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57)

 六. 어린 시녀가 결백을 말하다

밤엔 어느새 쌀쌀해진 9월 중순 무렵, 은홍색 배자를 입은 임새옥이 결리는 어깨를 풀어주며 반쯤 만든 대홍색 신발 천을 내려놓았다. 유소호가 여전히 불빛 아래서 쓰고 그리며 붓을 놀리는 모습에 곁에 있던 등불을 밀어주었다.

얼마 전에 소금남이 저택 몇 채를 골라와서 임새옥이 결정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임새옥은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 어서 소금남과 함께 가보라고 유소호를 재촉했다. 그러나 사농시(司農寺)에서 공금을 횡령했다고 어사가 상주서를 올렸고, 유소호는 거기에 연루되지 않았지만, 어찌 됐든 구성원이라 불가피하게 연신 불려가 심문받았다. 그렇게 보름 넘게 시달린 후에야 일이 잠잠해졌고, 숨도 돌리기 전에 황제가 유가 벼의 높은 생산량에 흥미를 느끼는 바람에 황궁에 논을 만들었다. 직접 와서 살피라는 말에 유소호는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한바탕 농사를 짓는 둥, 이래저래 바쁜 사이에 어느덧 9월이 되었다. 

유씨는 장씨를 만나는 것도 두려웠지만, 매일 피해 다닐 수도 없어서 직접 저택을 보러 가겠다고 나섰다. 임새옥이야 그걸 두고 볼 수 없으니 결국 자기가 영아를 데리고 나섰다. 소금남을 따라 하나하나 집을 본 결과, 이제 두 곳 남았는데 마지막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크기는 비슷한데, 하나는 커다란 화원이 있고, 하나는 집채가 좀더 많아요. 어머님은 집채가 많은 걸 하라고 하시고요.” 

“우리 식구가 몇이나 된다고, 집채 많은 집이 뭐가 필요해서.” 

그 이야기가 나오자 임새옥은 답답해졌다. 유씨의 속뜻을 왜 모르겠나. 유소호에게 첩을 들여주려고 준비하는 것이다. 

임새옥이 일어나 머리 장식을 벗으며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얼굴로 대답했다.

“지금이야 몇 안 되지만, 앞으로는 모르죠.” 

그 말에 유소호가 붓을 내려놓고 임새옥 곁으로 다가가 품에 안았다. 

“그렇지. 앞으로 적어도 아이 열은 낳아야지. 아이들이 언제까지 부모와 같은 방에 끼어 살 순 없을 테고. 역시 어머님이 꼼꼼하시군.”

임새옥이 얼굴을 붉히고 웃다가, 그 열 명 중에 몇 명이 자기 소생일까 생각하느라 웃음이 어색해졌다. 유소호도 눈치챈 모양이지만, 굳이 이야기하지 않고 등 뒤에 서서 머리카락이 참 까맣다고 칭찬하고는 머리를 빗겨 주었다. 그러면서 유소호가 조정의 일을 이야기해주자, 임새옥이 귀를 쫑긋 세웠다. 

“왕 대상공이 사직 상소를 올렸다고요?” 

왕안석이 퇴직하면 조정 인사가 대대적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심괄은 능력 면에선 손가락질할 거리가 없지만,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입지가 확고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왕안석이 강녕으로 물러간 후에 심괄은 수모스러운 일들을 저지른 후 황제에게 미움을 사게 되고, 신구 양 당파에 동시에 공격당하다가,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영락성(永樂城) 전투에서 참패한 후 정치 생명이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로 세상에 영원히 이름을 알리는 <몽계필담>을 쓸 시간이 생긴다. 이게 과연 행복일까 불행일까? 이 중요한 일에 대해 심괄에게 암시를 좀 주어야 할까? 운명을 바꿀 수 있도록?

임새옥이 그런 생각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문도 함부로 나갈 수 없는 여인인데 누가 그녀의 말을 믿을까. 잘못하면 요괴로 여기고 불태워 죽일지도 모르는데.

됐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 뿐이야. 공명을 바라고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조용히 살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해. 역사는 순리대로 흐르게 두자고. 

하지만 임새옥은 자신의 작은 나비 날갯짓이 완전히 헛된 것은 아님은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날갯짓은 역사상 평가가 그다지 좋지 않은 사람에게만 작용했을 뿐. 그건 바로 등관이었다. 역사에 따르면 ‘비웃든 욕하든 당신 뜻대로 하시오.’라고 했다는 등관이 지금쯤 아마 괵주(虢州) 지부로 좌천되어 정치 인생이 끝났을 때였다. 

(※소매종여, 호관수아위지笑罵從汝, 好官須我爲之. 비웃든 욕하든 당신 뜻대로 하시오, 나는 높은 관리가 되겠소, 라고 했다는 등관의 일화)

그러나 유소호가 조정에 들어온 일로, 등관은 황제에게 잘 보일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 여혜경과 왕안석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방식을 버린 덕분에 황제가 ‘괴이한 것에 마음 쓰고, 천성이 간악하다. 분별없이 일을 논하고 사람을 천거한다.’고 평가할 일이 사라졌고, 오히려 유소호에게 협조하고 천거한 한 그를 백성의 행복을 추구하는 좋은 관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이미 희녕 9년 9월 말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병부 시랑 자리에 든든히 앉아 있었다. 

