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4권) (25/57)

一. 첩을 들이는 일로 고부 두 사람 처음으로 맞서다 

가을비에 씻겨 내려간 유가의 작은 뜰이 유난히 깨끗해 보였다. 정당 앞에는 선물로 보내온 커다란 화분 두 개가 놓여 있고, 빗물에 젖은 하얗고 붉은 취부용 꽃잎이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임새옥은 치맛자락을 들고 발을 턴 다음에 뒤에서 우산을 들고 달리느라 헐떡이는 영아를 챙길 겨를도 없이 재빨리 계단 위로 올라갔다. 

“아유, 목말라. 물부터 마셔야겠다.”

임새옥이 휘장을 열고 튀어 들어가듯이 들어가서 탁자로 곧장 다가가 차를 마시려고 하자 유씨가 곁에서 다급히 불렀다. 

“식었다. 마시면 안 돼.” 

이미 꿀꺽 마신 임새옥은 타는 듯한 갈증을 달래며 유씨를 향해 웃어 보였다. 

“역시 어머니뿐이세요.”

유씨가 얼굴을 바로 흐리더니, 침상에 놓인 신발 천을 들어 올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을 놀렸다. 

요즘 고부 사이가 또 틀어졌다. 시작은 임새옥이 바쁜 틈에 유씨가 거간꾼을 통해 시녀를 들였기 때문이었다. 곡물 시장을 한나절 둘러보고 돌아왔더니 집 안에 꽃다운 여인 네 명이 있는 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있나. 

“어머니, 이 사람들, 우리 친척인가요?” 

임새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유씨가 눈을 흘겼다. 

“우리집 친척은 싹 죽었는데, 어디서 이렇게 고운 아이들을 골라왔겠니.” 

유씨가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여인들에게 임새옥을 ‘부인’이라고 부르라고 하자, 여인 네 명이 일제히 임새옥 앞으로 몰려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부인’ 하고 불렀다. 임새옥이 깜짝 놀라 손을 저으며 쫓아내는데 유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시녀라곤 영아 하나뿐이잖니. 그 아이는 내 시중드는 것만으로 바쁘다. 그래서 안채에서 쓸 사람을 몇 명 들였다. 오가며 시중들 것이다. 6품 관리의 부인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빨래하고 밥을 지어서야 되겠니.”

임새옥은 유씨의 말을 듣자마자 입이 축 내려갔다. 열여덟에서 열아홉으로 보이는 여인들은 하나같이 미간이 버들잎 같고, 얼굴이 도화 같으며, 눈매가 고왔다. 허리가 잘록하고 엉덩이가 큰 것을 보면, 유씨가 높은 대문 깊은 내원 출신임이 다시 한 번 분명해 보였다, 유씨는 어떤 여인이 사내의 호감을 사는지, 아이를 잘 낳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한순간 가슴이 턱 막히는데 화를 내고 싶어도 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자니 또 서럽고.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수많은 법도를 배운 덕분에, 꾹 참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어머님 생각이 깊으셔요.” 

유씨가 눈을 흘기고는 그런 표정으로 하는 말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소름이 다 돋는지 아느냐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그러나 며느리가 그 자리에서 얼굴을 구기고 난리를 부리지 않은 것만 해도 그동안 가르친 보람이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임새옥의 겉과 속이 다른 말을 따지지 않고, 영아만 남기고 다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그날 밤, 모처럼 일찍 돌아온 유소호가 유씨 거처로 들어갔더니 유씨 곁에 시녀처럼 보이는데 또 시녀 같진 않은 낯선 여인 둘이 있었다. 그 역시 깜짝 놀라 똑같이 친척이냐고 묻는 말에 얼굴을 구기고 있던 임새옥도 실소하고 말았다.

아들이 이토록 눈치가 없을 줄 몰랐던 유씨는 아들을 노려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조련이 되어 있는 두 여인은 즉시 유소호에게 다가가 옷을 벗기고 환복을 도우려고 했다. 놀란 유소호가 후다닥 피하자, 임새옥은 유씨 뒤에 서서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밥때가 되어 소박하던 평소와 달리 탁자 위에 술과 음식이 가득한 걸 보고 유씨도 흡족해했다. 며느리가 아들이 장차 첩을 들이는 걸 축하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유소호도 아내가 한동안 고생했으니 노고를 위로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가족이 즐겁게 젓가락을 들었다. 

하지만 음식을 한입 입에 넣은 유소호와 유씨의 안색이 이상해졌다. 그러나 임새옥은 뭐가 잘못인 건지 모른다는 듯 꼭꼭 씹는 걸 보고는 두 사람도 그냥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하루 새 음식 솜씨가 이렇게 형편없어지다니, 낭자가 정말 많이 힘들었구나! 

감동한 유소호는 애틋한 눈빛으로 임새옥을 바라보고는 결심한 듯이 탕도 한 입 크게 마셨다. 그리고는 괴상한 맛을 견디며 꿀꺽 삼켰다. 

유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조악한 재료로만 음식을 잘하는 모양이군. 좋은 재료로 하는 음식은 영 못 쓰겠어.’ 

맛있다고 하고 싶은데, 누가 봐도 기름을 너무 많이 넣은 채소를 도저히 넘길 수가 없었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입을 열었다. 

“아가야, 우리 집은 다른 집과 다르지 않으냐. 간단히 먹는 게 좋겠구나.” 

임새옥이 황급히 일어나서 죄송하다고 말하고는 영아에게 노부인의 분부가 있으니 부엌어멈을 불러오라고 했다. 유씨와 유소호는 어리둥절해졌다. 

“부엌어멈을 들였습니까?”

유소호는 먹은 음식을 뱉지 않으려 참으며 물었다. 

이런 부엌어멈을 둘 순 없지. 이걸 계속 먹다간 사람이 죽어 나가겠는데?

유씨는 눈앞에 나타난, 머리를 두건으로 감싸고 치마를 동여맨 여인을 바라봤다. 얼굴은 시커멓게 그을렸고, 손엔 그을음이 가득한 이 여인이 바로 시녀로 사 올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 아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다. 여인은 서러운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훌쩍거렸다. 유씨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속으로 염불을 외며 밥하러 가게 된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남자 주인에게 저런 꼴을 보였다가는 평생 가도 잠자리에 데리고 갈 마음이 생기지 않으리라. 

