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57)

二. 대문을 활짝 열고 농가연을 열다

섣달에 들어서, 임새옥이 사려던 물건은 거의 준비되었고 이제 십방촌에서 보내올 신선한 채소만 남았다. 아원은 대들보에 걸린 돼지고기 반쪽을 보고 역겨워서 토하고 싶었다. 돼지고기가 집에 도착했을 때부터 안으로 들이지 못하게 죽어라 막았었다. 어찌 유씨 가문 같은 집에서 이런 저급한 고기로 연회를 열 수 있을까.

“돼지고기는 참 싸구나.”

임새옥은 살저항(殺猪巷: 돼지 잡는 골목)에서 온 점원에게 족발 열 개를 더 가져다 달라고 한 후, 아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족발로 싸고 맛있는 편두민저수(扁豆燜猪手: 편두, 족발로 만든 요리)를 만들 생각에 침이 흐를 것 같았다. 아원은 더욱 질겁할 뿐이었다.

“낭자, 사 오라는 들깨 사 왔어.”

양손에 보따리를 각각 들고 성큼성큼 뒤쪽 부엌으로 들어온 유소호는 부엌을 가득 채운 물건들에 마음이 놓였다. 아궁이에서 바삐 움직이던 임새옥과 영아가 재빨리 맞이했다. 영아가 들깨를 받았고, 임새옥은 젖은 손을 옷에 닦으며 빙긋 웃었다.

“이랑, 요리할 거 다 정했어요. 어머니랑 같이 봐 봐요. 안 되는 게 있으면 얼른 바꾸게.”

유소호는 그녀 얼굴에 묻은 가루를 닦아주며 사랑스러운 듯 바라봤다. 

“고생했어, 낭자. 오 대인이 내일 부엌어멈 몇을 보내준대.”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밖으로 밀었다. 

“어서요. 빨리 봐야 바꿀 시간이 있어요. 매일 바빠서 모처럼 일찍 돌아왔잖아요. 공무로 바쁜 거예요, 사적인 일로 바쁜 거예요?”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유소호의 몸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다. 

“어전에 있는 천막 채소가 막 자라기 시작해서 내가 있어야 해. 참고하러 보러오는 사람도 많고. 그래서…….”

유소호가 걸음을 멈추고 다급하게 말했다. 변명하느라 급하고 난처해하는 그 모습에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이마를 콕콕 찔렀다. 

“알아요. 우리 관인은 절대로 아내 몰래 이상한 걸 먹을 사람이 아니죠.” 

유소호가 살짝 붉어진 얼굴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낭자, 당연하지. 절대로 그런 일은 하지 않아.” 

임새옥은 마당에서 선을 넘는 친밀한 행동에 깜짝 놀라서는 농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그를 밀어내고는 서둘러 유씨의 거처로 재촉했다. 

“탕은 완자 무 탕으로 했고요, 주요리는 증교(蒸餃: 찐 교자), 유엽교(柳葉餃: 나뭇잎처럼 주름 잡힌 교자), 백채저육포(白菜猪肉包: 배추 돼지고기 만두), 운영면(雲英面: 연근, 보리를 섞어서 고기 덩어리로 만들어 찌는 음식), 소미희죽(小米稀粥: 좁쌀로 끓인 멀건 죽), 냉채는 장우육편(醬牛肉片: 쇠고기 장조림 편육), 능파채 분조(粉條: 당면), 박황과(拍黃瓜: 오이무침), 반잡소(拌雜蔬: 채소무침), 단 음식은 나미연우(糯米蓮藕: 찹쌀 연근), 은이연자돈홍조(銀耳蓮子炖紅棗: 흰목이버섯, 연밥, 대추 등으로 만든 음식,), 계단갱(鷄蛋羹: 계란찜), 두부, 석계(腊鷄: 소금에 절여 말린 고기)를 찌고요, 편두민저수, 저육분조(猪肉粉條), 동과대압(冬瓜大鴨), 수저어를 고고, 구채계단(韭菜鷄蛋: 부추 계란 볶음), 오화육(五花肉: 삼겹살), 이척(里脊: 등심)을 볶고, 생선, 가지를 졸이는 거죠.”

임새옥은 빽빽하게 채운 종이 두 장을 유씨와 유소호 앞에 내려놓고 손으로 꼽으며 읽었다. 아원이 곁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어찌 됐든 부인네 밭에서 심은 거거나, 마을에서 기른 닭, 오리네요. 유일하게 산 건 가장 저렴한 돼지고기고. 부인, 이번 연회, 음식은 많아 보이는데, 사실 돈 얼마 안 쓰셨죠?”

“기름, 소금, 간장, 식초 같은 조미료도 돈 드는데?” 

임새옥이 웃으며 하는 말에 아원은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 

“얘야, 이건 다 우리가 집에서 평소에 먹는 것들인데, 이걸 내놓아도 되겠니?”

유씨도 조금 불안한 듯이 묻자 임새옥이 웃으며 다가가 앉았다.

“어머니, 우리 형편이 어떤지 다들 알잖아요. 은자를 때려 부어서 체면치레해도 소용없어요. 차라리 그냥 보여주는 게 나아요. 어차피 우리가 여는 연회에 기대가 없을 것이고, 또 하나는요, 매일 맛있는 것, 비싼 것, 주루에서 만든 것, 이런 것 먹는 사람들이라 오히려 간단한 요리가 더 신선할 거예요. 어쩌면 의외의 기쁨일지도 모르죠. 게다가 어머니 며느리는 자기 솜씨에 자신이 조금 있답니다.” 

“그렇지. 어느 집을 가도 우리 낭자가 만든 것만 못하지.” 

유소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유씨도 웃었다. 

“그래, 마음 써서 준비한 것이니, 아는 사람은 알 게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섣달 초열흘 날, 반나절 동안 내리던 싸락눈이 오후가 되자 흩날리는 배꽃처럼 소복소복 내렸다. 

금박 겹옷 차림의 아원이 한겨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문 앞에 서 있었다. 신선한 채소가 한 광주리, 한 광주리 들어오는 걸 보면서 맨 앞에 있는 중년 농부를 향해 눈썹을 치켜떴다. 

“이제야 오면 어떡해요.” 

농부는 다름 아닌 십방촌에서 유가 땅을 관리하는 조육아였다. 아원을 모르지만, 차림새, 행동만 봐도 주인으로 손색없어 보여서 바로 웃음을 띠었다. 

“저아, 길이 안 좋아서 지체됐습니다. 바로 부인께 사죄하러 가겠습니다.” 

아원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은 그럴 겨를 없어요. 짐 내려놓고 뒤쪽 부엌으로 가요. 가서 후문 쪽 곁방에서 쉬고 있어요. 할 말은 부인 바쁜 일 다 끝나고 내일 이야기해요.”

조육아는 고개를 숙이며 사람들을 이끌고 허둥지둥 사라졌다. 아원은 다른 쪽에서 탁자, 의자를 옮기는 사람들을 지휘해서 후원으로 향했다. 영아는 둥둥대며 이게 도착했네, 저게 없네, 이건 준비 다 됐네, 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문지기 장사가 혼자 빗자루를 끼고 온 정원을 청소하는 걸 보고 아원이 발을 굴렀다. 

“길 낼 정도만 치우면 돼요. 다른 건 내버려 둬요.”

그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 임시로 고용한 어멈들이 문 앞에서 허둥대며 오 대인 댁 부인이 도착했다고 알렸다. 아원이 후다닥 달려가 맞이했다. 

온몸에 금빛 비단 배자, 백능 겹옷, 금빛 비단 치마를 입은 오 부인이 시녀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곁에 우산을 들고 있던 시첩이 아원이 다가가 예를 갖추자 웃음 지었다.

“요 녀석, 네 부인은 왜 널 하루 종일 붙들어 둔다니. 놀러도 오지 않고.” 

아원이 웃으며 시녀에게 오 부인의 손을 넘겨받아 안으로 안내했다.

“저희 집엔 사람이 없어서 사사건건 직접 해야 해요. 그래서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네요. 저희 고생할까 봐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오 부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일찍 와봤단다.”

그러고는 함께 온 시첩 다섯과, 어멈 다섯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가서 손님맞이를 돕게. 다들 조심하고.”

오 부인은 유소호가 있는 사농시 동료의 아내였다. 선량한 사람으로 가장 먼저 임새옥과 친분을 맺었다. 올해 서른아홉인 그녀는 임새옥의 시원시원한 성격, 순박한 모습이 좋아서 친딸처럼 여겼다. 오 부인과 임새옥이 가장 친한 걸 아는 아원은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영아를 불러 여인들을 함께 보냈다. 

대청 안에 자리 잡은 오 부인은 실내를 둘러보았다. 황동 화로, 주변에 장식된 활짝 핀 도화 나뭇가지, 갖가지 국화, 매화, 난꽃이 들쭉날쭉 운치 있게 놓인 걸 보고 살짝 안도하며 슬슬 치장할 때인데 부인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묻는데 유씨가 뒤에서 들어오자, 오 부인은 일어서서 예를 갖추고 각각 주인과 손님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때 임새옥이 오색 긴소매 웃옷을 입고 금지녹엽 치마를 나풀거리며 다급하게 들어와서 숨도 고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언니, 도와줄 사람을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요.” 

얼굴이 발그레한 걸 보니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오 부인은 임새옥 손이 젖은 걸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 

“준비는 잘 되었고? 너도 참, 뭐 하러 이리 애써. 정월에 해도 되는 것을.”

