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재차 피하던 조 대저, 친정에 가겠다고 청하다
섣달 열여드레, 이날은 또 큰 눈이 내렸다. 잠에서 깬 유소호는 서늘한 기분에 돌아보니, 이불 밖에 팔이 드러나 있고 곁에 누운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보니, 거울 앞에 앉아 있던 임새옥이 기척을 듣고 돌아봤다.
“일어났어요?”
임새옥이 일어서서 다가왔다. 자줏빛 비단 겹옷에 검은 배자를 걸치고 옥색 치마를 입은 그녀는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리고 연하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다듬은 적 없던 눈썹을 새로 길게 그린 모습에 유소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한참 넋을 잃고 바라봤다.
“뭘 그렇게 넋 놓고 봐요.”
임새옥이 앞에 앉아 이마를 톡 건들며 말했다.
“낭자, 이렇게 꾸미니 정말 고와.”
유소호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당신이 아파서 며칠 동안…….”
임새옥이 그를 밀어내며 몸을 일으켰다.
“오늘 시랑 댁 부인이 여는 연회에 가야 해요. 당신도 어서 일어나세요. 슬슬 운대 밭에 비료도 더 주고 물도 주어야 해요. 사람들 보내세요. 흙 덮기 전에 월동수를 한 번 더 부어야 해요. 그걸 잊으면 겨우내 수고한 게 헛수고가 돼요.”
그 말에 유소호가 서둘러 일어났다. 임새옥이 옷을 입혀주는데 당부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아. 몸 상할라.”
임새옥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은 아침을 먹고 유소호를 직접 배웅한 후 들어와서 유씨와 방에서 한담을 나눴다. 아원이 찾아와 연회 이야기를 하자 유씨가 언짢은 듯이 입을 열었다.
“아녀자가 사내처럼 매일 술 마시러 나가고. 그게 무슨 꼴이냐.”
“어머니, 안락하게 너무 오래 보내셨나 봐요. 부귀한 가문이 어찌 교류하는지 잊으셨어요? 어머니도 사흘에 한 번씩 소소하게 모이고 닷새에 한 번씩 크게 연회를 열었을걸요?”
그 말에 유씨가 멈칫했다. 며느리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는 모습이 익숙해서 딱히 거슬리진 않지만, 그저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하다가 웃음 지었다.
“그렇구나. 그때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 시어머님은 매일 채식하시고 불경 외면서 편안하게 지낸다고 부러워했는데, 인제 보니 내가 시어미가 되었구나.”
그 말에 모두 까르르 웃었다. 영아가 연회에 자기도 가고 싶다고 유씨의 팔을 흔들었다. 아원은 내키지 않았지만, 임새옥은 영아의 가련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랑부의 연회는 다른 연회와 마찬가지로 화려하게 차려입고 술잔을 주고받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임새옥은 구석에 앉아 웃고 있었다. 시선은 딱히 어디에 두지 않고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듣는데, 어쩐지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아원이 뒤에서 살며시 쿡 찌르자,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기를 뜯어보는 몇몇 여인들을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날 이후로 자신이 이 여인들의 화젯거리가 된 걸 알고 있었다. 다만 태후에게 총애받는 몸이 되어서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몇몇 여인들이 황급히 시선을 거두고 다른 곳을 바라봤다.
“동생.”
그런 모습을 곁에서 본 오 부인이 위로라도 하듯이 손등을 두드렸다. 임새옥은 고맙다는 듯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 부인이 그녀의 소맷자락을 들추며 물었다.
“전엔 몰랐는데, 팔찌를 끼고 있었네? 팔찌가 있는지 모르고 빗맞았네.”
그러고는 임새옥 손목에 팔찌를 보고 말을 이었다.
“알뜰하기도 하지. 이랑은 요즘 봉록을 제법 받을 텐데, 팔찌 하나 주지 않은 것이야? 그 돈 모아서 누구 주려…….”
그러다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에 오 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임새옥은 손목의 팔찌를 돌리며 대답했다.
“제가 장신구를 싫어해요. 집에도 있어요. 이건 누가 준 건데, 오래 차고 있었어요.”
불현듯 이미 세상을 떠난 이씨가 떠올라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재빨리 잔을 들어 한 모금에 털어 넣었더니, 아원이 뒤에서 보고 대번 걷어찼다.
시랑 대인의 저택은 정원 다섯이 겹겹이 이어진 큰 저택이었다. 술을 마신 여자 손님들은 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를 들었다. 옹기종기 정자에 모여 바둑을 두는 사람도 있었다. 임새옥은 오 부인과 함께 노래를 듣다가 재미가 없어져서 바둑을 구경하러 갔다. 그래도 재미가 없어서 화원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임새옥이 술기운이 오른 걸 본 아원이 뒤를 따라오며 한참 잔소리했다. 연회석에서 숨겨놓았던 과자를 끌어안고 먹으면서 뒤따라오던 영아가 술이 맛없었냐고, 왜 못 먹게 하냐고 묻다가 아원에게 혼이 났다. 시중들러 온 거지, 먹으려고 왔냐고 머리를 콕콕 찍으며 혼내는 말에 영아는 입술을 내밀 뿐 말대답은 하지 못했다.
마음이 이곳에 없는 임새옥은 아원의 설교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름답게 핀 납매(臘梅: 겨울에 피는 매화) 화원이 들어왔다. 시랑 저택의 납매 나무는 모두 귀한 품종으로 대부분 높게 자라 있었다.
그녀는 활짝 핀 노란 꽃의 진한 향기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꽃향기를 맡자 술기운이 올라와서 비틀거리며 가산석에 기대앉았다. 주변에 가득한 꽃향기와 함께 잠시 눈을 감았다.
“취하셨네요. 어서 돌아가요.”
아원은 영아에게 잘 보고 있으라고 한 후 돌아간다고 인사해야겠다고 서둘러 오 부인을 찾아갔다. 아원이 가자마자, 너무 많이 먹어 볼일이 급해진 영아가 한마디를 남기고 측간으로 달려갔다.
