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57)

세월이 빠르게 흘러, 어느덧 2월이 지나고 만물이 살아나는 3월이 되었다. 십방촌의 강이 풀리면서 강물이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밭으로 나가 흙을 갈고 물을 끌어들였다. 

조삼랑은 괭이를 메고 밖으로 나갔고, 노씨는 조삼저를 안고 따라 나가면서 장작거리를 주워오라고 당부하고는 툴툴거렸다.

“매일 밖으로만 돌아다니기나 하고. 제 입 하나 준다마는, 제 어미와 아비가 배곯는 건 생각도 안 하지.”

그러다가 지나가던 여인들이 집을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는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어서 옆에 있던 몽둥이를 들어 올려 문을 쾅쾅 두들기며 욕을 퍼부었다. 

“함부로 입 놀리는 인간을 싹 다 두들겨 패줄 거다! 배은망덕하게 사람을 짓밟고 위에 아첨하는 것들도 다 때려 줄 테다!” 

여인들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재빨리 지나쳤다. 

신나게 욕설을 퍼부은 노씨가 사람들의 뒤통수에 침을 퉤 뱉고는 조삼저를 안고 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나귀차가 느릿느릿 다가오는 게 보였다. 조육아가 경성 유가에 봄 수확물을 보내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노씨는 마음이 더 답답해져서 몽둥이로 대문을 몇 번 더 내리치고는 들어가려고 돌아섰다. 그런데 나귀차에서 누군가 뛰어내리더니 그녀를 향해 달려오며 소리쳤다. 

“대낭, 대낭, 부인은요?” 

노씨가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봤다. 머리를 두 갈래로 올리고 파란색 겹옷에 붉은 꽃바지를 입은 동글동글한 아이가 공처럼 굴러왔다. 

영아잖아? 

“네가 어쩐 일이냐? 설마 유가에서 후회하고 우리 저아를 데리러 온 거냐?”

어느새 코앞까지 달려온 영아는 손에 보따리를 들고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웃고 있었다. 

“대낭, 부인은요? 부인은요?” 

“네가 왜 왔어? 너희 노부인이 시키더냐? 우리 저아를 데리고 오래?”

노씨가 안으로 잡아당기며 묻는 말에 영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새 부인이 들어왔어요. 새로운 하인도 잔뜩 들였고요. 그래서 전 부인에게 가겠다고 노부인에게 말씀드렸죠. 노부인이 보내주셨어요. 대낭, 우리 부인은요? 보고 싶어 죽겠어요.”

노씨는 새 부인이라는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한참 멍하니 있다가 몽둥이를 바닥에 내던지며 ‘천벌 받을 것들’이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영아는 겁에 질려 멀찍이 떨어져서 뭐라고 말도 못 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노씨는 가슴속 가득한 화를 풀 곳이 없어서 영아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넌 우리 노비도 아닌데 왜 우리 집에 온 것이냐? 너희 집 그 늙은 것이 식량이라도 보냈냐? 늙은 것과 망할 어린 것이, 우리 저아의 재산을 뺏은 것도 모자라 여기로 사람을 보내? 무슨 단꿈을 꾸는 거냐. 썩 꺼져라! 온 곳으로 꺼지란 말이다! 우리 집은 널 못 먹여 살린다!” 

영아가 놀라서 무릎을 꿇고 엉엉 울며 노씨의 바짓자락을 잡았다. 

“대낭, 공밥 안 먹을게요. 저 뭐든 잘해요. 대낭, 쫓아내지 마세요. 새 부인이 절 별로라고 생각해요. 노부인도 절 안 좋아하고요. 새로 온 애들은 절 괴롭히기만 해요. 거기서 못 살아요. 대낭, 쫓아내지 마세요. 저 뭐든 잘해요. 하루에 한 끼만 주시면 돼요!”

“새 부인을 들였어?”

마당이 한창 떠들썩한 사이, 임새옥이 문 앞에서 얼떨떨하게 물었다.

목소리를 알아들은 영아가 뒤를 돌아봤더니, 낡은 옷을 입은 임새옥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영아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울며 절을 했다. 

“부인, 부인, 절 받아주세요. 쫓아내지 마세요.” 

임새옥이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일으켜서 흙을 털어주었다.

“울지 마. 안 쫓아내.”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물었다.

“너희 관인, 언제…… 새 부인을 들였니?” 

영아는 받아준다는 말에 좋아서 활짝 웃더니 눈물을 대충 닦고는 코를 훌쩍였다. 

“2월 열닷새예요. 지금 한창 화원 정리 중이에요.”

웃고 싶은데 입꼬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임새옥은 당황해서는 영아의 말만 되뇌었다.

“2월 열닷새구나. 좋은, 좋은 날이네.” 

곁에서 지켜보던 노씨가 차갑게 비웃었다. 

“이제 너도 마음을 접을 수 있겠구나. 매일 몰래 나가서 사람 눈을 피해 울 것도 없겠다. 착실하게 집에 있어라. 좋은 집을 찾아 혼인시킬 거다.” 

임새옥이 싱긋 웃고는 영아를 잡아당겼다. 

“집에 방도 없으니까 나랑 같이 쓰자. 가서 물건 놓고 나와. 여긴 그 집과 달라서 힘들 거다.”

영아는 뛸 듯이 좋아하며 힘들지 않다고 외쳤다. 

“애초에 이러고 살았잖아요. 경성에서 보내는 것보다 편해요. 집이 우울한 것이 얼마나 답답했는데요.”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비틀거리면서 서둘러 담벼락을 짚었다. 그녀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조삼랑이 괭이를 메고 나타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어떤 놈이 우리 밭 새싹을 죄다 뽑은 거야.” 

노씨와 임새옥 모두 넋이 나갔다. 노씨가 먼저 반응하고는 조삼저를 바닥에 내려놓고 외쳤다. 

“당연히 천벌 받을 조 지보겠지! 죽었어.” 

노씨는 바위 위에 놓아둔 부엌칼을 들고 뛰쳐나갔다.

노씨가 미쳐 날뛰는 걸 본 조삼랑이 서둘러 뒤쫓아 갔다. 임새옥은 영아에게 조삼저를 봐달라고 당부하고 치맛자락을 쥐고 따라갔다. 

막 고향에 돌아왔을 때와 비교하면 요즘 확실히 지내기가 힘들어졌다.

고대엔 소식이 느려서, 처음엔 다들 임새옥이 쫓겨난 것만 알았다. 유가 사람들이 부귀해져서 촌부를 타박한 것으로만 짐작하고 다들 조가를 동정했었다. 물론, 남이 잘못된 것을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 지보와 친지들이 그랬다. 그러나 싸늘하게 비웃긴 했어도 심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시간이 서서히 흐르고, 조씨가 내쫓긴 진상이 경성에서 흘러들어오자 온 마을이 소란스러워졌다. 

유가 사람들이 눈이 높아져서 배은망덕하게 조 대저를 내쫓은 게 아니라 순전히 자기 행실 때문이었구나! 시어미를 모욕하고 지아비를 학대해서 황태후가 직접 교지를 내려 내쫓겼단다! 

그 후로 그나마 평온했던 조가의 나날은 끝이 났다. 밖에서 마주칠 때 사람들은 동정의 눈빛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혐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황태후란, 이런 무지한 촌사람 눈엔 신 같은 존재였다. 조가 대저가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그 어른 눈 밖에 난 걸까. 그들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임새옥은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곧바로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불안했던 그녀는 더더욱 불안하고 당황했다. 다행히 수시로 다른 마을 농부들이 기술을 배우러 왔고, 그걸 핑계로 매일 집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엔 도움을 청하러 오는 사람이 없어도 알아서 나가서 밭을 돌아다니거나, 강가에 멍하니 앉아 있곤 했다.

노씨는 그런 상황에 화가 나서 펄쩍 뛰고 발을 굴렀다.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조 지보 입에서 나온 소식임을 조씨 일가는 잘 알고 있었다. 조 지보는 그들을 뼛속까지 원망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에서 소식을 들은 건지 몰라도 경성에서 일어난 일을 퍼트린 바람에 조씨 일가는 가까이하면 안 되는 역병 취급을 받게 되었으니 노씨가 가서 따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때 임새옥이 말렸다.

