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운수 대통한 임새옥, 지주가 되다
노씨에게 소가에서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들은 임새옥은 기쁜 나머지 손 씻을 틈도 없이 대충 옷에 닦고는 노씨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그녀를 설득해낸 노씨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아까는 조삼랑이 소심하게 구는 바람에 현령 눈에 띌 좋은 기회를 잃고 괜히 유가만 좋은 일 시켰다며 부러움에 마음이 울컥하던 노씨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조삼랑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사돈댁에 찍혀서 앞으로 덕을 못 볼까 하는 걱정에, 부부는 식사할 마음도 없이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그때 낯선 이가 찾아오자 교훈을 얻은 노씨는 직접 맞이하며 사근사근 물었고, 그랬더니 소가에서 왔다고 하는 게 아닌가. 역시나 연근 때문에 찾아온 것이었다. 노씨는 금 봉황이라도 만난 듯이 알아 모시며 서둘러 유가로 와서 임새옥을 찾은 것이다. 이건 조가에 찾아온 복이니 유가로 넘길 수는 없었다.
임새옥이 걸음을 옮기다가 다급하게 유씨를 불렀다.
“어머니, 금방 가서 보고 올 거예요. 제가 돌아와서 할 테니, 식사 준비하지 마세요.”
유씨는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모녀가 돌아가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을 씻고 밥을 지으러 가는데 유소호가 방 안에서 나왔다.
“어머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찌 됐든 소화에겐 어머니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새옥이 두 사내를 데리고 들어왔고, 노씨도 나지막이 투덜거리면서 뒤를 따라 들어왔다. 유소호는 기쁜 마음에 방 밖으로 나왔다.
“제 시어머님이세요. 어머님, 이분은 강녕부 소씨 가문 관사세요.”
임새옥이 하는 말에 유씨는 며느리가 데리고 온 두 사내를 바라봤다. 여기에 오래 살았고, 이곳에 사는 여인들처럼 사람을 만나도 피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갑자기 낯선 이 앞에 서자 조금은 불편했다. 살짝 몸을 돌리고 간단히 예를 행하고는 조용히 두 사람을 살폈다. 둘 다 마흔 남짓한 나이에 자줏빛 비단 심의(深衣: 깃·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을 두른다. 대부분의 포袍와는 달리 위와 아래가 따로 재단되어 연결된다.) 차림이었고, 얼굴이 온화했다. 두 사내가 동시에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대낭, 안녕하십니까.”
임새옥은 유소호 곁에 가서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이분이 우리 집 관인이에요.”
임새옥은 속으로 예전에 이씨가 항상 우리 관인 어쩌고저쩌고했던 걸 떠올렸다. 자신이 이렇게 빨리 이 호칭을 쓰게 될 줄은 몰랐기에 어쩐지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유소호가 두 사람과 인사를 주고받은 후, 유씨가 입을 열었다.
“집이 누추해서 대접이 부족합니다. 양해해 주세요.”
두 사람 모두 겸손하게 웃어 보였다. 그중에 얼굴이 하얗고 수염 없는 사내가 마당에 있는 큰 돌을 대충 손으로 닦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에 앉으면 됩니다.”
두 사람의 허물없는 모습에 유씨도 지나치게 예의를 차리진 않았다. 분명 며느리의 연근 때문에 왔을 거라는 생각에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었다.
임새옥은 의자 몇 개를 가지고 나오고 차를 끓인 다음에 함께 앉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자리에 앉은 다음 한 사람은 이씨, 또 한 사람은 동(董)씨라고 제 소개를 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소씨 가문의 이등 관사입니다. 화저아의 연근은 원래 이 이야께서 받긴 했지만, 이야께서 우리에게 팔아달라고 맡기셨습니다.”
“아.”
이 관사가 천천히 하는 말에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소가에서 웬일로 찾아온 건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용의 모습이 뇌리에 또렷하게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입을 비죽였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붙잡지 않는 걸 보면 역시 먹고 놀기만 하는 한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저아가 이리 빨리 출하하는 연근 농사를 지어서, 우리 강녕부 모두가 깜짝 놀랐지 뭡니까. 집안일이 아니었다면, 노야께서 직접 오셨을 겁니다.”
이 관사는 말은 그렇게 해도 표정은 덤덤해 보였다.