“얘야!” 

유씨가 임새옥의 수작을 모를까. 유씨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치자, 임새옥과 유소호 모두 일어서서 고정하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며느리더러 이제 빨래도 하지 말고, 밥도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누가 밥을 잘하는지 알려주시지 않으셔서 제가 물었죠. 할 줄 안다고 나서길래 하라고 한 거예요. 제가 잘못한 거면, 다시 말씀해주세요. 바꾸면 되죠.” 

임새옥이 무고한 듯 눈을 깜빡이며 말하고는 그 여인을 노려보며 억울한 듯 말을 이었다. 

“거기, 왜 날 속였니?”

유씨는 말문이 막혔다. 유소호에게 첩을 들여 줄 생각이라고 밝히려고 하는데 유소호가 말을 가로챘다. 

“어머니, 거간꾼에게 속으신 것 아닙니까? 하나같이 꼴이 말이 아니지 않아요. 경박해 보이고.” 

그러면서 굳은 표정으로 세 사람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너희들 출신이 무엇이냐? 양민이냐?” 

그 말에 세 여인이 허둥지둥 무릎을 꿇었다. 여인 셋이서 떨면서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모습에 유씨도 깜짝 놀랐다. 거간꾼에게 양민 출신의 순결한 아이를 원한다고 분명 말해두었는데, 설마 다들 내력이 불분명한 것인가? 

한순간 마음이 급해져서 탁자를 내리치며 물었더니, 다들 양민 출신인 건 맞았다. 다만 어릴 때부터 시녀로 팔려 가서 유들유들해진 것이다. 유씨가 원한 사람은 줄곧 집에서 지내고 출타하지 않은 여인이었지 이런 여인들이 아니었다. 순간 부끄럽고 화가 나서 거간꾼에게 따져야겠다고 난리였다. 

부부는 어머니가 마음을 너무 써서 오히려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한참 달랬다. 거간꾼은 원래 교활해서 믿을 게 못 된다고 운운하는 말에 유씨도 겨우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더니 유씨가 임새옥을 붙들고 말을 꺼냈다. 유가가 얼마나 단출한지, 이번 대엔 또 이랑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유가 며느리로서 반드시 후사를 가장 중시해야 한다느니, 여인들이 소갈딱지를 부리며 질투하면 안 된다느니, 이랑이 공명을 얻었으니 좋은 첩을 골라줄 생각을 해야 한다느니 난리였다. 마지막으로 유소호에게는 밖에 함부로 이상한 마누라를 두면 안 된다고 하자, 유소호와 임새옥 모두 고개를 숙이고 ‘예’ 하고 대답했다. 

“얘야, 걱정할 것 없다. 첩이 몇이 있든 너를 밟고 올라갈 사람은 없다.”

말을 마친 유씨는 임새옥의 손을 붙잡고 위로했다. 임새옥이 억지로 웃으며 “저도 알아요.” 하고 말하자, 애써 감추려는 그 서러움이 전염됐는지 유씨도 마음이 씁쓸해져서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런 여인이 어디 있겠니. 다 이렇게 산다.”

말은 이렇게 터놓고 말했지만, 임새옥은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유소호는 바깥일에 여념이 없어서 집안일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목을 빼고 기다려도 바라던 첩 며느리를 얻지 못한 유씨는 임새옥에게 잔소리를 했다. 임새옥이 딴전을 피우며 미루자 유씨도 깨닫고 탁자를 내리치며 속았다고 화를 냈다. 

결국 유씨가 법도를 모르는 속 좁은 며느리인 줄 진작 알았다고 욕을 하자, 임새옥도 화가 났다. 타박하시는 거냐고, 그럼 차라리 돌아가겠다고 눈을 부릅뜨고 싸늘하게 외치자 유씨는 말문이 막혀 한참 말을 못 했다.

유가가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손가락질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고부 두 사람은 모두 화가 나서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화가 풀린 임새옥이 있는 말 없는 말 찾아서 말을 걸었지만, 유씨는 시큰둥했다. 

“어머니.” 

임새옥이 한숨을 내쉬며 맞은편에 앉았다. 

“저는 어머니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감추고 숨기면서 겉으로는 공손한 척하고 뒤에서 욕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보이는 대로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요. 그러니까 어머니도 제 속셈을 가늠하지 마세요. 저도 어머니의 기분을 가늠하지 않을 거예요. 저 화 난 거 맞아요, 당연히 어머니가 원망스럽죠.” 

그 말에 자기가 며느리였던 시절을 떠올린 유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여인이다. 왜 모르겠니. 됐다. 강요하지 않으마, 알아서 해라.” 

임새옥이 생긋 웃으며 유씨의 품을 파고들었다. 유씨는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를 웃으며 밀어내면서 바늘에 찔릴까 다급하게 일감을 치웠다. 

고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붉은색 대금 옷을 입은 아원이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더니,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입술을 비죽이며 탕 그릇을 내려놓았다. 

“성격은 안 변하시네요. 밖에서는 단정한 척하더니, 안팎으로 다른 얼굴을 하면 부인도 힘들지 않으세요?” 

아원의 성미를 잘 아는 임새옥은 화를 내지 않고 웃었다. 

“힘들지. 힘들지 않겠어? 하지만 꾸미지 않으면 저아가 나랑 외출하지 않을 거잖아. 나 혼자는 연회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아원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저 때문이라고요?” 

임새옥이 더 크게 웃어대며 아원을 향해 눈짓했다. 

“너는 내가 모신 교습 낭자이지 우리 집 노비가 아니잖아. 네게 좋은 혼사가 생기길 바라고 숙모께서 널 우리한테 맡긴 건데, 내가 밖에서 창피당하면 우리 저아의 명성만 나빠지게? 그러다가 우리 저아의 좋은 인연을 망치면, 그 죄를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어.” 

심괄은 역사의 흐름대로, 10월 말에 황제의 성지 하나에 선주(宣州)로 좌천되었다. 온 가족이 다 따라가게 되었는데, 장씨가 직접 찾아와 아원을 부탁했다. 경성에서 태어난 아이고, 아주 좋은 아이라서 딸처럼 곁에 두었다고. 혼인할 나이가 되었는데 발목 잡고 싶지 않다고. 아이가 성격이 괴팍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유가에서 잘 보살피다가 나중에 좋은 혼처를 구해달라고. 

