 밭을 다툴 것이고, 백성들은 이익을 좇아 농사를 망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모든 지방, 모든 부, 모든 현에 같은 구역, 같은 면적을 정하여 재배하라고 성지를 내리시면, 백성들이 채소를 먹을 수도 있으면서 맹목적으로 재배하는 것을 방지하여 농사를 정상적으로 진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용이 줄줄이 하는 말에 황제는 순간 훌륭하다고 외치며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황제가 훌륭하다고까지 외쳤는데, 어느 눈치 없는 놈이 다른 의견을 낼까. 

유소호도 이미 대세가 정해졌음을 깨달았다. 황제가 그의 상주서를 받을 생각이 없는 걸 보고는 안색을 흐리며 상주서를 거두었다. 그리고 모든 대신과 함께 허리를 숙이고 “폐하, 고명하십니다.” 하고 맞장구쳤다. 

황제는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조정에서 제어하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이 대인, 제대로 상을 내려야겠군. 미인을 아낀다던데, 궁녀 몇 명 골라서 내리면 어떻겠나?” 

황제가 뜻밖에도 이용과 시시덕거리며 웃는 것을 본 대신들은 사생활의 허물도 사실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는 따라서 하하 웃으며 너도나도 절묘하다고 맞장구쳤다. 

이용이 웃으며 성은에 감사했다. 조회 시간이 길었던 걸 생각한 황제가 마무리 지으려는데 그때 이용이 다시 한번 앞으로 나섰다. 

“폐하, 주청 올릴 것이 있습니다.” 

걱정거리를 해결한 황제는 기운이 넘쳐서 말하라고 했다. 

“폐하, 이 공은 신의 것이 아닙니다. 신이 오늘 올린 상주서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폐하, 폐하께서 내리신 상을 그 사람에게 전하여 성은을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허하여 주십시오.” 

이용이 천천히 말했다. 모든 이의 예상을 벗어나는 말이었다. 

이용의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은 나설 수 없는 사람인 듯한데? 그러니 이렇게 영예로운 일을 남에게 넘겼지. 저자도 굳이 여기서 이야기할 필요 없고 돌아가서 사례하면 그만인데, 이용이란 자, 정말로 사심이 없는 건가?

이용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는 더 좋아졌다. 

정정당당한 군자 아닌가! 공을 독식하지 않고 진언하다니! 인재로다! 

황제가 일어서며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대인의 식객인가? 그렇다면, 학적은 있는가? 짐이 따로 상을 내려도 되네.” 

유소호는 마음이 답답해져서 저도 모르게 등관을 힐끔 바라봤다. 마침 등관도 그를 바라보며 눈짓하고 있었다. 눈치도 없이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그 개아들이 누구인지 알아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이용이 고개를 들고 자기 쪽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유소호가 얼떨떨해져서 의도를 알 수 없어 의아해하는데, 이용의 말이 이어졌다.

“관씨현에서 상주서를 올린 바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적시에 보리 재해를 발견했으며 구제 방법을 제안하여 농신 낭자라고 칭송받는 성안현 조씨입니다.” 

갑작스럽게 이용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 길디긴 말이 모든 이의 귀에 그대로 들어갔다. 하지만 황제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는 대신들은 얼떨떨해져서 한순간 그 사람이 누구인지 바로 깨닫지 못하고 그저 여인인 것만 알아들었다. 

동시에 유소호의 머릿속이 콰앙 울렸다. 순간 생각이 복잡해지고 귓가에 한 마디만 반복해서 울렸다. 

성안현 조씨! 

그녀인가? 그녀야? 그녀의 생각인 건가?

그리고 그때, 모든 이의 의문을 알아본 이용이 서둘러 설명을 이었다. 

“폐하, 조씨는 바로 유 대인의…… 전처입니다.” 

황제는 태어난 이래 가장 놀란 일이 많이 일어난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시선은 모든 조정 대신과 마찬가지로 유소호에게로 향했다. 순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조씨가 농사일에 정통하다고, 유소호가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했다는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딘가 찜찜했다. 

이 조씨가 그 조씨가 아니라면, 황제로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상을 내리면 그만이었다. 지금 조정은 부녀자라고 차별하지 않았다. 치평 연간 장락의 여인 전사랑이 목란피를 건설하여 조정의 치하를 받지 않았던가. 