임새옥은 겸허하게 대답하고는 유소호를 소개했다.
두 사람이 아주 구체적으로 이것저것 물었지만, 유소호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기만 했다.
“소상공, 그 말은 방법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단 말입니까?”
줄곧 아무런 말 없이 있던 동 관사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소호가 미소 지은 채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예로부터 서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두 관사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내년 치 물건을 예약하려고 온 것입니다. 이번에는 수량이 많아야 합니다. 그리고 전부 우리가 살 생각이고요.”
임새옥은 내심 기뻐하며 서둘러 대답했다.
“물론 됩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편히 말씀하세요.”
이 관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간 짜놓은 계획을 다시 훑으면서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두 분께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땅이 없어서 생산량이 적은 거예요. 노야의 주문을 받으려면, 제가 노야를 난처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땅 살 돈도 계산해야만 합니다.”
두 관사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 전에 임새옥이 손가락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점원과 재료에 드는 비용도요. 비료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 부분은 돈 쓰지 않아도 됩니다.”
두 관사가 얼떨떨해진 건 둘째치고, 유소호조차 임새옥의 조건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술에 배를 불리겠다는 속셈인데, 이게 가능할 리가.
이 관사가 혀를 차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럼, 땅값을 우리가 낸다 치고, 그럼 그 땅은 누구 것인가요?”
임새옥은 우스운 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제 것이지요.”
동 관사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아, 시어머님을 모시고 나와 이야기 나누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임새옥이 씨익 웃었다.
“두 분, 제 말이 어린애가 하는 말 같으세요?”
“저아의 계산대로라면, 거기에 운임비까지 더해야 하니 우리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 강녕부에서 직접 심는 게 조금이라도 벌겠지요.”
이 관사가 웃으며 하는 말에 임새옥도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나중에 그쪽에서도 연근 심을 농사꾼을 보내주세요. 제가 직접 어떻게 심는지 보여줄게요.”
이 관사는 ‘노동력까지 우리가 내라고?’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조금 이르게 나는 연근을 재배할 줄 안다는 이유로, 소가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조건을 들고나오다니, 사람을 잘못 봤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바로 돌아가려 하는데 동 관사가 그를 붙잡았다.
“화저아, 계속 말해 보시지요.”
동 관사가 정색하고 하는 말에 이 관사도 정신을 차리고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두 사람이 알아들은 걸 본 임새옥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랬다. 그녀는 기술과 땅을 맞바꿀 생각이었다.
“장담해요. 내년의 이른 연근은 우리 성안현의 특산품이겠죠. 하지만 내후년엔 강녕부 소가의 특산품이 될 겁니다.”
이 관사도 이쯤 되니 생각이 명확해졌다. 아까는 한참 물어도 아무것도 대답을 얻지 못했다. 유 소상공이 간단하다고 말했지만, 이 긴 세월 동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한둘일까. 연근을 심어 본 사람은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 시기에 나오는 연근을 재배한 사람이 없겠나. 이 세상에 기이한 일이 생길 땐 분명 기인이 있는 법.
그렇게 따지면 분명 가치 있는 거래였다.
임새옥이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게다가 내년에 나오는 연근은 가격을 2할 싸게 드릴게요.”
결정을 짓기도 전에 임새옥이 이어서 하는 말에 두 사람은 더욱 놀라고 기뻐서 동시에 물었다.
“다른 조건은요?”
어린애가 경중을 모르고 덤빈다는 생각이 더는 들지 않았다.
“최고의 메벼 모종, 500포기가 필요해요.”
“화저아, 그건 쉬운 조건이 아니군요.”
동 관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임새옥 역시 이 말수 적은 동 관사가 농사 전문가라는 걸 알아보았다.
근래 그녀는 시간만 나면 유소호를 붙들고 현재 벼농사의 문제를 물어보았고, 유소호의 상세하지 않은 설명으로도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은 비록 점성미(占城米)1)를 이미 도입했고, 남쪽의 각 성에서 벼의 품질이 대대적으로 상승했지만, 여전히 특별한 지역에 국한되어서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지금은 여전히 식감이며 영양 모두 현저히 부족한 메벼를 가장 많이 심었다. 그래서 설사 돈이 있어도 그녀로서는 우량 모종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소가는 온 세상을 누비는 장사꾼이라 우량 모종을 구하는 건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가격도 그녀가 직접 구하는 것보다 저렴할 것이고. 그러니 그녀의 조건은 지나치게 심한 건 아니었다. 소가에서 손해 볼 일도 아니고.