다른 집에서 이토록 뛰어나고 기특한 시녀를 보냈다면 유씨는 분명 기뻐하며 거뒀을 것이다. 게다가 양민이라, 거두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랑의 첩실로 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장씨 수하라서 멀리하고 싶었고 행여 며느리를 물들일까 봐 걱정되지만,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좌천되자마자 부탁을 거절하자니 보기에도 안 좋았다. 게다가 아원 본인이 그럴 뜻이 없으니 할 수 없이 거둘 수밖에. 

다만 임새옥과 가까이 지내게 하진 않고 자기 곁에 두었다. 한동안 지켜봤더니 아이가 눈치 빠르고 말주변도 좋고 분별 있는 데다가 바느질 솜씨도 뛰어났다. 유씨가 매우 기뻐하며 은근슬쩍 이랑 이야기를 꺼냈더니 가시 돋친 대답이 돌아왔다. 말이며, 행실이며, 장씨의 기세와 닮은 것에 놀란 유씨는 바로 생각을 접었다. 

임새옥의 말을 들은 아원은 수줍어하는 다른 여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대담하게 말했다. 

“그건 그래요. 부인, 마음에 드는 사람 있다고 멋대로 결정하지 마세요. 제 마음에 들어야 해요.” 

유씨가 눈을 흘기며 호통쳤다.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여인네가 할 말이냐!” 

아원은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다물고 명첩을 내밀었다. 

“오늘 받은 거예요. 노부인과 부인 모두 모신대요.”

임새옥은 바로 얼굴을 찌푸렸다. 한창 바쁜 이 시기에, 명부로서 해야 할 사교 활동도 시작해야 했다. 황제가 유소호를 높이 사는 데다가, 왕안석이 경성을 떠난 후 구당파의 세력이 커지면서 사마 상공의 총애를 받는 유소호의 권세가 대단해졌다. 그렇게 되니 물이 불으면 배도 위로 올라간다고, 아내인 임새옥의 몸값도 올라갔다. 

“집에 은자가 얼마 없는데, 어전에도 돈이 들었고요. 셈해 보니 사흘에 한 번꼴로 접대하는 꼴이더라고요. 지금도 이런데, 정월엔 더 많아질 거예요.” 

임새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적으로 그런 사교 모임이 재미가 없었다. 

“부인 또 그러시네요. 손수건, 신발 천 같은 게 얼마나 한다고요. 신발 천은 제가 여기서 먹고 자면서 공짜로 만들어 드리잖아요.”

아원이 곁에서 하는 말에 임새옥은 말문이 막혀서 머쓱하게 웃었다. 

“옷값도 있잖아. 한 벌이면 된다니까, 굳이 서너 벌 만들었잖아.”

“얘야, 아원이 옷감을 잘 고르지 않니. 참 예쁘더구나.”

임새옥은 그게 다 돈이라고 꿍얼거리고는 유씨 들으란 듯이 물었다. 

“어머니, 옷만 예뻐요? 며느리는 안 예쁘고요?”

그 말에 방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유씨의 잠자리 시중을 들고 물러나려는데, 문 앞에 갔을 때 유씨가 부드럽게 하는 말이 들렸다. 

“얘야, 첩 문제는 일단 아이부터 낳고 생각하자고 이야기했다만, 너희 합방한 지 1년 지나지 않았니?”

탁 닫히는 문소리와 함께 임새옥의 마음도 철렁했다.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밤바람이 불어오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벌써 1년이야? 

밤이었다. 환락의 시간이 끝난 후, 깊이 잠든 유소호에게 기댄 임새옥은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였다. 윙윙 부는 바람 소리에 유소호를 슬쩍 밀며 나지막이 물었다. 

“천막 지키는 사람은 있어요? 바람에 날아가면 어째요.”

“있어, 있어……. 낭자, 걱정하지 말아…….”

유소호는 잠꼬대하듯 웅얼거리고는 임새옥을 더 꼭 안아주고는 다시 드르렁거리며 잠들었다. 너무 꼭 안겨서 불편해진 임새옥이 웃으며 그의 손을 밀어냈다. 

“냄새 폴폴 나는데 씻지도 않고, 달라붙지 말아요.” 

유소호는 옆에 사람이 없어진 걸 알았는지 중얼거리며 더듬더듬 다시 그녀를 끌어안고 웅얼거렸다. 

“낭자, 걱정하지 말아……. 그 여인들, 필요 없어…….”

임새옥은 마음이 따듯해져서 그의 품을 파고들고는 조금 여윈 허리를 꼭 끌어안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11월 초, 며칠 동안 불던 큰바람이 잦아들었다. 하늘이 맑게 개고 날도 전처럼 춥지 않았으며, 밭과 천막도 이미 적절하게 준비되었다. 어전사를 관장하는 유소호가 각지를 분주히 다녀야 해서, 경성 외곽 밭은 임새옥에게 맡겼다. 임새옥이 시골 출신임을 아는 관료들은 그저 유소호가 아내를 끔찍이 아낀다고만 여겼다. 경성으로 온 아내가 집에서 답답할까 봐 외출할 핑계를 찾은 것이라 생각하고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 

임새옥은 처음엔 부녀자의 덕을 지키느라, 관리들이 없을 때만 골라서 어전으로 향했다. 몇 번 그랬더니, 애써 꾸며놓은 구도와 배치가 모두 흐트러진 걸 발견하고는 다급해져서, 관리들이 다시 왔을 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들 관직에 오래 있던 농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그녀가 겉으로는 가르침을 청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질타하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개중에 그녀와 논쟁하는 사람이 자연히 생겼는데, 아무리 옥신각신해도 이 부녀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신나게 이야기하다가 오히려 그녀의 말에 솔깃해서 모두 밭으로 내려가 천막으로 들어가서 실제로 검증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다가 임새옥의 방도대로 하고 지켜봤더니, 새싹이 정말로 왕성하게 자라고 색도 정상이라 그제야 승복하게 되었다. 

“유 대인은 과연 재능이 남다르군. 촌부를 이토록 훌륭히 가르쳐내다니 말이오.” 

