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대례를 올린 부부, 머리를 올리다
“나야, 나. 무서워하지 마.”
문 입구에서 걸어 나온 유소호가 손을 비비며 임새옥 앞에 섰다.
이씨 꿈을 꾼 뒤로 밤에 간이 작아진 임새옥은 겁에 질려 얼굴이 하얘져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깜짝이야. 뭐 하는 거야.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유소호는 가지런하게 놓인 향안을 보고 마음속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낭자, 마음 써줘서 고마워. 나도 어머니도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 거야…….”
유소호가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이 하는 말에 임새옥은 얼굴이 빨개졌다. 이런 걸 들키니 매우 어색했다.
“두 사람한테 고맙단 소리 들으려는 게 아니야. 난 다만……. 다만…….”
웅얼거리며 입을 연 임새옥은 ‘다만’ 뒤에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밤바람이 불어와 으슬으슬해져서 유소호를 방으로 들이고 싶지만, 유씨가 알면 화를 낼까 싶었다. 유가에 들어온 후, 아직 상이 끝나지 않았으니 정식 혼인이라고 해도 예법을 지켜야 한다고 유씨가 그랬었다. 내일이면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말로 할 수 없는 기분이 씁쓸한데, 유소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물었다.
“저기, 할 말 더 있어? 이야기해. 듣고 있어.”
이야기? 무슨 이야기? 어떻게 해?
유소호는 순간 더 난처해졌다. 어머니도 참. 이렇게 큰일을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그는 말을 듣지 않는 제 손을 마구 비비며, 머리를 거의 옷깃에 파묻을 것처럼 숙이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백옥같은 뒷덜미가 달빛 아래 드러났다. 유씨의 말이 떠올라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 아내는 어떤 여인일까?
그 생각을 하자 어째서인지 가슴이 시큰해지고 흐릿한 모습 하나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왜 그래?”
임새옥은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고개를 들었다. 조금 쌀쌀한 날씨에 유소호는 멍해 보이기만 해서, 오늘 힘들었나 싶어 걱정되어 다급히 물었다.
“종일 힘들었을 텐데, 일찍 쉬어. 내일은 길 떠나야 하잖아.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서신으로 보내면 되지.”
이렇게 심성이 좋은 여인인데.
유소호는 아까 무심결에 임새옥이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던 게 떠올라서 조금 남았던 망설임을 지워버렸다.
나, 유소호가 이렇게 순수하고 선량한 여인과 평생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곁에 서 있는 임새옥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흥분해서 부끄러운 마음, 그리고 묘하게 드는 무서운 마음에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켰다.
“낭자, 어머니가 나도 이리로 옮겨와도 된다고 하셨어.”
임새옥은 머리가 어지럽고 복잡했다.
이게 기쁨인가? 아니면 비통함? 행복? 두려움?
그날 머리에 쓴 붉은 천을 벗겼을 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유씨의 말에 마음이 진정되었고, 자신이 눈앞에 있는 이 청수한 소년의 아내라는 것도 거의 잊을 정도였다. 혼인한 이래, 그녀는 새장을 벗어난 작은 새와 같았다. 유씨가 엄격하긴 해도 그녀가 하는 일을 단속하진 않았고, 유소호는 온화하고 너그러웠다. 이런 생활은 그야말로 전생보다 더 자유로웠다. 그 바람에 자신이 이 가족과 끈으로 얽혀 있다는 것도 잊었다. 혼인이라는 인연의 끈에 말이다.
임새옥은 유소호의 설렘과 수줍음이 뒤섞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엿보였다. 미지의 생활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인생의 중대한 선택에 대한 두려움.
그녀는 갑자기 홀가분해졌다. 이 소년은 진지하게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엔 한때 오기로 정한 혼인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손을 내밀어 주었다. 말로 할 수 없는 두려움과 혼란을 느끼면서도. 사실 사람이라면 당연히 보일 가장 진실하고 가장 정상인 반응이었다.
임새옥은 갑자기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온유하고 존경할 만한 이 소년, 지금 눈앞에 긴장한 얼굴로 서 있는 이 소년이 정말로 나의 진정한 연인일까? 사랑이란 이런 감정이겠지? 가슴이 가득 부풀어 올랐다. 그 안엔 날뛸 듯한 기쁨, 수줍은 망설임, 그리고 조마조마한 두근거림도 있었다.
“당신, 계속 잘해줄 거야?”
임새옥이 고개를 들어 유소호를 빤히 바라보며 다급하게 묻고는, 다시 덧붙였다.
“나는, 나는 계속 잘해줄 거야.”
유소호는 한순간 울고 싶어졌다.
이런 때까지, 이 아이는 남에게 바라기만 하는 게 아니구나.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팔을 내밀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서 정중하게 말했다.
“응, 그럴 거야. 그럴 거야.”
행복함에 임새옥의 얼굴이 온통 붉게 타올랐다. 소년의 빠르고 힘차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내밀어 꼭 안으면서 얼굴을 그의 가슴에 묻었다.
“그럼, 그럼 우리 방에 들어가…….”
떨리고 나직한 목소리였다.
11월 중순인 이날 밤, 밤새 큰바람이 불었다. 덕분에 여러 날 맴돌던 가을날 마지막 온기가 싹 가시고, 다음 날 이른 새벽부터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눈발이 날리더니 온 세상에 얇고 서늘한 겨울옷을 입혔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한기에도 방 안의 온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임새옥은 몽롱한 가운데, 밖에서 부는 사람에 창틀이 털썩대는 걸 듣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날씨가 추워졌는데 유씨 거처에 아직 화로를 준비하지 않은 걸 떠올렸다. 그 생각에 벌떡 일어나다가 머리카락이 잡아당겨지면서 두피가 저릿했고, 유소호도 곁에서 웅얼거렸다. 그제야 두 사람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엉켜버렸음을 알아차렸다. 붉은 이불에 흐트러진 두 사람의 긴 머리카락이 어젯밤 이 금빛 붉은 휘장 안에서 마음과 정이 어떻게 얽히고 섞였는지 드러내고 있었다.
유소호도 놀라서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창밖을 바라봤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아직 멀었어. 어머니가 밥은 영아에게 시킨다고 하셨어. 낭자가 일찍 일어날 것 없어.”
임새옥의 얼굴이 붉어졌다. 지난밤에 벌어진 일도 떠오르고, 두 사람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걸 보니 부끄러울 수밖에. 부부가 되었다지만, 이렇게 발가벗고 마주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서 침상 가에 벗어둔 옷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의 새하얗고 향기로운 피부에 남은 지난밤의 즐거웠던 흔적과 꽃 같은 그녀의 몸을 본 유소호는 간밤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순간 마음이 뜨거워진 그는 그녀가 일어나버리는 게 아쉬워서 그녀를 끌어당겨 침상에 다시 눕혔다. 임새옥은 부끄럽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해서 밀치고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유소호는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번에 가면 적어도 한 달은 있어야 돌아와. 아쉽지 않겠어?”
두 사람은 해가 환하게 밝은 후에야 일어났다. 임새옥이 눈살을 찌푸린 채 거울 앞에 앉아서 두 갈래로 머리를 올리려는 걸 본 유소호가 옷 입을 겨를도 없이 다가갔다.
“이제 그런 머리를 하면 안 돼.”
임새옥이 수줍고 부끄러운 듯이 웃는 걸 보고 말을 이었다.
“우리 낭자는 모든 걸 잘하는 똑똑한 사람인데 어째서 치장은 못 할까? 사내인 내가 더 잘하네.”
임새옥이 그저 웃기만 하는데, 유소호가 정말로 나서더니 그녀의 새카만 머리카락을 경사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원보빈(元寶鬂: 머리를 정수리까지 말아 올려 원보 모양으로 고정시킨 쪽 진 머리)으로 틀어 올렸다.
경대를 살펴봐도 유씨가 준 작은 은빗밖에 없길래 그걸 꽂아주었다.
“집에 돈이 좀 있으니까, 머리 장식을 좀 사고 그래.”
임새옥은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발그레하고 살구눈엔 봄기운이 가득한 것이,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여서 빙그레 웃음이 났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아니라서 부부 두 사람이 서둘러 전청으로 향했다. 밥을 먹고 있던 유씨는 두 사람을 보고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말 하지 않았고, 영아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임새옥의 머리를 바라봤다.
“부인, 오늘 빗은 머리 모양, 예쁘네요. 전엔 왜 안 하셨어요?”
영아의 말에 임새옥은 얼굴을 붉혔고 유씨는 헛기침하며 영아를 노려보았다. 노비는 주인을 닮는다더니, 영아 역시 어벙하고 말주변이 없는 아이로구나, 하면서.
일가가 식사를 마친 후, 유소호가 가지고 갈 짐을 일일이 살펴보았고 유씨가 이런저런 당부를 하고 있는데, 노씨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서둘러 맞이한 유씨가 입을 떼기도 전에 노씨가 싸늘한 얼굴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딸이 날 인정하지 않지만, 나는 그럴 수 없네요. 딸 때문에 속 끓는 게 어미 팔자니까요. 다른 건 모르겠고, 한 가지 물어봅시다. 저아가 들어온 지 얼마나 오래됐는데, 아직도 합방시키지 않다니, 대체 그게 무슨 법도입니까? 순진한 시골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다른 여인 들일 생각인 모양인데, 잘 들어요, 사위가 첩을 열을 들이든 어쨌든, 우리 저아야말로 정실부인입니다. 저 아이를 넘어설 사람은 없…….”
인상 쓰고 들어오느라 다른 건 전혀 보지 못했던 노씨는 이야기하다가 저쪽에서 다가오는 임새옥이 머리를 틀어 올린 걸 보고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머리 모양이며, 행색을 노씨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안도하며 웃음 지으려다가 다시 얼굴을 흐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유씨가 웃으며 노씨를 붙잡고는 임새옥을 떠밀었다.
“안사돈, 어찌 됐든 안사돈 딸인데, 이 아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안사돈이 때려야지, 시어미인 제가 대신 때리겠습니까?”
그 말에 임새옥은 노씨 앞으로 가서 허리를 숙이며 어머니, 하고 불렀고, 체면이 선 노씨는 그제야 표정을 풀었다. 물론 울음도 터뜨렸다. 임새옥은 노씨를 달래기만 할 뿐 노비를 들이는 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다 노씨도 도저히 틈이 보이지 않자 결국 포기했다.
잠시 후 관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임새옥과 유씨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모두 나와서 유소호를 배웅했다. 유소호는 모두를 향해 예를 갖추면서 아내와 모친을 부탁했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우르르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과 유씨 모두 눈물을 글썽이며 유소호가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유소호가 저 멀리 간 걸 보고도 두 사람이 차마 돌아서지 못하자, 노씨와 여인 몇이 한참 설득한 끝에 겨우 천천히 돌아섰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던 눈발이 이제는 제법 커져서 사방에 흩날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디작은 십방촌이 눈안개에 뒤덮였다.
희녕 8년 말은 유난히 날이 추웠다. 특히 현대에서 온 임새옥에게는 더더욱. 이곳에 온 지 곧 만 5년이 되지만, 이렇게 추운 날씨에는 여전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큰 눈이 종일 내리고 있었다. 하늘이 어둑어둑해졌을 때쯤, 임새옥이 무명 겹옷을 두르고 밖에서 돌아와 문을 콩콩 두드리자, 노인 하나가 금방 문을 열어 주었다.
“날이 춥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부인. 노부인께서 몇 번이고 문간방에 다녀가셨습니다. 어서 밭에 가서 모시고 오라고요.”
사내가 우렁차게 말했다.
유소호가 집에 없으니, 여인 셋이 지내는 게 마음에 놓이지 않던 주 현령이 노인 한 명을 골라 문지기로 보내 주었다. 이름은 장사(張四), 예전에 군에 있던 사람이라서 무예가 대단했다. 하지만 이제는 늙고, 집안 친지 하나 없는 몸이라 관아 앞에 자리 잡고 밥 얻어먹던 사람인데, 이를 긍휼히 여긴 주 대인이 그가 충성스럽고 용감한 사내임을 보고 임새옥에게 말해서 문지기로 보내 주었다.
온 지 꽤 되었는데, 마당 안으로는 걸음도 잘 하지 않고 성실하게 문을 지키고 말도 많지 않아서 유씨가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괜찮아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천막이 무너질까 봐, 확인해야 마음이 놓여요.”
임새옥은 양손을 호호 불며 대답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중당(中堂)을 지나 유씨 거처 계단으로 올라갔다. 문 앞에서 신발에 가득 붙은 눈과 진흙을 털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매우 포근했고, 방 안에 걸린 사등롱(紗燈籠) 한 쌍에서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비쳤다. 유씨와 영아는 화로에 둘러앉아 불을 쬐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까르륵 뒤로 넘어가던 영아는 임새옥이 안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보고는 후다닥 일어나서는 그녀의 옷에 붙은 눈을 털어주고 겉옷을 받았다. 안에 입은 푸른색 바지의 바짓단에 온통 눈과 진흙이 붙어 있었다.
“어서 와서 불을 쬐려무나. 동상에 걸리겠다.”
임새옥의 젖은 신발을 본 유씨가 마음 아파하며 말했다.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신을 벗었다. 그리고는 말자(襪子: 양말)도 축축이 젖어 있자 바로 벗어 대충 바닥에 던지고는 맨발로 화로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 모습에 유씨가 머리통을 탁 때렸다.
“이게 무슨 꼴이냐!”
임새옥이 또 그저 웃기만 하자, 유씨는 깨끗한 말자를 가지고 오라고 영아를 보냈다. 한참 지나도 영아가 돌아오지 않자 유씨가 소리 높여 불렀고, 영아가 그제야 나와서 웃으며 말했다.
“들어간 김에 침상도 치우고 왔어요. 휘장 내리고 이불 깔고. 그러면 따듯하니까 불 쬘 것 없이 바로 주무시면 되잖아요. 노부인 왜 그렇게 불러대세요.”
식구라곤 세 사람밖에 없고, 유씨는 성격이 좋고, 임새옥은 더더욱 존비 개념이 없는 사람이라, 영아는 명목상 시녀지 사실상 가족처럼 지냈다. 날이 갈수록 말버릇도 없어져도 유씨와 임새옥은 괘념치 않았다. 지금도 유씨는 그냥 웃어넘겼다.
“그래, 재빠르구나.”
그러면서 임새옥에게 밥은 먹었는지 물었다. 임새옥이 먹었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유씨는 어서 가서 자라고 재촉했다. 영아가 벌써 물도 길어놓았는데 밭에 종일 있던 임새옥은 정말이지 춥고 피곤해서 씻을 겨를도 없이 자러 갔다.
유씨와 영아는 남아서 화로를 에워싸고 신발 천을 만들며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눴다. 두 사람은 내실에 있는 임새옥이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노부인, 배고프지 않으세요? 만두 가지고 와서 구워 먹을까요? 지난번에 부인이 그렇게 해주셨는데 맛있더라고요.”
영아가 웃으며 하는 말에, 유씨가 그녀의 이마를 콕콕 찌르며 먹보라고 놀렸다.
