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조잡한 계략을 세운 송 낭자, 원한 바를 이루다
부엌칼을 들고 선 임새옥은 마당의 감나무를 바라보면서 한순간 아련해졌다. 돌고 돌아 다시 원점이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긴 했는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대저아!”
노씨의 목청에 넋을 놓고 있던 임새옥이 정신을 차렸다. 노씨가 외바퀴 수레를 밀고 들어오는데, 수레 위로 가득 쌓인 가재도구에 한숨이 나왔다.
꿈이 아니구나.
“따듯해지면 옮겨도 된다니까, 바득바득 재촉하기는. 망할 유가 놈들이 의리도 없이 배신한 건데, 우리가 그 집에 좀 살면 어때서? 게다가 그 집도 네가 번 돈으로 산 것 아니냐. 게다가 그 집을 짓는 걸 내가 지켜봤는데! 천벌 받을 것들. 개 놈들…….”
노씨는 물건을 내려놓으며 욕을 퍼부어댔다. 욕을 하다가, 하다가 눈물이 흐르자 제 뺨을 때리는 모습에 임새옥이 후다닥 달려가서 말렸다.
“어머니, 언젠간 옮겨야 하잖아요. 우리가 알아서 나오는 게 쫓겨나는 것보다 낫죠.”
임새옥은 웃으며 말하고는 옷에 손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쉬고 있어요. 삼저아랑 외할머니는 방에서 자고 있어요. 잘 보고 있어요. 전 아버지 좀 도와드리고 올게요.”
돌아온 이래 별로 밖에 나가지 않았던지라, 문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는데 노씨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누가 허튼소리 하거든 뺨을 갈겨줘라!”
임새옥은 흠칫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유가까지 가는 길을 수도 없이 걸었었는데, 이번처럼 멀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경성으로 떠났을 때 마을은 짙은 초록에 물들어 있었다. 지금은 춘절이 지났지만, 만물이 싹 틀 시기는 아직 한참 남아서 보이는 곳마다 쓸쓸한 겨울 풍경이 가득했다.
오늘 날씨는 유난히 좋아서, 마을 공터, 담장 모퉁이마다 일하다가 햇볕을 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웃고 떠들던 사람들은 저 멀리에서 하얀 겹옷, 연홍 치마, 푸른 꽃무늬 배자를 입은 여인이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고는 순간 입을 닫았다.
임새옥은 고개를 숙인 채 한 걸음, 한 걸음 사람들에게 다가가 심호흡하고는 고개를 들고 웃어 보였다.
“아주머니들, 바쁘시네요.”
사람들은 금세 떠들썩해져서 너도나도 대답했다. 다행히 모두 호의적인 수줍은 얼굴이었고, 몇몇 여인은 앉았다 가라고 손짓했다. 임새옥은 웃으며 고맙다고 하고는 천천히 자리를 떴다. 모퉁이를 돈 후에야 큰 짐을 내려놓은 듯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며칠 지나고 적응하면 괜찮아져.’
임새옥은 가슴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조삼랑은 유가 문 앞에서 쇠스랑 등 농기구를 밖으로 끌어내고 있었다. 금단은 두꺼운 나뭇가지를 들고 뒤를 따랐다. 임새옥이 허둥지둥 다가가 살펴봤더니, 마당에서 겨우 1년 키운 대추나무가 맞았다. 적당한 크기로 자라서 올해엔 대추를 딸 수 있었는데.
“왜 베었어?”
임새옥이 마음 아파하며 묻자 금단이 코를 쓱 닦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가 베랬어. 장작으로 쓴다고.”
임새옥은 웃고 말았다.
그때 조삼랑이 입을 열었다.