“어머니, 다 사실이고 억울한 말은 없는데, 가서 뭘 어쩌려고요. 괜한 망신을 자초하는 거예요.”

따질 만한 이유가 없는 걸 잘 아는 노씨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노씨가 이러니 마을 사람들은 더더욱 소문을 믿게 되었다. 조 지보도 수시로 ‘조가 대저는 황가의 눈 밖에 난 사람’이라고 툴툴댔다. 마을에 그냥 두면 관가에 반항하는 것이라는 둥 하는 말에, 겨우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겁에 질렸고, 뒤이어 조가 대저를 쫓아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처음엔 그저 몰래 집 앞에 오물을 뿌리던 수준에서 지금은 밭을 망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 또 참던 노씨가 드디어 폭발했다. 

“내가 죽어도 네놈을 데리고 갈 거다!” 

노씨가 조 지보의 대문 앞에 서서 굳게 닫힌 대문을 칼로 내리쳤다.

“이런 양심 없는 놈들. 우리 저아 덕분이 아니었다면, 지금 배불리 먹고 살 수는 있고?”

조삼랑과 임새옥은 허둥대며 다가가 울며 욕하는 노씨를 잡아끌었다. 노씨가 두 사람을 뿌리치고 조 지보의 대문을 부숴 버릴 듯 욕을 퍼붓고 있는데, 조 지보가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두 부부는 각각 몽둥이와 멜대를 들고 있었고, 새로 들인 덩치가 산만 한 사위가 단번에 노씨를 들이받았다.

“헛소리만 지껄이는 망할 년! 호랑말코 같은 년! 개돼지 같은 년! 이러니 소박맞는 딸을 키웠지. 이미 관가 눈 밖에 난 죄인이, 내 집 앞에 와서 소란을 떨어? 족장이 안중에도 없는 거냐! 혈연을 생각해서 봐줬는데,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마을 전체에 화가 닥치기 전에 사당을 열어 너희를 족보에서 없애야겠다. 그땐 살인을 하든 불을 지르든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우리 조씨 일가와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까!”

조 지보가 싸늘한 얼굴로 들고 있던 멜대로 바닥을 쿵쿵 찧고는 주위에서 구경하던 젊은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가서 어르신들을 모셔와라. 오늘 사당을 열어야겠다!” 

사람들은 당황하고 또 두려웠다. 조가가 마음 쓰이는 몇몇 사람은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괜히 불똥이 튈까 두려워서 뒤에서 한숨만 내쉬었다. 조삼랑은 털썩 무릎을 꿇고 조 지보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숙부님, 숙모님하고 불러댔다. 잠시 넋이 나갔던 노씨는 펄쩍 뛰면서 부엌칼을 치켜들고 조 지보를 향해 내리쳤다. 사당을 열러 가던 조 지보 역시 노씨가 이토록 간 큰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아슬아슬하게 겨우 피했는데 얼굴이 긁혀서 곧바로 피가 흘렀다. 조 지보 처는 보자마자 돼지 멱 따는 소리로 고함쳤고, 조 지보의 사위가 노씨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난리가 났구나, 난리 났어. 묶어다 관아에 넘겨라.” 

조 지보는 얼굴을 부여잡고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고함쳤다. 조삼랑이 우는 소리, 노씨가 욕하는 소리, 조 지보의 화난 고함,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 사내들이 부르는 소리, 임새옥은 고막이 징징 울리고 눈앞의 광경이 흐릿해졌다. 모든 것이 전생에서 본 영화관 스크린의 장면인 것마냥,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여러분, 이웃 여러분!”

임새옥이 천천히 하는 말을 아무도 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밀고 당기고, 한데 엉겨 난리가 났다. 임새옥은 귀를 막고 안간힘을 쓰며 본인도 놀랄 만한 비명을 내질렀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일제히 그쪽을 바라봤다. 울며 욕하던 노씨도 입을 다물었다. 임새옥은 그제야 손을 내려놓고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이고는 조 지보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봉황은 귀한 곳이 아니면 내려앉지 않는다고 하지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당신 주인의 뜻도 알았고요. 바로 떠날게요. 다들 안심할 수 있게, 내가 떠날게요. 하지만 이 일로 다시는 우리 부모님을 핍박하지 말아요.” 

그러고는 마르고 긴 손가락을 들어 조 지보를 향해 총 쏘는 시늉을 했다. 

“내가 지금 털 빠진 봉황이라고 닭보다 못한 줄 알죠? 당신 하나 어쩌지 못할 것 같아요? 속담에, 맨발인 사람은 신발 신은 사람이 무섭지 않다고 하죠. 나 조화, 이 꼴이 되었는데, 명성이 무서울 것 같아요? 다만 조 지보 당신은 잘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줄줄 이어진 말에 사람들은 얼떨떨해졌다. 속을 읽힌 조 지보는 순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위세를 보이려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임새옥이 어느새 돌아서서 가버렸다. 노씨와 조삼랑은 일어나서 울며 따라갔고, 일가가 곧 사람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뭘 보는가! 돌아들 가게!” 

그 여인의 쓸쓸한 뒷모습에 까닭 없이 소름이 끼친 조 지보는 돌아서서 주변 사람들을 향해 호통쳤다. 그러고는 훈계도 잊지 않고 덧붙였다. 

“다들 눈치 챙기게. 관가 눈 밖에 났다가는 자네들도 화를 입을 걸세.”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 지보는 물건들을 챙겨서 아내와 사위를 거느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3월엔 버들가지 살랑이는 바람이 춥지 않다.’는 말대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뼈를 에이고 살을 파고들던 바람이 청명을 앞두고는 금세 따듯해졌다. 마을 바깥쪽 큰 버드나무엔 벌써 파릇파릇한 새싹이 자랐고, 아이들은 나무로 기어 올라가 싹을 따 먹었다. 곁에 있는 커다란 백양나무도 새싹이 나와 바람에 흩날렸다. 

“금단, 주워서 닭장에 넣어둬. 닭이 먹으면 달걀 많이 낳을 거야.” 

임새옥은 바닥에 잔뜩 떨어진 새싹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이어서 당부했다. 

“버드나무 싹 가지고 애들하고 싸우지 말고. 써서 맛없어. 나중에 느릅나무에서 열매 떨어지면 그때 먹어.”

손가락을 깨물고 침을 흘리던 금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은 금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영아에게 건량 준비했는지 물었다. 영아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챙겼어요. 반찬도 여러 개 만들어서 챙겼는걸요.”

임새옥은 울어서 눈이 벌게진 노씨와 조삼랑을 바라봤다. 

“내가 원해서 가는 거잖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러고는 금단을 안아 올려 당부했다. 

“강가에서 놀면 안 돼. 애들이랑 싸워도 안 돼. 남의 것을 훔쳐 먹어도 안 돼. 참새 잡으면 안 돼. 놀면서 밭을 망치는 것도 안 돼…….”

금단이 얼굴을 찌푸리며 내려오려고 버둥거렸다. 

“누이, 맛있는 거, 재미있는 거 가지고 돌아와야 해.”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조삼랑과 노씨에게 다시 당부했다.

“사람들 탓하지 말아요. 속셈도 없고, 그냥 배곯지 않고 잘 살고 싶은 것뿐이잖아요. 나빠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우리 집에 나쁜 짓도 한 거 없고요. 어머니, 먼 친척 눈 밖에 날망정 가까운 이웃 눈 밖에 나는 건 아니랬어요. 나중에 외할머니 보내드릴 때,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노씨가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여인네가 어찌 행각승처럼 돌아다니려고.”

목 놓아 우는 노씨의 모습에 임새옥이 웃으며 위로했다. 

“진작 나가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어머니, 아버지, 걱정하지 말아요. 소가 점포 사람한테 물어봤더니 마침 남쪽으로 가는 행렬이 있어서 데리고 가 줄 수 있대요. 그러니까 무서워할 것 없어요. 건량 챙겨서 갈 거고, 올 때도 같이 돌아오면 돼요. 소가 점포에 정기적으로 서신 보내놓을게요. 아버지, 시간 날 때마다 가보세요. 괜히 걱정하지 말고요.”