기나긴 겨울밤, 임새옥은 바느질할 줄을 몰라서 식구들의 신발은 모두 두 사람의 몫이었고 서둘러 만드느라 밤늦게까지 깨어있어서 출출하긴 했다. 영아가 웃으며 만두를 만들러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은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굳게 닫힌 창문 틈으로 퍼져나간 냄새가 흩날리는 눈발을 따라 흩날리면서 사라지고, 눈밭에는 부드러운 등불빛만 남았다.
눈 깜짝할 사이 섣달 열여드레가 되었다.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유씨는 추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마을 어귀에 가서 아들을 기다렸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서신 한 장과 신년 선물 한 짐뿐이었다.
개봉부에 큰 추위와 눈보라가 닥쳐 경성 안팎에 병들어 굶어 죽는 어린아이와 노인이 많아졌다. 백성을 긍휼히 여긴 황제가 경성 관리들의 휴가를 거두고 그들을 보살피게 했다. 유소호도 추위에 보리가 얼어 죽을까 걱정되어 사방을 둘러보며 직책을 다 하느라 집에 돌아올 틈이 없었다. 다섯 장 가득 미안함과 위안의 말을 담아 서신을 보냈지만, 유씨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아들이 함께 명절을 보내러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에 유씨는 바로 기운이 빠졌고, 임새옥은 그녀의 관심을 돌리려고 유소호가 보낸 신년맞이 물건을 펼쳐 놓았다. 유씨가 억지로 기운을 내서 살펴보았더니, 물건이 많지도 않았다. 검은색 기린(麒麟) 비단 두 필, 취람색 운단(雲緞) 한 필, 그리고 금은 머리 장식 몇 개.
머리 장식이 임새옥의 것이라는 걸 알아본 유씨는 입술을 슬쩍 올리며 가져가라고 했다. 임새옥은 다 가져가지는 못하고 은비녀 두 개만 골랐고, 유씨는 얼레빗 하나를 골라서 영아에게 주고는 물건을 치워버렸다. 웃지도 않고, 밥 먹을 기분도 아니라서 매일 방에 누워만 있었다.
임새옥이 곁에서 위로하자 유씨는 다 며느리 탓이라고 투덜거렸다. 굳이 농사를 짓는다고, 괜히 연근 계약 같은 걸 맺어서 떠나지도 못한다고. 아니었으면 진작 땅을 팔고 이랑을 따라갔을 거라고. 그랬으면 이랑이 연말에 홀로 외롭게 있지 않았을 거라고, 눈물까지 흘렸다.
“예, 다 제가 잘못했어요. 그럼 바로 가서 팔아버릴게요.”
임새옥이 웃으며 말을 그렇게 하고서는 고소한 죽을 들고 유씨에게 먹였다. 유씨도 사실 땅을 팔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금 형편이 이렇게 핀 것이 모두 밭에서 난 작물 때문이 아닌가. 장차 경성으로 간다고 해도 팔 수는 없었다. 유소호 혼자 벌어들이는 봉록만으로 어떻게 집안을 돌보겠나. 관리 중에 집안에 밭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냥 화가 나서 하는 말인데, 며느리도 뻔히 알면서 맞장구쳐주지 않고 굳이 저렇게 말하며 놀리니 분해서 침상을 내리쳤다.
“요요, 입만 산 것. 감히 시어미가 하는 말도 비아냥거리는 거냐? 그냥 좀 받아주면 안 되고?”
그 말에 임새옥이 웃음을 터트리며 죽 그릇을 한쪽에 내려놓았다.
“어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족끼리 서로 눈치 보고 꿍꿍이 부려야겠어요? 힘들어서 어떻게 살아요. 다 어머님이 너그러우셔서 그래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살죠. 어머님, 죽 그만 드세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한 상 가득 차려올게요.”
유씨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며 죽을 뺏어와 먹기 시작했다. 먹다가, 먹다가 웃음이 났다. 며느리의 말이 맞았다. 옛날을 돌이켜보면 어느 것 하나 지금 심경과 비교할 수 없었다. 지금 심경은 단 세 글자, ‘편안함’이었다.
며느리가 가리지 않고 대놓고 말하는데도 선을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통쾌하다는 생각이 들다니.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 누가 재채기만 해도 반나절은 눈치를 봐야 했던 옛날은 정말 피곤하기만 했었다.
섣달 스무날이 되자, 임새옥은 아침 일찍 밭으로 향했다. 소작농 네댓 명이 도롱이와 두립을 쓰고 천막 안에서 바쁘게 나와 그녀를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갔더니 천막 안에 새로 딴 과일, 채소가 흩어져 있길래 다가가 살펴보았다.
“부인,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조홍이 묻자, 임새옥은 잠시 둘러보다가 대답했다.
“많으면 다 쓰지 못할 거고, 아무리 계산해도 모든 집에서 정월 내내 먹을 만큼은 안 되겠네요.”
그 말에 다들 웃으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제사 지내는 데 효심만 보이면 되지, 사계절 내내 먹을 양을 바칠 수야 있나, 하면서.
그렇게 다들 나눠서 사람을 부르러 갔다. 주인댁에서 새해에 먹을 채소를 나눠준다는 말에 밭 앞에 사람들이 광주리를 들고 빽빽이 서서 기다리느라 온 마을이 떠들썩해졌다.
임새옥이 얼마 전에 밭을 둘러보러 왔을 때, 소작농 하나가 막대기를 들고 아이를 때리는 걸 봤었다. 아이가 밭에서 자란 신선한 열매를 보고는 어른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몰래 따먹었던 모양이다. 부모에게 잡혀서 모질게 맞는 걸 본 임새옥은 마음이 안 좋았다. 신발 파는 사람은 맨발이고, 누에 기르는 집에는 옷이 없다고 했던 말처럼, 정작 농사짓는 소작농이 자기가 기른 채소 한 입 먹어본 적이 없었다. 돈으로 바꿀 귀한 걸 아까워하지 않고 먹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다들 그저 잘 심어서 돈 많이 받고 팔아서 곡식을 살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임새옥은 그대로 돌아가서 유씨에게 이번 겨울은 채소 수확이 좋으니 새해를 잘 보낼 수 있게 소작농에게 나눠주고 싶다고 말했고, 유씨도 당연히 동의했다. 부귀하게도 살아도 보고 가난한 나날도 살아본 그녀는 식구들이 먹고살 만큼만 있으면 충분했다. 돈이 많고 적고가 뭐가 중요할까.
그리고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고, 소작농이 아닌 마을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자고 했다. 그렇게 덕분에 십방촌 사람들은 새해를 아주 잘 보내게 되었다. 유가 소작농은 집집마다 신선한 채소 한 광주리를 얻었고, 소작농이 아닌 집도 반 광주리 얻었다. 한순간 저마다 유가 지주의 후덕함을 칭송했다.
물론, 지보 조대산을 제외하고. 천막을 부쉈던 옛일을 아직 똑똑히 기억하는 임새옥은 조대산과 왕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섣달 스무사흘 밤, 유씨는 임새옥과 영아를 데리고 향을 피우고 조당(竈糖: 엿과 비슷한 당과. 끈끈하고 달달한 조당을 조왕신의 입에 붙이기 위해서라고 함.)과 기장밥을 지어서 조왕신(竈王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영아가 닭을 안고 향을 피우고 절한 다음 조왕신을 배웅했다. 다 마친 후 영아가 조당을 한 움큼 쥐고 밖으로 달려가자 임새옥이 다급히 고함쳤다.
“혼자 다 먹지 말고 마을 아이들에게도 나눠 줘!”
영아가 알겠다고 하고는 쿵쿵 달려나갔고, 밖이 곧 소란스러워졌다. 이번에 쓴 조당은 임새옥이 소가 점포에 부탁해서 경성에서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렇게 좋은 조당을 마을 아이들이 언제 먹어 본 적이 있을까. 한순간 유가 대문 밖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이 떠들썩해졌다.
문지기 노인 장사는 아예 대문을 활짝 열고 문신(門神: 대문을 지켜주는 신)을 붙일 준비를 했다.
유씨와 임새옥은 겉옷을 걸치고 문 앞에 서서 아이들이 새로 만든 등롱을 들고 영아 뒤를 쫓아다니는 걸 바라봤다. 임새옥이 웃는 얼굴로 해바라기 씨를 먹으며 바라보는데 곁에 있는 유씨가 갑자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유소호를 떠올린 것을 알고 위로하려는데 대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영아가 구르듯 달려 들어왔다.
“소관인이 오셨어요!”
당황한 유씨와 임새옥은 계단에서 구를 뻔했다. 세 걸음을 걸을 것을 두 걸음에 달리며 나가 봤더니, 진청색 사융(絲絨: 벨벳) 대창의(大氅衣: 소매가 넓은 겉옷. 관리들이 평소에 입던 겉옷)를 걸친 유소호가 말에서 내려서 바람을 맞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유소호가 돌아올 줄 몰랐던 유씨와 임새옥은 당황한 얼굴로 허둥지둥 맞이하러 나갔다.
“아들아, 이 시기에 어떻게 돌아온 것이냐?”
유씨는 덥석 팔을 잡다가 아들이 추워서 덜덜 떠는 게 느껴지자, 기쁘면서도 마음이 아파서 서둘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임새옥과 영아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일상복을 가져다 갈아입히고 추위가 가시도록 생강탕을 끓여다 주었다. 유소호는 화로 곁에 딱 달라붙어서 생강탕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서야 안색이 풀렸다.
“여드레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왔어요.”
유소호는 임새옥이 건네는 조당을 받아서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아무리 촉박하게 오고 가도 엿새는 걸릴 것 아니냐. 그럼 집에서 겨우 하루 자고 다음 날 바로 떠나야 하지 않아. 길도 험한데 뭐 하러 이런 고생을 해.”
유씨는 마음이 아파 내내 눈물을 닦았다.
“반나절이면 어때요. 매일 집에서 우셨으면서.”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미소를 지으며 자기를 바라보는 유소호와 눈이 마주치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녀는 차 내린다는 핑계로 저쪽으로 갔고, 유씨는 경성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유소호는 대전에서 어떻게 행동했는지, 황제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심 대인이 얼마나 잘 돌봐주는지 집에 독채를 따로 내주었다 등등을 이야기했다. 경성의 번화한 이야기에 유씨와 임새옥 모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바깥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가 차츰 잦아들 즈음, 몸이 서늘해진 유씨가 문득 몇 시진인지 묻고는 어서 가서 쉬라고 채근했다.
임새옥이 잠시 주저하다가 내실을 정리하려고 움직이는데 유씨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거처에 끼어서 무얼 하려고. 너희 거처로 가서 자거라.”
임새옥은 순간 부끄러워져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유소호가 경성에 간 이래, 날도 춥고 유씨 혼자 두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임새옥도 유씨 거처 안쪽 작은 방을 치우고 거기서 지냈었다.
유씨가 영아를 부르자 영아가 밖에서 헤실헤실 웃으며 달려 들어왔다.
“노부인, 벌써 다 치워두었어요. 화롯불도 피워두었고요.”
유씨가 웃으며 그녀를 칭찬하고는 가서 자라고 부부를 재촉했다. 임새옥은 그제야 느릿느릿 밖으로 나갔다. 유소호가 등 뒤에 있으니 어쩐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경성에 있을 때도 우리 집 채소를 먹었어. 특히 시금치는 황제 폐하께서도 드신다니까. 그런데 길이 너무 멀어서 양이 너무 적더라고. 처음에 실어 보낸 양도 많지 않으니 경성 부자들이 우리처럼 현성에 사는 사람보다 먹을 복이 없는 거지. 폐하께서 경성에도 심어 달라고 하시더라고.”
두 사람은 걸어가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유소호는 일상 이야기를 골라 이야기했고, 임새옥은 빙그레 웃으며 들었다.
“오래 비웠던 방이라 추워요.”
임새옥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영아의 말대로 방은 정리되어 있었고, 사등롱도 켜져 있었다. 바닥에 화로 세 개를 피워놓아서 방 안은 벌써 따듯했다.
“낭자만 있으면 들판에서 자도 춥지 않아.”
유소호가 돌아서서 문을 닫으며 말했다. 임새옥이 더 붉어진 얼굴로 혀를 찼다.
“집 떠나더니 다른 건 안 배우고 몹쓸 말만 배웠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유소호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더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임새옥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나른해졌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서 간신히 몸을 가눌 정도인데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 침상 위로 누운 후였다.
“저기 뜨거운 물 있어. 가서 씻어…….”
임새옥은 달달 떨릴 정도로 당황해서 유소호를 밀어내며 말했다.
“낭자, 설마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유소호가 그녀를 누른 채 웃으며 물었다. 옷 안으로 손이 배회하자 임새옥의 얼굴이 갈수록 빨갛게 달아올랐다. 유소호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버둥거리며 밀어냈지만, 유소호는 오히려 감흥이 올라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낭자, 낭자. 착하지. 난 오늘 밤밖에 있지 못해.”
그 말에 임새옥도 싱숭생숭해서 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교초(鮫綃: 전설 속의 교인鮫人, 즉 인어가 짠다는 얇고 가벼운 비단) 휘장에 등불이 아른거리고, 향기로운 원앙 이불에 봄기운이 끝도 없이 휘몰아쳤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눈을 떴을 때, 방 안에 촛불이 모두 꺼져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어슴푸레하고 실내도 어두컴컴했다. 바닥에 있는 화로엔 불씨가 조금밖에 남지 않아 조금 으스스했다.
정신을 차리고 봤더니, 자신은 한오라기도 걸치지 않고 유소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불도 반쯤 덮고 있어서 제대로 덮으려고 팔을 뻗었더니 살짝 움직이는데도 온몸이 쑤셨다. 어젯밤 당황스러운 일을 떠올리고 살짝 고개를 돌렸더니 유소호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쩐지 달콤한 느낌에 그 사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앞으로 서로 기대서 함께 나이 들어갈 사람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 움직임에 유소호가 눈을 떴다. 옆에 누운 사람의 고운 눈매, 정이 가득한 부드러운 눈빛에 마음이 달콤해지고 포근해졌다. 힘겹게 달려온 길이 보람 있었다는 생각에 그녀를 품에 꼭 안고 낭자, 하고 살며시 불렀다.
“조정 대신들은 잘해줘? 괴롭히진 않고?”
임새옥은 왕안석이 여전히 상공 자리에 있는 게 떠올랐다. 유소호의 가문이 망한 것에 어느 정도 관련된 사람을 조당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원수를 만났으니 어찌 눈에 핏발이 서지 않으랴. 일시적인 감정으로 그 외고집 상공 눈 밖에 날 일은 하지 않아야 할 텐데.
“올해 개봉부의 보리 농사가 좋지 않아서, 상경한 이래 조당에 나가진 않았어. 단독으로 폐하를 만난 다음 줄곧 외부 순시 중이라 아직 동료들을 정식으로 만나지도 못했고. 춘절이 지나면 심 대인이 인사시켜 주신다고는 했고.”
유소호가 이야기하면서 임새옥에게 다가가 얼굴을 마주 댔다. 엉큼한 손길에 임새옥은 얼굴과 귀가 붉어져서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다.
“진지한 이야기 중이잖아요!”
