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57)

六. 함정에 빠진 조 대저, 혼인하겠다고 하다

노씨가 혼인이란 화제를 입에 올리자, 조삼랑도 미소를 지으며 모처럼 가장 행세를 드러내며 말했다. 

“내 생각엔 그 녀석에게 몇 푼이라도 주는 게 좋을 것 같소. 그 녀석 덕분에 좋은 혼사를 잡은 것도 있으니. 어찌 됐든 우리 화아의 농사짓는 재주를 마음에 들어하는 거니까.” 

임새옥이 목소리를 높여서 다시 물었다. 

“누구하고요?”

노씨는 흘깃 보더니 평소처럼 등을 때리기는커녕 오히려 방실방실 웃었다. 임새옥은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요즘 노씨가 평소와 다르다 했더니 혼인을 정해서 그런 모양이구나!

“화 대낭이 눈이 높아서 우리가 눈에 안 차는 줄 알았더니, 정말로 좋은 혼사를 가지고 왔더구나. 화아, 너도 수줍어할 것 없다. 며칠 뒤엔 정혼할 테니 알려줘도 되겠지. 대양촌의 장 대호(大戶: 대부호. 대갓집)다.”

노씨는 깊게 잠이 든 조삼저를 화항에 누이고는 보들보들한 아가의 얼굴을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삼저아, 돈 많은 형부가 있으니 평생 걱정할 것 없겠네!” 

대양촌의 장 대호? 어디의 뉘신지 몰라도 좋은 사람 같진 않은데?

“늙었어요? 나이 든 지주?” 

임새옥은 온몸이 거북해져서 발로 못을 밟은 것처럼 꽥 고함을 지르며 물었다. 

“장 대호의 아들이다. 이제 열일곱이야. 장 대호에겐 아들이 하나란다. 장 대호는 돈이 아주, 아주, 아주 많단다. 그런데 아들은 하나뿐이지.” 

노씨는 동그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임새옥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흔들어 보였다. 

“첩은 싫어요!” 

임새옥이 여전히 큰 소리로 고함쳤다. 격앙된 목소리에, 화항 위에 잠든 조삼저가 짜증스러운 듯 몸을 뒤척였다. 노씨는 조삼저가 깰까 봐 눈을 부릅뜨고는 까닭 없이 찾아온 화를 억눌렀다.

“첩이 아니라 처다!” 

듣기엔 좋은 짝 같았다. 조삼랑 같은 사람이 꿈에서도 구할 수 없는 사돈 같기도 하고. 임새옥은 쿵쿵 뛰는 심장을 쓰다듬으며 다시 한번 목소리 높여 물었다.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바보 아니에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씨와 조삼랑이 동시에 안색이 변했다. 노씨가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는 신을 들고 집어던져 임새옥의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내고는 이를 갈며 말했다. 

“이 망할 년! 바보면 뭐? 바보라서 좋은 거지! 앞으로 무슨 일이든 다 네 말만 들을 거 아니냐! 주인집으로 팔려 가서 맞고 사는 천한 노비보다 훨씬 낫지!” 

정말로 바보였어? 

임새옥은 제가 바보가 된 듯 넋이 나갔다. 

사실 조삼랑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보였던 반응도 임새옥과 비교하면 나을 게 없었다. 눈웃음 살살 치는 화 대낭을 쫓아낼 뻔했는데, 다행히 노씨가 그를 말렸다. 

“우리가 그 지경까지 가난하진 않아요.” 

노씨는 얼굴이 싸늘해져서, 화 대낭에게 건네려던 차를 자기가 마셔 버렸다. 화 대낭이 샐샐 웃으며 노씨의 손을 토닥였다. 

“화내지 말고 내 말 들어요. 장 대호가 어떤 집안인지 사방팔방에서 다 알지. 조상에 글공부한 사람도 있다우. 전지(田地: 지주가 소작인에게 경작시키는 땅) 있고, 전답도 있고. 생활이 어떨지, 말로 안 해도 잘 알겠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집안이 또 어디 있어. 산에 있는 땅을 거의 차지한 부자이지만, 소작농도 다 같이 배불리 먹잖아. 유일한 흠이 조금 인색하다는 거지.”

화 대낭은 노씨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진 걸 보고 내심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인색해도 다 늙어서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이 부족하면……, 화저아 어머니, 내 말 좀 들어봐요, 이건 흠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거라고요.” 

노씨와 조삼랑은 이해할 수 없어서 자세히 말하라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장 대호에겐 아내가 하나뿐인데, 아들 하나 낳고 죽었어요. 장 대호도 형제가 없어서 돈을 탐내는 친척도 없지. 생각해 봐요, 저아가 시집가면 어떻겠어요? 아들은 무능하지, 자기가 직접 고른 며느리니 당연히 의지하지 않겠어요? 그럼 그 가업은…….”

화 대낭은 거기까지 말하고 찻잔을 들어 올리며 일부러 말을 멈췄다. 노씨의 안색이 변하더니 금세 웃음꽃이 피었다. 

“아이고, 화 대낭, 그러게 우리 화아를 신경 써줄 줄 내 알고 있었다니까.” 

노씨는 허둥지둥 대추를 꺼내서 화 대낭에게 내밀었다. 화 대낭은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하나를 먹으며 말을 이었다. 

“다 화저아의 운이지, 뭐. 내가 장 대호에게 연달아 몇 집 이야기했는데 다 마음에 차지 않아 하더라고요. 아들이 바보라서 얼마나 신경 쓰는지 몰라. 얼굴만 반반하고 쓸모없는 아이를 들였다가 가업을 망하게 하면 어쩌냐며. 그런데 내가 화저아 이야기를 하니까 달라지더라고. 화저아가 심은 그 뭐더라? 연 뭐? 그 이야기를 하니까, 바로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사람을 시켜 알아보더니 바로 달려와 혼인 말 넣어달라고 부탁하지 않겠수. 나는 두 사람이 날 원망할까 봐 바로 오지 못했지. 하도 닦달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염치 불고하고 온 거예요.” 

그 말에 노씨는 둘째치고 조삼랑도 웃었다. 장 대호가 어떤 집안인지, 두 사람도 물론 안다. 다만 자기들과 얽힐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어쩌면 어느 날, 끝도 없이 펼쳐진 비옥한 땅에 조삼랑 세 글자가 박힌 경계석을 박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정말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경사로구나!

부부는 보살 모시듯 화 대낭을 배웅하고는, 화 대낭이 골목을 돌아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섰다. 그리고 조삼랑 부부의 시선에서 벗어난 화 대낭은 곧장 조 지보의 집으로 향했다. 

조 지보는 성에 사는 친척 덕에 얼마 전에 막 집을 새로 보수했다. 

북향 문루(門樓)로 들어가 새로 바른 조벽(照壁)을 지나면 나오는 마당에 석류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꽃 피는 계절을 맞아 붉은 꽃이 만개한 나무에 꿀벌이 잔뜩 몰려들어 웅웅거리고 있었다.

(※북향을 고급으로 여기는 중국의 주택 습관. 고대엔 황궁이 그 방향이라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조 지보의 처는 온몸에 푸른 물을 튀어가며 처마 밑에서 천을 물들이고 있었다. 화 대낭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불렀다. 

“대낭, 문안드리러 왔어요.” 

그녀가 온 걸 본 조 지보의 처는 천을 내던지고 걸어놓은 천을 들치며 대답했다. 

“어서 들어오게. 한참 기다렸잖아.” 

