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57)

四. 조정을 놀라게 한 유소호, 집으로 돌아오다

희녕 8년, 10월 말이 된 조정은 평소와 다르게 매우 시끄러웠다. 올해 스물일곱인 황제는 눈에 띄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승상 왕안석을 수시로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봤다. 그리고 말싸움하느라 정신없는 대신들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번병(蕃兵) 편제 개편안이 제의된 후부터 조정에는 이런 상황이 수시로 벌어졌다.4)

“여러 애경(愛卿), 월주 지부 조 대인이 오월 지역에 기근이 들 거라고 했던 상주서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어찌 되어 가는가?” 

황제는 일단 골치 아픈 개편안은 밀어두려다가 걱정스러운 다른 문제를 돌연 떠올렸다. 그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한창 극렬히 논쟁 중인 중신들을 중단시켰다. 

황제의 물음에 대전 안이 순간 조용해지고, 엄숙한 표정의 승상 대인을 슬쩍 살피는 눈길이 많았다. 희녕 3년 좌천된 후, 한때 철면어사(鐵面御史: 성품이 강직하여 시비곡직을 분명히 가리는 어사)라고도 불린 열도(閱道) 대인(조변의 호)은 이미 5년 동안 경성에 발을 들이지 않았으니, 헤아려 보면 지금 그의 나이 이미 예순일곱의 노인이었다.

“폐하, 신이 마침 상주서를 받았습니다. 월주 지부 조변이 사적으로 돈을 거둬 곡식을 축적하는 바람에 오월 지역 곡식 가격이 폭등했답니다. 이는 청묘법5)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승상 왕안석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감정이 조금 격앙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쉰넷이 된 그는 작년 파면 사건을 겪고 다시 조정에 나타난 후로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조당에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참지정사6)였던 조 대인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옹고집 성격인 왕안석을 승상으로 천거했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틀어져 원수가 될 줄이야. 그 원인이 바로 이 ‘청묘법’ 때문이었다. 사마광 대인7)이 추밀부사8)를 사직하고 떠났을 때, 조 대인도 사직을 청하는 상주서를 올렸었다. 황제는 붙잡으려 했으나 그리할 수가 없어서 좌천하여 항주로 보냈고, 그 후로 조 대인은 여러 관직을 전전하며 다시는 조정에 들어오지 않았다. 

왕안석 역시 매우 조급했다. 그의 평생 포부가 바로 강국부민인데,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다. 작년엔 화를 품고 관직을 떠났으나 황제의 간절한 요구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그를 근심스럽게 하는 것은, 처음엔 의지 가득했던 젊은 황제조차 어름어름 회피하려는 조짐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누군가 자신의 신법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려고 하면 조급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현재 조정의 다수가 왕안석의 파벌이다 보니, 소곤소곤 귓속말을 나누는 소리만 들릴 뿐 아무도 나서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황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서슬 퍼런 왕안석의 시선을 무심결에 피하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바로 그때, 한림 시독학사 심괄(沈括)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그는 막 거란에서 돌아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여행기를 바쳤고, 그 여행기에 요나라의 험난한 산천과 풍속, 습관을 상세히 기록하여 젊은 황제를 크게 기쁘게 했다.

(※한림 시독학사翰林 侍讀學士: 한림원 관직. 사서 편찬, 황제의 고문 등 직무를 맡음.)

(※심괄沈括: 천체관측법, 역법 등을 창안한 학자 겸 정치가. 요나라와 국경 설정에 공이 있음. ‘몽계필담’의 저자.)

“폐하, 오월의 재해는 사실입니다. 신이 사람을 보내 조사한 바로, 올해 여름 오랜 가뭄으로 오월 지역의 곡식 생산량 감소는 대세가 되었습니다. 하필 도열병까지 닥친 상황이니, 조 대인의 그런 행동은 실로 현명했다 할 수 있습니다.” 

심괄이 낭랑한 목소리로 하는 말에 조변의 난처함이 풀린 황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재해가 사실이라는 말에 다시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렇다면 국고로 곡식을 나누어주고 이재민을 구제해야 하지 않겠나.”

심괄이 다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근심하지 마십시오. 신이 아직 아뢰지를 못했는데, 다행히 도열병을 구제할 줄 아는 자가 있어, 오월 지역엔 가뭄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 외에 더 큰 손실은 없었습니다.”

황제뿐만 아니라 모든 신하들도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신하들이 이전에 자신들이 받았던 각종 상주서에서 너덧 곳의 지주가 모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한 걸 기억해냈다.

“유문장?”

황제도 곧바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황제는 큰 뜻을 품은 데다가 나라와 백성을 근심하는 젊은이였다. 가장 기대하는 것이 바로 ‘강국부민’이라서 왕안석을 지극히 존중하고 아꼈다. 다만 작년 정협(鄭俠: 송나라 시인) 사건이 크나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다. 자신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한 신법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이 처참한 유민도(流民圖)를 불러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 희녕 6년 전국 각지에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고 유랑하는 일이 생기자, 시인 정협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의 참혹한 실상을 그린 ‘유민도’를 조정에 바치고 왕안석을 탄핵한 사건. 이 일로 신종은 초심이 흔들려 희녕 7년 왕안석을 파직했다.)

꿈을 품은 젊은이에겐 너무나 큰 타격이었다. 그런 지금 가뭄, 기근 이야기를 다시 들은 황제는 저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정녕 하늘이 열성조께서 만든 법을 바꾸려 하는 나를 벌주는 것인가? 

그런데 도열병을 고쳤다는 유문장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어쩌면 하늘이 내 살길을 끊으려는 게 아닌 건가!

“그자는 오월 지역의 나이 든 농민인가?”

“아뢰옵니다, 폐하. 조 대인의 묘사에 따르면 올해 열여섯인 소년입니다. 게다가 북방 사람입니다.” 

대신 하나가 대답했다. 그도 첫 번째 상주서를 받았을 땐 전혀 개의치 않아 했고, 그냥 어느 지방 관리가 허풍을 떨며 쓸데없이 올린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같은 상주서가 많아지고, 모두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특히 엄숙하고 진지한 조 대인마저 상주서에서 ‘우리 송나라의 복’이라고까지 말하며 그 젊은이에게 상을 내려줄 것을 황제께 주청했다. 그러니 믿지 않을 수가 있나.

“열여섯!” 

황제가 놀라서 용상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북방에서 태어난 소년이? 어느 집 아이인가? 어린 나이에 이토록 대단하다니, 가문은 더 대단하지 않겠나.” 

“폐하, 성안현 현령 주문청이 보고하기를, 유문장은 그의 현 십방촌 사람이라고 합니다. 집안에 노모와 처가 있다고 하며, 올해 유가에서 심은 벼 생산량이 한 묘당 여덟 석이라고 합니다.” 

한림학사 등관(鄧綰)이 황급히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조당에서 발언하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었다. 황제는 그를 언짢아하는 것을 대놓고 드러내는데 고집스러운 상공은 한마디도 거들어 주는 법이 없었다. 상공을 위해 여혜경(呂惠卿)을 탄핵한 바람에 사람들에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다고 손가락질받는 오명을 뒤집어쓴 보람도 없이 말이다. 

(※등관: 왕안석이 권세가 막강했을 때는 왕안석을 따르고, 신종이 여혜경을 승상 자리에 올렸을 때는 여혜경을 따르고, 왕안석이 복권되었을 땐 다시 아부한 파렴치한 인물.)

(※여혜경: 희녕 초에 신법 운영에 적극 참여했다. 많은 법령을 만들었고 후에 한림학사가 되었다. 왕안석이 밀려난 희녕 7년에 참지정사가 되어 신법을 지속해서 시행했다. 나중에 왕안석과 사이가 틀어져 진주, 연주, 태원 등 외지로 나갔다.)

등관은 지금 남만(南蠻) 땅으로 좌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 있다면 최대한 입을 다물며 황제가 자기를 잊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황제가 그 젊은이에게 관심이 많은 것이 보이는데 좌천된 그의 측근 증포가 올린 상주서를 마침 읽은 참이었다. 혹시나 자기가 실세했음을 그자들이 알고 험담할까 두려워 미리 읽어두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내용을 알고 있었고, 황제가 분명 기뻐할 것도 알고 있었다. 하늘까지 자기를 돕는 듯했다. 

“여덟 석!”

황제가 어디 기뻐하기만 했으랴. 그야말로 흥분했다. 그리고 조당도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황제는 줄곧 말이 없는 왕안석을 바라보며 겸허하게 물었다. 

“애경, 이 일을 사실로 보시오, 아니면 거짓으로 보시오.” 

그렇게 왕안석에 묻는 이유가 있었다. 왕안석은 몇십 년 동안 낮은 관직에 있던 경험이 풍부한 관리였다. 그리고 황제가 백방으로 신임하고 아끼는 이유는 그가 관직에 오르고 싶어서 관리가 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송나라의 부국강대를 꿈꾸며 천만 백성을 위하기 때문이었다. 몇십 년 동안 낮은 관직에 있었던 경험이 있으니, 왕안석보다 백성의 괴로움을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이 노신(老臣), 이렇게 높은 벼 생산량은 처음입니다만 민간엔 기인이 참으로 많은 법, 주문청의 망언은 아닐 것입니다.” 