“낭자, 이건 인륜지사야. 이것도 진지한 일인데?”
유소호가 나지막이 웃으면서 임새옥의 얼굴이 잘 익은 게처럼 붉어지는 걸 흡족한 얼굴로 바라봤다. 그립고 그립던 신부인데, 어찌 참을 수 있을까. 돌아누워 품에 끌어안고는 냄새를 맡고 입을 맞추며 계속해서 지분거렸다.
유소호의 욕정 가득한 눈빛에 임새옥도 저도 모르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벗어날 수도 없고, 또 이번에 떠나면 적어도 다섯 달은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에 아쉬워서 눈을 감고 열렬히 회답했다.
유소호는 오후에 다급하게 길을 떠났다. 경성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고 주어진 휴가라, 길에 쓸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게다가 연일 내리는 큰 눈으로 도로가 질척거려 출발을 당길 수밖에 없었다. 갓 임관한 처지에 지각한다는 인상은 남기고 싶지 않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유소호가 다녀간 후로 유씨는 기분 좋게 새해를 맞이했다. 눈 깜짝할 사이 정월이 지나, 임새옥은 사람을 시켜 밭 열 묘의 천막에서 난 채소를 모두 수확했다. 그리고 밭을 갈고 비료를 뿌리면서 연근이 오길 기다렸다.
경칩이 지난 후, 임새옥은 마을 입구에 직접 나가서 소가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 이 관사가 방한모를 깊게 쓰고 진회색 모피 겹옷을 입고 노루 가죽 장화를 신고 나타나 예를 갖췄다.
“축하 인사드립니다.”
임새옥은 빙긋 웃으며 담담하게 답례하고 고맙다고 인사했다. 송나라의 정책은 백성들에게 너그러웠고 상업을 제한하지 않았지만, 상인은 신분이 낮았다. 이제 유소호가 관직에 있게 되었으니 아무리 가난해도 만석 부자 소가보다 귀한 신분이 된 셈이었다. 그러니 이 관사가 대례를 올린 것이 틀린 예법이 아니었다.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후, 임새옥은 사람들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후, 임새옥은 말을 부리고 온 사환의 쉴 곳을 마련해 주라고 장사에게 분부했고, 이 관사는 당연히 유씨를 뵈러 갔다.
듣기 좋은 인사를 잔뜩 들은 유씨는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유씨는 원래 상인을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며느리가 그들과 장사하는 것도, 겉으로 말하진 않아도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생활 기반이 거기에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 찾아온 관사의 말주변이 좋아서 소가에 대한 느낌이 훨씬 좋아졌다. 유씨는 영아에게 식사를 준비시키는 등 살뜰히 대접했다.
이 관사는 임새옥에게 연뿌리를 보이고, 함께 온 연근 농부 다섯 명을 소개한 후 돌아가겠다고 인사했다. 임새옥이 붙잡으니 이 관사가 웃으며 말했다.
“소인, 진정부에 가서 소 노야를 뵈어야 합니다. 급히 물건을 준비해야 하거든요.”
임새옥은 지금 시기 북방의 여러 곳이 요나라 통치하에 있어서, 조정에서 변경에서의 무역을 엄하게 조사하는 걸 알고 있었다. 소가는 남부의 거상이고 배도 여러 척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북부에 가서 어려운 장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싶었다.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하자,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아는 이 관사가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부인, 언젠가는 경성에 가시겠지요. 저희 집안이 경성에서도 크게 장사하고 있습니다. 그때 부디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 말에 임새옥도 웃어 주었다. 물론 인사치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거상 소가가 연을 맺은 뒷배는 유소호 같은 소년 농관(農官)보다 훨씬 대단하겠지만,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 관사를 직접 배웅했다. 그런 다음, 소작인 몇 사람을 불러 집을 세 내어 남쪽에서 온 연근 농부를 묵게 했다.
농부들은 가지고 온 은자를 소작인들에게 건네고 먹거리를 소작인의 처에게 부탁했다. 마치 현대에서 직무 연수에 참여하는 회사원들처럼 세밀하게 준비를 해온 농부들의 모습에, 임새옥은 역시 거상은 준비가 치밀하다며 감탄했다.
그날 이후 임새옥은 직접 사람들을 데리고 연근을 심으며 상세히 지도했다. 언제 뿌리를 심는지, 언제 비료를 뿌리는지부터 통풍은 언제 하는지에서 비료를 추가로 세 번 뿌리기까지, 내내 함께 설명해주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두어 달이 흘렀다.
마을의 나무에서 싹이 트고 가지를 길게 늘이며 온몸에 푸릇푸릇한 새 옷으로 갈아입는 입하가 찾아왔다.
임새옥은 그때 이미 연근 농사에서 손을 뗐다. 남쪽에서 온 농부들은 역시나 경험이 풍부한 고수여서, 몇 번 보고 몇 가지 물은 다음엔 곧바로 실력을 발휘했다. 강녕 사투리를 쓰는 바람에 임새옥과 소통하는 데 애를 먹어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궁금한 게 있을 때마다 구체적으로 물었다. 말로 안 통하면 붓을 들고 쓰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매일 임새옥 곁을 따르며 일일이 기록까지 했다. 그는 매우 신중한 사람이어서, 기록하기 전에 임새옥에게 허락도 받았다.
임새옥은 배우고자 하는 이런 사람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이 기술이 대단한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니 편하게 기록하라고 당연하게 허락했다.
오늘 날씨는 유난히 따듯했다. 임새옥은 밭머리에 서서 농부들이 조심스럽게 천막을 열고 환기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바람이 불자 푸른 연잎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며 흔들렸고, 그 모습을 보며 농부들도 함께 웃었다. 그들 고향의 고생을 조금이나마 해결했다는 생각을 했으리라.
임새옥이 연근밭을 따라 느릿느릿 돌아가는데 별안간 아이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들의 손에 연잎이 들려 있었다.
이 천벌 받을 녀석들! 감히 이걸 가지고 놀아?
임새옥이 서둘러 다가갔다.
“누가 따래? 이게 가지고 노는 거니?”
그녀는 나이가 제각각인 아이들 일고여덟 명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화가 나서 한 대씩 때려주고 싶었다. 그녀가 누구인지 확인한 아이들은 우르르 흩어졌고, 임새옥에게 붙들린 아이가 겁에 질려 꽥꽥 소리쳤다.
“저 아니에요! 저 아니에요! 금단이에요, 금단! 자기네 땅이라고 마음대로 따도 된다고 했어요!”
임새옥은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연근 밭을 따라 내려갔다. 역시나, 겨우 다섯 살인 금단이 논가에 엎드려서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커다란 연잎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금단 옆에 연잎이 두어 개 놓여 있고, 조그마한 연근 두 개가 내동댕이쳐진 걸 보고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로 화가 났다. 금단을 달랑 들어서 엉덩이를 힘껏 때려도, 진작 익숙해진 금단은 울지도 않고 고함만 빽빽 질렀다.
“집안 살림 거덜 내려고! 죽고 싶지 진짜?”
머리를 때리려고 손을 치켜들던 임새옥은 멈칫하고는 어깨를 찰싹 때렸다.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금단이 바닥을 굴렀다.
“조만간 내 땅이 될 거라고 어머니가 그러셨어!”
금단은 벌떡 일어나서 한마디 툭 던지고는 냅다 달아났고, 임새옥은 화가 치밀어서 치맛자락을 들고 뒤쫓아 갔다. 짧은 다리로 얼마나 재빠르게 달리는지 아차, 하는 사이 저 멀리 달아나서, 임새옥은 씩씩대며 노씨 집으로 들어갔다.
마당 바위에 옷을 말리던 노씨는 임새옥을 보고는 웃으며 다가오다가 화난 얼굴을 보고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왜 그러냐? 네 시모가 뭐라고 하든? 그래서 화가 났어? 아니면 사위가 새 여인을 들였어?”
임새옥이 더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
“우리 땅이 조만간 이 집 땅이 될 거라고 금단한테 그랬어요?”
노씨가 어색하게 웃더니 딴소리하는 걸 보고는 임새옥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옛날엔 재산 탐하면서 나를 바보한테 보내려고 하더니, 이젠 뒤에서 이런 헛소리를 해요? 어머니가 뭔데요? 황제 아비라도 돼요? 황제라고 해도 남의 재산을 탐내면 안 되죠! 어머니, 대체 왜 이렇게 어리석어요? 굶고 살아요, 벗고 살아요? 대체 왜 대낮부터 배불리 먹고 허튼소리만 하는 거예요!”
노씨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눈치를 보며 웃었다.
“사위가 경성에 높은 관리로 가지 않았니. 앞으로 얼마나 귀한 사람이 되겠어. 그러면 십방촌 몇 묘가 어디 너희 집 눈에 차겠니. 차라리 이 어미 노후 생각해서 주는 게 낫지. 그래야 나중에 네 형제도 먹고살지…….”
임새옥은 말이 끝나기 전에 혀를 차며 싸늘하게 웃었다.
“어머니, 벼슬하면 돈 번다고만 하지 말고 관직에서도 좌천될 수 있는 걸 생각해요. 그때 재산이 없으면, 어머니가 우리 일가를 먹여 살릴 거예요? 네?”
다급해진 노씨도 그동안 품은 불만을 모두 쏟아놓았다. 친척 아이 먹고살 길 하나 주지 않느니, 혼자만 잘 먹고 잘살려고 한다느니, 부모는 겨우 풀칠하는데 혼자 호의호식한다느니, 어린 아우, 허약한 여동생은 죽든지 살든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동아줄 잡고 날아간다느니, 고작 관리 부인이 되어 무슨 유세냐며, 신선이 되었대도 가난한 친척 무시하면 안 된다느니. 마당에서 울고 불며 난리를 부리는 모습에 임새옥이 오히려 당황해서 달아났다.
딸이 겁먹고 물러서자, 노씨는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곧바로 일어나서 옷을 털고는 뒤쫓았다. 기세등등하게 유가까지 쫓아갔더니, 더 운 좋게도 임새옥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유씨와 영아 둘이서 유소호가 연말에 가지고 온 옷감을 널어 말리며 여름옷을 몇 벌 지어야 할지 상의하는 걸 본 노씨는 속으로 염불을 외웠다.
하늘도 내가 얼마나 서러운지 아는 게로구나!
옷감을 보고 넋이 나간 그녀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입은 조악한 천보다 얼마나 좋은 천이냐!
노씨는 유씨가 맞이하기도 전에 다리를 내리치며 털썩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유씨가 허둥지둥 잡아 일으키며 무슨 일인지 물었다. 노씨는 한참 울다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유씨가 차 내 오라고 하자, 영아는 입을 댓 발이나 내밀고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느직느직 나갔다.
“저년 같은 딸을 사돈댁에 보내다니, 이 댁에 화근을 보탰네요. 애가 아둔해도 힘은 세다고 자랑했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아이였어요.”
노씨가 제 다리를 내리치며 엉엉 울면서 아까 있던 일을 제 잘못은 죄다 골라 빼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안사돈, 난 그냥, 안사돈네가 나중에 경성에 가면 누군가 땅을 관리해야 하잖아요. 안사돈이 여기 없는데, 수확한 물건이 좋은지 나쁜지, 다 자기 마음대로 이야기하면 그만 아닙니까? 안사돈처럼 보살 같은 사람이 교활한 촌사람을 어찌 알겠어요. 애 시아버지도 없어서 든든한 사람도 없고 안사돈 혼자 이 집을 지탱하면서 얼마나 힘들어요. 내가 다 마음이 아파요. 어린 애 둘이 젊어서 철이 없을까 봐, 사람 손에 놀아나고 속을까 봐, 다 그래서 그런 거지, 어디 이 댁 재산이 탐이 나서 그랬겠어요?”
노씨는 서러운 듯 펑펑 울어댔다. 유씨는 아픈 곳을 찌르는 그 말에 역시 안사돈이 제 마음을 안다며 눈물을 흘렸다.
유소호가 자기를 속이고 강남에 갔던 일을 떠올리고는 아이들은 결국 부모와 거리가 있다며,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며, 임새옥을 나무라고는 반드시 잘못했다고 말하러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유씨를 설득한 노씨는 울음을 멈추고, 언제 출발하느냐,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느냐 같은 쓸데없는 소리를 물었다. 유씨가 하나하나 대답해주자 있는 말 없는 말 하며 시간을 끌었다. 세 번째 찻주전자를 채우게 되자, 영아가 참지 못하고 주전자를 쿵 하고 노씨 앞에 내려놓았다. 노씨가 눈을 부릅뜨고는 말을 이었다.
“경성에 가면 웬만해서는 돌아오기도 힘들잖아요. 집에 사람이 안 살면 낡아요. 저아 애비 말이, 걱정하지 말랍니다. 우리가 들어와서 잘 관리할게요.”
그 말에 유씨가 어리둥절해하자, 영아가 곁에서 한마디 했다.
“그럼, 그 집은 버려도 괜찮고요?”
노씨는 영아를 흘겨보고는 웃는 얼굴로 유씨를 바라봤다.
“우리 집이야 사람이 살든 말든 어차피 다 무너져 가고요. 이 집은 새로 지은 집인데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러고는 연말에 온 눈으로 방 하나가 무너져서 지금 네 사람이 한 방에 끼어서 자니 운운하는 말에 유씨는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노씨는 입이 찢어지게 웃으면서 더는 헛소리 하지 않고 곧바로 일어섰다.
마당에 나갔을 때 취람색 운단을 보고는 또 입을 열었다.
“안사돈, 사위가 가지고 온 옷감이지요? 아이들 새 옷 몇 개 짓게 나도 좀 가져갑시다.”
유씨가 거절할 수도 없어서 잘라주라고 영아에게 말했지만, 영아가 입술을 내민 채 움직이지 않자 노씨가 알아서 절반을 잘라서 싱글벙글 돌아갔다. 마침 들어오던 임새옥과 부딪치고는 고개를 팩 돌리고 아는 척도 하지 않고 흥흥대며 걸음을 서둘렀다.
“우리 어머니 왜 온 거예요?”
물어보던 임새옥은 잘려나간 옷감을 발견했다.
“다 해서 한 필만 보내 준 것을. 이랑이 봉록을 얼마나 써서 산 건지도 모르는데 왜 그냥 주셨어요? 촌사람은 매일 진흙에서 구르는데, 저런 좋은 옷감이 뭐가 필요하다고.”
“옷감뿐이게요. 집도 가지고 갔어요.”
영아가 툭 하는 말에 유씨가 노려보았다.
“저런 말 많은 아이 같으니. 입 다물고 있으면 말 못 하는 줄 알까 봐 나불대는 것이냐.”
임새옥은 펄쩍 뛰었다. 아까 노씨 집에서 나온 다음에, 노씨가 백방으로 땅을 노리고 있으니 유씨와 경성으로 간 다음에 누구에게 땅 관리를 맡길까 생각하며 인선을 골랐었다. 그중에 조육아라는 중년 사내가 성실한 데다가 담도 커서 믿고 맡길 수 있겠다 싶어 그의 집에 갔다 온 터였다. 조육아 일가가 원보라도 주운 듯이 좋아하는 걸 보고 돌아오느라 지체한 사이에 노씨가 이렇게 큰 이득을 보았다니, 참지 못하고 몇 마디 투덜거렸다.