그런데 동 관사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혹시 벼 모종이 매우 비싼 걸까?
그 생각에 임새옥은 더 흥분했다.
비쌀수록 좋지. 내가 더 값어치 있게 바꿀 테니까.
“화저아, 성안현은 그런 벼 종류를 재배하기 적당하지 않습니다.”
동 관사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화저아가 연근을 재배할 줄만 알지, 농작물은 잘 모르는 듯하다고 생각하면서.
어쩌면 유 소상공의 말대로, 책에 나온 한두 마디 짤막한 내용만 보고 운이 좋아서 가능했던 걸까?
“그건 걱정할 것 없어요. 두 분께서는 그저 동의하는지 아닌지만 말씀하시면 돼요.”
임새옥은 조금 들뜬 얼굴로 말했다. 제 바람이 이렇게 빨리 실현되려고 하다니, 너무 기뻤다.
“그건, 우리가 결정 내릴 수 없습니다. 노야가 결정하셔야지요. 화저아, 며칠만 기다려주시지요.”
이 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갈 생각이라는 걸 눈치챈 임새옥과 유소호도 서둘러 일어났다.
임새옥은 두 사람이 일단 물러나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땅 문제가 관건이라는 것도 안다. 십방촌의 대부분 토지의 주인이 각기 다르고, 토지 매매는 관아 소관이라 관계가 복잡하고 절차도 번잡했다. 게다가 별것 아닌 것 같은 여기 땅이라고 해도 갑자기 집중적으로 매매하려면 가격을 정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기다리면 될 뿐.
임새옥은 꽤 자신이 있었다.
두 사람이 인사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주인 안부를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인은 잘 계시죠? 수고스럽지만, 제가 혼인했다는 소식을 부인께 전해주세요.”
두 관사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화저아, 우리 소부인은, 작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요?
임새옥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일에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째서 그런 일이……. 전가아가 아직 어린데, 이걸 어떻게…….”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이 이야와 우리 노야도 속이 시끄러워서 장사를 많이 줄인 겁니다.”
이 관사는 탄식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긴말 없이 서둘러 말을 타고 돌아갔다.
임새옥이 대문 앞에 서서 넋을 놓고 있자, 유소호가 그녀의 울적한 마음을 위로하듯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임새옥도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이 돌아서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노씨가 옆에서 나오며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 밭에서 나온 것으로 돈이 생겼으니, 나눠주지 않을 생각이면 꿈도 꾸지 말아라!”
유소호는 장모가 난리를 부리는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그저 허리를 숙여 돈은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디 노씨가 순순히 믿을 사람인가. 노씨는 집 안을 뒤져야겠다고 외쳐댔다.
“성이 다른 자네가 솔직히 말할 리 없지!”
노씨가 큰소리로 외치는 말에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유소호는 낭패스러웠지만 밀어낼 수는 없어서 할 수 없이 웃으며 상대했고, 그럴수록 노씨는 기세등등해져서 그를 잡아당기며 큰소리쳤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똑똑히 해보자고. 소가 사람들이 뭘 주고 갔는지 아닌지, 문을 열어서 보여주기만 하게.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우리 집에서 심은 건데, 어째서 자네 집이 이익을 보는 건가!”
한참 고함치던 노씨는 임새옥이 휙 잡아당기자 미처 방비하지 못하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죠! 연근 재배하는 방법을 물으러 온 거예요! 대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임새옥이 큰소리로 고함치자, 얼떨떨해하던 노씨가 곧 펄쩍 튀어 올랐다.
“딸은 팔이 밖으로 굽는다더니 정말이구나. 요 나쁜 년. 여기엔 불 지르고, 저기엔 물 뿌리고, 두 집안을 이간질하는구나! 혼인하더니 어미도 패는 것이냐? 잘 들어라, 네가 출가외인이라고 이 어미가 널 어쩌지 못할 것 같으냐?”
