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녕 9년 섣달 스무하루는 유난히 추웠다. 하지만 경성 사람들이 조왕신 제사를 지내는 열정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온 경성에 채붕(彩棚: 붕棚의 구조로 이루어진 가설 누각. 화려한 비단 등으로 장식)이 가득했고, 거리와 골목에 거마가 엇갈려 분주했다. 곳곳에 아이들이 작은 꽃등을 들고 ‘섣달 초파일, 조왕신께 제사 지내네. 춘절이 다가와, 여자아이는 꽃을 달고, 사내아이는 폭죽을 터트리네. 할머니는 꽃 겹옷을 입고, 할아버지는 하하 웃는다네!’ 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집집마다 뛰어다녔다.
살저항과 바로 붙어 있는 세미항(細米巷)의 집은 모두 집들이 낮아서 주위 높은 건축물에 에워싸인 모양새였다. 이곳은 성에서 가장 작고 짧은 거리이자 사는 사람도 가장 복잡한 골목인 만큼, 햇볕도 잘 들지 않는 곳이라 명절을 보내는 경사스러운 분위기도 조금 줄어들었다.
남록색 배자, 직금 대금 겹옷, 청남색 치마를 입은 아원이 한 손에 향과 촛불, 다른 손엔 문신(門神), 종규(鍾馗), 춘련을 들고 장난치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피해 담장을 따라 골목 맨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깨로 문을 몇 번이고 부딪쳐도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불퉁스럽게 고함쳤다.
“저예요! 문 여세요!”
뒤이어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끼익하고 열렸다. 임새옥이 푸른 갖옷만 입고 머리도 빗지 않은 채 머리를 내밀었다.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지.”
찾아온 사람이 아원인 걸 보고는 금세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오라고 말하자, 아원이 퉁명스럽게 그녀를 훑어보았다.
“지금 모습 보니까 쫓겨난 여인 같긴 하네요. 개털옷까지 입는 걸 보면요.”
이 집은 작은 집채 둘뿐이고, 마당도 두 걸음이면 끝이었다. 임새옥은 문을 닫고 폴짝폴짝, 몇 걸음 만에 방으로 들어갔다. 방엔 탁자 하나 침상 하나뿐이고, 바닥엔 화로와 까먹고 남긴 해바라기 씨껍질이 가득했다.
“그러게 말이야. 너무 급하게 나와서, 옷 챙기는 것도 잊었네. 눈 올 때쯤 만든 담비 갖옷은 아직 입어 보지도 않았는데. 다음에 가지고 와줘.”
임새옥은 화로 곁에 앉아서 해바라기 씨를 움켜쥐고 까먹었고, 아원은 손에 든 물건을 탁자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이런 것들을 사 오라고 하다니, 정말로 여기에서 새해를 맞을 거예요?”
“응.”
임새옥이 입을 오물거리며 해바라기 씨를 톡 뱉는데 아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난리 부렸으면 됐지, 대체 언제 돌아갈 생각인데요?”
“음.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네가 잘 지켜보고 있어 줘. 어머님은 아직 누워계셔? 그 여인은 제 어미 데리고 갔어?”
그 말이 나오자 아원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살이 떨렸다. 아원이 심 부인 장씨 곁에 있은 것이 이미 4, 5년, 장씨가 지아비를 혼낼 때 대부분 사람은 내치지만, 측근 시녀인 그녀는 모든 과정을 봐왔다. 그래서 내택에서 일어나는 전쟁으로 놀라서 안색이 변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나운 여인이 발광하는 방법이 이렇게 가지가지일 줄 누가 알았겠나.
아원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따지고 보면, 관인을 오해하신 거예요. 부인 말씀처럼 부인이 고향으로 가자마자 새로운 사람을 들인 게 아니에요. 부인이 집 나간 다음에 노부인이 풍한이 걸리셔서 며칠 누워 계셨어요. 관인도 며칠 공무로 바빴고, 또 화원 때문에 백방으로 애를 쓰셨거든요. 저 혼자 바빠서 어쩔 줄 모르는 걸 보시고, 노부인에게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내셨어요. 노부인은 처음엔 놀라서 화를 내셨죠. 울면서 관인을 때리셨어요. 다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고. 관인이 침상 앞에서 하룻밤 무릎을 꿇고 계시니까, 방가가 겁을 먹고 그 사람에게 달려가 알린 거예요. 그 사람이 제 어미를 데리고 찾아왔죠. 들어와서도 말은 안 하고, 마당에 무릎 꿇고 울기만 하더라고요. 노부인 성격을 모르세요? 남이 우는 걸 제일 못 보는 분이잖아요. 말로는 밉다 하면서도 사실은 그리웠던 거죠. 그 사람 어미가 그런 꼴이 된 걸 보고는, 몇 마디 못 하고 두 사람보다 더 펑펑 우셨어요. 그러니까 어찌 됐겠어요. 내 말 들으시고, 원망하지 마세요. 사람은 누구나 옛날을 그리워하잖아요. 게다가 저도 좀 지켜봤는데, 그 여인이 속셈을 조금 부리는 것 같긴 한데, 노부인과 관인이 어디 그런 걸 모를 분이세요? 절대로 법도를 어지럽히고 부인을 누르게 두진 않으실 거예요. 부인이 그날 돌아오신다는 걸 알고 진작 준비하고 한상 가득 차려놨는데, 아이코야, 오시자마자 뒤집고, 험한 말을 그렇게나 해댔으니, 노부인이 아니라 저까지도 부인을 내쫓고 싶던걸요? 부인이 그렇게 체면을 생각해주지 않는데, 남이라고 부인 체면 생각해주겠어요? 한 번 나가서 물어보세요, 온 성에서 부인이 한 짓을 다 알고 있을 거예요.”
단숨에 줄줄 말하고 난 아원은 임새옥이 해바라기 씨를 내려놓은 걸 발견했다. 빗을 들고 머리카락을 빗다가, 뭘 봤는지 머리카락 몇 가닥을 들고 넋을 놓고 있었다. 자기가 한 말을 한마디도 듣지 않은 것 같은 모습에 화가 나서 아이고, 하고 외치며 휙 돌아섰다.
임새옥이 다급하게 붙잡으며 웃어 보였다.
“들었어, 들었어. 내가 잘못했어. 아랫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었어. 시어머님 체면을 엉망으로 만들었잖아. 우리 아원, 이랑이 지금 휴가로 집에 있으니까, 나 대신 잘 지켜봐 줘. 분명 그 여인을 만나러 갈 거야.”
그녀는 뿌듯한 듯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여인, 나 때문에 놀라 자빠졌을 거야. 숨도 제대로 못 쉬던걸? 이랑이 집에 없을 때 와서 알려줘. 집에 한 번 들를게.”
아원은 조금 기분이 풀린 얼굴로 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라 마셨다.
“그래야죠. 제가 그동안 본 바로는, 부인과 노부인이 입씨름도 하고 싸우기도 해도 가까우셨잖아요. 노부인은 말로는 엄격하게 하셔도, 속으로는 매우 아끼시고요. 부인이 먼저 잘못했다고 하시면 끝날 거예요.”
임새옥은 웃기만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새카만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었다.
“아원, 정말 고마워. 네 집이 없었다면, 불효를 저지른 이 유가 며느리는 거리를 떠돌았을 거야. 이렇게 사람을 피해서 지낼 곳이 없었겠지. 어떻게 이렇게 편하게 살았겠어.”
아원은 마음이 시려서 뭐라고 말하고 싶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서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저 아원은 어찌 됐든 여기서 태어난 사람인데, 혼인할 만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으면 데릴사위 들일 본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죠. 그래야 나중에 부인처럼 말싸움 좀 했다고 쫓겨나진 않을 거 아니에요.”
임새옥은 싱긋 웃으며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흔들었다.
“누가 복 받아서 아원과 혼인할지 모르겠네. 내일 당장 아원의 희주를 마시고 싶어서 죽겠어.”
아원은 콧방귀 뀌고는 임새옥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던 말을 되새기면서 돌아가서 기회를 보겠다고 하며 일어섰다. 임새옥이 배웅하고 바로 문을 잠그는데 아원이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부인, 슬퍼하지 말아요. 화가 풀리면 관인이 분명 부인을 만나러 올 거예요. 두 분은 정식으로 혼인한 부부잖아요. 한평생은 길어요. 틀어질 때도 있는 거죠. 그래도 관인이 부인을 많이 걱정하세요. 그러니까 부인이 출타하실 땐 같이 가라고 절 닦달하시죠. 자고로, 강에 배가 많다고 해도 각자 갈 길이 있으니 서로 방해가 되진 않는다고 하잖아요. 사람이 많다고 해될 게 뭐가 있겠어요. 빈곤한 집 말고, 어느 사내가 한 사람을 지키며 살아가요. 그러니까 이런 일로 슬퍼하고 그러면 안 돼요.”
아원은 한참 이야기해놓고, 안에서 기척이 없자 입을 다물고 돌아섰다. 임새옥이 문에 기댄 채 입을 가리고 목이 따갑도록 울고 있는 것도 모르고.
이랑은 몰라. 아원도 몰라. 이곳에는 알아줄 사람이 없어. 유일하게 아는 나는 냉가슴 앓다가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겠지.
다음 날, 임새옥은 해가 중천에 뜨고서야 일어났다. 아원은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다가 들어와서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임새옥이 길게 하품하면서 옷을 입었다.
“1년 동안 힘들게 살다가 드디어 며칠 편하게 지내는 거잖아. 우리 아원, 잔소리 좀 그만 해.”
“노부인 말씀을 들어보니, 부인도 <여계>를 배우셨던데, 왜 ‘부용(婦容: 아녀자의 네 가지 도리 중 부녀자의 단정하고 유순한 용모를 이르는 말)’은 모르세요.”
아원은 가지고 온 난봉천화(鸞鳳穿花) 나포(羅袍: 무릎을 덮는 길이의 겉옷)와 대홍색 금지녹엽 치마를 꺼내서 입혀주며 말을 이었다.
“처음에 만났을 때부터 부인의 치장이 마음에 안 들었어요. 하물며 사내인 관인은 어떻겠어요? 그날 그 사람이 뭘 입었는지 보셨죠? 어떻게 치장했는지 보셨죠?”
임새옥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원이 머리를 빗겨주고 장식을 꽂아주는 대로 가만히 있다가 문득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했다.
“애틋할 땐 뭘 해도 다 좋고, 미워할 땐 뭘 해도 부족한 거지.”
아원은 열중해서 머리를 빗기느라 듣지 못하고 분을 꺼내 얼굴에 고루 발라주고는 서둘러 데리고 나갔다.
“관인은 동료들과 매화 구경 가셨어요. 금방 돌아오진 않으실 거예요. 어서 가세요. 노부인은 오늘은 꽤 나아지셔서 일어나셨어요.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해서 기분 좋게 해드렸다고요. 아무리 그래도 스무사흘엔 돌아가서 다 함께 지내야죠.”
그녀는 문밖에서 기다리는 마차에 임새옥을 떠밀 듯 태우고는 길을 재촉했다. 마부는 급하게 말을 몰다가 모퉁이에서 하마터면 다른 마차와 부딪칠 뻔했다. 서로 욕 몇 마디 하고는 그쪽도 갈 길이 바쁜 듯 빠르게 가버렸다.
아원은 창밖을 내다보다가, 흔들리는 마차 휘장 틈새로 마차 안을 보았다. 멱리를 쓰고 앉아 있던 여인도 마침 그쪽을 보았는데, 아원은 본 적 있는 사람 같아서 멈칫했다. 하지만 마차가 스쳐지나간 후 바로 잊어버렸다.
“부인!”
대문 앞에 울상을 하고 쭈그리고 있던 영아가 마차에서 내리는 임새옥을 보고 울음을 터트리며 다가가 손을 잡았다.
“드디어 돌아오셨네요. 가더라도 절 데리고 가세요. 혼자 무서워요.”
임새옥은 웃음이 날 것 같았고, 아원은 영아의 손등을 내리치며 혀를 찼다.
“대낮부터 무슨 불길한 말이야. 가긴 뭘 가. 돌아오신 거 안 보여? 노부인은? 왜 곁에 있지 않고 나와 있는 거야!”
영아가 얼굴을 찌푸리면서 두 사람과 안으로 들어가며 대답했다.
“얼마나 욕을 해대시는지, 괜히 눈에 띄어 혼날까 봐 나왔어.”
그런 이야기를 하며 계단을 오르는데, 유씨가 안에서 탁자를 내리치며 영아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어디로 간 것이냐! 아원, 그 망할 계집애, 일도 안 하고 어딜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건지! 양심 없는 며느리에게나 가볼 것이지. 내가 죽어야 돌아온다더냐!”
임새옥이 웃으며 휘장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 며칠 못 봤다고 그렇게 제가 보고 싶으세요?”
그녀가 갑자기 나타날 줄 몰랐던 유씨는 꿈인가 싶어서 무심결에 눈을 비볐다. 유씨의 모습에 임새옥은 코가 찡해져서 후다닥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머니, 저예요. 저 돌아왔어요.”