임새옥은 눈을 감고 아른아른, 비몽사몽 한 채 앉아 있었다.
겹겹이 자란 납매 나무를 돌아 낮은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화원에서는 시랑이 초대한 사내 손님들이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고 있었다. 한창 술이 올라 흥겨운 이때, 지극히 상등품인 여우 모피 옷에 옥 허리띠를 찬 이용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한 손엔 술잔을 들고 단숨에 비우면서 다른 손엔 붓을 들고 글을 쓰고 있었다. 커다란 선지 위에 적힌 유삼변의 <금당춘(錦堂春)>을 본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외쳤다.
“등사랑, 과연 서예 솜씨가 대단하오. 이 글씨가 있어서 유삼변이 쓴 시의 가치가 훨씬 올라가는군. 내일 항간에서 모두 이 시를 읊고 있을 것이오.”
누군가가 웃으며 이용의 서체를 따라 연습했다. 이용이 촉망받는 미래는 없어도 서예 솜씨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황제까지 칭찬하는 필체이니 말이다.
지금은 서예를 지극히 추앙하는 시대라서 사생활이 지저분해도 이용의 명성은 변함없이 높았다. 이용의 글씨를 얻을 귀한 기회가 오자, 그 자리에서 사겠다고 가격을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조상이 상인 출신인 이용은 술도 먹은 데다가 호탕하게 웃었다. 북송은 풍조가 너그러워서 문인이 돈을 밝힌다고 모욕을 당하지는 않았다. 누가 돈을 주고 자기 글씨를 산다니 기쁠 수밖에.
“호의에 감사합니다. 다만 이 글은 자형께 드릴 것입니다.”
줄곧 사람들 뒤에 조용히 서 있던 소금남은 미간을 찌푸릴 뿐 상대하지 않았다. 원래 소금남 같은 상인은 관리들의 연회에 참가할 자격이 없지만, 시랑 대인과 친분이 두텁기도 하고 이용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해서 함께 왔을 뿐이다. 다만 언제나 집에서 조용히 보내며 좀처럼 외출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친하지 않았다. 게다가 사람을 천 리 밖으로 밀어내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아무도 소금남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덕분에 이 떠들썩한 분위기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이 홀로 느긋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용은 몇 걸음 만에 소금남에게 다가가 종이를 손에 찔러주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다시 사람들 쪽으로 돌아갔다. 소금남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고는 종이를 펼쳐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을 마음이 없고,
근심으로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그릴 생각이 없네.
마음이 어지러우니 모든 일이 순조롭지 않구나.
근래 더할 나위 없이 초췌하고 말라가는 것 같더니,
몸에 걸친 비단옷도 헐렁해졌구나.’
(墜髮慵梳, 愁蛾懶畵, 心緖是闌珊. 覺新來憔悴, 金縷衣冠)
그 여인이 바로 이런 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소금남의 미간에 근심이 더해지는데, 별안간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용이 성큼성큼 나와서 “납매를 꺾어 와서 시를 지어 흥을 돋워 보겠습니다!” 하고 외치고는 바위를 돌아 사라졌다.
격문을 지난 이용은 눈 앞에 펼쳐진 매화나무들을 보고 멋지다고 감탄하고는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어느 가지가 좋을까 찾으며 걷다가 깊숙이 들어가 보니, 활짝 핀 꽃 나무 아래 돌바닥에 여인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이곳이 여자 손님을 초대해서 즐기는 곳임을 알고는 돌아서려는데, 여인이 몸을 뒤척이면서 얼굴이 드러났다. 술에 취해 단잠에 빠진 임새옥이었다.
자줏빛 비단 겹옷, 옥색 치마. 누워있어서 치맛자락 아래로 매화 꽃신이 나와 있었다. 머리엔 금으로 상감한 머리꽂이를 꽂고 작은 장식도 잔뜩 꽂혀있는 것이, 공들여 꾸민 것이 분명한 얼굴인데 취기에 발그레해서 붉은 입술은 더 붉게, 하얀 얼굴은 더 하얗게 느껴졌다.
“세상에!”
꽃밭을 수도 없이 누벼본 이용도 여인이 매화나무 아래 술 취해 누워있는 장면을 보고 나지막이 외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곁에 아무도 없는 걸 보고 성큼성큼 다가갔지만, 여인은 단잠에 빠져서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다. 내가 언제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있나.”
웅크리고 앉아 허리를 굽히고 유심히 여인을 바라보던 이용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손끝에 만져지자, 마음이 아파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야말로 ‘근심으로 잔뜩 찌푸려진 눈썹을 그릴 생각이 없네.’로군. 괜찮다. 앞으로 내가 어여뻐 해주마.”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서둘러 일어나던 이용은 여인의 소매 안에 비단 손수건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손수건을 자연스럽게 들어 올려 몇 걸음 만에 꽃나무 사이로 사라져서 아무 가지나 꺾어서 돌아갔다.
꽃나무를 돌아 나오자마자 바닥에 누운 임새옥을 발견한 아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울상이 된 영아를 매섭게 노려봤다.
“돌아가서 가만히 두나 보자.”
영아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꿍얼거렸다.
“소변이 급해서 잠시 다녀왔는데 부인이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어.”
아원이 임새옥을 흔들다가 매섭게 노려봤다.
“바지에 싸더라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여기가 어디야. 어떻게 부인 혼자 두고 가. 게다가 술을 드셨잖아. 네 부인 성격을 네가 모르니? 술주정이라도 하면 너희 유가 체면은 박살 난다고!”
아원이 흔들어대자 임새옥은 그제야 눈을 떴다. 아원의 설교 때문인지, 바람을 맞아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원은 쌤통이라며 누가 술을 마시랬냐고 한마디 하고는 그래도 걱정이 되는지 서둘러 임새옥을 부축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씨 거처엔 들르지 못하고 영아와 함께 부축해서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새옥은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눈을 감은 채 침상에 누웠다. 머리가 어질어질한데, 아원이 벗어둔 옷을 뒤적이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가져간 새로 만든 손수건은요? 왜 안 보여요?”