“걱정하지 말아요. 다 됐어요. 다만 언니가 저 대신 연회석은 맡아주세요.”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오 부인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정말로 네가 직접 요리하려고?” 

그 얘기를 들은 아원이 바로 얼굴을 흐리더니 속이 터진다는 듯 저쪽으로 가버렸지만,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언니들한테 새로운 것 맛보이려고요. 우리 시골 사람들은 평소에 뭘 먹는지도 보시라고요.” 

오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잡아끌고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저 여인들을 몰라서 그런다. 남 밟고 올라갈 생각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괜히 무리해서 버틸 것 없어. 내가 요리사를 부를 테니, 넌 신경 쓰지 말아.”

임새옥이 웃으며 감사 인사하고는 오 부인을 손을 토닥였다. 

“요리사는 어느 집에서나 부르잖아요. 매일 같은 것만 먹고요. 안심해요. 난 내려놓았어요. 괜히 뒤에서 수군대기 전에 아예 터놓으려고요. 시골 출신이 맞는데 뭘 감추고 숨겨요. 손가락질이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오 부인이 뭐라고 더 하려는데, 영아가 밖에서 뛰어 들어왔다. 

“노야가 부른 노래꾼이 왔어요.”

그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귀인 집에서 연회를 열 땐 청루의 기녀를 불러 흥을 돋우는 걸 임새옥도 알고 있었다. 명대로 하라고 영아를 보내는데, 부엌에서 어멈이 물을 것이 있다고 찾아왔다. 임새옥은 유씨에게 오 부인을 부탁하고는 서둘러 나갔다. 

반나절이 지나자 하늘은 점점 어두워졌고, 유가 문 앞에는 마차가 줄지어서 거리를 메웠다.

유소호는 비단 병풍을 펼치고 화려하게 자리를 깐 대청에서 관료 손님들을 모셨고, 유씨와 임새옥은 여자 손님들을 화원에 새로 준비한 큰 권붕으로 모셨다. 권붕 안에 큰 화로와 작은 화로 여러 개를 놓아두어서 포근했고, 여인들은 겉옷을 벗고 담소를 나누었다.

여인들은 오기 전에 입소문으로 오늘 유가 부인이 직접 요리를 한다는 것과 농가 채소를 선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에 임새옥의 출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비웃을 기회를 놓칠 리가 있을까. 다들 벗을 부르고 시첩을 이끌고 일찌감치 찾아왔다. 그리고 임새옥과 잘 지내는 선량한 부인들은 너무 걱정되어서 오 부인과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길 바라며 어멈, 시녀를 데리고 오느라 역시 일찌감치 왔다. 

첫 번째 탕요리와 완자 무탕이 식탁에 오르면서 연회의 서막이 열렸다. 아원은 중문 앞에 서서 냉채, 단 음식 위주의 두 번째 요리가 나가는 것을 보면서 조롱하며 웃는 소리가 들리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영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언니, 먹었어요. 다들 맛있대요.” 

뒤이어 고기 위주의 찜 요리가 탁자에 올라왔다. 두부, 갈비, 등심, 가지 요리가 세 번째 요리의 서막을 열 때, 영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먹었어요. 맛있대요. 다 웃고 있어요.” 

아원은 그제야 목까지 차올라 있던 걱정을 내려놓았다. 그때 오 부인 일가의 시첩 하나가 허둥지둥 걸어왔다. 

“저아, 노래꾼은? 왜 아직 안 보이니?”

아원은 그제야 생각나서 서둘러 사람을 보냈다. 잠시 후 간드러지게 치장한 여인 여덟 명이 저마다 악기를 들고 들어왔다. 다들 고개를 들고 웃는데, 백능 대금 겹옷에 붉은 비단 치마를 입고 월금을 안은 여인 하나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원은 쭈욱 한번 훑어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비파를 든 세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청으로 보냈다. 오가 시첩에게 저 세 사람을 여자 손님이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하고는 자기는 계속 중문 앞에 서 있었다. 안팎에 관악기, 현악기가 울리고, 웃음소리, 대화 소리가 사방으로 퍼졌다. 아원은 온 하늘에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채소 위주의 네 번째 요리가 올라왔을 때, 임새옥이 부엌 쪽에서 나오는 걸 본 아원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다. 같이 방 안에 들어가서 간단하게 씻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향분을 뿌리고 화장을 고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권붕으로 들어가자, 먹고 마시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부인, 솜씨가 좋으시네요.” 

“부인, 이리 와서 앉으셔요.”

“부인, 요리 좀 가르쳐 주세요.” 

여인들이 여기저기서 불러댔고, 성안현에 두 번이나 갔는데 없더라, 운운하며 남은 채소가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임새옥은 웃음 지으며 계속 겸손하게 고개를 저었고, 유씨도 일어서서 누추한 집에 들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손님들도 고맙다고 인사했다. 임새옥이 오 부인 쪽을 바라보자, 오 부인이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을 쳐주었다. 그녀는 됐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막 자리에 앉는데 사환 하나가 여인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눈치 빠르게 알아챈 아원이 바로 다가가 무슨 일인지 묻고는 돌아와 임새옥에게 알렸다. 

“노래 들으라고, 노야가 보내셨대요.” 

오 부인과 이야기 중이던 임새옥은 대수롭지 않게 돌아봤다. 월금을 안고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이 연회에서 자주 보는 경박한 기녀들과 달라 보였다. 고개를 끄덕여 주고 다시 돌아보는데 오 부인이 구석에 앉는 그 여인을 살짝 얼떨떨한 얼굴로 보고 있었다. 

“언니? 무슨 노래 들을까요?”

임새옥은 그렇게 묻다가, 오 부인이 비 온 뒤 갠 밝은 경치와 잘 어울리는 노래를 좋아하는 걸 떠올리고는 이제 막 들어온 월금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거기 자네…….”

그런데 오 부인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당기면서 난처한 얼굴로 말을 막았다. 

“그냥 마음대로 부르라고 해라. 매일 같은 거 들려서 질렸다. 다들 흥이 가득한데 왜 내가 좋아하는 걸 고르니!”

그러고는 무언가 알아내려는 듯, 임새옥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에 임새옥이 풉 하고 웃었다. 

“언니, 왜 그렇게 봐요. 얼굴에 뭐 묻었어요?”

임새옥이 얼굴을 만지며 묻자 오 부인이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부터 마음이 붕 뜬 것 같은 오 부인의 모습이 이상한데, 또 묻기도 그래서 가슴속 가득한 의문을 억눌렀다. 

“부인, 노야께서 나와서 술 한잔하시랍니다.”

그때, 아까 들어 온 사환이 다가와 하는 말에 임새옥은 안주인으로서 인사하라는 말임을 알아들었다. 법도에 맞는 일이라서, 양해를 구하고 다시 오 부인에게 부탁하고는 아원을 데리고 전청으로 향했다. 

대청에 도착해서도 고개를 들고 제대로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슬쩍 훑어보니 대청 가득 사람이 앉아 있고, 노래하는 여인 넷이 구석에 앉아 있었다. 연회석에 꽃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흩어져서 앉아 있는 걸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서 기록한 북송의 세도가들이 연회를 열 때 기녀를 데리고 가거나 기녀를 불러서 동석한다는 이야기구나 싶었다. 다행히 유소호 곁엔 절친한 동료 너덧이 앉아 있고 여인은 없어서 마음이 놓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모두를 향해 예를 갖췄다. 사람들이 올리는 감사주를 마시며 훑어봤더니 탁자 위의 음식은 대부분 싹 비어 있었다.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힐끔 유소호를 보니 얼굴이 발그레한 것이 술을 마신 모양이라 또 은근히 걱정됐다. 많이 마시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도 다가가도 되는지 몰라서, 유소호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사환, 방가(榜哥)라는 아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나지막이 몇 마디 당부하고 방가의 대답을 들은 다음에야 아원과 함께 전청에서 물러났다.

전청에서 나오는데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술을 거나하게 마신 관료들이 기녀들과 장난을 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너희 나리도 평소에 연회에 가시면 저렇게 여인들과 장난하시니?”

술을 몇 잔 마시고 취기가 오른 임새옥이 아원의 손을 잡은 채 투덜거렸다. 

“하이고, 그게 뭐 어떻다고요. 그냥 재미로 그러시는 건데요. 부인, 이런 것도 신경 쓰시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 체신 없으신 거예요.”

임새옥이 피식 웃었다. 

권붕 쪽으로 돌아갔더니,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아름다운 월금 소리만 쟁쟁 울렸다.

소복소복 내리는 눈발이 등불 빛 아래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월금을 참 잘 켜는구나. 그런데 어쩐지 서글프게 들리는데?”

잠시 멈춰 서서 연주 소리를 듣던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권붕 안으로 들어갔더니, 모든 이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금을 켜는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새옥이 들어온 걸 본 월금 여인의 손이 살짝 떨리더니 마지막 음이 살짝 어긋났다.

“멋진 연주네요. 상을 내려야겠어요.” 

임새옥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원을 돌아봤다. 그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무수한 시선이 느껴졌다. 한순간 고배율 스포트라이트가 머리 위로 떨어진 듯, 주위의 온도가 확 올라간 느낌이었다. 