“어찌 됐든 네 어머니 아니냐. 남도 아닌데 옷감 좀 준 게 어때서. 너는 이리 번듯하게 차려입고서, 식구들이 허름하게 입은 걸 보면 마음이 편하겠니? 이 집도 그렇다. 우리가 살 것도 아닌데 주면 어때서. 네 부모가 움집에 사는 걸 볼 만큼 냉혹한 게냐?”
유씨도 언짢아져서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잘못했다. 내 탓이야. 네가 번 돈이니 네가 알아서 했어야지, 안 그러냐? 네 옷과 집을 남에게 주는 게 아니었구나, 그렇지?”
임새옥은 그런 뜻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장소에 맞게 옷을 입어야지, 좋은 옷감을 주느니 차라리 무명천을 많이 주는 게 낫다고 말해도 유씨가 들은 체하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웃으며 잘못했다고 하고서야 겨우 마무리되었다.
임새옥은 나중에 함부로 땅이며 집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그저 잠시 여기에 살게 해주는 것뿐이라고 노씨를 단속했다. 이미 원하는 걸 이룬 노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으로 이제 멀리 가버리면 내가 뭘 하든 상관할 수 있겠냐고 생각하며 겉으로는 고분고분 알았다고 하며 더는 잔소리 하지 말라고 임새옥을 달랬다.
눈 깜짝할 사이 수확 철이 되었다. 연근 농부들이 열심히 배우는 모습에 임새옥은 연근 밭의 운용 방법도 알려주었다. 언제 벼를 심을 건지, 언제 채소를 심는지 알려주자, 농부들은 기뻐서 입이 찢어졌다. 반대로 마을 소작농들은 언짢아했다. 연근과 벼가 비싸게 팔리는 이유가 바로 유일무이한 기술 덕분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배워 가고, 임새옥이 십방촌을 떠나버리면 자기들 형편이 기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밭 열 묘에서 나온 연근은 수레 세 대를 꽉 채웠고, 이 관사는 무사로 이뤄진 표국(縹局: 운송 담당 보안업체)까지 고용했다. 가는 길에 빼앗길까 봐 그런다는 말에 임새옥은 그저 웃기만 했다.
물건과 돈을 교환하고, 서로 감사 인사를 나눈 다음 이 관사는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갔다.
다들 돌아간 후, 임새옥은 울상이 된 소작농들을 불러 모아 엄선한 볍씨를 건네주었다.
“우리는 연근 재배를 주력으로 하지 않을 겁니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높은 가격으로 팔지도 못하니, 일부는 벼를 심고, 일부는 보리를 심고, 나머지는 채소를 심을 겁니다.”
그녀는 볍씨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다들 잘 기억하세요. 벼가 무르익으면 길고 통통한 것을 골라 그 다음해의 볍씨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벼가 점점 더 좋아집니다.”
그녀의 말에 모두 그제야 안도했다.
“경성에 가도 자주 오십니까? 우리 십방촌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농사를 잘 지은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가버리면, 이 땅이 우리 말을 잘 들을까요?”
나이 든 사람들이 꽤 규모가 있는, 가지런히 정리가 된 땅을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물었다. 땅을 바라보는 임새옥의 시선이 흔들렸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가능하면 평생 이곳에 있고 싶었다. 부귀도 바라지 않고, 그저 배만 채울 수 있으면 되니까. 심고 싶은 걸 즐겁게 심을 수만 있어도 충분하니까.
하지만 운명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이 익숙한 십방촌을 떠나, 장차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그녀도 알지 못한다. 임새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6월 초하루, 더워지기 시작한 그 날, 장사가 하늘이 어슴푸레한 시간에 작은 나귀차를 몰고 십방촌을 나섰다. 하늘이 완전히 밝아졌을 때는 벌써 성안현 성문 앞에 도착했다.
나귀차에서 내린 임새옥은 간식 파는 점포를 찾아 먹을 것을 샀다. 유씨가 나귀차에서 얼굴을 내밀고 양산을 사라고 당부하면서 머리 위로 벌겋게 달아오른 붉은 해를 가리켰다.
“금속도 녹일 정도로 무더운 시기다. 가릴 게 없으면 오후엔 더워서 못 움직인다.”
“그럼 어머니, 날이 좀 선선해지면 가요.”
그 말에 유씨가 나귀차 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가기 싫어서 이러지. 내 진작 알고 있었다. 연근 수확은 진작 마쳤는데 지금까지 미루더니. 오늘은 내일, 내일은 또 모레. 네 지아비를 만나러 가라는 건데, 목 베라고 등 떠밀린 것처럼 구는구나. 고작 땅 아니냐. 어째서 심장을 내어준 것처럼 그리 굴어.
우리 이랑이 네 눈엔 땅 몇 묘보다 못한 것이냐? 무더위는 둘째치고, 하늘에서 칼이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오늘 가야겠다. 네가 원치 않는대도, 가서 이랑에게 말하고 돌아가라. 그러고도 네가 가겠다면 그때는 절대로 막지 않으마. 지금 너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우리 이랑이 출세했다고 조강지처를 버렸다고 괜히 욕을 먹지 않느냐!”
욕을 먹은 임새옥은 낙담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고는 서둘러 양산 가게를 찾으러 갔다. 살 것을 다 사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여인 목소리가 들렸다.
“화아, 화저아!”
지금 그녀를 아는 사람은 모두 조 대저, 혹은 조 낭자라고 불렀다. 하물며 노씨조차도 그 이름은 이제 부르지 않는다. 게다가 임새옥은 어려서부터 조화라는 이름을 인정하지 않은 탓인지, 자기를 부르는 줄 전혀 모르고 상대도 하지 않고 곧장 차에 올라탔다.
별안간 달려온 마차에 나귀가 하마터면 날뛸 뻔했다. 안 그래도 속이 부글부글하던 임새옥은 소매를 걷어붙이고 말을 노려봤다. 대체 누가 이리 우악스러운 건지 봐야겠다 싶었는데, 은빛 줄무늬 옷을 입은 여인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여인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웃는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
“화저아, 나 몰라보겠어?”
임새옥은 눈을 크게 뜨고 보고서야 그 사람이 소가에서 노비 생활할 때 알던 사람, 시녀 청아임을 알아보았다.
임새옥은 이 뜻밖의 만남에 얼떨떨해졌다. 2년 만에 만난 여인은 양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에 비취옥 귀걸이를 달고 흰 비단 홑옷, 살굿빛 치마를 입었으며 하얀 분을 바른 얼굴에는 뺨을 불그스레 칠해서 곱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임새옥 옆에 서 있으니 오히려 주인 같아 보이는 모습에 바로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로 몰라보는 건가?”
청아가 헤실헤실 웃더니 허리를 굽혀 예를 갖췄다.
“부인, 건망증이 심하시네요. 노비 청아, 인사 여쭤요. 축하드려요, 부인.”
임새옥이 황급히 그녀를 잡아당기며 민망해하며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유씨가 기다리다 지친 듯 눈을 부릅뜨자 재빨리 덧붙였다.
“아쉽게도 급히 가던 중이라서, 제대로 인사하기 힘들겠네.”
남 눈치 보는 데 능한 청아는 성큼성큼 다가가 유씨에게 예를 행하고는 자기소개부터 하면서 입을 열었다.
“화저아가 정말로 많이 변했네요. 예전과 비교할 수가 없을 만큼요. 분명 노부인께서 잘 가르친 덕분이겠지요. 멀리서 보고 어느 댁 금지옥엽 규수인가 했네요. 누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정말 모를 뻔했답니다. 이제 저만 눌어붙은 못난이 만두 같은 꼴이네요.”
그 말에 임새옥은 헛웃음이 나왔다.
네가 눌어붙은 만두라면 나는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게? 역시 대가족에서 굴러먹은 사람 아니랄까 봐, 양심에 거리끼는 말을 참으로 거침없이 한다 싶었다.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울 재주였다.
유씨는 추켜세우는 말인 줄 뻔히 알면서도 좋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녀가 임새옥을 힐끔 보며 말했다.
“이 아이, 말주변이 좋구나.”
강녕으로 돌아가는 거냐, 이 더운 날에 무슨 일로 이곳엔 왔느냐, 하면서 공교롭게 경성에 올라가게 되어 아쉽다, 아니면 집으로 초대했을 텐데 운운하는 말에 청아가 샐샐 웃으며 뒤에 있는 마차를 가리켰다.
“제가 참 복 받았네요. 노부인와 함께 할 수 있다니 말이에요. 우리도 마침 경성으로 간답니다.”
임새옥이 의아해져서 물었다.
“경성으로 가는데 여긴 왜 지나가?”
임새옥은 이제 처음에 와서 동서남북도 분간 못 하는 어린애가 아니었다. 유소호가 강남에 갔었던 일을 자세히 묘사하는 걸 들으며 머릿속으로 간단하게 지도를 그렸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 강녕부라는 곳이 남경이라는 걸 알아냈다. 그녀가 있는 성안현은 바로 하북 한단현 경계라는 것도. 그러니 강녕에서 경성으로 가는데 한단으로 온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청아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우린 진정부에서 오는 거야. 저기 봐, 노야도 오셨어.”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봤더니, 검은색 장포를 입은 소금남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마차 한 대와 사환 네댓 명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소금남은 우선 임새옥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유씨를 향해 예를 갖췄다.
“노부인, 주 대인께 말씀 들었습니다. 경성으로 가신다고요. 마침 저도 가는 길이라 방향이 같습니다.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지난번에 소금남이 현령 대인 앞에서 편을 들어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래, 유씨는 이 사내에게 호감이 생겼다. 온유하고 예의 바르고, 돈 냄새만 폴폴 나는 거들먹거리는 상인과 다르게 보였다.
처음에 만났을 때는 돈도 있고 고상한 이 사내 앞에서 다소 열등감이 있었다면, 지금은 오히려 조금 더 콧대가 높아진 편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지금 황제의 명을 받은 6품 관리다. 이렇게 눈치 빠르게 찾아와 경성까지 동행하자고 청하는 이유가 잘 보이려는 의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고급 옷감, 고급 신발, 과일이나 보낼 줄 아는 사람들보다 훨씬 고명한 행동이었다. 아부로 느껴지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베푸는 호의, 역시 큰물에서 노는 강남 거상다웠다.
“그럼 수고 끼치겠습니다, 소 관인.”
유씨가 웃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변경(汴京: 중국 구도舊都. 개봉의 옛이름)은 그리 멀지 않지만, 어찌 됐든 나이 들고 약한 여인들만 가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아들의 청렴한 명성을 지키기 위해 호송할 병사를 구할 수도 없어서 안 그래도 걱정 중이었는데, 너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소금남은 가당치 않다고 대답하며 예를 갖추고는 한쪽에 서 있는 임새옥에게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작년에 만났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차림이었다.
“부인, 경하드립니다.”
임새옥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답례했다.
“수고스럽지만 가는 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대관인.”
“벌써 시간이 이리 됐네요. 어서 떠나요.”
청아가 웃으며 하는 말에 유씨는 서두르라고 마부에게 지시했다. 소금남 일행은 마차 두 대, 말 다섯 마리, 사환 넷, 마부 둘이었다. 소가의 마차가 유가의 나귀차보다 훨씬 호화로웠고, 소금남은 자연히 유씨와 임새옥에게 마차에 오르라고 권했다. 사양하던 유씨는 결국 이기지 못하고 뜻을 따르기로 하고 영아의 부축을 받으며 청아 곁에 서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임새옥이 재차 감사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청아가 잡아당겼다.
“부인, 전가아 기억하시죠? 전에 부인이 돌보셨잖아요. 전가아가 부인을 알아보는지 한 번 가보시겠어요?”
“전가아도 왔어?”
임새옥은 깜짝 놀라서 저 뒤에 보이는 마차를 돌아보다가 유씨를 힐끔 봤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유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보렴.”
허락을 받은 임새옥은 급히 뛰어내려 몇 걸음 만에 마차 앞에 가서 섰다. 마차 휘장을 연 채 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금남은 임새옥이 온 의도를 눈치채고는 전가아를 안고 나오라고 지시했다. 여인이 즉시 몸을 돌려 마차에서 어린아이를 안고 나왔다. 소금남은 녹색 운단 겉옷을 입고, 백릉 말자 위에 푸른색 비단 납검아(衲臉兒: 신발코를 실로 누벼 꿰맨 신)를 신은 아기를 받아안아 임새옥을 향해 돌아섰다.
임새옥은 아이를 보자마자 이씨를 떠올리고 한여름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부르르 떨었다. 아이가 어느덧 세 살이라, 2년 전보다 살이 빠져 있었다. 아기가 웃지도 않고 얼굴을 찌푸린 채 소금남을 노려보자, 소금남이 아이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전가아, 여길 보렴. 이게 누구…….”
소금남이 막 입을 열자마자, 전가아가 손을 들더니 소금남의 얼굴을 할퀴고 침을 뱉었다. 무표정하던 소금남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분위기가 안 좋은 걸 본 청아가 후다닥 달려가 아이를 받아안고는 웃는 얼굴로 어르기 시작했다.
“착하지, 착하지요. 인형 호루라기 사드릴까요?”
아이는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대답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임새옥은 공연히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가 없는 걸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청아가 임새옥을 향해 전가아를 들어 올렸다.
“봐봐요. 알아보겠어요? 어릴 때 자주 안아줬는데.”
이렇게 어린아이가 기억할 리가 있나. 사흘만 못 봐도 낯설어질 텐데, 하물며 2년이다. 기억하는 게 이상하지.
청아의 목소리를 따라 임새옥을 쳐다본 전가아는 작은 입술을 비죽 내밀더니 또 침을 뱉었다. 소금남이 덥석 잡아서 찰싹 때리자, 전가아가 목소리를 높이며 울어댔다. 청아가 재빨리 몸을 틀어 소금남을 막고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야, 때리지 마세요. 청아가 잘못한 거니 청아를 때리세요.”
떠들썩한 소리에 사람들이 그쪽을 바라봤고, 앞쪽 마차에 탄 유씨와 영아도 고개를 내밀고 뒤를 바라봤다.
“괜찮아요. 괜찮아.”
임새옥은 아이가 이렇게 건방지고 괴팍하게 자란 것이 모친이 세상을 일찍 떠난 까닭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파왔다. 그녀는 전가아를 향해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전가아, 화저아가 안아도 될까?”
청아는 우는 전가아를 달래며 난처한 듯 임새옥을 바라봤다.
“전가아가 낯을 가려서요. 부인, 괘념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새옥을 노려보던 전가아가 잠시 보다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전가아의 예상 밖의 행동에, 채 끝나지 않은 청아의 말이 그대로 목에 걸렸다.
“우리 전가아, 착하지.”
임새옥이 생긋 웃으며 전가아를 받아안고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청아가 화들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데, 전가아가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청아와 소금남 모두 얼이 빠졌다.
임새옥도 웃으며 전가아의 이마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참 용감하네.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않잖아.”
“돌아, 돌아!”