노씨가 ‘옷을 허름하게 입어라’, ‘남을 뚫어지게 바라보지 말아라’, ‘사내들과 이야기하지 말아라’ 등등 다시 한 번 당부했다. 시간이 어느덧 많이 흘러서 임새옥은 영아를 데리고 인사를 건넨 후 나란히 걸었다. 저 멀리 가서 뒤를 돌아보니, 일가 네 사람이 아직 마을 입구에 서서 목을 빼고 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계속 걸어갔다. 영아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었다. 

“이야기 들은 적 있는데, 따뜻한 3월엔 양주로 가는 거래요. 대저아, 우리 양주로 가나요?”

유소호가 혼인한 걸 알게 된 후로, 임새옥은 말끝마다 부인이라고 부르는 영아에게 그렇게 부르지 못하게 하고 대저아라고 부르게 했다.

“지금은 거기까지 혼자 갈 능력이 없고 남을 따라가야 해서 안 돼.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때 양주에 가자.” 

본래 양주가 어디인지 모르는 영아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대저아, 이번에 얼마나 떠나있을 거예요? 사람을 개처럼 보듯이 깔보는 조 지보를 피하려고 떠나는 건 아니죠?”

임새옥이 고개를 갸웃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진짜 아니야. 진작 나가보고 싶었어. 우리 일하는 사람은 원래 책만 보는 건 안 되고 많이 나가서 많이 돌아봐야 해. 나이 든 농부에게 배워야 진짜를 배우는 거야.” 

영아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우리 일 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었고 임새옥은 자기가 실수한 걸 깨닫고 실소하며 말을 돌렸다. 

그러고는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도통 마음이 놓이지 않아 주저하다가 물었다. 

“영아, 이랑이 화원을 정돈하면서, 혹시 다 지은 밭이랑 그 온…… 그 집을 부쉈니?” 

영아가 불퉁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버들가지를 꺾어서 돌리며 대답했다. 

“맞아요. 새 부인이 꽃을 심고 나무를 심는다고요. 정자도 짓는다던데요? 노야는 상관하지도 않고, 알아서 사람 데리고 고치던걸요.” 

임새옥은 경성 방향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이랑, 청명이야. 운대에 물 주는 거 잊지 마. 채소로 다 팔아치우지 말고. 기름 짜서 팔아야 소 관인에게 새싹 값을 갚을 수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음이 무거워져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우울한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성에 도착해 보니, 소가 점포는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교 장궤가 그녀를 발견하고 서둘러 맞이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교 장궤.”

“대낭자, 그런 말씀 마세요.”

임새옥이 영아를 인사시키며 예를 갖추게 했다. 교흥아도 재빨리 답례하고는 간단하게 여정을 설명해주었다. 

“육로로 박평군(博平郡)까지 가서 뱃길로 갈 겁니다. 어디로 갈 건지 이야기만 하세요. 어디든 배웅하겠습니다.”

임새옥은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거기가 어디인지 모르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종착지는 강녕이니, 어디로 가든 헤어지지만 않으면 그만이었다. 

교홍아는 상단 관사 몇 명을 소개시켰다. 조 낭자라고 듣자마자 사람들은 공수하며 이 관사에게 자주 들어 알고 있다고 말했다. 교흥아는 안심하면서 일행이 동쪽으로 길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청명이 지나자 날씨가 조금 더 따듯해졌다. 축축한 기운이 느껴지는 공기가 막 소생한 만물에 영양을 공급했다. 소씨 가문의 깃발을 펄럭이는 긴 행렬이 어느 고개 아래 도착했을 때, 짙은 꽃향기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임새옥은 휘장을 젖히고 향기를 맡다가 마차 안에서 쿨쿨 자는 영아를 돌아보며 깨웠다.

“여기에 분명 넓은 배밭이 있을 거야! 일어나서 꽃 구경해!” 

영아가 자느라 부은 눈을 비비며 밖으로 나와서 사방을 둘러봤다. 

민둥민둥한 산, 바닥에 이제 막 새싹이 돋은 풀만 보일 뿐, 꽃은 어디 있는데?

“소정가, 여기가 어디지?”

임새옥이 말을 타고 있는 관사 한 명에게 물었다. 이 관사는 올해 겨우 열여섯으로 이름이 소정가였다. 친척인 이 관사가 어릴 때부터 데리고 돌아다녀서 지금은 벌써 직접 일을 맡아서 했다. 

임새옥은 내내 싹싹하고 예의 바르게 굴면서 상단과 친해졌고, 조 대낭자의 이름을 이 관사로부터 여러 번 들은 적 있는 소정가는 유난히 친절했다. 그녀가 부르자 소정가가 말을 몰고 다가가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낭자, 이제 곧 대명부가 나올 겁니다. 여기는 관씨현이고요. 잘 보셨어요. 이곳은 배가 나는 곳입니다. 활짝 피었을 때지요. 이 산만 넘으면 보입니다.”

그 말에 임새옥은 몹시 흥분했다. 관씨현? 후세의 산동성 관현? 그렇다면 배 생산지가 맞지. 학교 다닐 때 여러 번 갔던 곳인데!

임새옥은 기운이 나서 손을 비비며 기대했다. 역시나, 고개를 넘자 아래 보이는 평원에 눈처럼 새하얀 배꽃이 나타났다. 고개 아래로 내려갔더니 사람들이 오가는 길 양쪽이 모두 배밭이었다. 향기롭고 보송보송한 꽃밭을 윙윙거리며 맴도는 꿀벌들에는 봄기운이 완연했다. 영아와 임새옥 모두 마차에서 뛰어내려 배나무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소정가는 안 그래도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섰던지라, 관사들과 상의해서 모두를 불러 길가의 다관에서 쉬고 가기로 했다. 그들은 차를 마시며 쉬고, 임새옥은 영아를 데리고 꽃구경했다. 

“이곳의 토질은, 전형적인 사양토와 경양토야. 과일 심기에 가장 적합한 토양이지. 여기서 자란 열매는 매우 달아.”

임새옥이 허리를 숙여 흙을 몇 움큼 쥐고서, 정신없이 배나무를 구경하는 영아에게 말했다. 하지만 영아가 그녀를 어찌 상대할까. 오는 내내 임새옥은 밭만 보면 내려서 구경하며 흙을 파보았다. 더럽지도 않은지 만지작거리고, 냄새를 맡고, 시네, 짜네, 보는 것마다 잎과 뿌리를 뽑아 보는 것도 모자라 돈을 주고 잔뜩 사서 종이에 둘둘 감아 가지고 오기까지 했다.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지만, 이제는 그것도 익숙해져서 또 못 알아들을 말을 한다고 생각하며 대충 대답하고는 저쪽으로 달려갔다.

임새옥은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하고는 흔들리는 마차를 타고 오느라 굳은 몸을 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밭 뒤엔 보리밭이 있길래 천천히 다가갔다. 이 시대의 보리는 후세의 것과 조금 달라서, 거의 개량하지 않은 종자로 잎이 좁고 가늘고 생산량도 많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북방에서 보리를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당나라 후기에 이르러서야 좁쌀을 대체해서 징수 대상이 되어서, 현재는 종자도 그렇고 기술도 그렇고, 초기 발전 상태였다. 

저 멀리 내다보니, 온 천지가 하얗고 푸르러서 유난히 상쾌하고 생기 가득했다. 역시 자연 그대로의 생태 환경이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에도 흔치 않은 일이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큰 몫을 하고 있었다.

임새옥은 숨을 크게 마시고 고개를 숙여 보리를 바라봤다. 그런데 보리잎 끝에 누렇게 뜬 반점이 눈에 들어왔다. 가뭄에 말라 죽은 잎과 같은 모양새에, 가슴이 철렁해서 서둘러 웅크리고 앉아서 보리 싹을 유심히 만져봤더니,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살짝 잡아당기면 쑥쑥 빠지는 것이 많았다. 

그녀는 옷이니 신발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도 않고 얼마 전에 막 물을 준 것이 분명한 밭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발이며 치마에 진흙이 묻었다. 다시 허리를 굽혀 보리를 쑥 뽑아내는데 저 멀리서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낭자! 거기서 뭐 하는 거요!”