영문 모를 시선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왜? 내가 뭘 잘못했지? 전에 연회에 참석할 때도 요리사, 노래꾼 칭찬하며 상 주지 않았나? 요리는 내가 했으니 상은 필요 없고, 기녀에게 상을 내리는 게 뭐가 잘못되어서?

그녀가 의아한 듯 모두를 둘러보자, 사람들의 표정이 별안간 평소대로 돌아왔다. 다들 웃으며 칭찬하더니 상을 주라고 저마다 말했다. 임새옥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아원을 바라봤다. 아원 역시 의문 가득한 눈빛이지만, 그녀를 향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임새옥은 잠시 의문을 내려놓고 천천히 자리로 돌아갔다. 슬쩍 그 월금 여인을 바라봤더니, 그 여인도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 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 여인은 놀란 듯 시선을 거두더니 고개를 숙인 채 사람들 뒤로 물러갔다. 

마지막 마차를 배웅한 후, 유가 대문이 서서히 닫히고 등불도 하나둘 꺼졌다. 침상에 누운 임새옥은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아서, 술에 취해 자는 유소호를 슬쩍 밀었다. 

“해장탕 먹었어요? 속 아플 텐데 먹어요.”

유소호가 웅얼거리면서 그녀를 품에 안자, 술 냄새가 확 올라와서 후다닥 밀어냈다. 

“아후, 술 냄새!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마셨어요.” 

유소호는 버둥거리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잠기운이 사라지고 술기운에 자극받은 욕정이 몰려왔다. 앞머리가 흐트러진 임새옥의 얼굴에 노기가 아직 남은 걸 보고 고개 숙여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우리 낭자, 정말 기쁜 하루였어. 당신은 정말 좋은 아내야. 최고의 아내고.”

임새옥은 술 냄새를 견디지 못하고 힘껏 그를 밀어냈다. 

“오늘 힘들었잖아요. 어서 자요.”

유소호는 술에 취해 히죽히죽 웃다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평소에 그 흥이 생기면 계속 엉겨 붙던 것과 달리 곧바로 잠이 들어서 안도하다가, 술을 마시고 불편할까 싶어 냉큼 일어나 물을 먹였다.

그러고는 다시 누워서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 고비를 넘겼다. 이번엔 어찌 됐든 유가 체면을 버리진 않았겠지? 

유소호가 자기를 품에 안는 게 잠결에 느껴지자 그의 턱에 얼굴을 비비면서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유소호가 귓가에 속삭이는 ‘옥루 누이’라는 말에 화들짝 눈이 떠졌다. 

조금 전에 들은 것이 환청이라는 듯이, 컴컴한 방 안엔 유소호가 작게 코 고는 소리 말곤 창밖에서 윙윙 부는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이불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밖에서 부는 매서운 바람이 대청을 뚫고 들어온 듯이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임새옥은 창밖에 윙윙 부는 북풍 소리를 들으며 언제 잠든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 살며시 몸을 쓰다듬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오는 시각,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려고 허리를 숙이던 유소호는 그녀가 깬 걸 보고 입을 맞추었다. 

“이런, 깨웠군. 소생, 잘못했습니다.”

임새옥은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비틀고 신물을 뱉어냈다. 유소호가 깜짝 놀라서 품에 안고 왜 그러는지 물었다. 

“괜찮아요.”

토하고 났더니 미식거리는 느낌이 가라앉은 임새옥은 이불자락을 잡고 달달 손을 떨었다. 유소호의 얼굴을 볼 엄두도 나지 않아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시간이 이리 됐네요. 공무하러 가야죠.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요. 난 조금 더 누워있을 테니, 어머니께 말씀드려 줘요.”

유소호는 잔뜩 걱정한 얼굴로 어제 너무 힘들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그녀를 눕혔다. 그러고는 머리를 빗을 여유도 없이 옷을 입고 의원을 부르라고 유씨를 찾아갔다. 기운이 쭉 빠진 임새옥은 유소호를 말리지도 못하고 비스듬히 누웠다. 

방 안이 한순간 고요해졌다. 임새옥은 귀가 막힌 듯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창밖의 목근(木槿)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창을 때리며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어딘가 모르게 험상궂기만 했다.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떠는데 유씨, 아원, 영아가 우르르 들어왔다. 

“아가, 좀 어떠니? 자꾸 토하고 싶은 것이냐?”

유씨가 긴장하고 또 기쁜 듯한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얼굴이 창백하구나.”

유씨는 침상 곁에 앉아 임새옥의 이마를 짚었고, 아원과 영아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내밀었다. 

“굳이 애를 쓰더라니. 연회 요리를 어찌 혼자 하신다고 고집을 부리셨어요.”

아원은 얼굴은 걱정 가득한 표정인데 말은 또 그렇지 못했다. 유씨가 주저하다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아가, 이번 달거리는…….”

임새옥은 부르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며 웃었다. 

“어머니, 아니에요……” 

말이 끝나기 전에 유소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머니, 호 의원 모시고 왔습니다. 휘장 내릴까요?”

“자주 오가며 얼굴 아는 사이인데, 무슨 대수냐.” 

유소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약상자를 등에 멘 수염이 허연 노인을 모시고 들어왔다. 골목 입구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의관을 차린 호 의원으로, 유씨가 자주 잔병을 앓아서 잘 아는 사이였다. 의원은 서로 예를 갖추고 침상 앞에 앉아서 팔을 내밀라고 하고는 세 손가락을 맥 위에 얹었다. 의원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유심히 맥을 살핀 후 왼손도 살폈다. 진맥이 끝나자 유씨를 향해 안색을 살펴도 되냐고 물었다. 

“자주 보는 사이 아닌가. 괜찮네.”

호 의원은 눈을 찌푸리고 유심히 임새옥을 살폈다. 여인은 얼굴이 창백한 가운데 붉게 달아오르고 눈썹을 살며시 찌푸리고 있다가 입술을 살짝 끌어올리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호 의원은 시선을 돌리더니 유씨에게 임새옥의 기거, 식생활을 물었다.

“요 며칠 집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이 아이 혼자 맡았네. 어젠 날도 추웠는데 술도 두어 잔 했네.”

호 의원은 일어서서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렇다면 제가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닙니다. 맥이 허하고 약한 데다가 안색이 차고 창백한 것을 보니 간에 열이 오른 것입니다. 토(土)가 허하고 목(木)이 성해서 허혈이 온 것입니다.”

유소호와 유씨는 얼굴을 마주 봤고, 아원이 곁에서 물었다. 

“원인은요?”

“염려가 과도하여 가슴이 답답하고 기(氣)가 흐름을 잃은 것입니다.”

임새옥은 무심결에 의원을 힐끔 보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용한 의원 같으니라고. 

유씨는 실망한 얼굴로 아니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유소호는 듣고도 개의치 않으며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심한지 아닌지 물었다. 호 의원이 웃으며 약상자를 정리했다. 

“열 내리는 약을 먹으면 됩니다. 마음을 편히 먹고 음식을 담백하게 드시면 며칠 뒤엔 낫습니다.” 

유소호는 그제야 안도하며 직접 호 의원을 배웅했다. 그리고 약재를 가지고 와서 영아에게 달여오라고 건네주고는 밥도 먹지 않고 직접 탕약을 들고 들어왔다. 

“아원은요? 왜 당신이 해요. 어서 가서 식사해요.”

“아원은 외출했어. 아원이 있어도 내가 먹여야 안심이지.”

눈살을 찌푸리며 묻던 임새옥은 유소호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유소호는 그녀가 약을 먹는 걸 보며 안도했다.

“낭자, 내게 할 말이 있지?” 

임새옥이 미간을 찌푸린 채 약을 먹고는 다시 누워서 기운 없는 얼굴로 평소처럼 웃지도 않는 걸 본 유소호가 잠시 생각하다가 손을 잡으며 물었다. 

임새옥은 순간 또 가슴이 답답해졌다. 유소호에게 잡힌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더니, 청수한 얼굴에 걱정이 한가득했다. 물어보려던 그 말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로 변하고 말았다.

유소호는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저잣거리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라 이야기해주었다. 임새옥이 조금씩 웃음 짓는 걸 보고 창 밖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일찍 돌아올게. 같이 있을 테니 약 잘 챙겨 먹고. 쓰다고 안 먹으면 안 돼.”

그는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일어나서 머리를 빗었다. 

“이랑, 내가 빗겨 줄게요.”

임새옥은 침상에 누워서 잠시 바라보다가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유소호가 말리려고 하는데 어느새 일어나서 웃고 있었다. 

“힘들어서 그런 거지, 큰 병은 아니에요. 당신은 숱이 많아서 잘 못 빗으면 못나서 안 돼요.” 

유소호가 피식 웃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가만히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제 조그마한 녹색 교자는 무엇으로 만든 거지? 다들 맛있다던데.”

임새옥이 머리끈을 입에 물고 대답했다. 

“유엽교예요. 능파채 즙으로 반죽을 해서 얇게 피를 밀어 들깨를 넣고 버들잎 모양으로 빚는 거예요. 솥에 잠깐 찌면 돼요.”

“그럼 또 즙은 얼마나 짠 거야? 어제 열몇 통은 쪘을 텐데.” 

유소호는 마음 아픈 듯이 말하면서 임새옥을 올려다보며 살며시 웃었다. 

“낭자, 어제 연회, 정말 좋았어. 요리를 다 먹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리도 다 빼앗겨서, 난 유엽교를 하나밖에 못 먹었는데. 아야…….”