임새옥이 성가신 듯 손을 저었다.
“어디에 떨어뜨렸겠지. 손수건이잖아. 없으면 없는 거지. 그 꼴로 수놓은 손수건을 누가 가져가겠어.”
아원이 몇 마디 잔소리를 하고는, 시랑 댁에 가서 찾아봐야겠다고 해도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햇살에 눈이 부셨다. 다시 눈을 감기도 전에 유소호가 다가와 앉으며 햇빛을 가렸다. 유소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임새옥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낭자, 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걱정거리라도 있어?”
임새옥이 억지로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연회가 많으니 술이 갈수록 느네요. 당신도 그렇잖아요? 한 방울도 입에 안 대던 사람이, 지금은 마시잖아요.”
유소호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내가 언제. 우리 집 연회에서나 마셨지, 다른 때는 마시지 않아.”
그러고는 심각해진 얼굴로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 할 말이…….”
임새옥은 그의 손을 당기면서 벌떡 일어나 재빨리 말했다.
“이랑, 할 말이 있는데 진작 이야기한다는 게 깜빡했어요.”
유소호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임새옥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걸 꾹 참으며 말했다.
“집 떠난 지 벌써 반년이에요. 식구들은 글을 몰라서 소식 하나 보내지 못하잖아요. 곧 새해니까 십방촌에 한 번 다녀오고 싶어요.”
“음, 그럴 때도 되었지. 며칠 지나면 휴가를 받을 테니 같이 돌아가자.”
임새옥이 손을 내저었다.
“며칠 지나서 가면 섣달 스무사흘 안에 못 돌아와요. 게다가 어머니 혼자 집에 계시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영아를 데리고 가면 돼요. 오늘 바로 갈래요. 오래 걸리지 않아요. 금방 다녀올게요.”
유소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 된다고 하니 임새옥의 안색이 변하고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아 마음이 약해져서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했다.
“알았어, 알았어. 진정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요즘 답답한 거 알고 있어. 매일 억지웃음 짓는 걸 내가 모를까. 먼저 가 있으면 휴가받고 바로 갈게. 지금 가서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임새옥이 안도하며 말했다.
“어머니껜 내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아들이 중간에서 말 전하는 게 어디 있어요. 괜히 오해만 생겨요.”
“그런 게 어디 있어. 어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당신 기분이 안 좋아질까 봐 그러는 거지.”
임새옥은 벌써 옷을 입으러 나가면서 대답했다.
“어머니랑 의견이 일치한 적이 거의 없는데요 뭘. 그래도 앞에서 다 털어놓고 말해야 해요. 그래야 다들 잘 지내요.”
유소호가 웃으면서 머리를 빗겨 주고는 함께 유씨를 찾아갔다. 유씨는 역시나 동의하지 않았다. 길이 험하다고 걱정했고, 하물며 여인 혼자 가는 건 더 안 된다고 했다.
임새옥은 백방으로 설득하다가 안 되자 얼굴이 흐려지더니, 어머니가 보고 싶다고 하면서 곧 눈물이라도 흘릴 참이었다. 유씨가 두고 볼 수 없어서 탁자를 내리치며 내키지 않아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임새옥이 이내 울음을 그치고 웃는 모습에 화를 내지도 못한 유씨는 결국 유소호에게 사람 몇 명을 보내서 호위하라고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에 영아는 뛸 듯이 기뻐했다. 경성의 새로운 물건을 사서 돌아가서 자랑해야겠다고, 돈 몇 푼 달라고 유씨에게 하는 말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오로지 아원만 한쪽에서 얼굴을 구기고 서 있었고, 그런 그녀의 시선에 임새옥은 뜨끔해서 고개를 숙였다.
이왕 날짜를 정한 김에, 유씨는 바로 장부를 꺼내 돈을 내어주었다. 임새옥은 집에 가지고 갈 물건을 사서 가라며 유씨가 주는 열몇 냥 은자를 보고 눈시울이 붉어져서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이렇게 많이 필요 없어요. 우리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온 경성을 옮겨다 주어도 만족할 사람이 아니에요.”
유씨가 노려보며, 자기 부모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버릇없다고 혼을 냈다. 유씨가 은자를 손에 쥐여주며 어서 가서 사고, 다 쓰지 못하면 돌아가지 말라고 하니 임새옥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고 영아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
다음 날, 준비를 마치고 유씨에게 인사한 후 영아와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병졸 다섯 명의 호위를 받으며 경성 밖으로 달려갔다. 유소호는 말을 타고 3리 밖까지 배웅한 후 돌아갔다. 임새옥은 휘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는 점점 작아지는 그림자를 바라봤다.
‘부인, 잠시 피할 수 있어도 평생 피할 수 있어요?’
그녀는 떠나기 전에 아원이 싸늘하게 귓가에 속삭이던 말이 떠올라 마차에 기댄 채 참지 못하고 비 오듯 눈물을 흘렸다. 먹을 걸 끌어안고 먹던 영아가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목에 음식이 걸려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임새옥이 돌아오자 온 십방촌이 떠들썩해졌다. 사람들은 노씨 일가가 잠시 살고 있는 유가 저택으로 일제히 모여들었다.