몇몇 사람이 절로 감탄하면서 유 대인에 대해 탄복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임새옥을 바라봤다. 다갈색 옷을 입은 그 여인은 하얀 멱리를 쓰고 허리를 굽힌 채 밭을 살피고 있었다. 때때로 흙을 파서 손바닥에 올리고 유심히 관찰하는 임새옥을 보며 “바탕이 좋은 겁니다.”라고 말했다.

“땅 두 묘가 아직 남았는데, 대인이 항주에서 좋은 볍씨를 찾았다고 가지고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째서 안 보이는 게지.” 

누군가 물었다. 아까 저 여인이 말한 방도를 곱씹어 보느라 정작 중요한 일을 잊었다가 인제야 떠올라서 큰소리로 물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늦었어. 이제 곧 겨울이라, 다른 건 못 심네.” 

그 말을 들은 임새옥이 몸을 일으키며 웃어 보였다. 

“하늘이 시기를 거스르면 재난이요, 땅이 자연 섭리를 거스르면 요사스럽다 했습니다. 지금 새로 만든 밭은 10월, 11월에 농사지으려고 만든 거예요. <제민요서(濟民要書)>(위진남북조 시대에 쓰인 농학 저서)에서 말하길, 이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칩거하는 해충이 있고, 땅이 전혀 윤택하지 않아서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래서, 해충 피해가 없는 농작물을 고르려고요. 그래야 이 넓은 땅에서 한 톨도 못 건지는 상황은 면하지요.” 

관리들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한 톨도 못 거둬들인다? 부부 둘 다 참으로 자신만만하군. 이게 무슨 그렇게 큰 위험한 일이라고 저리 큰 소리인지. 

결국은 지식이 얕은 부녀자라는 생각에 순간 초조해져서 유 대인은 언제 돌아오는지 서로 속닥거렸다. 

“부인, 이 천막 채소와 논벼, 이미 댁에서 농사지어 본 것 아닙니까? 그때 성공했는데, 인제 와서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누군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 사람이 긴장한 듯한 모습이자 임새옥이 싱긋 웃으며 밭에서 나왔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를 평생 업으로 삼은 사람을 보고 자랐습니다. 10년에 9년은 기근이 들었죠. 올해 풍년이라고 해도, 내년도 그럴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은 없답니다. 농사라는 건 진인사대천명입니다.”

한바탕 이어진 말에, 조금까지 돋았던 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황제가 무슨 상을 내릴까 생각하는 게 아니라 무시무시한 결과를 어떻게 피할 건지 고려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의견이 분분했고, 별 농작물 이야기가 잡다하고 두서없이 모조리 튀어나왔다.

관리 대부분이 수리, 농사의 대가였지만, 구체적인 농업, 재배는 그다지 경험이 없었다. 

임새옥도 딱히 그들을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사실을 말했으니까. 농사란 위험이 따르는 법이었다. 지금 설명해 두어야 나중에 책임을 무작정 유소호에게 돌리지 않을 것이다. 관직에는 별 흥미가 없지만, 복은 함께 나누면서 화만 혼자 짊어질 수는 없었다. 

임새옥은 관리들에게 예를 갖추고 아원과 영아를 데리고 마차를 타고 가버렸다. 여인이 떠나자 남은 사람들은 홀가분해져서는 불안한 심정은 잠시 잠재우고, 서로 술을 사네, 노래를 들으러 가네, 하며 웃고 떠들었다. 한창 이야기 나누는데, 저쪽에서 무명 치마를 입은 여인이 팔에 바구니를 끼고 어깨엔 괭이를 짊어지고서 걸어왔다. 여인은 그들이 있는 곳까지 오기도 전에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켜주었다. 

관리들은 일제히 표정을 가다듬고 말과 가마를 타고 떠났다. 가다가 뒤돌아보니, 그 여인이 밭 중간을 향해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그러자 누군가 손을 저으며 나지막이 웃으며 말했다. 

“자네, 만화루에 노래하는 낭자가 새로 왔다고 하지 않았나? 저 영두항(迎頭巷) 낭자의 월금(月琴) 솜씨와 비교하면 어떨지 모르겠군.”

순간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그야 유 대인에게 물어봐야지.” 

일행은 웃으며 멀어졌다. 

아원은 진흙이 묻어서 닦아도 떨어지지 않는 진홍색 신발을 바라보며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심 부인과 외출할 때는 어딜 가든 가마 아니면 마차를 이용했었다. 그런데 십몇 년 동안 걸은 걸 다 합한 것보다 오늘 더 많이 걸었다. 다리도 저리고 아프고, 그런데 앞에 가는 임새옥과 영아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신이 나서 지나가는 점포마다 다 들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그러게 오지 말라니까, 왜 굳이 왔어.” 

임새옥은 점포 주인이 씨앗 설명해주는 걸 듣다가 아원이 불편해하는 걸 보고 싱긋 웃었다. 한마디 하고는 잠시 설명을 더 듣다가 고개를 저으며 걸어 나왔다. 

“옛날부터 아낙들이 옷감, 머리 장식 고르느라 발이 부르트도록 다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도, 씨앗 보려고 발 부르트게 다니는 사람은 처음이네요.” 

아원은 투덜거리며 버티고 서 있다가,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영아가 헤실헤실 웃으며 바라보는 걸 보고 욱해서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임새옥은 빙긋 웃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계속 돌아다니면 요 녀석이 내일은 걷지도 못하겠는데, 그것도 괜찮은데?

지금은 전족하는 풍습이 심하지 않아서 그렇지, 너처럼 대가댁 규수 같은 시녀는 반 발짝도 못 걸었겠네. 

임새옥이 잡으라고 손을 내밀며 돌아가자고 하자, 아원은 화가 나서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에 멈춰섰다. 

“부인, 우리가 왜 나왔는지 잊으셨어요?”

임새옥은 그제야 생각이 난 표정이었다.

“맞아. 배자 맞춰야지. 사흘 후에 오가(吳家) 연회에 가야 하네.” 