왕안석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대체 어떤 인물인가? 어린 나이에 어찌 이러한 재주가 있단 말인가?” 

왕안석의 말을 들은 황제는 이미 완전히 이 사실을 믿고 있었다. 황제가 잔뜩 흥분하여 저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하늘이 짐을 보우하는 것이다. 우리 송나라 백성이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심이야.” 

대신들이 모두 입을 모아 폐하의 공덕을 감축했다.

“이 소년이 이토록 농사에 열중하는 것을 보면 분명 글공부는 하지 않았겠군.”

황제의 말에 등관은 스스로에게 절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무심결에 한 자기 행동이 운명을 바꿀 커다란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문청의 상주서를 읽은 후 특별히 올해 과거 시험을 조사했다가, 유문장이 주시에 참여했지만 급제하지 못한 걸 발견했다. 황제가 이 소년에게 관직을 내릴 생각이라는 걸 누구라도 알아들었으리라. 

등관이 다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폐하, 유문장은 학생입니다. 올해 개봉부에서 열린 주시에 참여했으나, 아무래도 오월의 재난을 근심하느라 어서 달려가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흐트러졌는지, 급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에 조정에 줄지어 선 신하들은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권세에 빌붙은 자가 아닐 수 없군! 그냥 급제하지 못했다고 하면 될 것을, 성심을 추측하여 아부부터 한다니! 

“정말 그러한가?”

황제는 놀라워하면서도 더욱 기뻐했다. 

조정 중신들은 등관의 말을 지극히 경멸하면서도, 등관이 성심에 맞장구칠 생각으로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그 소년이 농사를 안다면 분명 농민 출신일 것인데, 알고 보니 글공부한 사람이라니. 이것 참……. 남다른 재주라고 해야 하나?

“급제하지 못하였대도 상관없다. 누가 짐을 위해 다녀오겠나? 짐은 유문장에게 진사 출신 자격을 내릴 생각이다. 용도각(龍圖閣) 제식으로 봉하고 농사 판사(判司: 관청 서기)로 임명하라.” 

(※용도각: 송나라 진종 때 건립한 관부. 태종의 어서, 어제 문집, 보록, 보물을 들을 보관한 곳. 용도각 학사란 이름뿐인 직책, 명예직이었다고 한다.)

황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말투로 말했다. 

대신들은 깜짝 놀랐다. 

곧바로 6품 관직이라니,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모든 이의 시선이 왕안석을 행했다. 그러나 표정이 싸늘한 승상 대인은 정신이 저 밖에 있는 듯, 황제의 말을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심괄이 허리를 굽히며 나섰다. 

“신이 가겠습니다. 이 일이 사실인지 아닌지, 현지에 가서 조사하겠습니다.” 

심괄 대인이 출발한 같은 시각, 아직은 유소호라고 불리는 유문장은 자기 집 대문 밖에 서 있었다. 

예년 이 시기엔 농민들은 할 일이 없어 마을 밖으로 나가 일거리를 구하거나, 마을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수다 떨며 나날을 보내거나 했다. 그런데 마을로 들어온 유소호는 후미진 곳에 앉아서 볕을 쬐는 눈이 침침한 노인들 말고는 개 한 마리 지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십방촌 사람들이 한창 바쁘게 밭에도 천막을 세워서 건생 채소를 재배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큰 천막에 채소는 파릇파릇하게 자랐고, 초록빛 시금치는 벌써 구매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모든 이가 발에 땀 나게 바삐 움직이느라 자신들의 주인, 유 소관인이 돌아온 것도 전혀 알지 못했다.

유소호는 정갈한 대문이 있는 가옥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임새옥이 서신에서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곳이 바로 자기 집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비쩍 마른 나귀를 문밖 나무에 묶어두고 대문을 살짝 밀자, 잠그진 않고 닫아만 둔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눈앞에 탁 트인 세 칸짜리 가옥이 보이는데, 마당엔 커다란 나무 몇 그루를 심은 곳을 제외하고 모두 벽돌이 깔려 있었다. 두 가닥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가 옷을 말리다가 기척을 듣고 뒤를 돌아봤다. 

“이 빌어먹을 놈이? 어떻게 들어왔어? 어서 나가!” 

눈앞에 나타난 사람에 깜짝 놀란 영아가 고함치며 쫓아내려고 하는데.

“네가 영아냐?”

유소호가 동글동글한 시녀를 바라보며 바쁘게 웃었다. 임새옥이 서신에서 묘사한 것처럼, 얼굴, 눈, 코, 하물며 몸까지 동글동글했다.

영아가 화들짝 놀라며 누구냐고 물으려는데, 반죽을 끝낸 임새옥이 부엌에서 나왔다. 소작농이 물을 것이 있어 온 줄 알고 “영아, 누가 왔니?” 하고 물으며 다가왔다.

유소호가 고개를 돌렸더니, 동그랗고 부드러운 얼굴선에 눈이 살구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자색 노주(潞綢: 산서의 유명한 비단) 겹옷, 하얀 비단 치마, 검은 배자를 입고 걷어 올린 소매 아래 드러난 얇은 손목에 은팔찌 하나만 낀 팔을 휘두르며 다가오는 모습이 눈이 부셨다. 자기가 너무나 잘 아는 조 대저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낭자, 나 돌아왔어.” 

임새옥이 다가오자, 유소호의 놀라움은 안쓰러움으로 바뀌었다. 떠났을 때보다 훨씬 말랐고, 눈가에 감추지 못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먼 길을 온 듯한 남루한 차림새의 사람을 본 순간, 임새옥이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어디에서 구걸하러 온 거지인가?’였다. 부엌에 가서 남은 밥을 가지고 오라고 영아에게 시키려는데, 그 사람이 ‘낭자’라고 부르는 걸 듣고는 순간 멈칫했다. 한참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졌다. 

“세상에. 어째서 이런 꼴로…….”

임새옥은 그에게 달려가 손을 덥석 잡았다. 목이 메어 ‘얼마나 고생했냐’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유소호를 붙잡고 안으로 달려가며 고함쳤다.

“어머니, 이랑이 돌아왔어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요즘 집에 돈이 적잖게 들어왔고, 유씨는 다짐한 대로 세세히 돈을 관리하면서 한가할 때는 방에서 장부를 꼼꼼히 챙겼다. 이날 일찍 일어난 그녀는 임새옥이 돈 일부를 가져다 외상을 갚아야 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고는 빗질도 하지 않고 임새옥이 얼마 전에 가져다 둔 옷을 대충 걸쳤다. 임새옥이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일부러 성에서 솜씨 좋은 여인을 골라 지어준 옷이었다. 그녀는 금박을 두른 짙푸른 대금 비단옷을 입고 창가에 기댄 채 장부를 꺼내 셈을 하고 있었다. 

10월 말이라 서늘한 날이었다. 영아는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쓱쓱 쓸고 임새옥은 부엌에서 무엇을 다지는지 도마가 뚝딱뚝딱 울렸다. 영아를 시켜 겨 껍질을 뿌리자, 참새들이 마당에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작은 마당에 생기가 넘쳤다. 

그런 사소한 소리에 유씨는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며느리가 입으로는 그렇게 싹싹한 말은 하지 않아도 모든 일에 사근사근하게 공경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걱정과 미안함이 너무나 느껴져서, 유씨의 차가워졌던 마음도 서서히 풀렸다. 다만 응어리가 조금 남아 가시지 않았을 뿐이다. 

유씨는 장부를 보며 일단 임새옥에 줄 돈을 셈했다. 그러고는 그날 성에서 옷을 지어 가지고 온 여인이 보여주었던 대홍색 단화(團花: 방사형, 혹은 회전형 둥근 꽃무늬) 문양의 희상봉(喜相逢) 비단을 떠올렸다. 

(※희상봉喜相逢: 쌍희. 새해에 입는 옷을 짓는 옷감을 의미)

그걸 보았을 때 예전에 집에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는 새해를 맞이하면 꼭 그런 비단으로 옷을 만들었다. 벌써 몇 년 동안 새해에 새 옷을 입지 않았다는 생각에 돈을 조금 빼냈다. 

며느리에게 새 옷 한 벌 해주고, 영아도 시중을 잘 드니 당연히 한 벌 해주어야지. 이랑은, 거짓말이 들통났으니 새해에는 돌아오겠지. 사계절 내내 입을 옷 한 벌 없으니 아예 같이 만들어 버리자.

그 생각이 들자, 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며느리가 서신을 보낸 지 꽤 되었는데, 어째서 아직 답신이 없을까. 무서워서 돌아오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순간 또 기운이 빠져서 장부를 덮어 화항 위로 던져두었다. 바로 그때, 마당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임새옥이 ‘어머니, 이랑이 돌아왔어요!’ 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곧바로 큰 소리를 내면서 방으로 뛰쳐 들어왔다. 

유씨는 화항에서 화급하게 내려오다가 다리가 꼬여서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다행히 유소호가 재빠르게 부축하면서 모자 두 사람 모두 주저앉고 말았다. 

“어머니, 불효자 인사드립니다.” 

유소호가 무릎을 꿇은 채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박고 울먹였다. 유씨는 봉두난발에 꾀죄죄한 아이를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불현듯 그들이 도망쳐 나왔을 때를 떠올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은데, 한데 엉켜서 결국은 한숨만 나올 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 실망하신 것 압니다. 어머니를 속인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능한 탓입니다. 글공부에 재주가 없어서 공명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렸습니다.” 