임새옥은 한 손엔 금단을, 다른 손엔 조삼저를 안고서 싱글벙글, 올해 수확은 어떤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으며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마을 사람들은 임새옥이 붉은빛 비단 대금 겹옷, 연황빛 치마를 입고 가지런하게 틀어 올린 머리에 비녀도 여러 개 꽂고서 얼굴이 확 편 걸 보고 저도 모르게 경외심까지 들었다. 예전에 마을을 오가던 촌아이 같은 모양이 어디 한 구석이라도 남아 있는가 말이다. 금단이 거무죽죽한 진흙을 뭉쳐 옷에 바르고, 낯을 안 가리는 조삼저가 꼬질꼬질한 손으로 어깨를 잡아서 옷이 더러워지는 걸 본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제가 더 마음 아파했다. 임새옥은 전혀 느낌이 없는 듯이 아우들을 안고 장난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또 예전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노씨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빙그레 웃으며 영아를 불러 차 대접을 시켰다. 하지만 크고 작은 아이들과 함께 앉아 당과를 나눠주며 입고 장식한 것을 자랑하던 영아는 아예 노씨의 말을 듣지 않았다. 딸이 이번에 돌아와서 체면이 충분히 선 노씨도 화를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한마디 하고는 조삼랑에게 물을 끓이라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사양하면서 시간도 늦은 데다가 임새옥이 먼 길 오느라 피곤할 거라면서 서둘러 흩어졌다.
노씨는 이웃들이 가지고 온 달걀과 집에서 기르는 닭, 오리를 바라보며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으로 향했다.
“저아, 뭐 먹고 싶니? 어제 막 돼지 잡았는데, 그거 먹으렴.”
임새옥이 대답하기도 전에 금단이 굴러 내려가서 먹고 싶다고 소리쳤다. 임새옥은 물론 금단이 하자는 대로 돼지고기 먹자고 했다. 병졸과 마부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었는지 묻고는 조삼랑이 그랬다고 대답하자 안심하고 자리에 앉아 예전에 유씨가 묵었던 거처를 바라봤다. 지금은 노씨 부부가 기거하는데, 배치는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깔끔했다. 다만 대들보에 채소를 말려놓고 격간에 돼지고기가 걸려 있었다.
임새옥은 고개를 숙이고 품에 안긴 조삼저를 바라봤다. 아이는 그 사이 많이 커서 갈수록 조삼랑과 닮아갔다. 성격도 닮았는지, 임새옥을 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똥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걸을 수 있니?”
임새옥이 조삼저를 내려놓자, 아이는 탁자 다리에 기댄 채 그녀를 힐끔 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임새옥이 피식 웃었다.
“무뚝뚝해서는 성격이 괴상하다. 걷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 둬라.”
노씨가 안쪽 방에서 돼지고기를 가지고 나오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웃으며 조삼저를 안아 올렸다.
“우리 삼저아는 큰 뜻이 있는 거예요. 이런 건 침착하다고 하는 거죠.”
그러고는 노씨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노씨는 끓는 물에 돼지머리를 저며 던져 넣으며 물었다.
“네 시어머니가 눈치는 안 주더냐?”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노씨는 긴 장작을 꺼내 아궁이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어도 못 그러겠지. 무서워할 것 없다. 감히 눈치 주면 나하고 싸울 때처럼 해라. 무서울 게 무어야.”
“어떻게 그래요. 시어머니가 어머니랑 같아요?”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노씨가 콧방귀를 뀌고는 두어 차례 부채질을 해서 불길을 키웠다.
“그건 그렇지. 우리 모녀야 둘이 싸워서 뼈가 부러져도 그만이고, 아무리 싸워도 핏줄이지만, 그 집에서는 성씨 다른 남 아니냐. 네 어미가 부귀한 적은 없어도, 부귀한 사람들이 눈이 높은 건 잘 안다.”
그러면서 일어서서 임새옥을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널 이기지 못하니 살면서 말대답해도 괜찮다. 넌 먹을 거 먹고 마실 거 마시고,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임새옥은 코가 찡해져서 물 끓는다고 급히 가리키면서 말을 돌렸다. 노씨는 기름과 간장을 더 하고 솥 안을 휘휘 젓고는 회향(蘹香: 미나리과 채소, 향신료)을 넣고 돼지머리에 끼얹었다. 뚜껑을 덮고 마당에서 이야기하자고 임새옥을 끌고 나갔다.
영아가 마당에서 금단과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달아나고 하나는 쫓고, 커다란 잿빛 개도 신이 나서 왈왈거리며 쫓아다녔다. 담장 구석에 있던 닭들이 놀라 푸드덕거리기까지 하자, 노씨가 닭이 놀라 달아난다고, 썩 나가라고 꽥꽥 고함쳤다.
“사위가 밖에 마누라를 몰래 기르진 않고?”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노씨가 귓가에 속삭였다.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고는 고개를 저었다. 노씨는 그녀를 잠시 빤히 보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넌 내 딸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모를까 봐. 울상 짓고 있는 거 봐라. 시어머니가 아니라면 사위겠지.”
임새옥은 웃으면서 재빨리 대답했다.
“그럴 돈이 어디에 있어요. 어머니는 모르겠지만, 경성에서 마누라 두려면 돈을 물 쓰듯 써야 해요. 그럴 돈이 어디 있다고요.”
노씨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임새옥의 말을 계속 들었다.
“그냥 거기가 익숙해지지 않아서 그래요. 답답하게 집에 있거나, 정신없이 연회에 참석해야 해서 귀찮아요. 농사일하는 것처럼 편해야 말이죠. 어머니, 내년엔 집에 돌아와서 살까 봐요.”
그 말에 노씨는 깜짝 놀라 펄쩍 뛰면서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툭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것참 이상하네. 남들은 다 부러워서 침 흘리는 좋은 팔자를 넌 왜 고생처럼 말하냐. 다들 좋은 쪽으로 가려는데, 넌 왜 오히려 아래로 내려가려 해.”
임새옥이 언짢아져서 대답했다.
“농사일이 왜 고생이에요? 좋은 걸 몰라서 그러는 건데…….”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씨가 고함치면서 말을 끊고는 욕설을 퍼부어댔다. 얼마나 욕을 하는지, 임새옥도 입을 다물었다.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조삼저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흥미진진하게 그녀 머리에 꽂힌 비녀를 들여다봤다. 임새옥은 피식 웃고는 조삼저를 안고 달아났다.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 노씨도 불을 살피러 갔다.
