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 십방촌 농경지 세부 계획
며칠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우중충한 날이 지난 후, 날씨가 차츰 서늘해졌다. 유씨네 마당 한쪽 담장 가득 타고 올라간 조롱박이 푸릇푸릇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씨는 편안한 배자를 입고 조롱박 덩굴 아래 앉아 바느질 바구니를 끼고 신발 천에 수를 놓고 있다가 임새옥이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무더위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덥다. 더위 먹을라, 조심해라.”
임새옥은 큰 종이를 들고 새로 사 온 갖가지 씨앗을 대조하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어머니도 가서 보세요. 이랑이 채소를 한 묘 심었거든요. 감람(甘藍: 양배추), 대파, 마늘, 파채(시금치), 순무랑 무도요. 이제 가지랑 미나리만 있으면 될 것 같아요.”
“난 됐다. 사람이 많아서 이리저리 치이더라. 괜히 보태지 않으련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새옥이 후다닥 달려나가자, 유씨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한참을 넋을 놓고 신발 천을 내려다봤다. 부부 두 사람은 해가 완전히 저물고서야 웃고 떠들며 돌아왔다. 둘은 밥상머리에서도 유씨의 식불언 법도를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 땅엔 무엇을 심고 저 땅은 누구에게 줄 것인지 수시로 상의했다.
십방촌의 땅은 지보의 것을 제외하고 모두 유씨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잠시 소작인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유가와 사이가 좋지 않을뿐더러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 던지는 짓도 했었으니 말이다. 그 원망으로 땅을 회수해가기라도 하면 목숨이 달린 일이니, 사람들은 차륜전(車輪戰: 번갈아 가며 공격하는 전법)을 벌이듯이 유가를 드나들었다. 다행히 유소호가 지금처럼 농사지으면 된다고 표명하면서 소작료는 예전보다 1할 적게, 나머지는 가을이 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하니 드디어 잠잠해졌다.
그리 많지 않은 가을 곡식을 거둔 후, 마을 사람들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낯선 사람을 잔뜩 거느리고 밭을 측량하고, 유소호는 지필을 들고 수시로 무언가를 그리고 쓰더니 분산된 땅을 금세 하나로 잇고 강물을 끌어왔다.
임새옥이 연근을 심었다는 것을 다 아는 마을 사람들은 바로 당황했다. 농사를 더 짓지 못하게 되자 일제히 조 지보 집에 모여서 현령 나리를 찾아가겠다고 울고 불었다.
조대산 역시 너무나 급작스러운 변화에 분노하고 원망하던 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애걸복걸 애원하던 외지인 고아와 홀어미가 어떻게 갑자기 십방촌의 지주가 된 것일까. 자신도 제가 소유한 땅이 없었다면 그 역시 유가의 소작농이 되었을 것이다.
그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데, 마을 주민들이 난리를 부리려고 하자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는 사람들을 더 부추긴 다음 현령에게 데리고 가 고변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유가에서 연근을 심을 소작농을 구하기 시작했다. 수확의 1할을 소작농의 몫으로 주겠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야단법석이 났다. 연근의 값어치를 이미 잘 보지 않았나.
조삼랑이 고작 한 광주리를 석 관전에 팔지 않았던가. 그보다 더 잘 재배하면 이문이 더 많이 남을 테니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고!
이렇게 좋은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되면 조상님께 감사 인사를 고할 시간도 없는데 관아에 고발할 겨를이 어디 있을까.
임새옥은 일고여덟 집을 골라 강가의 땅 열 묘를 나눠주고, 나머지는 동촌으로 배정했다. 유소호는 씨앗을 가지고 채소를 심었다. 가을부터 쭉 심어 나갈 예정이었다.
며칠 동안 자재를 구매하랴, 천막을 세우랴 정신없이 바빴다. 마을 사람들은 유소호를 따라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대부분 못 알아들었지만, 이 채소를 잘 심으면 예전보다 곡식 수확이 좋아질 거라는 것만 알아들었다.
조대산이 뒤에서 기운 빼는 말을 해댔지만, 마을 사람들은 현령에게 인정받은 유소호를 믿고 모두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조삼랑과 노씨는 직접 찾아와 몇 번 난리를 부렸다. 처음엔 좋은 밭을 고르겠다고 난리였고, 나중엔 소작료는 내지 않겠다고 억지를 썼다.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촌 일대를 지정해 주었다.