유소호는 일어나지도 않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울먹였다. 

“말씀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말씀드릴 면목도 없었습니다. 어쩌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숨었습니다. 어머니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를 존중하기에 더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 때리고 욕하셔도 좋습니다. 절 버리지만 말아 주십시오.”

그러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서 유씨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었다. 유씨는 버리지만 말라는 말에 오장육부가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집안이 박살 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고통스럽게 살지 말고 그대로 머리 박고 죽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어리디어린 이랑이 울면서 옷깃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버리지 말라는 그 말에 죽을 마음을 접고 이를 악물고 살아갔다. 그렇게 온갖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어째서 이제야 살 만해지니까 모자 사이에 틈이 생긴 걸까. 

한순간 온갖 서러움이 밀려와 양손으로 힘껏 유소호를 때렸다. 

“이 어미를 속이다니. 이 어미를 남으로 여기다니.”

유소호는 피하지 않고 때리는 대로 맞으며 그저 울기만 했다. 한쪽에서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울어대던 임새옥은 두 모자의 응어리가 풀렸음을 깨닫고 마음을 누르던 큰 돌을 내려놓고는 저도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하늘이 무너진 듯이 우는 모습에 영아는 겁에 질려 멍하니 문 앞에 서 있었다. 누구를 말려야 할지도 모르겠고, 처량한 제 신세 생각에 아예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울다가, 임새옥이 모자를 설득해서 일으키고 영아에게 물을 끓이라고 지시했다. 유소호는 씻으러 보내고 자기는 서둘러 밭으로 가서 신선한 채소를 땄다. 사실을 알게 된 소작농들이 집으로 가서 닭, 오리를 들고 와서 요리에 쓰라고 주었다. 백방으로 사양해도 끝내 물리지 못한 임새옥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고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유소호는 새 옷으로 갈아입었고, 유씨가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몇 달 밖을 떠도는 동안 소년티가 가신 그는 몸은 야위었지만 오히려 단단해져 있었다. 전에 입던 옷이 팔다리가 짧은 걸 보니 키가 더 자란 듯했다. 

“안 그래도 새 옷을 지어 연말에 입히려고 했더니, 하필 이때 돌아왔구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게 되었으니 아주 잘 되었다.”

유씨가 머리를 빗겨 주며 하는 말에 유소호는 그저 빙긋 웃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응어리가 없어진 것이다. 임새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아는 그녀 손에 들린 채소와 고기를 가지고 갔다. 두 사람이 한참 부엌에서 바삐 움직인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탁자 위에 음식이 가득 놓였다. 닭과 오리를 굽고, 신선한 채소를 볶고, 일가족이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밥을 먹었다. 유소호는 예절을 돌볼 틈도 없이 게 눈 감추듯 음식을 싹싹 비웠고, 임새옥과 유씨는 그런 그의 모습을 마음 아프게 바라봤다.

“내 아들, 밖에서 얼마나 고생한 게냐. 어찌 이리 굶주렸어.”

유씨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고생하지 않았습니다. 돈 많은 지주가 잘 먹여주었는걸요. 그저 급하게 돌아오느라 먹을 것을 챙기지 못했을 뿐입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몇 끼 굶은 것뿐입니다.” 

식사를 마친 후, 임새옥은 모자 둘을 남겨두고 영아와 함께 치우러 갔다. 유씨가 장부를 꺼내 유소호에게 보여주었다. 

“네가 글공부할 재목이 아니라니 나도 이제 강요하지 않으마. 며느리가 집 안을 아주 잘 관리해서, 우리 여인네들이 땅을 지키며 살아도 먹고살 수 있게 되었다. 너도 괜히 글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떠돌아다니지 말고 며느리와 함께 집에서 농사나 지어라. 유가를 다시 일으키길 바라지도 않는다. 아이나 많이 낳아다오. 그래야 죽어서 네 아버지를 볼 낯이 있지.”

유소호는 우습기도 하고 울고도 싶었다. 그는 봇짐을 가지고 와서 남쪽의 새로운 물건들을 꺼내 보여주며 유씨를 기쁘게 했다. 

임새옥이 들어오자 유씨가 웃으며 말했다. 

“네 처에게나 주어라. 나는 필요 없다.”

유소호는 임새옥의 붉어진 얼굴을 슬쩍 보고는 대답했다.

“저 사람에게 줄 것도 가지고 왔습니다.”

나무 상자를 여는 그의 모습에 유씨와 임새옥 모두 궁금한 듯 고개를 내밀었다. 

“목화?” 

임새옥이 놀란 얼굴로 소리치면서 하얗고 보송보송한 것을 덥석 잡았다. 

유소호도 놀란 모양이었다.

이 아이가 이것을 본 적이 있나?

“목화? 이것이 목화냐?”

유씨도 궁금한 듯 보송보송한 것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무슨 꽃이기에 이리 보송보송한 것이냐.”

임새옥은 작디작고 조금은 거친 목화를 쥔 채 흥분해 있어서, 유소호가 유씨의 말에 대답했다. 

“흥화(興化)에 갔을 때, 마을에 피어 있었습니다. 꽤 보기 좋고 특별한 것이 다른 꽃과 달라 보여 조금 꺾어 왔어요.”

“어디? 어디에서 꺾었어?” 

정신을 차린 임새옥이 다급하게 물었다. 

“흥화에서.” 

임새옥은 어리둥절했다. 

흥화가 어디지? 

임새옥은 후세의 것과 큰 차이가 나는 목화를 손에 들고 빙빙 돌리며 온몸이 뜨거워졌다. 겉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초기 아시아 목화인 듯했다. 이 시기 중국엔 목화가 들어오지 않은 줄로 알았었다. 그래서 여기에 온 지 4년인데, 아직 제대로 된 솜옷 한 번 입지 못했다. 면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목면(木棉)이었는데, 이미 목화가 존재할 줄이야.

“많이 심었어?”

임새옥이 물었다. 그녀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유씨 모자는 이미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유씨가 꽃이 하얗기만 하고 거칠어 예쁘지 않다고 하면서 임새옥에게도 꽂지 말라고 하자 유소호도 흥미를 잃고 다른 것을 보고 있었는데 임새옥이 별안간 또 한마디 물은 것이다.

“심은 게 아니라, 야생에서 자란 거야.” 

유소호는 임새옥의 진지한 얼굴에 귀중한 꽃인가 싶어 덩달아 진지해졌다.

그렇다면 목화의 가치가 전혀 발견되지 않은 거네! 이건 목화라고! 

임새옥은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그녀 고향은 집집마다 목화를 심었다. 목화를 잔뜩 따와서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그 목화 더미 위에 눕는 게 오누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다. 다만 벌레를 심하게 먹어서 지역에서 차츰 열기가 식어갔고, 더는 주요 농작물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랑, 이건 관상용으론 가치가 없지만, 밭에서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한 거야. 현재 상태로 보면, 한 묘에 이백 근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임새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천천히 말하며 목화를 한 움큼 손에 들고 비비고 또 비볐다. 아들과 며느리가 농사일을 좋아하는 걸 아는 유씨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한쪽에 비스듬히 앉아서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걸 빙긋이 웃으며 바라봤다. 

임새옥의 말이 무슨 개념인지 깨달은 유소호가 입을 벌리고 얼떨떨하게 물었다.

“생산량이 꽤 큰데? 다만, 어디에 쓰는데?”

임새옥은 들뜬 얼굴로 그의 곁에 앉아서 목화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디에 쓰냐고? 꽃송이는 천을 짤 수 있어. 목면 대신 솜옷을 만들 수 있어. 씨는 기름을 짤 수 있고, 대는 땔감으로 쓸 수 있어!”

한 묘에 생산량이 이백 근인 꽃으로 천을 짠다? 솜옷을 만든다? 

유소호는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들판에서 자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 하얀 것들이 황금이었다고? 

“안 그래도 고민하고 있었거든. 벼는 이 지역에서 큰 면적으로 퍼트릴 수 없어. 그저 우량종을 재배해서 팔고 싶었을 뿐이야. 대신 옥수수, 목화가 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이 두 가지는 장차 우리나라 농작물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해서 말하던 임새옥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닫고 재빨리 입을 다물다가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뜨끔해서 유소호를 바라봤다. 

“정말로? 그럼 다시 가서 종자를 구해와야겠다.” 

유소호 역시 생각에 잠긴 채 임새옥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뭐라고? 또 어딜 간다고?” 

유씨가 화들짝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

“어디에도 못 간다! 내 말대로 해라. 채소 심고, 보리나 심으면 된다. 뭐 하러 사람들이 심은 적 없는 희귀한 것 때문에 고생하느냐. 농사도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네 아버지도 그러셨다. 건실하게 농사지으면 됐지, 교묘함만 추구하는 건 농사꾼의 금기라고 하셨어. 피땀 흘려 본전도 못 찾는 일이다.” 

그 말에 임새옥과 유소호 모두 침착해졌다. 임새옥은 손에 든 목화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지금 상황으로 이 목화의 생산량은 크게 늘릴 수 없을 것이다. 종자 개량도 1, 2년으로 될 일이 아니고. 하지만 현재 생산량으로 보급한다고 해도 분명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이다. 