한 시진 곤 돼지머리는 살이 벗겨질 정도로 야들야들해져서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노씨는 돼지머리를 그릇에 담고 목소리 높여 밥 먹자고 고함친 후 뒤쪽으로 갔다. 임새옥은 궁금해져서, 달려가는 금단을 붙들고 왜 뒤로 가는지 물었다. 금단이 코를 쓰윽 닦고 대답했다.
“누이, 외할머니가 거기 살아. 외할머니가 풍이 와서 못 나오니까, 밥은 거기서 먹으래.”
이야기하는 새에 어느새 후원에 도착했다. 노씨가 예전에 임새옥의 거처로 들어가는 걸 본 영아가 발을 굴렀다.
“저 좋은 집채를, 노인네에게 내어주다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금단이 던진 눈덩이에 얼굴을 맞고 순간 넋이 나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우리 외할머니를 욕하다니! 이 망할 계집애, 때려줄 거다!”
금단이 허리춤에 손을 대고 외치는 소리에 영아는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엉엉 울었다. 임새옥은 할 수 없이 그녀를 달래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화로를 지핀 방 안에 협죽도가 활짝 피어 있었다. 열기, 꽃향기가 지린내와 함께 훅 끼쳐오자, 임새옥은 역겨워서 넘어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격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임새옥의 그 비싼 침상에 누워있던,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을 노씨가 안아서 앉혔다.
깨끗한 옷을 입은 노인이 국화처럼 쭈글쭈글한 얼굴로 침을 흘리며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턱받침으로 멘 천은 이미 완전히 젖어 있었다. 노씨는 그녀를 바깥쪽 큰 의자에 데려다 놓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식사해요!”
노인은 그저 침을 흘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노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턱받침으로 바꿔주며 중얼거렸다.
“큰애가 돌아왔어요. 오늘 돼지고기 먹을 거예요.”
그러면서 자리에 앉아 흐물흐물해진 고기를 골라 노인에게 한입, 한입 먹였다. 노인이 반 이상은 흘리면서 먹자, 노씨가 큰 소리로 타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먹였다.
이미 익숙해진 금단과 조삼랑은 노씨가 고기를 고르고 나자 서둘러 앉아서 젓가락을 들었다. 임새옥과 영아가 멍하니 서 있는 걸 본 금단이 큰 소리로 불렀다.
“누이, 빨리 먹어. 늦으면 누이 건 없어.”
임새옥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조삼저를 안고 자리에 앉았다. 보드라운 부분을 골라 먹이려는데, 조삼저가 옹알거리면서 눈앞의 그릇을 가리켰다. 죽을 달라는 말이었다.
영아는 고기 냄새에 침이 꼴깍 넘어갔지만, 노인이 쉴 새 없이 침을 흘리는 데다가 코를 찌르는 이상한 냄새에 젓가락을 들고 있어도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조가 사람들이 열심히 먹고 있으니 저도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죽만 입에 퍼넣었다.
식사를 마친 후, 임새옥은 데리고 나가서 놀라고 조삼저를 영아에게 넘겨주었다. 노씨가 외할머니 얼굴을 깨끗이 닦은 후에야 자리에 앉아서 허겁지겁 밥을 먹는 걸 보고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노씨가 보고는 깜짝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임새옥은 눈물을 닦고는 한쪽에서 노씨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는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작년에만 해도 멀쩡했잖아요. 왜 갑자기 풍이 온 거예요?”
노씨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눈을 부릅떴다.
“성에 들어가서 부인이 됐다고 가냘픈 척하는 거냐? 아무것도 아닌 일로 눈물 바람은 왜 눈물 바람이야. 전에 큰 눈이 왔을 때, 외출했다가 넘어지고는 저렇게 되었다. 배은망덕한 네 외삼촌은 돌보지도 않고 시커먼 방에 내버려 두잖니. 네 덕분에 좋은 집에 살아서 방은 얼마든지 있으니, 네 외삼촌과 한바탕하고 외할머니를 모셔왔다.”
그러고는 임새옥을 가리키며 노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보세요. 큰애 알아보시겠어요? 전엔 아들 일가밖에 모르셨잖아요. 새해 인사 가도 매일 눈만 흘기고. 큰애가 놀라서 어머니 곁에 가지도 못했잖아요. 얘가 대운이 왔어요. 어머니가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거, 다 우리 큰애 덕이라고요. 우리 큰애가 멍청하다고 그랬죠? 경을 칠 소리라고요!”
이야기하다가 옛 생각이 난 노씨는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노인은 알 턱이 없으니, 노씨를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노인이 울기 시작하자 노씨가 그릇을 내려놓았다.
“또 오줌 쌌어요?”
만져봤더니 역시나 젖은 모양이었다. 노씨가 욕을 하며 안아다 침상에 눕히고 옷을 갈아입혔다. 임새옥은 다 식어 빠진 밥을 바라봤다. 목이 칼칼해졌다.
임새옥은 식사를 마치고 집에서 나와 길을 따라 밭으로 향했다. 천막엔 여전히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녀가 나타나자 서둘러 맞이하러 나왔다. 임새옥은 한 사람씩 둘러보며 물은 몇 번이나 줬는지, 비료는 뿌렸는지 물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직접 흙을 파 보면서 거름기를 유지하려면 내년엔 다른 걸 심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뭘 심으면 좋은지 물었고, 임새옥은 고개를 기울이고 생각하다가 손뼉을 쳤다.
“내년 하반기엔 다들 천막을 허물고 운대를 심어요.”
마을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운대는 그동안에도 먹어온 채소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운대 때문에 천막을 다 허물다니, 얼마나 아까운가.