임새옥이 허둥지둥 손에 힘을 풀고 머리카락을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너무 세게 잡아당겼네요. 아파요?” 

서둘러 이마를 문지르던 그녀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맴돌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소호가 헛웃음을 지며 그녀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이게 무슨 대수라고 이래. 오히려 나 때문에 당신이 놀랐네. 난 안 아파, 안 아파. 설사 내 머리 껍질을 뽑아도 안 아프지.”

임새옥은 기혈이 거꾸로 몰리는 기분에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일어섰다. 

“어서 가요. 늦었어요.”

시간이 이르지 않은 탓에 유소호는 아무런 말 없이 서둘러 매무새를 가다듬고 모자를 썼다. 임새옥은 털옷을 걸쳐 주고 문 앞까지 배웅한 다음 그가 눈이 쌓인 길을 밟으며 멀어질 때까지 문에 기댄 채 서 있었다. 

“방금 약 드시고 바람맞으면 어떡해요.”

이진탕 한 그릇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아원이 저 멀리 내다보며 말을 건넸다. 임새옥은 대답도 없이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서서 꽃병에 핀 매화를 쓰다듬었다. 아원은 등 뒤에 서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청루 골목에서 온 사람이 아니래요. 같이 온 게 아니라고 청루 어멈이 그러더라고요. 방에 도착했더니 벌써 기다리고 있더래요. 장사에게 물었더니 방가가 데리고 왔다고 하고.”

“이름이 뭐라든?”

임새옥이 손에 매화 가지 하나를 꽉 쥐고 천천히 물었다. 귓가에 아원의 말이 먼 듯 가까운 듯 메아리쳤다. 

“……대인은 한 번도 기녀들을 곁에 두지 않으셨대요. 마음에 든 여인이 있다고. 외곽 영두항에 사는데, 기녀가 아니라 양민이래요.…… 다들 송 낭자라고 부른대요. 월금 솜씨가 뛰어나고…… 스물 남짓이고.…… 연회에서 대인들이 하는 말을 들은 거래요. 진짜인지 어떤지도 모르겠고요. 오늘 제가 오 부인 댁에 가보려고요.”

임새옥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손을 펼쳐 보니 손바닥은 벌겋고 발치엔 부러진 매화 가지가 떨어져 있었다. 

“가서 물을 거면, 내가 직접 가서 물어야지.”

“부인, 어째서 관인께 묻지 않으세요.” 

아원은 잠시 임새옥을 빤히 바라봤다. 임새옥은 손을 꽉 움켜쥔 채 천천히 내실로 들어가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못하겠어.” 

임새옥이 옷을 갈아입을 거라는 걸 아는 아원이 서둘러 따라갔다. 

“부인, 제가 보기에 관인은 마음이 변하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아원은 상자를 들여다보고는 침향색 비단옷을 골라 임새옥에게 입히며 말을 이었다. 

“부끄러워하는 성격도 아니니 그냥 말할게요. 관인이 그럴 분이면, 제 미모로 지금 여기에 서서 부인 옷 갈아입는 거나 도와드리겠어요?”

임새옥은 피식 웃고는 금세 흐려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마음에 드는 사람을 못 만난 거였겠지.” 

임새옥이 폭넓은 비취색 치마를 조이며 하는 말에 아원은 할 말을 잃었다. 분을 고르게 발라주고는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말없이 중문 쪽으로 걸어갔다. 

“만약, 진짜라면…… 관인이 그 여인을 집에 들이려고 불러와서 부인과 대면시킨 거잖아요. 허락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미리 말씀드리는데, 그런 법은 없어요. 난리 부릴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우리 부인도 기껏해야 방 안에 가둬놓고 노야를 때리고 화풀이나 하지, 첩을 쫓아내지는 못하셨어요.” 

임새옥은 그 자리에 서서 넋을 잃었다. 아원이 한 말만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만약 진짜라면. 만약 진짜라면…….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주인과 종 두 사람이 눈 온 땅에 서서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데, 유소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났을 뿐인데 왜 돌아왔지?

유소호는 관복 차림으로 급하게 달려와서 한 손에 관모를 든 채 헐떡이며 말했다. 

“어서 함께 갑시다. 입궁하라는 태후마마의 명이야.”

그 말에 임새옥과 아원 모두 안색이 변했다. 

“태후마마요? 절 왜요?” 

임새옥은 조금 전까지 답답하던 마음을 싹 잊었다. 태후라니, 황제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현재 가장 존귀한 여인이잖아. 나랑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인데? 

유소호가 조정에 들어가 관리가 된 것만으로도 뜻밖의 일이었다. 하물며 황가와 관계를 맺은 건 어떻겠나. 

유씨도 영아를 붙들고 손에 상자 하나를 들고 허둥지둥 다가왔다.

“준비된 관(冠)이 없으니 장식을 많이 꽂고 가거라. 새로 만든 대홍색 궁수포를 입고.” 

임새옥도 넋이 나간 상태라 시키는 대로 했다. 향 반 개 태울 시간 만에 일가가 모두 준비를 끝내고 전청으로 갔다. 붉은 망의(蟒衣: 황금색 이무기를 수놓은, 대신들이 입던 궁중 예복), 삼산모(三山帽), 분홍 바탕의 조혜(皂鞋) 차림의 중년 사내가 일어서서 미소 지었다. 

“유 부인, 축하드립니다.”

임새옥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속으로 ‘내가 진짜 태감을 만났구나!’만 되뇌었다. 그런데 쳐다볼 엄두는 나지 않아서 황급하게 답례하는데 유소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녕궁 조 마마의 측근 내시 장 대인이십니다.” 

“하하하, 따지고 보면 가까운 사이입니다. 제 조카가 얼마 전에 유 대인이 계신 어전시에 들어가서 대인의 수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족 아닙니까.” 

장 태감의 말에 일가가 따라 웃었다. 잠시 한담을 나누고, 장 태감이 이제 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씨가 차라도 한잔 드시라고 하자 장 대인은 고맙다고 인사하고 태후마마께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신다고 말했다. 유씨도 더는 붙잡지 못하고 직접 배웅했다. 

문밖에 진작 기다리던 마차 곁에 서 있던 궁정 차림의 여인들이 임새옥을 부축해 마차에 태웠다. 다른 사람은 부르지 않아서 시녀를 데리고 갈 수 없게 된 터라, 임새옥은 겁에 질려 손을 달달 떨었다. 다급해진 아원이 후다닥 달려와 ‘무릎 꿇고, 고개 숙이고, 말은 적게 하세요.’ 하고 최대한 간단히 당부했다. 유소호는 직접 말을 타고 마차를 따라갔다. 일행은 빠르게 멀어졌고, 유씨는 영아, 아원, 장사와 함께 문 앞에 서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들을 지켜봤다. 

마차는 나는 듯이 거리를 지나 곧장 어도(御道)를 향해 질주했다. 단정하게 마차 안에 앉은 임새옥의 맞잡은 두 손에 땀이 가득했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도 따라 흔들려도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를 보고 두 궁녀가 비웃지는 않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유소호가 곁에 서 있기에 그의 손을 꼭 잡고 내렸다.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서지도 못했다. 

두려움이 가득한 그녀를 보며 유소호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이 자리에서 품에 안을 수 없음이 안타까운데, 다행히 장 태감이 일부러 돌아서 주자 임새옥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화아, 화아, 두려워하지 말아. 마마는 자상한 분이셔. 연회 이야기를 들으시고 물으실 것이 있다고 일부러 부른 것이고 다른 일이 아니니, 그저 만드는 방법을 알려드리면 돼.” 

유소호는 그녀 곁에 바짝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며 말을 이었다. 

“귀한 분들도 사실 매우 답답하게 지내시지. 재미있는 이야기 해서 무료함을 달래드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무서워할 것도 없어. 설사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출신을 아시니 탓하지 않으실 테고.” 

임새옥은 하나하나 다 듣고도 유소호의 손을 놓지 못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사내가 얼마나 필요한지 깨달았다. 그저 이렇게 손을 잡은 것만으로, 아직 어린 사내일지라도 몹시 든든했다. 한순간 저도 모르게 유소호의 손이 빨개질 정도로 꼬집었다. 

“소호, 날 버리지 마요. 여기서 기다려요.” 

유소호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그 역시 힘껏 그녀의 손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지 않아. 줄곧 여기서 기다릴게. 무서워하지 말아. 줄곧 여기서 기다릴게. 화아, 이번 일이 지나면, 당신을 얕잡아 보는 사람이 다시는 없을 거야. 아무도 당신을 넘어서지 못해.”

목소리를 낮춰서 하는 마지막 말에 그녀의 온몸이 바짝 굳었다. 임새옥은 억지로 조금 웃으며 겨우 입을 열었다. 

“이랑, 난 그런 건 상관없어요. 난 그저…….”

말이 끝나기 전에 장 태감이 저쪽에서 크흠 하고 크게 헛기침했다. 시간이 된 것을 깨달은 임새옥은 하지 못한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유소호의 손을 놓고 장 태감을 따라 들어갔다. 

바람이 불자, 어도에 남은 눈송이가 그녀의 주위를 하얗게 맴돌았다. 유소호의 모습이 차츰 멀어졌다. 