유씨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로 얼굴을 구기고 그녀를 밀어냈다.
“이게 누구냐. 뉘시길래 대낮부터 우리 집 대문으로 들어온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눈물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임새옥도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조아리자, 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곁에 있던 아원과 영아 모두 마음이 아팠다.
유씨는 그제야 마음이 풀려서 돌아보다가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임새옥의 모습에 감정을 억누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얘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가 모를까. 평소에 내가 늘 뭐라고 하긴 해도, 다 널 아껴서 그런 것 아니냐. 뭐든 오냐오냐할 순 없지 않아. 우리 여인네는 지켜야 할 법도가 수천수만이다. 하나라도 잘못되면 집안이 잘못된다. 널 아끼지 않으면 상관하겠느냐? 허튼짓하도록 내버려 두다가 꼬투리 잡아서 쫓아버리면 되지.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할 수 있겠니. 세상 사람들은 오히려 널 욕할 것이다.
네가 속이 좁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좁으면 안 된다. 자고이래 이런 법도는 없다. 첩을 많이 들인대도 당연히 네가 대낭자가 될 터이고, 사내가 아무리 이해타산을 따진다고 해도 근면하고 착실한 처를 내쫓지 못한다. 하물며 이랑은 마음으로 널 존중하고 은애한다. 네가 근심할까 봐 시시각각 걱정하지 않니.
내가 일부러 너희 부부 사이에 방해꾼을 들이려는 게 아니다. 유가는 몇 대 동안 후손이 적어 실로 어쩔 수가 없지 않으냐. 너희 대에서 후손을 많이 보길 바라는 것이야. 이랑이 널 어찌 대하느냐. 가슴에 물어보아라. 그 여인들이 필요 없다고 하니,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술 마시지 말라고 하니, 한 잔도 입에 대지 않았어. 네가 농사짓겠다고 하니, 동료들이 비웃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밭에 보냈다. 네가 조금이라도 울적해 보이면 걱정해서 이것저것 살피고 다닌다. 네가 고향이 그리울까 봐, 집에 화원을 만들었다. 널 위한 화원을 만들려고, 다른 이가 선물한 갖옷도 다 팔았더라. 추워서 병아리처럼 종종대며 돌아와서는 잃어버렸다고 날 속이지 무어냐.
그날 네가 눈을 치켜뜨며 새 사람을 들이려고 옛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거냐고 했지? 아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생각해 보아라. 그 말이 얼마나 이랑의 마음을 상하게 할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으냐? 내가 밖에 나갈 일이 없어도, 바깥이 얼마나 방탕한 세상인지 안다. 또 생각해 보아라. 우리 이랑이 언제 밖에서 묵느라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있더냐? 지금 이랑이 여인 하나 때문에 입을 연 것이, 어디 미색을 탐해서 그런 것이더냐? 그 송 낭자는 어릴 때부터 그 아이와 함께 자란 사람이다. 솔직히 말하마, 그 송 낭자도 어릴 때 법도를 모르는 아이였다. 철이 들 때부터 우리 이랑과 함께 놀았어. 겉으로는 사나워도 이랑을 가장 감쌌다. 이랑은 어릴 때 몸이 안 좋아서, 종종 가문의 아이들에게 맞았다. 옥루가 시녀를 데리고 그 아이들을 혼내주었어. 아무리 나중에 우리 집에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대도, 우리 이랑은 어릴 때 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더라.
우리 이랑이 속 시커멓고 냉혹한 사람이면 좋겠느냐? 옥루에게도 이리 정 깊고 의리가 있는데, 너희는 결발 부부 아니냐. 이랑이 네게 무정무의 하겠느냐? 네가 눈썹을 치켜뜨고 눈이 시뻘게져서 그런 말을 하면, 이랑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생각해 보았느냐?”
유씨가 울면서 하는 말에 임새옥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아원과 영아까지 울음을 터트렸다. 온 방에 다른 소리 하나 없이 우는 소리만 가득했다. 유씨는 임새옥이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데다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고 나니 마음이 훨씬 진정되어 그녀 손을 잡았다.
“걱정할 것 없다.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도 널 서럽게 하지 못한다. 게다가 송 낭자는 공연히 신경 건드릴 사람이 아니다. 이랑이 돌아오거든, 이랑 앞에서 이야기하마. 앞으로 조금이라도 행사가 불손하거나, 아가 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매파를 불러 팔아 치울 거다. 절대로 네가 분을 참고 살아야 할 일은 없다.”
유씨가 임새옥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임새옥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나서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조화, 어머니의 진심에 감사하며 절 올립니다.”
그 말에 유씨는 더 기분이 좋아져서 “네가 똑똑한 사람인 걸 안다.”고 말하면서 어서 부인을 일으키라고 영아에게 지시했다. 그런데 임새옥이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조화, 바보와 혼인할 뻔한 조화를 위기에서 구해준 유가에 감사하며 두 번째 절 올립니다.”
유씨는 얼떨떨해지고 어쩐지 불안해졌다. 입을 열기도 전에 임새옥이 세 번째로 고개를 조아렸다.
“어머니, 조화, 이랑의 진심에 감사하며 세 번째 절 올립니다.”
“아가, 지금 이게 무슨 뜻이냐?”
유씨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임새옥은 옷을 털며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어머니, 며느리가 떠날 수 있도록 휴서(休書) 한 통 써주세요.”
그 말에, 방 안에 있는 세 사람 모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조금 전에 다 잘 이야기한 것 아니었나? 왜 갑자기, 용서를 구하는 게 아니라 떠나는 걸 허락해달라고 하는 거지?
“결국 옥루를 들이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유소호가 별안간 휘장을 젖히며 들어왔다. 얼굴은 시퍼렇고, 두 주먹을 꾹 쥔 데다가 눈에 핏발이 가득했다. 갑자기 그가 나타나자, 임새옥은 의아해하다가 안색이 부자연스러운 아원을 힐끔 보며 웃었다.
“아원, 날 생각해서 속인 거 알아.”
“말해 봐. 옥루를 들이지 않겠다고 해야, 그만둘 건가? 그래?”
유소호가 한 걸음 더 임새옥 쪽으로 다가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임새옥은 그를 바라봤다. 잠을 제대로 못 잔 것이 분명한 초췌한 얼굴을 보자, 못난 눈물이 뚝 흘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자, 거친 수염이 손끝에 느껴졌다.
“이랑, 옥루가 들어오든 들어오지 않든, 아무런 상관없어요. 이랑, 이제, 우리의 인연은 끝났어요.”
유가의 작은 마당에서 일어난 가슴 떨리도록 놀라운 소용돌이는 잠시 제쳐두고, 임새옥과 부딪칠 뻔한 마차 이야기를 해보자.
살저항을 빠져나온 마차는 모퉁이를 돌아 강가의 거리에 당도했다. 거리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간 마차는 곧 성 밖에 있는 영두항에 도착했다.
“부인,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뛰어내려 나지막이 고하자, 마차 휘장이 열리더니 백능 웃옷에 금빛 배자를 걸친 여인이 내렸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맑은 눈빛, 머리에 자잘한 꽃장식을 꽂은 여인이 내리자, 마부는 자리를 피했다.
“월낭, 자네가 들어가 보고, 다른 사람이 없으면 불러서 나오게.”
마차 안에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임새옥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월낭이라고 불린 이 여인이 옛날에 그녀가 매를 맞고 교훈을 얻은 일을 일으킨 이용 가문의 시첩 중 하나임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 마차 안에 있는 사람의 지시를 들은 월낭은 좁은 골목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유심히 살펴본 끝에, 집을 찾아내고 다가가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누구냐고 묻는 여인 목소리가 들렸다.
“송 낭자, 일거리가 있는데, 받겠나?”
월낭이 목소리 높여 묻자,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늘씬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월낭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언니셨군요.”
월낭이 마당 안을 훑어봤더니 눈먼 노파가 앉아서 볕을 쬐고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 좀 하지.”
송옥루는 웃어 보이고는 돌아서 눈먼 어미에게 말했다.
“어머니, 유 대낭 집에서 옷 지어달라고 부르네요.”
송 대낭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얼른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송옥루는 안으로 들어가 낡은 겉옷을 송 대낭의 무릎에 걸쳐 주었다.
“어머니, 아궁이에 밥 있어요. 배고프면 드세요. 다른 건 건드리지 말고 그냥 두세요. 돌아와서 내가 치울게요. 손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요.”
송 대낭이 알았다고 하자, 송옥루는 밖으로 나가 문을 잠그고 월낭을 바라봤다.
“언니, 앞장서세요.”
월낭은 줄곧 한쪽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르지도 둥글지도 않은 얼굴, 보기 좋은 몸매, 이마 위 주근깨가 자연스러운 맵시를 더 해주었다. 치마를 입고 느릿느릿 걷는 것이 걸음마다 꽃이 피는 듯하고, 웃고 찌푸리는 모든 동작이 아름다웠다. 월낭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그날 연회에서 본 모습과는 영 딴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상금도 주시고, 감사해요. 제 월금 소리가 언니의 귀를 더럽히진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생긋 웃으며 말하던 송옥루는 골목 앞에 조용히 서 있는 마차를 보고 그 사람이 찾아온 속내를 대충 짐작했다.
“송 낭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아름다운 금 소리는 처음이었는데.”
월낭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은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했다. 휘장이 걷히고, 송옥루는 마차 안에 앉은 여인이 자기를 향해 웃는 걸 보았다.
금사취엽관(金絲翠葉冠), 백능 관주(寬綢) 겹옷, 침향색 비단 학창의, 대홍색 궁금(宮錦: 궁중에서 제작하거나 궁에서 입는 형식을 모방하여 제작한 비단) 치마를 입은, 얼굴이 온화하고 상냥한 여인이었다.
평소에 사람을 자주 만나는 송옥루는 이 사람이 바로 여러 규중에서 보살이라고 부르는 경성에서 이름난 여인, 바람기 많은 등사랑 이용의 적처, 동씨 연낭이라는 걸 물론 알고 있었다.
“부인을 뵙습니다!”
송옥루가 후다닥 몸을 굽히고 예를 갖췄다. 동연낭은 월낭에게 어서 일으키라고 지시하고는 마차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마차가 곧장 성 안으로 향하면서, 마차 안의 두 사람은 한담을 나누며 내심 서로를 살폈다.
동연낭은 송옥루를 보며 ‘이러니 유문장이 집에 들이려고 난리지, 역시나 간드러지게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사내는 둘째치고, 여인이 봐도 몹시 마음에 들었다.
송옥루도 동연낭을 속으로 가늠했다.
‘관인이 어째서 이런 사람을 두고, 전혀 눈에 띄는 점 하나 없는 그 유가 며느리 조씨를 아득바득 원하는 건지 모르겠네. 역시 사내 속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지아비를 하늘처럼 떠받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 이용이 좋아하는 건 뭐든 따르며 오냐오냐하는 바람에 집안 첩들이 꼴이 말이 아니라더니, 오늘 보니 역시 그럴 만한 인물이군.’
송옥루는 동연낭, 월낭과 함께 어느 화원 앞에서 내렸다. 두건을 쓰고 자색 장삼을 입고 깨끗한 신발을 신은 사환 두 사람이 냉큼 나와 맞이했다. 월낭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누군가 나와서 화원 뒤쪽으로 안내했다. 송옥루는 평소에 자주 연회에 연주하러 가지만, 이렇게 좋은 화원은 처음이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방택 화원 본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일반적인 개인 화원이 아닌, 화원 이름을 딴 호화로운 주루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더니, 대청 양쪽으로 회랑과 회랑이 연이어 있는 가운데 작은 각루(閣樓)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꽃, 대나무가 걸린 창마다 휘장이 드리워져 있고, 술 냄새는 나지 않고 시끄러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송 낭자, 편하게 앉게.”
월낭이 청각(廳閣)으로 들어가서 말했지만, 송옥루는 시선을 거두고 감사 인사를 할 뿐 앉지 않고 동연낭을 바라봤다. 동연낭은 빙긋이 웃으며 역시 영리한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휘장이 흔들리더니, 자색 양모 학창의를 입은 이용이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늦었군. 송 낭자 오래 기다리게 했네.”
송옥루는 서둘러 예를 올렸고, 동연낭은 월낭을 데리고 물러가며 문을 닫았다. 이용은 겉옷을 벗고 일상복 차림으로 자리에 앉았다. 송옥루에게 앉으라고 손짓하자 그녀는 한 번 사양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대낭자, 축하하오. 며칠이면 결정될 것 같더군.”
이용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치켜들고 단숨에 잔을 비웠다. 송옥루는 눈을 살짝 치켜들 뿐, 이용을 직시하지 못하고 살짝 웃어 보였다.
“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유가에서 제게 큰 은혜를 베풀어줬는데, 제가 어찌 그 부부가 마음이 멀어지는 걸 보고만 있겠어요. 옥루는 이제 천민입니다. 명성이 더 나빠진들 얼마나 더 나빠지겠어요. 절대로 부인의 명성을 더럽힐 수는 없지요. 문안현에 있는 친척을 찾았고, 며칠 있으면 어머니를 모시고 갈 거예요. 오늘도 대인이 절 좋게 봐주신 것에 감사 인사하려고 온 거예요.”