“진정해요. 내년 수확이 끝나면, 다들 앞다퉈 운대를 사러 올 거예요. 이 채소보다 훨씬 비싸다고요. 이 운대는 먹으려고 심는 게 아니라 기름 짤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끼리 의견이 분분해지자, 임새옥은 이 자리에서 알아듣게 설명할 방법도 없으니 그냥 입을 다물고 내버려 두었다. 찬 바람이 불자 속도 후련해지고 마침 걷느라 다리가 아픈 참에 그 자리에 앉아 축축한 진흙을 만져보았다. 올해 눈이 다 제때 왔으니, 내년엔 분명 큰 풍년이 들 것이다.
“부인, 부인!”
느긋하게 쉬고 있는데, 영아가 저 멀리서 고함치며 달려왔다.
“노야가 오셨어요!”
영아가 고함쳐도 아랑곳하지 않던 임새옥은 그 말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봤다. 유소호의 마른 몸이 영아 뒤로 보였다.
“당신이 어쩐 일이에요?”
임새옥이 벌떡 일어나서 갖옷을 걸치고 눈앞에 나타난 유소호에게 물었다.
“특별히 휴가를 냈지. 혼자 보내니 도저히 마음이 놓여야 말이지.”
유소호는 그녀 옷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는 손을 잡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이 차갑잖아. 동상 걸리겠다.”
임새옥은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듯한 얼굴에 그녀는 그의 품을 파고들며 얼굴을 묻었다. 그녀가 갑작스럽게 열정적으로 달려드는 바람에 유소호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 그녀를 꼭 안고 웃었다.
“역시 고향에 돌아왔더니 사람이 달라졌네. 안심해. 그리 먼 것도 아니고, 앞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오면 되지. 낭자가 접대 같은 것 싫어하는지 나도 아니까. 그러니 이제 나 때문에 일부러 갈 것 없어. 아, 참, 돌아가면 내가 준비한 좋은 걸 보여줄게. 분명 좋아할 테니까.”
임새옥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들고 무엇인지 물었다. 유소호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하늘이 캄캄한 시간이고 바람이 심하게 불자, 그는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스러운 마음을 진작 내려놓은 노씨는 유소호를 붙들고 우리 딸 괴롭히면 안 된다고 재차 당부했다. 망할 여편네를 몰래 둬도 안 된다는 말에 유소호가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사위가 시원스럽게 대답하자, 노씨는 더 기뻐했다.
“사위는 열심히 관리 생활하게. 아이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나면, 우리 일가도 경성으로 갈 걸세. 그땐 우리 금단 앞날도 잘 챙겨주고.”
임새옥은 드디어 어머니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하며 헛기침했다.
“성에서 보내는 생활이 얼마나 힘든데요. 어머니가 어찌 살려고요.”
노씨가 바로 눈을 부릅뜨며 욕을 퍼붓자, 유소호가 듣기 좋은 말을 하며 가로막아서 말싸움이 나진 않았다.
스무사흘까지 돌아가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해서, 다음 날 이른 아침 부부는 마을 이웃에게 인사하고 길을 나섰다. 다행히 좋은 날씨가 이어지고 눈보라가 없어서 사흘 만에 변경에 당도했다.
어전을 지나갈 땐, 임새옥은 마차에서 내려 살피면서 유소호에게 월동 준비를 당부했다. 내년에 싹이 트면 제때 덮은 흙을 걷어내고 부드러운 흙을 거두고 수분을 유지해야 봄에 잘 자란다는 말에 유소호가 웃으며 일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소호가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임새옥을 잡아당겼다.
“그때 다시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왜 굳이 오늘 다 이야기하려는 건데. 앞으로 우리가 다시 이야기할 일이 없을 것처럼.”
임새옥은 눈시울이 붉어져서 서둘러 고개를 돌리고 운대 잎사귀를 살피러 갔다.
대문에서 기다리던 유씨와 아원은 그들이 들어오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임새옥이 다가가 인사하자, 유씨가 짐짓 화난 척 물었다.
“이제 안심하고 집에서 새해를 맞이할 수 있겠니?”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다가가 어리광을 부리자, 유씨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차가운 손을 쓰다듬었다. 어서 돌아가 옷 갈아입으라고 당부한 다음에 아원을 데리고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낭자.”
유소호가 임새옥을 붙잡았다. 아원의 의미심장한 눈빛을 본 임새옥이 그녀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유소호에게 붙들려서 후원으로 끌려갔다.
“나랑 좀 갈 데가 있어.”
처음에 이 저택을 샀을 때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커다란 화원이었다. 유씨의 생각은 이곳을 잘 정돈하고 꽃과 나무를 잔뜩 심으면 집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집에 돈이 없어서 잠시 접었고, 얼마 전에 손님 접대를 위해서 간단하게 정리하고 권붕을 지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처음 샀을 때 모습 그대로였었다.
그런데 지금 들어와 보니, 깔끔하게 정리된 땅에 새로 흙을 갈고, 경계를 구분해 두었다. 그리고 접객에 쓴 권붕은 천막이 되어 있었다. 밭에 세운 천막보다 더 훌륭하고 완벽한 밀폐 온실이.
“이, 이걸 어떻게 한 거예요?”
임새옥은 갑작스러운 광경에 너무 놀라 허둥대며 입을 가렸다. 유소호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며 가지런한 땅을 가리켰다.
“여기엔 채소도 심고, 보리도 심을 수 있어. 나중에 내가 저쪽에 입구를 내고 물을 끌어오면 벼도 심을 수 있지.”
그리고는 천막 앞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릴 때 봤던 아버지가 만든 온방대로 만든 것인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아서 이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어.”
유소호가 이야기하면서 돌아보는데, 임새옥이 입을 가리고 눈물을 흘리는 걸 보고 놀라서 멈칫했다.
“낭자?”
임새옥은 실내에 가득한 축축한 진흙 냄새를 맡으며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다해 고개를 들고 유소호를 올려다보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랑, 당신이 전해달라고 오 부인에게 부탁한 말, 다 들었어요. 알아들었고요.”