고함과 함께 마흔쯤 되어 보이는 뚱뚱한 사내가 농기구를 든 소작농들과 함께 달려왔다. 

“다, 당신 뉘 댁 낭자요? 왜 내 보리를 망치는 거요?” 

사내가 그녀의 손에 들린 보리싹을 보고는 화가 나서 고함치자, 임새옥이 서둘러 예를 갖췄다. 

“어르신 땅인가요?” 

뚱뚱한 사내가 씩씩대며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내 땅이 아니면, 설마 그쪽 땅이겠소?”

사내가 그녀를 힐끔대며 살폈다. 스물은 안 넘어 보이는 여인이 원보빈으로 틀어 올린 새카만 머리카락엔 뾰쪽한 은비녀 하나만 꽂고 있었다. 미색 대금 웃옷, 보라색 비단 치마 차림의 여인은 흔히 보는 촌부와는 뭔가 좀 달랐다.

“그런데 몹시 낯선 얼굴인데?” 

임새옥은 상대가 비아냥거리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보리싹을 내밀었다. 

“어르신,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이 보리, 병들었어요.”

그 한마디에 사내는 멍해졌고, 뒤에 서 있는 소작인들은 더욱더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 눈치를 살피고는 반신반의하며 누렇게 뜬 보리만 바라봤다. 

“어르신, 보리가 가뭄이 진 것 같아서 서둘러 물을 준 거죠?” 

임새옥이 다시 묻자 사내가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다시 한번 그녀를 살펴보더니 의아해하며 물었다. 

“이보오, 낭자, 어디에서 왔소? 보리가 병든 걸 어찌 아오?” 

임새옥이 웃으며 대답하려는데, 영아가 뒤에서 불렀다. 소정가 일행도 출발하려고 다들 일어섰다. 기한에 맞춰야 하는 화물이 있어서 지체할 수 없는 걸 잘 아는 임새옥은 자세히 말할 새 없이 다시 보리싹을 뽑아 살펴봤다. 

“심각한 건 아니에요. 아직 늦지 않았어요. 어르신, 올해 보리를 조금 일찍 심지 않았어요?”

그 사내는 살짝 안색이 변했고, 소작농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놀란 듯이 어떻게 알았냐고 툭 내뱉었다. 두어 마디 만에 콕 집어내는 그녀는 경험이 풍부한 나이 든 농부와도 같았다. 아무래도 식견이 넓은 뚱뚱한 사내는 상대를 무시할 수 없음을 바로 인식하고는 정색하며 물었다. 

“이보오, 대낭자, 내 보리, 병충해에 걸린 거요?” 

사내의 저도 모르게 떨리는 그 목소리에 뒤에 서 있는 소작농들도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몇 년 전 겪은 황충(蝗蟲: 메뚜기) 피해가 아직 생생했다. 그때 그야말로 치명적인 재난을 겪었다. 

임새옥이 빙긋 웃었다. 생산력이 떨어지는 시대라 먹고사는 일은 하늘에 달린 때였다. 10년 중 9년은 기근이라는 말이 과장되긴 해도 농작물 생산의 어려움을 제대로 짚은 말이었다. 대대로 지혜가 쌓이면서 땅은 깊이 갈고 정성껏 가꾸는 방법으로 벌레 피해를 모면해왔다. 그것만 해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병충해와 열악한 토양, 따라주지 않는 날씨 등 종합적으로 초래한 농재해를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생산량 감소는 필연적이었다. 심하면 아예 수확이 없을 수도 있고.

모호하게 이야기했더니, 지주처럼 보이는 사내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았다. 물론 이해했다. 얄팍한 수확량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소작농들이 농재해를 당한 심경은 누구보다 더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가슴을 톡톡 치며 웃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다행. 마침 지나가다 보았네요. 다행히 증상도 막 나타났고, 또 다행히 마침 주인을 만났네요.”

영아가 뒤에서 또다시 재촉하는 걸 들은 임새옥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병충해는 아니고요. 뿌리가 썩는 근부병(根腐病)이에요. 상태를 보면 씨앗부터 병에 걸린 거 같아요.”

임새옥은 허리를 숙여 아까 뽑았던 싹을 들어 올려서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병은 위조병, 시들음병이라고 해요, 겨울 보리엔 흔하죠…….”

그렇게 말하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겐 흔한 증상이지만, 송나라엔 흔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생산량이 절반 정도 감소하거나 혹은 더 많이 감소할지도 몰라요.” 

그 말에 다들 안색이 변해서는, 뚱뚱한 사내는 쓰러질 듯한 모습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요? 다, 당신은 누구요?”

임새옥은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어서, 그저 서둘러 말했다. 

“기억하세요. 가축 분변에 싱싱한 풀, 솔 껍질, 나무껍질을 함께 넣어 말려서 밭에 뿌리세요. 물도 많이 뿌리고요. 꼭 물을 자주 뿌려야 해요. 시작할 때 한 번, 분변을 부을 때 또 한 번, 그러면 손실을 줄일 수 있어요. 수확량 3분의 2는 지킬 거예요. 보리 수확 끝나면 밭을 깊게 갈아서 그루를 싹 엎어내야 해요. 기억하세요. 그리고 바로 운대를 심어 흙을 거름지게 해주세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급하게 가다가 또 돌아보고 당부했다. 

“이런 증상이 없는지 다른 곳에도 물어보세요. 다른 집도 살펴보고요. 제가 보기엔 씨앗부터 병이 든 거예요. 분명 같은 종자를 썼을 테니, 피해도 같을 거예요.” 

임새옥은 그 말만 남기고 성큼성큼 달려가서 영아의 잔소리를 들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일행은 멍하니 밭에 남은 뚱뚱한 사내와 소작농을 뒤로하고 채찍을 휘두르며 사라졌다. 사람들이 사라진 후에야 다들 정신을 차렸다. 

“나리, 이게 진짜일까요?”

소작농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임새옥 일행은 어느새 고개를 넘어가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 건가.” 

“멍청한 놈! 어서 밭에 가서 정말 맞는 말인지 보고 와!” 

뚱뚱한 사내는 혼잣말하는 사내를 걷어차고는 다른 사람도 걷어차며 외쳤다. 

“어서 가서…… 가서…… 저 낭자가 말한 대로 해! 다 기억하지? 제대로 안 하면 껍질을 벗겨 버릴 테다!” 

소작농들은 겁에 질려 “기억했습니다, 기억했어요!” 하면서 허둥지둥 달려갔다. 소작농들이 알아서 흩어진 후에, 사내는 임새옥이 사라진 방향을 다시 돌아보며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혹시 농신(農神) 낭자가 강림해서 알려주고 간 건가.”

사실 참 공교로운 일이었다. 이 사내는 성이 황가요 이름이 주(周), 조상은 상인이었다. 대대로 장사를 해오다, 황주 대에 2, 30묘 좋은 땅과 저택 두 채를 남겼다. 황주는 간이 작은 사람이라 장사 소질이 없어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생활도 오히려 제법 괜찮아서 이 밭을 신줏단지처럼 모셨다. 덕분에 관씨성에 있는 저택에는 살지 않고 세를 내어주고 일가가 마을로 옮겨와서 살았다. 종일 밭에서 생활했고, 밭을 목숨처럼 아끼고 소작농들에게 매우 각박해서 황충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곧 봄이 오는데 보리가 누렇게 변해가길래, 올해 눈이 많이 내려 수분이 충분한데 어째서 땅이 가물었나 싶어서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소작농을 시켜 물을 준 것이다. 그런데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먹는다더니, 이렇게 우연히 임새옥을 만난 것이다. 

황주가 쩨쩨하긴 해도 우직한 성격이라, 임새옥이 한 말을 주변에 알렸다. 하나에서 열, 열에서 백으로 퍼진 이야기에 지주들이 모두 밭에 내려가 살폈다. 놀랍게도 정말로 그런 증상을 발견하고는 한순간 난리가 났고, 곧 현령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 현령 역시 정무에 힘쓰고 백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바로 황주를 불러 방도를 받아서 현 전체에 보급했다.