송옥루가 술잔을 들어 보이고는 한입에 비우자, 이용이 하하 웃었다.
“그렇다면 더 축하해야겠군, 부인.”
송옥루는 ‘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양하는 대신, “대인, 저를 놀리시나요.”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빙긋이 웃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대인께 부탁한 일은 어떻게 되어가는지요.”
이용이 웃으며 술 한잔을 더 마시고는 소매에서 문서 하나를 꺼냈다.
“진작 끝냈네. 부인께 드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송옥루는 환하게 웃으면서 일어서더니 문서를 받았다. 펼쳐서 유심히 살펴보니, 양민 대명부 송씨 일족의 관리 가문 신분을 회복한다고 그 문서에 똑똑히 쓰여 있었다. 순간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리고 이용에게 절을 두 번 올렸고, 이용은 예를 받고서 웃으며 말했다.
“부인의 가문은 해박한 학자 집안이지. 지방에 있던 저택도 모두 돌려놓았네. 대명부에 있는 친우에게 부탁해서 깨끗이 치워두었으니, 친척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면 되네.”
송옥루가 자세를 바로 하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대인의 큰 은혜에 감사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젖혀 술잔을 비웠다. 두 잔을 마시고도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에 이용이 손뼉을 치며 좋다고 외치고 자기도 마셨다.
“송 낭자의 주량이 좋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과연 그렇군. 오늘은 그만 마시고, 유 대인과 혼례를 치를 때 많이 마시면 되겠군.”
송옥루는 웃으며 고개를 숙인 채 감사 인사를 하고는 눈을 들어 이용을 바라봤다.
“그럼 소인도 이 자리에서 대인께서 뜻을 이루길 삼가 축원하겠습니다.”
또 한잔 비우는 그녀의 모습에 이용이 껄껄 웃었다.
“통쾌한 사람이군. 유 대인이 조금 부러워지는걸.”
송옥루가 입을 가리고 빙긋 웃으며 요염한 눈빛으로 이용을 바라봤다.
“다 젊은 날의 인연이지요. 소인도 대인과 인연이 없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래놓고 이용이 웃기만 하자 바로 덧붙였다.
“저희 부인은 성격이 꽤 셉니다. 대인, 조심하셔요.”
이용이 싱긋 웃었다.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내가 제일 잘 알지. 여인네들의 생각이야,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걸세. 송 낭자, 좋은 미래가 눈앞에 닥쳤지만 너무 급하게 굴진 말게.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먼저 무언가를 내줘야 한다는 말이 병법에 있네. 송 낭자, 물러서는 것이야말로 전진하는 것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 그 댁 대인은 심성이 아이 같으니 따르기만 하고 꺾지 말게.”
이용은 거기까지 말하고는 손에 든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술이 몇 방울 튀자 눈을 찌푸렸다.
송옥루가 일어서서 절을 올렸다.
“대인, 안심하시지요. 사내의 마음이라면, 아마 그것도 이 옥루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대인의 살찐 거위도 분명 손에 들어올 겁니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힐끔 보고는 빙그레 웃었다.
“대인, 드실 때 부디 조심하세요. 괜히 다치고 저를 탓하시면 안 됩니다.”
이용이 하하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손뼉을 치자, 옆 방에 있던 동연낭이 월낭을 데리고 들어왔다. 송옥루가 감사 인사를 한 다음, 세 사람은 왔을 때처럼 천천히 돌아갔다.
이용은 남아서 술 몇 잔을 더 마신 뒤에 얼굴에 봄바람을 안고서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그는 사환이 끌고 온 말을 타고 변하 강가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곧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시기인지라, 공기에 향촉과 폭죽 냄새가 그득했다.
천막으로 된 다관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두건을 두른 차 어멈 앞에 잔뜩 모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차 어멈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는 침을 튀기며 이야기했다.
“……조씨가 하는 말을 듣고, 유씨가 곧바로 눈을 까뒤집고 혼절했다지 뭐요. 소관인이 얼마나 효자인데, 곧바로 조씨를 때렸지. 여러분, 세상 살면서 아내를 안 때리는 사내도 있소? 그런데 그 조씨는 시골 출신이라 튼튼하기 짝이 없지. 소관인이 사내라고 해도, 결국 글공부한 사람 아니요. 얼마 때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조씨에게 억눌려서 두 주먹 맞았다지 뭐요. 시녀들이 뜯어말려도 떼어내지 못했대나. 다들 모여서 구경했는데, 나는 뛰는 게 느려서 들어가지도 못했다니까…….”
다들 우하하 웃고, 또 욕을 퍼부었다. 말을 세우고 이야기를 듣던 이용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싸움을 해도 지지 않다니, 성격 참 대단하군……. 역시 재미있어.
이용은 더 듣지 않고 말을 몰아 서두르는데, 인파 속에 푸른 비단옷을 입고 귀마개를 쓴 소금남을 발견했다. 얼마나 이야기에 집중하는지, 자기를 못 본 것 같아서 이용은 말에서 뛰어내려 다가가서 어깨를 두드렸다.
“어째서 아직 경성에 있습니까?”
소금남이 움찔하는데, 차 어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조씨가 소관인 모자를 때리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는, 궤짝을 타고 올라서 재산을 나눠줘야 나간다고 고함쳤대요. 여러분, 여기에 경성 밖 어전 때문에 소관인이 온 재산을 쏟아부은 걸 모르는 사람이 있소? 연회도 못 열 형편 아니냐고요. 그러니 없는 집에서도 거들떠보지 않는 돼지고기를 사람에게 접대했지. 다행히 소관인이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걸 황제께서 알아주시고, 조정 대신들도 근검절약하는 소관인을 존경하고 감탄해서 상주서를 올린 바람에 황제께서 상도 내리신 것 아니에요. 조씨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빈손으로 유가 대문을 밟아놓고, 인제 와서 재산을 나눠달라니, 얼마나 독한 여인인지 알겠네요.”
사람들이 웅성웅성 떠들어댔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가난한 집 사내라서 기껏해야 집에서 어머니 욕하고 아내를 때리는 사람들인데, 이토록 사나운 여인네가 있다는 소리를 듣자 마치 자기가 모욕당한 것처럼 하나같이 화를 내며 쌍욕을 내뱉었다.
소금남은 늘어뜨린 양손을 움켜쥐었다. 얼마나 힘껏 쥐었는지,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흩어지라고 고함치려고 하는데, 별안간 누가 어깨를 두드리자 분노한 얼굴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용은 그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자형, 왜 그럽니까?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
이용인 걸 알아본 소금남은 감정을 억누르고 그 자리를 벗어났고, 이용이 그를 재빨리 따라갔다.
“며칠 전에 강녕으로 돌아간 거 아닙니까? 왜 아직 여기에 있습니까?”
소금남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무언가 떠올리고는 물었다.
“이정 대인이 아직 언사(言事: 상주서)를 관할하시지?”
이용은 소금남이 왜 묻는 건지 몰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불효를 저질러서 집현원 교리에서 탄핵되었다가 겨우 돌아왔지요. 말은 얼마나 날카롭게 하는지. 내 보기에 다시 조만간 좌천될 것입니다. 자형, 이정과 아는 사이 아닙니까. 만나러 가려고요?”
소금남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유문장이 이제 막 관리가 되어놓고 첩을 총애하고 처를 구박하다니. 이걸 가만히 두면 세상이 뭐가 돼. 어사인 등 대인이 유문장 그자와 친분이 두터우니 분명 탄핵 상소를 올리지 않겠지. 하지만 이 대인은 강직한 사람이니까…….”
사실 소금남은 이정이 왕안석의 사람이라 진작 유소호를 거슬려 하고 있으니 이게 기회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정은 분명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니, 그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싶었다.
그 아이도 참. 어쩌면 성격이 혜낭과 그리 비슷한지.
소금남은 걱정 가득한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한숨만 나왔다.
“대관인, 어찌 오히려 유씨 집안 일에 더 신경을 많이 쓰십니다.”
이용의 미소가 서서히 흐려지더니, 소매에서 금박 부채를 꺼내 몸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바로 사람을 보내 전가아를 데려와야겠군요.”
소금남은 깜짝 놀라 눈을 들어 이용을 바라봤다. 이용이 서늘한 눈빛을 감추며 웃는 듯 마는 듯 입을 열었다.
“3년입니다. 전가아를 그 빌어먹을 곳에 홀로 남겨두고 해를 맞이하게 한 것이 말입니다. 아무래도 자형은 그 아이를 보살필 생각이 없는 듯하군요. 그렇다면 내가 자형 집안에 말씀 올리고 전가아를 우리 이씨 가문 양자로 들이는 게 낫겠습니다.”
이용이 부채를 촤르륵 펼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자형이 걱정을 덜고 다른 사람을 신경 쓸 여유가 생기겠지요.”
소금남은 찬물이 머리에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이 흐르는 느낌에 한참 손을 파르르 떨었다. 뭐라고 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이용이 말을 타고 멀어지는 걸 그저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변하에서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폭죽 냄새와 함께 소금남 앞을 맴돌더니, 그의 몸에 마지막으로 남은 열기를 훑고 지나갔다.
유소호 일가는 고관대작들이 사는 번화한 거리와는 뚝 떨어져 있지만, 유가의 작은 뜰에서 벌어진 일은 반나절 만에 온 경성에 알려지고 집집의 깊은 내원까지 파고들었다.
유가 며느리 조씨가 첩을 들이려는 지아비를 휴서로 협박하고, 시어머니를 거역하고, 지아비를 때리고, 거기에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재산을 빼앗았다는 행실은 심괄 부인 장씨의 행실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예전에 장씨가 수시로 심괄을 때리고, 전처의 자식까지 쫓아낸 일로 경성이 떠들썩했었다. 하지만 장씨는 막강한 친정이 뒷배로 있는 데다가 부부가 싸운 이유도 하나같이 사소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일개 촌부가 이렇게 행동하다니! 게다가 지아비가 첩을 들이는 걸 거부하는 건 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닌가.
한순간 잠잠하던 경성이 끓는 물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주루, 다루, 어느 곳 하나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유가 이야기를 담론하지 않으면 시를 읽고 글공부한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듯이 말이다.
이번 여론은 명백하게 세 파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사대부, 조정에 출사하지 않은 문인 위주로 작금의 세태를 한탄하는 사람들이었다. 사회의 풍조가 날로 기울어서 세상에 이런 악처가 나타났다는 논점이었다. 관리 부인들을 선두로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뒤에서는 임새옥을 지지하는 정실부인 파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번째는 당연히 시첩, 시녀가 선두에 나서 송옥루를 지지하는 첩실 파였다.
그 중간에는 주루에서 관리들을 접대하는 사람들, 청루에서 접대하는 사람들, 그리고 저잣거리의 백성 등등 갖가지 인물이 뒤섞인 혼합파도 있었다.
마침 다들 휴가 시기라서 다행이었지, 조당에서도 이 일을 논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호사가 관리들은 명절 방문이라는 명목으로 다음날 곧바로 유가를 찾아갔다. 유소호가 정말로 조씨에게 맞았는지 확인하려고 찾아간 것인데, 유가 대문은 굳게 닫혀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간접적으로 소문을 증명한 셈이 되었다.
“예전에, 당 태종께서 재상 방현령(房玄齡)에게 첩을 내렸을 때, 방 부인이 받을 수 없다 하여 당 태종이 ‘질투하지 않고 사느니, 질투하고 죽겠다는 것인가’ 하고 방 부인을 협박한 일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식초인 척 독주를 만들어 방 부인을 자결하게 하셨지. 방 부인은 뜻을 깨닫고 식초를 받아 단숨에 마시고 자결했지. 이런 행실은 좋다고 할 수 없어도, 존경할 순 있지. 그런데 이 조씨는 자기를 희생해 제 결심을 표시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아비를 흠씬 패고 시어머니를 욕보이다니, 실로 잘한 것이 하나 없군.”
방건을 두른 하얀 수염이 난 문인들이 주루에서 술을 마시며 한탄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세미항에 숨어 있던 임새옥 역시 화로를 끼고 해바라기 씨를 까먹으며 앓는 소리로 한탄했다. 문신을 붙이고 들어오던 아원은 그런 임새옥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서 눈이 와 질척이는 땅바닥을 쾅쾅 굴렀다.
“이제야 걱정하시는 거예요? 행패 부리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요?”
임새옥이 비녀를 뽑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것참 이상하지. 십방촌 땅문서를 달라고 한 것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빨리 정리되어야 해가 가기 전에 새사람을 들일 거 아니야. 그런데 어머니가 기절할 줄 누가 알았어. 부축하러 가려는데, 이랑이 날 때리려 해서 주먹을 피한 것뿐인데, 혼자 넘어진 것이 밖에 그렇게 퍼졌잖아.”
임새옥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원은 그녀의 얼굴에서 후회하는 기색은 하나도 읽지 못했다. 오히려 능글맞은 웃음이라고나 할까.