현재 방직 기술은 여전히 뒤떨어진 상태인데 무턱대고 목화 재배 기술을 추진한다면 분명 낙관적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 테니 천천히 하는 게 좋을 듯했다. 

“서두를 것 없어. 직접 갈 것 없이, 성에 점포 사람이 물건 거두러 올 때 부탁해서 남쪽에서 가지고 오면 돼. 지금 노는 땅도 없어서 심지도 못해.” 

임새옥이 하는 말에 유소호도 싱긋 웃었다. 충동적으로 한 말이지 지금 바로 갈 생각은 없었다. 멀리 다녀온 바람에 매우 고단해서 한동안 쉬어주지 않으면 다시 갈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그 화제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가족은 몇 년 못 만난 듯이 웃고 떠들다가,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영아가 차를 두 주전자나 내왔을 때 겨우 이야기를 마쳤다. 저녁으로 죽을 진하게 끓여서 먹는데, 한창 먹다가 유소호는 고부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서 젓가락을 든 채 잠들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올 일념에 며칠 밤을 새우며 달려온 것이라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뒤엔 졸음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유씨는 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는 임새옥과 함께 그를 부축해 눕히고 그대로 방에서 재웠다. 

유소호는 다음 날 해가 진 후에야 일어났다. 그 바람에 유씨는 또 한바탕 눈물 바람을 일으켰다. 가련한 이 아이가 대체 얼마나 고생했기에 이럴까 싶어서. 

그 후로 며칠 동안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소작농들이 문안 인사를 왔고, 성내의 큰손들도 모두 찾아왔다. 유소호는 며칠 내내 연회에 초대를 받았지만, 다행히 술을 마시지 않아서 유씨와 임새옥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유씨가 더는 글공부를 강요하지 않을 테고, 임새옥이 농사에 열심인 걸 본 유소호는 착실히 농사지어 판매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려면 고객들과의 관계도 잘 맺어야 하기에 연회 초대에도 흔쾌히 응했다. 

돈 많은 상인들 역시 유소호가 오월 지역에서 했던 일들을 들어 알고 있었다. 작은 현성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지만, 지금 조정이 민간을 배려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조정이니 필시 유소호 같은 농민을 특별히 대할 것이다. 현령 주 대인이 얼마나 유가를 돌보는지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고작 열몇 묘를 가진 젊은이를 절대로 무시하지 않았고, 서로 겸허히 존중하며 원만하게 어울렸다. 

유소호가 돌아온 이래, 임새옥은 매매와 관련된 외부 일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오로지 밭에서 소작농을 가르쳤다. 천막 재배는 성숙기에 접어들어 그다지 관여할 일이 많지 않았다. 드디어 한가해진 임새옥은 매일 집에서 밥하고 집안을 정리했고, 집에 돈이 생기니 걱정거리도 사라졌다. 매일 자유롭게 먹고 마시는 것을 연구하며 갖가지 방법을 바꿔가며 요리하는 사이, 홀쭉하게 말랐던 얼굴도 차츰 살이 오르고 피부도 촉촉하니 부드러워졌다.

이날 유소호는 아침 일찍 성내 소가 점포로 향했다. 이곳의 소가 점포는 주로 화물 운송의 경유지 역할 정도만 해서, 현재로서는 유가와의 거래가 별로 없었다. 교흥아는 궤대에 서서 주판을 튕기다가 유소호가 나귀를 타고 오는 것이 저 멀리 보이자 서둘러 맞이하러 나갔다. 

“소관인, 오늘은 어찌 시간이 나서 들르셨습니까?”

교흥아가 한 손으로는 나귀를 잡고, 한편으로는 나귀에서 내리는 유소호를 부축했다. 유소호는 소금남이 천막을 수리하라고 돈을 보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소가에 깊이 감사하며 직접 서신을 써 감사 인사를 전했고, 소금남도 친히 답신을 해주어서 지금은 꽤 가까운 사이가 된 셈이었다. 

“노야, 대관인께 부탁한 연근 준비가 어찌 되어가는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유소호가 예를 갖추며 하는 말에 교흥아는 소관인의 예를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며 바로 그를 말렸다. 그러고는 빙긋이 웃고만 있자 유소호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노야, 왜 그렇게 웃기만 합니까?”

유소호를 점포 안으로 안내해서 들어간 교흥아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이 늙은이가 할 말이 있습니다만, 물어도 될지요.”

유소호는 그의 비밀스러운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유소호가 의자에 앉으며 하는 말에 교흥아가 헛기침을 했다. 소식을 듣고 욕심이 나서 진정할 수 없었던 걸 떠올리고는 부끄러움을 억누르며 말을 꺼냈다.

“소관인에게 혼사를 넣고 싶어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소호가 벌떡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자, 교흥아는 깜짝 놀라 다급히 쫓아 나갔다. 무엇이 심기를 건드린 것이냐고 물었더니 유소호가 냉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노야, 아침부터 술 드시고 어떻게 된 겁니까? 집에 처가 멀쩡히 있는데 혼사라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소호가 이토록 제 체면을 세워주지 않을 줄 몰랐던 교흥아는 순간 부끄러워서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저 웃으면서 다른 이의 부탁을 받고 물어본 것이니 화내지 말라고 달랬다. 귀에 거슬리는 말이면 늙은이가 방귀 뀌었다고 생각하고 넘기라는 말에 유소호는 다시 피식 웃고는 그 화제를 넘겨 버렸다. 

유소호가 연근 문제를 몇 마디 당부하고 더 머무를 생각이 없다는 듯 서둘러 돌아가자, 교흥아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배웅했다. 얼굴이 아직도 화끈거렸다.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온 그로서는 이렇게 대놓고 거절당한 건 처음이었다. 교흥아가 제 뺨을 철썩 때리고 돌아서는데, 마침 아내가 안에서 휘장을 걷고 나오더니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유 소관인이 왔던데, 어찌 되었어요? 우리 삼저아 이야기해 보았어요?” 

교흥아는 울컥한 마음을 아내에게 풀며 혀를 찼다. 

“이런 망할 여편네! 비웃음당할 그런 생각이나 하고! 괜히 신경을 거슬렀으니, 앞으로 어찌 살라고!” 

듣자마자 일이 잘 안 됐음을 깨달은 교흥아의 아내도 불퉁스럽게 대답했다. 

“소관인이 앞날이 훤하게 되었다고 당신이 말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곧 관리가 되네, 마네, 한 게 누군데. 일개 지주였으면 내가 아까워서 우리 삼저아를 첩으로 내줄 생각을 했겠어요? 평소에 보니, 그 집 낭자, 성격도 좋아 보이더만, 말도 못 꺼낸답니까?” 

교흥아는 허둥지둥 그녀의 입을 막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죽고 싶소? 함부로 할 말이 아니야! 노야와 이 관사 어르신이 하는 말씀을 몰래 들은 것만 해도 큰 죄거늘. 노야께서 절대로 퍼트리지 말라고 이 관사 어르신에게 당부까지 하신 일이오! 우리가 퍼트리면 더 안 되고!”

여인은 곧바로 입을 다물고는 좋은 일인데 말하지 못할 게 무엇이냐고 꿍얼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교흥아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장부를 들여다보며 그 일을 잊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간 유소호는 우선 유씨에게 문안부터 드리고 부엌으로 향했다. 임새옥과 영아가 부엌에서 만두를 찌고 있었다. 

“거기 앉아 있지 마. 괜히 눈 따가워.”

유소호가 들어와서 한쪽에 앉는 걸 본 임새옥이 황급히 말했다. 불을 피우던 영아는 곧바로 일어났다. 

“저 대신 불 좀 지펴주세요. 장작이 얼마 없어서 패러 가야 해요.” 

그러고는 영아가 동동 뛰어가자 임새옥이 얼굴을 붉히며 뒤에서 소리쳤다. 

“대낮부터 무슨 잠꼬대야. 장작이 모자라긴 뭐가 모자라!” 

유소호는 웃으며 곁으로 다가가 앉아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힐끔 그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왜 이리 빨리 돌아왔어? 누가 화나게 했어? 얼굴이 왜 뿌루퉁해.”

부채질하던 유소호는 이야기하려다가 그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혀를 차며 대답했다. 

“소가 점포, 앞으로 자주 가지 마.” 

임새옥은 깜짝 놀라 반죽을 내려놓았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려는데, 채 묻기도 전에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영아가 헐레벌떡 달려와 고함쳤다. 

“사람들이 잔뜩 왔어요. 노야더러 뭐라더라, 뭔 종이를 받으라던데, 아무튼 난리예요!” 

임새옥과 유소호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갈수록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서둘러 나가보니 유씨도 나와 있었다. 대문은 열려 있고, 낯선 아역 두 명이 앞장서서 들어와 예부터 갖췄다. 

“소관인, 큰 경사입니다!” 

그 말에 세 사람 모두 얼떨떨해졌다. 

“경사라니요?” 

유소호가 묻는데 관복을 갖춰입은 주문청이 걸어들어왔다. 그는 들뜨고 또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유 소관인, 어서 옷 갈아입고 향안(香案: 향로를 올려놓는 작은 탁자)을 내오게. 성지를 받을 준비하게나.”