전가아가 활기찬 모습으로 작은 두 손을 짝짝 치며 소리쳤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세상에. 전가아가 웃었다! 말을 했어!”
마차 안에 있던 여인이 다리를 철썩 치며 놀란 듯이 하는 말에 이번엔 임새옥이 어리둥절해졌다. 그제야 소금남과 청아의 놀란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물었다.
“왜요? 전가아가 말을 못 했나요?”
청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저하다가 입을 열려는데, 소금남이 가볍게 헛기침하자 바로 입을 다물었다.
“늦었다. 출발하자.”
소금남은 그 말을 남기고 혼자 마차 앞으로 가서 말에 올라탔다. 청아가 전가아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마차 타러 가요, 전가아. 마차 타고 외숙 만나러 가요.”
그 말에 전가아가 다시 얼굴을 구겼다. 아이가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청아 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임새옥은 마음이 불편해져서 다시 아이를 끌어당겼다.
“낯 안 가리니까, 그냥 내가 데리고 탈게.”
청아의 얼굴이 확 굳었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옷 더러워질까 걱정이에요. 아직 오줌을 못 가려요.”
“이렇게 컸는데 혼자 오줌을 못 눈다고?”
임새옥이 더 놀라서 하는 말에 청아가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외가 노부인이 1년 데리고 있더니 이렇게 되었어요. 걷는 것도 싫어하고, 항상 안기려고 하고.”
임새옥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전가아를 바라봤다. 아이는 눈은 큰데 생기가 없었고, 얼굴도 보들보들한데 혈색이 안 좋았으며, 어린 나이에도 미간에 주름이 잡힌 걸 보고 순간 마음이 서늘해져서 저도 모르게 ‘어쩐지, 어쩐지!’ 하고 중얼거렸다.
“어쩐지, 라니. 뭐가요?”
청아가 물었지만 임새옥은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이씨가 꿈에 보이더라니.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구나.’ 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자기는 소가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데 왜 자기 꿈에 나타난 건지 궁금해졌다.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걸 알아서? 설사 만난다고 해도 내가 뭘 도울 수 있어서? 전가아를 내가 데리고 와서 키울 수는 없잖아.
전가아에게 부친, 할머니, 외할머니를 비롯한 가족, 친지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설사 없다고 해도 완전한 남인 그녀가 돌볼 이유는 없었다.
청아의 꿈에도 갔었냐고 한번 물어보고 싶어도 당황스러운 질문이라 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쓴웃음 짓는데 청아가 앞으로 밀었다.
“어서 가세요. 노야는 벌써 가셨어요.”
임새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전가아를 안아 올리며 웃어 보였다.
“전가아, 마차 타러 가자! 오리 만들어줄게. 좋아?”
오리가 있다는 말에 더 관심이 생긴 전가아는 유씨가 탄 마차를 향해 몸을 기울이면서까지 손을 뻗었다. 임새옥이 깔깔 웃으며 아이를 안고 그쪽으로 갔다. 청아도 유모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그 마차에 끼어서 탔다.
노인과 아이가 탄 마차라 마부는 말을 천천히 몰았다. 길에서의 모든 일은 소금남이 안배해 두어서 임새옥은 편안한 마음으로 전가아를 안고 손가락 체조를 가르치는데, 딱 봐도 서툴러서 영아가 까르륵 웃었다. 화가 난 전가아가 영아에게 침을 뱉었다.
청아는 마차 안에서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했다. 휘장을 젖히고 소금남에게 더운지 묻고는 또 금세 목마르지 않은지 물었다. 툭하면 내려서 소금남에게 물을 전해주거나 부채질해 주기 바쁜 청아를, 임새옥은 빙긋 웃으며 바라봤다.
청아의 몸치장을 보면 시첩이 된 것 같은데, 머리 모양은 또 아니었다. 임새옥은 예전에 청아에게 골탕 먹었던 걸 아직 기억했다. 말주변이든 속셈이든, 자기는 열 명 있어도 청아 하나를 못 이긴다는 것 또한 잘 알았다. 아직 조금은 두려움이 남은 그녀는 말을 조금이라도 잘못해서 성질을 건드릴까 싶어서 한번 물어볼까 하는 마음을 싹 접었다.
어린 애를 좋아하는 유씨도 처음에는 전가아를 데리고 놀려고 했다. 하지만 워낙 변덕스러운 전가아가 연달아 침을 내뱉었다. 영아야 상대가 뉘 댁 소야인지 아랑곳할 사람이 아닌지라, 아이의 이마를 쿡쿡 찌르며 훈계하기 시작했다. 소금남을 제외하고 이 아이를 이런 식으로 훈계하며 혼낸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전가아는 일단 눈을 부릅뜨고 영아를 보다가 곧이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청아가 영아를 마차 벽 쪽으로 누르며 전가아를 잡아끌었다.
“때려요. 때려. 울지 마요, 뚝.”
유씨도 영아를 슬쩍 꼬집으며 어서 소야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치고는 아이더러 몇 대 때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아도 고집스러운 사람이라, 청아에게 잡혀 있으니 짜증이 나서 단번에 밀어젖혔다.
“아이를 이렇게 오냐오냐 키우면 어떡해요. 잘못했으면 혼내야죠!”
청아가 얼굴을 구기며 전가아를 품에 안고는 화난 얼굴로 영아를 노려봤다.
“우리 집 종이 아니라서 내가 뭐라고 할 순 없지만, 너 같은 애가 노부인과 화저아 곁에 있다니, 언젠간 가문의 평판을 더럽히겠구나.”
임새옥과 유씨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가아를 달래고는 영아를 향해 한소리했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 녀석, 집에서 나쁜 버릇이 들었구나.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니 행동이 말이 아니네. 네가 옳은 말 했다.”
두 사람 모두 그렇게 말하자, 영아가 곧바로 매섭게 대꾸했다.
“내가 시녀인 게 뭐? 너는 시녀 아니니? 제가 주인인 줄 아나! 우리 부인의 이름을 네가 함부로 불러도 돼?”
마차 안에 있는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청아는 처음 겪는 수모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운 버들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마차 안의 이상한 기척에 소금남이 말을 달려 다가와 휘장을 젖히며 물었다. 청아는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서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그야말로 ‘입을 열지 않아도 마음이 처량하고 비참합니다, 지나가는 군자여, 내 말 좀 들어보세요.’가 따로 없는 얼굴이었다.
소금남이 휘장을 젖히는 순간, 전가아는 더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아이를 바라보는 틈에 몰래 소금남을 힐끔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청아가 주인에게 서러움을 드러내느라 다른 걸 돌볼 겨를이 없는 틈을 타서, 전가아를 곁으로 안아와서 귓가에 속삭였다.
“전가아, 자꾸 우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 아버지가 안아주길 바라면 이야기해. 울수록 싫어하셔. 한번 해볼래?”
전가아가 멈칫하고는 울음을 그쳤다. 반신반의하며 임새옥을 보는데, 그때 청아가 서러운 듯 말을 꺼냈다.
“제가 아둔해서 노부인의 심기를 건드렸네요.”
그녀는 소금남이 전가아를 탓할까 봐 두려운 것처럼 전가아를 품에 안으려고 손을 뻗다가 아이가 곁에 없는 걸 알고 순간 당황했다.
영아가 콧잔등을 찌푸리면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씨에게 머리를 맞고 아야, 하고 소리쳤다.
“저아, 그런 말 말아라. 아이 아니냐. 아이는 더 많이 까불고 투닥투닥해야 튼튼하게 큰다. 특히 사내아이는 여자아이처럼 키우면 안 되지.”
유씨가 넋이 나가 보이는 청아를 티 나지 않게 슬쩍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노인네가!
청아가 보이지 않게 손을 움켜쥐었다.
인제 보니 며느리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가 보네? 이렇게 감싸고, 시녀까지 감싸다니!
청아는 코를 훌쩍이고는 감격한 얼굴로 유씨를 바라봤다.
“옳은 말씀이세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정말 몰라요.”
“견자(犬子: 우식愚息)가 고집 세고 짓궂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노부인.”
소금남이 바로 한마디 하고는 임새옥 품에 움츠리고 있는 전가아를 굳은 얼굴로 바라봤다. 혼내기도 전에 아이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팔을 벌리며 쭈뼛쭈뼛 말했다.
“아버지, 안아줘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얼마만이더라?
소금남의 심장이 갑자기 누군가에게 얻어맞기라도 한 듯 조여왔다. 아이의 두렵고 불안한 표정에 더는 견디지 못하고 팔을 내밀어 안아주니, 아이가 안도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평소엔 안기만 해도 굳던 몸에 힘이 빠지고 잠사(蠶絲) 이불을 안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기묘한 느낌에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못난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고는 실례라는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전가아를 안은 채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갑자기 소금남이 가버리고, 청아는 어색하게 손을 뻗은 채로 혼자 남겨졌다. 임새옥이 전가아에게 귓속말하는 걸 듣지 못해서 지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전가아가 오늘 무슨 일이지? 전에는 대관인을 만나면 원수라도 만난 듯이 건들지도 못하게 했었는데? 이 아이를 만나고부터…….
청아는 저도 모르게 임새옥을 바라봤다.
이 아이만 만나면 사사건건 일이 잘 안 풀려!
소금남이 재빨리 피하긴 했지만, 임새옥은 그의 표정이 바뀌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의 표정에 그녀도 한참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요즘 소가와 왕래하면서 소금남이 근래 2년 동안 집에 거의 없었던 걸 알게 되었다. 십방촌에 한 번 왔었고, 전남(滇南: 현 운남)에도 한 번 갔다는 듯했다. 그리고 최근에 진정부에서 왔다고 하니, 불쌍한 아이는 모친이 없을 뿐 아니라 부친도 없는 셈이었다. 세 살이면 철이 들기 시작할 때인데, 그 영향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저도 모르게 눈가가 젖어 소매로 훔치려는데 청아의 시선이 닿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활짝 웃는 청아의 얼굴에 원망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조금 전 표정은 그녀의 착각이라는 듯이.
청아는 눈가를 닦고는 공경심이 가득한 얼굴로 유씨를 바라봤다.
“화저아가 정말 복 받았네요. 노부인 밑에서 지낼 수 있으니 말이에요. 갈수록 출중해지고요. 예전에 우리 부인 곁에 있을 때도, 화저아가 저보다 신중하다고 자주 말씀하셨어요. 받아들이지 못했었는데, 인제 보니 정말 그러네요. 2년이나 지났는데, 절 보세요, 전 아직 이렇게 일일이 호들갑 떨고, 노야를 잘 돌보지도 못하고. 우리 노야에게 연분이 없으니 참으로 안타깝네요. 그때 우리 부인께서 화저아를 붙잡지 못해서…….”
청아가 말을 하다 말고 화들짝 입을 가리고는 당황한 듯 유씨를 힐끔 봤다. 그러더니 마차더러 멈추라고 고함치고는 ‘소야 시중을 보러 가겠다.’는 한마디만 남기고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렸다.
임새옥은 그녀의 마지막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쟤 좀 봐!
스무 살도 안 된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옹졸할까. 처음 만났을 때보다 갈수록 무서워지네. 전가아가 나를 조금 친근하게 대했다고, 남 시어머니 앞에서 저런 말을 해야겠어? 자기 며느리가 하마터면 다른 사람의 첩이 될 뻔했다는데, 어느 시어머니가 그 ‘다른 사람’이 다시 며느리 앞에 나타나는 걸 두고 볼까. 없을걸?
유씨를 바라봤더니 유씨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데, 영아가 한쪽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는 거야. 이상한 소리를 하네. 왜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 노부인을 칭찬하는 거예요, 부인을 칭찬하는 거예요?”
임새옥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유씨도 웃었다.
“어머니, 저런 며느리 바라셨죠?”
임새옥이 유씨의 팔을 잡으며 빙긋 웃었다. 유씨도 싱긋 웃고는 며느리의 이마를 콕콕 찔렀다.
“우리 며느리, 남이 이렇게 질투하다니, 재주가 좋구나! 어디가 변했다는 거냐? 나는 영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 앞길을 막았나 보지?”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유씨의 눈빛에 임새옥은 내심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서 유씨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제가 그럴 사람이면 매일 어머니께 혼나겠어요?”
유씨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랑이, 네 모친 눈에 차지 않는데 어쩔 수 없이 고른 사람이었구나. 그러면서 무슨 문곡성이 강림한 걸 진작 알아봤다고 날 어른 것이냐!”
임새옥이 깔깔 웃으며 유씨에게 몸을 기댔다.
“어머니가 우리 어머니와 혼인한 것도 아니잖아요. 제 마음속엔 이랑이 최고면 된 거 아니에요?”
유씨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앞으로 이런 부덕(婦德)에 어긋나는 말은 다시는 하면 안 된다고 하며 그녀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러니 영아는 갈수록 어리둥절해져서 손가락을 깨물며 물었다.
“소관인 이야기는 또 왜 나와요? 저 애가 아까 소관인 이야기했나요?”
유씨와 임새옥이 더 크게 웃으면서, 유씨가 영아 이마를 콕콕 찌르며 ‘아둔하긴!’이라고 했다. 마차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 하자, 밖에 있는 마부의 입꼬리도 슬쩍 올라갔다. 6월 날씨도 조금 선선해진 듯 느껴졌다.
이번 일로, 아무래도 양쪽 모두 바보가 아니니 분위기가 처음처럼 화기애애하진 못했다. 청아가 몇 번 다시 건너오긴 했는데, 유씨와 임새옥 모두 묘한 얼굴로 바라보는 데다가 영아 그 계집애가 집에서 기르는 개 대하듯 보는 바람에 더는 얼쩡거릴 마음이 없어졌다.
대신 소금남과 전가아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어 매일 안겨 다녔다. 그 바람에 편하게 소금남 시중을 들게 된 청아는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부자 두 사람에게 물을 건네고 부채질을 해주었다. 덕분에 양측 모두 평온을 되찾았고, 며칠 분주히 움직인 끝에 드디어 개봉성의 거대한 성문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중국 역대 도성 중에 임새옥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물론 서안이었다. 대학 다닐 때 교수와 함께 과제 하는 기회에 여러 지방을 다닌 적이 있는데, 서안이 가장 좋았었다. 콕 집어 말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호방한 제왕의 기운이 느껴진달까. 서안과 비교하면 개봉성은 시골 여인처럼 어쩐지 조금은 촌스러웠다. 개봉성 하면 떠오르는 건, <포청천>의 전조(展昭: 포청천의 호위무사), 그리고 저잣거리 냄새가 물씬 풍기는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 정도?
(※청명상하도: 북송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풍속화. 청명절에 흥청거리는 개봉성의 인파를 긴 족자에 그린 것. 원근법을 이용하여 사진처럼 정확한 풍격을 재현해낸 것이 특징. 후세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원, 명, 청을 거쳐 수많은 모본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이건 정말 임새옥의 개인적인 편견이었다. 개봉성은 지리 조건이 서안에 훨씬 못 미치고, 병가(兵家: 고대 중국의 제자백가 중 일파로 춘추전국시대와 한대에 많이 출현한 병법가, 병학자)들이 보기에는 난수이공(難守易功: 지키기 어렵고 공격하기 쉬운 곳)한 곳이라 절대로 도성으로 삼을 첫 번째 후보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편리한 운하가 있어서 거대한 생명력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송나라 초기에 발생한 여러 차례 전란으로 피폐했던 개봉성이 불과 몇십 년 만에 번성하여 당나라 전성기의 장안에 뒤지지 않게 번화하게 된 것이다.