“나는 이제 못 가니까 휴서는 다 썼는지, 아원이 가서 물어봐 줘야지 뭐.”
임새옥은 곁에 있는 차를 홀짝 비우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아원에게 말했다. 아원은 등을 돌리고 한참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불현듯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정말로 고개 숙이지 않으실 거예요?”
임새옥은 따끈따끈한 화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다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아원, 넌 몰라. 만약…….”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알았어요, 이런 식으로 나와서 대체 무슨 좋은 결과가 있는지, 두고 봐야겠네요!” 하고 한마디 남기고는 문을 쾅 닫고 사라졌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화로의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임새옥은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진짜 조화였다면 좋았을 텐데.”
밤이 찾아온 변경성은 낮보다 화려했다. 특히 마행가(馬行街)는 수십 리나 되는 긴 거리 곳곳에 상점이 가득했고, 그 가운데에 관리들의 저택도 섞여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길일이 가까운 시기라, 거리에는 놀러 나와 구경하며 새해에 쓸 물건을 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평소에 외출하지 않는 규중 귀부인들도 이때엔 집 밖으로 나와서 벗을 불러 짝을 지어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바람에 거리는 거마로 혼잡해서 사람이 걸음을 멈출 틈이 없었다.
주루에서 나온 소금남은 변복 차림의 이정이 말을 타고 돌아가는 걸 배웅하고는, 돌아서서 번잡한 거리로 들어가 인파를 지나 집으로 걸어갔다. 술을 마시고 바람을 맞자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마음은 훨씬 홀가분해졌다. 그 고집 센 여인에게 도움이 될 일을 뭐라도 했으니 말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자제들이 향당(香糖)을 물고 휘파람을 불고 떠들면서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거리에 걸린 밝은 등불이 거리 전체를 대낮처럼 환하게 비췄다. 등롱 가게 앞엔 신기한 꽃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소금남은 저도 모르게 그날, 어전에서 유소호가 돌아온 걸 본 그 여인의 얼굴에 떠오르던 미소가 떠올랐다. 여인의 얼굴 가득 감추지 못한 사랑이 흘러넘쳤었다. 그렇게나 그자를 사랑하던 여인이었다. 그런 그 여인이 지금 얼마나 마음을 다쳤을지 알아줄 사람이 있을까.
“비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주정뱅이가 인파에 밀려 부딪쳐오자 소금남은 정신을 차렸다. 남쪽으로 갈 배 준비가 끝났고, 내일 일찍 떠날 것이다. 그러면 새해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더는 전가아를 혼자 집에 둘 수 없다는 생각에 전가아를 떠올리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소금남이 길을 막은 취객을 밀어내고 피하려는데,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유소호인 걸 알아보고는 서둘러 붙잡았다. 얼굴이 벌겋고 몽롱한 눈으로 취해서 헛소리를 웅얼대는 유소호를 재빨리 끌어당기고 걸음을 서둘렀다. 번잡한 거리를 벗어나 집에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소호가 나무를 끌어안고 버티면서 세미항으로 갈 거라고 소리쳤다. 물어봐야겠다고, 어떻게 그런 무정한 말을 하는지 물어볼 거라고 외쳐대는 바람에 사람들이 모두 뒤돌아볼 지경이었다. 설득해도, 달래도 듣지 않자, 마침 이 일이 마음에 걸리던 소금남은 잠시 주저하다가 곧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 세미항으로 향했다.
세미항 주민은 대부분 노점판 상인이라 야시장에 돈 벌러 나간 후였다. 짧은 거리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불이 켜진 집은 단 한 집뿐이었다. 큰 등롱 두 개가 걸린 대문에 새로 붙인 위엄 넘치는 문신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
유소호가 문을 부술 기세로 머리로 박아대며 소리쳤다.
“문 열어! 문 열어! 똑똑히 이야기해! 내가 뭘 잘못했어!”
소금남은 사람들이 볼까 봐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안에서 기척이 없자, 유소호가 쉴 새 없이 문을 두드렸다. 그가 다시 고함치려 하자, 소금남이 할 수 없이 문 앞으로 다가가 소리쳤다.
“부인, 저, 소금남이 데리고 온 겁니다. 그냥 나와서 만나보시지요.”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나더니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방심한 사이 유소호가 앞으로 꼬꾸라지자 임새옥이 서둘러 부축했다. 소금남은 붉은 등롱 불빛 아래 그녀를 쳐다보았다. 새것이 아닌 대홍 대금 겹옷에 연노랑 치마를 입고 머리를 빗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안색은 평소와 같은 걸 보고 마음을 조금 놓으며 공수했다.
“술에 취해서 여기에 와야겠다고 하길래요.”
임새옥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대관인께 수고를 끼쳤네요.”
임새옥이 유소호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소금남은 따라 들어가고 싶지만 부적절한 것 같아서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주저하는 사이, 임새옥이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대관인, 들어와서 차 한잔 드셔요.”
소금남은 작디작은 마당을 보고 마음이 쓰렸다. 해를 등진 집이라 음산한 한기가 도는 곳에 낮은 집채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 안에서 주황빛 등불이 흘러나왔다. 임새옥이 취한 유소호를 낑낑대며 부축하는 걸 본 소금남은 참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다. 임새옥은 사양하지 않고 고맙다며 웃고는 돌아서서 문을 잠그고 재빨리 다가가 휘장을 젖혀주었다.
방 안에 옅은 향을 피워두어서 젖은 곰팡내가 심하진 않았다. 탁자에 사등 한 쌍이 놓여 있고, 바닥엔 화로를 지피고 있었다. 이불이 깔린 나무 침상이 작은 창가에 놓여 있고, 창엔 조금 낡은 휘장이 걸려 있었다.
임새옥이 침상을 정리한 후, 소금남이 취해서 잠든 유소호를 부축해 침상가로 다가갔다. 임새옥이 유소호의 옷깃을 풀어주는 사이, 소금남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 여인을 이렇게나 가까이 보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인의 새카만 머리카락이 흐르는 물처럼 몸 앞으로 쏟아졌다. 유소호를 부축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이 제 손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는 보드라운 피부가 닿는 느낌에 서둘러 피하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임새옥이 유소호의 겉옷을 벗긴 다음 소금남이 그를 침상에 눕혔다. 그녀는 허리를 숙이고 축축해진 그의 신을 벗겨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다.
유소호가 술에 취해 웅얼거리자, 임새옥이 토닥여주었다. 그녀는 유소호가 잠이 든 걸 보고 축축한 신을 화롯가에 가져다 말리면서 소금남에게 앉으라고 청했다.
“여긴 아무것도 없어요. 차도 거리에서 산 묵은 것이고요. 차라리 물을 드세요.”
임새옥이 손을 닦고 탁자에서 도자기 그릇을 꺼내 뜨거운 물을 따랐다. 소금남은 받아들고 화롯가 의자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에 오래 계실 겁니까?”
소금남이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임새옥은 허리를 숙이고 곁에 있는 접시에서 잘라놓은 만두를 들고 화롯가에 앉았다. 젓가락으로 만두를 꿰서 구우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마 봄까지는 있을 거예요. 운대가 마음 쓰여서요. 제철이 아닌 때에 심은 것이라서요. 봄이 중요한 시기예요. 비료를 추가로 얼마나 뿌릴지, 잘 관리해야 해요. 첫 물을 주고 난 다음에 떠나려고요.”
소금남은 그녀의 난해한 말을 듣는데 마음이 뭐라 말하지 못할 정도로 착잡해졌다. 물을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럴 거면서, 어째서 떠나려는 겁니까. 유 대인하고 잘 이야기해볼 것이지, 지금처럼…… 지금처럼…… 내려놓지 못하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봤다. 차분한 안색에 은근한 걱정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이 사내가 참으로 마음이 놓였다.
오래된 옛친구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불쑥 그런 말도 한 거겠지.
“말하면요?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는걸요.”
임새옥의 말이 끝난 후, 두 사람 모두 침묵했다. 갑자기 소금남이 탔다고 고함치자, 임새옥이 허둥대며 만두를 불에서 꺼냈다. 역시나 반쪽이 탄 걸 보고 웃음이 나왔다.
“대관인께 드리려던 건데.”
임새옥이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만두 반쪽을 소금남 눈앞에 흔들었다. 소금남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나서는 손을 내밀었다.
“그나마 먹을 순 있겠네요.”
바로 그때, 침상에 누운 유소호가 갑자기 콜록거리며 몸을 뒤척이더니 엎드린 채로 토하기 시작했다. 임새옥이 서둘러 침상 맡에 있던 놋쇠 대야를 들고 가서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소금남은 내심 한숨을 내쉬고는 물을 따라서 건넸다.
유소호가 토하고 나서 몽롱한 상태에서 물을 마시더니, 별안간 임새옥의 팔을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지? 그녀가 왜 그러는 거지?”
임새옥은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물이 절로 흘러서 서둘러 손으로 닦았다. 소금남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그건 그녀가 잘못한 거예요. 당신의 호의를 몰라주고, 복이 없어서 당신 곁에 있지 못해요……. 평생…….”
목소리가 목이 멘 듯 작아지다가 마지막엔 조용해졌다. 소금남은 주전자를 꽉 잡고서 돌아서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시큰해지는 코를 문질렀다.
“대관인, 저는 휴서만 안 받았지, 이미 유가에서 나온 몸이에요. 그러니 단둘이 있을 수 없어요. 미안하지만, 같이 있어 주세요.”
임새옥은 유소호가 편안하게 잠든 걸 지켜본 후, 머리카락을 단정히 가다듬고 소금남에게 다가와 예를 갖췄다. 소금남도 다급히 답례했다. 여인이 고개 숙여 오물을 치우고는 창을 열어 환기하며 향을 피웠다. 그렇게 한참 바삐 움직이다가 화로 맞은편에 앉더니 만두를 다시 들어 올리고 구웠다.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유 대인은 아무래도 아직 어려서 심지가 굳지 않은 면이 있겠지요. 지금은 관직에 올랐으니, 허튼짓은 못 합니다. 제가 이미……. 제가 듣자 하니 조정 대신 한 분이 탄핵 상주서를 올렸다더군요. 그러니 분명 마음을 바꿀 겁니다.”
소금남이 천천히 하는 말에 임새옥이 멈칫하고 눈살을 찌푸리다가 씁쓸해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처음부터 이 사람 탓이 아니에요. 그분도 저를 위해서 상주서를 올린 게 아닐 것이고요.”
왕안석이 조정을 떠났지만, 신법을 추진하겠다는 황제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안석이 키운 사람들이 여전히 조정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유소호처럼 분명한 반대파는 진작 그들의 눈엣가시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황제가 아끼는 데다가 정치엔 참여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일하니 못 본 체할 뿐. 조정에서 언관이 대단한 걸 임새옥도 알고 있었다. 황제는 법도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이라서 유소호처럼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는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그들 손에 놀아날지도 모른다.
이 여인이 내막을 확실히 파악한 듯 보이자, 소금남으로서는 뜻밖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여인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임새옥이 물었다.
“대관인, 어느 대인이 상소를 올린 건지 아시나요?”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소금남은 얼떨떨해졌다. 하지만 감추지 않고 말했다.
“집현원 교리, 이정 이 대인입니다. 강직한 사람이니, 아마 그분일 겁니다.”
임새옥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그 이정이구나. 원래라면 어사중승 자리에 올랐을, 왕안석이 아끼는 제자. 오대시안(烏臺詩案)을 직접 일으켜서 소동파를 죽기 전까지 몰고 갔던 이정.
(※오대시안: 이정, 서단 등이 소동파의 <호주사상표湖州謝上表>를 발췌한 문장과 그전에 지은 시구를 들어, 소동파가 황제를 비판했다고 비방한 사건)
임새옥은 근심 가득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이런 지경까지 되었군요. 집안일도 조정일이 되는 시대였다는 걸 깜빡했네요. 아아, 일이 커졌네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소금남은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무서워할 것 없습니다. 그냥 겁만 주는 거지, 첩을 들이려는 마음만 거두면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유 대인의 재능을 총애하는 관가께서 난처하게야 하시겠습니까.”
임새옥은 고개를 갸웃하고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삼키고는 한숨을 내쉬며 그러길 바란다고 중얼거렸다.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왕안석은 재상이고, 재상은 마음속에 배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넓다지만, 추종자들은 하나같이 속이 밴댕이 같은 사람이었다. 하물며 이정은 역사를 돌이켜 보면 언관과 어사를 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태생적으로 시빗거리를 찾아내는 재능을 갖췄을 것이다. 예전에 유소호가 낙양까지 달려가 사마 상공을 찾아뵌 일은 그야말로 보란 듯이 그들의 뺨을 때린 일이었다. 후에 일어나는 오대시안도 소동파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두들겨 맞은 것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예전에 이정의 모친이 세상을 떠난 후 상을 법도대로 치르지 않고 장례를 지낸 것을 풍자하는 시를 지은 것이 화근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유소호는 진작 이정 일당의 눈엣가시가 되었을 텐데, 지금 이런 기회가 생겼을 때 쉽게 놓아줄 리가 있을까. 죽을 때까지 가지고 놀려 들겠지 싶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와 유소호 둘 사이의 일인데, 조정 인사가 끼어들게 되었으니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임새옥이 기분이 좋지 않은 걸 소금남도 물론 알아챘다. 하지만 그저 유소호를 걱정해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젊은 부부가 다시 좋아질 기회가 있어 보여서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실망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말을 골라서 마음을 넓게 먹으라고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의 호의를 잘 아는 임새옥은 고마운 마음에 기운을 차리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활활 타는 화로를 지키면서 고소한 만두를 구워 먹었다. 때때로 울리는 폭죽 소리, 그리고 유소호가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긴긴 겨울밤을 즐거이 대화를 나누며 지새웠다.