“다 정리했다. 왔으니 한 번 가서 보아라. 흘린 게 없으면 문 닫고 와라.”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이 간 다음에 느릿느릿 유가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맞은편이 바로 유씨가 쓰던 거처였다. 작년 새해에 걸었던 두꺼운 휘장이 아직 걸려 있었다. 순간 눈이 따끔해서 황급히 돌아섰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눈물을 참고는 걸음을 서둘러 나가버렸다. 빗장을 잠그고는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정월 보름이 지나면서 변경성의 새해 분위기도 서서히 옅어지고 상점들이 문을 열면서, 조정도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갔다. 등청 첫날 관료들은 서로 웃으며 인사를 나눴다. 진심이든 거짓이든 인사치레를 나눴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이용은 몇몇 젊은 동료들과 맨 뒤에 서서 풍류운사(風流韻事: 풍류가 있으며 운치가 있는 놀이. 남녀간의 염문)를 나누며 수시로 웃음을 터트렸다. 잠시 더 기다리자, 내시 하나가 나와서 황제의 뜻을 전했다. 작년에 황자를 본 황제는 정월 보름 원소절에 대상국사(大相國寺)에 가서 향을 피우고 하늘에 감사하다가 풍한에 걸렸다. 밤새 토사곽란을 앓았으니, 조회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기쁨 가득하던 대신들이 곧바로 얼굴을 가라앉히고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시가 다시 나오더니 황제가 약을 먹고 잠들었다고 전했다. 심각하지 않아서 괜찮다는 태의의 말을 전하자 다들 흩어졌다.
대신들이 막 궁문을 나서는데, 누군가 융의에 모자를 쓰고 급한 걸음으로 맞은 편에서 다가왔다.
“하, 저거 어전시 유 대인 아닌가.”
눈썰미 좋은 사람이 대뜸 소리치자, 한순간 그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맞은편에서 다가가던 유소호는 뙤약볕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다 초조해졌다.
“유 대인, 관가께서 오늘 옥체가 편치 못하여 조회를 열지 않았소.”
원래 유소호와 친분이 깊던 사농시 오 대인이 다가가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서고는 안색을 살피며 나지막이 말했다. 어사중승 등관도 말할 것도 없이 뒤따라 다가가서 친자식을 만난 듯이 이리 살피고 저리 살폈다.
한 달 만에 나타난 유소호는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야윈 몸이 지금은 앙상했다. 키도 커서 얼핏 보면 대나무 같은 몸에 얼굴도 창백했고 기운도 없어 보였다. 오 대인은 그의 손을 토닥이며 괜찮은지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호의를 아는 유소호가 감사해하며 웃었다.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등관에게 예를 갖추자 등관이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고, 그와 친한 다른 관리들도 몰려들었다. 유소호의 집안일이 온 성의 웃음거리가 됐다지만, 뭐가 어쨌든 황제가 나서서 편들 정도로 총애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사람은 어디든 있는 법, 예를 들면 이제 막 어사대로 옮긴 이정은 뒷짐 진 채 얼굴을 구기며 입을 열었다.
“유 대인, 안색이 나쁘지 않군. 언제 희주를 먹여줄 건가?”
유소호의 안색이 변하고 또 변했고, 오 대인이 서둘러 나서면서 곧이라며 분위기를 풀었다. 눈치 빠른 다른 이도 나서서 두 사람을 잡아끌었다.
“자자, 우리 집에 새 요리사가 왔소. 솜씨가 참 좋다오. 여러분, 제 체면을 봐서 들러주시겠소?”
그렇게 다들 유소호를 둘러싸고 우르르 가버리자 이정이 소맷자락을 떨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재주를 보이기 전에 저훼(詆毁: 비방하고 헐뜯음)하는 능력부터 보이는군. 폐하께서 어찌 가만히 두시는 겐지.”
멀어지는 등관의 뒷모습을 보고 다시 혀를 차며 간신배라고 내뱉고는 돌아서는데 훤칠한 공자가 웃으며 예를 갖췄다.
“어사 대인!”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살펴본 이정은 상대가 왕안국의 풍모가 있다는 소리를 듣는 음서 자제임을 알아보았다. 이런 사람을 못마땅해하는 이정은 콧방귀를 뀌며 상대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용은 무안해졌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씨익 웃으며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는 연회에 참석하게. 그 시를 꼭 제대로 읊어야 하네.”
그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마디했다.
“그토록 재능있는 처를……. 유 대인이 몹시 후회하겠군.”
이용이 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후회? 얼굴을 맞은 기분이겠지.”
다들 웃음을 터트리며 가버린 후, 이용은 잠시 그 자리에서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땅문서를 손에 넣고 직접 널 맞이하러 가마.”