화 대낭이 웃으며 들어가 보니, 방 안엔 새로 만든 탁자, 의자가 어수선하게 놓여 있었다. 조 지보가 딸의 혼사 때문에 특별히 만든 것임을 알고 구석에 놓아둔 낡은 의자를 찾아 앉았다. 막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조 지보가 딸 난향과 함께 들어왔다. 

“어떤가? 추켜세우니 응하던가?” 

조 지보는 인사치레도 없이 바로 본론을 말했다. 화 대낭이 일어서서 깎듯이 예를 올리고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대저아 말대로 했지요. 소매를 걷어붙이고 쫓아내려고 하더니, 대저아 말대로 말했더니, 곧바로 매우 기뻐하면서 어서 혼사를 결정 지으라고 재촉하던걸요.” 

조 지보도 사실 교활한 잔꾀는 없는 사람이라 딸이 아니었다면 이런 수작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은근히 잘 안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저아, 그 아이가 아깝게 되었구나.”

난향은 제 아비를 노려보고는 눈시울을 붉히며 소매를 물었다. 

“아버지, 그 애가 아니었다면 제가 그 배은망덕한 사람에게 모욕당할 일도 없었어요. 아버지, 그 애가 애석하다고 딸인 저를 잊으신 거예요?” 

조 지보는 아내는 무섭지 않아도 딸은 무서운 사람이라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예쁜 내 딸.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있느냐. 다만, 유가 녀석이 혼사를 거절한 게 정말로 그 아이 때문이란 말이냐? 착각해서 괜한 아이 신세 망치면 어쩌느냐. 다 한 마을 사람인데…….”

난향은 제 아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을 굴렀다. 

“그게 아니면 왜겠어요? 두 사람의 모습을 제가 똑똑히 봤는데,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나쁜 사람 같잖아요!”

그러면서 화 대낭을 바라봤다. 

“아주머니, 어서 가서 그 혼사 무르세요. 내가 갈게요. 이러다가 집에서 날 목매달아 죽이겠어요. 그럴 일 없게 내가 거기로 갈게요.”

난향이 엉엉 울며 그렇게 말하자, 다들 당황해서 우르르 몰려가 그녀를 달랬다. 조 지보는 무릎을 꿇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 화 대낭이 나서서 달랬다. 

“따지고 보면 좋은 혼사랍니다. 조 대저는 기운이 세서 일을 잘하니, 시집가면 분명 시아버지 마음에 쏙 들 거예요. 앞날이 환하지요. 우리 난저아가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인데,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마세요.” 

그 말에 난향이 드디어 웃었다. 

조 지보는 아내와 딸이 안채로 들어가는 걸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아 중얼거렸다. 

“바보에게 시집가서 평생 살아야 하는 건 아무래도…….”

화 대낭이 아이고, 하며 말을 자르며 빙그레 웃었다. 

“누굴 원망하겠어요? 조 대저가 나리 같은 부모를 타고 나지 못한 탓이지요. 우리가 언제 시집가라고 칼이라도 들이밀었나요?”

며칠 지나지 않아, 조 대저의 혼사가 온 십방촌에 퍼졌다. 한순간 별별 말이 다 들렸다. 장 대호 같은 집안과 쉽게 혼인을 맺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니, 노씨의 예상대로 대부분 부러워했다. 오랫동안 왕래하지 않던 할머니, 삼촌, 숙모까지 다 찾아와서 화저아에게 주는 혼수라며 돈을 내놓았다. 기회를 잡은 노씨는 제대로 비아냥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 망종(芒種: 6월 6일경. 보리는 익고 모를 심는 시기)이 되어 봄에 뿌린 보리를 수확할 때가 되었다. 푸릇푸릇하던 밭은 온통 누렇게 변하고, 마을 곳곳이 녹음에 쌓여 매미가 끝도 없이 맴맴 울어댔다. 

유소호는 집 앞에 서서 글공부하느라 뻐근하던 몸을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임새옥의 작은 그림자가 느릿느릿 마을 밖으로 가는 걸 보고는 요즘 내내 들리는 소식을 떠올렸다. 점점 멀어져 가는 작은 체구를 바라보며 뜬금없이 마음이 쿡 쑤셨다. 그는 방 안에서 바쁘게 일하는 유씨를 힐끔 바라보고는 살금살금 집에서 빠져나갔다. 

연근을 수확하고 텅 빈 수렁만 남은 조삼랑의 밭은 주변에 잘 익어 곧 수확할 보리밭과 대조되어 유난히 더 허전해 보였다. 

그날, 약속대로 연근을 가지러 온 두 사람은 기대하지 않고 왔다가 눈앞에 가지런히 놓인 신선한 연근 두 광주리를 보고는 몹시 당황했다. 그들의 허둥대는 모습, 그리고 조삼랑 밭에 서서 놀라서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 모두가 나와서 구경하던 십방촌 사람들의 시끌벅적함은 이제 밭에서 싹 사라졌다. 그렇게 십방촌은 다시 예전처럼 조용해졌다. 조삼랑네 밭이 다른 사람들의 밭과 다르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아예 없었던 일이라고 여길 지경이었다. 

가장 실망한 사람은 아마도 노씨이리라. 임새옥이 이용의 첩이 되길 바랐던 희망은 두 심부름꾼과 함께 멀어져 갔다. 그리고 더는 소식이 없다는 사실은 노씨가 완전히 기대를 접고 임새옥의 혼사를 더더욱 빠르게 추진하는 요인이 되었다. 

임새옥은 그 수렁 가장자리에 맨발로 앉아서 보릿대를 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소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갔다. 그 발걸음 소리에 그녀가 자연스레 생각에서 깨어났다. 

“응? 네가 왜 나왔어?”

임새옥이 살짝 고개를 들고 씨익 웃었다. 그 미소에 유소호는 까닭 없이 마음이 시렸다. 그러나 위로하는 말은 정말이지 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한참 우물거려도 결국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임새옥은 어느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발로 수렁 가장자리만 찰싹찰싹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는 유감이라는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아쉽지?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쩨쩨하다니까. 음, 정확히 말하자면 마을 사람은 다 그래. 새로운 일에는 절대로 투자하지 않아. 벼가 무슨 대단한 거라고. 심은 사람이 없다고, 여기 사람은 다 보리를 심는다니까 그 돈을 쓰는 게 너무 아깝대. 너 벼 심어 봤지? 양이 어땠어?” 

임새옥은 다시 고개를 들어 유소호를 올려다봤다. 유소호는 그 말에 얼떨떨해졌다. 

멍하니 있던 게, 그걸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희귀한 것도 아니지. 진종(眞宗: 송나라 3대 황제. 태종 조광의의 셋째 아들)께서 그 당시 보급하려고 애쓰셨지. 지금은 꽤 잘 알려진 곡식이고. 양강(兩江: 강남성과 강서성을 함께 부르는 말), 양회(兩淮: 회수淮水의 남쪽인 회남淮南과 회수의 북쪽을 아울러 이르는 말) 지역에선 이모작으로 벼를 심어.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버지가 말씀하는 건 들었어. 생산량은 예전과 비슷한 데다가 매우 고되대.”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였다. 벼농사는 큰 변화가 없으리라. 벼는 적응력이 지극히 강한 농작물이라, 효율적으로 재배할 수만 있다면 생산량이 분명 비약적으로 올라갈 것이다. 물론 가장 우량한 볍씨를 구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직접 나가서 둘러볼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조삼랑과 노씨는 그보다 더 전통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전통적인 사람이었다. 그들에게 농사는 그저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지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리고 농사라는 게 쉬워 보이고 자본이 들지 않는 것 같아도, 제대로 하려면, 특히 임새옥처럼 새로운 품종을 연구할 일념뿐일 때는 돈을 들이붓는 작업이 된다. 

