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화 (20/57)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달이 지나고, 날씨가 추워졌다. 임새옥의 지도하에, 봄처럼 따듯한 유가 천막 안에 갖가지 채소를 심었다. 논에 심은 논벼도 묵직한 몸을 흔들어대며 무르익을 시기를 기다렸다.

한 달 동안 임새옥의 생활은 조금씩 호전됐지만, 유소호에게서 서신이 다시 오지 않아 걱정이었다. 그 넓은 오월 지역을 유소호 혼자 분주히 움직이다가 지칠까 싶기도 하고.

그날 저녁을 준비하면서 비스듬히 기우는 불같은 석양을 바라보고 넋을 놓고 있는데, 채소를 씻던 영아가 까르르 웃었다.

“부인, 또 소관인 생각하시는 거예요?” 

임새옥은 순간 얼굴이 저녁놀처럼 붉어져서 영아를 노려봤다. 돌아서서 솥에 기름을 부었더니 영아가 씻어 놓은 콩나물을 솥에 넣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식초, 소금을 넣고 볶았다. 

“부인, 역시 부인께서 만드는 음식은 제가 만드는 거보다 맛있어요. 냄새만 맡아도 향기로워요. 고기를 넣지 않아도 맛있네요.” 

영아가 부러운 듯이 하는 말에 임새옥이 빙긋 웃고는 다른 솥에서 찌는 만두를 살피러 갔다. 

“맛있고 말고는 고기랑 상관없어. 사실 간단해. 마음 써서 만들면 돼.”

영아는 시무룩해져서 입술을 내밀었다. 

“부인, 제가 시중을 잘 못 든단 말씀이세요?”

임새옥이 하하 웃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손으로 이리저리 옮기며 식혔다.

“이상한 소리 하긴! 내가 언제 네 이야기를 했어? 어리석은 사람은 쓸데없이 근심한다더니! 마음을 쓰라고 한 거야. 먹는 걸 좋아하고, 먹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맛있는지 자연히 궁리하게 되는 거야.”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 낭자, 유 낭자!” 

임새옥이 나가보니, 성내 소가 점포의 사환이 다급하게 외치고 있었다.

“소관인의 서신입니다.” 

임새옥이 받으려는데, 유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랑의 서신이 왔다고? 어서 이리 다오.”

임새옥이 깜짝 놀라는 바람에 서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몸을 돌리는데 유씨가 이미 다가오는 걸 보고 식은땀이 절로 났다. 서신 봉투에 ‘낭자, 보시오’라고 쓰인 걸 보면 분명 경성 과거에 관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환이 냉큼 주워서 유씨에게 건네려고 하자, 임새옥이 황급히 막았다. 

“어머니, 제게 보낸 서신이에요.” 

수줍은 표정을 지으려고 했는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기괴한 표정이 되고 말았나 보다. 유씨가 피식 웃었다.

“네가 글을 아니? 어미가 읽어주마.” 

유소호가 한동안 서신을 보내지 않아 유씨도 초조하던 참이었다. 그녀가 성큼 다가와 서신을 잡고 바로 뜯으려는데, 임새옥이 다른 쪽을 잡고 놓지 않았다. 고부 두 사람이 순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유씨는 몇 번 당기다가 임새옥이 이상한 표정으로 서신을 절대로 손을 놓으려 하지 않자, 순간 의아해져 얼굴을 흐리며 물었다. 

“혹시 내게 숨기는 게 있는 거니?”

시어머니에게 서신을 빼앗긴 임새옥은 초조해졌다. 교 장궤가 왜 목소리 높여 고함치면서 야단법석을 떠는 어리바리한 사람을 보낸 건지 원망도 들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드라마에서 적에게 비밀조직이 들킨 사람들이 비밀 편지를 한입에 삼켜 버리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설령 이 서신을 꿀꺽 삼켜 버린다고 해도 없던 일은 되지 않고 유씨가 더 의심하게 되리라.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으며 천천히 말했다. 

“어머니, 보, 보시고 화내지 마세요.”

이미 화가 나서 얼굴이 시퍼레진 유씨는 놀라고 두려웠다. 왜 이랑이 내게 서신을 쓰지 않은 걸까. 왜 이랑이 쓴 서신을 내게 감추는 걸까. 

아들이 아내를 맞았다고 어미를 잊었을까 걱정하는 건 물론 아니었다. 그보다 자연스럽게, 이랑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서신을 든 유씨는 파르르 떨며 봉투를 뜯었다. 숨이 가빠져서 뒷걸음질 치는데, 다행히 영민한 영아가 어느새 의자를 가지고 왔다. 유씨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읽었다. 임새옥은 서신을 가지고 온 사환을 배웅할 기분도 아니라서 영아를 불러 보내라고 한 후 마을 토박이 의원을 불러오라고 나지막이 말했다. 영아가 곧바로 쪼르르 달려갔다. 