노씨가 손을 높이 치켜들자, 유소호도 가만히 보고 있을 리 없어서 곧바로 제 어깨로 막았다. 노씨가 아무리 기운이 세도 사내아이를 이길 수는 없었다. 버둥거릴 뿐 때리지 못하고 오히려 비틀거리다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내리치며 울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 앞에서 다시 한번 똑똑히 말할게요. 그때 연근 세 광주리, 60개를 수확했죠? 강녕부에 돌려준 두 광주리는 돈 한 푼 벌지 못했어요. 나머지 한 광주리는 아버지가 석 관전에 팔았죠. 제가 출가하는 날, 다들 봤죠? 시어머니가 내게 주신 자투리 천 말고 친정에서 해준 혼수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무슨 도리로 이렇게 찾아와서 난리를 부리시는 거예요? 그 연근은 빚 갚으려고 심은 거예요. 그런데 돈을 주겠어요? 듣기 싫은 말, 미리 말해두는데, 들어와서 뒤지고 싶으면 그렇게 하세요. 다만 오늘 들어 오면, 앞으로 우리 유가는 어머니하고 끝이에요. 평생 두 집안은 서로 왕래하지 말고 제 갈 길 가요. 전, 집과 부모를 버렸다는 소리를 듣는대도 두렵지 않아요. 어쩔 도리가 없잖아요?”
임새옥이 싸늘한 얼굴로 고함치면서 나무 울타리를 탁 소리 나게 열고는 유소호를 옆으로 밀면서 노씨를 향해 들어가라는 듯 손짓했다.
연근을 얼마에 팔았는지 임새옥이 이야기했을 때, 노씨는 얼른 울음을 멈췄다. 빚진 게 많은데 갚지 않으려고 끝까지 속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임새옥이 말해버리니 순간 당황했다. 구경꾼 중에도 빚쟁이가 있었고, 벌써 낯빛이 변해서 노씨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임새옥이 앞으로 왕래하지 않겠다고 하니 더더욱 당황했다. 사위는 장래 관리가 될 사람인데 정말로 틀어지면 안 되지 않은가.
유씨 모자는 말주변이 좋지 않은 얌전한 사람이고 딸이야 저를 무서워하니, 난리 좀 부리면 돈 몇 푼 뜯어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딸이 사람이 변한 것처럼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 약점을 찌를 줄이야. 노씨는 당장 기어 일어나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집안 형편이 어떤지 잘 알지 않니. 네 동생들이 얼마나 어리니. 그런데 혼수를 안 줬다고 나무라다니! 말발 한 번 대단하구나.
배도 채우지 못하는 연근을 무슨 석 관전에 판단 말이냐! 네 아비가 당장 내일 죽으면 관이라도 짤 돈을 구하려고 몇 푼 챙겨놓은 것을. 나도 그냥 한 번 와서 물은 것뿐이다.
널 이 나이까지 키웠는데 여생을 보낼 돈 좀 달라는 것도 잘못한 것이냐?
됐다, 나도 이 꼴 저 꼴 안 보고 너 같은 것 낳지 않은 셈 치련다!”
노씨는 줄줄 쏟아놓고 울면서 빠른 걸음으로 가버렸고, 일이 마무리된 걸 본 사람들은 한참 위로하다가 흩어졌다.
임새옥은 여전히 씩씩대며 돌아섰다. 유씨는 밖에서 벌어진 일을 모르는 듯이 마당에서 물을 끓이고 밥을 짓고 있었다. 임새옥은 잠시 생각하다가 다가가서 웅크리고 앉았다.
“며느리 때문에 어머님이 고생하시게 했어요.”
유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고는 밥을 먹자고 했다. 화가 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임새옥은 물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묵묵히 밥을 먹었다.
그날 밤, 낮에 기쁘고 놀라고 화나는 일을 겪었던 임새옥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잠에 쉬이 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밖에서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빗소리가 크게 들렸다. 옷도 챙겨입지 않고 서둘러 창을 닫다가, 불어오는 찬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새벽에 잠이 들었는데, 몸이 춥다가 덥다가, 마음이 번잡하고 불안했다. 어렴풋한 가운데 휘장이 들춰지는 느낌이 들더니 찬 바람이 불고 누군가 들어왔다. 침상에서 바라봤더니. 흰 비단 상의, 살굿빛 비갑(比甲: 배자와 비슷한 모양으로, 소매가 없으며 겉옷), 폭이 넓은 줄무늬 치마를 입고, 추마빈(墜馬鬂: 한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 스타일. 말을 타고 추락하는 형태라고 하여 추마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을 틀어 올린 여인이 하얀 얼굴, 붉은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다름 아닌 한때 주인으로 모셨던 소가 이혜낭, 이 부인이었다.