그 바보와 혼인해 버릴까? 돈도 있고 땅도 있다던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 임새옥의 얼굴이 유소호 눈엔 갈수록 허망해 보이고 서글퍼 보였다. 

“소화, 매 맞는 거 무서워하지 말고, 그 바보와 혼인하기 싫다고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정신을 차린 임새옥은 유소호의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 그리고 깊이 공감해주는 것 같은 서글픈 표정에 씨익 웃어 보였다. 

“아니야. 매 맞는 게 뭐가 무서워. 넌 우리 어머니한테 겁먹어서 그래. 천둥소리만 크고 비는 조금 오는 거 있지? 우리 어머니가 그래, 하나도 안 아파.”

“하지만 바보와 혼인하라는데, 너, 원망 안 해?” 

유소호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다시 물었다. 임새옥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부모님은 말이야, 그냥 가난이 무서워서 그래.” 

그러고는 표정이 조금 굳더니 한숨을 내쉬고 혼잣말하듯 말을 이었다. 

“어느 부모가 자기 딸이 잘사는 걸 바라지 않겠어. 머리로든 마음으로든, 뭘 알겠어. 배 불리 먹고 따듯하게 입으면 잘 사는 건 줄 알지.” 

그러면서 또 웃었다. 

“어머니는 정말 나 때문에 속 터져 죽을걸? 자기 자식이 주인이 될 기회, 이낭이 될 기회를 버리고 굳이 가난한 집을 지키려 할 줄 어찌 알았겠어. 그렇게 좋은 기회를 버렸으니, 화날 만도 해. 난 예전에…….”

임새옥은 보리가 겹겹이 파도치는 밭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저 먼 곳을 바라보듯이 말을 이었다. 

“예전에 사범전문학교(중학교 및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고등 교육 기관. 2~3년제)에 붙었어. 3년 공부하고 졸업만 하면 선생님이 될 수 있었어. 탄탄한 철밥통이었지. 그런데 말이야, 난 공부하고 싶었어. 대학생이 되고 싶었고, 큰 도시로 가고 싶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게? 엄마는 화를 내고, 아빠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어. 날 싫어해서가 아니라…….”

임새옥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유소호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바보와 혼인해? 내 능력으로 분명히 잘살 수 있겠지. 게다가 그 집은 돈도 있고 땅도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할 수 있겠지. 그렇게 평생 보낸다?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억누를 수 없는 서글픔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유소호는 임새옥이 조금 전에 무슨 말을 한 건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학당 스승님이 서책을 강해(講解)해주는 것보다 더 난해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여자애가 매우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알 수 있었다. 당연했다. 누가 바보와 혼인하길 바랄까. 그래서 위로해 보려고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우리 아버지도 예전에 종종 나를 때리셨어. 난 멍청하고 글공부를 잘못해서 손이 퉁퉁 부을 정도로 때리셨지. 대랑과 우리 어머니가 울어도 말리지 못했어. 결국 형님이…….”

“형님도 있어? 어쩐지 네 어머니가 항상 이랑이라고 부르시더라니. 그럼 형님은?”

임새옥이 궁금해하며 묻는 말에 유소호의 얼굴이 흐려지고 눈가가 그렁그렁해지더니 고개를 숙였다. 

“죽었어.” 

정말 비참한 과거구나. 임새옥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위로할 기운이 없었다. 내 마음도 무거운걸. 

둘은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무른 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임새옥의 한숨 소리에 의협심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임새옥이 온몸으로 풍기는 쓸쓸한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무슨 생각인지 갑작스러운 말이 별안간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소화, 아니면, 나하고 혼인하자…….”

눈앞의 소녀가 벌떡 튀어 오르더니 화들짝 고개를 들며 까만 검은콩 같은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정말? 그것도 좋지. 아니, 그게 더 좋아!” 

유소호는 저도 모르게 혼인하자고 툭 튀어나온 말에 재빨리 제 혀를 깨물 정도였지만, 얼굴을 붉히기도 전에 임새옥이 하는 말에 놀라서 얼굴이 그대로 창백해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너무나 체신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소녀의 두 눈빛에, 더더욱 체신 없는 말이 또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난 너무 가난한데. 네 어머니, 허락하지 않으시겠지?”

눈앞의 소녀는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유소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짓궂은 표정이 그녀 얼굴에 떠올랐다. 

“어머니는 그냥 가난이 너무 무서워서 그래. 하지만 돈 많은 지주보다 더 큰 유혹이 눈앞에 놓이면 절대로 거절하지 않아. 예를 들어, 넌 앞으로 과거를 볼 사람이잖아. 큰 벼슬을 할 사람이야. 네가 자신만만하게 장담만 한다면 우리 어머니도 분명 너와 혼인시키지 못해 안달하실 거야.” 

유소호는 입만 뻐끔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참 만에 애를 쓰며 겨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과거에 낙방하면…….”

“그건 나중 일이고. 나중 일을 누가 정확히 아니?”

임새옥은 대범하게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했다. 한순간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두 눈만 깜빡이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뒤늦게야 자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깨달았다. 

순간 바로 옆에서 천둥이라도 친 듯한 기분에, 유소호는 겁먹은 토끼처럼 화급하게 달아나서는 금세 임새옥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달아나는 동안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임새옥도 얼떨결에 정신을 차렸다. 제 얼굴이 아플 정도로 화끈거렸다. 

나, 대체 무슨 말을 한 거니. 이, 이게 여자애가 할 말이야? 

나 진짜 바보와 혼인해야 하는 현실에 겁에 질려 어떻게 됐나 봐. 

하지만, 하지만……. 

유소호가 던진 유혹이 너무나 컸다. 앞뒤 가릴 겨를 없이 달려들어 죽어라 붙들고만 싶었다. 

그래,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있을까? 앞으로 이보다 더 알맞은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을까? 조용하고, 상냥하고, 또 같은 취미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임새옥은 뜨거운 얼굴을 부여잡고 서서히 바닥에 쭈그리고 얼굴을 양 무릎 사이에 묻었다. 들떠서인지, 아니면 무서워서인지 몸이 달달 떨렸다. 

놓치면 안 돼, 놓쳐선 안 돼. 유소호보다 더 알맞은 사람이 있어? 

어쩌면, 있겠지. 하지만 그녀, 임새옥은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조삼랑 집안의 연근에 이어 조삼랑 딸이 바보와 혼인한다는 소식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평소와 달리 십방촌이 떠들썩해졌지만, 그것도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런 따분한 나날은 그다지 오래 가지 않았고, 온 마을 사람을 들끓게 할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그들 마을에서 가장 괜찮은 집의 딸이 눈에 차지 않던 외지인 유소호가 지지리도 가난하고 아둔한 조삼랑 일가와 혼인을 맺게 되었다는!