다만 한때 부부였던 이 두 사람이 지금은 확연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전처에게 상을 내리면, 전 지아비의 뺨을 때리는 게 아닐까? 

“폐하, 조씨가 조정에서 천막 재배를 추진한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조씨가 당시 직접 농사를 지은지라, 그 이득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백성을 아끼는 폐하의 마음도 알고, 함부로 조정일을 논해서는 안 되는 것도 알지만, 민간에서 자라 대대로 농사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고, 또 흉년을 자주 겪어온 바, 백성의 배를 채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한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배법을 고안하여 고작 몇 묘 땅에 가치가 만금에 달하는 조숙(早熟) 연근 재배를 시작한 것입니다. 성안현 현령은 대대적으로 연근 재배를 추진하려 하였으나, 조씨가 농사는 논벼 위주로 진행하자고 현령을 설득했습니다. 연근지향이라는 명성보다 백성의 배를 불리는 농작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했습니다. 이 일은 성안현 현령 주문청의 상주서가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용이 느긋하게 말하면서 상주서 하나를 들어 올렸다. 

듣기에 매우 단순하고 기이할 것 하나 없는 내용인데, 어쩐지 다들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용이 유난히 또렷하게 강조하는 뜻이 있달까. 직접 농사를 지었다니? 재배법을 고안하였다니? 현령을 설득했다니?

이용의 설명에 따라, 유소호의 얼굴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다들 뚫어지게 유소호를 바라봐도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가장 가깝게 서 있는 등관만이 힐끔 보다가, 유소호의 소매 안 손이 덜덜 떨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황제는 이게 아끼는 신하의 체면을 깎는 일인지 아닌지 더는 고려할 겨를이 없이 내시를 불러 상주서를 가져오게 했다. 

역시나, 주문청의 상주서는 그 당시 조씨가 한 일을 소상하게 구구절절 기록하고 있었다. 조씨가 천막 재배를 함부로 보급해서는 안 되니 곡식의 중요함을 먼저 고려하라고 설득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성안현 주문청, 조씨 모두 충성스럽고 근면하구나. 상을 내려야 마땅하다. 각자 은자 이백 냥, 옷감 네 필을 하사하고, 주문청은 봉록 천 석을 추가하고, 조씨에겐 비단 열 필을 내린다.” 

잠시 생각한 황제는 내심 자신의 결정이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면 조씨에게 상을 내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소호의 체면도 그렇게까지 깎이지 않는다. 황제는 말을 마치고 무심결에 유소호를 바라봤다. 조정 대신들의 시선도 모두 유소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어찌나 바라보는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은 어린 신하는 더는 볼썽사나운 낯빛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들 물러가게.” 

황제는 유소호의 난감함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서둘러 지시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저도 모르게 조씨를 떠올렸다. 전에 한 번 본 적은 있으나, 음식 솜씨가 뛰어난 것 외에 농사일에 이토록 정통했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다른 이와 다른 점도 있었다. 조씨가 어떻게 생겼는지 떠올려봐도 생각나진 않지만, 다소 무례하게 감히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던 것이 기억났다.

황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 태후의 침궁에 들었다. 조 태후는 막 약을 먹고 정신이 맑은 편이었다. 발걸음도 가볍고 은근히 입가에 미소도 짓고 있는 황제를 보며, 조 태후가 웃으며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황제는 방 안에 가득한 약 냄새, 침상에 앉은 조모의 모습에 마음이 시렸다. 태후는 흰머리도 가득하고 너무 오래 누워있어서 피부도 갈수록 늘어졌다. 황제는 자리에 앉아 조 태후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마마, 오늘은 좀 괜찮으십니까? 궁 밖에서 좋은 의원을 찾고 있습니다. 금세 좋아지실 겁니다.”

“관가,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애가는 생사 문제는 이미 내려놓았습니다.” 

조 태후는 웃으며 말했지만, 황제는 마음이 아팠다. 황제의 마음을 아는 태후는 무슨 일로 기분이 좋으냐며 화제를 돌렸다. 황제가 순간 흥이 나서 마마, 하고 운을 떼다가, 그 당시 조 태후가 나서서 조씨를 내친 것이 떠올랐다. 순간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황제가 망설이는 걸 물론 알아본 조 태후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관가, 할미에게 말 못 할 것이 무엇입니까.” 