유소호는 눈을 뜨기도 전에 골이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세상에! 술 먹고 취하는 게 이토록 괴로운 일이었구나.
신음하며 물을 찾는데, 소리를 내자마자 누군가 부축해서 따듯한 차를 입가에 대주었다. 찻물을 허겁지겁 삼켰더니 타는 듯한 목구멍이 조금 나아졌다. 눈을 떠보니, 안색이 조금 초췌한 임새옥이 앞에 있었다. 순간 너무 놀라고 기뻐서 낭자, 하고 부르려다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낯으로 여기 왔어.”
그 말을 하자마자, 임새옥이 씨익 웃더니 손을 휙 놓았다. 미처 방어하지 못한 유소호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는 그제야 방 안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침상에서 튀어 내려왔다. 그랬더니 소금남이 한쪽에 서서 자기를 보고 있었다. 더 경악하고 얼떨떨해져서, 지금 자기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생각했다.
“대인, 어제 술에 취하셨습니다. 길 가다 만났는데, 부인께 가겠다고 난동을 피우셔서 할 수 없이 제가 함께 왔습니다.”
소금남이 그렇게 말하며 제 양모 학창의를 가져다주자 유소호는 그제야 소금남이 왜 여기 있는지 깨닫고 안색이 더 흐려졌다. 임새옥이 자신을 피하려는 의도로 소금남도 잡아둔 것이리라.
떠나기 전에 임새옥을 한번 만나고 싶은 뜻을 이룬 소금남은 공수하며 작별을 고했다. 임새옥은 서둘러 배웅하고 그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본 후 방으로 돌아와 방에 앉아 있는 유소호를 향해 말했다.
“유 대인, 아직 제 거처에서 무얼 하십니까? 남녀가 단둘이 있다가 괜한 오해 받으면 명성이 더럽혀집니다. 유 대인은 무섭지 않을지 몰라도, 악명을 떨친 저는 두렵습니다. 부디 제가 살아갈 수 있게 해주세요, 유 대인.”
유소호는 그녀의 말에 멈칫하더니, 제 따듯한 신발과 깔끔한 옷에 마음이 시려 저도 모르게 소화, 하고 불렀다.
임새옥의 안색이 서서히 가라앉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랑, 당신 잘못 없어요. 다 내 잘못이야. 당신과 한평생 함께 보내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었어.”
“어째서? 왜 못해? 당신도 알잖아. 내 마음에 당신이 있다는 걸 알잖아.”
유소호가 속이 상해서 성큼성큼 다가가 임새옥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임새옥은 손을 빼고는 숙취로 초췌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며칠 못 본 사이 수척해져서 눈까지 쑥 꺼진 걸 보고 마음이 아파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사람이 예전엔 언제나 싱긋 웃으며 자기를 바라보던 게 떠올랐다. 밥은 먹었는지, 어머니에게 맞진 않았는지 다정하게 묻고, 그녀와 함께 밭에서 장난치다가 함께 유씨에게 잘못했다고 빌던 옛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런데 왜 이제 다 과거가 되어야 하나.
“이랑, 평생 나와 당신, 단둘이 보내자면 그럴 건가요? 옥루를 내려놓고, 나만, 나하고만 평생 보낼 수 있어요?”
유소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임새옥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말했다.
“소화, 어째서 아직도 그런 걱정을 해. 절대로 당신을 서럽게 하지 않아. 옥루도 내 마음에 있고, 당신도 내 마음에 있어.”
임새옥은 풉 하고 웃었다. 웃느라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역시 쇠귀에 경 읽기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몇천 년의 세대 차이를 어쩌겠어.”
그녀가 손을 다시 빼내자, 유소호는 부드러워졌던 그녀의 안색이 흐려진 걸 보고 제 말이 또 먹히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임새옥이 표정을 가다듬고 생긋 웃어 보였다.
“이랑, 나도 새 지아비를 집에 들이면 어쩔 거예요?”
유소호가 얼굴을 굳히며 허튼소리라고 하자, 임새옥이 웃음을 거두고 정색했다.
“이랑, 다 같은 사람인데, 왜 당신은 마음에 두 사람을 담을 수 있고, 나는 안 돼요? 다 사람인데, 왜 달라야 하죠?”
유소호는 다소 어이가 없어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당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착하지. 이제 그만합시다.”
임새옥은 품에 안기지 않으려고 이를 깨물고 버티며 막았다.
“이랑, 휴서 언제 줄 거예요?”
유소호가 참고 또 참으며 더 달래려고 했는데, 입을 열기 전에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영아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부인, 부인, 부인 어머니가 그 노래하는 여인과 싸우고 있어요! 저더러 부인을 불러오래요!”
영아가 흥분해서는 그렇게 외치는데 문이 휙 열렸다.
“사내도 데리고 오래요. 부인, 장정 몇 명…….”
그렇게 외치며 안쪽으로 달려 들어가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 그녀를 힘껏 밀치느라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아프다고 고함치기도 전에 유소호가 겉옷도 입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 나가는 게 보였다.
유소호가 뛰쳐나가는 걸 본 임새옥은 머리를 빗을 겨를도 없이 대충 묶었다. 다행히 어젯밤에 잠을 자지 않아서 옷을 입은 채라 그대로 달려 나올 수 있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왔어?”
임새옥은 그렇게 묻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잠글 틈도 없이 문 밖으로 달려 나갔다. 영아도 곧바로 엉엉 울면서 뒤를 쫓았다.
“무서워서, 무서워서 장씨 통해서 부인 친정에 보내 소식을 알렸어요.”
임새옥은 그녀를 상대할 겨를 없이 곧장 성 밖 영두항으로 달려갔다. 빠르게 달린 덕분에, 곧 유소호와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졌다.
해가 막 어슴푸레 뜰 때였다. 아침 햇살이 아직 경성에 내리쬐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거리엔 벌써 행인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섣달 스무이레 아침, 변하에서 나룻배를 모는 뱃사공이든, 부두에서 곡식 포대를 옮기는 잡부든, 골목 어귀에서 사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든, 모두 일거리를 놓고, 잡담을 멈추고 이 광경을 구경했다. 매무새가 흐트러진 사내, 머리를 빗지 않은 여인, 그리고 손에 빗장을 든 여자애가 거리를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분명 어느 탕자가 여인을 희롱하다가 쫓기는 걸 게야!”
누군가 웃으며 말하자 다른 이가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어쩌면 화대를 내지 않아서 쫓기는 건지도 모르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여인이 곧 사내를 뒤따라 잡을 듯했다. 하지만 예상한 것처럼 엉켜서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인은 사내를 앞질러 가더니 곧장 앞으로 질주했다. 사내는 화가 난 듯이 두어 번 손을 흔들었지만 숨을 헐떡거리느라 말을 못 하는 듯했다. 뒤이어 빗장을 든 여자애도 그를 앞지르자, 사내는 숨 고를 겨를도 없이 미친 듯이 뒤를 쫓았다. 그렇게 세 사람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밖에 희한한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군가가 새로운 결론을 말했다. 순간, 고금을 막론하고 중국인의 습성이 발동한 사람들이 금세 우르르 모여 세 사람이 사라진 길을 따라 뒤쫓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길치이지만, 영두항은 매우 찾기 쉬웠다. 이미 사람들이 삼 겹, 사 겹으로 둘러서서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구경하는 사람 중엔 머리를 빗는 사람, 어깨에 짐을 짊어진 사람, 소매를 걷어붙인 채 밀대를 든 사람, 아이를 안은 사람도 있었다. 하나같이 돌 위에, 담 위에, 그리고 나무 위에, 지붕 위에, 사람이 설 수 있는 곳을 모두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음탕한 년이 어디서 허튼소리를 지껄여? 내가 무슨 자격으로 욕을 하냐고? 네가 감히 날 욕해? 내가 누구냐고? 오줌 싸고 비춰 보지 그래! 그 낯짝을 믿고 사내를 꼬드겨서 내 딸을 쫓아내고 네 집을 챙겨? 오늘 널 때려죽여서 염라대왕 앞에서 따져봐야겠다. 기름 솥에 처넣을 테다!”
노씨가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채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송옥루 집 문 앞에 서서 하늘이 떠내려가라 욕을 퍼부어댔다.
송가에선 눈먼 어미는 구석에 숨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송옥루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데, 맞아서인지 머리카락도 다 흐트러졌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대낭, 아니에요.” 하고 엉엉 울기만 했다.
“퉤!”
노씨가 크게 침을 뱉자 송옥루의 온몸에 침이 튀었다.
“성에 들어오자마자 들었다. 이 쌍놈의 계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더구먼. 내 사위를 꼬드겨 내 딸을 쫓아내고도 다른 사람에게 치근덕거려? 널 결딴내지 못할 바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죽고 만다!”
노씨가 손을 휘두르며 송옥루의 머리채를 잡고 두들겨 팼고, 송옥루는 피하지도 못하고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송옥루가 머리채를 휘어 잡힌 채 질질 끌려서 담벼락에 머리를 박는 걸 본 사람들이 다들 쓰읍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딸이 우는 소리에, 송 대낭이 숨 한 번 크게 쉬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울어댔다.
“내 딸을 때려죽이려거든, 이 노인네부터 죽여라!”
노씨가 그 바람에 비틀거리며 쓰러져서 흙투성이가 되자,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한쪽에 있던 금단은 제 어미가 그 꼴이 된 걸 보고는 튼튼하고 짧은 다리를 놀리며 달려가 울고 있는 송옥루를 들이받았다. 송옥루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가 금단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송옥루가 더는 참지 못하고 밑에 깔린 금단을 힘껏 꼬집자, 금단이 아악, 하고 고함치면서 마구 손을 휘둘러댔다.
아무래도 어린애인지라, 금단은 상대가 여인이라고 해도 이기지 못하고 몇 대를 두들겨 맞았다. 송옥루가 금단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노씨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서 덤벼드는 것을 막으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뒤에서 머리채를 잡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눈앞에 별이 보이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이제 손도 쓸 줄도 아네? 왜, 끝까지 연기하지 그래?”
임새옥이 송옥루의 머리카락을 잡고 허리를 걷어찼다. 송옥루가 바닥에 철퍼덕 쓰러지자 임새옥이 더 때리려고 달려드는데, 송 대낭이 더듬더듬 다가가 막아섰다. 노인이 하늘, 땅을 찾으며 울어대는 통에 임새옥은 손을 거두고 금단을 들어 올려 흙을 털어주며 어디를 맞았는지 물었다.
누이가 온 걸 본 금단은 엉엉 울며 배가 아프다고 소리쳤다. 옷을 들춰봤더니 옆구리 양쪽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이런 망할 년.”
임새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노씨도 그걸 보고는 당장 달려가 송가 모녀와 한데 뒤엉켰다. 금단은 그녀의 목숨줄인데 참을 리가 있나.
송 대낭은 노씨의 다리를 붙들고 울며 막았다. 노씨는 송옥루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송옥루는 노씨의 허리를 붙들었다. 두 사람이 바닥을 뒤구르는 모습에 사방에 모인 사람들이 넋을 잃고 구경했다. 죽을 팔러 온 행상까지 죽이 쏟아질까 두렵지도 않은지 사람들 사이를 마구 파고들었다.
유소호는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숨이 끊어질 것만 같은데, 저런 광경을 보려니 숨이 더 턱 막혀서 크게 고함쳤다. 뜯어놓으려고 달려갔는데, 셋이 엉겨 붙어 구르는 바람에 바로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송옥루를 품에 안고 어깨로 밀치는데, 송옥루가 아프다고 고함쳤다. 노씨가 한 움큼 뽑은 머리카락을 바닥에 내던졌다.
송옥루가 품에서 기절한 걸 본 유소호는 얼굴이 시퍼레져서는, 송옥루를 송 대낭에게 넘기고는 성큼성큼 다가가 노씨를 가리켰다.
“지금, 미쳤습니까!”
노씨가 벌떡 튀어 올라 유소호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 근본도 없는 망할 놈이! 네가 감히 내 앞에서 개소리를 해?”
사내인 유소호가 어디 여인에게 맞을 리가 있을까. 그는 손을 뻗어 노씨의 주먹을 막고는 확 밀어버렸다. 힘껏 주먹을 휘두르던 노씨는 오히려 밀려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아전들이 인파를 가르고 달려 들어와서, 송나라 역사상 가장 사나운 여인들의 싸움 장면을 직접 보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임새옥은 유소호가 노씨를 미는 걸 보더니, 아전들이 몰려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영아 손에 들린 빗장을 빼앗아서 유소호를 힘껏 내리쳤다.