잘되든 아니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고 소작료도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노씨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위 뒤를 졸졸 쫓아다니며 시끄럽게 굴다가, 유소호가 직접 밭에 채소를 심어 준 후에야 입을 닫았다. 그러고도 뒤에서 좋은 소리를 하진 않았다. 행여 먹을 수도 없는 이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유가에서 먹여 살려 줘야만 한다느니 하는 말에 다들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혹시 진짜로 잘 안 되면 임새옥이 그녀와 또 한바탕 싸우고 나서야 끝날 것 같아서였다.
바쁘게 가을을 보내고 7월 하순이 되어 강녕부 소가에서 보낸 벼 모종이 약속대로 도착했다. 유소호와 임새옥은 발에 땀이 나도록 바쁘게 움직이며 사람들을 데리고 강가 쪽 밭으로 가서 모내기를 시작했다. 십방촌은 한 번도 벼를 심은 적이 없던 터라, 한순간 십방촌 인근 마을의 사람들까지 모두 몰려와 구경했다. 새해에 성내에서 열리는 묘회(廟會)보다 더 떠들썩해졌다.
유소호는 인공으로 만든 논에 농사꾼을 직접 데리고 내려갔다. 임새옥의 생각대로 만든 논으로, 연근을 심을 때가 아직 멀었고 땅을 놀릴 수 없으니 논벼를 심기로 했다. 그다음에 연근을 심고, 연근을 수확한 후엔 수생 채소를 한 번 더 심을 생각이었다.
임새옥은 농사를 일으킬 생각에 유소호의 서재 겸 내실에서 신이 나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이야기했고, 유소호도 큰 소리로 웃었다. 임새옥의 기쁨에 유소호 역시 감염되어서 의문스럽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성공하지 못한대도 무서울 게 뭐란 말인가. 이런 과정의 즐거움만으로도 충분했다.
농부들은 유소호의 모내기 시범을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밭머리에 서 있던 임새옥 역시 여인이라는 신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바짓단을 걷어붙이고 논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러면 안 돼. 너무 느려. 내가 하는 걸 봐요.”
임새옥은 모종을 들어 올리더니 휙 내던지듯 논에 한 줄 한 줄 흩뿌리며 설명을 이었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게 한창 떠들썩한데 징, 북소리가 들리면서 현령 주 대인까지 행차했다. 사람들이 허둥지둥 엎드려서 예를 갖추느라 밭머리가 더 비좁아졌다.
주 대인은 유소호 부부에게 예를 갖출 것 없다고 하고는 그냥 와 본 것이니 계속하라고 했다. 유소호는 남아서 주 대인과 이야기를 나눴고, 임새옥은 모종을 논에 던지는 법을 농부에게 가르쳤다. 농부들은 처음엔 조심조심하더니, 몇 번 던져 보고는 마음 놓고 던지기 시작했다. 한순간 논에 모종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모습에 밭머리에 있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 드문 방법이군.”
주 대인이 말했다. 남쪽에서 관리 생활한 적 있으니 어떻게 논벼를 재배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도 되는 겐가? 지역이 다른데, 이리해도 모종이 상하지 않겠는가? 모종을 버리면 안 되지.”
주 대인이 의문이라는 듯이 묻자, 유소호가 웃으며 서둘러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선친께서도 전에 이야기하셨고, 소생도 서책에서 보았습니다. 안심하십시오, 대인.”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임새옥은 우량 모종을 직접 다 심고서 기슭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자기가 사 온 보통 모종을 모두에게 나눠준 다음, 유소호는 주 대인을 모시고 깔끔한 곳으로 가서 쉬었고 임새옥은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왔다.
들어가 보니, 주 대인이 화가 났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고 유소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조씨, 자네들은 내가 돈을 내지 못할까 봐 연근 기술을 강녕부에 넘긴 겐가? 이곳의 백성을 위해서라면 집을 팔아서라도 자네들에게 줄 돈을 모았을 걸세. 이 기술을 이곳에 남기기 위해서라면 말이네.”
주 대인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 대인이 화를 낼 만도 했다. 땅이 부족해서 ‘청우의 고향’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고 임새옥이 말한 이래, 주 대인은 그 생각을 접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 않아 십방촌에서 조기 연근 재배 기술을 팔았다는 소문이 성안현에 자자했다. 내년이 지나면 강녕부가 조기 연근이 자라는 유일한 산지가 될 것이라고.