지금 임새옥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청명상하도>보다 더 번화하고 정교한 거리였다. 유씨가 붙잡지 않았다면 머리를 창밖으로 전부 내밀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골에서 상경한 영아와 함께, 꽥꽥 고함만 치지 않았다 뿐이지, 이걸 보고 까르르, 저걸 보고 놀라는 바람에, 뒤쪽 마차에 탄 청아가 더 점잖고 고귀해 보일 지경이었다.
“오늘 우리가 오는 걸 이랑이 알고 있니?”
온갖 번화한 곳은 다 구경했던 유씨가 신경 쓰는 건 오로지 아들뿐이라서, 풍경 보느라 정신없는 임새옥을 붙들고 내내 물어댔다.
“어머니, 여정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정확히 계산하겠어요. 그래도 요 며칠 도착하는 건 알고 있을 거예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매일 휴가 내고 성문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임새옥이 웃으며 대답하다가, 마침 잡기를 부리는 사람을 발견한 영아가 불러대자 나란히 고개를 내밀고 구경했다.
임새옥이 고향을 그리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유씨도 마음을 놓았다.
“오기 전엔 그렇게 내키지 않아 하더니, 이제는 좋으냐? 인제 여길 떠나기 싫어졌지? 좋은 게 천지란다. 살아 보면 알 것이다.”
그 말에 임새옥이 멈칫하다가 중얼거렸다.
“경치가 아무리 좋아도 우리 집이 아닌걸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인지 유씨는 못 들었지만, 마침 다가가던 소금남 귀엔 들렸다. 그는 멈칫하고는 임새옥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속으로 그 말을 몇 번 되뇌어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향수에 빠진 이 여인은 알까. 은애하는 사람이 사라지면, 어디든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마차는 어느새 가장 번화한 거리에 이르렀다. 소금남은 유씨에게 예를 갖춘 후, 등 뒤로 보이는 커다란 점포를 가리키며 그곳이 자기 점포라고 했다. 좋은 옷감과 장신구를 파는 곳이니 시간 나면 한번 들르라고 말하고는 세 사람을 심괄 대인의 저택으로 모시고 가라고 마부에게 당부했다. 상인 신분이라 직접 모시고 가지 못해 죄송하다 운운하는 말에 유씨는 소금남에게 더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의를 철저히 지키고, 모든 일을 적절히 안배하는 사내의 모습에 진심으로 성의를 갖춰 감사 인사를 한 후 임새옥에게 내려서 대신 예를 갖추라고 했다.
청아에게 안겨 점포 안으로 들어가던 전가아가 임새옥을 보고는 팔을 뻗자, 임새옥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다가가 안아주었다.
“나도 경성에 살아. 나중에 꼭 만나러 올게. 알았지?”
요 며칠 청아의 소심한 눈초리 때문에 전가아에게 거의 다가가지 않았더니, 아이는 미소가 사라지고 낯설고 서먹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런 전가아가 임새옥에게 안긴 채 그녀의 말을 듣고는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전가아, 찾아와. 거짓말 안 돼.”
임새옥이 ‘거짓말하는 사람은 강아지 새끼지.’라고 말하고는 두 눈을 찡끗하며 제 이마를 아이의 이마에 비볐다. 이렇게 다정하게 구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전가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곁에 있는 소금남의 얼굴도 부드러워졌다.
“한때 우리 집에 있었으니, 괜찮다면 우리 집을 친정처럼 여겨도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편하게 찾아오세요. 혹여 내가 없으면 여기 관사에게 말하면 됩니다.”
소금남이 그녀에게서 전가아를 안아오며 말했다. 별것 아닌 말이지만, 매우 조심스러웠다. 크게 티 나지 않아도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관리 집안에 아부하려고 이런다고 오해할까 봐 그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임새옥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대관인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기억해두겠어요. 친정이라고 생각할게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애초에 부인께서 계실 때, 절 양녀로 삼겠다고 말씀하셨네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청아의 안색이 괴이하게 변했을 뿐만 아니라 소금남도 멈칫했다. 임새옥은 그의 시선에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이는데 소금남의 입가에 봄바람 같은 미소가 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갈는지…….’
오는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잘못한 거지?
임새옥은 한순간 너무나 껄끄러워졌다. 물어보고 싶어도 물을 수도 없고.
그때 뒤에서 탁, 소리와 함께 종이부채가 소금남의 어깨를 쳤다.
“어느 댁 낭자가 2년 동안 웃지 않던 소 대관인을 길에서 웃게 한 겁니까?”
임새옥에겐 2년이 흘렀어도 기억에 생생한 목소리였다. 뭐가 어찌 됐든, 금을 캘 개회를 준 사람이니까. 시작은 조금 황당하고, 과정은 조금 혹독했지만, 돈 많고 한가한 이용이 신분이 미천한 시녀의 한마디를 기억해 준 것만으로 임새옥은 감사 인사를 할 만했다.
“무례하게 굴지 마라. 이분은 농사사(農事司) 유 상공의 부인, 조씨이시다.”
소금남이 이용이 어깨에 얹은 부채를 툭 치면서 말했다. 임새옥이 서둘러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갖춘 다음에 고개를 들어 이 일면식 있는 이용을 살폈다. 관을 쓰지 않은 머리에 그냥 금영롱 뒤꽂이만 끼우고 산뜻한 덧옷만 입고 있었다. 손엔 활짝 편 쇄금천(灑金川: 명대에 유행하던 쥘부채. 부채 표면에 금박을 붙이거나 쇄금 방식으로 장식을 했다.)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이, 반안(潘安)에 버금가는 용모를 빛나게 했다.
(※반안: 중국 4대 미남. 초나라 송옥, 서진 반안, 위개. 남북조 시대 북제의 난릉왕. 반안이 최고 미남으로 손꼽힌다.)
진정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풍류스러운 사내가 눈을 반짝이며 임새옥을 바라보다가 소금남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부채를 착 접었다.
“정말로 조화였구나! 어찌 귀한 부인이 되어서도 이리 차림이 궁색합니까! 무례를 범한 것이 제 탓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형, 보십시오. 우리 집에 있었을 때랑 똑같지 않습니까.”
이용이 껄껄 웃었다. 안 그래도 소금남의 미소에 어색해하던 임새옥은 본디 가까이하고 싶지 않던 자에게 한마디 듣고는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어서 심가로 가야 한다는 핑계로 황급하게 달아났는데 마차에 탈 때까지도 이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금남이 몇 마디 꾸짖기는 했으나 이용은 실실 웃으며 아까 진작 품에 안겨 온 전가아를 안고서 소금남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이용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틈을 타 서서히 멀어져 가는 마차를 뒤돌아봤다. 아까 그 여인이 고개를 들다가 지었던 놀란 표정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떠올랐다. 어떻게 생겼었는지 예전 모습은 이미 기억나지 않지만, 유독 반짝반짝한 새카만 두 눈만은 기억났다. 그리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모습은 어릴 때부터 여인에게 둘러싸여 자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선한 느낌이었다.
정말 아깝구나!
“무엇이 아까워?”
소금남이 묻자 이용은 흠칫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은 모양이었다. 이용은 얼굴에 금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가아를 흔들었다.
“저 아이를 붙잡지 못한 것이 아깝지요. 그랬으면 당당한 6품 관리 자리가 그 녀석에게 돌아갔겠습니까.”
“허튼소리! 유 소상공은 어린 나이에 재주가 뛰어나고 선한 분인데 네가 어찌 감히 조롱하긴! 너도 이제 9품 관리가 되었으니 방탕한 행실은 그만두어라. 장인어른의 명망을 그르친다.”
소금남이 정색하고 하는 말에 이용은 대수롭지 않은 듯 작은 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지만, 자형은 잘 알지 않습니까. 그 녀석…… 소상공이 오월 지역에서 처음에 얼마나 밭을 말아먹었습니까. 조화가 서신을 써서 상세한 방도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이런 공적이 있었겠습니까?”
소금남은 안색이 더 안 좋아져서 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호통쳤다.
“그만하지 못해! 남의 서신을 함부로 뜯어 본 것이 이미 큰 죄이거늘! 그 조…… 조씨의 출신이 한미하다고 하나, 지금은 6품 관리의 정실부인이다. 어딜 함부로 이름을 불러!”
이용은 소금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가신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예, 예. 됐습니다. 조용히 지내려고 집에서 나왔더니, 여기에 와서도 잔소리가 끝이 없습니다. 이만 가렵니다. 어머니가 전가아가 보고 싶어서 밥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전가아는 제가 데리고 갑니다.”
이용이 전가아를 안고 어슬렁어슬렁 가버리는 뒷모습을 보며 소금남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섰더니 연분홍 옷으로 갈아입은 청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새 옷 몇 벌을 안고 그를 맞이했다.
“노야, 뜨거운 물 준비해 두었어요.”
소금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후원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열기가 훅 불어왔다. 그는 돌아서서 청아 손에 들린 의복을 받아들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가보라고 했다.
청아의 발그레한 얼굴이 순간 굳었다. 그녀는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금남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노비가 시중을 잘 못 들었나요? 노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금남이 얼굴을 굳히며 소리 높여 그녀의 말을 잘랐다.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마라! 네 본분을 지키고 할 일만 하면 된다. 나가라!”
청아가 얼굴이 창백해져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자, 소금남이 그녀를 밖으로 떠밀고 쿵 소리 나게 문을 닫았다.
소가 점포의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저택에 나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가운데, 어깨를 움츠린 여인이 회랑을 미친 듯이 달려갔다.
같은 시각, 유씨 고부와 영아 세 사람은 높은 담장 아래 깊숙이 자리 잡은 심가 저택 안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시녀들이 하나같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종알거렸다.
노부인, 오는 내내 힘드셨지요, 저희 부인이 며칠 내내 기다렸습니다, 유 소상공이 내일 성 밖에 나가 마중한다고 청가를 내셨다는데 오늘 도착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운운하는 사이 일행은 어느새 중문 앞에 도착했다.
이런 가옥은 처음 보는 임새옥과 영아는 정신없이 두리번거렸지만, 유씨는 시선 한번 돌리지 않고 단정한 모습으로 곧게 걸어갔다. 작은 길을 지나 곧 심가 저택 뒤채에 당도했더니, 수많은 아름다운 시녀들에게 둘러싸인 아담한 여인이 처마 밑에 서 있었다.
대홍색 궁수포(宮繡袍: 화려하게 수 놓은 중국식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의 모습에 임새옥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사람이 바로 전설 속에 유명한, 심괄의 두 번째 부인 장씨였다. 남편 학대하는 걸 좋아한다는 여인!
“노부인! 드디어 오셨군요!”
장씨가 그들을 보자마자 웃는 얼굴로 다가왔다. 가까이에서 보니 장씨는 스물여덟, 아홉쯤 되어 보이는데, 물기가 촉촉한 아름다운 눈, 곱게 빗은 귀밑머리,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 다정한 모습인 것이 발호하고 포악한 모습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임새옥은 예로부터 역사서에 여인들의 언행이 왜곡되었음을 떠올리고는 후세에서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법. 바람이 불지 않는데 파도가 일진 않는다는 생각에 바로 신중한 표정으로 예를 갖췄다.
유씨를 붙들고 한바탕 인사치레를 마친 장씨는 시선을 임새옥에게 돌리고 한참 살펴본 후에야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러니 이랑이 종일 그리워하고 내내 애틋이 여기지요. 내심 웃었었는데, 이렇게 아름답고 고운 아내가 있으니 당연했네요. 나도 이리 보고만 있어도 좋은걸요.”
장씨가 그렇게 말하면서 손목에서 번쩍번쩍한 금팔찌를 빼서 임새옥의 손에 쥐여주었다.
“명색이 숙모인데, 이런 작은 선물을 준다고 타박하지 말아라. 네 숙부가 힘만 들고 좋은 소리는 못 듣는 자리에 있어서, 집에 쓸 만한 것이 없어. 너 보기 부끄럽구나.”
임새옥이 금팔찌에 깜짝 놀라서는 손이라도 덴 것처럼 마다했다. 무심결에 유씨를 힐끔 봤더니, 유씨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의 마음이니 받으렴.”
임새옥은 그제야 감사 인사를 올리고는 팔찌를 받은 후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 장씨에게 건넸다. 겹 실채기로 상서로운 모란을 누빈 비단 손수건으로, 처음으로 경성에 오는 임새옥이 망신당하지 말라고 유씨가 사흘이나 공들여 대신 만들어 준 것이었다.
역시나, 손수건을 받아든 장씨는 웃으며 예쁘다고 한참 감탄했다. 그녀는 손수건을 곁에 있는 붉은 색 옷으로 차려입은 예쁘장한 시녀에게 건넸다.
“아원, 네 솜씨와 비교하면 어떠하냐?”
시녀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들고 임새옥을 바라보더니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나긋나긋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유 부인과 비교하겠어요. 제 솜씨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지요.”
그 말에 장씨도 웃었다.
“맞는 말이다. 네 솜씨보다 훨씬 훌륭하구나.”
그러면서 소매에서 연꽃 비단 손수건을 꺼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본 임새옥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자신과는 죽어도 비교할 수 없는 솜씨였고, 몇십 년 내공이 있는 유씨에 버금가는 솜씨였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그 시녀를 향하는데, 시녀도 마침 그녀를 보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였다.
만나서 인사도 하고 감사 인사도 주고받은 다음, 다들 실내에 단란하게 모여앉았다. 시녀 여남은 명이 뒤에서 시중들며 차를 날랐다. 한담을 나누는 동안 임새옥은 구석에 앉아서 유씨와 장씨가 이야기를 나누는 걸 고분고분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하나같이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유씨는 밭의 수확 이야기를 했고, 장씨는 유이랑이 이곳에서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하며 동남쪽을 가리켰다.
“우리 집엔 사람이 많은데, 이랑이 나이가 어려도 관가께서 지극히 중시하시고 상경하자마자 많은 일을 주셨잖습니까. 수선스러울까 봐 화원 구석에 조용한 거처를 내주었습니다.”
유씨는 바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심괄에게도 자녀가 있다는 걸 알고 만나 보고 싶다고 하자, 장씨가 손을 내저었다.
“어디 내놓을 만한 애들이 아닙니다. 괜히 노부인의 눈만 버려요.”
그 말에 유씨는 매우 난처해졌고, 임새옥은 역사의 추측의 증명되는 것 같아 달리 놀라지는 않았다.
