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쏜살처럼 흘렀다. 바쁜 나날이라 더욱이 그랬다. 눈 깜짝할 사이에 유소호의 과거 시험날이 보름 남짓 남았다. 그 사이, 임새옥은 전생과 현세 몇십 년을 다 합쳐도 이렇게 바쁜 적이 없다고 할 만큼 바쁘게 보냈다.
유소호가 떠나자마자 유씨가 쓰러진 것이다. 과하게 근심한 데다가, 밭에서 막 딴 채소를 먹고 밤에 찬 바람을 쐰 바람에 사나흘 동안 토하고 배앓이를 했다. 시름시름 앓는 시어머니의 모습에 임새옥은 부르튼 입술이 낫기도 전에 다시 부스럼이 났다. 막 벌어들인 은자 열 몇 냥을 몽땅 쓰고서 밤낮없이 열흘 시중을 든 후에야 유씨의 몸이 나았다.
그러는 동안 밭의 채소는 한창 신나게 자랐다. 마을 사람들이야 본 적 없는 새로운 채소이니, 임새옥이 일일이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천막 재료도 다 구해놓았다.
8월 보름이 지나고, 날씨가 서늘해져서 천막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농부들도 기다리고 구해온 일꾼들도 기다리고만 있으니, 임새옥은 밭과 집을 뛰어다니느라 보름 만에 생으로 살이 열 근이나 빠졌다. 두 눈에도 핏발이 가득 섰다.
유씨는 마음이 아파서 시녀 하나 두라고 여러 번 말했다. 며느리가 돈이 아까워 못 쓸까 봐, 제 쌈짓돈을 가져다 쓰라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돈 쓰는 데 아낌없는 임새옥은 시어머니의 손을 토닥이며 어머니 돈을 쓸 게 뭐가 있냐고, 어차피 집안 돈은 다 어머니 것인데 무얼 쓰든 같지 않냐고 그녀를 설득했다. 동의한다는 말이었다. 거간꾼을 시켜 사올까, 아니면 마을에서 고를까 고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이, 또 일이 터졌다.
논이 어떤 단계까지 발전하는지 지켜볼 일념인 임새옥은 아무리 바빠도 우량 모종을 심은 논에는 매일 가서 살펴봤다. 잘 자라고 있었는데, 하루는 평소처럼 살펴보러 갔다가 논에 흐릿하게 물곰팡이가 나타난 걸 발견했다. 놀라서 다른 논도 살펴봤다니 역시나 조금씩 그런 증상이 있었다. 바로 벼농사를 책임지는 농부들을 불러 어서 병든 모종을 뽑으라고 지시했다. 제때 발견한 덕분에 병해가 크게 퍼지지는 않았다.
사람이 쓸 약도 부족한 이 시대에, 어떻게 해야 농약을 만들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니 또 여드레가 흘렀다. 논과 채소밭을 둘러보고, 모든 게 평안한 걸 확인한 후에야 한시름 놓았다.
쑤시는 등허리를 두드리며 시녀를 구하는 일을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거간꾼에게 부탁하자니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서 걱정이었다. 마을에도 가난한 집 아이가 많았다. 집이 가난해서 다 커도 혼인할 수 없으니 그중 하나를 골라 시녀로 들이는 게 나을 듯했다. 노비로 입적하진 말고 생활고를 완화해주면서 자기도 집안일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어느 집 아이가 적당할지 손가락을 꼽으며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 하고 부르는데, 꽃무늬 홑옷을 입은 여자아이 하나가 물을 담은 대야를 들고나왔다. 그리고는 그녀를 보더니 바로 얼굴이 빨개져서 수줍은 듯 사촌 언니라고 불렀다.
“왔어요?”
임새옥은 한참이나 어리둥절하다가 누군지 깨달았다. 노씨 친정 쪽 어느 외숙모의 딸이니 촌수로 사촌 언니가 맞았다. 노씨와 몇 번 외가에 간 적 있는데, 이 여자애는 갈 때마다 있는 걸 보면 외가에 사는 듯했다.
임새옥은 한참 생각해도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그저 의아한 듯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씨가 왔냐고 웃으며 걸어 나와서 여자애를 슬쩍 밀었다.