주 대인이 반신반의하며 조대산을 불러 물었더니 과연 사실이었다. 조대산은 소가에서 많은 돈을 내고 유씨 손에서 기술을 얻었다고도 말했다. 계약도 맺었으며, 앞으로 이 가난한 현에 살지 않고 온 가족이 강녕부로 옮겨간다더라, 하고 말하자 주 대인은 화가 나서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임새옥이 그 말을 듣더니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대인, 진정하세요. 제 말씀을 들어보세요. 절대로 돈이 탐나서 그런 것이 아니랍니다. 이 연근 재배 기술이랄 게 특별할 것이 하나 없어서입니다.”
그녀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만물엔 저마다 규칙이 있어서 땅에 따라 알맞게 해야 합니다. 제가 인위적인 기술로 연근을 이르게 재배해냈다지만, 2년만 지나면 대단한 기술이 아니게 됩니다. 그런 때가 오면 우리 북방은 남방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곳이야말로 연근이 많이 나는 곳이니까요.”
그랬다, 농민의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농업을 발전시켜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그녀, 임새옥은 그저 미리 알고 있던 지식을 적절히 썼을 뿐이다. 그녀가 시작한 이상, 이 기술은 금세 빠르게 이 세상에 퍼질 것이다. 농업 기술을 통제하는 건 돈을 벌 장기 계획이 아니었다.
주 대인은 어느새 안색이 누그러져서 속으로 쉴 새 없이 ‘땅에 따라 알맞게 해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너무 통속적이면서도, 너무 적절한 말이었다. 그는 눈앞의 나이 어린 부인을 바라봤다. 나이 어린 부인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연근 값어치가 지금은 지극히 높습니다. 대인께서 널리 퍼트리려고 하면 각 마을 농부들이 모두 심으려 하겠죠. 첫해에는 어쩌면 모두 돈을 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음 해부터는 강남의 물가 쪽 마을에서 분명 따라잡을 겁니다. 그곳은 하늘, 토지, 다 갖췄고 긴 세월 재배해온 기술도 있으니까요. 우리 성안현은 절대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연근의 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가격은 떨어지겠지요. 대인, 그렇게 되면 이곳이 어떻게 될지 상상이 가시지요?”
주 대인은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 벌떡 일어나서 임새옥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몸을 피했다.
“대인, 소인을 죽일 셈이십니까.”
주 대인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경솔했네. 오월 일대에 몇 년 동안 가뭄이 들어 기근이 심각하네. 조 대인3)이 사방으로 식량을 마련하고 있는데 나는 하마터면 밭을 망칠 뻔했어. 자네들 부부보다 백성들의 사정을 통찰하지 못하였네. 게다가 돈을 좇는다고 두 사람을 의심하다니, 실로 면목이 없으이.”
유소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인께서 두 번이나 십방촌에 오신 것만 해도 백성들의 사정을 얼마나 마음 쓰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가 억울할 일도 아닙니다. 어찌 됐든 이것으로 땅을 벌었으니까요. 돈을 탐한다는 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농사지으려면 돈이 필요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대인.”
그 후로 응어리가 풀린 양측은 매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임새옥은 논에서 모종을 던지며 신이 난 농부들을 가리키며 웃었다.
“선황제 폐하께서 벼농사를 대대적으로 보급하셨다고 관인에게 들었습니다. 단지 우리 북방은 줄곧 생산량이 많지 않다기에 제가 한 번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성공하면 가장 먼저 대인께 알리겠습니다. 그럼 우리 현에 널리 퍼트려 주세요, 대인. 이건 절대로 다른 곳에 팔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다들 껄껄 웃었다. 주 대인은 유소호에게서 생산량 이야기를 듣고 갈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생산량을 늘리는 일, 이건 많은 농사꾼을 모을 일이고 또 조정의 상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일이었다.
주 대인은 유소호에게 글공부는 어찌 되어가는지 물은 후에 돌아갔다. 가는 내내 이 일을 당장 위에 보고해야 할지 당분간 거론하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바쁜 일을 끝낸 임새옥은 조금 한가해진 반면, 유소호는 천막 채소 일로 바빠져서 매일 해가 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글공부는 당연히 예전만큼 부지런히 하지 못했고, 유씨의 얼굴도 점점 더 안 좋아졌다.
이날, 어린 부부가 밥상 앞에서 재잘재잘 떠는 걸 본 유씨는 젓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호통쳤다.