유소호의 서신은 당연히 그동안 있었던 일에 관한 내용이었다. 벼를 구제하게 되면서 흥분된 마음, 임새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곧 집으로 돌아올 거라는 말. 며칠 지나면 병에 걸렸다고 유씨에게 서신을 쓸 거라는 말도 있었다. 새해에는 반드시 돌아와 함께 마주 앉을 수 있다는 말 등등.

유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멀리 나가 본 적 없는 아녀자라지만, 경성에 과거를 보러 간 거인들이 논벼를 구제하는 관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지막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더더욱 잘 알고. 

“얘야, 얘야, 너…….”

서신을 다 읽은 유씨는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임새옥을 가리킬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임새옥의 품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때, 영아가 헐떡대며 마을 의원을 데리고 들어왔다. 세 사람이 허둥지둥 유씨를 방 안으로 옮겨 침상에 눕혔다. 의원이 한바탕 침을 놓은 후에야 유씨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됐소.” 

의원이 땀을 닦으며 약상자에서 약초를 꺼내서 달여오라고 영아에게 건넸다. 의원은 임새옥의 감사 인사를 받은 후에 돌아갔다. 

방엔 고부 두 사람만 남았고, 한순간 아무런 말 없이 고요했다. 똑바로 누운 유씨는 멍한 두 눈에 눈물만 뚝뚝 흘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자랑으로 여기던 아들이었다. 밤마다 신령 앞에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관리가 된 관인이 있는데도 죽을 둥 살 둥 농사짓는 며느리를 남몰래 비웃기도 했다. 돈을 감춰놓고, 급하게 써야 하는 며느리에게 주지 않은 것도 다 아들이 위풍당당하게 돌아오면 상으로 줄 생각에서였다. 유가가 몰락했어도 아들의 체면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며느리가 이상한 표정을 짓더라니. 어쩐지 마을 사람들이 채소를 훔치고, 천막을 망가뜨리고 제멋대로 굴더라니. 돈을 밝히고 부귀한 사람을 귀히 여기는 노씨조차 전혀 자기를 경외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니.

혼자 아무것도 모르고 헛되이 좋아했던 것이로구나. 다른 사람들은 제 공연을 웃으며 보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다가, 친아들 생각이 났다. 

대랑, 나의 대랑아. 얼마나 말을 잘 듣는 아이였나. 한시도 마음 아프게 한 적 없는 아이였다. 

친자식이 아니면 모친의 마음을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건가. 친자식이라야 모친이 조금이라도 상심하는 게 마음 아픈 건가.

“대랑.”

나지막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유씨의 얼굴에서 비 오듯 눈물이 흘렀다.

임새옥은 유씨가 눈을 떴을 때 이미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유씨의 지금 심정이 어떨지 상상이 갔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이랑에게 미안했다. 이 정도 일도 제대로 못하다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진상을 알게 하다니.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이렇게 잔혹한 진상이 눈 앞에 펼쳐지게 하다니.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서 잔혹한 게 아니다. 아들의 기만이 잔혹한 것이다. 

유씨가 대랑을 불렀을 때, 임새옥은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유소호는 첩의 소생임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무너진 다음, 첩은 겁에 질려 세상을 떠났다. 유씨가 어린 그를 데리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고생, 고생 하면서 지금까지 키웠다. 그런데 지금 이런 때에 무심결에 친아들을 부른다는 것은, 제 아들에게 응어리가 생긴 것임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임새옥, 너 이걸 어떻게 되돌릴 거니!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이랑은 상관없어요. 이랑이 급제하지 못해서, 어머니가 슬퍼하실까 봐, 제가 그랬어요. 제가 이랑을 설득해서 속인 거예요. 이랑의 뜻이 아니에요. 이랑은 안 된다고 했어요. 어머니 몸이 너무 걱정되어서…….”

임새옥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유씨의 손을 잡고 목놓아 울었다. 

자고로 응어리는 풀기 어렵다. 군신, 부자, 부부, 형제, 어느 관계도 그렇다. 유소호, 임새옥 부부가 아무리 유씨를 위해도, 유씨는 유소호가 자기를 기만한 일 하나로 의심이 생겼다. 결국은 친어미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결국은 둘 사이에 벽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혈육 사이에 몸이 힘든 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은 집에 돈도 있고 땅도 있고, 생계 걱정이 없고, 다른 일은 더더욱 없으니, 유씨의 마음속에 그런 생각은 나날이 자라날 것이다. 

임새옥이 재차 고개를 조아리며 울며 말하자, 유씨는 한참 침묵하다가 일어나라고 했다. 유씨는 그저 됐다고, 이왕 다 알게 되었으니 어서 돌아오라고 하라고, 밖에서 고생할 것 없다고 말했다. 그러고 하루 누워있다가 다음날 바로 일어났다. 

아무런 일도 없는 것 같은 유씨의 모습에, 임새옥은 갈수록 조바심이 났다. 유소호에게 응어리가 생겼음을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서 더 조바심이 났다. 서신을 써서 유소호에게 알리고 어서 돌아오라고 재촉하면서 밤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불안해했다.

그날도 밤에 깨어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 병이 급하면 아무 의원이나 찾는다고, 천월한 이래 귀신 이야기를 믿게 된 임새옥은 일어나서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 탁자를 놓고 향과 촛불을 켠 다음 달 아래서 기도했다. 