“교아, 어서 밥해라. 네 언니 종일 침도 못 삼킬 정도로 바쁘게 일한단다. 담백한 탕을 좀 만들어라.”
노씨는 어찌 됐든 친딸인 임새옥이 요즘 정신없이 바쁜 것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임새옥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노씨가 원래도 남 눈치 보는 사람이 아니고, 요즘은 모든 게 순조로워서 자기가 했던 심술궂은 일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양, 아무렇지 않게 다시 유가를 드나들었다.
“어머니, 오늘은 한가해요?”
임새옥은 노씨가 웃는 것만 봐도 살이 떨렸다. 요즘 채소를 팔아 돈을 벌긴 했어도 시어머니가 병이 난 바람에 다 쓴 것을 떠올렸다. 마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노씨가 이런 때에 괜히 손 벌리면서 망신당하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교아라는 사촌 동생이 부엌으로 가는 걸 본 그녀는 서둘러 소매를 걷었다.
“우리 집에 왔으면 손님이지. 어서 앉아. 네가 일하면 어쩌니.”
임새옥의 말에 교아는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꼼지락거리며 슬쩍 노씨 눈치를 봤다. 노씨가 눈을 부릅뜨더니 금세 웃으며 임새옥을 바라봤다.
“손님은 무슨. 네 여동생 아니니. 마음껏 일 시켜라. 네 시어머니는 몸이 부실하고 넌 바쁘지 않니. 너도 알다시피, 교아 얘는 네 외할머니 집에 있으면서 별걸 다 배웠다. 네 외할머니가 널 아끼는 마음에 일부러 보내준 거다. 앞으로 집안일은 이 애에게 다 맡기면 된다.”
임새옥은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속으로 꿍얼거렸다.
사흘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다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네. 며칠이나 됐다고 또 와서 친척을 보내다니. 종으로 부리라는 건지, 모시며 떠받들라는 건지.
그녀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씨가 어느새 다가와 속삭였다.
“네 시어머니는 마음에 들어 하더구나. 난 집에 일이 있어서 이만 간다.”
그러고는 교아를 향해 손짓하며 언니를 잘 도우라고 당부하고는 후다닥 가버렸다. 하려던 말을 채 뱉지 못한 임새옥은 켁켁 기침하고는 교아와 눈을 깜빡이며 마주 볼 수밖에 없었다.
“언니, 밥하러 갈게요.”
임새옥의 시선에 더 난감해진 교아는 용기를 내어 말하고는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임새옥이 두고 볼 리가 있나. 앉으라고 권하고는 유씨와 이야기할 겨를도 없이 폴짝폴짝 부엌으로 먼저 들어갔다. 교아가 정신을 차려보니, 임새옥은 벌써 음식을 하고 있었다.
“교아, 어서 앉아. 멀리서 왔는데, 대접할 것도 없네. 형편이 어려워서 너무 힘들거든.”
임새옥은 바닥이 보일 정도로 멀건 죽을 밥상에 놓고는 자리에 앉은 유씨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 모처럼 동생이 왔는데 절임 채소 좀 꺼내도 될까요?”
유씨는 혀를 내둘렀다.
며느리가 연기하겠다는데 협조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녀는 탁자 저쪽에 앉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교아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손님이 왔는데 당연히 그래야지.”
임새옥이 돌아서서 가지러 가려 하자, 유씨가 헛기침을 하면서 이랑 줄 것은 남기라고 당부했다.
“언니, 언니네는 채소 농사짓지 않아요? 왜 이런 것만 먹어요?”
교아는 눈앞의 접시에 놓인 절임 채소 세 가닥을 보고 얼굴이 다 질려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임새옥이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고로, 신 장수는 맨발이고, 누에 기르는 사람은 옷이 없다고 한단다. 생계 때문에 채소 농사짓는 건데 아까워서 어찌 먹겠니.”
“언니, 가업을 이렇게 크게 하면서 어떻게 우리 집보다 더 못 먹고 살아요?”
임새옥이 몇 끼를 굶은 것처럼 두어 입 만에 탕을 다 마신 걸 본 교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하. 가업은 무슨. 땅도 누구 것이 될지 몰라. 일단 외상으로 사온 것이라서, 내년에 그쪽에서 원하는 연근을 넘기지 못하면 나를 팔아서라도 빚을 갚아야 할걸.”