조 태후가 황제의 친할머니는 아니지만, 황제는 조 태후를 늘 극진히 존경했다. 조 태후가 속 좁은 아녀자가 아닌 데다가 백성을 간절히 아끼는 것을 잘 아는 황제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마마, 그 유가의…… 악처 조씨를 기억하십니까?” 

조 태후가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지요. 음식 솜씨가 훌륭하고, ‘모진 동풍 때문인가, 은애하던 정이 부족했던가.’ 하던 뛰어난 시를 쓴 여인 아닙니까.”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애가가 너무 조급했던 것이 아닌가 싶어서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내내 듭니다. 그래, 요즘 어찌 지낸답니까? 좋은 혼처를 찾아 재가하기는 어렵겠지요.” 

조 태후가 전혀 조씨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황제는 오늘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조 태후가 벌떡 일어나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보리 재해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천막 채소를 보급하면 안 된다고 직언한 사람이 바로 그 내쳐진 조씨라는 말을 들은 조 태후는 몹시 놀란 얼굴로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겨우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우리가 맨 처음에 먹었던 그 채소, 바로 그 여인이 집에서 심은 채소였지 않습니까. 분명 농사에 정통했겠지요.” 

그러면서 후회되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애가가 좋은 배필을 찢어놓은 것이군요! 관가, 애가가 체면 불고하고 나서서 두 사람을 다시 이어주면 어떻겠습니까?” 

“하하, 마마, 유 대인은 이미 처를 들였습니다. 조씨가 돌아오면 지금 처는 어쩌시려고요.”

조 태후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첩 하나 들이는 일로 그 난리가 났는데, 첩이 될 리는 없겠지요.” 

태후는 갈수록 걱정이 되어 이를 어쩌면 좋냐고 연신 물었다. 안 그래도 태후가 몸이 안 좋은데 근심을 보탤 수 없다는 생각에 황제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현지 관리에게 당부해 좋은 혼처를 찾아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때 마마께서 상을 하사하시면 체면을 충분히 세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쪽에서도 재가라는 이유로 홀대하지 못할 것이고요. 이리하면 어떻겠습니까?” 

조 태후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요. 다만, 반드시 정실이어야 합니다. 성정이 그러하니, 평범한 집안을 찾는 게 좋겠군요. 하아, 다 애가가 그때 관가의 어미가 둘째네 이야기를 하는 것만 듣고 마음이 급해져서 나선 탓입니다. 조씨의 인품을 잘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습니다그려.” 

태후는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도 “마마께 말씀드리지 말 걸 그랬습니다. 오히려 손자의 잘못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에 조 태후도 마음을 달래고는 그 아이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자기도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죽으라는 것으로 여길 겁니다! 조씨가 몸 둘 바를 모르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분부대로 이행했다. 가지런히 상자에 담긴 하사품들이 기세등등하게 황궁에서 줄지어 나갔다. 우선 이용의 저택에 가장 먼저 갔고, 이용은 일가 노소를 거느리고 무릎 꿇고 하사품을 받았다. 성지를 내린 태감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태감이 “이 대인의 글씨 값이 요즘 많이 올랐다고요.” 하고 웃으며 말하자, 이용은 바로 지필묵을 가져와서 좋은 일과 장수를 비는 축사를 써주었다. 태감이 몹시 기뻐하며 고맙다고 했다.

“대인, 성안현에도 가십니까?”

태감이 싱글벙글 자리에 앉은 다음, 이용이 차를 건네며 물었다.

“그렇지요. 성안 현령에게 내리는 성지, 그리고 조씨에게 내리는 성지를 가지고 내일 출발합니다.” 

본디 약삭빠른 태감은 이용이 더 묻기 전에 먼저 물었다. 

“대인, 제가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조씨는 지금 성안이 아니라, 제 고향 강녕에 있습니다.” 

이용이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모습에서 의도를 눈치챈 태감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이고, 그럼 이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대인, 제가 두 곳 다 다녀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겁니다. 수고스럽지만, 대인께서 다녀와 주실 수 있을는지요? 제가 돌아가서 대인이 도와주셨다고 관가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럼 감사하지요.” 

이용은 하하 웃으며 태감의 손을 토닥이면서 옥을 소매 안으로 굴려 넣었다. 태감은 웃기만 하고 다른 말 없이 조씨에게 내릴 하사품을 남겨 놓고 돌아가겠다고 인사했다. 이용이 또 분부하여 은자를 내오자, 태감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일단 사양했다. 