그렇게 열흘쯤 흐르고, 누렇게 뜨던 보리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황주 일가는 그 기쁨에 집에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올렸다. 반평생 살면서 처음으로 자기와 관련된 좋은 이야기를 들은 황주는 조상 덕에 좋은 일이 생긴 기분이었다.

관씨현의 현령 대인은 그런 걸 믿는 사람이 아닌지라, 그 낭자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보면서 이웃 현에도 같은 현상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북방의 겨울 보리 구역에 죄다 근부병이 발병해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한순간 관씨현을 오가는 인마가 줄을 지어 현령 대인이 다 응대할 수 없게 되자, 마음이 급해진 사람들은 아예 황주 밭으로 달려가서 몰래 흙을 훔쳤다. 농신 낭자의 신력을 빌려 자기 밭의 보리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식겁한 황주는 사람을 보내 밤낮없이 땅을 지켰다. 그러지 않았으면 그의 보리는 근부병으로 생산량이 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싹 걷어가서 없어질 뻔했다.

관씨현 현령은 본디 보충 관직 출신으로 사람이 성실했다. 십수 년 동안 현령을 해오면서 윗사람 앞에서 입을 여는 일이 손에 꼽힐 정도인데, 이번 일로 지부 대인이 몸소 방문하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게다가 직접 상주서를 써서 황제에게 올리라는 당부까지 받았다. 관씨현에서 농재해를 제때 발견한 상황을 보고하면서 그 김에 전국의 보리 생산 구역을 살펴보시길 건의드리라니, 얼마나 큰 논제이냔 말이다! 

관씨현 현령은 놀랍고 기쁘고 또 두려워서 몇 날 며칠 밤잠을 설쳤다. 지부 대인이 보내준 서리의 도움을 받아 인생 첫 상주서를 작성해서 덜덜 떨며 위로 올리고는 계속해서 잠을 설쳤다. 

관씨현 현령이 불면의 밤을 겪는 동안, 성안현 주문청도 잠을 설쳤다. 그러나 그는 기뻐서가 아니라, 초조해서였다.

사실 임새옥이 집을 떠난 지 사흘 후, 성안현에서도 누군가가 보리가 잘못됐음을 발견했다. 가뭄 증상인 줄 알았는데 연달아 물을 줘 봐도 해갈되지 않았고, 봄 새싹이 났어야 할 보리의 성장세가 갈수록 무력해졌다. 경험치가 많은 나이 든 농부는 이런 현상이 정상이 아님을 곧바로 주목했고, 입에서 입으로 소식이 전해지면서 보리를 심는 성안현 사람들은 모두 그 이상 증세를 발견하게 되었다. 

습관대로 달려가 임새옥을 찾았는데, 조 대저가 집에 없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보리의 성장세가 나날이 안 좋아지는 바로 이때, 관씨현 겨울 보리 집단 병재해 소식이 전해졌다. 관아에 있던 주문청도 비슷한 시기에 친절한 연락을 받게 되었다.

“농신 낭자라니! 농신 낭자라니!” 

주문청은 공문서를 구길 듯이 탁자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관씨현에서 돌아온 사람이 묘사하는, 그 자상하고 수수한 옷차림의 젊디젊은 농신 낭자가 십방촌의 조 낭자라는 걸 듣자마자 딱 알았다. 이제 관씨현의 명성은 성안현 천막 채소 때의 유명세를 훌쩍 넘어섰다. 아무래도 관씨현 일은 배를 채우는 식량 문제와 직결된 것이 말이다. 덕분에 저보다 품급이 낮던 그 현의 현령은 상경해서 황제를 뵐 기회를 누리게 되었다. 본디 그 영광은 주문청의 것이어야 마땅한 영광이란 말이다!

성안현은 북방의 다른 작은 성처럼 보리가 주요 농작물이었다. 하지만 지리 문제로 이미 열흘이 지난 후에야 겨우 소식을 들었고 처방대로 보리밭을 구제했지만, 조기에 진행한 관씨현보다 효과가 현저히 떨어졌다. 올해 보리 생산량 감소는 확정된 사실이었다. 

성안현 사람들이 가장 화가 난 건 보리 생산량 감소가 아니었다. 농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고, 풍년이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어서 들어온 한 가지 소식이 성안현 백성의 분노를 철저히 자극했다. 관아가 관여한 후로 농신 낭자의 신분이 금방 밝혀졌다. 아무래도 선명한 깃발을 든 소가 행렬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관씨현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해준 농신 낭자가 바로 그들 성안현에서 유명한 그 조 낭자였다. 즉, 원래대로라면 자신들이 이 재해에서 제일 먼저 벗어날 수 있었단 말이다!

쌓이고 쌓인 원망은 결국 화풀이할 근원을 찾아냈고, 오랫동안 울분을 참으며 지내던 노씨가 드디어 기를 펴게 되었다. 이날, 그녀는 다시 한번 조 지보 대문 앞에 섰다. 지난번과 다른 것은, 주변에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화가 잔뜩 난 지주들과 아전을 줄줄이 거느린 현령 대인도 있다는 점이었다. 

노씨는 조 지보가 자신들에게 한 갖가지 일을 호소했다. 슬픈 이야기가 나올 땐 눈물 콧물 다 흘렸다. 주 대인이 재빨리 피해서 망정이지, 옷에 다 튈 뻔했다. 

“조대산! 노씨의 말이 사실인가?” 

주문청은 끝도 없이 호소하는 노씨를 헛기침을 해서 멈추게 하고는 문 앞에 서 있는 조 지보를 어두운 얼굴을 바라봤다. 

조 지보 일가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대거 인원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조대산은 예전과 달라졌다. 예전엔 관아에 있는 먼 친척을 믿고 간 큰 척했던 것뿐이지만, 지금은 다르다. 제 뒷배는 경성에 있는 정6품 관리인데, 하찮은 현령인 주문청 지가 뭐라고! 

“대인, 이건 우리 조씨의 집안일입니다. 어째서 대인이 따져 물으십니까?”

조 지보가 떨떠름하게 묻고는 새로 만든 장삼을 툭툭 치며, 격앙한 표정으로 서 있는 지주들을 힐끔 봤다. 

“나리들, 어째서 하찮은 조씨 일가의 일까지 신경 쓰시는 겁니까? 유 대인이 십방촌 사람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이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나리들께서 농사일로 조급해하시니, 이 노인네도 기회를 보아 유 대인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가 되면 자연히 위기가 해소될 것인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오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주 대인과 각지에서 온 지주 나리들은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주문청이 손을 털며 싸늘하게 웃었다. 

“좋네. 한 현의 수장인 내가, 하찮은 자네 일족의 일을 상관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 그럼 물어보겠네, 친정으로 돌아온 조가 여인을 핍박한 적 있는가?” 

“하이고, 그게 뭐 어때서요? 조가 장녀는 실덕하여 내쫓겼습니다. 실로 우리 일족의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조씨 일족의 명예를 위해서 족장인 제가 한 일인데,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주문청은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었다. 하찮은 지보가 이렇게 시건방을 떨 리 없으니, 분명 뒷배가 있는 것이라며 이를 갈았다. 

그 순박하고 친절하던 소년이 이토록 모질게 전처를 대할 줄이야. 거기에 상관하지 말라고 나를 위협해? 

“친정으로 돌아온 여인을 후대하라는 조정 율법이 있다. 하찮은 족장이 감히 조정 율법을 거역해? 여봐라!” 

주 대인이 쩌렁쩌렁하게 고함치자 아역들이 일제히 대답했고, 관가의 기세에 다들 겁에 질렸다. 

“조대산을 옥에 가두고 심문할 준비하라!” 

조 지보는 고작 현령이 이토록 눈치 없이 굴 줄은 몰랐다. 조대산 처, 딸, 사위가 엉엉 울며 용서해달라고 고개를 조아리는데, 조대산은 대수롭지 않게 콧방귀를 뀌었다. 경성에 사람을 보내라고 부인에게 눈짓하면서 “잡아가는 건 쉬워도, 다시 풀어줄 때는 쉽지 않을 겁니다, 주 대인.” 하고 말했다. 화가 난 주문청은 아무런 말도 없이 손을 휘둘러 끌고 가게 했다. 조대산 가족은 그가 끌려가는 걸 눈을 뜨고 바라만 보면서, 구경꾼을 쫓아내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대책을 상의했다. 