교아가 억지로 웃어 보였다.
“언니, 초조해하지 말아요. 지금은 힘들어도 형부가 과거 급제하면 분명 좋아질 거예요.”
임새옥이 더 크게 웃으며 젓가락을 흔들었다.
“이랑도 현령 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공부하는 거지. 농사일은 몰라도, 공명은 팔자에 없단다.”
유씨야 연기인 걸 알아서 혼절하지는 않고 겨우 버텼지만, 안색은 교아보다 나을 게 없었다. 유씨가 젓가락을 탁 내려놓고 싸늘하게 말했다.
“아가, 얼른 먹어라. 할 일이 얼마나 많으냐.”
임새옥은 내심 웃으며 교아를 향해 혀를 날름하고는 서둘러 일어났다. 식사를 마친 후, 임새옥은 교아에게 앉아 있으라고 한 다음 쓸고 닦고, 옷을 기우고, 탕약을 끓여 내가는 둥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러는 중에 농부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이런저런 걸 물어보고 갔다.
교아는 갈수록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사이 유씨가 화항에 비스듬히 앉아 수시로 기침해대는 걸 보고는 더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겨우 날이 저물 때까지 버틴 교아는 돌아가 보겠다고 일어섰다.
“얘, 이왕 왔는데 며칠 더 있다 가지 그러니.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간다고.”
임새옥이 바느질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묻자, 교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모 댁에 가려고요. 할머니 곁을 떠난 게 처음이라 마음이 안 놓이네요.”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또 와서 저녁 먹으라는 말에 아이는 식겁해서 더 빨리 달아났다.
그때 노씨는 집에서 조삼랑과 아이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떠들고 있었다. 친정 사람을 어떻게 보살펴 주었네, 친정 식구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네, 이젠 더는 무시하지 않네, 하는 말에 조삼랑은 얼굴을 구기며 자기네 친척을 보내지 않은 것을 침묵으로 항의했다. 그러고 있는데 교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저아, 왜 돌아온 거니? 막 언니 집에 갔으면 부지런히 일해야지. 벌써 게으름 피우면 어쩌니. 앞으로 시녀가 많아지면 어련히 편안해질까!”
노씨가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하지만 교아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미처 치우지 않은 탁자 위의 만두를 집어 들고는 몇 입 만에 먹어 치웠다. 그리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고모, 수고스럽지만 얼른 집에 보내주세요. 저는 그 복을 감당 못 하겠네요. 딱 하루였는데, 배곯아 죽을 것 같아요. 신선이 사는 곳인 것처럼 말하더니 괜히 속아서 왔네요.”
노씨는 얼떨떨해져서, 유씨가 받아주기 싫어서 이상한 말을 해서 이러는구나 싶었다.
“네 언니 시어미는 입 없는 조롱박이라 집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 신경 쓸 것 없다. 넌 언니만 따라다녀. 욕 좀 먹는다고 어떻게 되니! 잘 먹고 잘살 기회를 버리면 안 되지.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을 다른 사람이 버느니 우리 집에서 버는 게 낫지. 네 언니다. 언니가 널 때리겠니? 다른 집 가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
연달아 만두 세 개를 먹은 교아는 손을 내저었다.
“할머니 앞에서 땅 자랑을 그렇게 하시더니, 알고 보니 외상으로 사온 거더라고요. 농부 열몇 명이 와서 이것저것 묻고 가던데, 채소를 그렇게 많이 심었다는데 밥상엔 하나도 없는 걸 보면 수확이 없는 거예요. 남에게 줘야 할 채소를 거두지 못하면 나까지 팔려 가면 어째요.
우리 어머니는 아들, 딸 하나 더 있는 고모랑 달라요. 우리 어머니에겐 나 하나뿐이에요. 언니 고생할까 봐 걱정되어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아이 많은 집 찾아서 보내세요. 우리 같은 사람 탐내지 말고요. 앞으로 내가 없으면 고모가 우리 어머니, 아버지 보살펴 줄 거예요?”