“진작 맞추자니까 안 듣고 오늘까지 미루더니 잊어버리시다니요. 내일 맞추면 늦어요. 입고갈 옷이 없어서 놀림거리 될 거라고요. 여인네들은 그런 걸 제일 좋아한단 말이에요. 지난번에 제가 막아드리지 않았으면 그 탕을 쏟았을 것이고, 온 경성에 소문났겠죠. 다들 부인 출신을 알아서 웃음거리가 생기기만 간절하게 기다리는데, 전혀 신경도 쓰지 않으시다뇨. 다른 사람이 드시기도 전에 뭐가 급해서 탕을 드시고 그러세요. 식은 것 같아도 뜨거운 탕이였다고요.” 

아원은 조 낭자라고 불리는 재봉사가 직접 차를 내오러 간 걸 보고, 눈앞에 놓인 옷감을 하나씩 살펴보면서 말했다. 

“응, 응. 알았어. 나도 조심할 만큼 조심하고 있다고. 매일 배곯고 갔다가 배곯고 돌아오잖아. 칼날 같은 그 눈빛들만 봐도 밥이 안 넘어간다고. 그날 저녁은 진짜 너무 배가 고파서, 다들 배불리 먹었으니까 탕을 안 먹는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지, 그런 줄 알았겠니? 네가 신경 써준 덕분에, 연회에 대여섯 번 참석한 것 중에 딱 한 번 실수했잖니. 게다가 본 사람도 없었어, 이쯤 하면 나 하산해도 될 것 같은데?” 

“흥. 지금처럼 하는 것만 해도 괜찮은 건 맞는데, 하산은 아직 멀었어요.” 

아원이 코웃음 치며 하는 말에 영아가 곁에서 말했다. 

“언니야, 이번엔 나도 데리고 가줘. 난 한 번도 못 가봤잖아.” 

아원이 막 유가에 왔을 때, 마침 임새옥이 처음으로 명첩을 받았다. 아원이 경성에 오래 있었던 것만큼 치장이며, 사람 눈치 보는 거며 모두 능통한 걸 알기에 같이 가달라고 살살 달랬었다. 하지만 아원은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그러다가 임새옥이 혼자 옷을 갈아입고 치장하고 나왔는데 사람이 변한 걸 보고 같이 가도 창피할 일은 없겠다 싶어 따라갔었다. 그 후로는 연회엔 항상 그녀가 따라갔다. 

“거기가 노는 덴 줄 알아? 네가 가서 무얼 해.” 

아원이 눈을 부릅뜨자 영아가 입술을 내밀었다. 

“돈을 죄다 옷, 머리 장식에 쓰느라고 오랫동안 기름진 걸 못 먹었단 말이야.” 

임새옥은 피식 웃었고, 아원은 눈을 흘겼다. 문득 임새옥이 좋은 생각이 나서 손뼉을 쳤다. 

“생각났어! 생각났어!” 

마침 돌아오던 조 낭자가 그 소리에 깜짝 놀라 흠칫했다. 아원이 뒤에서 찔러대는데도 임새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아원, 여기서 재단하는 거 보다가 집에 가 있어.” 

임새옥이 말을 마치고 바람처럼 달려 나가자 영아도 재빠르게 따라 나갔고, 혼자 덩그러니 남은 아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조 낭자는 손가락을 깨물며 아원의 눈치를 봤다. 

“부, 부인 걸음이 참 빠르시네요.”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아원의 안색이 더 구겨졌다. 

“우리 부인은 황명을 받고 온 마음이 어전에 다 가 있어서 그래요. 입조심 해요. 혹여 안 좋은 말이 한마디라도 들리면 가게 부숴버릴 거예요.” 

아원이 싸늘하게 하는 말에 조 낭자는 감히 어찌 그러겠냐고 손을 저었다. 아원은 화를 꾹 참고 배자에 쓸 오색 장화(妝花: 남경 운금雲錦 중 직조 공예가 가장 복잡한 품종. 남경 지방 특색을 지닌 대표적 꽃무늬 직조물) 비단을 골랐다. 잠시 생각하다가 대홍색 금지녹엽(金枝綠葉) 백화(百花) 옷감을 골라서 치마도 만들라고 했다. 

“모두 은자 닷 냥입니다. 대저아, 선금으로 내시겠어요?”

조 낭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아원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유 사농 댁에 보내고 돈은 조씨 부인에게 받아요.”

아원은 계산서를 받고 마음 아파하는 임새옥의 모습을 상상했더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제때 물건을 보내라고 당부한 후에 집으로 돌아가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영차 소리와 함께, ‘소가’라는 글자가 적힌 상선이 기슭에 닿자, 안절부절못하던 여인이 치맛자락을 들고 배 위로 뛰어오르려고 했다. 그걸 걸 본 소금남이 한발 먼저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널판을 가리키며 올라가시라고 손짓했고, 멱리 아래 임새옥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혀를 살짝 낼름하고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올라갔다. 

소금남은 그녀와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그의 지시에 선창이 열리자, 켜켜이 쌓인 널빤지가 보였다. 흙이 깔린 널빤지에 파릇파릇한 시금치 같아 보이는 작은 잎이 자라 있었다. 

“이거 맞습니까? 여남은 곳을 뒤져서 운대(雲臺: 유채의 다른 이름) 세 묘를 구했는데, 충분하겠습니까?” 

임새옥은 눈빛을 빛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예, 예. 됐어요. 감사해요, 대관인, 정말 감사해요.”

임새옥이 돌아서서 예를 갖추자 소금남은 문득 민망해서 재빨리 몸을 피해 예를 받지 않았다. 

기쁨과 감사가 저토록 언행에 그대로 드러나는 여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것 없다고 말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잊지 말고 돈만 내시면 됩니다.” 

그러고 살며시 웃는데 임새옥도 웃었다. 

“당연하지요. 이자도 세 배로 돌려드릴 건데요.”

눈앞에서 흔들리는 작은 손가락에, 소금남은 잠시 멈칫했다가 남이 볼까 두려운 듯이 시선을 피했다. 

“부인, 농담도 잘하십니다.”

같은 시각, 변경 성문 쪽 관도(官道)에 한 무리 관리들이 서 있었다. 추위를 쫓을 겸, 그리고 조바심을 달랠 겸, 쉴 새 없이 손을 비비고 발을 굴렀다. 오늘이라더니, 유 대인은 언제 돌아오냐고 불평하는 소리도 수시로 들렸다. 