왜 이 여인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질까.
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아프진 않았다. 그저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꼬꾸라졌다. 그리고 그 여인이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어.”
고마워? 뭐가? 누굴?
그 이상한 질문들은 유소호를 혼란스럽게 하지 못했다. 곧 혼절해 버렸으니까.
구중궁궐에 있는 황제는 이번 새해를 편안하게 보내지 못했다. 강녕부에 가서 왕안석을 방문하고 온 사람이 왕안석이 병이 났다고 아뢰었다. 당황한 황제는 그날로 태의를 보내 치료하게 했다. 왕안석이 조정에서 물러나긴 했어도 황제는 여전히 그를 강녕의 수장으로 삼았고, ‘사상(使相: 장군과 재상의 지위를 겸임하던 사람)’ 대우를 누리게 해주었다. 조정일에 참여하지 않은 것만 빼면 원래 받던 봉록도 누릴 수 있으니, 그 노인을 향한 황제의 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황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서안 위의 상주서를 다시 살폈다. 이정의 상주서인 걸 본 황제는 지쳐서 그만 보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자세를 바로 했다. 이정은 왕안석이 직접 천거한 제자로, 관직을 위해 불효를 저질렀지만 다른 방면엔 문제가 없었다.
상주서를 읽은 황제가 곧바로 얼굴을 구기며 소리 나게 상주서를 덮었다.
“유문장이 첩 때문에 처를 내쫓았다고? 그리고 첩을 처로 올리려고 한다? 여봐라, 유문장을 들라 하라. 짐이 물어봐야겠다.”
내시가 곧바로 명을 받고 나갔다. 하지만 유소호를 불러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사 등관이 나타났다. 딱 봐도 황제가 화가 났음을 아는 등관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네가 여긴 어떤 일인가. 마침 잘 되었다. 어사 아닌가,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해야 할 걸세.”
황제가 이정의 상주서를 내던지자 등관이 허둥지둥 주워들어서 힐끔 보고는 곧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 신, 바로 이 일로 온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일로 유 대인의 집에 있었는데 폐하의 지의(旨意)를 받고 죄를 청하러 달려온 것입니다.”
“아, 네가 죄를 청하러 왔다고? 짐은 오늘 어사 자네가 직책을 소홀히 한 것을 물으려는 게 아니다. 유문장이 감히 항명까지 해?”
황제가 더욱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지나치게 화가 나서 헉헉거리자, 곁에 있던 내시까지 당황해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정하시라고 외쳤다.
“폐하, 유 대인은 안 오는 것이 아니라 못 오는 것입니다. 지금 혼절해서 인사불성입니다.”
등관이 무릎을 꿇은 채 애달픈 듯 읍소했다.
황제로서는 뜻밖이긴 했다. 사실 황제는 이 젊은 농관을 여전히 특별히 아꼈다. 어찌 된 일이냐고 물으니, 등관이 한숨을 내쉬며 유소호의 집안 배경부터 자초지종을 상세히 아뢰기 시작했다.
황제도 당연히 유씨 가문에 죄명이 떨어진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안석과 관련된 일이라 깊이 알아보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연민의 마음은 있었다. 황제의 안색이 나아진 걸 본 등관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혼인한 건지, 나중에 어떻게 송옥루를 만난 건지, 마지막엔 이미 온 경성에 퍼진, 조 대저가 어미, 아우를 앞세워 지아비를 때린 일도 물론 이야기했다.
“실로 괘씸하군! 세상에 이런 악처가 있단 말이냐.”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유소호를 비난할 생각이 싹 사라져서 분노하며 외쳤다.
“폐하, 신이 특별히 십방촌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조씨가 원래 몹시 고집불통에 악랄하였다고 합니다. 걸핏하면 부모를 욕하고, 집안일로 부모와 말다툼했다고 합니다. 조씨가 제 부모를 가리켜 차라리 때려죽여야 조용해진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폐하, 낳고 길러준 부모에게까지 그러는 이가 다른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등관이 고개를 저으며 눈물을 닦았다.
“가련한 유 대인이 지금 두들겨 맞고 머리가 다 깨졌습니다. 유 노부인도 놀라서 기절하여 지금 모자가 모두 인사불성입니다. 조씨는 어미를 데리고 집에 쳐들어가서 땅문서를 내놓으라고 집을 뒤지고 있답니다. 송씨는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아 때리고 욕하는 대로 맞으며 무릎 꿇고 앉아 애걸복걸, 죽음으로라도 조씨가 화를 풀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관이 제때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면 무슨 난리가 생겼을지 모릅니다!”
황제는 이미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화가 났지만, 그래도 조금 남은 이성을 붙들고 물었다.
“그 송씨는 출신이 어떠한가? 이 대인의 말로는 관기라던데?”
등관은 한숨을 내쉬며 문서를 하나 꺼냈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유 대인이 참으로 정과 의리가 깊습니다. 송씨는 대명부 송가 적녀로 유가와 교분이 있었습니다. 조상이 대대로 관직에 있었으며 송씨 아비 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음서로 지방 도감(都監)을 맡은 집안인데 나중에 청묘…….”
거기까지 이야기한 등관은 슬쩍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언짢은 기색이 없자 속도를 빨리해 말을 이었다.
“온 가족이 경성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비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가문이 몰락하여 눈먼 노모를 모시고 혼자 힘으로 집안을 보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청백한 몸으로 기예를 판 것이지 관기가 아닙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탄식했다.
“그렇다면 괜찮은 편이군.”
그러더니 금세 얼굴이 흐려졌다.
“그 조씨의 행실이 정말로 괘씸하지 않은가!”
등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유 대인이 때리고 욕하는 것도 참으면서 조강지처를 내칠 수 없다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송씨도 이미 물러나서 곧 어미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자기의 애경이 이런 대우를 받았다는데 황제가 어찌 참을까. 이 일은 곧 후궁의 태후 귀에도 들어갔다. 이것도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황제의 아우 기왕 조호가 처 풍(馮)씨와 옥신각신하던 때였다. 아들 일로 마음 아픈 고 태후는 세상 여인이 갈수록 법도를 모른다고 한탄하고 있었는데 조씨가 거리에서 지아비를 학대했다는 소리가 들리자 뒤로 넘어갈 만큼 화를 냈다.
“그 조씨, 그때 보았을 때는 예법을 아는 것 같았는데, 이리 독한 마음을 품었구나. 그때 상까지 내렸는데, 내 얼굴을 때린 셈 아닌가.”
고 태후의 말을 들은 조 태후가 화를 내며 서안을 내리쳤다. 당황한 사람들은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정말로 관기였다면 때리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 송씨는 관리 집안 출신이랍니다. 조씨를 매우 존중했고, 집에 들이지 않겠다고 듣자마자 바로 노모를 데리고 경성을 떠나려고 했답니다. 유가의 명성에 해가 될까 봐요.”
고 태후가 눈물을 닦으며 종이를 내밀었다.
“보세요, 얼마나 가련합니까. 재능까지 있는 여인이랍니다. 시를 이렇게나 멋들어지게 썼습니다.”
시를 좋아하는 조 태후가 얼른 받아서 읽더니 송씨에 대해 더 흡족해하면서 바로 얼굴을 구기며 명을 내렸다.
“그 조씨가 화리(和離) 하겠다고 난리를 부릴 뿐만 아니라, 재산을 나눠달라고 떼쓴다고 들었다. 가서 유가에 내 뜻을 전해라. 조씨를 내쫓고 재산은 반 푼도 주지 말라고 해라. 이 세상 여인들을 경각하게 하라!”
소식이 전해진 후, 임새옥은 넋이 나가서 탁자를 내리치고 또 내리쳤다. 정말이지 자기 땅을 잃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 어미 때문이다. 그 여인에게 기세를 보여줘서 길들이려고 소란을 부린 것뿐이다. 그래야 나중에 집에 들어와도 함부로 너를 대하지 못할 것 아니냐. 그런데 어쩌다가 내쫓긴 것이야.”
노씨가 목 놓아 울면서 제 얼굴을 내리쳤다. 당황한 임새옥이 달려가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머니, 우리 돌아가요. 가서 우리 땅에 농사지어요. 그걸로도 배불리 먹고살 수 있어요.”
임새옥이 설득해도 노씨는 응어리가 풀리지 않아서 몇 날 며칠 한숨을 내쉬었다. 심지어 잘못했다고 유씨 대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유가 대문은 두 번 다시 그들 조가를 위해 열리지 않았다.
정월 초사흘,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그때, 임새옥은 장신구 몇 개를 팔아서 나귀차를 고용해 노씨와 금단을 데리고 경성을 떠나 성안현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폭죽 소리가 끊이지 않고, 마차가 지나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기쁘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 바람에 이 작은 나귀차는 더 처량해졌다.
임새옥이 금단과 이야기를 나누며 갖가지 폭죽을 들고 장난치는 사이, 노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형편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이런 걸 사서 돈 낭비하다니.”
“어차피 돈이 없으니 이 몇 푼은 있으나 마나예요. 새해잖아요. 분위기는 내야지요.”
노씨기 속상해서 또 울기 시작했다. 제가 딸을 망쳤다고 되풀이하는 노씨를 보며 임새옥은 울지도 웃지도 못해서는 위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나귀차가 멈춰섰다.
“왜 멈춰요?”
임새옥이 휘장을 열고 물었다. 눈앞에 화려한 비단 치마에 담비 갖옷을 입은 여인들이 줄줄이 서 있다가, 임새옥이 나귀차에서 내리니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맞았다.
“동생, 배웅하러 왔어.”
담비 갖옷을 입고 모자를 쓴 오 부인이 가장 먼저 입을 열자, 곁에 있던 시녀가 술을 올렸다. 임새옥은 콧날이 찡해졌다. 한동안 울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서둘러 술잔을 받아 한 모금에 마시고는 모두를 향해 절을 했다.
“조화, 부인 여러분께 감사드려요. 오늘이 있으니 경성에 온 보람이 있네요.”
이 부인들은 모두 연회에서 사귄 사람으로 쭉 훑어보니 대부분 낯익은 이들이었다. 태후가 친히 지의를 내려 조화를 꾸짖었으니, 천하제일 악녀라는 명칭을 짊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여인이라면 누구나 피하려고 안달일 텐데, 그동안 그녀가 얼렁뚱땅 사귀어왔던 귀부인들이 몸소 배웅하러 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러니 어떻게 눈물을 참을까.
“동생, 좋은 사람 찾아서 혼인해.”
오 부인이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며 보따리를 내밀었다.
“언니가 주는 혼수야.”
그걸 본 다른 여인들도 선물을 건넸고, 금세 임새옥은 품 안 가득 물건을 안았다.
“이러면 안 돼요. 이걸 어떻게 받아요.”
임새옥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말하는데 아원이 나오더니 커다란 보따리를 나귀차 위에 올려놓았다.
“저는 돈이 없어서 옷이랑 신발 몇 벌 준비했어요. 그래야 재가할 때 창피하지 않죠.”
임새옥도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아원, 난 뭘 하든 안 돼. 아무리 치장해도 남들은 타박하더라. 네가 그날 한 말이 맞았어.”
“또 그 이야기예요? 그 뜻이 아닌 거 알면서…….”
아원은 우왕하고 울음을 터트리고는 돌아서서 어깨를 들썩이며 가버렸다. 임새옥은 가슴이 턱 막혀서 속으로 제기랄 하고 외쳤다.
천월한 지 이렇게 오래됐는데, 내가 아직 남의 걸 도용 한 번 하지 않았잖아! 그 송옥루가 재능이 뛰어나니 어쩌니 하니까, 나 임새옥도 한 수 읊어줘야겠어. 고작 시 아니야!
그녀는 잔뜩 들고 있던 선물을 바닥에 내려놓고 양손을 휘둘렀다.
“저기, 필묵 좀 줘 보세요.”
참으로 공교롭게도, 귀부인의 마차에는 모두 지필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눈빛을 주고받은 다음 누군가가 지필을 들고나왔다. 임새옥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신들린 듯 시를 써 내려갔다.
불그레 고운 손으로 황등주를 따르니,
성에 봄기운 가득하고 궁궐 담엔 버드나무 춤추었네.
모진 동풍 때문인가, 은애하던 정이 부족했던가.
가슴에 수심 품고 몇 년이나 헤어져 살았던가.
잘못이다,
잘못이다,
잘못이다.
예전과 다름없는 봄인데 사람은 야위어가고
붉게 젖은 눈물 자국 비단 손수건에 스며드네.
복숭아꽃 지는 고요한 연못가 누각.
철석같은 맹세 남아 있으나, 마음 담은 편지 한 장 전하지 못하네.
말자,
말자,
말자.
(※<채두봉釵頭鳳>, 육유陸游.
송나라 시인 육유는 외사촌 누이 당완과 결혼했고 금슬이 좋았다. 그러나 육유가 공부를 게을리한다고 육유 모친이 며느리를 미워해서 2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 후 두 사람은 각각 재가를 한다.