줄줄 이어지는 말에 노씨의 얼굴이 시퍼레졌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손가락질만 했고, 교아는 가차 없이 어서 수레로 바래다 달라고 조삼랑에게 말했다. 자기가 없으면 할머니가 잠을 못 잘 거라고 하는 말에 노씨가 욕을 퍼부어댔다.
“이 발칙한 계집, 말은 잘하는구나. 네 할미는 너희가 없으면 더 오래 살 게다. 안팎으로 장단 맞춰서 우리 집안 물건을 싹 쓸어갔으면서.”
교아는 나이가 어려도 입이 보통 독한 게 아니었고, 그 말에 휙 돌아서서 말했다.
“고모, 그런 말을 하다니요! 삼촌이 알고 화를 내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 노씨 가문 물건이 언제 조씨 가문 것이 된 건지 모르겠네요.”
노씨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달려가 때려주고 싶어도 이 녀석이 돌아가 허튼소리 해서 올케 앞에서 이간질할까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눈치 보며 사는 어머니를 위해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안 보는 게 속 편하겠다고 생각하며 어서 바래다주고 오라고 조삼랑을 재촉했다.
유가에서 부릴 시녀를 구한다고 들었을 때 노씨는 바로 눈독을 들였다. 딸이 소가에 노비로 있을 때 잘 먹고 잘 지내면서 달마다 월전도 받은 걸 떠올리고는 꽤 좋은 일거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러 친정에 사람을 보냈다. 이 김에 친정에 큰소리도 치고, 제 모친이 아들, 며느리, 친척들에게 기죽지 말고 조금 편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런데 큰소리치기도 전에 이렇게 화만 키울 줄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터지고, 어머니가 더 힘들게 지낼까 걱정이 되어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그리고 며칠은 유가에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새옥이 더 자유로워진 건 아니었다. 노씨 친정 질녀 일이 있은 후, 마을과 근처 마을 사람들까지 일제히 찾아왔다. 하루에 한 끼도 잘 못 챙겨 먹는 사람들이라 유가의 끼니를 타박하지도 않았다. 한순간 허름한 유가 마당에 사람이 넘치고,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사람도 있었다.
조 지보는 이때다 싶어 현령에게 유가를 고발했다. 유가에서 땅을 미끼로 양민을 노비 삼으려 한다는 고발에, 임새옥은 아역 두 사람에게 불려 성으로 들어갔다. 유씨는 며느리 걱정에 다 낫지도 않은 몸을 끌고 같이 가겠다고 나섰다. 임새옥은 유씨를 설득하다 할 수 없이 소작농에게 부탁해 수레를 구해서 문을 걸어 잠그고 고부 두 사람이 함께 현성으로 향했다.
현령이 부른다는 말에 유씨는 가는 내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임새옥은 당연히 위로했다.
“어머니, 걱정할 것 없어요. 별일 아닐 거예요. 이 현령 대인은 지극히 사리에 밝은 분이세요. 허튼소리를 들으신 거예요. 우리가 잘못한 게 없으니 걱정할 것 없어요.”
유씨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날, 네 시아버님도 이렇게 갑자기 불려갔다가…….”
임새옥은 헤헤 웃다가 웃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 표정을 가다듬고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 아무튼 안심하세요. 이번에 성에 들어간 김에 시녀 하나 구하면 어때요?”
유씨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그랬어야지. 형편이 넉넉하진 않지만 시녀 하나 부릴 돈은 있다.”
그녀는 임새옥이 준 돈을 가늠하며 말을 이었다.
“병에 걸려 돈을 쓰지 않았다면, 이랑이 돌아오기 전에 새집을 지었을 것을.”
이야기하는 사이, 성에 도착했고 관아를 찾아가 문지기에게 이름을 이야기했다. 통보하러 갔던 문지기는 금세 다시 나와 그들을 내당으로 안내했다. 못해도 공당(公堂)에서 몇 마디 들을 줄 알았던 임새옥은 의아해졌다.
왜 내원으로 가는 거지?
중문을 막 지나자, 도좌청(倒座廳: 사합원 구조에서 내당 맞은편 채. 사랑채)에서 녹색 비단 장포를 입은 젊은 사내가 나왔다. 유씨가 피하려고 다급하게 임새옥을 잡아끄는데 그 사내가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화저아냐?”