그 한마디에 온 집안이 어리둥절해져서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 

“성지요?” 

임새옥이 반복하며 되묻는 사이, 유씨는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온몸을 부르르 떨며 야단났네, 하고는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온 마당에 사람들이 고함치며 난리가 났다. 

주문청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정도로 좋아할 일은 아닌데? 

임새옥과 유소호는 무슨 종이인지를 거들떠볼 겨를도 없이 유씨를 방 안으로 옮겼다. 영아는 벌써 달려가 의원을 모시고 왔다. 

유가에 관복을 갖춰 입은 관아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행차한 걸 본 십방촌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들어서 한순간 문 앞이 물샐틈없이 붐비고 떠들썩해졌다.

주문청은 다급해져서 쉴 새 없이 손바닥을 비볐다. 하지만 부부 두 사람이 노부인 때문에 걱정하고 바삐 움직이고 있는데 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계속 서성이고 있는데, 드디어 유씨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아들아, 우리 가문에 또 일이 터진 게냐.” 

유씨가 유소호의 손을 덥석 잡고 울음을 터뜨렸다. 

주문청은 어리둥절할 뿐.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건가?

“노부인, 소관인이 오월 재난을 구제한 공을 세운 일로 성상께서 크게 기뻐하시어 사람을 보내 상을 내리는 것이오.”

“정말로요?”

유씨가 대번 울음을 멈추고 벌떡 일어나 앉으며 묻자 주문청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가 감히 성지로 농담을 합니까.”

갑작스러운 경사에 유가 사람 모두 넋이 나간 사이, 주문청만 흥분해서 발을 굴렀다. 

“흠차(欽差: 황제의 명을 받은 파견인) 대인이 곧 올 것이네. 어서 맞을 준비를 해야지!”

그 말에 온 가족이 다시 허둥대기 시작했다. 유씨는 부축도 받지 않고 알아서 일어나 옷궤로 가 옷을 뒤졌고, 임새옥은 영아를 데리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향안을 준비했다. 주 대인은 유소호를 붙들고 쉴 새 없이 법도를 일러주었다. 

소식이 퍼지자 온 마을이 들끓었다. 노씨는 조삼랑과 함께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그러다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서 도와준다고 하면서 유가로 들어가려는데 아역들이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자, 노씨가 발을 구르며 화를 냈다.

“이번에도 도와주고 수고비 받을 거요?” 

누군가 노씨에게 묻는 말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가장 좋은 옷으로 갈아입은 유씨는 임새옥과 유소호의 낡은 옷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왜 진작 새 옷을 지어주지 못했을까, 뭐 한다고 굳이 새해를 기다렸을까.

세 사람은 마당에 자리 잡고 서서 흠차 대인이 오길 조용히 기다렸다. 주문청은 관병을 이끌고 구경하는 마을 사람들을 향해 엄중히 경고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참이 흘러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대인, 심 대인께서 이미 성으로 들어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째서 아직 오시지 않을까요?”

현의 소리(小吏) 하나가 얼굴의 땀을 훔치며 묻는 말에 주문청이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심 대인은 원래 그런 분이시다. 어딜 가든 마음 내키는 대로 둘러보셔서, 관아에서 마중 가거나 동행할 것도 없다. 십여 년 동안 항상 그래왔으니, 걱정할 것 없이 그저 조용히 기다리면 된다.”

임새옥은 유씨 뒤에 서서 다리를 떨고 있다가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영아를 보고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유씨의 눈총을 받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전생에, 현에서 ‘새 시대 혁신 리더’ 어쩌고 상을 준다는 소식이 퍼졌을 때 우리 아빠의 심정도 대략 성지를 받았을 때와 비슷했겠지? 

임새옥은 그 생각에 속으로 한숨을 폭 내쉬었다. 마음속에 깊이 묻혀놓은 그리움은 이번 생엔 죽을 때까지 털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곁에 있는 유씨가 긴장해서 가쁘게 내쉬는 숨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성지라.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정말로 황권(皇權) 시대, 황제가 하늘인 시대에 있음을 실감했다. 그녀 같은 하찮은 인물은 꿈도 꾸지 못할 영광이었다. 

도열병을 제어했을 뿐인데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갈 줄이야. 게다가 상까지? 이 시대에서 농사일은 유망한 일인 걸까? 

모든 이가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을 때, 바깥이 또 소란스러워졌다. 소작인 일고여덟 명이 누군가를 끌고 왔다. 천막을 지키는 사람들로, 줄곧 천막 안에 있느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있다가 관병이 있는 걸 보고는 곧바로 큰소리로 외쳤다. 

“마침 관아 나리들이 계시는구먼! 우리가 직접 끌고 갈 필요가 없겠어!” 

그러고는 유가 마당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소관인! 소낭자! 채소 도둑을 잡았습니다!” 

주문청이 얼떨떨해하는 사이, 임새옥이 몇 걸음 만에 달려가서 당장에 문 안으로 들어오려는 소작인들을 향해 손을 저어 보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나중에 이야기해요. 어서 풀어 주고 돌아가요.”

“부인, 이 도둑놈이 오전부터 줄곧 우리 밭에서 어슬렁거렸습니다. 눈매가 쥐새끼 같은 것이, 진작 주시하고 있었습죠. 아니나 다를까, 논에 뛰어 들어가 천막에서 채소를 뽑지 뭡니까? 한 주먹에 턱을 부숴버렸죠.” 

이번엔 공을 세운 조홍은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것으로 지난번 천막 사건을 설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임새옥이 손을 내젓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밧줄로 칭칭 묶은 사내를 덜렁 끌어내서 걷어찼다. 

“현령 나리가 여기에 계신다. 좀도둑이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보자!” 

임새옥은 발을 구르다가 성큼성큼 다가가 좀도둑을 일으켰다. 좀도둑이래서 어릴 줄 알았는데 어리지도 않았다. 마흔쯤 되었을까. 심의를 입고 두건을 썼는데, 두건은 비뚤어졌고 심의에는 진흙이 묻었으며 얼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턱이 빠져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임새옥이 부축해주자 허둥지둥 일어나는데 이가 더그덕거렸다.

주문청은 좀도둑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마을 사람이 때린 것을 고발하려는 줄 알고 성가신 마음에 끌고 가라고 지시하려다가 얼굴을 똑똑히 보는 순간 놀라 꽥 고함쳤다. 

“어이쿠, 심 대인 아니십니까!” 

현령 주 대인의 고함 한마디에 온 마당의 사람이 놀랐다. 한순간 무릎 꿇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우는 사람은 울고, 고함치는 사람은 고함치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아니었다. 주문청은 조금 전까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가 지금은 넋이 나가 주저앉은 조홍 앞으로 가서, 이자를 가두라고 소리쳤다.

심괄은 일제히 무릎 꿇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주문청을 붙들고 턱 이야기를 하려는데, 우사(藕絲: 연뿌리에서 나는 실)로 지은 옷차림의 해맑고 곱게 생긴 여인이 나타나 예를 올렸다. 

“대인, 양해해 주세요. 이 사람은 마을 사람으로 의술을 조금 안답니다. 대인 턱을 고쳐드릴 거예요.” 

여인이 온몸을 덜덜 떠는 노인을 끌어당겼지만, 노인은 덜덜 떨면서 중얼거리기만 했다. 

“이분은 하늘의 별인데, 늙은이가 어찌 감히.” 

여인이 노인의 다리를 슬쩍 차면서 나직이 말했다. 

“어서 서두르지 않고 뭐 해요. 조카가 잡혀가길 기다리시려고요?”

의원은 그 말에 더 식겁해서는 심하게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은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섰다. 

심괄의 턱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어이, 거기 노인, 무얼 하는 건가?” 

주문청이 저쪽에서 보고는 큰소리로 외치자 의원이 겁에 질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괜찮네, 괜찮아. 좋아졌어, 좋아졌어.” 

심괄이 턱을 문질러 보고 급히 손을 휘저었다. 그 여인은 어느새 인파 뒤로 사라졌다. 관병이 얼굴이 잿빛이 된 마을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는 걸 본 심괄이 어서 놓아주라고 지시했다. 모르고 한 일은 죄가 아니라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기뻐하며 ‘청천대노야(靑天大老爺: 결백하고 공정한 관리)’를 외쳤다. 

주문청이 마당의 잡인들을 죄다 치우고 나자, 심괄이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성안 현령은 어디 있는가.” 

주문청이 허리를 숙이며 앞으로 나서자, 심괄이 다시 유문장의 이름을 불렀다. 유소호가 유씨와 임새옥을 데리고 급히 자리를 잡았다. 

“황제께서 명하시길, 성안현 유문장은 백성을 위기에서 구하고, 오월의 난을 구제한 공을 세웠다. 특별히 진사 신분을 하사하고 용도각 제식으로 봉하며, 농사 판사에 임명한다. 이상!”

임새옥은 어리둥절해졌다. 

유소호가 관리가 되었다는 뜻인가? 

성지에 나온 단어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유소호와 유씨가 벌써 절을 하고 있길래 서둘러 따라 절하며 입을 모아 주군의 큰 은혜에 감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관인, 일어나게.” 