“아가, 따라오너라.”
갑자기 안색이 변해버린 유씨의 모습에 유소호와 임새옥 모두 깜짝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무슨 일로 화가 나신 걸까. 잠시 생각하던 유소호는 바로 깨닫고 임새옥에게 눈짓을 보낸 후 재빨리 글공부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따라 들어간 임새옥은 유씨가 조상님 위패를 모신 곳 앞에 앉은 걸 보고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벌을 주세요, 어머님.”
그녀가 이렇게 눈치 빠르게 굴 줄 몰랐던 유씨는 호통치려던 말이 오히려 나오지 않아서 잠시 말이 없었다.
“네가 무얼 잘못했느냐? 따지고 보면 우리 가문은 다 네 덕에 입신양명할 근본이 생겼지. 고마워해도 부족할 것을.”
임새옥도 속으로는 그건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당연히 입에 올리진 않고 고개를 숙였다.
“어머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랑이 아니었다면 제가 이런 걸 다 어떻게 알았겠어요. 진작 그 바보와 얼렁뚱땅 혼인했겠지요. 유씨 가문은 임…… 조화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조화, 몸 바쳐 일해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유씨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다행히, 이 아이가 제 어미를 닮지 않아 도리를 아는구나.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싸늘했다.
“그런 말은 가당치 않다. 유씨 가문에 들어왔으니, 너는 이제 평생 우리 유씨 사람이다. 잘 되면 같이 잘 되는 것이고, 실패하면 같이 실패하는 것이다.”
임새옥은 옳은 말씀이라고 대답했다. 유씨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우리 유씨 가문은 대명부(大名府) 사람이다. 가문이 우리 대까지 이어지면서 고귀하다고 할 순 없으나 대명부에서는 그래도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가문 땅이 만 묘에 이르고 지극히 부유했지.”
왕년에 호의호식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기를 떠올렸는지, 유씨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눈빛이 아련해졌다.
처음 듣는 유씨 가문의 옛이야기에, 임새옥은 큰 흥미가 생겨 아예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씨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문의 자손이 매우 번성했는데 이랑의 아버지만은 유가의 독자였다. 이랑의 할아버님이 처첩을 무수히 들였는데 자식을 하나밖에 얻지 못하셨다.
이랑의 대에도 겨우 형제 둘뿐이었다. 식솔이 단출했지.
유씨 가문에 조정의 관리는 없었지만, 선행을 베푼 것만으로 현지에서는 명망 높은 가문으로 떠받들어졌다.
조상님으로부터 내려온 법도를 지키면서, 아무리 집안이 부유해도 자손들은 흥청망청 살지 않았다. 누구나 직접 밭에 내려가 일했고, 유가 자손의 농사 솜씨는 대명부에서도 손에 꼽혔다. 이랑만 봐도 잘 알 것이다. 고작 대여섯 살에 직접 밭에 내려가 농사를 지었다. 보는 것만으로 많은 걸 깨우쳤지. 특히 네 시아버님은 조정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다들 ‘토지 나리’라고 불렀다. 그분의 정교한 솜씨와 어진 마음을 찬양한 것이지.”
살포시 한숨을 내쉬는 유씨의 눈가에 한 줄기 눈물이 서서히 흘렀다.
“부귀는 꿈 같다고 옛말에 그러지 않더냐. 그 꿈이 너무 돌연히 깨지더구나. 벼슬을 하지 않으니 은원이나 이익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재난이 들이닥칠 줄 누가 알았겠니. 왕 대상공이 황제를 부추겨 신법을 시행한 다음에 집안의 땅이 그대로 사라졌다. 돈 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네 시아버님은 그 화를 참지 못하고 대랑을 데리고 관아에 고발하고자 경성으로 향했다. 그런데 권세에 빌붙는 앞잡이니, 호가호위하는 놈이니 소리를 들으며 투옥되었다. 부자 두 사람은 매를 맞고 이틀 만에 그 안에서 죽었다. 집안의 은자는 탕진했고, 우리 모자가 찾아가도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다…….”
유씨는 이내 얼굴을 묻고 통곡했다.
“가련한 대랑, 겨우 열세 살이었다. 막 정혼했을 때였는데…….”
임새옥도 코가 시큰해져서 유씨를 따라 눈물을 흘렸다.