임새옥은 이런 젊은 사내가 어떻게 자기를 아는지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준수한 용모의 사내가 그녀가 고개를 들자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니 한때 주인이었던 소금남, 소 대관인이었다. 임새옥은 서둘러 다가가 손을 모으고 예를 올렸다.
“노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소금남이 대답하기 전에 주 대인이 안에서 나왔다.
“괜히 여기까지 오라고 했군. 사람을 보냈는데 역시 늦었어.”
주 대인이 웃으며 하는 말에 유씨는 허리를 숙여 아니라고 인사한 후 도좌청으로 들어갔다. 차를 마신 후에야 별것 아닌 일이 벌써 마무리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 대인이 조 지보의 말을 듣고 유씨 고부를 소환하는 사이, 소금남이 관사 두 명과 찾아와서 이곳에 점포를 연다고 문건을 올렸다. 남쪽에서 여러 해 관직에 있었던 주 대인은 당연히 소씨 가문을 잘 알고 있었다. 상인의 지위야 실로 아무것도 아니지만, 돈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법. 특히 소씨 가문처럼 발이 넓은 대상인은 주 대인도 소홀히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
한담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씨 가문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함께 일하는 사이이다 보니, 소금남은 당연히 임새옥을 좋게 말했다. 하물며 그가 생각하기에 그 아이는 절대로 경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유가와 자주 왕래해본 이 관사는 마을 사람들의 은원도 알고 있어서 한참을 설명했다. 주 대인은 당연히 화를 풀었고, 오히려 사람을 보내 지보 직에 최선을 다하고 사사로운 말다툼으로 일을 키우지 말라고 호통쳐서 조 지보를 훈계했다.
고부가 관리를 만나러 나왔던 여정은 차 한잔하는 시간에 마무리됐고, 유씨는 안도하며 임새옥을 데리고 물러나면서 다시 한번 소금남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시녀를 들일 생각이시라고요. 이 관사가 사람들을 좀 데리고 왔는데, 가서 골라 보시지요.”
소금남이 느긋하게 말하며 앞쪽 다루를 가리켰다. 유씨가 사양하자 소금남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 관사가 사람을 잘 봅니다. 연약한 여인들이 안심하고 부릴 만한 사람일 겁니다.”
소금남의 호의를 느낀 유씨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두 사람을 따라 다루로 향했다. 거간꾼 하나가 벌써 여자아이 열몇 명을 데리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씨는 하나하나 뜯어보고는 순박하고 튼실해 보이는 여자애를 골랐다. 임새옥은 줄곧 뒤에 조용히 서 있다가, 유씨가 결정한 후 거간꾼에게 돈을 건넸다. 이 관사는 앞다퉈 돈을 내려다가 소금남이 고개를 젓는 걸 보고 손을 거두었다.
“여기에 점포가 있으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와서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유씨 고부가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하자, 소금남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임새옥을 향해 느긋하게 말했다.
“네 연근이 참 좋더구나. 내년 치까지 다 정해졌으니 절대로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
임새옥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소금남이 더는 말이 없는 걸 보고 슬슬 돌아갈 때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물러나면서 살며시 고개를 들어 그를 힐끔 살폈다. 사내는 창가에 서서 손에 든 차를 마실 듯이 말 듯이 넋을 놓고 있었다. 휘장 너머로 햇살이 비치면서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난히 외로워 보이는 모습에 임새옥은 뜬금없이 이씨를 떠올리고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이 밝은 대낮에 목덜미에 찬 바람이 부는 듯해서, 화들짝 놀란 그녀는 문득 전가아는 잘 지내는지 물었다.
만난 이래 줄곧 유씨 뒤에 서서 고개도 숙이고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임새옥이 갑자기 큰 소리로 묻는 말에 소금남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돌아서서 그녀를 바라봤다. 1년 동안 못 보았지만, 조금 마른 것 말고는 그날 방에서 이씨에게 소개받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씨를 떠올린 그는 마음이 아파서 잠시 대답하는 것을 잊었다.
소금남이 대답도 하지 않고 표정도 이상한 걸 본 임새옥은 가슴이 조마조마해졌다.
설마 이씨가 꿈에 나타나 전가아를 당부한 것이 까닭 없이 꾼 꿈이 아닌가? 소금남이 전가아를 잘 돌보지 않나?