온 마을의 이목이 조삼랑에게 집중되었다. 유가야 그렇다 치자. 외지에서 온 사람이니, 굳이 갈 데까지 간다고 해도 거리낄 것도 없고 여차하면 다른 마을로 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착실한 조삼랑은 뭘 잘못 먹었길래 지보가 배척하는 유가와 공공연하게 사돈을 맺는단 말인가. 조 지보의 뺨을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조삼랑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 십방촌 사람이었다. 연배로 따지면 조 지보를 할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 해야 했다. 소식을 알게 된 조 지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는 접어두고, 조삼랑 부부의 엉뚱한 생각을 없던 일로 하려고 조삼랑의 어머니, 형제 그리고 본가의 멀고 가까운 친척들까지 모두 찾아와 번갈아 가며 설득하고 나섰다.

조삼랑의 어미는 조삼랑 집 앞에 앉아서 눈물 콧물 다 흘리며,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부터 ‘어떻게 이런 불충 불효를 하니!’까지 아들의 잘못을 줄줄 읊어댔다. 구경꾼은 안팎으로 몇 겹씩 몰려들었고, 밥그릇까지 들고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다. 

구경꾼들은 모두 이렇게 소곤거렸다.

“진작 이야기했잖아. 이 집 큰 애가 예전부터 그 녀석과 이상했다니까. 감추지 못할 일을 저지른 거겠지.”라고.

노씨가 물 한 대야를 휙 뿌리자 구경꾼과 조 노파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화를 입었다.

“할 말 있으면 그 애 욕하지 말고, 잘못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요! 빤히 내 욕하고 싶으면서 괜히 내 딸 욕보이지 말고! 내가 어머니라고 불러서 그렇지, 시커먼 노인네 속을 모를까 봐? 팔이 밖으로 굽어도 유분수지. 뒤에서 한 짓 좀 봐요. 그게 사람이 할 짓인지 다들 눈 뜨고 보고 있다고요. 

이 보는 눈도 없는 속 시커먼 노인네 같으니라고.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서는! 우리가 잘사는 게 샘나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고. 당신 손녀라고요!

어느 날 성공해서 성으로 가는 날이 오면 우리가 모르는 척한다고 원망하지 말아요. 다른 사람이 주는 밥 먹고, 다른 사람 손에 놀아나면서, 어디서 내 딸을 손가락질해요! 

내 딸이 잘못한 게 있으면 다 내가 시킨 거예요! 매일 남 이야기만 하고. 당신들이 한 나쁜 짓, 다들 모를 것 같아요? 다 까놓고 이야기하자고요. 다들 갈 데까지 가보자고 우리 집을 공격하는데, 당신들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으면 내가 개예요, 개!”

머리를 풀어헤친 노씨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조 노파를 손가락질하다가 사람들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욕하는 모습에, 사람들은 처음엔 크게 웃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노씨가 하는 모습을 보니, 누가 한마디라도 하면 달려들어 두들겨 팰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일은 조 지보와 조가와 유가 사이의 일이지 자기들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유소호가 장차 크게 될 테니 괜히 의 상하지 말라는 노씨의 속뜻을 알아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치를 보며 슬쩍 웃었다. 그리고는 욕먹고 얼굴이 창백해져서 당장이라도 눈을 까뒤집을 것 같은 조 노파를 일으키고는 크게 웃으며 가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화제의 중심인 유소호네 집 마당은 변함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굳이 일이 있다면, 유소호가 구석에 심은 채소를 누군가가 뿌리까지 뽑은 일 정도랄까. 유씨 모자는 못 본 듯이 들락거렸다. 

저녁을 먹은 다음, 유씨가 어두운 등불 아래 서둘러 옷을 짓고 있는데 유소호가 휘장을 걷고 조금 주저하며 그녀를 바라봤다. 

“어머니, 그렇게 밤낮없이 일하다가 눈이 견디겠어요?”

고개를 든 유씨는 그저 웃기만 했다. 지나친 고생에 여인의 얼굴에 주름이 늘었다. 한때 매우 잘 가꿨던 손도 지금은 마을 촌부의 손처럼 거칠었다. 

“이랑, 이런 때 혼인하게 되어서 마음이 매우 좋지 않단다. 그런데 새 옷 하나 지어주지 못해서야, 나중에 무슨 낯으로 지하에 있는 네 아버지와 친어머니를 만나겠니.” 

유소호의 눈시울이 바로 붉어졌다. 그는 유씨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어린애처럼 그녀의 무릎에 엎드렸다. 

“어머니,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제게는 어머니가 친어머니예요.”

유씨는 바늘을 내려놓고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이의 얼굴은 막 소년티를 벗었고, 한창 자랄 때였다. 그러나 한 끼 먹고 한 끼 건너뛰며 굶주려서 다소 야위었다.

“어릴 때는 여자애처럼 입술이 붉고 치아가 새하얗고 예뻤지. 동글동글, 화저아 동생이랑 비슷했단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말라서…….”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 마른 것만 보이세요? 키가 자란 건 안 보이세요?”

유씨는 그를 일으켜서 진지하게 살펴보고는 미소 지었다.

“정말이구나. 우리 이랑, 키가 컸네. 화저아가 너보다 더 컸는데, 반년이 흘러, 네가 머리 하나만큼 더 컸더구나. 잘 되었다. 신랑이 신부보다 작다는 소리는 안 듣겠어.” 

혼인 이야기가 나오자, 유소호는 다른 보통 사내애가 보일 만한 반응을 보이며 부끄럽고 얼떨떨한 듯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 제멋대로 결정해서 화나셨어요? 전 다만, 전 다만…….”

웅얼거려봐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유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를 잡아끌어 앉혔다.

“그 애의 출신을 타박하는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남 타박할 처지도 아니고. 다만 혼인 대사는 평생이 걸린 일이란다. 이랑, 난 네가 한때 충동으로 장차 후회할까 걱정이란다. 말해 보렴, 너, 화저아를 좋아하니? 아니면 그 애가 어려움에 빠진 걸 두고 볼 수 없어서 네 처로 삼으려는 거니.”

유소호는 얼떨떨해져서 흔들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결국 아무런 말도 못 하는 유소호의 모습에 유씨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더는 캐묻지 않고 말했다. 

“내 보기에 화저아는 좋은 아이다. 어수룩한 것 같아도 사실 생각이 있는 아이지. 간교하지도 않고. 그 아이를 처로 들이는 건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단다. 다만, 네가 나중에…….”

그 말에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그 애를 저버릴 일은 절대로 없어요.” 

갈수록 수줍은 듯 목소리가 작아졌다. 

화저아는, 자신이 직접 이야기해서 구한 제 처였다.

날이 하루하루 흐르고, 드디어 혼인날이 되었다. 유소호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조삼랑, 노씨 앞에 나타나 예를 행했다. 노씨 때문에 화가 난 친척들은 하나도 오지 않았고, 가깝게 지내던 마을 사람만 찾아와 얼굴을 내밀었다. 노씨는 죽어도 보란 듯이 혼사를 치러야겠다고, 조삼랑에게 돈을 주어 악사를 부르고 간단한 주연을 마련했다. 조가 마당이 한순간 떠들썩해졌다. 

노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소호의 예를 받고는 누가 듣는 걸 꺼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우리 저아를 자네에게 맡기는데, 약속한 말은 지키게. 행여 약속을 못 지키면 딸더러 쫓아내 버리라 할 걸세.” 

사람들은 땀을 한 바가지 흘렸다. 여인들이 노씨의 소매를 살살 끌어당기며 이런 경사스러운 날에 무슨 불길한 소리냐고 해서 겨우 입을 닫았다. 임새옥은 머리에 쓰개를 쓴 채 부축받고 나와서 부모에게 절을 올리고 유소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노씨는 사람들이 신랑 신부를 에워싸고 멀어지는 걸 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친 다음에 조삼저를 안고 대문을 닫았다.