그 생각을 하다가 잘생긴 얼굴이 잠시 흐려졌다. 그는 양손을 비비며 이를 악물었다.
“쓸모없고 어리석은 여인. 길을 이렇게 깔아주었는데 아직도 들어가지 못해? 공을 얼마나 들였는데.”
궁문을 나선 이용은 말에 뛰어올라 사환에게 건네받은 채찍을 휘두르며 바람처럼 성문 쪽으로 달려갔다.
정월이 지난 후, 유가 대문은 늘 열려 있었다. 장사는 일이 없으면 툭하면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거리 풍경을 바라봤다.
이날, 안에서 유씨가 고함치는 소리가 또 울려왔다. 이어서 여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법도를 모르는데 뭐하러 쓸데없이 화를 내세요.”
뒤를 돌아보니, 영아가 눈시울이 빨개져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너도 참. 뭐하러 들어갔냐. 좋은 꼴 못 볼 걸 알면서.”
장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영아가 눈을 비비고는 멍하니 거리를 바라봤다.
“나를 버리고 혼자 가시다니, 부인도 참 독하시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너는 유가에서 산 노비 아니냐. 부인은 조씨인데 무슨 독하니 마니냐.”
장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영아는 입술을 내밀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각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자, 등을 켜려고 장사가 일어나는데 방가가 말을 끌고 걸어왔다.
유소호는 거나하게 취해서 말에 탄 채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다. 장사는 서둘러 다가가 방가에게 고삐를 넘겨받았다.
“겨우 몸이 나으셨는데, 어째서 또 술을 드시고 취하신 게냐.”
“내가 어찌 말려요. 게다가 나는 연회 자리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방가가 불퉁하니 대답하고는 유소호를 부축해 내려왔다. 영아는 벌써 안에 알리러 들어갔다.
곧 유씨가 허둥지둥 마중 나왔다. 방가는 유씨 뒤를 바짝 쫓아 나오는 포도색 겹옷, 하얀 비단 치마를 입은 새초롬한 여인을 보고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유씨와 그녀가 알아서 유소호를 부축해 들어갔다.
“불을 때는데도 어찌 따듯해지지 않아.”
유소호를 데리고 침소로 들어간 유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영아는 입을 내민 채 화로에 숯을 넣으며 꿍얼거렸다.
“사람이 없으니 아무리 불을 피워도 따듯해지지 않죠.”
유씨가 창백해진 얼굴로 빗자루를 집어 던지자, 빗자루에 맞은 영아가 밖으로 나갔다.
송옥루는 유소호의 신발과 옷을 벗기고 이불을 덮어 주고는, 술 취한 그의 얼굴을 보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 제 탓이에요. 이랑은 계속 부인을 그리워하네요. 티를 낼 수 없으니 술을 마실 수밖에요.”
유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알아주는 건 너뿐이구나! 불쌍한 이랑, 매일 기운도 없고 밥도 잘 먹지 못하잖니. 며칠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여위어서는. 그 조씨, 거들떠보지도 않다니.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이리 독한지.”
유씨는 유소호의 침상 가에 앉아 눈물을 닦았다. 송옥루도 한참 같이 울고 있는데 유소호가 뒤척이며 술 취해 중얼거렸다.
“……모진 동풍 때문인가, 은애하던 정이 부족했던가. 가슴에 수심 품고 몇 년이나 헤어져 살았던가. 잘못이다, 잘못이다……. 그래, 잘못이지, 암. 잘못이야.”
송옥루는 멈칫했고, 유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송옥루는 처량한 얼굴로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어머니는 모르시겠지만, 부인이 떠날 때 시 한 수를 남겼어요. 이랑이 조금 전에 읊은 게 그 시예요. 지금 온 성 사람이 읊고 있어요.”
유씨가 얼떨떨해져서 중얼거렸다.
“그 아이가 언제부터 시를 썼다고. 뭐라고 썼는데?”
“가슴에 와닿는 시예요. 참으로 잘 썼더라고요. 다들 상심하며 듣고 눈물을 흘리며 읊는대요.”
유씨의 얼굴이 더 안 좋아졌다.