그녀는 오늘 제대로 당부하지 못하면 이씨가 또 꿈에 나타나서 놀라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유씨가 눈치 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다가갔다.
“노야, 부인께서 안 계시는데 이렇게 멀리 출타하셨잖아요. 전가아는 누가 돌보고 있나요?”
지금 노야를 질타하는 것인가?!
이 관사와 유씨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당돌한 물음이었다. 남의 집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어디 시녀가, 그것도 예전 시녀가 따져 묻는단 말인가.
소금남은 그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여자애의 초조한 얼굴에, 이 아이는 성실한 아이라고 이씨가 몇 번이나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고작 반년 정도 밑에 있었을 뿐인데, 이씨가 세상을 떠난 걸 알고 이토록 아들 전가아를 마음 써 주는 것이 고마웠다.
“외조모에게 맡겼다. 그 아이 외숙이 수시로 서신을 보내주고. 전가아는 잘 지낸다.”
그리고는 다시 덧붙였다.
“마음 써주어서 고맙구나.”
임새옥은 그제야 안도했다. 이용이 황당한 사람이긴 해도, 이씨와 사이가 좋은 건 알 수 있었다. 전가아가 그 집에 있다니 분명 잘 지낼 것이란 생각에 속으로 부처님을 부르면서 이씨가 다신 찾아오지 않길 바랐다.
다만 소금남의 고맙다는 말에 너무 부끄러워서 허둥지둥 유씨를 따라 밖으로 나갈 뿐이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조 지보는 훨씬 조용해졌다. 그리고 유가에서 시녀를 산 걸 보고 마을 사람도 마음을 접었다. 유가의 살림살이는 논의 벼처럼 나날이 윤택해졌다.
새로 들인 시녀의 이름은 영아(英兒), 올해 열넷, 임새옥과 비슷한 나이였다. 그녀 역시 가난한 집 아이로 부모가 죽은 다음 본가 삼촌, 숙모에게 팔려 갔다. 착실하고 몸은 재빠른데, 단지 음식 솜씨가 별로였다. 하지만 그것만 해도 임새옥은 훨씬 수월해져서 하루 두 끼를 제외하고는 더 많은 시간을 밭에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벼는 무럭무럭 자랐다. 임새옥은 생산량을 높일 수 있길 기대하며 서서히 이런저런 시험을 했다. 천막도 잘 지어져서 농부들은 밭을 갈고 임새옥의 지시에 따라 거름을 뿌렸다. 노천에 심은 가을 채소도 갈수록 환영받았다.
연근으로 현령을 접대할 기회를 잡은 취풍루는 명성이 크게 높아져 성괴루를 압도하고 일약 성안현 최고의 주루가 되었다. 취풍루 오 장궤는 유가 채소를 재물신으로 여길 지경이 되어 채소를 다 사들이고 싶어 안달이었다. 다른 주루도 당연히 뒤처지고 싶지 않아 했고, 돈 많은 집에서도 명성을 듣고 수시로 찾아와 채소를 사 가는 등, 사방에 십방촌 유가 지주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유소호가 심은 노씨네 배추, 무, 시금치도 금세 불티나게 팔려서 노씨는 웃음꽃이 피었다. 빚쟁이들이 찾아와 성가시게 하는 것 말고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채소를 심은 다른 집도 수확이 많았다.
그 바람에 연근을 배정받은 농가들은 초조해져서 임새옥만 만나면 언제 연근을 심냐고 물어댔다. 내년 봄이라는 설명을 들은 농민들은 얼굴을 구겼다. 그럼 1년 동안 헛수고하는 게 아닌가. 벼는 그들 눈에 평소에 심는 좁쌀 같은 존재였다. 생산량도 얼마 되지 않는 벼를 바라보며 마을 분위기는 단숨에 바뀌었다.
연근 농사짓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걱정만 하던 채소 농민들은 가슴을 활짝 펴고 연민의 눈빛으로 논을 바라봤다.
이번 가을에만 심고 말 게 아니잖아!
주인이 그러는데, 겨울이 되면 천막 채소 농사를 시작한다고 했거든.
계속 심을 수 있고. 계속 팔 수 있다고 했어.