이런 상황을 본 노씨는 울분을 크게 털어내고 신이 나서 딸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막 집 대문 앞에 도착했는데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큰 소리로 묻는 말이 들렸다. 

“여기가 조 대낭자의 집이오?”

노씨가 돌아보니, 스물대여섯쯤 된 훤칠한 공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영모(纓帽: 관리가 쓰던 꼭대기에 술이 달린 모자)를 쓰고 금영롱 뒤꽂이를 꽂고 금박 부채를 흔들고 있는 것이, 그야말로 인간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야살스러운 사내였다. 노씨는 어쩐지 매우 눈에 익는다고 생각하며 멀뚱히 바라봤는데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환 셋이 말에서 튀어 내리더니, 그중 하나가 말을 끌고 하나는 이용을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이용이 노씨를 향해 공수하며 웃어 보였다. 

“대낭, 나를 몰라보는 것인가? 예전에 만나지 않았나, 노아촌에서.” 

노씨는 벼락에 맞은 듯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강림한 신선을 맞이하듯이 다가가서 “소관인이셨군요!” 하고는 허둥지둥 안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다가 방 안이 엉망이라 도저히 이런 귀한 공자를 접대할 상태가 아닌 걸 떠올리고는 마당에서 의자 두 개를 닦아서 앉으라고 권했다. 

이용이 빙긋 웃으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대낭, 이럴 것 없네. 아는 사이에 허례는 무슨.”

노씨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조삼저를 안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다가 목소리를 높여 금단을 불렀다. 금단은 흙투성이가 되어서 뒤쪽에 있는 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가 마당에 낯선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보고는 들어오지 않고 쭈뼛거렸다. 

“가서 아버지 불러오너라. 귀한 손님이 오셨다.” 

노씨가 눈을 부릅뜨며 고함치자, 금단이 후다닥 달려갔다. 이용은 부채를 흔들며 주변을 살폈다. 마당은 허름하고, 집채도 오랜 세월 고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닭 몇 마리가 마당에서 마구 돌아다니는데, 공기에 닭똥 냄새가 났다. 

여기가 바로 조화가 어릴 때부터 자란 곳이구나! 

“소관인, 어쩐 일로 저희 집에 오셨습니까?” 

노씨가 손을 비비며 한쪽에 앉았다. 품에 안긴 조삼저가 손가락을 문 채 말없이 눈을 크게 뜨고 이용을 바라봤다. 정신을 차린 이용이 웃으며 대답했다. 

“대저아와 인연이 있지 않은가. 소가를 떠난 후로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유 대인과 함께 경성으로 오지 않았어? 평소에도 교류가 있었네. 이런 일이 생겨서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데 마침 시간이 나서 혹시 도울 것이 있나 하고 와 본 걸세.”

노씨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용을 다시 살폈다. 옷차림도 비범하고 은근슬쩍 자기도 관리임을 티를 내는 것이라든지, 그리고 확실히 표현하는 말에 애초에 바로 이 사내가 대저아를 첩으로 들일 생각이 있었던 게 떠올랐다. 돌고 돌아 다시 이렇게 될 줄이야! 

노씨가 손뼉을 짝짝 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배은망덕한 일가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우리 저아, 돌아온 이래 매일 눈물로 세수하며 산답니다.” 

이용도 한숨을 내쉬면서 주변을 힐끔거렸다.

“대저아는 나갔는가?”

노씨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쫓겨나서 돌아온 이래 다들 비웃어서 집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며칠 전에 집을 떠났습니다.” 

이용은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어디로 갔냐고 묻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여인네가 어찌 집을 떠나!”

노씨는 속으로 더 기뻐하며 다급히 일어섰다. 

“진정하세요. 같이 간 사람이 있습니다. 잘 아는 분이겠네요. 소 대관인 댁 사람입니다.” 

이용은 안색이 변해서 “소가?”라고 되물었다.

경성에 있는 이용 저택의 화원은 작년 말에 공사를 시작했고 3월 말에 은자를 물처럼 뿌리며 완공되었다. 꽃이며 나무가 끝없이 펼쳐졌고, 누각과 정자도 있고, 석가산, 호수, 푸르른 대나무와 소나무에 사철 과일나무 등도 있어서 춘하추동에 구애받지 않고 각각의 풍광을 즐길 수 있었다.

날씨가 좋은 이 날, 동연낭은 시첩들을 거느리고 정원을 산책했다. 화원에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한창 흥이 올랐을 때, 석가산에 서 있던 금매가 갑자기 노야가 돌아오셨다고 외쳤다. 다들 당황해서 우르르 달려가 맞이하는데, 귀염받으려고 다급하게 내려오던 금매는 넘어져서 치마 가득 흙을 묻히고 허둥지둥 달려갔다. 그 모습을 본 이용이 눈을 부릅뜨며 한마디했다.

“집에서 한가하니 별꼴을 다하고 있구나!” 

금매는 얼굴이 붉어지면서도 이용의 총애를 믿고 투덜거렸다.

“노야가 집을 떠나셔서 다들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화가 나셔서는 왜 저희에게 화풀이 하세요.”

정곡을 찔린 이용이 대번 발로 걷어차자, 미처 방어하지 못한 금매는 가슴을 얻어맞고 그대로 넘어졌다. 얼굴이 하얘져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처첩들은 끽소리도 못 내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용은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고, 동연낭은 그제야 금매를 부축해서 들어가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월낭을 데리고 서재로 들어갔더니, 이용이 고개를 젖히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는 붓을 들어 쓱쓱 쓰더니 곁에 있던 사환에게 건넸다. 

“곧바로 보내라.” 

동연낭은 그 사환이 나간 후에야 향긋한 차를 따라서 다가갔다. 

“식사하셨어요?” 

이용이 콧방귀를 뀌고는 일어나서 서성거렸다. 이용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자 근심거리가 생겼으리라 생각하고는 물어보려는데, 월낭이 뒤에서 살짝 끌어당겨서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게나 공을 들였는데, 남 좋은 일만 했군.”

이용이 서재를 서성거리며 이를 악물고 웃었다. 

“소금남, 소금남! 얼마 전까진 그리 죽은 부인에게 순정인 것처럼 굴더니, 금세 새 사람을 들일 생각을 해?”

이용이 동연낭이 곁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손가락질하며 눈을 부릅떴다. 

“가서 전가아를 데리고 오라고 노부인에게 알리시오. 새 어미 손에 전가아를 키울 순 없지.” 

동연낭은 웃음이 나왔다. 

“관인,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거린다고 한다더니, 아주버님이 평생 혼자 보내란 말씀이세요? 그런 법은 없…….”

그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용에게 뺨을 맞고 넘어졌다. 한쪽 뺨이 금세 부어오르고, 월낭이 허둥지둥 다가가 제 몸으로 동연낭을 가렸다. 하지만 이용의 주먹과 발이 비처럼 쏟아졌다 두 사람은 울음을 참을 뿐, 잘못했다고 빌지도 못했다. 

“체면을 세워줘도 모르는 망할 여편네 같으니! 다녀와서 다시 보자.”

이용은 실컷 욕을 한 후에야 발길질을 멈추고 싸늘하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가서 유가 새 부인에게 운봉루로 날 만나러 오라고 전해!”

이용은 월낭과 동연낭이 허둥지둥 나가는 걸 보다가 서안 위에 있는 부채를 휙 잡아채 갈기갈기 꺾으며 이를 악물었다. 

“송옥루, 감히 나를 가지고 놀아? 어디, 실컷 가지고 놀게 해주마.” 

유가 저택의 대문에 칠한 색은 여전히 붉디붉었다. 조금은 구부정한 장사가 대문을 열고는 바람에 흙이 일지 않도록 물을 뿌렸다. 살굿빛 배자를 입은 시녀 둘이서 힘을 모아 후원에서 말라버린 정향나무를 들고나왔다. 두 사람은 화분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고는 장사를 바라봤다. 그중 얼굴이 갸름하고 입가에 먹을 복점이 있는 시녀가 허리춤에 손을 대고 그를 불렀다. 