“그 아이가 상심해? 눈물을 흘려? 이랑을 호되게 두들겨 패고도 화가 안 풀렸다니? 이런 시를 지어 우리 이랑을 조롱하다니! 그 악독한 것. 그 악독한 것. 우리 이랑을 뭐로 본 것이냐.”
침상을 두드리며 이야기하던 유씨는 화가 나서 비처럼 눈물을 흘렸다. 머리를 유소호의 품에 묻고 목 놓아 우는 모습에 당황한 송옥루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렸다.
술에 취해 골이 지끈지끈 아프던 유소호는 작은 두 손이 이마를 쓰다듬는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귓가에 임새옥이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술을 얼마나 마셔서 냄새가 이렇게 나요. 얼른 가서 씻어요.’
유소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손을 내밀어 품에 안았다.
“낭자, 날 버리지 말아.”
부드러운 느낌이 품에 들어오자 마음이 몹시 놓여 그 사람을 안고 얼굴을 비비며 나긋나긋 말했다.
“낭자, 날 버리지 말아. 두려워.”
문득, 품에 안은 몸이 바짝 굳는 게 느껴지더니 참는 듯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새옥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던 모습이 다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해졌다. 저도 모르게 어이쿠, 외치며 품에 안은 사람을 밀치고 뒤로 숨다가 침상에 머리를 박고는 아파서 숨을 헐떡였다.
“이랑, 이랑, 다쳤어요?”
송옥루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다가가 살폈다. 유소호는 그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곳이 어디인지 깨닫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누이, 어찌 왔어요? 내가 무례하게 굴었나요?”
송옥루는 눈이 시큰해져서 또 눈물을 흘리더니, 서둘러 눈물을 닦고는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이랑, 걱정되어서 와봤어. 그런데 술을 왜 이렇게 마셨어.”
“다들 기분이 좋아서 마시다 보니 이리되었어요. 괜찮아요. 왜 이리 울어요.”
유소호는 웃으며 말하고는 송옥루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송옥루가 더 심하게 울면서 유소호의 품에 머리를 묻었다.
“이랑, 부인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몸을 망치면 안 되죠.”
그 말에 유소호가 별안간 크게 웃으면서 송옥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인? 무슨 부인? 내가 왜 그 모진 동풍에 은애하는 정도 옅어졌다는 그 사람 때문에 술을 마시겠어요.
누이, 누이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 여인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 내가 그 여인만 보면 무서워한다는 걸 아무도 몰라. 내가 그 여인을 처음에 봤을 때,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있었거든. 그 여인이 몽둥이를 들고 달려와서, 아이들이 놀라서 달아났어요. 그때 얼마나 사나웠는지, 누이는 못 봤지. 그러니까, 그러니까, 예전의 누이 같았어요.”
그러더니 빙긋 웃으며 일어나 앉더니 송옥루의 손을 잡았다. 송옥루는 코를 훌쩍이며 서럽고 수줍은 듯 그를 바라봤다.
“이랑, 예전에 내가 매일 괴롭혔는데, 나, 나 밉지 않아?”
사등이 불타는 방 안에 유씨의 분부에 따라 화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따듯해진 건지, 술기운이 오른 건지, 유소호는 덥고 답답해졌다. 여인이 고개를 숙여 반쯤 보이는 가녀리고 부드러운 얼굴, 길게 그린 눈썹, 옅게 바른 연지, 옥 같은 귓불에 달랑이는 진주를 바라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소호는 송옥루를 덥석 품에 안아 얼굴을 들어 올리고 입을 맞췄다. 여인은 숨이 막히는지 손으로 밀어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랑, 이랑, 이러면 안 돼요.”