경사스러운 날이 지난 후, 날씨가 갈수록 무더워졌다. 온 마을에 버드나무에 가득 달라붙은 매미 소리가 극성스럽게 십방촌에 울렸다. 

임새옥은 편안한 무명 홑옷과 긴 바지를 입고 마당에서 물을 뿌리고 머리를 감았다. 막 다 감았는데 대나무 발이 젖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유씨가 큰 방에서 나왔다. 임새옥은 서둘러 다가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어머니, 우물에 과일 몇 개 넣어두었는데, 드시겠어요?”

“그러자꾸나.”

유씨는 임새옥이 양쪽으로 틀어 올린 머리에 붉은 끈만 묶어 둔 걸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에서 작은 은 얼레빗을 빼냈다. 

“화저아, 이리 오렴. 좋은 건 줄 게 없고, 이 빗뿐이다. 예전에 유씨 가문에 들어갔을 때 네 시아버님이 내게 주신 거다.” 

임새옥은 안 된다고 손을 내저었지만, 유씨는 그녀를 끌어당기며 머리에 꽂아주었다. 그러고는 잠시 감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나도 네 나이 때였단다. 네가 꽂으니 어울리는구나.” 

진심으로 주는 거라는 걸 깨달은 임새옥도 더는 사양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받았다. 그러고 몇 마디 한담을 나누고 서둘러 밥 준비를 하러 갔다. 

유씨가 단정하게 탁자 앞에 앉아 이를 드러내지 않고 조금씩 오물오물, 퍽퍽하고 맛없는 조악한 음식을 산해진미처럼 먹는 걸 보고 임새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너도 먹으렴.” 

힐끔 그녀를 본 유씨는 눈살을 찌푸리고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임새옥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어머니, 먼저 드세요. 전 이랑에게 밥 가져다줘야 해요. 밭에서 같이 먹으면 돼요.” 

뭐가 어떻게 됐든, 유가도 어떻게든 땅을 구해서 뭐든 심어야 했다. 십방촌에 이미 있는 좋은 땅 중엔 그들 몫이 없어서, 유소호가 마을과 멀리 떨어진 황무지를 찾아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았다. 유씨가 물건을 변통해 좁쌀을 사 와서 심었더니, 다행히 하늘이 보살피는지 비 몇 번 내리더니 벌써 무사히 뿌리를 내렸다.

유씨는 항상 아들을 마음 쓰는 사람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임새옥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씨익 웃자 유씨가 바로 정색했다. 

“여인네가 어찌 소매를 걷어. 그러면 안 된다.”

임새옥이 황급히 소매를 내리는데 유씨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아무 때나 웃지 말고. 예전에 했던 말인데, 기억나지 않아?” 

임새옥은 한바탕 쏟아진 말에 겸연쩍어져서 무심결에 웃으려다가 그건 더 격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그 바람에 얼굴이 더 부자연스러워지자, 유씨는 차마 못 봐주겠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일단 가렴. 저녁에 다시 오너라. 그때 가르쳐 주마.” 

임새옥은 사면이라도 받은 듯이 허둥지둥 나가다가 항아리에 발을 부딪쳤지만 그대로 문밖으로 튀어 나갔다. 등 뒤에서 유씨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황급히 걸음을 멈추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유씨의 시선을 벗어난 후에 땀을 닦고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며느리는 그냥 저아 때랑은 다르구나.” 

조삼랑 집 앞을 지날 때 보니 대문이 열려 있었다. 노씨는 우물 앞에 서서 머리를 감고 있었고, 조삼저는 멍석 위에 엎드려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어머니, 찬물로 머리 감지 말라니까요.” 

고개를 내밀고 보던 임새옥이 성큼성큼 들어가며 말했다. 아궁이에 아직 따듯한 물이 있길래 재빨리 한 바가지 퍼서 가져갔다. 

“흥. 무슨 잔말이 그리 많아.” 

노씨는 물을 받아서 머리를 헹구고는 몸을 일으켜 임새옥을 바라봤다. 

“합방은 안 했니?” 

노씨가 그녀의 차림새를 보고 톡 까놓고 묻자, 임새옥은 순간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머님 말씀이, 지금은 글공부가 중요할 때래요. 게다가 시아버님 3년 상도 아직 지나지 않아서 서두를 것 없대요.” 

노씨도 신경 쓰지 않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지. 일단 급제부터 하고 보자. 평판도 망치고 몸도 잃을 일은 없어야지.” 

갈수록 들어줄 수가 없어서 임새옥은 노씨의 말을 자르고 돌아섰다. 그녀를 훑어보던 노씨는 손목의 은팔찌를 발견했다. 

“뭐가 그리 급하니. 네 시어머니가 준 것이냐? 어디 나도 좀 보자.”

이씨가 준 은팔찌였다. 줄곧 감춰두고 있다가 혼인한 후에야 꺼내는 거라 노씨는 처음 보는 것이긴 했다. 노씨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부터 뻗다가 딸이 팔찌를 빼지 않자 구시렁거렸다. 

“뭐 좋은 거라고. 달라는 거 아니다.” 

노씨가 손목을 잡아당겨 힐끔 보고는 다시 물었다. 

“네 시어머니, 전엔 부자였다며? 좋은 건 없다더냐?” 

“내가 어떻게 알아요.” 

임새옥이 헤헤 웃으며 대답하고는 서둘러 나가자 노씨가 콧방귀를 뀌었다.

“시집가더니 잠시도 있기 싫은 모양이구나.”

“이랑에게 밥 가져다주러 가요. 이따 다시 뵈러 올게요.” 

임새옥이 돌아보며 웃는 얼굴로 하는 말에 노씨가 다시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배웅하러 나가서 임새옥이 멀어진 후에야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유소호가 배고플까 봐 몹시 초조해하며 허둥지둥 마을 밖으로 가봤더니 유소호가 밭 끝쪽에 앉아 머리를 묻고 훌쩍이고 있었다. 깜짝 놀라 후다닥 다가가서 큰 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어디 부딪쳤어? 다쳤어? 그러게 이런 일 하지 말라니…….”

그녀는 말이 끝나기 전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렵게 일궈낸 땅에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파릇파릇한 좁쌀 새싹이 가득했는데, 지금은 누렇게 떠서 흩어져 있었다. 밭에 웅덩이가 가득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쟁기로 한바탕 뒤집고 간 듯했다. 

이런 천벌 받을 놈들! 

임새옥은 화가 나서 펄쩍 뛰면서 밭을 폭주하기 시작했다.

“때리든 욕하든 사람한테 할 것이지, 왜 남의 밭을 망쳐! 왜 남의 밭을 망쳐! 이런 소인배들, 소인배들!” 

몇 바퀴 돌아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땅에 주저앉아 넋을 놓고 있는 유소호를 잡아당겼다. 

“가! 가서 따지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감히 우리를 괴롭혀? 그냥 둘 줄 알아?”

유소호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 애가 이렇게까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는 건 또 처음이었다. 저절로 웃음이 났다. 

“너도 성질이 있구나.”

임새옥은 코웃음 치며 흘깃 보고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좀 알아보지 그랬어. 이 임……, 아니 이 조 대저를 괴롭히고 두들겨 맞지 않은 사람이 있는 줄 알아? 가, 가! 감히 내 땅을 망쳐? 집을 불태워 버릴 테다.” 