“장씨, 이거 버려요.” 

장사가 빗자루를 내려놓고 느릿느릿 다가가서 아무런 말도 없이 화분을 들고 나가자, 두 시녀가 손수건을 흔들며 헤실헤실 웃더니 좁은 길을 지나 유소호의 거처에 도착했다. 새로 푸른 벽돌을 깐 그곳에 마련한 화단 두 개에 지금은 만당홍(滿堂紅: 백일홍, 배롱나무) 두 그루를 새로 옮겨 심어놓았다. 아직은 푸르지만, 새싹이 돋기 시작했다. 처마 밑에 주르륵 놓인 화분에는 국화, 정향화가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두 시녀는 문에 걸린 붉은 휘장을 젖히고는 탁자 위에 화병을 정리했다. 꽃이 피지 않는 매화를 뽑아내는데 안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홍향, 녹옥!” 

시녀 둘은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주렴을 젖히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입는 전지연(纏枝蓮: 꽃가지가 얽힌 문양으로, 전통적으로 길한 문양 중의 하나) 문양의 대금 상의를 입은 송옥루가 침상에서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부인, 죽 좀 올릴까요?” 

얼굴이 갸름한 시녀가 웃으며 다가가서 겉옷을 걸쳐 주었다. 

“곧 정오이지만 방은 아직 싸늘해요. 조심하세요.” 

송옥루가 빙긋이 웃고는 서안 앞에 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날 잡아서 이랑더러 권붕을 치우라고 해야겠다. 빛을 가려서 방 안이 쌀쌀해. 죽은 됐다. 느끼하잖니. 홍향, 우유를 데워오너라.”

송옥루가 거울을 바라보며 지시하자 홍향이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녹옥이 급히 다가가 장식함을 열었다. 

“부인, 어떤 머리 모양으로 올려드릴까요?”

“음, 며칠 전에 시랑 대인 댁에서 뵌 부인의 머리 모양이 좋더구나. 할 줄 아니?” 

송옥루가 잠시 생각하다가 하는 말에 녹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빗과 장신구 몇 개를 꺼냈다.

“네. 그 부인보다 훨씬 예쁠걸요.”

머리를 빗으며 장식은 뭐로 할지 묻자, 송옥루는 유심히 고르다가 문득 화병 밑에 깔린 서신을 보고는 겉봉을 뜯었다. 

“이건 누가 보낸 것이냐?” 

“어제 장씨가 가지고 온 거예요. 등사랑 동 부인이 보낸 거래요.” 

녹옥이 고개를 빼고 보고는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미 뜯어서 서신을 읽던 송옥루가 움찔하자, 녹옥이 실수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송옥루가 비녀로 녹옥의 손을 찌르며 욕을 퍼부었다. 

“망할 년! 조심해야지!” 

녹옥이 후다닥 무릎을 꿇으며 잘못했다고 빌었다. 송옥루가 머리를 빗다 말고 일어서서 서성이다가, 서신에 적힌 시간과 장소를 다시 보고는 화가 치밀어서 서신을 찢었다. 우유를 들고 들어오던 홍향은 녹옥이 바닥에 꿇어앉아 있는 걸 보고 부르르 떨며 다가가지 못했다. 하필 그 모습을 본 송옥루가 싸늘하게 호통쳤다. 

“썩 들어오지 않고 뭘 해! 뭐가 그리 오래 걸려! 어디에서 놀다 온 거냐!” 

“노부인이 바느질하신다고 도와달라고 부르셔서…….”

홍향이 우유를 바치면서 조심스럽게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송옥루가 혀를 찼다. 

“왜? 나는 네 월전을 주지 못할 것 같아서, 노부인에게 가서 알랑거리려고?” 

홍향도 겁에 질려 얼굴이 붉어져서는 무릎을 꿇고 가당치 않다고 울먹였다. 송옥루가 가슴속 가득한 울화를 그녀에게 풀며 손가락질해댔다. 

“울긴 왜 울어? 여우 같은 꼴을 누구에게 보이려고? 네가 툭하면 관인 곁을 맴도는 걸 내 모를 줄 아니? 사내 한 번 못 보고 산 년처럼, 한 번만 더 그러면 요자(窯子: 가장 급이 낮은 기방)에 팔 것이다. 어디 아무나 실컷 보라지!”

홍향은 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훌쩍이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한바탕 욕을 퍼부은 송옥루는 우유를 마시고 겨우 화를 달랬다. 홍향에게 꺼지라고 외치고는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녹옥을 보고 혀를 찼다. 

“아직 그러고 있니? 어서 머리 빗겨!” 

녹옥이 바들바들 기어 일어나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머리를 빗겼다. 그리고 송옥루가 입은 옷을 정향 뿌리로 색을 낸 치마로 갈아입히고는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얼굴 고쳐라. 누구 보라고 울상이야. 노부인에게 내가 혼나야 속이 시원하겠니?”

송옥루가 두 시녀를 흘겨보고는 싸늘하게 하는 말에 두 시녀가 식겁하고 얼굴을 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방을 나갔다. 송옥루가 좌우를 살피고는 두 사람을 데리고 천천히 앞뜰로 향하더니, 유씨가 정원에서 바느질하는 걸 보고 웃으며 다가갔다. 

“어머니, 또 바느질하셔요. 허리 아프세요. 아이들에게 시키시면 되죠.”

그러더니 마침 유씨의 시녀 운아가 안에서 나오는 걸 보고 눈을 부릅떴다. 

“운아, 상전 노릇 하라고 널 노부인께 보낸 줄 아니?”

운아는 입술을 내밀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고, 송옥루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유씨는 코를 찌르는 향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 어딜 가니?”

“부인들끼리 옷 구경 가기로 했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러 온 거예요.” 

송옥루가 고개를 숙이며 웃자, 유씨가 언짢은 얼굴로 그녀의 옷을 바라봤다. 

“또 옷을 짓는단 말이냐? 이것도 얼마 전에 지은 옷 아니냐? 내 말 들어라. 며느라기…… 조화가 두고 간 옷도 다 새것이다. 입지도 않았어. 네 키가 조금 더 크긴 해도 입을 수 있다. 괜히 버리지 말아라.”

고개를 숙인 송옥루의 안색이 싹 변했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고분고분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 말씀이 옳아요. 기억해두겠습니다. 이번엔 그냥 같이 구경 가는 거고, 전 안 지어요. 형님이 남기고 간 옷, 다 챙길게요.”

그러고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주눅이 든 것처럼 말을 이었다.

“사실은 그 옷들, 형님에게 보내고 싶어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아서, 마음이 놓이지 않아요…….”

눈시울이 붉어진 유씨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 애를 생각해주다니 기특하구나. 시골에서 그런 옷을 입을 일도 없으니, 네가…… 네가 가지고 있으렴. 옷 몇 벌 지어서 보내주는 것도 좋겠지…….”

그러고는 뭔가 떠오른 듯이 말을 이었다. 

“십방촌 땅문서를 보내라고 했는데, 보냈니? 그래야 우리 유가가 미안하지 않지. 그래야 아녀자 혼자 기댈 곳이라도 있지.” 

송옥루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벌써 보냈어요. 조육아에게 들려 보냈답니다.”

그러고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찍었다. 

“어머니 마음을 진작 알고 있었죠……. 형님이 그 마음을 알면 분명 화를 풀 거예요. 그때 다시 집으로 모셔 오면…….”

유씨는 눈시울이 붉어져서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중얼거렸다. 

“못 돌아온다. 내 마음을 알아도, 이제 못 돌아온다…….”

송옥루는 손수건을 들고 곁에서 같이 상심하다가 바람이 불자 얼른 모시고 들어가라고 운아에게 지시했다. 유씨가 돈 함부로 쓰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는 등등 몇 마디 당부하고 나서야 송옥루가 물러났다. 

돌아서자마자 그녀의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입술을 깨물고 손수건을 비틀면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서 진작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오른 후 손수건을 힘껏 내던졌다. 