유소호가 성지를 받자, 심괄이 웃으며 그를 일으켰다. 임새옥도 유씨를 부축해 일으켰다. 유씨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눈앞에 서 있는 조정 관리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멈칫하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존중(存中: 심괄의 자字)?”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씨의 목소리가 유소호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심괄 귀에 그대로 들어갔다. 심괄이 움찔해서 소리를 찾아 돌아보니, 왜소한 체구에 온유한 얼굴, 짙푸른 대금 나삼을 입은 서른대여섯 정도의 여인이 보였다. 

“소관인의 모친, 유씨입니다.” 

주문청이 다급히 소개하며 돌아보니, 유씨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유씨는 예를 갖추지도 문안을 올리지도 않고 멍하니 심괄만 바라보고 있었다. 

“형수님?” 

심괄은 대경실색해서 한 걸음 다가갔다. 

“큰형수님?”

아들이 관리가 되는 순간에 옛 지인과 상봉하는 겹경사가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한 유씨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 비틀거렸다. 임새옥이 재빠르게 달려가 뒤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어머니, 어머니, 왜 이러세요.” 

“형수님, 어떻게 여기에 계십니까? 얼마나 힘들게 찾아다녔는지 아십니까?” 

심괄은 눈시울이 붉어지고 목소리도 먹먹해졌다. 

유씨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팔을 덥석 잡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늘이 무너져서 암담하고 처참해졌던 그해로 기억이 되돌아갔다. 얼마나 곳곳을 헤매고 다녔던가. 도와달라고 얼마나 찾아다녔던가. 가는 곳마다 얼마나 냉대받았던가. 

“심 대인! 그때 왜 없었습니까! 왜 없었어요!”

주문청은 눈 앞에 펼쳐진 괴이한 장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성지를 이토록 슬프게 받는 사람은 전무후무하지 않겠는가.

임새옥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지만, 유씨의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눈물을 흘렸다. 

유소호는 모친을 부축하며 옷매무새가 엉망이 된 조정 관리가 묵묵히 눈물을 흘리는 걸 멍하니 바라봤다. 

이 사람이 바로 부친이 말했던 다재다능한 인재 심괄, 심존중이로구나.

시골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심괄은 그의 부친과 벗이 되었다. 어릴 때 집에 있던 온방(温房)에서 연구에 몰두하던 아버지 곁에 이 사람이 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심지어 두 사람이 기분 좋게 이야기하면서 온방이 떠내려가라 크게 웃던 것도 기억났다. 집안에 재난이 닥친 다음, 심 대인을 찾아가야 한다고 어머니가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집이 털리고 몰락한 후에도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경성까지 가서 심 대인의 저택을 사방으로 수소문했었다. 하지만 만나지 못했었다. 심 대인은 수리(水利) 공사를 시찰하러 갔다고 했다. 나중에 심 대인이 그 왕 대상공의 오른팔이라는 것을 들은 후,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경성을 떠났고 그 후로는 다시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드디어 대청에 자리를 잡고 앉은 후, 두 사람이 옛날부터 잘 알던 사이라는 걸 깨달은 주문청은 말을 편하게 나눌 수 있도록 눈치 빠르게 물러갔다. 차를 가지고 온 영아가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자, 임새옥이 들고 들어가서 직접 심 대인에게 차를 따라준 다음에 유소호 뒤로 물러섰다.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늦었었습니다.” 

심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깍지 낀 양손에 힘을 꾹 주었다. 

“절강에서 밤새 달려 돌아갔었습니다. 식솔들 말이, 형수님이 이미 떠났다고 하더이다. 사람을 보내 찾았습니다. 강에 몸을 던졌다는 사람도 있고, 굶어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형수님, 제가 정말 미안합니다.”

한바탕 울고 평온을 찾은 유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저도 너무 급하다 보니 정신이 나갔던 게지요. 사실 누굴 찾아가도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목숨을 구할 수 없을뿐더러, 잘못하면 대인도 연루됐을 겁니다.” 

그 말을 마친 후, 대청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심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다. 고집불통 상공이 결정한 일은 황제도 되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심괄은 이 일로 승상과 멀어졌다. 누구를 본보기로 잡아도 상관없지만, 하필 ‘토지야(土地爷: 중국 고대 설화에서 땅을 관장하던 신)’ 유흥(劉興)을 건드리다니. 설령 그 위력으로 토호들이 불안을 느끼고 신법을 순조롭게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그로 인해 잃은 것은 억 근에 가까운 이 나라의 양식인지도 모른다. 겸손하던 그 농부가 떠올랐다. 때때로 가늘게 뜨던 눈빛에 무궁무진한 지혜가 떠올랐었거늘! 

심괄은 원통해서 자기 손을 뜯어버릴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가버렸단 말인가!

“아!” 

심괄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이 화들짝 고개를 들고 조용히 한쪽에 서 있는 유소호를 바라봤다. 

“문장이, 이랑인가요?”

유씨는 대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유소호의 손을 잡아당겼다. 눈가에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보라. 우리 유씨 가문이 결국 다시 일어나지 않았는가. 

심괄이 유소호를 바라봤다. 제 아버지와 제법 닮은 소년의 눈매와 체형에 순간 아련해졌다. 

“생각나는군. 그때는 아직 어렸는데. 작은형수가 이불에 꽁꽁 싸맨 널 안고 나와서 만월주(滿月酒: 아이가 출생한 지 한 달 된 것을 기념하며 마시는 술)를 마셨지. 다시 만났을 땐 온방에 모종을 놓아둔 궤 아래 숨어 있었단다. 네 아버지가 부르니까 깜짝 놀라서 달아나다가 궤에 머리를 부딪치고는 얼마나 시끄럽게 울던지. 그랬던 네가 이렇게 자랐구나. 

소년이 도열병을 다 고치다니, 그 부친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했는데, 그럼 그렇지, 그럼 그렇지, 유가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일을 해.”

심괄은 만감이 교차하여 눈가가 또 촉촉해졌다.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유소호가 흘린 눈물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랑이 어릴 때 아비를 잃어서인지 얼마나 아둔한지요, 꼭 제 아비처럼 융통성이 없습니다. 유가를 위해 꼭 관직에 오르길 바랐는데, 정말로 관리가 되면 그것도 걱정일 것 같고요. 고관들은 모두 안목이 넓으면서 속셈도 많지 않습니까. 우리 이랑은 얌전하니 착실하기만 해서 속을까 걱정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왔다면 성지를 받지 못하게 했을 겝니다.” 

유씨가 표정을 가다듬고 그렇게 말하고는 유소호의 손을 토닥였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심괄을 향해 큰절을 올리자, 당황한 심괄이 벌떡 일어나 답례했다. 

“앞으로 이랑을 잘 가르쳐주세요, 심 대인. 큰 부귀, 공명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무사히, 착실하게, 우리 유가의 명성만 회복하면 충분합니다.”

유씨가 유소호를 잡아끌었다. 

“자, 심 대인에게 인사 올려라. 숙부라고 불러 보렴.”

유소호는 그 말대로 인사를 올렸다. 유씨의 마음을 아는 심괄도 거절하지 않고, 유소호가 두 번 고개를 조아리자 부축해 일으켰다. 

“형수, 마음 놓으시지요. 이랑은 어린 나이에 이리 유능하니 분명 대업을 이룰 것입니다.” 

유씨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자리에 앉아 임새옥에게 차를 따르라고 했다. 심괄은 아직 여자아이 차림을 한 여인을 힐끔 보았다. 아까 혼란스러운 와중에 가장 먼저 나와서 턱을 맞춰준 여인임을 떠올리고는 괜히 궁금한 마음이 생겼다. 아까 자기를 끌고 왔던 농부들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랑보다 더 어린 이 여자애가 설마 아까 농민들이 말했던, 대규모 천막 채소를 재배해낸 대낭자란 말인가? 

“이 아이는 이랑의 처입니다.” 

심괄의 의문을 알아차린 유씨가 웃으며 말했다. 

“대인을 뵙습니다.” 

임새옥은 고개를 숙이고 차를 따른 후 서둘러 뒤로 물러나서는 채소 도둑 취급을 받았던 대인을 살며시 살폈다. 

이런 흠차도 있었나. 관복도 입지 않고,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남의 밭까지 들어가서 보는 사람이 있다니. 

경성 고관들은 분명 유소호가 한 일을 매우 뜻밖으로 생각하리라. 물론 의심도 할 것이다. 하지만 의심 때문에 직접 찾아와 조사하는 관리는 손에 꼽히는 중에 또 꼽히지 않을까?

저 심 대인이 대체 누굴까? 심 대인, 심? 

임새옥의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 

심괄!<몽계필담>의 저자, 심괄? 

“심괄, 심 대인이신가요?”

임새옥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에 너무 놀라서 예법도 잊고 말았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렇게 물었다. 

유씨 모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심괄은 돌연 그 목소리에 움찔했다. 

유씨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아이는 다 좋은데, 출신이 문제로구나. 예의, 법도를 입이 닳도록 가르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이랑이 관직에 오르지 않는다면 모를까, 두 사람이 시골 마을에서 산다면 상관없지만, 인제 이랑이 관직에 올랐으니 장차 고명(誥命)을 받을 사람이 툭하면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서야, 비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지 않나. 

“그래, 본관이 심 대인이다.” 

심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바라보고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소낭자, 설마 소낭자도 나를 아는가?”

알지요! 당연히 알지요! 