부귀했던 사람이 갑자기 지옥에 떨어졌으니 견디기 어려웠겠지. 이 가련한 모자가 어떻게 견뎌냈을까. 가련한 이랑,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으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든 뒤에서든 항상 웃고 지냈다니.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다가, 아예 목 놓아 같이 울기 시작했다.
고부 두 사람은 한참 그렇게 울다가 역시 유씨가 먼저 눈물을 거두고 말을 이었다.
“가족들이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다. 다 사라졌다. 가련한 우리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평범한 백성일 뿐이라 관리들에게 따질 수도 없었다. 아가, 어찌 내 대에서 가문이 무너지는 걸 보겠니. 죽어서 어찌 조상님 얼굴을 보라고. 다행히 핏줄 하나 남았다.
나는 이랑이 다시는 농사짓지 않길 바란다. 만석 재산이 있으면 무얼 하겠니. 나는 그 아이가 학문을 해서 공명을 얻길 바란다. 열 조상을 빛내길 바란다.
아가, 유가 핏줄은 농사 솜씨를 발휘하는 걸 좋아하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이 시어미가 이렇게 비마. 그 아이를 그 길로 끌어들이지 말아다오. 학문에 정진하여 공명을 얻을 수 있도록 해다오.”
유씨가 임새옥을 향해 털썩 무릎을 꿇자, 임새옥이 기겁하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어머님,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어서 일어나세요. 어찌 감당하라고 이러세요.”
임새옥은 연신 유씨를 부축해 의자에 앉혔다.
“땅이며 돈이며, 네가 어찌 쓰든 난 관여하지 않으마. 이랑을 설득해서 글공부에 전념하게 해다오. 장원이 되면 우리 유가가 널 떠받들고 사마.”
유씨가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에 임새옥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어머님, 안심하세요. 앞으로 일은 다 제가 할게요. 이랑은 글공부만 하면 돼요. 다시는 밭에 얼씬도 못 하게 할게요.”
“이랑이 너와 혼인 잘했다는 걸 안다.”
유씨가 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랑이 장차 과거에 급제하면 너도 봉황하피(鳳冠霞帔)를 하고 고명(誥命)을 받을 것이다. 밭 갈고 농사짓는 것보다 훨씬 낫지…….”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서 농처럼 물었다.
“어머니, 이랑이 급제하지 못하면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씨가 눈을 까뒤집더니 혼절하려 하자, 임새옥이 겁에 질려 고함치면서 서둘러 인중을 눌렀다. 유소호도 기척을 듣고 달려 들어왔다.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유씨를 침상에 눕히고 쓰다듬었더니 한참 만에 숨을 돌리고 깨어났다.
유씨가 유소호의 손을 붙들고 애원했다.
“이랑, 급제해야 한다. 급제해야 해. 네 아버지와 형의 원한을 풀어야 해……. 그래야 이 어미가 안심하고 눈을 감는다…….”
유소호는 눈물을 글썽이며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임새옥은 행여 유씨를 다시 자극할까 봐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소호를 힐끔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소호의 능력으로 급제할 가능성은 너무나 희박했지만, 그런 말을 다시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유씨가 살아갈 희망을 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새옥은 유소호에게 눈짓하고 마당으로 나가서 이야기했다.
“곧 시험 날이 되어가니 글공부에 정진하도록 해. 밭엔 내가 갈게.”
임새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생각이 있으면 내게 말해. 시키는 대로 할게. 그럼 네가 하는 거랑 같으니까. 어머님이 걱정할 일도 없고, 좋잖아.”
유소호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임새옥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리해 주었다.
“그럼 고생해. 가을에 심은 채소를 내다 팔면 집을 새로 지을 생각이야.”
보드라우면서도 살짝 거친 그의 손길에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고개를 들었더니 마침 유소호의 어깨춤에 시선이 닿았다. 밤바람이 살며시 불어오자, 특유의 청향이 코를 간질였다. 간지러워져서 이마를 짚으며 그 핑계로 그의 손길을 피했다.
“수고라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인데.”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지는데 유소호가 손을 잡았다. 순간 얼굴이 불에 덴 듯이 달아올라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우리는 부부잖아. 그렇게 체면 차리면 내외하는 것 같아.”