그러는 사이 전방에 검은 말 열몇 마리가 질주해왔다. 선두에 두터운 융의(絨衣)를 걸치고 양모 쓰개를 쓴 사람이 객지를 떠도느라 지친 모습으로 달려오자, 관리들은 신이라도 영접한 듯이 우르르 몰려갔다. 

“왜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유소호가 말고삐를 잡고 다급하게 말에서 뛰어 내리며 물었다. 관리들이 입을 뻥긋거리며 서로 미루고 눈짓하는 걸 보고 다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밭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제 처가 줄곧 살피던 것 아니었나요?”

그 말에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고는 앞으로 나섰다. 

“대인, 부인 때문입니다. 부인이 잘 자라고 있는 채소를 뽑고 천막 한 묘를 비우더니, 비우더니, 운대를 심는답니다.” 

“운대요? 11월에 운대를 어떻게 심는다고요?”

유소호가 얼떨떨하게 묻는 말에 다들 일제히 맞장구쳤다. 

“그러니까요, 그러니까요. 우리도 그렇게 말씀드리고 설득했지요. 한데 듣지 않으시니 어쩝니까. 방법이 없으니 여기서 대인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벌써 심었을 겁니다…….”

유소호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말에 올라타서 방향을 틀어 어전 쪽으로 질주했다. 관리들도 허둥지둥 자기 말을 찾았다. 그중 누군가는 자신들을 보우해달라고 하늘에 기도했다. 

그 여인의 등쌀에 어전 수확이 정말로 한 톨도 없이 끝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찌 그 여인은 우리 봉록을 빼앗으려는 겝니까!

“전에 유 부인을 만났을 때는 시골 출신이라 저속하고 무지하다는 소문과 달리 단정하고 예의 바르더만, 왜 갑자기 미친 것처럼 굴지? 유 대인의 앞길을 끊어놓는 짓 아니냔 말이지.” 

누군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하하. 설마…….”

서리 하나가 돌연 제 머리를 치면서 유소호와 함께 돌아온 병사에게 물었다. 

“유 대인이 돌아온 다음에 영두항부터 가셨느냐?” 

병사는 얼굴을 굳히며 서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는 말을 재촉하여 이미 멀리 간 유소호를 쫓아갔지만, 나머지 사람들의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설마 유 부인이 알게 되었나? 시골 여인은 질투가 많다던데. 그래서 일부러 이런 짓을 해서 유 대인을 사지로 몰려는 것인가? 심괄 대인 집안과 사이가 좋다던데, 조씨도 장씨처럼 악처인가?” 

한순간 관도에 잡소리와 흙먼지가 휘날렸다. 

임새옥은 마지막으로 옮겨 심은 새싹을 살펴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이마에 흐른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한쪽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소금남을 돌아봤다. 

“내년 4, 5월이 되면 여기에 꽃이 잔뜩 필 거예요. 그때 전가아를 데리고 와 보여주세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소금남은 일을 하느라 뺨이 발그레해진 여인을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흐르는 땀방울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온통 푸르른 이곳에 서서 활짝 웃는 모습이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지만, 금세 적절하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갑작스러운 감정을 억눌렀지만,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소금남은 시선을 밭으로 돌렸다. 소작농들은 행여 여린 새싹을 밟을세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몇몇 소작농은 부모를 잃은 얼굴로 밭머리에 쭈그리고 앉아 시들어버린 채소 싹을 에워싸고 있었다. 

소금남은 사환을 불러 그 소작농들에게 돈을 주고 보내라고 지시했다. 막 그 말을 끝냈는데, 말을 탄 사람들이 흙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왔다. 

“낭자, 당신 뭘 하는 거지?” 

유소호는 말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내리더니 주변을 아랑곳하지도 않고 크게 소리쳤다. 소리를 듣고 돌아선 임새옥의 얼굴에 금세 웃음꽃이 피어났다. 그녀는 유소호의 얼굴에 나타난 초조함, 분노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유소호는 이번에 족히 열흘은 나가 있었다. 임새옥이 변경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었다 보니, 밖에서 만난 게 아니라면 분명 달려가 안겼을 것이다. 

“이랑, 이랑. 나 유…… 운대를 찾아냈어요. 겨울에 운대가 딱이라는 게 생각났죠. 우리 밭을 새로 만든 거라서, 지금은 뭘 심어도 뒷심이 없어요. 이 유채…… 운대는 적응력이 강하고, 또 두텁고 푸석푸석한 흙을 좋아해요. 이번에 운대를 심으면 토양의 거름기도 높일 수 있고, 수확한 다음엔 기름으로 짤 수 있어요. 어때요?” 

임새옥은 그날 기름진 음식이 먹고 싶다는 영아의 한마디에 기름 짜는 데 쓰는 유채가 떠오른 이래 줄곧 흥분 상태였다. 이렇게 좋은 걸 왜 잊었을까. 유채는 실속도 있고 땅도 비옥해지는 좋은 농작물이었다. 

그녀는 반나절 고민 끝에 유채의 고대 명칭인 운대를 생각해냈다. 1년 사계절 어디에든 심을 수 있고, 지금 마침 남방에서는 유채 모종을 키울 때라서 소금남에게 부탁해서 사 왔는데, 가격까지 저렴할 줄은 몰랐다. 

이 시대에 기름은 주로 들깨, 살구씨, 울금향씨, 만청자(순무 씨)를 많이 사용하고 운대는 줄곧 식용 채소로 여겨졌다. 그러니 운대를 제대로 재배하고 다시 널리 보급하면, 단순하게 몇 묘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보다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니, 얼마나 기뻐할 만한 일일까.

그녀는 그렇게 흥분한 상태인데, 유소호가 곁에 없으니 말할 데가 없었다. 아까 도저히 못 참고 소금남에게 한바탕 이야기했는데, 문외한인 소금남은 호기심 어린 눈빛과 축하하는 미소를 주었을 뿐이다. 덕분에 그녀의 들뜬 마음을 완전히 쏟아내지를 못했다. 

유소호는 흥분해서 참새처럼 폴짝거리는 여인의 모습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도저히 퍼부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 이마의 땀을 닦아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낭자, 촉개(蜀芥: 갓)나 운대처럼 잎을 따는 채소는 모두 7월에 심는 것인데, 어찌 제철이 아닌 지금 심었어.” 