임새옥은 달려가 이 사람을 붙들고 주무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이건 진짜야! 산 사람이라고! 수업 때 그림에서 봤던 사람이 아니고, 박물관에서 조각으로 본 사람도 아니고, 정말로 산 사람이잖아! 

“박학하고 문장이 뛰어나며, 천문, 방지(方志: 향토사), 율력(律曆: 역법), 음악, 의약, 점술, 다방면에 모르는 것이 없으며 모두 저서가 있지 않으십니까.”

임새옥이 두 눈을 반짝이며 줄줄이 읊는 말에 심괄이 껄껄 웃으며 손을 저었다. 

“소낭자, 이렇게 과찬하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 뜻밖이었다. 

내가 이토록 유명했던가? 외진 마을의 촌부가 알 정도로? 게다가 내가 섭렵한 것을 줄줄 말할 정도로? 그중엔 그저 애호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이제 막 접한 것에 불과해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이 소낭자가 어떻게 전부 알고 있을까?

‘4월이라 꽃이 모두 졌는데, 산속 절에 복숭아꽃 활짝 피었네.’라는 시 한 구절에 어린 심괄은 산에 올라 직접 검증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하물며 오월 지대에서 죄다 상주서를 올린 유소호의 행적이 어땠을지 당연히 직접 와서 살펴보고자 했을 것이다.

(※ 人間四月芳菲盡, 山寺桃花始盛開. 

당나라 시인 백거이百居易의 시 

<대림사도화大林寺桃花>)

그 심괄이로구나! 

지금 임새옥의 모습은 다른 세 사람 눈엔 조금 어리숙해 보였다. 그녀는 너무 흥분했다. 너무 흥분한 바람에 지금 심경을 묘사할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통속적으로 말해보면, 신을 만난 느낌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가령 물을 배출할 수도 집어넣을 수도 있는 관개 시설에 대해서라든가, 가뭄이나 장마가 들어도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는 옥답 1,270경(頃: 1경은 백 묘)을 개발해낸 세부 사항이라든가, 등차수열의 해법을 어떻게 생각해 낸 건지, 어떻게 뭘 배우면 바로 깨우치고, 깨우치면 바로 정통하는지, 다 묻고 싶었다. 그러나 천만 마디가 결국 한 마디로 압축되고 말았다.

“심 대인, 제, 제가 만든 밥 드시고 싶지 않으신가요?”

임새옥이 넋을 놓고 있길래 세 사람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심괄은 돌아가서 복명해야 하고, 유씨는 부탁할 일이 많으니 당연히 꾸물거릴 틈 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다. 그런데 임새옥이 별안간 내뱉은 한마디에 세 사람 모두 얼이 빠졌다. 

“얘야.”

유씨의 얼굴이 흐려졌다.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분위기가 묘하게 되자 유소호가 서둘러 나섰다. 

“대인, 제 처 음식 솜씨가 매우 좋습니다. 너무 기뻐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서 한 말이니, 숙부 대인,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 

그러면서 임새옥을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 

“낭자, 숙부 대인은 바쁘셔서 그럴 시간이 없으셔. 하지만 우리가 경성에 가게 되면 당연히 숙부를 모시고 대접해야지. 그때 솜씨를 보이면 돼.” 

심괄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의 차림새를 보면 이 어린 부부가 아직 정식으로 부부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서로 은애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렇지. 그때 조카며느리의 솜씨를 맛보도록 하지.” 

유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임새옥을 살짝 노려보았다. 하지만 임새옥은 그것도 보지 못한 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심 대인, 이름을 적어주실 수 있을까요?” 

결국 임새옥의 바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틀 동안의 호통과 일주일 간의 예법 특훈만 받았을 뿐.

하늘이 어둑어둑해지자, 주문청은 흠차 대인을 줄곧 이 외진 마을 농가에 둘 수 없었고, 심괄 역시 지칠 대로 지쳐서 유소호에게 어서 정리하고 이틀 후에 길을 떠나자고 당부하고는 주 대인을 따라 성으로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내일 바로 길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유가의 밭이 실로 너무 궁금했고 풀어야 할 의문도 많아서, 심괄은 반드시 이틀 시간을 내서 제대로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래서 궁에서 이 기이한 천재 소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황제를 며칠 더 기다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소식은 반나절 만에 날개가 달린 듯 사방팔방 퍼져나갔다. 내일 이른 아침엔 아마 온 성안현에서 알게 되리라. 

현령 대인이 흠차 대인과 함께 드디어 돌아간 후, 마을 사람들이 용솟아 오르는 샘물처럼 유가로 들이닥쳤다.

유가는 외로운 모자 둘뿐이던 집안이라 땅 몇 묘가 있다 해도 딱히 경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달라졌다. 유가 아들이 봉록을 받는 관리가 되었다. 촌사람이라 얼마나 높은 관직인지 잘 모르지만, 황제가 친히 성지를 내린 벼슬은 남다르지 않겠는가.

관리가 되는 사람은 이 시대 촌사람 눈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별이며, 반드시 떠받들어야 하는 신선이었다. 권세에 빌붙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예물을 보내고, 축하 인사하고, 오고 가는 사람들로 유가 마당이 떠들썩했다. 하늘이 어둑해지기 시작해도 사람이 줄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갈수록 많아졌다. 유가 사람이 마을 밖에 서서 바라봤다면, 저 멀리에서도 등롱을 든 사람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서 있음을 보았을 것이다. 

“영아, 문 닫아, 문 닫아!” 

임새옥은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소리쳤다. 다 이웃이라, 찾아온 사람을 냉대할 순 없었다. 하물며 축하하러 온 사람 아닌가. 임새옥과 영아는 반나절 동안 끝도 없이 차를 끓이고 따르느라 팔과 목이 쑤셨다.

하지만 결국 대문을 닫으라고 명령한 임새옥은 돌아서서 정방으로 향했다. 

“대저아, 힘들지?”

노씨가 임새옥이 어깨를 문지르는 걸 보고 웃으며 묻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유씨와 마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씨는 유씨가 피곤한 얼굴로 버티고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이 침을 튀겨가며 말하기 바빴다. 

“어머니, 늦었는데 안 돌아가세요? 금단이랑 삼저는 누가 보고 있어요?”

임새옥은 골치가 지끈지끈했다. 노씨와 조삼랑은 주 대인이 돌아간 다음에 들어와서는 줄곧 눌어붙어 있었다. 차를 한 주전자나 마시고 뒷간도 한 번 가지 않고, 누가 찾아와도 자기가 웃으며 맞이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노씨가 안주인인 줄 알 듯했다. 

노씨가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데, 입안 가득 황금 원보 같은 커다란 이가 보였다. 

“애들? 네 할머니 있잖니. 평소엔 장작만 들어도 팔이 쑤시니 어쩌니 하던 노인네가 지금은 잠시도 손을 안 떼고 둘 다 안고 있단다.”

노씨가 줄곧 의자에 묵묵히 앉아 있는 조삼랑을 향해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너희 조가에 온 20년 동안 얼마나 수모를 겪었니. 이제야 허리 펴고 살겠구나.”

그러면서 성큼 다가가 유소호의 손을 잡아끌고 웃는 얼굴로 유씨를 바라봤다. 

“다 이랑 덕이지요. 애 아버지가 이랑의 이마에 금빛이 감돈다며 언젠가는 장원이 될 사람이라고 진작 알아봤지 뭐예요.”

임새옥은 신물이 넘어왔고, 유소호와 유씨는 내심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종일 허둥대느라 우리 다 피곤해요. 별일 없으면 어서 돌아가세요.” 

유씨는 사돈 체면 생각에 절대로 축객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니, 자기 모친은 자기가 상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임새옥이 노씨를 떠밀었다. 

노씨는 그녀의 손을 밀어내고 웃으며 말했다. 

“얘야. 안 그래도 이야기하려 했다. 앞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더 많아질 테지. 부인인 네가 직접 움직이면 되겠니? 시녀 하나 있다지만, 어리바리해서 쓸모가 없잖니.” 

노씨는 한쪽에서 아까부터 짜증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시녀 영아를 노려봤고, 영아는 기가 막혀 발을 굴렀다. 노씨는 예전부터 이 시녀가 거슬렸다. 저번엔 감히 자기를 내쫓기까지 했고, 고함은 또 얼마나 치는지. 노씨가 딸을 찾아가 집 지을 때 도와준 수고비를 달라고 했던 일을 온 마을이 다 알게 되어 지금까지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네 외할머니 집에 삼보, 걔도 다 컸단다. 불러다 심부름시키면 돼. 그리고 네 외숙모 친정 셋째 올케네 딸아이, 걔가 열일곱이 되었다는구나. 뭐든 다 잘한댄다.”

노씨가 손을 꼽으며 하는 말에 조삼랑도 초조해져서 체면도 불고하고 황급히 끼어들었다. 

“네 큰아버지네 근가아도 다 컸단다. 문지기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네 둘째 숙부네 엽아는 너보다 한 살 많은데…….”

조삼랑의 말에 화가 난 노씨는 딸과 이야기하다 말고 돌아서서 팔을 걷어붙이고 욕설을 퍼부었다.

“걔들까지 뭘 들이대요. 하나같이 무뢰한에 멍청이들인데! 밥이 남아 쉬어도 돼지에게 먹이면 먹였지, 걔들 줄 건 없어요.” 