“며느라기, 며느라기! 지금 며느리가 누군데! 그 며느리 자리를 상대가 원하는지 아닌지 생각해야지! 내가 돈을 많이 쓴다고 타박해? 내가 얼마나 쓴다고! 이랑의 봉록에 하사품까지 은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다 꼭꼭 감춰두고는! 곰팡이 슬면 어쩌려고! 가난하게 살더니 아주 난리구나!” 

홍향과 녹옥은 마차 문 쪽에 기대서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한바탕 타박한 송옥루는 두 사람에게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눈치도 없니? 출발 안 해?” 

홍향이 후다닥 휘장을 젖히고 마부를 재촉하자, 마부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홍향은 용기 내서 송옥루를 힐끔 보고는 운봉루로 가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모서리에 장식을 건 마차가 서서히 성 안으로 향했다. 마침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던 유소호와 마주치자, 휘장 너머로 그를 발견한 송옥루가 급히 손을 흔들었다. 유소호가 말을 몰고 다가가 웃음을 쥐어짜며 물었다. 

“낭자, 어딜 가요?” 

송옥루는 유소호가 얼굴이 살짝 굳고 눈가에 근심이 서려 있으며, 땀까지 흘리는 걸 보고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주며 투덜거렸다. 

“이랑, 요새 뭐가 그렇게 바빠서 집에도 안 들어와요. 그러다 몸 상해요.” 

유소호가 마지못해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피했다. 

“하북 동로 일대에 보리 재해가 빈번히 발생해서 며칠 나갔다가 오늘 막 돌아와서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에요. 오늘도 못 돌아갈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어머니께 전해줘요.” 

송옥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하게 말했다. 

“이랑, 쉬어가며 해요. 탕을 만들어 보낼 테니 꼭 마시고요.”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부터 보내고 마차가 모퉁이를 도는 걸 지켜보다가 황궁 쪽으로 말을 몰았다. 

황궁으로 들어갔더니, 조회는 벌써 끝났는데 대신들은 아직 돌아가지 않고 황궁 내각에 모여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들어가자 다들 다가가 인사를 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다급하게 상황을 물었다. 

“대인, 어떤가? 피해 상황은 진정됐는가?”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이자, 모여든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 유 대인의 지도 덕분에 조씨가 병 재해를 발견한 바람에 지체되지 않은 것 아니겠소.” 

누군가 웃으며 하는 말에, 사람들은 순간 어색해져서 맞장구를 쳐야 할지 호통을 쳐야 할지 몰랐다. 그래도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순간 모두 유소호를 바라봤다. 유소호의 안색이 살짝 변하는데, 마침 안에서 내시가 나왔다. 폐하께서 찾는다는 말에 유소호가 다급하게 들어갔고, 그러자마자 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소호는 안에 들어가서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고 심장이 쥐어짜듯 아팠다. 재난 구제로 바빠서 잊고 있던 생각이 다시 치밀어올랐다. 

어디를 가려는 거야. 왜 집에 안 있고? 집도 땅도 있는데 왜 밖을 나돌아?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된 건 아니겠지? 노씨가 욕을 해서? 재가하라고 강요하는 걸까?

그 생각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저도 모르게 앞섶을 움켜쥐었다. 입맛이 씁쓸했다. 

재가할 건가?

“유 대인!” 

곁에 있던 내시가 나직이 부르는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유소호는 용상에 앉은 황제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황제가 조바심 나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수확량을 얼마나 보전했어?” 

유소호가 공수하며 대답했다. 

“폐하의 홍복으로, 대명, 개덕, 하간, 창주, 기주, 박주, 체주 모두 8할은 지켰습니다. 하북 서로는 그보다 적지만, 그래도 4할은 지켰습니다.”

황제는 용상에 기대며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4할도 괜찮지. 4할도 괜찮아. 수확이 전혀 없는 것만 아니면 된다. 7년 전 황충 재해에서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는데 이런 재난을 겪다니. 유 애경, 짐이 천하 창생을 대신하여 경에게 감사하네.” 

유소호가 황급히 엎드리며 가당치 않다고 대답했다. 황제가 몇 걸음 만에 다가가 몸소 그를 일으켰다. 여기저기 분주히 돌아다니느라 초췌하고 피곤이 가득한 유소호에게 잔뜩 상을 내리고 격려하던 황제는 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관씨현에서 말하는 농신 낭자가 경의…… 십방촌 조씨인가?”

“설명하는 바를 들으면 그런 듯합니다.”

멈칫하고 입을 연 유소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 그 여인도…… 농사에 지극히 정통합니다. 폐하, 그 여인에게도 상을 내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황제는 뜻밖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조금 난감해하는 유소호를 살피다가 불현듯 웃었다.

“이럴 거면서 두 사람은 왜…….”

유소호가 순간 난처해하는 걸 본 황제는 헛기침하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다면, 당연히 공을 치하해야지.” 

유소호가 내심 기뻐하며 고개 숙여 감사 인사했다. 흥미가 생긴 황제는 식사 시간이 된 걸 보고 유 애경과 함께 식사하겠노라 명했다. 당황한 유소호는 또 몇 번이고 절을 하고 구석에 앉아서는, 황제가 먼저 젓가락을 든 후에야 조심스럽게 요리를 먹으면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니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들었다.

“참, 유 애경, 자네 말대로 어전의 운대를 다 거두었네. 맛보게.”

황제가 파릇파릇한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매우 좋아하신다네. 게다가 천막 채소보다 훨씬 저렴하지 않은가.” 

유소호는 눈앞의 음식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임새옥의 얼굴이 떠올라서 손을 덜덜 떨다가 결국은 음식을 집지 못했다.

황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운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마침 경에게 알리려던 참이었지. 얼마 전에 조정으로 돌아온 소송(蘇頌: 대송 천문학자 겸 정치가) 대인이 며칠 전에 상주서를 올렸는데, 운대는 바로 수확하지 말고 5월에 씨를 거둬 기름을 짜면 상등품 기름을 얻을 수 있다더군. 유 대인, 운대는 경이 심은 것 아닌가. 소 대인의 말이 맞는가?”

유소호는 젓가락을 떨어뜨리고는 허둥지둥 죄를 고했다. 황제가 탓하지 않자 잠시 생각하다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폐하, 신은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은 천막 채소가 비싼 것을 고려하여 봄에 먹을 채소로 운대를 심은 것입니다. 채소 가격을 내려서 가난한 자들도 봄 채소를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황제는 “그런 것이었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유소호의 애민지심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 일은 더 거론하지 않고 주빈이 모두 즐겁게 식사했다. 

대전에서 물러난 유소호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밖에서 지키고 있던 대신들이 불러세웠다. 황제의 총애가 나날이 깊어지는 걸 보고 하나같이 유소호에게 아첨하는 자들이라, 환영회를 열겠다고 난리였다. 유소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까닭 없이 집에 돌아가기 마음이 편하지 않아 바로 승낙했다. 

그리고 지금 경항 대운하에 있는 임새옥은 뒤에서 일어난 이런 일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오늘 날씨가 유난히 좋아서 그동안 채집한 표본을 싹 펼쳐두었다. 영아를 불러 지켜보게 하고는 자기는 시원한 곳에 앉아서 그동안 봐왔던 토질과 농작물 종류를 세세히 기록했다. 

반나절 정도 내려오니, 강의 흐름이 급해지는 게 느껴지고 오가는 배들이 많아졌다. 배 위의 사람들도 돌아다니는 걸 보니 곧 부두에 정박할 모양이었다. 오늘은 배에서 내릴 생각이 없어서 아랑곳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소정가가 “어, 저기 소 대관인이시잖아!” 하고 외쳤다. 임새옥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더니, 저 멀리 부두에 회음(淮陰)이라고 적혀 있었다. 

‘양주와 멀리 떨어진 곳인데 강녕에 있는 소금남이 왜 여기에 있겠어. 주인에게 물건을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에 소정가가 잘못 본 거겠지.’ 

임새옥이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서서 저 멀리 바라보니, 북적이는 인파 속에 흰 장삼을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배가 서서히 가까워지고, 얼굴이 확실히 보이기도 전에 임새옥은 그 체형을 알아봤다. 

저게 소금남이 아니면 누구일까. 

<고대 지주> 5권에 계속

고대 지주 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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