유소호가 미소 지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달빛 아래, 그녀의 작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고 눈빛이 반짝이면서 소녀 특유의 청향이 살랑살랑 느껴졌다. 손에 잡힌 살결이 사내와 달리 부드러워 가슴이 두근거리자, 유소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소년의 감정이 처음으로 싹튼 것이고, 임새옥도 처음으로 마음이 동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에 서툴렀다. 날이 더워 얇은 옷차림인데 이렇게 가까이 마주 서니 불에 덴 듯했다. 갑자기 품에 안긴 임새옥은 머릿속이 쿵 하고 울렸다. 갑자기 유소호가 고개를 숙이더니, 두 입술이 곧 맞닿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놀라서 어머, 하고 외치며 그를 밀어냈다.
미처 방어하지 못하고 넘어진 유소호는 임새옥이 얼굴을 가린 채 방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잠그는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자기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바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얼굴을 씻은 후에야 방으로 들어갔다. 서책을 들어도 눈앞이 혼란스러워서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이 번잡해서 서책을 밀어내고 이불을 덮어 버렸다.
다음 날 다시 얼굴을 마주친 두 사람은 서로 수줍어했다. 유씨는 이상해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날부터 유소호는 정말로 매일 집에서 글공부에 매진했고, 임새옥이 밭을 직접 관리했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으로 접하는 것들이라 자주 실수했고, 임새옥은 입에 불이 날 정도로 가르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술이 터졌다.
유씨 모자는 마음이 아파서 그렇게 공들일 가치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임새옥이 손가락을 문지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벼는 당분간 수확하지 못해도, 채소는 빠르게 자라고 있어요. 채소를 팔아 돈을 얻으면 집을 새로 구하길 기대하는걸요. 얼마 전에 살펴봤는데, 동촌 조성실 집과 조장안의 옛집이 크기가 적당하더라고요. 비우고 살지 않는 집이니 은자를 주고 사려고요. 우물 하나 파고 두 집을 튼 다음에 내년 봄에 권붕(卷棚: 양옆으로 벽이 있고 앞뒤로는 벽이 없는 집) 세 채, 청방(廳房: 대청이 있는 큰 집채) 세 채 지으려고요. 그러려면 은자를 많이 써야 해서 채소 농사를 대충 하면 안 돼요. 소문이 좋게 나야 앞으로 우리가 파는 것들도 좋은 값에 팔 수 있어요.”
임새옥이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으면서 손짓하며 줄줄이 이야기하자, 유씨 모자는 웃음도 나고 마음도 아팠다.
“얘야, 고생이 많구나. 집은 뭐하러 새로 구한다고. 전엔 그보다 더 좋은 곳에 살았지만, 그게 뭐 대단하다고. 어차피 몸 누일 공간만 있으면 된다. 뭐 하러 그 돈을 써.”
유씨가 한숨을 쉬며 말하고는 배 달여 놓은 물을 임새옥에게 건넸다. 임새옥은 헤헤 웃으며 받아들고 꿀꺽꿀꺽 마신 다음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랑도 곧 과거 보러 가야 하잖아요. 그 돈도 준비해야 해요. 적어도 서동 하나 달려 보내야지요.”
유소호가 웃으며 말을 잘랐다.
“내가 무슨 귀한 몸이라고 시중까지 받아. 그런 생각은 싹 접어. 돈 쓸 곳도 많은데.”
십방촌 지주 유가의 신선한 시금치가 첫 수확을 끝낼 무렵, 유소호의 시험 날도 다가왔다. 유씨는 임새옥과 함께 짐을 꾸리고 준비했고, 임새옥은 돈을 주고 나귀가 끄는 수레를 준비했다. 고부 두 사람이 직접 멀리까지 배웅하고는 뒷모습이 사라지는 걸 미련 가득한 모습으로 보고도 차마 바로 돌아서지 못했다.
이렇게 가버리면 한참 지나야 돌아오게 된다. 8월 보름에 주시가 끝나면 성시(省試)가 있다. 성시가 끝나면 이듬해 봄이 오고, 거인(擧人)들은 전시(殿試)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유소호가 돌아오려면 못해도 내년 여름은 지나야 한다. 유씨는 눈물을 훔치고 눈물을 흘리고를 반복했다. 아들과 이렇게 긴 시간 떨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임새옥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주시만 끝나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해를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러나 그 말은 죽어도 유씨 앞에서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유소호가 멀어진 방향을 자꾸 되돌아보았다. 마음이 이상하게 괴로워서 저도 모르게 염불을 외웠다.
어찌 됐든, 평안하게 돌아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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