그러나 임새옥은 조정에서 벌어진 이런 일은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마주할 자신의 인생에만 관심을 두었다.

왕안석이 곧 실각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유소호를 보며, 임새옥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역사를 아는 사람으로서, 그녀의 왕안석에 대한 관점은 역사 속에 사는 유소호와 달랐다. 한숨이 나왔다. 곧 조정이 크게 동요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되면, 유소호 같은 농관에게 파급이 미칠지 아닐지도 모를 일이었다. 

“왜 그래?” 

한참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유소호가 물었다. 임새옥의 얼굴이 망연한 데다 심지어 서글퍼 보이기도 한 것이 제 말을 듣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가 첩을 들이려 하는 일로 근심하는 거겠지? 

하긴, 여인들이 조정일에 관심을 가질 턱이 있나. 

유소호가 임새옥을 품에 꼭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화원 있는 집이 좋아. 내일 어머니께 말씀드릴 테니 그 집으로 해. 서둘러 이사 가야지.” 

정신을 차린 임새옥은 그의 배려에 감동해서는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이랑, 혹시……. 아니, 나중에 관직에서 물러나면 우리 다시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지으면 어떨까?”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임새옥을 안고 침상 위에 누웠다. 

“나중 일은 급하지 않아. 그것보다 우리 가문의 후사를 위해 힘써야지.” 

사흘 후, 유소호는 정말로 그 저택을 사들여 돈을 내고 계약을 마쳤다. 심괄이 도와줄 사람들을 보내 주어 화원만 남기고 새 가구를 들이는 선에서 저택 정리를 끝냈다. 날이 추워져서 화원을 정리하기 쉽지 않았고, 또 하나는 돈을 거의 다 써서 보수할 여력이 없어서였다. 

음양(陰陽)을 보고 길일을 골라 떠들썩하게 그 집으로 짐을 옮겼다. 장씨는 시녀, 어멈을 데리고 직접 배웅하면서 골동 장식품 등을 많이 선물했다. 장씨가 손을 잡고 아쉬워하자 유씨도 잠시 껄끄러운 마음을 내려놓고 그녀의 손을 토닥여주었다. 

이 여인이 지아비를 학대하는 행실은 싫지만, 다른 일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으니까. 

그렇게 손을 토닥이며 이야기하다가, 기분이 좋아져서 저도 모르게 <여계>에 관해 이야기하려 했다. 다행히 곁에 있던 임새옥이 제때 눈치를 채고는 재빠르게 말을 잘랐다. 

며느리 훈계하는 건 몰라도 어머니보다 지위가 높은 명부(命婦)를 상대로는 아니에요. 가족 말고 시어머니의 설교를 참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어머니!

집들이 연회가 아니었다면, 유소호가 어느새 이 많은 관리와 친분을 맺은 걸 모를 뻔했다. 길일부터 꼬박 사흘 주연이 이어졌다. 다행히 대갓집 출신인 유씨에게 주연은 생소한 일이 아니었고, 장씨가 노복 여러 명과, 부엌어멈을 데리고 와서 도와준 바람에 임새옥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건 면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나, 안주인인 그녀는 온몸이 쑤실 정도로 바빴다. 

드디어 마지막 손님을 배웅한 다음, 권붕 아래에서 잠시 쉬려고 허리를 받친 채 막 석가산을 돌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튀어나와 부인, 하고 불렀다. 임새옥은 너무 놀라 다리를 삘 뻔했다. 

“아원, 넌 정말 신출귀몰하는구나.” 

임새옥은 기둥을 짚고 숨을 돌리면서 한쪽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붉은 금박 겹옷에 비취색 비단 치마를 입은 아원이 꽃병을 끌어안고 물었다. 

“이거 어디에 둘까요?” 

“일단 아무 데나 두렴. 나중에 다시 정리해야 해.” 

임새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불쾌한 기색의 아원을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아원은 꽃병을 한쪽에 내려놓고 서성거리다가 임새옥 앞에 멈춰 섰다. 

“부인, 저 때문에 이사를 서두르시는 건가요?” 

임새옥은 얼떨떨해져서 고개를 들어 이 깜찍한 시녀 아이를 바라봤다. 

“응?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아원이 눈썹 위로 가지런한 앞머리를 흔들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소상공께 다가가기만 하면 부인이 옆에서 훔쳐보셨잖아요. 경계하신 거 아니에요? 안 그러면 소상공이 어째서 일부러 절 피하세요? 지금은 새로 수리한 집, 환기도 하기 전에 서둘러 옮겨 오셨잖아요. 절 피하느라 그런 게 아닌가요? 오늘 제대로 부인과 이야기해야겠어요. 그래야 부인도 마음 놓지 않으시겠어요?” 