유소호는 몸이 굳어지더니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임새옥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랑, 만약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유소호가 만든 이 온방은 비닐하우스와 거의 비슷했다. 투광지를 발라놓은 창문도 몇 개 있는데, 다만 시간이 촉박해서 실내는 아직 따듯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실내 온도는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유소호의 이마엔 땀이 배어 있었다.
“낭자, 내 말 좀 들어봐.”
유소호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임새옥의 손을 잡았다. 위로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눈앞의 이 여인은 위로가 필요 없는 모습이었다. 처음엔 손을 살짝 떨었는데, 그 말을 하고는 오히려 평온해졌다. 고개를 들고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모습에 오히려 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당신을 속이려고 한 게 아니야. 다만 뭐라고 이야기해야 좋을지 몰랐어. 나는, 그날, 아니. 그러니까 오 부인에게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저 당신이…….”
“이랑.”
임새옥은 갑자기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유소호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처음에 송 낭자를 만났을 땐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죠?”
유소호는 그제야 하, 한숨을 내쉬더니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역시 낭자가 날 이해해주는군. 송 대낭은 우리 집과 인연이 있는 집안이었어. 그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 줄은 몰랐지. 예전에 그 집에서 우리 집에 한 일이 있어서,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못하고 조금 도와주었지. 그런데 그런 헛소문이 퍼질 줄 누가 알았겠어. 낭자, 그 사람 그래서 날 찾아온 게 아니야. 옥루는 그런 뻔뻔한 사람이 못 돼. 그날 날 알아보고는 바로 달아나서 내가 사람을 보내 찾은 거야. 내가 찾아가도 문을 걸어 잠그고 만나주지 않아서 연달아 사흘 찾아간 끝에 겨우 만날 수 있었어. 제 아버지가 옳지 않은 일을 해서 그녀 일가가 업보를 겪는 거라고 하더군. 그리고 내가 관직까지 얻어서 더 볼 낯이 없다고 하고.”
유소호가 이야기하다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임새옥의 손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낭자, 옥루가 나보다 나이가 몇 살 더 많은데, 생각은 정말 어린애더군.”
임새옥의 마음이 울렁거리면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미 가라앉을 대로 가라앉아서 더 가라앉을 것도 없었다. 임새옥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왜 날 속였어요? 어머니와 외롭게 사는 사람인데, 사내가 돌보는 게 편하겠어요? 그러니 헛소문이 돌죠.”
유소호가 한숨을 내쉬며 눈살을 찌푸렸다.
“다 어머니 때문이지. 우리 집에 변고가 생기고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지 못하게 된 다음부터 어머니는 예전에 알던 사람을 모두 원수처럼 여기시거든. 내가 입관한 첫날, 우리 집안 친척, 벗은 다 죽은 것이라 생각하라고도 하셨고. 옛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송 대낭은 우리 어머니 성격을 아는 사람이라, 죽어도 만나러 오지 않겠다고 하잖아. 어전 몇 묘만 주면 된다고. 그러면 굶어 죽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어전 몇 묘로 어찌 충분하겠어.
옥루가 강한 척하는 사람이라 알리지 않고 연회에 부른 적이 있어. 그 성격에 어디 그런 서러움을 견딜 수 있어야 말이지. 그날 연회에 갔다가 만났는데, 상금을 받으려고 울면서 억지로 술을 마시더군. 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지, 무슨 일이 났을지 모르지.”
임새옥이 조용히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연회가 생길 때마다 그녀를 불렀군요. 그것도 좋진 않아요. 차라리 돈을 더 주고 노래하는 걸 말리지 그랬어요. 젊은 여인이 그런 식으로 얼굴을 보이는 건 좋지 않잖아요.”
유소호가 웃음기가 더 짙어진 얼굴로 임새옥이 빼낸 손을 다시 잡았다.
“옥루가 연회에 동석하는 다른 여인들의 행실을 잘 알아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고 하더군. 내가 술을 안 좋아한다는 걸 듣고는, 처음 하는 일도 아니니 반드시 따라와야겠다고 했어. 낭자 대신 날 잘 지켜주겠다고.”
임새옥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니, 내가 송 낭자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그 말에 유소호도 웃으며, 임새옥이 다시 손을 빼서 등 뒤로 감춘 것도 모르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진작 당신을 만나러 오라고 했지. 당신은 어머니와 다르다고. 그런데 그럴 낯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해서. 휴, 낭자, 당신은 모르겠지만, 원래는 매우 고고한 사람이었어. 형편 좋을 때는 누굴 봐도 콧대를 높이 치켜들었거든. 성격은 또 얼마나 고집 센지, 예전엔 날 참 많이 괴롭혔거든. 그런데 또 사내아이처럼 담을 타고 나무에 기어오르고도 그러고. 내가 한 번 뭐라고 했다고, 나만 보면 돌을 던지는데…….”
그가 소꿉친구와 함께 보낸 달콤한 시절에 심취하자, 임새옥은 이야기를 빨리, 깔끔하게 진행하기 위해 헛기침했다.
“그럼 우리 연회에는 어쩌다 왔어요? 당신도 내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데리고 오다뇨.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이 그 여인을 뭐로 보겠어요?”
유소호가 겸연쩍은 듯 웃으며 손을 비볐다.
“처음엔 부를 생각이 없었지. 당신과 어머니를 만나라는 말만 해도 어린 쥐처럼 놀랐거든.”
그 여인의 수줍고 겁먹은 모습을 떠올렸는지, 그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임새옥은 그의 얼굴을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눈물이 흘러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닦는데 유소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연회 때문에 돈을 많이 썼다고 했더니, 그걸 기억하고는 다른 건 도와주지 못해도 연회에서 연주해서 흥을 돋울 수는 있다더군. 낭자를 위해서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겠다고. 어머니가 알아보고 흥이 깨질까 싶기도 하고, 또 당신이 예를 갖춰 그녀를 대해서 오히려 혼란스러워질까 봐, 그래서 말하지 않았어.