“가당치 않습니다. 대인, 이미 상을 주셨지 않습니까. 어찌 더 받겠습니까.”

“이건 조씨 대신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받으셔야 합니다. 아니면 대신 다녀오지 않겠습니다.” 

이용이 짐짓 불만인 듯이 하는 말에 태감이 껄껄 웃으며 은자를 받고 재차 감사 인사를 하며 흡족하게 돌아갔다. 

이용은 황궁 사람을 배웅한 후, 우선 모친을 전청에 모시고 오랫동안 혼자 지낸 형수도 자리에 앉힌 다음 자리에 앉았다. 동연낭은 시첩들을 거느리고 와서 축하 인사를 올렸고, 뒤이어 대관사, 관사 어멈들, 마지막에 집안 노복들이 와서 인사를 올렸다. 일제히 마당에 무릎 꿇은 모습을 보며 이용의 모친은 좋아서 울다가 웃으며 이용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이고 아들아, 네 부친도 지하에서 편히 눈을 감으시겠구나. 우리 이랑에게 앞날이 없다고 떠들어대던 것들, 망신스럽겠구나.” 

이용의 형수가 어리벙벙해 보이는 열 살 남짓한 아들을 데리고 느릿느릿 다가와 살며시 예를 갖췄다. 

“숙부께서 우리 가문을 빛냈네요. 큰 조카도 잘 부탁드려요.” 

그러고는 이용을 힐끔 보는데, 시어머니가 곁에서 하는 말이 들렸다. 

“아가, 번번이 이야기하지 않니, 아직 젊은데, 뭐 하러 수절하겠다는 것이냐. 우리 가문은 케케묵은 집안이 아니다. 네가 재가하겠다면 딸처럼 보내 주마.” 

형수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며느리가 혼자라면 어머니 말씀대로 했을 거예요. 하지만 관가아가 있잖아요.” 

그러면서 곁에 있는 아이를 잡아당기고는, 한쪽에서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이용을 다시 한 번 힐끔 보았다. 

“평생 기댈 곳도 있고, 어머니도 잘해주시고, 동서들도 절 윗사람 대우해주잖아요. 전 아무 데도 안 가요. 어머니, 며느리가 싫으신 건 아니죠?” 

며느리가 손을 잡으며 하는 말에 이 노부인이 웃으며 눈물을 닦았다.

“내 아가, 그렇게 생각해 주다니, 고맙구나.”

줄곧 미소를 지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연낭의 귓가에 뒤에서 시첩 하나가 은근히 비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동서 같은 소리는. 자매겠지.” 

그 말에 동연낭이 황급하게 돌아보고는 노려봤다. 그렇게 한참 이야기 나누다가, 이 노부인이 큰 며느리와 장손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방 안에 남은 시첩들은 훨씬 홀가분해진 모습으로 모여 앉아 황가에서 내린 하사품을 에워싸고 손가락질해가며 살펴보았다. 

“관인, 내일 가시려고요?” 

동연낭이 묻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이용은 시첩 하나가 비단을 만지려는 걸 보고는 곧바로 고함쳤다. 

“더러운 손 치워라!” 

이용이 곁에 있는 찻잔을 들어 집어던지자, 물을 뒤집어쓴 그 시첩은 겁에 질려 무릎을 꿇은 채 달달 떨었다. 다른 시첩들도 놀라서 황가 하사품과 멀리 떨어진 문 쪽으로 몸을 피했다. 

동연낭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듯이 말을 이었다. 

“그럼 의복 준비할게요.” 

그런데 돌아서기도 전에 이용이 그녀의 허리를 두르며 잡아당기자, 방 안 가득한 시첩들의 얼굴에 부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이랑.” 

동연낭은 얼굴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월낭이 시첩들을 죄다 내쫓는 걸 보고 부끄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이용에게 안긴 채 병풍 뒤로 들어가 치마가 들춰지고 속곳이 벗겨진 채 탑상 위에 눕혀졌다. 전율이 이는 쾌감과 함께 이용이 헐떡이며 속삭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앞으로 당신도 수절할 것 없이, 형수처럼 하시오. 거리낌 없이 사내를 만나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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