임새옥은 내궁으로 들어가는 내내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저 장 태감만 따라 걸었다. 구불구불한 길을 일각 정도 걸어도 심궁 내원의 경치가 어떠한지 알지 못했다. 발치에 청석 바닥이 정말로 깨끗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걸어가는 동안 마음이 오히려 편안해졌다. 손발도 아까처럼 심하게 떨리지 않았다. 아무 생각이나 하며 장 태감을 따라 화청(花廳)으로 들어가는 순간, 따듯한 향기가 불어오고 발밑이 구름을 걷는 듯 폭신폭신해졌다.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를 들으며 넋을 잃는데 장 태감이 살며시 건드렸다. 그녀는 뜻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고대에 온 이래 이토록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은 건 처음이었다. 

“마마, 유가 조씨 들었습니다.”

장 태감이 웃으며 고했다. 바닥에 엎드린 임새옥의 귀에 주렴 소리와 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들어오너라. 얼굴 좀 보자꾸나.” 

임새옥이 얼떨떨하게 가만히 있는데 장 태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씨, 어서 감사 인사하고 들어가시지요.” 

그녀는 그 말에 겨우 고개 조아려 감사 인사를 하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곁에서 나직이 웃는 소리가 들려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멈출 엄두는 나지 않아 서둘러 격간(隔間: 칸막이로 나눠진 공간)으로 들어갔다. 

“민부(民婦), 마마를 뵈옵니다.”

다시 털썩 무릎을 꿇고 상좌를 향해 절을 하는데 웃음소리가 더 커져서 저도 모르게 심장이 심하게 뛰었다.

“이 아이 놀라겠다.”

여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저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됐다, 일어나라.”

임새옥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좌우에 서 있는 수많은 비단 치마가 곁눈에 보이자, 그제야 잘못된 방향으로 절한 걸 깨달았다. 어쩐지 다들 웃더라니.

임새옥은 그렇게 선 채 목소리의 여인이 묻는 말을 들었다. 역시나 어제 연회 때문이었다. 알고 보니 하필 공교롭게 황제의 형제인 기왕(岐王) 조호(趙顥: 송 영종 차자, 송 신종의 동복 형제)가 중간에 연회에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산해진미에 익숙한 황족은 한 상 가득한 붉고 푸른 음식에 푹 빠져서 즐겁게 먹고는 돌아갈 때 유엽교를 싸 갔단다. 대부분 황궁에서 기거하는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께 효도하는 걸 물론 잊지 않고 음식을 올렸다. 그 바람에 유가 조씨가 알현하는 기회를 선사하게 된 것이다. 

“호아가 하는 말에 어찌나 군침이 돌던지. 조씨, 다른 건 됐고, 유엽교는 어찌 만든 것이냐? 어째서 궁에서 만든 것은 네 집 것과 다르지?”

임새옥은 용기를 내서 그제야 살짝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탁자 위에 유엽교가 잔뜩 쌓여 있었고, 맞은편에는 은발이 가득한 나이 든 여인이 있었다.

이분이 바로 역사에서 유명한 조 태후겠거니 했다. 마음이 어찌나 들뜨는지, 감히 고개를 들어 귀한 얼굴을 직시하지 않도록 얼마나 애썼는지 모른다. 

눈앞의 조 태후는 임새옥이 후세의 드라마에서 보던 변태 같던 태후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장군 가문 출신에 경전과 사서를 섭렵한 사람으로 황제 세 분을 보좌했다. 거기에 심성까지 순수하고 선량하고 마음이 드넓은 여인이었다. 물론 왕안석 변법에 대한 행동은 그녀의 식견 문제지, 도량 문제가 아니었다.

임새옥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곁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조 태후 곁에 묘령의 여인들이 여남은 명이 모여 있는데, 하나같이 궁중 차림으로 손수건, 부채를 들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에 눈이 아른거려 재빨리 다시 시선을 내리고는 유엽교 만드는 방법을 설명했더니,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우리도 저렇게 만들었는데, 왜 느끼하기만 할까요?” 

임새옥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향한 걸 느끼면서 대답했다.

“어주방(御廚房: 황제의 어선을 만드는 주방)에서 향유(香油: 참기름)를 넣었을 것입니다.” 

“아, 어서 가서 알아보고 오너라.” 

조 태후는 사람을 보내고는 임새옥에게 이런저런 걸 물었다. 몇 살인지, 가족은 또 누가 있는지. 언제 혼인한 것인지. 이곳 생활은 어떤지. 놀랍게도 평범한 집안에서 나누는 일상 이야기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녀가 돌아와 웃으며 고했다. 

“역시 그랬습니다. 어째서 향유를 넣었는데 오히려 맛이 없어질까요?” 

임새옥이 서둘러 대답했다.

“제가 만든 건 모두 촌사람이 평소에 먹는 조악한 음식입니다. 양념도 잘 쓰지 않습니다. 소맥분도 거칠어서 궁에 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제 알겠군. 양념이 음식의 원래 맛을 덮은 게지.” 

임새옥이 시골에서 온 걸 아는 태후는 요즘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어떤지 물었고, 임새옥은 당연히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했다. 태후는 더욱 기뻐했다. 

“네 덕분에 우리도 신선한 채소를 충분히 먹는구나. 전에는 묵은 송채를 일 년 내내 먹었는데 올해는 얼마나 좋았는지.” 

임새옥이 다시 황급히 일어나 가당치 않다고 고했다. 조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심히 그녀를 살피고는 보라는 듯이 주변 사람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 아이의 행실을 다들 좀 보게. 대대로 이어온 학자 집안 출신 고명 부인과 전혀 다름없지 않나. 생김새도 곱고, 몸도 튼튼해서 아이도 잘 낳겠구나.” 

태후의 말에 다들 입을 가리고 웃었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임새옥도 얼굴이 붉어졌다. 조 태후가 아이고, 하면서 사람들을 손가락질했다. 

“웃긴 뭘 웃는 게냐. 젊은이들이 뭘 알까. 여인이란 이런 모습이라야 복이 있는 게다.” 

사람들은 당연히 웃으며 맞장구쳤다. 임새옥은 고개를 숙인 채 따라 웃으며 대답했다. 

“매일 밭일 하는 저희 같은 사람이 어찌 귀한 분과 비교하겠습니까. 오늘 마마를 이렇게 뵙고, 마마의 좋은 운을 나눠 받았는데 아마 평생 다 쓰지도 못할 겁니다.”

조 태후도 기쁘게 웃었다. 경성의 귀부인, 궁인들의 입에 발린 아첨만 듣다가 이런 말을 들으니 진실되다 느껴져서인지 더 기분이 좋아져서 마을 노인들은 몇 살인지 물었다. 사실 십방촌엔 장수하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임새옥이 설사 바보라고 해도 그렇게 대답할 순 없었다. 조삼랑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몇 사람 이야기했더니 조 태후가 더 기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었지. 생각해 보니 네 고향 성안현과 그리 멀지도 않구나. 열몇 살에 궁에 들어온 다음 나간 날이 손에 꼽히고, 지금은 나가보고 싶어도 이 몸으로는 갈 수가 없구나.” 

사람들은 얼른 화제를 돌리며 따라 웃었고, 임새옥은 조금 서글퍼져서 살짝 고개를 들고 환갑에 가까운 노인을 바라봤다. 역사로 따져보면, 수명이 고작 3, 4년 남았다.

조 태후가 시골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몇 개 찾았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신불(神佛) 이야기를 해주니, 조 태후가 넋을 놓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주변 궁녀들도 매우 좋아했다. 깊은 궁궐에 갇혀 사는 여인들은 한창나이에도 시시각각 조심하며 살아야 했다. 생활 걱정은 없다지만, 마음은 항상 조마조마한데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기니 하나같이 귀를 쫑긋하고 빠져들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흥이 나고 듣는 사람은 기뻐하며 듣는데,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여긴 참 떠들썩합니다.” 

임새옥은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궁녀들이 벌써 달려가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폐하!” 하고 외치자, 그녀도 가슴이 떨려 허둥지둥 따라 꿇었다. 

사람과 함께 한기가 따라 들어오더니, 눈앞에 색깔이 현란한 여우 가죽 장화와 자색 비단 장포 자락이 나타났다. 들어 온 사람은 그녀들을 지나쳐 조 태후 곁으로 다가가 문안을 올렸다. 조 태후가 서둘러 일으켰다. 

“주 첩여가 출산을 앞두고 음식을 잘 못 먹는다고 들었소만, 관가, 다녀오셨소이까?”

들어 온 사람은 바로 황제 조욱(趙頊), 국사를 처리하고 문안 인사를 올리러 온 것이었다. 황제는 우선 모두 일어나라고 한 다음에 태후의 말에 대답했다. 

“마마, 태의가 지키고 있습니다. 괜찮다고 하는데, 오늘도 음식은 먹지 못하고 신선한 우유만 조금 마십니다.” 

조 태후는 손이 귀해 아직 아들이 없는 황제를 위해 근심 가득한 얼굴로 염불을 외웠다. 황제는 그때 모두를 둘러보다가 사람들 뒤에 서 있는 임새옥을 바라봤다. 

“유 애경의 처 조씨인가?”

임새옥이 앞으로 몇 걸음 나와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민부, 폐하를 뵙습니다.” 

시선이 한참 맴도는 것 같더니 일어나라고 명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일어나 뒤로 물러나려 하는데 황제가 부르더니 궁금해하며 물었다. 

“짐이 듣기에, 너도 농사를 짓는다지? 네 재주가 유 애경만큼 뛰어나다고 유 애경이 여러 번 말하던데, 정말 그러하냐?” 