낭자, 그런 말을 전할 생각은 없었어. 옥루가 긴장하고 겁을 내며 며칠 동안 집에서 울길래, 잘 말해달라고 오 부인에게 부탁했을 뿐이야. 화내지 말아. 일부러 당신 체면을 깎은 게 아니야. 여인네 사이에 남의 청백을 오해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진작 퍼졌을 줄 누가 알았겠어. 정말 화가 나더군.”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랬군요. 안 됐네요. 많이 놀랐겠어요.”
한참 이야기를 마친 두 사람 모두 입을 잠시 다물었다. 임새옥이 고개를 들고 손을 몸 앞에서 마주 잡았다.
“그럼, 언제 그녀를 집에 들일 작정인가요?”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오자, 유소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낭자, 경성에 있는 동안 답답한 거 알아.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서 사람을 더 쓸 수도 없고. 지금 당신은 궁에 들어가 하사품도 받은 명부인데 어머니 몸은 갈수록 안 좋아지지, 아원은 우리 집 하인이 아니라서 언젠간 돌아갈 사람이고. 영아는 힘만 세고 아둔해서 기대할 수 없고. 어떻게 당신 한 사람에게 모두 맡기겠어. 그래서 내 생각에…….”
임새옥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혼인하고 새 사람을 들여서 나를 돕겠다는 건가요?”
유소호는 그녀의 미소에 흠칫해서 서둘러 손을 저었다.
“혼인이라니, 아니, 아니야. 송 대낭도 그랬어, 낭자와 같은 대우는 언감생심이라고. 들어와 첩이 되길 바란다고.”
유소호는 임새옥의 안색이 안 좋아지는 걸 보고는 품에 안고 위로하려고 다가갔다.
“낭자, 낭자, 아무도 당신 출신을 무시하지 못해. 지금 당신은 황제의 하사품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건 고명과도 비슷한 일이지.”
임새옥은 더는 참지 못하고 싸늘하게 웃었다.
“당신 말대로라면, 당신은 나를 위해서 새 사람을 들인다는 거네요?”
지금까지 한참 이야기했는데도 이렇게 톡 쏘는 말을 할 줄 몰랐던 유소호는 얼떨떨해졌다.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 한마디 하려다가, 그녀의 얼굴빛을 보니 농담을 하면 안 될 것 같아 잠시 어리둥절해하며 떠보듯이 물었다.
“낭자, 혹시, 싫은 건가?”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랑, 나를 위해서라면, 그래요, 싫어요.”
그 말에 유소호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뭐라고 반응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한순간 머쓱해져서는 헛기침하며 웃어 보였다.
“낭자가 정말 농을…….”
임새옥은 고개를 저으며 정색을 하고 그를 바라봤다.
“이랑, 농담이 아니에요. 나 때문이라면, 난 그 사람이 들어올 필요가 없어요.”
유소호는 조금 언짢아졌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다 헛수고였다는 생각에 안색도 안 좋아져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왜 이러는데. 안심해. 옥루는 어머니가 사온 첩들과 달라. 그녀는 당신을 존중하고 있어. 당신이 우리 유가의 은인이라고.
사실 난 옥루를 처를 맞이하는 예로 집으로 들일 생각이었는데,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거절하더군. 울면서, 자기가 어떻게 당신과 비교할 수 있냐고 하며, 기꺼이 첩의 예로 들어오겠다고 했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잘 아는데…….”
임새옥이 웃으며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잘랐다.
“관인, 진정해요. 옥루가 좋은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다른 거, 알았어요. 관인, 시원하게 말하지 그래요. 본인 때문에 그녀를 들이려는 거라고요. 처든 첩이든, 나 조화는 한마디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왜 날 끌어들여요?”
유소호는 이해할 수 없어서 멈칫하고는 한참 넋을 놓고 있다가 떠보는 듯이 다시 물었다.
“낭자, 그럼 동의한다는 거지?”
임새옥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이랑, 당신은 그녀가 좋아요?”
그 말에 유소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내가 웃는 모습을 보며 가슴의 큰 바위를 내려놓고 그녀를 끌어안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화아, 당신이 걱정하는 건 알아. 하지만 안심해. 우리는 결발 부부니까, 당신의 위치는 내 마음속에서 아무도 넘어설 수 없어.”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막았다.
“이랑. 나무 심을 때, 한 구멍엔 한 그루밖에 못 심어요. 한 구멍에 나무 두 그루 심는 거 보았나요? 하나를 뽑아내지 않으면 둘 다 죽어요. 이랑, 당신은 지금 당신 마음 하나에 동시에 두 사람을 심을 수 있나요?”
잔뜩 기뻐하던 유소호는 찬물이 끼얹어진 느낌이었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임새옥은 벌써 밖으로 나갔다.
한참 멍하니 있어도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동의한다는 건지 안 한다는 건지, 오늘 낭자가 왜 이리 말을 이상하게 하는 건지.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임새옥은 어느새 문을 지나 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소호가 허둥지둥 따라갔다. 날은 이미 완전히 저물어서 바람이 잔설을 휘몰아 얼굴을 때리자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다.
아원은 임새옥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자 서둘러 다가가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제 말 들으세요. 절대로 화내지 말고 참아야 해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돼요. 지금은 난리를 부릴 때가 아니에요. 그 사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따라왔고, 거처에서 소리를 들은 유씨가 영아를 시켜 들어오라고 불렀다.
휘장 너머로 보이는 불이 환하게 켜진 방 안에 유씨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있었다. 유씨 곁에는 하얀 비단옷을 입은 늘씬한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Goddamnit!”
막 임새옥의 곁으로 달려온 유소호는 자기 부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상한 말을 들었다. 손을 들어 말리려는데, 임새옥은 이미 바람처럼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노야, 이제 골치 아파지시겠어요.”
아원이 싸늘하게 하는 말에 유소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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