임새옥은 그제야 유소호의 초조해하는 기색을 알아차렸다. 얼굴이 바람에 튼 걸 보니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렸더니, 관리들이 한쪽에서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눈치챈 그녀는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다가 유소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바로 씨를 뿌리는 거면 10월에 하는 게 맞아요. 그래서 남쪽에서 모종을 구매해서 옮겨심기한 거예요. 나, 나, 자신 있어요…….”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물론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자신 있어서 뭐라고 해야 좋을지 막막해서였다. 

금세 풀이 죽어서는 조금 겁먹은 듯 바라보는 눈빛에 유소호는 이내 마음이 누그러졌다. 얼굴을 쓰다듬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애써 자제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 

임새옥은 유소호의 안색이 누그러지는 걸 보고 자기 말을 믿는다는 걸 알아챘다. 순간 기뻐서 진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그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응. 이랑, 날 믿어요.” 

겁먹은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한순간 활짝 핀 꽃처럼 웃는 그녀를 보며, 유소호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품에 안을까 봐 얼른 시선을 피했다.

“믿지. 우리 낭자가 관리들을 곤경에 빠뜨릴 모진 사람이 아닌 걸 믿지.”

주변에서 지켜보던 관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하나같이 짓궂은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대인에게 제법 심 공(公)의 풍모가 느껴지는군요.”

아직 조금은 불안했지만, 유소호가 인정했으니 됐다. 이제 하늘이 무너져도 받쳐줄 사람이 있으니. 아내의 환심을 사려는 대인의 흥을 뭐하러 굳이 깨겠나. 

관리들은 한순간 서로 손짓하며 밭으로 들어가서 유채를 살폈다.

천막 채소를 다 뽑힌 소작농들도 안도했다. 

자신들보다 더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관리들도 다 차분해졌는데, 자신들이 안도하지 않으면 어쩔 건가. 어차피 농사를 지어도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겨울에 할 일도 없으니, 잘 되면 공으로 이득 보는 것이고, 잘못되어도 쓸데없이 일찍 일어났다고 치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손실 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우르르 흩어지려는데, 그 모습을 본 임새옥이 그들을 불렀다. 

유채는 씨앗을 뿌리고 싹이 나면 내버려 둬도 되는 채소가 아니었다. 임새옥은 소작농들을 불러서 모종이 어느 정도 튼튼하게 자라서 겨울을 무사히 지나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밭에 서서 모종을 가리키며 흙을 어떻게 고르는지, 물은 어떻게 주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또 돌아가면 거름을 준비해서 새싹이 안전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온도를 유지하게 흙에 뿌리라고 했다. 

소작농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관리들도 차츰 몰려들더니, 이야기를 들을수록 감탄하는 눈치였다. 유소호가 전혀 의문을 품지 않은 표정으로 곁에서 빙긋이 웃고 있는 걸 보고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저 무턱대고 하는 행동이라면, 저렇게 자세히 알 리도 없지 않은가. 

이미 큰길로 나간 소금남은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말을 타고 가려는데, 온몸을 비단옷으로 치장한 이용이 앞에 전가아를 안고는 말을 몰고 달려왔다. 

“자형 만나러 집에 갔더니 여기 있다고 해서요.” 

이용은 말고삐를 당기고 말머리를 틀려다가 밭에 잔뜩 모여있는 사람을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유 소상공이 또 공을 세웠습니까?” 

소금남이 싱긋 웃으며 말 위에서 몸을 내밀어 전가를 안아왔다. 붉은 장포를 입고 금빛 사관(紗冠: 상투처럼 틀어 올린 머리에 쓰는 작은 관)을 쓴 전가아의 손을 만져봤더니 따듯한 걸 보고는 마음을 놓았다. 

이용의 말에 무심결에 그 방향을 바라보니 마침 사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유소호와 임새옥이 나란히 걸어오는데,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웃고 있는 게 어렴풋이 느껴져서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화저아, 화저아!” 

그때 갑자기 전가아가 손뼉을 치며 그쪽을 가리켰다. 이용도 저도 모르게 여인을 눈여겨 바라보았다. 검은색 겹옷, 남빛 치마를 입은 그 여인은 분 하나 바르지 않고, 장신구 하나 없는 차림이었다. 사내들 사이에 있으니 유난히 가냘파 보였다. 

이용이 전가아를 다시 안아가더니 말을 재촉했다. 

“가자, 네 화저아에게 가보자.”

다급하게 불러도 이용이 듣지 않자, 소금남은 잠시 주저하다가 할 수 없이 따라갔다. 

“사람들 앞에서 말조심해라. 어찌 됐든 6품 명부이니…….”

뒤를 쫓으며 당부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용이 돌아보며 웃는 듯 마는 듯 그를 힐끔 바라봤다. 

“자형, 배려가 제법 깊습니다?”

“처신 잘해라.” 

소금남은 어두워진 안색으로 나지막이 한마디하고는 말을 멈췄다. 이용은 크게 웃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용, 대인들을 뵙습니다.” 

이용은 예를 갖추며 슬쩍 그 여인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멈칫하더니 재빨리 사람들 뒤로 몸을 숨겼다. 전가아를 봤는지, 몸을 반만 빼꼼 내밀고 그쪽을 바라봤다.

이용은 최근에 강녕부에서 옮겨온 인물이었다. 아비 덕분에 정9품 문산관(文散官: 해당 업무가 없는 문인 관직) 등사랑(登仕郞)이 되었다. 한직이지만 글씨를 빼어나게 쓰고 안건 판결을 제법 잘하는 데다가 얼굴이 잘났고 통이 크고 사람을 잘 사귀어서 조정에 이름이 조금은 난 편이었다. 다들 왕안례(王安禮: 왕안석의 동생)와 제법 비슷한 것이 사생활까지 매우 닮았다고 말하곤 했다. 온유하고 곱상한 외모로 여인들의 눈길을 꽤 끄는 그는 소문에 의하면 집에 아름다운 처첩이 가득하고, 밖에서도 무절제하게 여인들과 교류한다고 했다. 지아비 있는 여인과 관계를 가진 적도 몇 번 있다고 하고, 바로 그 대목 때문에 출세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있었다.