“가당치 않습니다. 관인이 잘 가르친 덕분입니다. 모두 관인에게 배운 것입니다.” 

황제가 뭐라고 더 말하려는데, 조 태후가 무언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황제에게 말했다.

“관가, 조씨의 음식 솜씨가 뛰어납니다. 몇 가지 만들어서 주 첩여에게 보내봅시다. 새로운 것이니 먹을지 압니까? 어떻습니까?” 

임새옥은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세상에. 황제의 임신한 비빈, 그것도 장래 아들을 낳을 비빈이 먹을 음식을 만들라니. 먹고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일이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들어 황제를 바라봤다. 제발, 사랑하는 비를 생각해서 신중히 하소서! 

살아 있는 황제는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왜곡되고 변형된 모습이 아닌 실제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개국 황제는 일반적으로 못생겼다고 하지만, 2대, 3대로 내려오면 우월한 모계 유전자 덕에 기본적으로 못생긴 사람이 거의 드물다고 한다. 눈앞에 아직 서른이 안 된 황제는 과연 눈매가 아름답고 코가 황제상이었다. 게다가 온몸에 두른 고귀한 복장에 온화하고 점잖은 기품이 느껴지는 완벽한 미남자였다. 

“오늘 조회가 끝나고 한담을 나눌 때 짐도 들었습니다. 유가에서 어젯밤 훌륭한 연회를 열었다고요. 알고 보니 부인이 직접 요리를 했다더군요.”

황제는 임새옥을 바라보다가, 넋이 나간 듯이 자기를 바라보는 여인을 보고 빙긋 웃었다. 슬쩍 훑어봤더니, 붉은 궁수포를 입고 틀어 올린 새카만 머리카락에 떨잠을 꽂고 있었다. 그녀의 맑은 눈빛과 청수한 용모에, 속으로 이러니 유소호가 그렇게 애틋하게 아끼지 싶었다. 

하지만 역시 촌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내를 뚫어져라 바라보다니, 과연 다소 저속해 보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을 직시하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보더라도 몰래 바라볼 뿐. 이렇게 생각하니 신기하기는 했다.

황제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본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때가 어느 때인데 정신을 파나 싶어서, 제 뺨을 때리지 못해 한스러운 마음으로 몸을 낮췄다. 

“과찬이십니다.” 

“그렇다니, 몇 가지 만들어 보아라. 새로운 걸 먹어 보는 것도 좋겠지.” 

황제의 말에 임새옥의 바람은 산산이 조각났고, 평온해졌던 다리가 또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가당치 않습니다. 조악한 음식을 어떻게…….”

임새옥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무릎을 꿇고 황급하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맞고 싶지도 않고.

조 태후가 크게 웃으며 어서 일으키라고 명했다. 괜찮다, 새로운 걸 시도해보는 것이다, 하자 임새옥도 더는 거절할 수가 없어 거의 끌려가듯이 다리를 질질 끌고 어주방에 들어갔다. 

궁녀들은 임새옥이 입궁해서 위세를 부리고 가식적인 다른 귀부인들과 달라 보이자 곁에서 때때로 위로해주었다. 덕분에 임새옥은 달달 떨리는 손을 진정하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곧 출산할 임신부! 곧 출산할 임신부인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한숨이 나왔다. 

임신한 적도 없는데 뭘 먹어야 좋은지 어찌 알까. 임신하면 가려 먹을 게 많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교양과목으로 목축 수업은 들어서 곧 출산할 가축 시중은 들 줄 알지만……, 하다가 혼자 혀를 찼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부인!”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보며 궁녀도 걱정스러운 듯 재촉하자, 결국 임새옥은 입술을 깨물고 부엌칼을 들었다. 몇 가지 채소를 골라 탁탁 칼질하더니 곧 두 가지 음식과 탕 하나를 만들어내자 누군가 알아서 기미하더니 그릇을 들고 나갔다.

태후궁에 있는 황제와 태후가 함께 들여다보니, 금황색 완자가 한 접시 있고, 장육사(醬肉絲: 고기를 채썰어 간장에 졸인 것)와 하엽병, 총사(蔥絲: 파채)가 함께 놓인 접시, 쌀죽 한 그릇을 보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관가, 괜찮겠습니까?”

조 태후가 한쪽 손으로 살살 부채질하며 물었다. 향기는 진하지 않고 평범해 보였다. 황제는 잠시 보다가 갑자기 완자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고는 꼭꼭 씹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마, 과연 맛있습니다. 남과(南瓜: 호박) 같구나?”

줄곧 옆에 있던 임새옥이 곧바로 대답했다. 

“폐하, 남과 맞습니다.”

조 태후도 참지 못하고 하나 먹고는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하엽병을 가리키며 이건 뭐냐고 묻길래, 임새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가가 하엽병에 장육사와 총사를 말아서 조 태후의 측근 시녀에게 건넸다. 조 태후가 받아서 한 입 먹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황제도 궁금해하자, 궁녀가 임새옥이 한 대로 말아서 올렸다. 

“관가, 어서 주 첩여에게 보내세요. 이러다가 우리가 다 먹겠습니다.” 

조 태후가 웃으며 말하고는 궁녀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임새옥은 안도했고, 황제는 일어나서 물러가겠다고 고하고는 요리를 든 태감과 함께 돌아갔다. 조 태후는 임새옥에게 앉으라고 한 다음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눈치 빠른 궁녀가 하사품을 잔뜩 들고 왔다. 

“주 첩여가 좋아하든 말든, 애가는 마음에 든다.”

하사품을 내리자 임새옥은 감사 인사를 했다. 조 태후는 저녁에 바로 먹겠다면서 만드는 법을 어주방에 알려주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 첩여가 음식을 먹었다는 소식을 황제가 사람을 보내 알려오자, 조 태후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하사품으로 보석을 내렸다. 

임새옥이 두 손 가득히 하사품을 들고 출궁하자, 저 멀리 유소호가 눈을 밟으며 서성이는 게 보였다. 임새옥은 뒤에 태감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달려갔고, 유소호도 그녀를 보고서는 서둘러 다가왔다. 

“이랑, 이랑!”

임새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손에 든 것들을 보여주자, 유소호가 실소하며 물건을 받았다. 

“별일 없었지?”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소호가 따라온 태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보물 몇 가지를 찔러주었다. 태감이 싱글벙글 받고는 두 사람을 배웅했다. 

집에 와서도 또 한바탕 떠들썩해서는, 유씨는 영아, 아원과 함께 저녁 내내 황궁 이야기를 듣고도 부족해했다.

“아가, 궁 안에 귀한 분들이 정말로 우리 집 일상 음식을 맛있다고 했단 말이냐?”

유씨는 제 기분을 표현할 방법이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임새옥이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니, 정말로 좋을 리가 있어요? 그냥 좋은 것만 먹다가 가끔 이런 걸 먹으니 새로워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틀이면 질릴 걸요.”

그러다가 흥이 나서 후세에 전해지는 비취백옥탕 이야기가 떠올랐다. 청나라 황제 이야기를 고대 황제로 바꿔서 이야기해줬더니 방 안에 있는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비취백옥탕: 형주荊州의 유명한 음식. 푸른 시금치, 하얀 두부를 사골에 넣고 끓인 탕.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어릴 때 매우 빈곤해서 항상 배를 곯았다. 부모를 잃고 중이 되어서 시주밥을 얻으러 나갔다가 기절한 날, 길 가던 할머니가 집에 데리고 가서 먹여준 음식. 먹고 정신을 차린 주원장이 무슨 음식이냐고 하자, 할머니가 농담으로 ‘진주비취백옥탕’이라고 했다. 나중에 황제가 되어 온갖 미식을 먹던 주원장은 어느날 병이 들어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그때 진주비취백옥탕을 떠올리고 어선방에 명을 내렸는데, 이름만으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진주, 비취, 백옥을 넣어 탕을 끓여다 바쳤다. 전혀 맛이 아니라서 다른 요리사를 찾았고, 똑똑한 요리사는 진짜 진주, 비취, 백옥에 황제가 관심이 없다면 다른 것으로 시도해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는, 진주 대신 생선살, 토마토로 홍옥(비), 시금치로 녹옥(취), 두부로 백옥을 대신하여 바치고 큰상을 받았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늦어진 듯하자 유소호가 임새옥이 지쳤을 거라고 말했고, 그제야 유씨가 두 사람을 놓아주었다. 참으로 심신이 피로한 날이라, 임새옥은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유소호가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눕는 게 은연중에 느껴졌다. 

다음 날 눈을 떴더니, 유소호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임새옥이 마음을 가다듬기도 전에 축하하러 찾아온 사람들이 몰려들어 쉴 틈이 없었다. 조씨가 태후에게 후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조정에 퍼진 모양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찾아올 수밖에. 그렇게 얼렁뚱땅 또 며칠이 흘렀다. 

섣달 열이레, 이날이 되어서야 임새옥은 아원을 데리고 오 부인을 찾아갔다. 화청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부터 한참 하며 차를 두 주전자 비운 후에야 오 부인이 드디어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었는데, 네가 태후와 관가께서 내린 상을 받았다고 하니 마음이 놓인다. 이제 그 사람이 어떻든, 우리가 걱정할 것이 없어.” 

임새옥은 소매 안에서 손을 움켜쥐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언니, 아무래도 나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네요.” 