임새옥은 너무 놀라 부인! 하고 불렀다.
“어떻게 오셨어요? 낮에 부인 생각을 했는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씨가 작년 말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떠올라서 겁에 질려 고함쳤다.
“돌아가셨잖아요! 왜 절 찾아오신 거예요!”
이씨는 여전히 웃음 지은 채 두둥실 다가왔다.
‘힘들게 찾아온 거란다, 화저아. 네가 행운이 있는 아이인 걸 안단다. 내 아들이 눈에 밟히는구나. 그 아이를 진심으로 돌봐달라고 부탁하러 왔다. 주인과 종복으로 지낸 우리 사이가 있지 않니.’
이씨가 침상으로 올라오려 하자 임새옥은 겁에 질려 고함쳤다. 그때 누군가가 힘껏 얼굴을 때리며 “화아, 일어나라!” 하고 외쳤다. 그제야 눈을 번쩍 떴더니, 유씨가 겉옷 하나만 걸친 채 등불을 들고 침상 곁에 서 있었다. 임새옥은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유씨의 품에 파고들어 엉엉 울기 시작했다.
“가위눌렸니? 괜찮다, 괜찮아.”
유씨가 곁에 앉아 등을 토닥였다. 한참 울다가 정신을 차린 임새옥은 유씨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한기가 들까 봐 어서 돌아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유씨는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놀랐냐고 물었다.
임새옥은 무서워져서 작은 목소리로 무슨 일인지 말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제 옷자락을 꼭 붙잡고 말하는 임새옥의 모습에 유씨는 창틀에 놓인 도자기 그릇을 가지고 와서 힘껏 내동댕이치면서 큰소리로 욕을 했다. 임새옥은 깜짝 놀랐다가 이내 마음이 포근해졌다.
시골엔 밤에 놀라는 아이가 있으면 여인들이 그릇을 깨고는 큰소리로 욕하면 바로 괜찮아진다는 말이 있었다. 전생의 엄마도 전에 그런 적이 있었는데, 고대에도 그렇게 할 줄은 몰랐다. 평소에 단아하고 정숙하기만 하던 유씨의 이런 모습에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또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유소호가 소리를 듣고 문밖에서 물었다. 유가엔 방이 세 칸뿐이고, 유씨가 중간 칸, 유소호와 임새옥이 각각 한 칸에 묵었다. 집이 좁아서 발걸음 소리도 서로 잘 들리는데, 지금처럼 큰 소리를 냈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별일 아니다. 화아가 가위눌렸구나. 넌 어서 자라. 내일 학당에도 가야 하지 않으냐.”
“아.”
유소호는 밖에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화아, 무서워하지 마라. 내가, 내가 저쪽에 있으니까…….”
그래 놓고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끝내지도 않고 후다닥 사라졌다.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웃었고, 유씨도 그녀를 힐끔 보더니 빙긋 웃었다.
아들이 일시적인 감정으로 혼사를 결정한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좋아하는 마음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며느리도 의외였다. 어수룩한 줄로만 알았는데, 요 며칠 일어나는 일들을 보니 거친 것 같아도 세심한 점이 있었다. 마음 씀씀이며 말주변이며 다 제법인데, 또 얼마나 착실한지. 조금도 거들먹거리지 않고, 부부끼리 서로 마음 쓰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니 시어머니로서 마음이 놓일 수밖에.
“어머니, 저랑 같이 자요.”
유씨가 돌아서자 임새옥이 잠시 생각하다가 그녀를 불렀다.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씨도 무섭지만, 귀신하고 비교하면 사람이 나으니 눈을 질끈 감았다.
“법도에 맞지 않는다.”
담담히 대답한 유씨는 임새옥의 작은 얼굴이 금세 흐려지는 걸 보고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뿐이다. 다시는 안 돼.”
이렇게 쉽게 들어줄 줄 몰랐던 임새옥은 신이 나서 침상 위로 올라가서 누우면서 헤헤 웃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 얌전하게 잔답니다.”
“식불어, 침불언(食不語, 寢不言)2)이란다.”