유소호는 웃음을 터트리면서 울적한 마음을 털어냈다. 

“내 마누라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임새옥은 순간 얼굴이 붉어져서 유소호를 쏘아봤다. 

“뭐라는 거야. 얼른 가지 않고 뭘 해.” 

유소호는 밥을 담은 그릇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됐어. 누가 한 건지도 모르는걸. 찾아가도 인정하지 않아. 괜히 책망만 당한다.”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끌고 걸음을 서둘렀다. 

“뻔하지. 분명 속 시커먼 조대산이 한 짓이야.” 

해가 긴 여름날, 집집마다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해가 아직 높이 뜬 때, 지보 조대산의 처는 허둥지둥 담장 앞에 쌓아둔 장작 몇 개를 들고 또 총총 사라졌다. 장작더미 뒤에 숨어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화아, 불은 지르지 말자. 날이 건조해서 불이 나면 큰일 나.” 

유소호가 부싯돌에 불을 붙이는 임새옥을 말리며 속삭였다. 임새옥은 고개를 갸우뚱하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길 순 없었다. 

조대산네 마당에서 조대산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아둔한 여편네야. 때가 어느 땐데, 밥 하나도 제대로 못 지어!” 

이어서 그의 처가 고분고분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됐어요, 됐어. 금방 돼요.” 

임새옥은 순간 어떤 생각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릴 때 많은 즐거움을 준 그 흑백 영화 덕분이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지만. 평생 그런 장난을 칠 일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천월이라는 기묘한 일이 일어나서 허튼 장난을 쳐도 되는 어린애로 또 한 번 돌아올 줄은 몰랐다. 

“어, 어떻게 그래.” 

임새옥이 소곤대는 말을 들은 유소호는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안 될 게 뭐야! 그냥 화풀이하는 거잖아. 피해는 조금도 없다고!” 

임새옥은 그를 끌어당기면서 그 김에 장작더미에서 닥치는 대로 짚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는 유소호의 등을 떠밀며 조대산 집의 구석으로 가서 부엌을 찾아내고는 나직이 웃었다. 

“내가 엎드릴 테니, 먼저 올라가. 올라가서 날 끌어 올려줘. 재미있을 거야. 이런 장난 한 적 없지?”

조대산 집에 짙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욕하는 소리, 고함이 울려 퍼졌을 때, 그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둘은 이미 멀리 달아나고 없었다. 

유소호는 임새옥에게 끌려서는 헉헉대며 달렸다. 이런 짓은 처음이었다. 남의 집 굴뚝을 틀어막다니.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건, 진짜……. 너무 자극적이었다!

“봐준 줄 알아라!” 

임새옥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분한 듯 외치고는 속으로 다짐했다. 

추수 때에 꼭 너희 집에 가서 식량을 훔쳐 올 거다! 감히 이 임새옥을 상대로 이런 음험한 짓을 해? 

유소호가 갑자기 쉿, 소리를 내고는 문 앞에서 살금살금 목을 빼고 살폈다. 유씨 거처에 불이 켜진 걸 보고 임새옥의 손을 잡고 재빠르게 마당 안 우물가로 향했다. 숨소리를 죽이고 물을 기르던 임새옥은 가벼운 헛기침 소리에 놀라서 물통을 우물 안으로 빠트릴 뻔했다. 

유씨는 시커먼 얼굴의 아들과 며느리를 보더니 손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한참 파르르 떨다가 끝내 때리지는 못했다. 

“이랑, 혼인하고 가정을 이뤘으니 이제 어른이 된 거다. 어째서 갈수록 어린애가 되는 거냐? 이렇게 황당한 일을 하다니, 글공부하는 사람의 체면은 어찌하란 말이냐.” 

유씨는 화가 너무 나서 오히려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서안을 힘껏 내리쳤다. 유소호에게 하는 말이지만, 시선은 임새옥을 향해 있었다. 

임새옥은 재빨리 목을 움츠렸지만, 유씨의 매서운 시선은 여전했다. 의식적으로 고개를 들고 웃어 보이려고 했지만, 결국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유소호가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아당기더니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어요. 어머니, 화 푸세요.” 

부부가 입을 모아 말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이랑, 일어나라. 가서 <예기(禮記)> ‘소의(少義)’ 편을 오십 번 베껴 써라. 내일 아침에 내게 주어야 한다.”

그게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라는 걸 알아들은 유소호는 불안한 듯 임새옥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어머니, 다 제가 멋대로 우긴 겁니다. 소화는 상관 없…….”

“넌 일단 물러가라.”

처음으로 유씨가 화를 내는 걸 본 유소호는 끽소리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바로 물러가진 않고 그대로 있는데, 임새옥이 살며시 쿡쿡 찌르며 걱정 말라는 눈빛을 보이자 머뭇거리며 일어나 천천히 나갔다.

임새옥은 속으로 투덜대고 있건만, 유씨는 그저 그렇게 며느리를 무릎을 꿇린 채로 말도 없이 싸늘한 얼굴로 넋을 놓고만 있었다. 며느리의 귀한 무릎이 지근지근 아파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 보이는 며느리가 슬슬 꿈틀대며 몸을 흔드는 걸 본 유씨의 미간이 실룩였다. 

설마 촌의 낭자가 부귀한 가문 규수들보다 더 귀하단 말인가. 무릎 잠시 꿇고 있었다고 벌써 못 견딘다니. 아니면 너무 저속해서 예절을 모르는 걸까. 

유씨는 당연히 후자로 생각하면서 헛기침했다. 임새옥이 자세를 바로 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가, 네게 아녀자의 도리를 가르친 사람이 없는 걸 나도 안다. 하지만 이제 넌 우리 유가 사람이다. 우리 유가가 몰락했다고 해도, 조상의 규율을 버릴 순 없다. 우리 아녀자는 분수를 알아야 하고 예의와 법도를 지켜야 내조하고 자식을 가르칠 수 있다. 오늘부터 매일 밤 내게 와라. 매일<여계(女戒: 부녀자의 도리를 논한 지침서)>를 한 편씩 가르쳐주마. 네가 비록 글은 모를 테지만, 반드시 숙지해야 한다.”

임새옥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차라리 날 죽여 주세요!

유씨는 얼굴이 굳어지더니, 힘주어 제대로 앉으라고 외쳤다. 임새옥은 시어머니의 엄한 모습을 처음 보는 터라 화들짝 놀라 제대로 꿇어앉았다.

“반드시 기억해라. 너는 이랑의 처다. 이랑은 장차 학문을 닦을 사람이다. 절대로 경솔한 행사로 우리 유가 체면을 떨어뜨려선 안 된다. 위패 앞에 가서 무릎 꿇고 오늘 한 짓을 반성해라.” 

유씨가 방 한구석의 위패를 가리켰다. 임새옥은 속이 속이 아니지만, 견뎌야지 별수가 있나. 다행히 위패 앞엔 방석이 놓여 있었다. 유씨도 더는 그녀를 보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일어서서 내실로 향했다. 

임새옥은 귀를 쫑긋 세우고 내실에서 작게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리자 한숨을 내쉬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시린 무릎을 주무르는데 휘장이 흔들리더니 유소호가 고개를 내밀었다. 임새옥이 황급히 쉿, 소리를 냈다. 

“배고프지?” 

유소호가 살금살금 다가와 그녀 곁에 앉아서 병자 하나와 따듯한 달걀을 건넸다. 오늘 겨우 한 끼 먹은 임새옥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고 서둘러 먹기 시작했다. 소리가 날까 봐 한꺼번에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힘겹게 넘기고는 나지막이 물었다.