유소호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유가 조상님께 송구하다느니, 시어머니 얼굴을 볼 면목이 없다느니, 더 할 말이 없어지자 매달 육식을 사흘간 금하고 매일 밤 향을 피우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니 유씨의 몸이 평안하고 더는 자기네 부부 일로 근심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시어머니 응어리가 빨리 풀려 모자가 처음처럼 화목하길 바란다고는 등등, 마음을 의탁한 후에야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도 들었다. 

시어머니는 마음이 식고, 며느리는 걱정하는 가운데 하루하루가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 한 달 넘게 흘러, 논에 벼가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시기가 되었다. 임새옥은 소작농을 모아 수확했고, 수확량을 끝낸 양이 여든여섯 섬에 이르렀다. 그 소식에 소작농들이 좋아서 넋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주 대인도 직접 달려와 볼 정도였다.

이 시기, 다른 곳 벼의 생산량은 한 묘에 고작 두 섬 수준이었다. 아무리 좋아도 넉 섬인데 유가가 처음 심은 논에서 이토록 놀라운 생산량이 나왔다는 소식에 주 대인은 믿을 수가 없었다. 

유소호가 오월 지대에서 명성을 떨친 것도 알고 있고, 그런 재주가 있는 유가라면 벼농사를 잘 지어도 이상할 게 없다지만, 이렇게 생산량이 늘 정도는 절대로 아니지 않은가.

주 대인은 관리를 죄다 불러 함께 십방촌 유가로 달려왔다. 도착해 보니, 이웃 여덟 현의 관리들도 모두 와 있었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높게 쌓인 곡식더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주 대인은 생산량을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수확하느라 바쁜 임새옥을 찾아가서, 성안현에서 널리 보급하기 전엔 절대로 다른 집에 볏모를 팔면 안 된다고 엄중히 다짐받았다. 그랬다간 어떤 죄명이라도 씌우겠다고 운운하는 말에 임새옥은 우습기도 하고 기도 막혀서 다시 한 번 장담해야 했다.

“대낭자, 이번엔 뭘 심을 생각인가? 아직도 연근을 심지 않을 생각인가? 어째서?”

주 대인의 시선이 임새옥의 손에 들린 종이로 향하자, 임새옥은 깜짝 놀랐다. 

현대에서 쓰는 간체로 쓴 건데, 이 노인이 보고 의심하는 건 아니겠지?

역시나 주 대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깜짝 놀란 그녀는 황급히 종이를 숨겼다. 

사실 임새옥의 완전한 오해였다. 번체는 청대 과거 시험의 표준 글자지만, 그전에는 글자를 자유롭게 썼다. 덕분에 다양한 서체가 많이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문인들은 간단한 글자를 쓰는 걸 좋아했다. 예를 들어 먼지 ‘尘(진: 번체는 塵)’자는 송나라 때 나타난 글자였다. 더 재미있는 건 깨뜨릴 ‘打(타)’자이다. 이 글의 독음은 원래 ‘ding’으로 본래 뜻은 ‘던져서 적중하다’인데, 송나라 초기엔 때리다 ‘撻(달)’의 간소체로 쓰였다. 

하지만 ‘打’자에 곧 새로운 생명이 생겨 만능동사가 되어 어디에든 쓰이게 되자, 구양수(歐陽修: 북송 정치가 겸 문인)는 매우 불만스러워했다는데…….

주 대인은 사실 임새옥의 글씨 때문에 웃은 것이었다. 임새옥의 글씨는 옛날 사람 눈에는 파리가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촌부인 그녀를 유소호가 이만큼 가르친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임새옥은 겸연쩍은 듯 웃으며 대충 적은 목록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연근은 내년 봄이 되어야 심을 수 있습니다. 땅을 그냥 비워놓을 수 없으니, 벼농사를 끝내고 건생(乾生) 채소를 심을까 합니다. 뿌리줄기나 가지 채소를 심을까 해요. 천막 채소와 함께 시장에 내놓으면 겨울에 분명 잘 팔릴 거예요.” 

주 대인은 연신 감탄하며 절대로 다른 현에 볏모를 팔지 말라고 또 한 번 당부하고는 서둘러 돌아갔다. 돌아가서 조정에 올릴 상주서를 쓸 생각이었다. 유소호가 재난을 구제한 공로를 거론할 것도 없이, 임새옥이 벼 생산량을 늘린 것만으로도 조정에서 중시하기 충분했다. 

주 대인의 더 큰 목적은 조정에서 유가에게 상을 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심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유가에 조건을 걸 때 더 자신 있게 걸 수 있으니까. 

주 대인이 모르고 있던 것은, 그가 상주서를 올리기 전에 유소호에게 상을 내리라고 오월 지역에서 올린 수많은 상주서가 빗발처럼 경성으로 날아갔다는 점이었다. 그 바람에 주 대인의 상주서는 묻히고 말았고, ‘벼 수확량 증가’라는 흥미로운 큰일을 황제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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