시녀와 어멈들이 들어와 연회가 준비되었다고 아뢰자, 다들 곧바로 전청으로 이동했다. 전청엔 차가 준비된 탁자 두 개에 접시가 마흔 가지 준비되어 있었다. 갖가지 과일, 정교한 유소(油酥: 밀가루를 기름에 반죽하여 구운 후 발효시킨 페이스트리 비슷한 빵) 같은 간식에 임새옥의 먹보 기질이 발동했다. 제 손으로 해 먹는 다과에 익숙하다가 국빈 연회 같은 음식을 보니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유씨가 며느리의 추태를 눈치채고 탁자 아래서 걷어차서 망정이지, 흉한 꼴로 먹어댈 뻔했다.
간단히 다과를 마친 후, 장씨가 직접 그들을 유소호가 거주하는 처소로 안내했다. 이미 사람을 보내 이랑과 심괄에게 알렸고 곧 돌아올 테니 쉬고 있으라는 말에, 유씨와 임새옥은 감사 인사를 하고 장씨를 배웅했다.
정말로 지친 유씨는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처소에 있으라고 임새옥에게 당부한 후 내실로 들어가 잠시 누웠다. 임새옥은 영아와 한 방에 앉아서 보고 느낀 것을 재잘거리며 공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날이 완전히 캄캄해진 후에도 유소호와 심괄이 돌아오지 않자, 유씨가 초조해했고 그걸 본 장씨가 웃으며 말했다.
“노부인, 진정하세요. 조정에 일이 많아 늦게 돌아오는 일이 잦아요.”
그러면서 상황을 보고 오라고 다시 사람을 보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임새옥은 지금이 희녕 9년이니 왕안석의 신법 추진이 두 번째로 실패한 때임을 떠올렸다. 다만 그게 몇 월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왕안석이 아들을 잃은 다음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그러나 시골에서 막 상경한 여인이 왕 대상공 댁 공자가 죽었는지 대뜸 물을 수는 없었다. 유소호가 왕안석과 가문의 원한이 있으니 분명 한 패가 되지 않을 것이고 연루될 일은 없다는 걸 알아서 불안하진 않았다. 다만 조바심이 나서 수시로 고개를 들고 문밖을 살폈다.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데, 밖에서 시녀 둘이 나는 듯이 들어와 웃는 얼굴로 소상공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유씨와 임새옥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는데 관복을 입은 유소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니.”
몇 걸음 만에 곁으로 다가온 유소호가 유씨의 팔을 잡았다가 물러나서 절을 올렸다. 유씨가 ‘아들아!’ 하고 부르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옆에 서 있던 임새옥 역시 기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년에 집에 돌아왔을 때 본 이래, 꼬박 여섯 달 만에 다시 보는 것이었다.
못 만날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온갖 생각이 다 들고 그 자리에서 펑펑 울고 싶어졌다.
내가 이렇게나 깊이 그리워했었구나!
희녕 9년 6월 말, 황제는 후궁에서 대나무로 짠 죽편(竹編)에 누워있었다. 궁녀 두 명이 뒤에 서서 부채질하고 있었다. 회임한 지 5개월째인 주 첩여가 조심스럽게 배 한 조각을 황제의 입에 넣어주었다. 주 첩여는 눈을 감고도 미간을 단단히 좁히고 있는 황제의 모습에 마음이 몹시 아팠다.
“관가, 또 못 주무셨습니까. 잘 드시고, 잘 주무시게 관가를 잘 보필하라고, 마마께서 몇 번이고 당부하셨어요.”
주 첩여가 몸을 일으켜서 조심스럽게 황제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황제가 한숨을 내쉬고는 눈을 뜨더니 주 첩여를 앉히고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대상공의 공자, 아무래도 안 될 것 같구나.”
그는 자식 복이 없는 황제로 아이가 요절한 슬픔을 여러 번 겪어 온 만큼 왕 대상공이 휴가를 청하러 왔을 때 그의 비통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왕안석의 아들 일로 슬픈 것도 맞지만, 이 승상을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주는 슬픔이 더 컸다. 왕안석이 건의한 정견을 몇 번 반려했더니, 외고집 상공이 연달아 사직 상주서를 올렸다. 백방으로 애를 써도 만류하지 못했는데 또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외고집 노인이 아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자기보다 더 아는 사람이 있을까.
“태의를 보내셨잖습니까. 왕 소상공은 반드시 위기를 벗어날 겁니다.”
주 첩여가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조정일에 귀를 닫고 후궁에 사는 비빈이지만, 태후 두 분이 모두 왕 상공에게 깊은 원한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태후 두 분이 모두 황제 앞에서 울며 호소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왕 상공의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는 말에, 곧바로 기쁘기까지 했다.
하지만 불룩 나온 배를 보고, 자신도 곧 아이가 생길 사람임이 떠올랐다. 그래서 도리에 맞지 않는 기쁜 마음을 서둘러 거둬들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왕 상공 이야기를 더 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 아야, 하고 작게 외쳤다. 황제가 화들짝 놀라 곧바로 자세를 바로 하고는 어서 태의를 부르라고 고함쳤다.
“관가,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아이가 또 신첩을 찼습니다.”
수줍은 듯 말하고 황제의 얼굴을 살폈더니, 황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지더니 은근히 뿌듯해 보였다. 지금 황제의 주의를 돌릴 수 있는 건 그녀의 복중 아이뿐이었다.
“관가, 옥체를 보전하셔야 합니다. 지나치게 노심초사하지 마시어요.”
주 첩여가 황제의 품을 파고들며 진심 어린 말투로 하는 말에 황제는 감동하며 또 한숨을 내쉬었다.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곽규(郭逵)가 순조롭게 조설(趙卨)의 직책을 대체했으니 자리가 바뀐 녀석이 톡톡히 교훈을 얻길 바랐다. 마음속으로 송나라 군대가 대승을 거둘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이 초조한 마음을 해소할 큰 승리가 너무나 간절했다.
(※곽규, 조설: 북송 장군. 조설이 밭을 사적으로 사들이고 기병을 모집하여 좌천되었다.)
“관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주 첩여가 둥글게 자른 당근 한 조각을 들어서 황제에게 먹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특별히 사람을 시켜 성안현에서 사 온 거랍니다. 유가네에서 심은 당근이에요.”
황제가 유가라는 말에 흥미가 생겨서 유심히 씹었더니 아삭아삭한 단맛이 났다.
“유가에서 이제 과일도 심는단 말이냐? 유 애경이 참으로 신기한 사람이구나. 또 무슨 신기한 일을 하려는지.”
주 첩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과일이 아니에요. 유 소상공의 처, 조씨가 채소라고 재배한 거랍니다. 볶고 찌고 끓이고 튀겨도 된답니다. 다만 가지러 갔던 사람이 만드는 걸 직접 본 건 아니라서 관가에게 만들어드릴 수가 없답니다.”
“아, 그러하냐? 애비(爱妃)가 맛보고 싶은 것은 아니고?”
황제가 웃으며 묻는 말에 주 첩여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성안현 사람들은 겨울에도 신선한 채소를 먹는다더군요. 백성들이 하는 말이, 황제 같은 생활 아니냐 한다던데, 관가께서 그런 것들을 먹지 못하는 것을 그들이 어찌 알겠어요.
마마께서 들으시고는 웃음도 나고 화도 나신다고 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잘 산다니 좋아서 웃음이 나신대요. 우리 대송의 복이라고. 그런데 유가에서 이런 좋은 솜씨를 널리 알려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것에 화가 나셨습니다. 혹여 폭리를 탐하고…….”
“무엄하다!”
주 첩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제가 굳은 얼굴로 호통쳤다. 비빈은 절대로 함부로 조정일을 입에 올려선 안 되는 법. 주 첩여가 겁에 질려 부르르 떨고는, 그제야 제가 말을 잘못했음을 깨닫고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신첩이 잘못했습니다.”
기분 좋던 황제의 마음이 금세 흐려졌다. 얼마 전에 어사가 바로 그 일로 상주서를 올려 유소호를 탄핵했었다. 그 원인을 황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절대로 유가의 하찮은 땅 몇 묘를 상대로 일으킨 일이 아니었다. 그저 유소호가 신법을 반대하는 쪽에 섰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유소호가 조정에 들어왔을 때, 왕 승상은 어린 관리의 재능을 매우 아꼈다. 몇 번이고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지만, 유소호가 번번이 거절했다. 게다가 왕 승상이 보낸 사람 앞에서 보란 듯이 사마 상공을 뵈러 낙양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정작, 사마 상공을 만나지 못하자 사마부 밖에서 큰절을 올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에 왕안석은 기가 막혀 피를 토하며 무지한 어린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 일은 당연히 신법을 지지하는 당파의 심기를 거슬렀고, 어사 이정(李定)은 작년 겨울 경성 상인들이 높은 가격에 성안현 채소를 사 온 것을 크게 문제 삼았다. 황제도 그 일로 유소호를 몇 번 불러들였는데, 겨울 보리와 겨울 농해 일로 지쳐 초췌해진 유소호의 모습을 보고 그 일을 언급하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그 소식이 후궁까지 전해졌을 줄이야.
(※이정: 북송의 대신. 어릴 때 왕안석에게 가르침 받았고 변법에 찬성한 인물이었다. 집현원 교리를 거쳐 어사중승에 올랐고, 송 철종 때 사마광이 집권한 후에 좌천되어 강녕부에서 세상을 떠났다.)
“관가, 신첩은 유 상공을 책망하는 게 아닙니다. 마마께서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 상공을 매우 좋아하셨어요. 유 상공의 가문에 땅이 별로 없는 것도 알고 계셔요. 그리고 소작인을 굽어살피고 소작료를 적게 받는 것도요. 채소 가격도 그들이 올린 게 아닙니다. 마마의 뜻은, 유 상공이 경성에서 여기 백성들에게도 재배 방법을 지도하면 좋겠다는 말씀이셔요. 그저 생각이 많아서 그리 말씀하신 거지, 절대로 딴 뜻은 없습니다. 폐하, 고명한 판단을 내려 주셔요.”
주 첩여가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며 몸을 구부려 절을 하자, 황제가 다급히 부축해 일으키며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다만 유 애경이 지금 공무로 노고가 큰데, 어찌 식도락을 위해 더 힘들게 하겠느냐. 하지만 짐이 약조하마. 올겨울엔 분명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요리도 같이 맛볼 수 있을 게다.”
“예?”
눈가에 아직 눈물을 달고 있던 주 첩여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황제가 활짝 웃었다.
“유 애경의 부인 조씨가 상경했다는구나.”
같은 시각, 모처럼 휴가를 받은 유소호는 침상에 누워 어린 아내를 끌어안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별안간 동시에 재채기했다.
“다 어젯밤에 소란을 피워서 그렇잖아요. 굳이 저 밖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는. 풍한이 든 거라고요.”
임새옥은 제 몸에 딱 달라붙어 있는 유소호를 밀어내고는 몸을 뒤척여 일어났다.
“영아에게 이진탕 끓여 오라고 할게요.”
임새옥은 얇은 면사 홑옷에 연분홍 긴 치마를 입고 장식 하나 없이 머리를 간단하게 틀어 올린 차림이었다. 그녀의 몸이 햇살에 비쳐 은은히 빛나는 걸 본 유소호는 기분이 좋아서 그녀를 덥석 끌어안았다.
“서두를 것 없어요, 서두를 것 없어. 금세 가지고 올 테니까.”
유소호가 그러면서 창밖을 보자, 임새옥이 웃고는 돌아서서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관인, 물어보는 걸 잊었네요. 요즘 아름다운 여인에게 둘러싸여서 아주 기분 좋게 지냈죠?”
임새옥이 웃는 듯 마는 듯 물었지만 유소호는 웃기만 할 뿐 딴청을 피웠다. 임새옥이 소매에서 정교한 자수 손수건 하나를 꺼냈다.
“이게 뭐예요? 가지고 있더라도 잘 감출 것이지.”
유소호가 이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가져갔었군. 어쩐지 찾아도 없더라니. 가져갔으니 되었어. 당신에게 주려던 거니까.”
유소호가 싱긋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전혀 믿지 않는 표정으로 손수건을 흔들었다. 벌써 몇 번이나 살펴봤는데, 다름 아닌 장씨로부터 칭찬을 받던 시녀 아원의 솜씨였다. 처음에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라고 또 두려웠는지 모른다. 오히려 스스로가 부정을 저지른 것처럼 놀라고 두려웠다. 물어보고 싶어도 물을 수가 없어서 혼자 며칠을 앓았고. 특히 유소호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던 어느 날, 서재 밖에 숨어 있는데 그 시녀가 유소호에게 탕을 가져다주러 온 걸 보았다. 너무 놀라서 비틀거리다가 다리를 삐어 아픈 걸 참고 방으로 돌아왔었다.
가슴이 뛰고 정신이 없는데, 오히려 유소호가 탕을 들고 들어와 야식 먹자고 불렀다. 그날부터 하루도 쉬지 않고 야식을 먹으면서도 의심스럽고 불안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저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안정되었고, 자기가 상상한 만큼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자신감이 생겨서 오늘은 말 나온 김에 물은 것이다.
“낭자, 처음엔 받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 곧 상경하지 않아. 그럼 선물할 일도 많을 터인데, 당신 솜씨가……. 그래서 받았지. 그래야 어머니도 편하시고.”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이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톡 때렸다.
“내 솜씨가 어때서요? 당신 신발도 만들었었는데.”
임새옥이 나무라자, 유소호는 그녀의 화난 듯 웃는 듯한 교태로운 모습에 순간 마음이 흔들려서 대번 품에 안고 더듬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는데 방문이 끼익 열리더니 새초롬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 유상공, 아원, 먹을 걸 가지고 왔어요.”
유소호의 손길에 이미 몸에 힘이 풀리던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 침상에서 굴러떨어졌고, 유소호가 웃음을 참으며 손을 내밀었다. 임새옥은 손을 저으며 밀어내고는 어서 나가 보라고 재촉했다.
저 애는 침소까지 뛰쳐 들어 올 애라고요!
유소호가 웃음을 참으며 나가자, 허둥지둥 매무새를 정리하는데 유소호가 밖에서 하는 말이 들렸다.
“수고했다.”
“당연한걸요. 백성을 위해 밤낮없이 애쓰시는데 몸 상하시면 안 되죠. 다른 건 도와드리지 못해도 탕 끓이는 것 정도는 자신 있어요.”
시녀가 새초롬하게 말하면서 탕을 젓느라 숟가락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상공, 어서 드세요. 하엽병(荷葉餠: 종이처럼 얇게 민 밀전병)은 식으면 맛없어요.”
“내, 내가 먹지.”
유소호의 허둥대는 목소리가 들라자, 비녀를 꽂던 임새옥의 손이 흠칫 해서는 비녀가 삐뚜로 꽂혔다.
오호라, 시작이라 이거지?
임새옥은 서둘러 밖으로 나가면서 웃어 보였다.
“아원, 왔구나.”
붉은색 대금 홑옷에 푸른 비단 치마를 입은 시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작은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유소호 입가에 가져다 댄 수저를 내려놓으면서 “부인!” 하고 예를 갖추었다.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원이 힐끔 그녀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는 듯 안색이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더니 잠시 후 물러갔다. 유소호는 따라가 문을 잠그고는 임새옥을 향해 손짓했다.
“이것 봐, 이것 봐. 당신이 좋아하는 하엽병에, 은사어탕(銀絲魚湯)인데?”