수줍은 듯 파르르 떠는 목소리가 유소호의 귓가에 울렸다. 깃털이 마음을 간질이는 것처럼 온몸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더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그대로 눕히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옥루, 그때 분명 당신을 떠올린 거야. 그래, 맞아. 그때 분명 그 여인을 당신으로 여긴 거야. 그녀를 당신으로 여겼어. 이제 당신을 만났으니, 그녀, 그녀는 없어도 그만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은 해놓고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의 동작이 느려진 걸 느낀 송옥루는 몰래 이를 악물고는 교성을 내뱉으며 유소호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따지고 보면 유소호도 운우지정을 깨달은 지 반년밖에 안 된 풋내기였고, 임새옥이 여러 날 그를 피했었다. 그러니 이런 도발을 어찌 견딜까. 순간 휘몰아치는 욕정에 그는 저도 모르게 여인의 옷을 벗겼다. 하얗고 보드랍고 좋은 향기가 나는 피부가 드러났다. 오늘 반드시 이 사내를 잡을 결심을 한 송옥루는 부끄러워할 겨를 없이 알아서 교성을 지었다.
베갯머리에서 쉴 새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수많은 방중 기교로 유소호를 단단히 옭아맸다. 다행히 진작 준비해서 매일 몸에 지닌 닭 피를 몇 방울 떨어뜨린 다음엔 아무런 걱정 없이 환락을 마음껏 즐겼다.
밤에 깨어난 송옥루는 수줍은 척하려고 하는데, 옆에 누웠던 사람이 사라지고 없는 걸 발견했다. 화들짝 놀라 일어나 앉으니, 유소호가 옷을 걸치고 바깥 칸 창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서 있는 걸 보고는 곧바로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속으로 욕을 퍼붓고는 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랑, 하고 불렀다.
유소호가 놀라서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여인이 당황해하는 것을 보며, 마음 깊은 곳의 수심을 누르고 몇 걸음 만에 다가가 옷을 걸쳐 주었다.
“더 자지 않고.”
송옥루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소호에게 기댔다.
“이랑, 옥루가 당신의 명성을 더럽혔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가리며 고개를 숙이고는 웃어 보였다.
“내 명성? 그런 건 진작 없어서 당신이 더럽히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송옥루는 제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황급히 그의 손을 잡고서 애원했다.
“이랑, 옥루는 영원히 부인을 존경할 거예요. 옥루는 첩이에요. 이랑과 부인은 옥루의 하늘이에요. 부인은 독한 사람이 아니에요. 시간이 지나면, 옥루가 직접 부인을 찾아가서 부탁할게요.”
유소호는 담담하게 웃으며 송옥루의 손을 토닥였다.
“바보. 당신의 호의를 기억해둘게요. 다만 이런 말은 다시 하지 말아요. 당신은 원래 양민이고 우리 집에서 노비 노릇을 한 적 없잖아요. 지금은 신분도 회복했는데, 첩을 자처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날을 잡읍시다. 집에 당신이 있어야 내가 밖에 있어도 안심되죠.”
송옥루가 놀라고 기뻐서 입을 가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황급하게 말했다.
“이랑, 내가 양민 출신이지만 기예를 판 적이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당신하고 어울리겠어요. 괜히 당신까지…….”
유소호가 웃으며 그녀를 잡아당겨 안고는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했다.
“나이가 들었는데 왜 갈수록 겁이 많아져요. 툭하면 이렇게 겁을 먹기는. 그게 뭐 어때서요. 우선 기적(妓籍)에 든 적이 없고, 또 노비 신분도 아니고 그저 가난했던 것뿐이에요. 이 세상에 가난한 시절 없던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낭자…….”
유소호는 낭자라는 두 글자를 입에 올리는 순간, 마치 칼에 베인 듯이 입 안이 얼얼했다. 유소호가 억지로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제 가슴에 잡아끌어 꼬옥 안아주었다.
“남들이 비웃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사람들 보고 살 것도 아닌데. 당신이 여기에 있으면 그걸로 됐어요.”
송옥루는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리더니, 덥석 그를 안고 펑펑 울었다.
“이랑, 이랑, 이번 생에 당신을 다시 만날 줄은 몰랐어요.”
그녀 품에 안긴 유소호는 흥분한 그녀 모습에 웃음이 났다. 웃다가, 웃다가 웃음소리가 작아졌다. 까닭 없이 가슴이 턱 막히고 당황스러워서, 송옥루를 쓰다듬으면서 뜬금없이 눈물을 흘렸다.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이 떨리고, 가슴 속에서 쓱 빠져나간 무언가가 그 틈새를 통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이제 날아가 버렸으니,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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