한번은 황제가 이용이 올린 상주서를 보고 아름다운 글씨체, 조리에 맞는 문체에 크게 호감을 느끼고 관직을 높여주려 했으나, 조정 관리의 첩과 사통한 이유로 개봉부에 고발됐다는 보고를 받고는 곧바로 그 생각을 접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마터면 유삼변(柳三變)을 대하던 인종(仁宗)처럼 될 뻔한 황제는 조서를 내려서 이용을 파직시키고 다시 등용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이용은 전혀 조심하지 않고 여전히 제 뜻대로 살아서 가족들의 큰 골칫거리였다. 

(※유삼변柳三變: 유영柳永. 송나라 문사. 남녀간의 슬픈 사랑과 이별을 노래한 시가 많다. 일생을 화류계 기녀들과 함께했으며 그녀들의 일상과 서정을 노래했다. 다른 문사들이 자연을 벗 삼아 명산대천을 순례하며 시를 짓는 반면, 유영은 성의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방랑했고 이때 느꼈던 감정을 작품으로 남겼다.)

유소호는 조정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이용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행 관리 중에 이용을 알아보는 사람이 바로 소개해주자, 말주변이 좋은 이용은 입을 열자마자 유소호에게 감사 인사부터 전했다. 알고 보니 그 역시 어전을 산 것이다. 이용의 행실에 관한 소문을 어느 정도는 아는 유소호는 예의를 지키며 거리를 두었다. 

임새옥은 조마조마해졌다. 그동안 연회에 나간 시간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여인이 있는 자리엔 남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 법, 이용의 자자한 명성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생각한 것처럼 역시나 풍류, 호색한 사내임을 검증한 것이다. 그래서 전가아가 이리저리 눈을 돌리며 자신을 찾는 걸 봤지만, 다가가지 못했다. 저 사내와 얽혔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르니 말이다. 

다행히 이용은 간단히 몇 마디 하고는 알아서 물러섰다. 임새옥은 사람들 속에 파묻힌 채 영아를 잡아끌어서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살그머니 휘장을 젖히고 밖을 바라봤다. 전가아가 여전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서 마차를 세우라고 할 뻔했는데, 다른 곳을 바라보던 이용이 별안간 고개를 돌리더니 싱긋 웃었다. 임새옥이 화들짝 놀라 서둘러 휘장을 내렸다. 

“뭘 봤길래 그렇게 놀라셔요?”

호기심이 발동한 영아가 휘장을 젖히려 하다가 임새옥이 손을 찰싹 때리자 입술을 내밀고는 다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유소호가 돌아오자 온 집안에 기쁨이 넘쳤다. 부부는 잠시 떨어지는 것이 신혼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기쁨에 그 밤 내내 몸을 한데 엉켰다. 

날이 하루하루 추워졌다. 어전 농사가 끝난 후, 나갈 구실이 없어진 임새옥은 함부로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저 언제 추가로 비료를 뿌려야 하는지, 언제 밭의 흙을 엎어야 하는지 등을 유소호에게 설명했다. 논벼, 천막 채소는 잘 알고 있으니 달리 이야기할 필요가 없고, 유채도 거름을 충분히 주었기에 겨울만 잘 지나면 따로 돌보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나날은 다시 예전처럼 평온하고 조용해졌고, 임새옥은 무료함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유씨와 아원이 웃으며 바느질을 하는 걸 바라보다가 신발 천을 내던지고 일어난 그녀가 창가에 기대서서 활짝 핀 수선화를 바늘로 건드리는데 그걸 본 유씨가 그녀를 불렀다. 

“얘야. 금세 섣달이 되고 새해를 맞이할 텐데, 신발 천은 다 만들었니?” 

“만들었어요. 만들었지요. 이것 보세요, 다 됐잖아요.” 

임새옥이 웃는 얼굴로 돌아보고 대답하면서 길게 기지개를 켜자, 아원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흥. 절대로 직접 신지 마세요. 창피해서 싫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유소호가 밖에서 발을 터는 기척이 들렸다. 영아가 민첩하게 달려 나가 휘장을 젖히자, 유소호가 어깨에 눈송이를 달고 손을 비비며 안으로 들어왔다. 

“눈 옵니다.” 

임새옥이 후다닥 나가보니 그의 말대로 정원 안에 눈송이가 팔랑팔랑 내리고 있었다. 

“곧 새해구나!” 

“얘야, 이랑 말이 우리도 집에서 손님 접대할 때가 되었다는구나.”

안에서 부르는 소리에 다시 후다닥 들어갔더니 유씨가 상자를 열어 장부를 꺼냈다. 아원과 영아는 세 사람이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물러갔다. 

“반년 동안 우리가 여기저기 많이 방문했는데, 한 번도 답례는 하지 못했잖아. 우선 내가 너무 바쁘기도 하고 당신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이 안정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그래서 연말 휴가 전에 동료와 부인들을 모시고 식사 대접하면서 신세를 갚을까 하는데. 낭자가 수고 좀 해줘.” 

유소호가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씨에게 다가가 함께 장부를 들여다봤다. 

“신세는 갚아야 하는데, 지금 집에 돈이…….” 

유소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알아. 얼마 안 되는 봉록을 모두 접대에 쓰거나 어전에 쏟아 넣었으니 다른 사람처럼 거창하게 할 필요는 없고 성의껏만 하면 돼.” 

유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예전에 집에서 열던 연회는 돈을 물 쓰듯 하지 않은 적이 없거늘.” 

임새옥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했다. 

“들어보니까, 경성에서 유명한 주루 요리사를 모시는 데만 해도 은자 열몇 냥이 든다던데요. 그 돈이면 집에서 한 달 먹고살 돈이에요.” 

그 말에 유소호도 눈살을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됐어. 나중에 다시 얘기해.” 

그러다가 웃으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요리사를 부르는 데 돈이 그리 많이 든다고? 많이 먹어봤는데, 우리 낭자만큼 맛있게 하는 곳은 하나도 없더만. 그렇게 따지면 낭자의 몸값이 꽤 높은 셈인데?”

유씨가 당장 혀를 차며 며느리를 그런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하는데 임새옥은 멈칫하다가 곧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생각났다. 이랑. 우리 연회를 열고 손님 초대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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