임새옥은 기도 막히고 우습기도 했다.
미색을 팔아서 아내 먹을거리를 얻어 오는 남편은 또 처음이었다.
“예전엔 너무 배가 고파서 어쩔 수가 없었어. 늦게 돌아와서 만들어 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그냥 굶었거든. 그래서 아원이 가져다주길래, 거절하지 못하고 먹었지.
낭자, 맹세해. 정말로 먹을 것 때문이었지 아원 때문이 아니야. 이제 당신도 왔는데, 당신도 먹을 걸 좋아하니까, 더 거절하면 안 되지…….”
유소호가 웃으며 숟가락을 그녀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임새옥이 그의 손가락을 덥석 물고는 노려보며 웅얼거렸다.
“먹을 걸 좋아한다니, 내가 뭘 그렇게 먹는 걸 좋아한다고.”
갑자기 손가락을 물린 유소호는 아야, 하고 외치더니 다른 손으로 그릇을 내려놓고는, 그녀를 품에 안고 작은 귓불을 입에 머금었다가 입맞춤해 내려갔다. 임새옥은 온몸이 달아올랐지만, 아직 낮인 걸 떠올리고 그를 밀쳐내고 달려나갔다. 유소호가 뒤에서 발을 구르며 불러도 헤실헤실 웃으며 처소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심가 화원까지 가서 연못에 비친 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가다듬은 후에 작은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꽃 구경에 바위 구경에, 꽤 즐거워진 마음으로 막 꽃담장 쪽으로 왔더니 유씨와 영아가 함께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꽃담장에 바짝 붙어서 화원 저쪽을 보고 있는 걸 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뭐 하세요?”
영아가 획 뒤돌아보고 쉿, 하더니 그녀를 벽 쪽으로 끌고 당기면서 속삭였다.
“부인, 저것 좀 보세요.”
이 화원의 다른 쪽은 바로 심괄 부부가 기거하는 처소였다. 자미화(紫微花)가 정원을 둘러싼 채 한창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임새옥과 두 사람은 꽃담장 너머로 심괄 대인과 그의 아내 장씨를 바라보았다. 촘촘하게 핀 자미화 너머로 머리도 빗지 않은 일상복 차림의 심괄 대인이 아내 장씨에게 머리채가 붙잡혀 있었다. 장씨는 한 손에 집에서 쓰는 먼지떨이를 들고 남편을 때리고 욕하고 있었고, 심괄은 피하지도 않고 그저 봐달라고 읍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임새옥이 나지막이 물었다. 영아와 유씨는 이미 얼굴이 잿빛이 되었고, 유씨는 담장을 짚고 있지 않으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모르겠어요. 심하게 싸워요. 그런데 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려요. 심 대인이 큰 잘못을 한 것 같던데요. 조정 누구를 거슬렀다나. 대상공 어쩌고 하는 말도 들렸고요.”
영아는 조금 두렵긴 해도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사나운 여인의 모습에 은근히 들뜬 기색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심괄이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머리를 감싸고 거처 밖으로 달아나려 하자, 크게 분노한 장씨가 먼지떨이를 내던지고 심괄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힘껏 잡아당기니, 생으로 수염이 뽑히고 옷에 피까지 흘렀다. 유씨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담장을 짚고 아래로 주르륵 주저앉아 버렸다. 놀란 임새옥과 영아가 얼른 웅크리고 앉아 유씨를 부축했다.
심괄의 자녀가 안으로 달려 들어갔는지, 우는 소리, 봐달라는 소리가 한바탕 울려 퍼졌다. 그러나 장씨가 크게 고함치며 욕하는 소리는 잦아들지 않았고, 임새옥과 두 사람은 더 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유씨를 부축하고 허둥지둥 왔던 길을 따라 거처로 돌아갔다.
“이 세상에 어찌 저런 여인네가 다 있니.”
유씨는 방 안에 앉아 심신이 진정되는 차를 마시고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헤헤. 노부인, 저희 마을에도 아내에게 매 맞는 사내가 더러 있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부인의 어머니도 자주 때렸…….”
영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씨가 떽, 소리쳤다.
임새옥은 역사적 사실이 증명되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조금은 들뜬 기분이었다. 그 표정을 본 유씨는 더더욱 당황했다.
큰일났구나. 안 그래도 거친 며느리 아닌가. 평소에 시어미, 지아비를 대할 때도 예법이 부족한데, 오늘 장씨의 행실을 보았으니 이 세상 모든 아내가 저리 행동하는 것으로 알면 어쩌나. 그러면 안 되지. 더 있을 곳이 아니다!
유씨는 다급히 임새옥에게 이랑을 불러오라고 말했다. 임새옥은 바로 영아를 보냈고, 금세 돌아온 영아가 이랑이 집에 없다고 했다. 화원 샛문을 지키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조정에 급한 일이 생겨 출타했다고 했다. 무슨 급한 일인지는 문지기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들이 없다는 말을 들은 유씨는 급히 이사해야겠다는 마음에 어쩔 수 없이 임새옥에게 말했다.
“이랑이 오랫동안 심가에 폐를 끼쳤지 않으냐. 인제 우리도 왔는데 계속 여기 있어서 될 일이 아니다. 아가야, 어서 사람을 구해 집을 알아보아라. 어찌 됐든 올해 안엔 나가야 한다.”
임새옥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유소호가 아원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나, 고 여자애가 자꾸 기회를 보고 알짱거려서 좋을 것이 뭐가 있나. 간교라도 부려서 달려들면 정말 큰 일이었다. 이런 일은 유비무환인 법!
그날 이후, 유씨는 장씨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피했다. 심지어 임새옥과 영아도 그쪽으로 가지 못하게 했다. 어서 집을 구하라고 임새옥을 채근하자, 안 그래도 집에서 답답하던 임새옥은 집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영아를 데리고 신이 나서 집 밖으로 나갔다.
“부인, 저 그날 성에 들어올 때 봤던 왕 도인 밀전(蜜餞: 정과, 꿀 조림) 먹을래요.”
영아가 임새옥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돈을 가져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눈썰미가 좋구나. 나는 왜 못 봤지. 뭐로 만든 밀전이었니?”
임새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묻는데, 영아가 대답도 하기 전에 갑자기 누군가 후다닥 나타나는 바람에 두 사람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시녀 아원이 봉선화를 한 움큼 들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두 사람을 위아래로 훑었다.
임새옥은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상대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웃으며 먼저 말을 건넸다.
“아원, 꽃 따고 있었니?”
말을 하긴 했어도 어쩐지 몹시 거북했다. 아원이 거의 콧소리 내듯 대답하고는 마지막으로 임새옥의 담황색 치마로 시선을 옮겼다.
“부인, 이 치마는 이 웃옷에 안 어울려요.”
임새옥은 얼떨떨해져서 무심결에 제 옷차림을 바라봤다.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원은 벌써 돌아서서 가버렸다. 어쩔 수 없이 영아를 돌아보며 정말로 별로냐고 물었더니, 영아가 눈을 부릅뜨고 이리저리 살폈다. 고부 두 사람이 낡은 옷 몇 벌을 돌려가며 입는 걸 본 장씨가 얼마 전에 유행하는 새 옷을 몇 벌 지어 보냈다. 유씨와 영아는 또 밤을 새우며 신발 천 몇 개를 만들어 돌려주었고.
임새옥이 오늘 입은 치마가 바로 그 새 옷이었다. 오늘 처음 입은 건데, 웃옷은 예전에 만든 푸른빛 항견(杭絹) 홑옷이었다. 거기에 동심빈(同心鬂)으로 머리를 틀어 올리고 유씨가 준 은빗을 꽂았다. 새카만 눈썹은 길고 입술은 불그스레한 것이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
“괜찮은걸요. 제 눈엔 예쁘기만 해요.”
원래 치장에 관심 없는 임새옥은 추하게 보일 정도만 아니면 상관없어서 그냥 잊어버렸다. 그렇게 영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둘러 나가서 길을 물어보고는 마차를 부르지도 않고 걸어서 번화한 거리로 나갔다.
변경의 아침 시장은 아주 일찍 열렸다. 소금남은 시각을 알리는 첫 번째 철패(鉄牌: 일종의 음향기. 승려가 두드려 시간을 알렸다.) 소리가 거리에서 울릴 때 이미 큰 거리로 나와 있었다. 맞은편에서 두타(頭陀: 행각승)가 한 손엔 철패, 다른 손엔 철패를 치는 기구를 들고 불심이 지대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생을 제도하고 어려움에 처한 자를 구한다. 나무아미타불, 오경(五更) 삼점(三點), 맑은 날씨!’를 외치며 다가왔다.
소금남은 그와 스쳐 지나가면서 두타 앞에 정확히 은전 몇 닢을 던져주었고, 두타는 아미타불을 읊으며 의젓하고 귀 티 나는 공자가 서서히 멀어지는 걸 바라봤다.
소금남은 부두에 서서 나귀에 짐을 실은 짐꾼이 천천히 지나가는 걸 바라보며 관사가 큰소리로 ‘절동, 절서 견직물’, ‘광동 주옥’, ‘촉중(현 사천성 중부) 오룡차(烏龍茶)’, ‘낙하(현 낙양) 황주(黃酒)’ 하고 물품을 외치는 걸 들었다. 모든 화물을 창고로 옮겼을 때 해가 이미 충천에 떴고, 그는 그제야 떠들썩한 시가를 따라 천천히 돌아갔다.
그는 주변에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듯이 조용히 생각에 빠져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다가 잡기를 부리는 사람이 있는지, 한데 모여 ‘잘한다!’고 소리치는 인파 속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놀라서 크게 웃어젖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임새옥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이런 잡기가 마치 마술처럼 느껴졌다. 손에 먹을거리를 잔뜩 들고서 손바닥이 빨개질 때까지 손뼉을 쳤다. 곁에 있는 영아는 키가 작아서 쉴 새 없이 까치발을 하느라 작은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접시 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양손에 접시 백 개를 들고 동시에 던지더니, 반은 허공에 띄운 채 착착 던지고 받는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서 쉴 새 없이 잘한다,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즐겁게 보고 있던 임새옥은 누가 갑자기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눈썹을 치켜뜨며 휙 돌아섰다. 어느 호색한인지, 제대로 혼내줄 생각으로 돌아봤는데 소금남이 앞에 서 있었다.
소금남은 안색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몇 번이고 불렀는데, 임새옥이 넋을 놓고 보느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루로 가서 차를 한 잔 마실 때까지도 그의 찌푸린 미간은 풀릴 줄을 몰랐다. 고개를 들었더니, 임새옥은 또 다루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임새옥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지금 구교문(九橋門) 시가 끝에 있었다. 이곳엔 주루가 빼곡하게 숲을 이룰 정도여서 마주 보고 나부끼는 깃발이 하늘을 가릴 정도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들어온 이 집은 ‘우선루(遇仙樓)’라는 주루로, 누각 다섯 채가 서로 마주 보고 지어진 주루였다. 그중 가장 높은 것은 3층 높이였는데, 높낮이가 다른 누각과 누각 사이에는 다리와 난간으로 서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서루(西樓)로 이 주루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창을 통해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담에 녹색 기와를 얹은, 기세가 비범한 건축물이 보였다.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그리고 소금남의 담담한 대답에 임새옥은 하마터면 찻물을 뿜을 뻔했다.
황궁이라고 했어! 황권이 최고인 이 고대에, 황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주루가 있단 말이야?
천월하지 않았으면 이 넓은 세상을 모를 뻔했어!
“유 부인, 무슨 일입니까? 편안하게 말씀하세요.”
소금남이 헛기침하는 소리에 정신이 둥둥 떠다니던 임새옥은 정신을 차렸다. 그 사이 시녀 영아는 시녀라는 자기 직책을 아예 잊고 탁자 위로 새로 올라온 간식을 짭짭거리며 먹고 있었다. 소금남이 힐끔 바라보자 놀라서 고개를 숙였지만, 여전히 볼을 불리고 우물우물 입을 놀렸다.
이런 주인과 종이라니, 이를 어쩐다.
소금남은 걱정이 밀려왔다.
임새옥이 자세를 바로 했다.
난 아무 사내하고 주루에 오는 법도를 모르는 여인이 아니에요! 난 시어머니의 명을 받고 일 이야기 하러 온 거라고요. 길에 다른 여인이 없는 것도 아니던데, 왜 내가 거리에 나와 있는 게 큰 불만인 것처럼 구는 건데요!
임새옥은 원래는 점포로 찾아갔는데 부두에 있다길래 찾으러 나온 거라고, 조금은 자신 없이 말했다. 찾으러 가는 길에 영아와 신나게 놀았으니 마음에 좀 걸리기는 했다. 역시나, 소금남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지길래 서둘러 저택 이야기를 꺼냈다.
유소호는 너무 바쁘고, 고부 두 사람은 이곳이 생소한데 심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거간꾼에게 속을까 두려워서 어쩔 수 없이 소 대관인께 폐를 끼치게 되었다고.
소금남은 그제야 미간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걸 원하는지, 크기, 위치 등을 묻는데 임새옥은 어리둥절해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것이라 대답했다. 세 사람이 살 정도면 되고, 최대한 큰길에서 멀고 외진 곳이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그럼 돈이 적게 들겠지 생각하는데 소금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이 다시 전가아의 안부도 물었다.
“외조모와 있습니다. 외조부가 시랑(侍郞) 직에서 물러나셨고, 용가가 관직을 물려받게 되어 일가가 막 이곳으로 이사해왔습니다.”
소금남은 비단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설명하고는 사환을 불러 몇 마디 하자, 사환이 서둘러 나갔다. 임새옥이 오호,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관리인지 낮은 관리인지 몰라도, 방탕하기 짝이 없는 이용이 관리라는 말에 좀 놀라기는 했다.
임새옥은 탁자 위의 음식을 영아가 거의 다 먹을 것 같아서 서둘러 젓가락을 들고 몇 입 먹다가 소금남의 시선을 느끼고 머쓱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소금남은 이 여인은 혼인하고도 겉으로 드러나는 성격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모든 게 다 신기한 어린아이 같다고나 할까.
“다 먹었습니까? 다른 것도 드시겠습니까?”
임새옥은 고개를 숙이며 다 먹었다고 인사했다. 남은 음식을 힐끔 보고는 싸가겠다는 말을 삼키고 막 일어서는데 사환이 비단 천을 안고 들어왔다. 소금남이 사환에게 물건을 받아서 건네자, 임새옥은 놀라서 얼떨떨해졌다.
이, 이건……. 사적인 선물을 주는 거라고 봐야 하나?
“이곳은 시골이 아닙니다. 이제 관리 부인이 되셨으니, 이런 차림으로 출타하면 안 됩니다. 이 멱리를 항상 쓰고 다니세요.”
소금남은 임새옥이 의아해하는 걸 알아차리고는, 이 여인이 법도를 전혀 모르는 걸 알기에 간단히 설명도 덧붙였다.
임새옥은 그제야 깨닫고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멱리를 받아서 머리에 쓰고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단정한 걸음걸이로 소금남을 따라 주루에서 나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걷다가 뒤돌아보니 그 사내는 어느새 인파 속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