유가에서 돈을 거의 걷어가지만, 남는 돈도 예전보다 훨씬 많아!
한순간 사람들은 유가의 소작농이 된 걸 복으로 생각했다.
조 지보조차 사람들이 비웃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밭에 채소를 심고 유가를 흉내 내서 천막을 지었다. 사람하고 원수졌지, 돈하고 원수진 건 아니니까 말이다.
날씨가 차츰 선선해졌을 때, 유소호의 서신이 도착했다. 막 집으로 돌아온 임새옥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유씨를 보며 깜짝 놀라 무슨 일인지 물었다.
시녀 영아가 차를 올리며 말했다.
“기쁘셔서 그래요. 노야가 급제하셨대요!”
임새옥은 깜짝 놀랐다.
유소호가 급제했다고?
그거야말로 유가 조상 묘에 푸른 연기가 날 일이네!
유씨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읽었더니, 정말로 주시를 통과했고, 내년 봄 성시를 준비하려고 경성에 남아야 해서 돌아와서 새해를 보내지 못하니 불안하다 등등이 적혀 있었다.
“얘야, 이랑이…….”
유씨는 우느라 말을 잇지 못하며 임새옥의 손만 덥석 잡았다. 임새옥 역시 놀라고 기뻤다. 뭐가 어찌 됐든, 그 당시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 같았다. 그날 기뻐하던 부모님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고부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고 같은 눈물을 흘렸다. 어서 조상님께 향을 피우자는 영아의 말에 두 사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모든 일을 끝내고도 아직 차분해지지 않은 유씨가 임새옥을 불렀다.
“아가, 이제 이랑이 거인이니, 사 둔 땅에 집을 짓자꾸나. 내년에 관직을 받고 돌아올 텐데, 궁색하면 안 되지.”
임새옥은 대답하고는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가 이상한지 콕 집어 말할 순 없었다.
유씨는 그동안 모은 돈을 꺼냈고, 임새옥은 성으로 가서 장인들을 모셔왔다. 유씨는 새카맣게 몰려든 사람들을 마당에 세우고 일을 안배했다. 임새옥은 건물 짓는 일은 잘 알지도 못하고 밭에 사람이 있어야 해서 나가야 하는데, 유씨가 걱정이었다. 여인인 데다가 몸도 좋지 않아 오래 지키고 있을 수 없으니, 임새옥은 조삼랑에게 부탁했다. 수고비도 주겠다고 약속하자 노씨는 몹시 기뻐하며 뭘 그런 걸 다 주냐며, 딸이 집을 지으면 내가 짓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며 조삼랑을 재촉했다. 그렇게 길일을 골라 고사를 지낸 후, 떠들썩하게 첫 삽을 팠다.
이날 임새옥이 논을 돌보는데 영아가 사환 하나를 데리고 허둥지둥 나타났다.
“집에서 노부인 챙기지 않고 여기엔 왜 왔어?”
임새옥이 기슭으로 올라가 치마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영아가 빨리 뛰어오느라 헐떡이며 대답했다.
“노부인은 새집에 계세요. 여기 이 사람이 노야의 서신을 가지고 왔대요.”
임새옥은 의아한 눈으로 사환을 바라봤다. 다루의 점원 같은 그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복잡한 곳에 노부인 혼자 두고 오면 어쩌니. 이랑의 서신이면 노부인께 드리면 되지. 내게 가지고 와서 무얼 해.”
“소낭자, 꼭 소낭자께 직접 드리라고 소관인이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말하며 서신을 건넸다.
“나?”
임새옥은 젖은 손을 옷에 닦았다.
내가 글을 아는 걸 유소호가 언제 알았지? 그 애가 적은 문장을 뒤에서 보고 웃었을 때?
서신을 열어보니, 유소호의 글씨가 맞았다.
‘낭자, 직접 보시오.’라는 글에 절로 얼굴이 붉어져 슬쩍 돌아서서 열어보았다. 얇은 종이에는 짧은 글 한 줄뿐이었다.
‘서신을 보면 성안현 남향 거리 다루로 와.’
“누가 서신을 준 거니?”
임새옥이 아연실색해서 사환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야 유 소관인이지요. 우리 가게에도 운 좋게 여기 채소가 있거든요.”
사환이 잔뜩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