오 부인의 조상이 태조와 함께 나라를 세운 후로, 오 부인의 가문은 임새옥 같은 사람은 쳐다볼 수도 없는 명예로운 가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못하다고 하지만, 손님을 접대하는 방의 붉은 휘장과 바닥에 깔린 융단 등, 어느 것 하나 부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사향과 난향이 가득한 실내가 봄처럼 따듯했다. 

임새옥은 옆 칸에 있는 수탑(繡榻: 침상과 긴 의자 겸용 가구)을 바라봤다. 수탑 위에 드리워진 화려한 두장(斗帳: 침상에 드리우는 휘장의 일종.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서, 계량에 쓰는 두를 엎어 놓은 것과 같다 하여 두장이라고 부름.)을 보고 자기 집에 있는 수 놓다 말고 구석에 던져 놓은, 차마 남 앞에 보이지 못할 신발 천을 떠올렸다. 

느릿느릿, 오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모를 줄은 몰랐구나. 연회에서 보고는 네 걱정에 알아봤더니, 대명부 여인이라고 하더구나. 예전에 유가 옆집에 살았고, 조상은 한직인 시랑인데 그 여인의 아버지 대까지 이어졌단다. 비록 관료가 되진 않았지만, 학자 집안이었는데 유가가 청묘법에 항거해서 죄를 받았을 때 연루될까 두려워서 온 집안이 옮겨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고 떠돌아다니다가 경성으로 흘러 들어왔다는구나. 지금은 눈먼 노모를 모시고 바느질, 빨래 같은 걸 하며 먹고 산댄다. 기적이 없는 청백한 몸으로 가끔 연회에 나가 악기를 연주하고. 어찌 됐든 명문가 출신이니 생계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 나도 종종 들었는데, 단정하고 예를 아는 사람인 듯했다.” 

“임은 죽마를 타고 놀고, 우물 난간을 맴돌며 청매를 희롱했었네.” 

(※낭기죽마래, 요상농청매郞騎竹馬來, 繞床弄靑梅, 

- 이백, <장간행長干行>

소꿉친구가 스스럼없이 장난치는 모습을 묘사한 시)

임새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손을 소매 안에서 맞잡았다. 맞잡은 손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 부인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말했다. 

“태백 선생의 시를 아는구나.”

그래 놓고 적절한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임새옥을 바라봤다. 처연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 오 부인은 웃음을 거뒀다. 

“옆집에 살았어도 집안 법도가 있는데 그럴 수야 없었겠지.” 

임새옥은 정신을 차리고 오 부인을 향해 마지못해 웃었다.

“옛날부터 아는 사이인데 지금 고생하는 걸 봤으니 당연히 도와주어야죠. 사람들이 오해한 것 같네요.” 

오 부인은 놀라더니 금세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송 낭자, 어전을 나눠줄 때 받으러 갔다가 유 대인을 만났댄다. 그런데 바로 달아났다는구나. 다른 뜻이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물고 늘어졌겠지. 그런 걸 보면 체면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 같다.” 

임새옥은 걱정이 조금 가신 얼굴로 일어서서 오 부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오 부인은 손을 잡고 대문까지 배웅하면서 송 낭자가 사는 곳을 상세히 알려주었다. 

“동생, 동생이 나이가 어리니, 언니가 한마디 해주려고. 앞으로 집에 사람이 들어오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야. 지금 이 여인은 연회 때 봤더니, 일을 일으키려고 온 건 아니더라. 은혜를 알고 분수를 아는 여인 같으니, 차라리 인정을 베풀어서 집에 들여. 분명 동생을 잘 모실 거야.” 

임새옥은 몸이 바짝 굳었다가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말이 맞아요.” 

그러고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이었다. 

“청백한 몸인데 어쩌다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게 되었을까요. 돈까지 주었는데, 욕보인 꼴이 아닐까요.” 

오 부인이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어쩌면 일부러 온 거겠지. 다른 건 할 수 없으니 연주라도 해서 성의를 보이려고.”

오 부인이 잠시 생각하다가 “몇 번 만난 적 있는데…….” 하고 덧붙이자 임새옥은 다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원이 부축하지 않았다면 온몸을 후들거릴 뻔했다. 오 부인의 말이 이어졌다. 

“그날 알아보고는 막아보려 했지. 아무도 못 보게. 그 사람들이 얼굴은 몰라도 이야기는 다 들었을 거거든. 그런데 등사랑 집에서 온 시첩이 하필 나서서 송 낭자를 지목할 줄 누가 알았겠니.”

“누구요?” 

임새옥이 숨을 죽이며 물었다. 

“누구긴 누구야. 어딜 가든 조용히 못 지내는 이가 용이지. 전에 이 부인을 만난 적 있지 않니? 생각해 보면 그 댁 부인은 성격이 참 좋은 낭자인데, 등사랑 그 사람은…….”

“아!” 

연회에 갈 때마다 조마조마하느라 다른 사람을 주의할 겨를이 있어야 말이다. 이용은 만난 적 있어서 알아보지만, 그 부인은 설사 만난 적 있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임새옥은 더 들을 마음이 없어져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아원의 손을 잡고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오 부인은 대문 앞에 서서 염불을 외우면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임새옥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등을 기대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누가 들을까 봐 소리 내서 울지도 못했다. 아원은 손에 든 손수건을 세 번이나 비틀며 참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오 부인도 말씀하셨잖아요. 옆집이긴 해도 어릴 때고, 또 집안엔 가법이 있어서 아무 일도 없었을 거라고요.” 

임새옥은 가슴이 답답하고 참을 수가 없어서 양손으로 힘껏 벽을 잡고 처연하게 말했다. 

“어릴 때니까, 기억이 더 또렷한 거야.”

아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임새옥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꿍얼거리고는 휘장을 열고 마부에게 고함쳤다. 

“성 밖 영두항으로 가요.” 

임새옥이 화들짝 놀라 벽을 붙잡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뭐 하는 거니? 난 안 가, 안 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이래요! 지금 부인 꼴 좀 보세요! 가서 보고, 부인 마음에 들면 노야가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인정을 베풀면 되죠. 그럼 나중에도 고마운 걸 기억하고 나대지 못할 거고요. 마음에 안 들면 부인답게 단념하라고 혼내주면 되죠. 노야가 잠시 화를 낼 수도 있지만, 어찌 됐든 결발(結髮) 부부인데 어쩌겠어요. 게다가 태후께 상도 받은 부인을 버리기라도 하겠어요? 그런 법도는 없어요. 사내는요, 그냥 신선한 걸 잠시 바라는 거예요. 지나면 잊는다고요. 이렇게까지 울고불고할 거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대신 때릴게요. 부인 화가 풀릴 때까지 때릴게요, 예? 그날 절 보던 눈빛은 어디로 간 거예요? 지금은 병든 고양이 같잖아요! 저보다 더 대단한 여인이 있을 것 같아요?” 

(※결발 부부: 서로 초혼인 부부. 혼인할 때 신랑, 신부의 머리카락을 조금씩 잘라 묶는 것. 첫 혼인 때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 결발 처는 정실부인을 뜻한다. 첩은 물론 후처도 결발처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아원은 눈을 부릅뜬 채 화가 나서 우다다 내뱉었다. 임새옥은 눈물도 나고 웃음도 났다. 아원을 한참 바라보다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말했다. 

“자기 사내를 뺏어가는 여인을 곱게 볼 사람이 어디 있어? 너도 참, 애 같은 소리한다. 그 여인이 어떻게 너랑 같아!” 

아원은 듣기 싫다는 듯 입술을 내밀었다.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뺏는다니요. 부인 대신 노야 시중드는 사람이에요. 하인이라고요. 정실부인인 분이 첩하고 뭘 비교하세요. 괜히 체신만 떨어지지. 제가 그 여인보다 못할 건 또 뭐고요? 연회에서 저도 살짝 봤는데, 저보다 키 좀 클 뿐이지, 생긴 건 저보다 못하던걸요.” 

아무리 말해도 설명할 수 없는 걸 아는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시대 여인에게 사내가 평생 한 여인과 지낸다는 건 딴 세상 이야기였다.

영두항은 도시 속 마을 같은 곳이었다. 민가가 어지럽게 자리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장사꾼이었다. 지금은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원도 처음 오는 곳이라 사람들에게 물은 끝에 겨우 영두항에 도착했다. 그녀는 마차를 세우라고 지시하고 임새옥을 마차에서 끌고 내렸다. 유난히 화창한 날이었다. 임새옥은 눈이 녹았으니 발치를 조심하라는 아원의 말을 들으며 손갓을 하고 햇빛을 가렸다.

좁고 진흙이 널려 있는 골목 어귀에 서서, 임새옥은 감히 걸음을 더 이상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평소에 깨끗한 걸 좋아하는 아원은 신발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치맛자락을 들고 그녀를 재촉하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뭐가 무서워요. 그냥 보러 온 건데. 온 성 사람들이 다 알았는데, 부인이 알면 안 돼요?”

안 하니 못한 말에 임새옥은 가슴이 쥐어뜯기 듯 아팠다. 이미 멎었던 눈물이 저도 모르게 떨어져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집안 체면을 세우려고 노력했는데, 내가 웃음거리가 됐네. 됐어, 돌아갈래.” 

그러고는 바로 돌아섰다. 그 말을 들은 아원은 왠지 모르게 코가 찡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데 옆에 있는 집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옥낭, 대문 밖에 재 뿌리고 오너라. 사람들이 지나다니기 불편할라.” 