육유가 어느 해 심원沈園에 갔을 때 마침 당완도 남편과 그곳에 있었다. 당완이 남편의 동의를 얻고 술과 안주를 가지고 가서 육유에게 술을 따라주었고, 육유가 감회에 젖어 담벼락에 시를 적었다. 당완은 화답하는 시를 남기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고, 육유는 평생 당완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붓을 휙 던지고는 그 자리에 있는 모두를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나귀차를 타고 큰 소리로 웃으며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 후에 누군가 훌륭한 시라고 큰소리로 외치자, 뒤이어 모두 정신을 차리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하지만 가슴 가득 차올랐던 기쁨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눈앞에 보이는 글씨는 그야말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내가 기억해요. 내가 기억해. 외웠어요!”
그중 한 부인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급하게 읊으니, 누군가가 곧바로 붓을 들고 쓱쓱 써 내려갔다.
임새옥은 이 기억력 좋은 여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조 대저가 평생 단 한 번 지은 시는 긴 역사의 세월 속에 묻혀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건 송나라 전체의 비극일 것이고.
그 시는 빠른 속도로 퍼졌다. 천 가지 걱정과 만 가지 감회를 얼마나 적절하게 그 시에 담아 표현했는지, 순식간에 온 도성에서 그 시를 노래하고 읊었다. 후궁에 있는 조 태후에게까지 전해졌을 때, 조 태후는 한참 넋을 잃고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이 아이를 오해하고 탓한 건 아니겠지?”
임새옥은 이 시가 일으킬 파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후세의 육유(陸游)가 전처 당완(唐婉)을 다시 만났을 때 마음속 가득한 정, 원망, 그리움, 연민, 그 아무것도 시로 쓰지 못했고 오로지 다음과 같이 한마디로 탄식했다고 한다.
“조씨 부인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해버렸구나!”
쫓겨난 유가 며느리 조씨의 뒷모습은 폭설과 함께 변경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이 여인에 관한 전설은 이제야 막이 오른 셈이었다. 하루도 되지 않아, 조화가 술 마시고 쓴 슬픈 시는 큰 거리, 작은 골목에 퍼졌고, 금세 온 성안의 청루를 풍미했다. 접객하러 나와서 이 시를 부르지 않는 기녀는 반드시 그 자리에서 쫓겨나야 했다.
소복소복 내리는 큰 눈이 종일 내린 날이었다. 가장 번화한 시가에 있는 이씨 가문의 저택은 높은 대문에 뜰이 겹겹이 자리 잡은 대저택이었다. 이곳은 예전에 사고를 친 관리가 살던 저택으로, 이가가 옮겨온 후엔 대대적으로 정돈하고 보수했다. 현재 화원을 아직 완전히 보수하지 못했는데 큰 눈으로 며칠 작업이 중지되어 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태호석(太湖石: 검은빛의 구멍이 많은 복잡한 형태의 기석) 위로 눈이 두껍게 쌓여 있고, 그곳과 그리 멀지 않은 대청은 화려하고 따듯한 기운이 가득했다.
대청에서는 주연이 열리고 있었다. 비단 휘장과 병풍을 두르고, 골탄(骨炭)을 넣은 화로를 놓은 곳에서, 하얀 여우 갖옷을 입은 동연낭이 차를 마시면서 희첩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눈이 점점 더 많이 오는 듯하자, 월낭이 눈을 모아서 차를 끓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다들 그러자고 하면서, 몇몇 시첩이 직접 움직여서 눈을 쓸어 모아 봉단작설차(鳳團雀舌茶)를 끓이고 둘러앉아 마셨다. 그렇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융의를 입은 이용이 모자도 쓰지 않은 채 화원을 지나 그녀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
시첩들은 모두 눈을 깜빡이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다들 서재로 가고 싶지만, 이용의 규칙을 잘 아는지라 겁이 나서 말은 꺼내지 못하고 동씨를 부추겼다.
“이렇게 큰 눈이 오는 날이잖아요. 부인이 가서 눈 구경하자고 노야를 모셔 오는 게 어때요?”
동씨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고 시첩들의 속셈을 잘 아는지라 그저 웃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시첩들은 입술을 깨물며 배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고 내심 생각했다. 노야가 부인에게는 한 달에 정기적으로 두 번씩 찾아가는데, 자신들 열몇 명은 번갈아 가며 모셔야 하니 두 달이 지나도 코빼기도 못 보는 일도 있었다.
한순간 이용 곁으로 달려가 얼굴을 보이고 예뻐해 달라고 조르고 싶은 바람에 눈 구경할 마음도 사라져서 다들 서재 쪽만 목을 빼고 바라봤다.
그중에 금매(金梅)라고, 최근에 밖에서 들어와서 지금 가장 총애를 받는 여인이 웃으며 소매를 흔들었다.
“목 빼고 기다리기만 하면 뭐 해요. 제가 설차 한 잔 올리면서 모셔 올게요.”
그러고는 동씨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차를 들고 살랑살랑 가버리자 시첩들이 눈을 흘겼다. 누군가는 나지막이 웃었다.
“노야의 규칙을 아직 몰라서 저러지. 대낭자, 예전에 연저아가 어쩌다가 쫓겨났는지 알려줘야겠네요.”
동씨와 월낭은 사람들의 갖가지 속셈을 모르는 체하며 그저 빙긋이 눈만 구경했다. 잠시 후, 서재에서 여인의 간드러진 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재로 가지 않은 시첩들은 시샘이 나서는, 이용의 기분이 좋았던 모양인데 자기가 갈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괜히 망할 계집애만 노야께 잘 보였다고 생각하며 이제라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주저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이용이 서재 앞에 서서 손짓했다.
“다들 이리 와서 내가 쓴 글 좀 보아라.”
한순간 비단옷이 어수선하게 움직이고 탁자, 의자를 넘어트리며 시첩들이 앞다퉈 달려가는데 오직 월낭만 동씨를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이용의 서재는 세 칸 크기로 선반으로만 구분되어 있었다. 고서가 가득한 서재 사방에 황동 화로 네 개를 놓고 유단견(油單絹: 기름에 절인 천) 휘장을 걸어놓아 바깥의 혹독한 추위와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실내엔 만개한 도화와 색색의 국화가 놓여 있고, 창가엔 푸른 대나무, 난초, 서안엔 먹과 매화가, 다른 쪽 왜탑(矮榻: 낮은 침상 겸 긴 의자)엔 초동(焦桐: 그을린 오동나무로 만든 금)이 놓여 있으며, 안신향이 타고 있었다.
서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용이 서안 앞에서 금매를 몸 앞에 바짝 안고 있었다. 목덜미에 입술을 맞추면서 금매의 옷 속에 손을 넣고 주무르는 바람에 그 여인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야릇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에 익숙한 여인들은 그저 웃는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형님, 형님은 글자 읽을 줄 알잖아요. 뭐라고 쓴 거예요?”
시첩들은 서안 앞에 모여서 위에 놓인 넓은 족자를 바라봤다. 종이를 가득 채운 비뚤비뚤, 크기가 제각각인 글을 본 시첩들은 동씨를 불렀다.
이용은 금매의 몸에서 손을 떼고, 동씨가 서안 앞으로 다가오는 걸 웃는 얼굴로 바라봤다. 동씨가 한참 눈을 찌푸리고 보다가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불그레 고운 손……. 무슨 술……. 성에 봄기운 가득하고……. 이 글씨체를 알아보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것 같네요.”
동씨가 결국 읽는 걸 포기하고 웃자, 금매가 이용에게 기대서는 발그레한 얼굴로 물었다.
“대가의 글씨인가요? 부적처럼 보이는데. 공자의 글씨와 비교도 안 되잖아요.”
이용이 웃으며 그녀의 가슴을 더듬었고, 금매는 부끄러운 듯 아양을 떨었다. 시첩들은 질투가 나고 가슴이 타올라 금매를 걷어차 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대가는 아니지. 하지만 이 공자가 이걸 구하느라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른다.”
이용이 보물이라도 보듯이 한참 동안 글자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치워놓고는 소매를 휘둘렀다.
“자, 내가 써서 보여주마.”
이미 준비하고 있던 시첩 하나가 먹을 갈고 큰 종이를 펼쳤다. 이용은 붓을 받아들고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단숨에 써 내려갔다. 동씨는 중간에 서서 그가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을 따라 천천히 읽었다.
“……모진 동풍 때문인가, 은애하던 정이 부족했던가. 가슴에 수심 품고 몇 년이나 헤어져 살았던가. 잘못이다, 잘못이다, 잘못이다.”
그러다가 ‘예전과 다름없는 봄인데 사람은 야위어가고, 붉게 젖은 눈물 자국 비단 손수건에 스며드네.’까지 읽고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한창 집중해서 듣던 시첩들은 어서 읽으라고 재촉하는데 동씨는 미간을 단단히 좁히고 눈시울을 붉힌 채 완성된 글자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시, 읽다 보니 마음 아파지는구나.”
그녀의 말에 시첩들은 저마다 얼굴을 마주 봤다. 글을 아는 금매가 머리를 내밀고 계속해서 읽었다. 다 읽은 다음엔 저마다 속으로 읊어보았다. 다들 감회에 잠겨서 한순간 서재 안이 끽소리 없이 조용해졌다.
“그렇지, 마음 아픈 시지.”
이용은 한숨을 내쉬며 붓을 내려놓고는 뒷짐을 지고 창가로 다가갔다. 어지럽게 휘날리는 설경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이렇게 큰 눈이 오는 날에 먼 길 떠나는 게 얼마나 힘들까.”
그리움과 걱정이 밀려왔다. ‘지금 바로 달려가서 어디든 상관 말고 집 하나 구해서 살게 하면 이렇게 밤마다 그리워할 일이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다가 정말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당황한 시첩들이 어디를 가는 건지 묻기도 전에 이용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또 누가 노야 마음을 잡은 거야. 겉옷도 입지 않고 나가시다니!”
금매가 발을 구르며 하는 말에 모두 눈을 흘겼고, 오로지 동씨만 알겠다는 듯 말했다.
“아, 이게 그 조씨가 쓴 거로구나. 세상에, 정말 사람 잘못 봤었네.”
이용 집안의 화려한 여인들의 기쁜 듯 슬픈 듯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시선을 유가 대문 앞으로 돌려보자. 녹색 융 겹옷을 입고 담비 모자를 쓴 아원이 굳게 닫힌 대문을 걷어찼다. 그렇게 연달아 몇 번 걷어찬 후에야 누군가 끼익하고 문을 열었다.
“저아, 이렇게 큰 눈이 오는 날 어쩐 일이냐.”
장사가 다급히 묻는 말에 아원은 들어가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미안하지만 가서 좀 물어보고 와요. 조 대저가 보낸 서신을 가지고 왔는데, 이댁 노부인과 노야께서 날 들여보내 주실 건지 말이에요.”
장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아, 말을 그렇게 비딱하게 할 필요가 있나. 바늘 끝이든 보리까끄라기든 날카로운 것들끼리 맞서 봐야 결과가 어떻겠어. 조금 양보하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아원이 멈칫하더니 빙긋 웃었다.
“유가에도 똑똑한 사람이 있었네요.”
안으로 들어간 아원은 막 눈을 쓸어서 길을 낸 자리에 또 눈이 한층 쌓인 걸 보면서 쭉 안으로 들어갔다. 휘장을 열려고 하는데 영아가 고개를 내밀고 나오다가 아원인 걸 보고는 좋아서 꽥 고함치며 달려와 팔을 잡고 울먹였다.
“부인 어디 가셨어? 왜 나는 안 데리고 가고.”
아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안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유씨의 놀란 듯 기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누가 왔니? 혹시…….”
아원은 영아를 데리고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바닥에서 기어 일어난 유씨의 얼굴에 가득했던 기쁨은 순간 사라졌다. 유씨는 머쓱한 듯이 얼굴을 돌리고는 옷에 먼지를 털었다.
“아원, 왔느냐.”
영아는 여전히 아원의 손을 잡은 채 울면서 부인을 불렀다. 유씨가 탁자를 내리치며 꺼지라고 외치자 영아가 울면서 뛰어나갔다.
아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방을 둘러보았다. 며칠 치우지 않아서인지 세밑인데도 경사스러운 느낌은 하나도 나지 않는 걸 보고 입을 비죽였다.
“노부인, 집을 좀 치우셔야겠네요. 정월이 되면 새 사람을 맞이하셔야죠. 그때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유씨는 안색이 굳어서 돌아서서는 얼굴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재상댁으로 높이 올라갔다더니, 오늘 웬일로 시간이 나서 여기에 온 것이냐.”
아원은 코웃음 치며 소매에서 서신을 꺼내 유씨 앞에 던졌다.
“조 대저가 유 대인에게 전해달라는 서신이에요. 마침 시간이 나서 가지고 왔죠.”
그러고는 오고 싶어서 온 줄 아냐고 덧붙이자, 기가 막힌 유씨는 기침을 하면서도 서신을 잡았다. 그대로 구겨버리고 싶었지만 아쉬워서 그럴 수가 없고, 바로 열어서 보자니 아원 앞이라 체면이 안 서서 멈칫한 채 있었다.