속마음을 들킨 임새옥도 감추지 않고 생긋 웃었다. 

“그런 이유도 있지. 저아, 화내지 말아. 저아의 평판을 해칠까 봐 그런 거니까.”

아원은 무른 칼 같은 공격에 그저 콧방귀를 뀌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명부이신 분이 이렇게 기뻐하시면서 그대로 기분을 드러내다뇨.” 

그러고는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임새옥의 앉은 자세를 손가락질했다. 

“앉은 자세가 이게 뭔가요?” 

임새옥의 옷차림을 보고는 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침향색(沈香色: 황갈색) 대금 상의는 백견(白絹) 도선(挑線)에 어울린다고요. 그런데 왜 담회홍색을 입으셨어요?” 

(※도선: 천을 짤 때 나오는 문양 혹은 다른 색을 엮어서 올록볼록한 느낌을 주는 치마)

그 말에 임새옥이 일어서서 매무새를 이리저리 살폈다. 

“이상해? 난 좋은 것 같은데?” 

아원이 입술을 내밀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저도 이제 알겠어요. 부인은 시원시원하신 분이죠. 그러니 저도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처음에 소상공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마음에 들었어요. 그분을 따르고 싶은 마음도 생겼고요. 이 점은 우리 부인께도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임새옥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부인이 예법을 모른다고 하지만, 다들 잘 못 본 거라고요. 솔직히 그때 부인께서 저를 소상공께 주었대도 아무도 뭐라고 할 수 없었어요. 하지만 우리 부인 말씀이, 소상공 부인이 오길 기다려야 한댔어요. 그래야 말씀드릴 수 있다고.” 

아원의 목소리는 맑고 카랑카랑하고 이야기할 땐 꼭 어린애 같아서 임새옥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비굴하지 않은 목소리만 들어도 이 애가 속셈을 감출 사람이 아님을 확신했다. 그래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부인께서 왜 내게 말씀하지 않으셨지? 혹여 오늘 말씀하실 거라서 네가 먼저 와서 이야기하는 거니?”

아원이 얼굴을 팩 돌렸다. 

“소상공 부인이 오신 다음에, 한 이틀 지켜보고 우리 부인께 됐다고 말씀드렸어요.”

임새옥이 웃음을 참으며 왜냐고 물으니, 아원이 비스듬히 뜬 눈으로 임새옥을 위아래를 훑어보며 대답했다. 

“부인은 치장도 할 줄 모르고 말씀도 함부로 하잖아요. 따라갔다간 체면 상할 일만 있을 거예요. 소상공이 아무리 좋아도 제겐 그 복이 없는 것 같네요. 그래서 말씀드리러 왔어요. 저 아원을 사사건건 경계하지 마시라고요. 저는 한 말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니 안심하세요, 부인.” 

임새옥은 정말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정말이니? 정말이야?”

하지만 아원은 그 말만 남기고 치맛자락을 들고 총총 사라졌다. 

밤이 되었을 때, 임새옥은 이 일을 유소호에게 이야기해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랑, 시녀 아이까지 내가 싫다고 당신 첩이 되는 걸 마다하네요. 나와 혼인한 바람에 고생이 많아요.” 

유소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가 이토록 무례하다니. 숙모께 말씀드려 혼내주라고 해야겠어.”

그러면서 임새옥을 품으로 잡아당겼다. 

“낭자, 낭자가 나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 

그는 한쪽에 놓아둔 만들다가 만 신발 천을 들어 올렸다. 바늘땀이 조금 크긴 해도 가지런하긴 했다. 

“이것 봐. 한 번도 배우지 않은 건데, 이 정도까지 하는 것만 해도 괜찮은 거지. 우리 집이 몰락했을 때, 빈곤한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 나는 2년이나 걸렸어. 당신은 이제 좋은 나날을 보낼 테니 잘 지내기만 하면 되잖아.

고생은 아무나 못 이겨낼지 몰라도, 복을 누리는 걸 못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다른 사람이야 모를 수 있어도 내가 모를까. 

노자 말씀이 ‘지혜가 많은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고, 진정으로 영민한 사람은 아둔해 보이며,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하셨지. 바로 우리 낭자 이야기 아니겠어.” 

(※大智若愚, 大巧若拙, 大音希聲, 大象無形. 노자, <도덕경>. 너무 출중한 것은 오히려 이해받지 못해 반대로 느껴진다는 의미)

임새옥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가슴에 기댄 채 콜록콜록 기침했다. 

“참으로 청산유수네요. 얼마나 많은 여인을 유혹하려고.” 

임새옥이 웃는 모습에 유소호는 그제야 마음을 놓으며 그녀를 안은 채 조정에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밤늦게까지 운우의 정을 나누다가 유소호가 편안히 잠든 후, 임새옥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아까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이랑, 오늘 당신이 해준 말을 위해서 그동안 나태했던 마음을 다잡고 당신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노력할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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