유씨가 등불을 후, 불어 껐다. 임새옥은 몰래 혀를 낼름 하고는 입을 다물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을 때까지 편안히 잠들었다.
주 현령이 보증을 서준 덕에 유소호도 이번 주시에 응시할 수 있게 되었고, 갈수록 학업이 많아지면서 성내의 학당에 가는 날도 많아졌다.
노씨는 빚쟁이를 피해 친정으로 달아나서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임새옥으로서는 매일 밥 짓고 청소하고, 외출해서 채소를 고르고, 바쁘면서도 자유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다만 소가의 대답을 기다리느라 조바심이 나서 시간이 늦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한 달은 있어야 두 관사의 대답이 오리라 여겼는데, 보름쯤 지났을 때 이 관사가 말을 타고 찾아왔다. 이번엔 계약서를 준비해왔을 뿐만 아니라 땅문서도 다 준비해서 왔다. 임새옥은 너무 놀랍고 좋아서 바로 반응하지 못할 정도였다.
“화저아, 살펴보세요. 강 서쪽 땅 열 묘입니다. 그리고 마을 동쪽 다섯 묘도 있고요. 이러면 되겠습니까?”
이 관사가 땅문서를 펼쳐 놓고 물었다. 임새옥은 누가 비웃을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리고 아파서 아이고, 외치면서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기뻐하며 대답했다.
“충분합니다. 충분해요. 십방촌에 모두 스무 묘밖에 없는데, 열다섯 묘나 차지했으니, 정말로 대지주가 되었네요.”
“그러게요, 지주가 되었습니다그려.”
임새옥이 깔깔 웃으며 하는 말에 이 관사도 맞장구쳤다. 바보처럼 웃는 아이의 모습에 이 관사는 웃음을 참지 못했는데, 솔직히 열다섯 묘는 많은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소지주지, 대지주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신나게 웃은 임새옥은 그제야 생각난 듯 물었다.
“요즘 길이 이리 발달했나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마무리 지으셨어요? 못해도 한 달은 있어야 노야의 대답을 들을 줄 알았는데요.”
“허허, 그게 참 공교로웠습니다. 노야께서 마침 출타하여 이곳을 지나가셨습니다. 얼마 전에 성안현에 묵으셔서 그 김에 처리했지, 안 그랬으면 정말 이렇게 빠르진 못했겠지요.”
“노야께서 오셨어요?”
임새옥은 멈칫하고는 가서 인사드려야 하나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노비 문서를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 이씨가 직접 넘겨주려 했는데 노씨가 갑자기 출산하는 바람에 받지 못하게 되었고, 다시 이 부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으니 전해주는 것을 잊은 모양이었다.
“음. 며칠 전에 떠나셨습니다. 겨우 이틀 머무셨을 뿐입니다.”
이 관사는 땅문서를 함에 넣어 임새옥에게 건넸다. 임새옥은 곁에 있는 유씨를 힐끔 보고는 덧붙였다.
“수고스럽지만 땅문서 이름을 시어머니 고쳐주세요…….”
말이 끝나기 전에 유씨가 끼어들었다.
“그럴 것 없다.”
임새옥이 고집을 피우려 하자, 유씨가 함을 받아들면서 말을 이었다.
“내가 보관하면 되는 것 아니냐. 네 것, 내 것 할 것 없다. 식구끼리 무슨 차이가 있어.”
임새옥은 그제야 포기했다. 이 관사는 계약 내용을 조금 더 설명해주었고, 임새옥은 계약금을 떼어주며 연근을 구해달라고 했다. 보내줄 시간 등등, 내용을 정하고 적고, 저녁이 되어서야 이 관사를 배웅했다. 임새옥은 땅문서가 들어 있는 함을 바라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유씨도 의외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다. 얼마 전까지 땅이라곤 하나도 없는 외지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십방촌의 지주가 되다니.
고부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생각을 하느라 유소호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어머니, 화아. 어째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우리 집 앞에 모여 있나요? 시끄럽게 뭐라고 떠들어대던걸요. 무슨 일이 또 생겼어요?”
유소호가 책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임새옥이 먼저 씨익 웃고는 표정을 가다듬고 땅문서 함을 유소호에게 건넸다.
“유 소관인, 우리 집 소작료를 어찌 받을지는 소관인께서 생각을 해주셔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