조삼랑도 다급해졌다. 노씨가 예전부터 작은 이득만 있어도 친정만 챙기는 바람에 어머니와 형제 앞에서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이번에 탄탄한 미래가 확실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데 노씨가 저리 또 탐을 내니 화가 나서 한순간 병든 고양이가 위세를 떨치듯이 쫄보가 용기를 내는 순간이었다. 그가 벌떡 일어나 노씨의 뺨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입만 열면 허튼소리 하는 여편네야! 보자 보자 하니까 무서워서 헛소리하는 걸 봐준 줄 알지!” 

조심랑에게 시집온 지 십몇 년, 눈치 한 번 안 보고 살던 노씨는 조삼랑이 평소에 자기를 구박했던 시가 사람들을 편들자고 감히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자 기가 막히면서도 화가 나서, 꽥 소리를 치며 뺨을 되돌려주었다. 다들 허둥지둥 뜯어말리는데도 부부 두 사람이 욕을 퍼부으며 싸우자, 임새옥이 화가 나서 찻그릇을 내동댕이쳤다. 

“싸우더라도 집에 가서 싸워요! 우리까지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사람이 죽어도 말리지 않을 테니 가서 마음대로 문 닫고 싸우세요. 우리 집에서 쓸 사람은 우리가 알아서 사 올 거예요. 친척들은 하나도 쓸 생각 없으니 마음 접으세요!” 

그 말에 노씨는 얼굴이 시커메져서 눈물을 흘렸다. 근본을 잊은 딸이라니, 뭐 하러 지금까지 키웠냐느니, 진작 물에 빠져 죽었으면 오늘 이런 꼴도 안 봤을 거라니 하는 말에 유씨는 말을 좋게 하라고 임새옥을 나무랐다. 얼른 안사돈을 집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자,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영아가 다가가 노씨를 끌고 나갔다. 밖으로 밀어내고는 문을 닫았더니, 노씨가 밖에서 욕설을 퍼부었고, 영아도 만만한 성격이 아닌지라 똑같이 되받아쳤다.

노씨는 말솜씨가 보통이 아닌 이 여자애를 이길 수 없어서 훌쩍이며 돌아가면서 가는 내내 욕을 퍼부었다. 임새옥을 욕했다가, 조삼랑을 욕했다가. 부귀해지니 어머니를 잊고 혼자 복을 누리네, 죽을 둥 살 둥 키운 딸이 배은망덕한 배신자였니 운운했다. 그녀의 평소 행실을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은 웃으며 지켜볼 뿐 아무도 진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나중에 누군가가 일부러 들췄을 때, 임새옥이 높은 자리에 있는 고상한 큰 인물에게 지탄받는 빌미가 된다. 어찌 됐든 효도는 송나라에서 황제 아비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일이니 말이다.

노씨 부부를 배웅한 후, 유가 세 식구는 지쳐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각자 방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잠들어서는, 임새옥이 눈을 떴을 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후다닥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빗은 다음 앞뜰로 나갔더니 유소호가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어머니 일어나셨어? 뭐 먹고 싶어?”

임새옥이 곧바로 부엌으로 달려가며 물었다. 

낙엽을 모아서 태운 재를 큰 나무 아래 뿌리던 유소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난 먹었어. 솥에 어제 지은 밥이 있기에 데워서 먹어. 피곤한데 새로 지을 거 없어. 심 대인이 곧 오실 테니 난 나가서 기다릴게.” 

임새옥은 걸음을 멈추고 기뻐하며 물었다. 

“심 대인이 오셔? 뭐 하러?”

유소호는 빙긋이 웃고는 손에 묻는 재를 탁탁 털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 보니 물어본다는 걸 잊었네. 어떻게 너도 심 대인을 알아? 어머니께서 나한테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나도 이번에 강남에 갔다가 그분의 여러 가지 일화를 듣고 알게 된 건데, 넌 어째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아?” 

임새옥이 내심 웃으며 대답했다. 

“소가에서 들은 거지, 뭐. 강녕부 사람은 심괄 대인을 다 안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길래 기억했지. 난 또 나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네. 아직 젊더라고.” 

“심 대인의 부친께서 강녕부에서 재임하셨지. 백성에게 은혜를 많이 베푸셨대.” 

임새옥이 크게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음이 간질간질해져서 유소호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이랑, 심 대인이 왜 오시는 건데? 나도 따라가면 안 돼?” 

집에 있느라 답답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밖으로 나온 유씨가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얼굴을 굳히며 헛기침했다. 

“얘야, 이리 오렴.” 

임새옥은 순간 안색이 잿빛이 되었다. 

끝장났다! 

유소호가 걱정스러운 듯 유씨를 보고는 편들어주려고 하는데 유씨가 입을 열었다. 

“심 대인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니? 참으로 부지런한 분이시다. 어서 마을 입구로 마중 가지 않으면 늦는다.” 

유소호는 다른 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임새옥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 가버렸다. 

하룻밤 잘 자고 일어나 기운을 차린 유씨는 임새옥을 가까이 불렀다. 어제 잘못한 갖가지 행동을 짚어주고는 조상님 앞에 무릎 꿇고 있게 했다. 임새옥은 배를 곯고 무릎 꿇고 있는데 자기는 밥을 먹고 다시 와서 <여계>를 읊으며 숙지하라고 명했다. 

그러는 동안 또 사람들이 축하하러 찾아왔고, 유씨가 나가서 접대하는 사이 영아가 만두를 들고 왔다. 덕분에 임새옥은 배고파서 넘어질 처지는 피했다. 

해가 진 후에야 신발에 흙과 진흙을 잔뜩 묻히고 돌아온 유소호의 얼굴엔 감추지 못한 흥분이 가득했다. 벌을 다 받은 임새옥은 얼굴을 찌푸리고<여계>를 외우고 있다가 유소호가 유씨에게 하는 이야기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 심괄이 유소호를 크게 칭찬했다는 대목까지 이르자 유씨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 아들, 가풍을 욕되게 하지 않았구나.”

“어머니, 저는 대부분 탁상공론일 뿐이고 다 소화가 한 거죠.” 

유소호가 웃음을 지으며 책을 외우는 임새옥을 바라보았고, 그녀도 그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눈짓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당연히 눈치챈 유씨는 콧방귀를 뀌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마침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다. 예전엔 그저 지주였으니 몰라도, 인제 이랑이 관직에 올랐으니 우리도 따라가야 한다. 얘야, 앞으로 행실 조심해라.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어선 안 된다.” 

책 외우느라 골치가 터질 것 같던 임새옥은 유씨의 누그러진 말투에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씨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열심히 하는 시늉 그만해라. 몇 개나 외웠을는지 모르겠지만, 골치가 다 아프게 시끄럽긴 하더구나.” 

임새옥은 헤헤 웃으며 유씨 곁에 다가가 앉아서 잘 보이려는 듯 머리를 주물러 드렸다. 유씨는 유소호의 옷가지도 챙겨야 하고 겨울을 날 옷에, 은자는 또 얼마를 가지고 가야 하는지, 집도 장만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만만한 금액이 아닌지라 걱정부터 앞섰다. 

“심 대인께서 우선 대인 댁에 묵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새해 명절이니, 곧 다시 돌아와야 하고요. 5월에 연근을 팔고 나면 상경할 돈이 생길 거예요. 집은 그때 사도 됩니다. 저 혼자 잘 고르지도 못하고, 괜히 돈 버리느니 어머니가 보고 사는 게 좋겠습니다.” 

유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 제 비위를 맞춰주고, 며느리도 알뜰살뜰 제 시중을 드니, 빙긋 웃으며 이 행복을 만끽했다. 고향을 등지고 떠났을 때만 해도 평생 아이, 손자를 무릎에 앉히는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리라 여겼었다. 그러다가 문득 낮에 너무 바빠서 잊어버리고 있던 중요한 일을 떠올리고는 임새옥의 손을 토닥였다. 

“됐다.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 너희들도 나가보렴.”

임새옥이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뜨거운 물을 준비하라고 영아를 부르러 나간 사이, 유소호는 유씨가 머리 장식을 벗는 걸 도와주고는 한쪽에 서 있었다. 모자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안색이 지극히 괴이했다. 

“이제 둘 다 나가보렴.”

유씨의 말에 영아는 남아서 그녀의 발을 씻겨 주었고, 임새옥은 유소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정원엔 밝은 달이 높게 떠 있었고, 환한 달빛이 바닥을 비췄다. 어느 집 아이가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건지, 카랑카랑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내일 가더라도 밥은 먹고 가야지. 지난번에 돼지머리 고기 맛있다고 했지? 내일 영아에게 사 오라고 해서 만들어줄까?” 

방에서 나온 후 유소호는 줄곧 말이 없었다. 처마 밑까지 가서 임새옥이 물어도 유소호는 그저 응,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피곤해서 그러는 것으로 여긴 임새옥도 더 묻지 않고 푹 쉬라고 당부하고는 자신은 손을 씻고 마당에 향안을 놓았다. 그날 맹세한 이래, 밤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줄곧 지켜왔던 일이었다. 중얼중얼 염불을 외운 다음 일어나려는데 마당 입구 그림자 사이에 누군가 서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가 꽥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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