“다 썼어?” 

유소호가 씨익 웃으며 속삭였다. 

“다 못 써. 이틀 줘도 다 못 써. 여기에 가지고 와서 쓰면서 대신 지키고 있을 테니, 넌 저기에 기대서 자.” 

임새옥이 헤헤 웃으며 작게 물었다. 

“넌 효도를 이렇게 하니?” 

유소호는 씨익 웃고는 서책을 가지고 와서 등불을 켜고 적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고, 밝게 뜬 달이 창살을 통해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이 진지하게 글을 베끼는 유소호의 얼굴을 비추고, 조상 위패 앞에서 깊이 잠든 임새옥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유소호가 챙겨줘서 오래 무릎을 꿇진 않았지만, 임새옥의 귀한 무릎은 결국 빨갛게 부어올랐다. 이날 유소호는 아침 일찍 장작을 주우러 나갔고, 유씨는 일거리를 챙겨 외출했다. 밭에서 나올 생계가 없어졌으니, 교낭에게 부탁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임새옥이 절뚝절뚝 물을 길어 세수하는데 노씨가 조삼저를 안고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 별일 없으면 동생 좀 보…….”

노씨는 말을 마치기 전에 임새옥의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시모에게 맞은 거냐?” 

임새옥이 황급히 그녀를 끌어 앉히고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씨가 그녀의 바지를 걷었다. 벌게진 무릎을 본 노씨가 손뼉을 치며 펄쩍 뛰었다. 

“이런 천벌 받을 짓을. 곱게 기른 딸을 보냈더니 이런 짓을 해?” 

마침 안으로 들어오던 유씨가 그 말을 듣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임새옥이 황급히 노씨를 잡으며 웃어 보였다. 

“어머님, 우리 어머니가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어요. 금방 가실 거예요.” 

노씨가 임새옥의 은근한 눈빛을 알아들을 리가 있나. 그녀는 조삼저를 앉은 채 임새옥을 병아리 들 듯 들어 올렸다. 

“안사돈, 내가 딸을 잘 못 가르쳐서 폐를 끼쳤네요. 바로 데려가서 잘 가르친 다음에 다시 보내지요.” 

노씨가 이렇게 말하며 노려보자, 유씨는 얼굴이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딸을 감싸는 친정이 어디 있나. 

시어머니에게 혼 한 번 나지 않는 며느리는 또 어디 있을까. 

친정에서 어찌 시가 일에 간섭을 하나. 

하지만 노씨가 이치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잘 아는 유씨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임새옥만 다급해서 펄쩍 뛰면서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누군가 당황해서 고함쳤다. 

“조 대낭, 여기 있었구려. 큰일 났소, 삼랑이 싸우고 있소!” 

깜짝 놀란 노씨와 임새옥은 얼이 빠졌다. 

조삼랑처럼 착실한 사람이 싸움을 한다고? 

“어머니, 맞는 건 아니겠죠?” 

임새옥이 고함쳤다. 노씨는 곧바로 임새옥을 놓아주고 곁에 있던 쇠스랑을 들고 튀어 나갔다. 임새옥은 식겁해서 조삼저를 안고 따라갔다. 

노씨는 조삼저를 낳은 후 더 퉁퉁해졌지만, 동작은 여전히 재빨랐다. 임새옥은 조삼저를 안고 헐떡거리며 따라갔다. 사실 일이 벌어진 곳은 그리 멀지 않은 조삼랑의 서쪽 비탈 작은 밭이었다. 임새옥이 도착했을 때, 노씨는 이미 장정 하나와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아주머니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임새옥은 발을 동동 굴렀고, 어머니가 싸우는 걸 본 조삼저는 우앙 울어 재꼈다.

“저아, 너희 집 땅이 장안네 땅을 침범했는데, 네 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아서 싸움이 났단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열어서 이러쿵저러쿵 정신없이 떠들었지만 임새옥은 바로 알아들었다. 

이곳은 조삼랑 부친이 생전에 가지고 있던 땅으로, 분가할 때 넷째 아들 조사랑에게 주었다. 조삼랑은 침수지만 받는 바람에 노씨가 적잖게 생활고를 겪었다가 올해 겨우 조사랑에게서 이 땅을 얻어왔는데, 아직 씨도 채 뿌리지 못한 상태였다. 

조삼랑은 할 일 없을 때마다 와서 밭을 갈았는데, 이웃집 조장안이 찾아와 다시 땅을 재야 한다는 둥, 조삼랑이 선을 넘었다는 둥, 잔소리를 해댔다. 손에 돈을 조금 쥔 조삼랑은 예전과 달리 몇 마디 따졌고, 어쩌다 보니 싸움이 난 것이다. 

조삼랑이 어떤 사람인지, 마을 사람들이 모를까. 간이 백 개 생겨도 제 것 아닌 걸 탐낼 사람이 아니었다. 임새옥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노씨가 조장안의 처에게 떠밀려 비틀거리자 나설 준비를 하면서 곧바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지보 조대산이 오더니 싸늘한 얼굴로 고함쳤다. 

“뭐 하는 거요! 마을 이웃끼리 이게 무슨 짓이야!” 

조장안네는 곧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아차 하는 사이에 조삼랑이 자기네 땅을 차지했다고 호소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노씨는 모질게 두들겨 맞고 머리가 어질거려 바로 대답하지 못했고, 조삼랑은 너무 기가 막혀 말문이 막혔다. 어쩔 수 없이 임새옥이 튀어나와 한마디 하자마자, 조 지보가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누가 남의 땅을 차지하면 두 배로 돌려줘야 한다고 조상님이 정했네. 삼랑, 할 말 더 있는가? 자네처럼 착실한 사람이 이런 수작을 부릴 줄은 몰랐군. 장안네가 땅을 비워놓긴 했어도, 그래도 그건 장안네 땅이지. 어찌 그걸 욕심 내나.” 

조 지보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하자, 노씨가 당장 침을 뱉었다. 

“우리 말은 한마디 들어 보지도 않고, 왜 우리가 빼앗은 거라고 확신해요? 여긴 우리 삼촌이 농사짓던 땅이라고요!”

“말 한번 잘했네. 조사랑이 농사지을 때는 줄곧 아무런 일 없이 조용했는데, 왜 자네 부부에게 넘어간 후로는 이런 일이 생기나! 정말이지 조씨 가문 체면이 땅에 떨어져서야 원.” 

“우리가 언제요! 그랬대도, 조사랑이 한 짓이겠지요!”

노씨는 미칠 듯이 화가 나서 펄쩍 뛰며 외쳤다. 인파 속에서 구경하던 조사랑의 처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와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장안 아저씨, 나와서 말 좀 해 봐요. 해마다 와서 보지 않았어요? 우리가 언제 땅을 차지했어요? 괜히 구정물 뿌리지 말아요.” 

조사랑은 줄곧 분수를 지키는 좋은 이웃이었다고, 조장안이 바로 나와서 증언했다. 노씨야 욕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도, 이치를 따질 줄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화가 나서 얼굴과 목이 시뻘게져서 가슴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다 같이 짜고 우릴 괴롭히려는 게지. 천벌 받을 것들! 들이밀어도 싫다고 마다하니까, 일부러 우리 같은 착한 사람을 찾아와 화풀이하는 거잖아요! 하늘님, 똑바로 좀 봐주세요!” 