뒤이어 옥구슬 굴러가는 것 같은 대답이 들리고 나무 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자능 겹옷 차림의 늘씬한 여인이 나왔다. 

그녀는 손엔 나무를 태운 재를 한 대야 들고서 그쪽에 사람이 있는 걸 보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여기 이웃은 원래 돕고 사는데, 두 사람이 주저하는 걸 보고 사람을 찾으러 온 줄 알고 재빨리 불렀다. 

“두 분 낭자, 누구를 찾아오셨나요? 길을 모르세요?”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임새옥은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인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스물 남짓한 나이에 머릿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갸름한 얼굴이 분을 바르지 않아도 촉촉했다. 길게 그린 눈썹에 수려한 얼굴을 얼핏 보고도 임새옥은 마음이 깊게 가라앉았다. 

혹시나 상대가 알아볼까 봐 대답도 하지 못하고 아원을 끌고 가려는데, 집 안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옥낭, 누구냐? 이랑이 왔니? 발 더러워지면 안 되는데…….”

그 말에 다리가 비틀거려서 치마를 밟았고, 아원이 재빨리 부축했음에도 넘어지고 말았다. 어디를 부딪쳤는지 몰라도 심하게 아팠다. 그럼에도 그 여인이 따라와 이 못난 꼴을 볼까 봐 버둥거리며 일어나서는, 어찌 보일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듯이 마차에 올라타 머리를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원은 진흙이 잔뜩 묻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꼴 좀 보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방향을 틀어 성 쪽으로 향하던 마차는 반대로 이쪽으로 달려오는 말을 탄 공자와 스치고 지나갔다. 하얀 비단 충정관(忠靖冠: 관모의 일종), 학창의(鶴氅衣: 흰 창의의 소맷부리 등 가장자리를 검게 덧댄 옷) 차림에 늠름하고 고상한 이 사람은 바로 운치가 넘쳐나고 호방한 등사랑 이용이었다. 

그는 마차에서 어렴풋이 들리는 울음소리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성격으로는 큰 서러움을 겪은 걸 테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하는 사이, 어느새 영두항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한 그 여인은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햇빛이 어른거려서 눈가를 찌푸리고 그 여인이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처음엔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재빨리 다가가다가, 문득 낯선 이라는 걸 깨닫고 고개를 숙이고 허둥지둥 돌아섰다. 문을 닫으려는데 그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송 낭자, 잠깐.” 

동시에 문을 잡는 손과 빙그레 웃는 얼굴이 여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할 말이 있습니다.” 

겨울이라 해가 빨리 지는데 바람까지 불었다. 유가 처마 아래 붉은 등롱 한 쌍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원이 살짝 취한 임새옥을 마차에서 끌고 내렸다. 문지기 장사가 기척을 듣고 문을 열고는 멱리를 깊이 쓴 임새옥이 바람 때문인지 비틀거리는 모습에 황급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노부인과 노야가 몇 번이고 나와서 물으셨습니다. 오가에서 식사를 해도 그렇지 왜 이렇게 늦냐며 저를 보낼 참이었습니다.” 

아원은 가볍게 대답하고는 화가 잔뜩 난 상태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임새옥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사가 술 냄새에 코를 킁킁대며 문을 닫으면서 중얼거렸다.

“부인도 술을 드시기 시작한 건가.”

“그러게 그렇게 많이 드시면 안 된다니까. 그건 당물이 아니라 술이라고요. 잠깐 한눈판 사이에 그렇게 많이 드시다니. 정말이지……. 정말이지…….” 

아원은 임새옥을 부축한 채 이를 악물고 말하다가 참지 못하고 임새옥을 꼬집었다.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취기가 느껴지는 살구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술이야. 기껏해야 과일주 같은 음료지. 나 어릴 땐 보리 추수 끝나면 혼자 한 축(軸)도 마셨는데. 술도 없다니, 여기 사람들은 정말 재미없게 산다.” 

아원은 못 알아들을 말을 중얼거리는 그녀를 부축하고 후원으로 향했다. 유씨 거처에 불이 켜진 걸 본 임새옥은 그쪽으로 가려고 했다.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 드리지 않았어. 그건 큰 잘못이야, 조심해야 해. 더는 잘못하면 안 돼. 잘못하면 쫓겨날 거야. 여기는 시어머니가 하늘보다 높잖아.”

아원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바닥에 채 녹지 않은 눈을 집어 들어서 그녀의 얼굴에 철썩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한기에 임새옥이 부르르 떨며 정신을 차렸다. 술기운이 확 사라져서 눈을 부릅뜨고 멍하니 아원을 바라봤더니, 아원이 힘껏 그녀의 어깨를 잡고 나직이 말했다. 

“전에는 담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겉보기만 그렇고 쓸모없을 줄은 몰랐네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소심하게 굴다니요. 시원스러운 성격이시라면서요? 할 말 있으면 하면 되고, 서러운 게 있으면 말하면 되지, 말도 안 하고 왜 술이나 마셔요. 노야는 둘째치고 저도 이런 부인은 싫으네요.” 

그 말에 임새옥이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트리며 훌쩍훌쩍 말했다. 

“넌 알지도 못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다행히 정원에 부는 바람 소리가 목소리보다 커서 망정이지, 안에 있는 유씨가 들을 뻔했다. 아원은 아무런 말 없이 곁에서 보고만 있었다. 잠시 울던 임새옥이 눈물을 닦고 코를 훌쩍였다. 

“좋아. 뭐가 무서워. 지금 가서 이야기할 거야.”

그러고는 바로 유씨 거처로 걸음을 옮기는데 몇 걸음 가다가 또 자신이 없어서 걸음이 느려지자, 아원이 등 뒤에서 밀었다. 그렇게 문 앞까지 와서 아원이 휘장을 열려고 하는데, 안에서 유소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 송 대숙(大叔), 기억하세요?” 

차를 마시는 것 같던 유씨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 양심 없는 인간들 이야기 내 앞에서 하지 말아라. 친척보다 더 가깝게 지냈는데, 일이 터지니 누구보다 빨리 달아나더구나.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건 둘째치고 다음 날 바로 떠나지 않았니. 평생 내 눈앞에 띄지 말라 해라.”

아원은 손을 거두고 임새옥과 함께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바람이 불고, 임새옥은 몸을 쉴 새 없이 떨었다. 

유소호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건 송 대숙의 뜻이지 송 대낭하고 옥루 누이 생각은 달랐을 겁니다. 옥루 누이는 화단 담장 아래 묻어두었던 돈을 저에게 주었어요…….”

아원은 자기에게 기댄 임새옥이 떠느라 이까지 딱딱 부닥치는 걸 느끼고는 어깨를 빌려주었다. 안에서 유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음, 종종 담장에 기어 올라와서 네가 글공부하던 걸 보던 그 저아 말이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 처와 행실이 비슷했지. 송씨 일가에서 응석받이로 키워서 법도를 모르던 아이였지. 그런데 그 사람들 이야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어서 네 처에게 가보아라. 어째 이리 늦었는데 돌아오지 않아. 갈수록 버릇이 없구나.” 

말이 끝나기 전에 임새옥이 웃으면서 휘장을 젖히고 들어왔다. 

“어머니, 또 제 흉보셨죠? 재채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임새옥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매만지며 성큼성큼 화로 곁으로 가서 불을 쬐었다. 일상복을 입고 있던 유소호가 벌써 일어나서 옷을 털어주고는 손을 잡다가 아이고, 하고 외쳤다.

“손이 왜 이리 차가워.” 

그리고는 뒤따라 들어온 아원을 바라봤다. 

“이 녀석, 네 부인께 겉옷을 챙겨드렸어야지.” 

아원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아원이 노비답지 않게 버릇이 없다는 걸 이미 알기도 하고, 게다가 유가 노비도 아닌지라 유소호는 헛기침만 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몇 마디 잔소리하던 유씨는 임새옥의 얼굴이 발그레한 걸 보고 더 언짢아했다. 

“몸이 다 낫지도 않았는데 술을 마시다니. 그날 고작 몇 잔 마시고 병이 난 걸 잊었느냐?”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잘못했다고 하자, 유씨도 걱정스러워서 한 말이라 손을 저으며 어서 자러 가라고 했다. 유소호가 그녀를 부축하고 인사를 드리고 물러 나왔다. 부부 두 사람이 나란히 돌바닥을 따라 돌아갔다. 

유소호는 등롱을 들고 무엇을 먹고, 무엇하며 놀았는지 물었다. 임새옥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다가 유소호가 여인들도 술을 먹느냐, 어떤 방식으로 먹느냐 놀리며 묻자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사내들처럼 마시진 못하죠. 저아들을 부르지도 못하고요. 오늘 들어보니 다들 자기네 노야가 가까이 두는 저아가 있다던데, 당신한텐 아직 못 물어봤네요. 평소에 누굴 불러요?” 

“나야 그런 적 없지. 난 그저 옥루만…….”

빙긋 웃으며 툭 대답하던 유소호의 말이 뚝 멈췄다. 밤바람이 서늘하게 두 사람의 얼굴을 때렸다.

“눈 오네요. 어서 들어가요.” 

임새옥이 빙긋 웃으면서 그를 밀고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유씨의 명으로 영아가 벌써 화로를 피워놓아서 방 안이 따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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