“유 대인은 아직 누워계셔요? 어서 좋은 의관 찾아서 보이세요. 새 사람을 들이는 데 지체되면 어째요. 노부인, 혹시 바빠서 못하시는 거면 오늘 제가 한가한데 도와드릴까요?”
아원이 손수건을 흔들며 음흉한 것도 밝은 것도 아닌 묘한 웃음을 짓자, 유씨는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한 눈으로 이만 돌아가라고 했다. 아원은 코를 찡그리며 팩 돌아섰다. 영아가 당연히 대문 쪽으로 쫓아왔다. 숨이 넘어갈 듯이 울면서.
두 시녀 때문에 화가 난 유씨는 한참 숨을 헐떡이다가 겨우 진정하고는 서신을 내려다봤다. 다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넋을 잃고 있는데, 임새옥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조화, 어머니의 진심에 감사하며 절 올립니다.’ 하길래 손을 내밀었다.
“아가, 이 어미가 마음 아파하다가 죽으라고 이러는 것이냐.”
내밀었던 손이 허공을 짚으면서 하마터면 다시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유씨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신을 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이랑, 이랑.”
문을 두드려도 안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아서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흐린 날이라 방 안은 더 어두컴컴했다. 바닥에 놓인 화로엔 불이 하나도 없어서 실내가 으슬으슬 추웠다. 이불을 두르고 침상에 누운 유소호는 이마에 하얀 수건을 올린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랑, 이러다 병이 더 심해진다. 불을 지켜주는 사람도 없는데.”
아들의 차가운 손을 만진 유씨는 마음이 아파 또 눈물을 흘렸다.
집에 사람이라곤 영아 하나뿐인데, 매일 밖으로 돌 생각만 하고.
유씨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가 병이 났는데 곁에 아무도 없으면 어쩌니. 차라리 지금 옥루를 들이자꾸나.”
“싫습니다! 누구도 싫어요!”
유소호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버럭 고함치더니 돌아누우며 이불을 덮어썼다. 아들이 훌쩍이며 우는 것 같자 유씨가 바들바들 떨면서 물었다.
“너, 너……. 이건 또 왜 이러는 것이냐.”
유씨는 가슴이 턱 막혀서 침상 머리맡에 기대서서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 기대고 있다가 서신을 던져주었다.
“네 처…… 조씨가 보낸 서신이다.”
유소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화들짝 돌아눕더니 서신 겉면의 글씨를 보고서야 허둥대며 일어나 앉았다. 손이 덜덜 떨려서 겉봉이 잘 뜯어지지 않자 급한 마음에 확 잡아 찢었다. 그 바람에 서신이 반으로 찢어지자 당황해서 급히 이어붙였다.
하얀 종이에 몇 마디 말이 적혀 있었다.
‘이랑, 봄이 오면 운대 잎을 보고, 잘 자라면 비료를 추가로 뿌려요. 부족하면 여러 번 뿌리고요. 운대는 기름 짜기 정말로 좋은 꽃이에요. 절대로 빨리 따서 먹으면 안 되고 적절히 싹을 솎아서 먹으면 돼요. 월동 후에 파랗게 싹이 나기 시작할 땐 물을 조금 주고, 꽃이 피면 부지런히 주어야 해요. 여물기 시작하면 물은 조금만 주고, 노랗게 꽃이 피면 수확해요. 절대로 늦게 수확하면 안 돼요. 꽃이 만개하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드니 분명 경성 외곽의 명소가 될 거예요.
아내와 함께 가서 감상하세요, 대인.
- 조씨 올림.’
유소호는 다 읽기도 전에 손을 덜덜 떨었고, 표정이 이상한 걸 본 유씨가 뭐라고 썼냐고 연신 물었다.
“뭐라고 썼니? 이랑, 혹시 잘못했다고 하면, 그냥, 그냥 네가 져주어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서신을 갈가리 찢더니 다친 머리를 양손으로 퍽퍽 때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이냐고!”
유씨가 놀라 아들을 다급히 안고는 울었다.
“이랑, 이랑, 괴로운 거 안다. 이러지 말고 날 때려라. 날 때려.”
유씨는 우느라 말을 잇지 못했고, 유씨 품에 안긴 유소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머리를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유씨는 그런 아들을 안고 중얼중얼 위로했다.
경성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은 임새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큰 눈이 내렸지만,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급한 그들은 쉬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달렸다.
이날은 날이 환하게 개면서, 나귀차가 관도를 따라 신이 나서 달렸다. 얼마나 덜컹대는지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고개를 숙인 채 보따리를 껴안은 노씨의 얼굴에도 울상짓던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 부인들 참 통이 크구나. 팔찌며 장신구며 옷감을 팔아 돈을 이렇게나 많이 주다니 말이다. 저아, 시가에선 미움받았지만, 밖에서는 꽤 인복이 있었구나.”
흔들려서 멀미가 날 것 같은 임새옥은 그 말에 대답할 기분이 아니었다. 얼마나 남았냐고, 곧 도착하느냐고 기운 없이 묻자, 창에 기대서 밖을 바라보던 금단이 다 왔다고 고함쳤다.
“성문이 보여. 사람 무지하게 많아.”
임새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노씨는 보따리를 챙기고 매무새를 고쳤다.
“성에 들어가면 왕 어멈 가게에 가서 먹을 것을 좀 사자. 삼저아랑 네 외할머니에게 주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나귀차가 별안간 멈췄다. 임새옥은 머리를 박았고, 노씨는 휘장을 젖히며 욕을 퍼붓다가 밖에 주르륵 늘어선 관리들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다물었다.
“조 낭자, 오느라 수고했네.”
현령 주문청이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허둥지둥 나귀차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했다.
이미 이야기를 듣고, 황가에 잘 보이려고 내가 고향에 돌아가는 걸 막으려고 나온 걸까? 아랫사람은 짓밟고 위에는 잘 보이려 드는 건 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일이니까.
그녀의 시선이 주문청 뒤로 향했다. 그중에 현지 향신(鄕紳)도 있는 듯했다. 그들은 예전에 그녀의 천막을 보러 왔었고, 풍년이 든 벼도 사서 갔었다. 그녀의 얼굴에 의문과 조금은 두려운 듯한 기색이 스치자, 주문청이 내심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이 여인을 놀라게 한 모양이군.
“조 낭자가 돌아온다는 걸 알고, 이곳에 몇 번이나 나와서 기다렸네. 취풍루에서 조 낭자의 환영회를 열어주려고 일부러 말일세.”
주문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껄껄 웃자, 임새옥은 더욱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안 돼요. 어떻게 그래요. 제가 어떻게…….”
그러자 향신들도 웃으며 몰려왔다.
“되네, 돼. 조 낭자가 돌아온다는 걸 알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임새옥은 뜻밖의 열정적인 환영에 얼떨떨해졌다. 나, 이렇게 환영받는 사람이었어?
그러나 곧바로 그 까닭을 깨닫고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유소호의 전처라는 신분이 꽤 유용한 듯했다. 이 시대 사람에겐 농사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렇다면 임새옥이 천막 채소, 논벼를 심어 풍부한 생산 가치를 창조해낸 걸 보았던 사람에게 사나운 악처라는 명성이 뭐가 중요할까. 기껏해야 자기네 며느리로 들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일 테고, 잘 보이려고 행동해도 아무런 단점이 없었다. 오히려 장점만 가득할 뿐.
이 이치는 원래 이렇게 단순명료한 것이었다. 다만 산에 있는 사람은 산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보는 게 실로 어려울 뿐이었다.
취풍루에서 열린 주연은 주빈이 모두 즐거운 자리였다. 처음엔 모두 주 현령의 말에 맞장구만 치다가, 술이 들어가자 저마다 속셈을 품은 향신들은 서둘러 본론에 돌입했다. 누구는 ‘우리 집 논농사가 늘 허탕 치네.’라고 하고, 누구는 ‘우리 집 보리가 올해 다 누렇게 떴네.’, 또 누구는 ‘대낭자, 우리 집 천막 채소가 다 죽는데 무슨 일이냐.’, 그러자 누구는 ‘우리 집 연근은 왜 자라지 않냐.’ 물어대는 통에 임새옥은 대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사람들이 찾아온 이유를 물론 잘 아는 주 현령이 헛기침하며 말했다.
“술은 이만하면 됐으니, 차나 한잔 합시다. 그때 각자 묻고 싶은 걸 물으면 되지 않겠소?”
그러자 다들 임새옥을 둘러싸고 우르르 나갔다. 임새옥은 마구마구 먹어대는 노씨와 금단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토끼 넓적다리를 내려놓았다.
차를 마신 다음, 다들 제대로 말문을 열었다. 유가 천막 채소의 명성이 퍼진 후, 성안현 절반 이상의 지주, 부자들이 천막 채소를 흉내 내서 농사짓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주문청이 특별히 살피러 온 적도 있고, 임새옥도 유가의 소작인들에게 당부한 바가 있어서 소작인들이 그들을 예전처럼 도둑 보듯이 하지 않았다. 그렇게 차츰 천막 채소가 온 성안현에 널리 퍼졌고, 1년 동안 발전하면서 성안현은 엄연한 천막 채소의 고장이 되었다.
똑똑한 농부들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고, 채소뿐만 아니라 과일도 심었다. 더 똑똑한 사람은 꽃까지 심어서 한순간 성안현은 지명도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재정 수입도 증가해서 관리부터 지주, 그리고 소작농까지 모두 득을 보았다.
천막 채소 창시자인 임새옥은 그들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재물신처럼 보일 것이다. 농사란 이런저런 문제를 겪기 마련이고, 전에는 멀디멀어서 묻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이제 본인을 만났으니 이것저것 묻는 게 당연했다.
주문청은 울지도 웃지도 못할 기분이 되어 작은 지방 사람은 역시나 식견이 좁다고 생각했다. 조씨가 쫓겨난 며느리가 되었으니, 사실 그들을 부르면서도 와주리라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웬일로 부르자마자 우르르 몰려왔다 했더니, 다들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조 낭자. 괜히 본관이 골치를 안겨 주었군.”
주문청이 미안한 듯 웃으며 말하자, 임새옥이 예를 갖추며 미소 지었다.
“다른 할 일도 없는걸요. 주 대인이 민부를 이토록 예우해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민부는…….”
그녀는 어째서인지 목이 따끔해져서 입을 다물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절을 올렸다.
주문청 역시 그녀가 생각이 많은 걸 이해했다. 변경성에서 일어난 일이 조금은 이곳까지 전해졌다. 높은 논벼 수확량을 아뢰는 글을 상주한 다음, 주문청도 조정에서 내리는 상을 받았었다. 그리고 조정 인사가 슬쩍 알려준 바에 따르면, 곧 승관도 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문청은 유소호보다 임새옥과 더 가까웠다. 연근도 그렇고, 논벼도 그렇고, 다 이 여인이 직접 나서서 해낸 것을 제 눈으로 보았었다.
잘 어울리는 젊은 부부라고 생각했었는데, 경성으로 간 지 반년도 안 되어서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는 까치와 제비처럼 갈라서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임새옥이 이렇게까지 유소호가 첩을 들이는 걸 반대하고, 머리가 깨지게 싸워도 양보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것 말고는 이 여인의 잘못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여인을 도와주기로 결심했었다.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임새옥이 지친 기색이 역력하자, 주문청이 끝도 없이 주절대는 사람들을 말렸다. 물어볼 게 있으면 나중에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하고 사람들을 돌려보내자, 안 그래도 지친 임새옥은 재차 미안하다고 말하며 입을 열었다.
“토지마다 제각각 상태가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시는 말씀만 듣고는 정확히 판단할 수 없으니, 나중에 궁금한 게 있으면 부르세요. 가겠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감사 인사를 남기고 임새옥을 배웅했다.
노씨도 얼굴에 기름기가 줄줄 흐르는 금단을 데리고 안에서 나왔다. 손엔 크고 작은 기름종이를 든 채 주 대인을 향해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주문청은 앞으로도 조화에게 수고를 끼칠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고, 노씨는 웃느라 눈이 다 사라질 지경이었다.
“수고라니요, 대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여러 나리께 도움 되면 좋지요. 혼자 답답해하다가 병이 나는 것보다 낫습니다.”
노씨가 눈알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 집엔 땅이 별로 없어 농사지어도 먹고살 것이 부족해서 얘 아비 하나면 충분합니다. 집안 농사 일엔 이 아이가 필요 없으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르셔요.”
여기 모인 사람들이 그 속뜻을 모를까, 다들 웃으며 대답했다.
“공으로 수고 끼칠 수가 있겠소. 우리 중 누구든 대낭자가 잘살도록 애쓸 것이오.”
그 말에 노씨는 안심하며 금단을 데리고 트림하면서 나귀차 쪽으로 갔다. 여기까지면 됐다고, 집까지는 걸어가는 게 몇 푼이라도 아낀다는 말에 사람들이 앞다퉈 돈을 내러 갔다. 노씨는 웃으며 짐짓 말리는 척하고는 사람들이 마차를 마련해주자 어깨를 으쓱이며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