한바탕 쏟아지는 욕설에 조 지보의 안색이 시퍼레졌다. 구경하러 오는 사람은 더 많아지고, 말도 더 많아지는 걸 보고 조 지보가 소매를 휘둘렀다. 

“무슨 짓을 했는지 자기가 제일 잘 알겠지! 어서 땅을 재고 경계석을 고쳐 세우게. 괜히 껄끄러운 일 만들지 말고.” 

조 지보가 사적인 원한을 공적으로 풀고 있음을 바보라도 알아차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조장안 역시 지보의 지시를 받고 수작을 부려 모함하는 것이고. 조장안이 조대산의 조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으려나.

정말로 누군가가 나서서 땅을 재려고 하자, 노씨가 후다닥 달려가 절대로 안 된다고 붙들었다.

“삼랑! 조상의 법도를 망칠 생각인가!”

조 지보가 돌아서며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말에 노씨도 겁을 먹었다. 정말로 조대산의 노여움을 사서 마을 규칙이니 조상 법도니 하고 들고나오면 일가가 마을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온 가족의 살길이 끊기게 된다.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며 사람들이 땅을 새로 재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으로 반을 내어주고 보니, 이 땅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조대산은 바닥에 꿇어앉아 목놓아 우는 조삼랑과 노씨를 보고 콧방귀 뀌며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나라엔 국법이, 가문엔 가법이 있네. 나 조대산이 지보 자리에 있는 한, 아무도 규칙을 어지럽힐 수 없네.”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평소에 지보가 세운 규칙을 거스른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기 시작했다. 조대산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매우 흡족해해서는 목놓아 우는 조삼랑 부부를 성가신 듯 힐끔 보고는 소매를 휘둘렀다. 돌아가려고 뒤돌아서는데 임새옥이 진흙을 집어 던지면서 “이 개새끼!” 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미처 방비하지 못한 조대산은 그대로 얼굴에 진흙을 얻어맞았고,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조 지보는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되는 대로 얼굴을 닦았다. 

“우리 어머니를 괴롭힌다! 어머니를 괴롭힌다!” 

조금단도 바로 따라서 바닥의 진흙을 주어서 연달아 집어 던졌다. 힘이 세진 않아도 열 개 중 여덟 개는 조 지보를 맞혔고,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떨어진 조대산은 몇 걸음 만에 달려가 손을 휘둘렀다. 한 대 맞은 조금단이 바닥을 구르자, 임새옥이 꽥 고함치며 조삼저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다짜고짜 조대산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아무래도 조대산은 성인이라, 몇 대 맞고는 금세 그녀를 비틀어 잡았다. 

“무식한 여인네에 무식한 딸년이군.” 

때리려고 손을 치켜드는데, 갑자기 나타난 손에 붙들렸다. 유소호가 잔뜩 화가 나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네를 괴롭히다니. 그게 사내가 할 짓입니까?” 

유소호가 호통치며 그를 밀어내고 임새옥을 잡아당기려 했다. 임새옥은 그 틈을 타 조대산을 걷어찼다. 뼈를 제대로 걷어차인 조대산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손을 치켜드는데, 유소호도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금세 세 사람이 뒤엉켜 혼전이 벌어졌다. 한순간 어른들이 하하 웃는 소리, 아이들이 떠들어대는 소리, 여인들이 우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돌연 징 소리가 울렸다. 야단법석이던 사람들이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마을의 방물장수 조성실이었다. 그는 놀라고 두려운 얼굴로 달달 떨면서, 유소호 부부에게서 간신히 벗어나서 꼴이 말이 아닌 조대산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이리, 이리 오너라! 현령 나리 오신다!” 

그 말에 사람들은 난리가 났다. 

이런 외진 촌구석에 현령 나리 같은 귀인이 오다니!

조성실은 거의 울 정도로 겁에 질렸다. 아침에 마을에서 나가자마자 위풍당당한 아역(衙役: 각 관청에서 잡역에 종사한 사람) 몇 명을 만났다. 그들이 자신들은 현 관아에서 온 것이라며 십방촌이 어디인지 묻자, 조성실은 당황해서 장사도 내던지고 그들을 모시고 마을로 들어왔다. 

그런데 마을이 텅 비었길래, 인파를 따라 이곳으로 온 것이다. 멀리서 이 혼란스러운 광경을 본 순간부터 조성실은 배가 뒤틀릴 정도로 겁을 먹었다.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고, 고함쳐도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촌사람이지만, 이런 장면을 현령이 보았다간 분명 좋을 게 없다는 건 알아서, 할 수 없이 들고 있던 징을 친 것이다. 

조대산이 아마 가장 놀랐을 것이다. 혹은 기쁘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고. 

친척인 소리(小吏: 하급 관리)가 현령 대인께 나를 소개해 준 걸까? 그래서 현령 대인이 특별히 찾아온 건가?

나, 나, 나 조대산, 조상님 묘 앞에서 이제 대길이 트이려나 보다!

조대산은 거의 넘어질 듯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든 이의 시선이 향한 곳에 아역 네 명이 호위하고 있는 검은 가마가 서 있었다. 가마에서 새하얀 얼굴에 수염을 기른 중년 사내가 푸른 비단 장포 차림으로 내려와서 고요한 마을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이분은 현령 주 대인일세.”

고개를 조아리고 절하는 조대산을 알아본 아역 하나가 다급하게 말했다. 

전임 현령이 떠난 다음, 반년 후에야 새 현령이 부임했는데 이 현령은 성이 주(朱)씨요, 이름이 문청(文淸)이었다. 원래는 지주(知州: 송나라 주州를 관리하는 벼슬)였고, 삼사사(三司使: 북송 전기 최고 재정 장관) 증포(曾布: 북송 정치가) 대인의 제자였다. 증포 대인이 사건에 휘말려 좌천된 후, 주 대인도 함께 연루되어 지방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역사에 꽤 상세히 기록된 일이고, 매우 복잡한 인과가 있었다. 하지만 일제히 꿇어앉아 대인을 뵙고 있는 시골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관계없는 일이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흥미가 없어서 알아볼 생각도 없었다. 

주문청은 잘 보이려고 비굴하게 웃음 짓고 있는 사내가 바로 이곳을 관리하는 관사 같은 자임을 알아봤다. 지나치게 몸가짐에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닌가 싶긴 했지만, 외진 시골 사람을 상대로 그렇게 따질 것도 없어서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비굴하게 웃음 짓는 관사와 수많은 마을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서 일어나게. 공적인 일로 온 것이 아니니 예 갖출 것 없네.” 

조대산은 고개를 몇 번 더 조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령을 자기 집으로 모실 생각에 에워싸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쫓아냈고, 조대산의 처는 그걸 보고 후다닥 집으로 돌아갔다. 대단한 분이 오셨으니 당연히 청소부터 해야 하지 않은가.

“됐네, 됐어.” 

주 현령은 지나치게 긴장한 관사를 달래주려고 온화하게 말했다. 

“이곳은 분위기가 참 좋군.” 

조대산은 현령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훑었다. 황량할 정도로 깔끔한 땅이 뭐가 좋은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물론 반박할 리는 없었다. 그는 현령의 걸음이 밭으로 향하자 바짝 뒤쫓았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구경해야 하는 원칙에 따라 다 함께 앞으로 이동했다. 어린아이들은 폴짝폴짝 맨 앞으로 달려가, 의복이며 차림새며 모두 신기한 이 어른을 아무런 거리낌 없는 얼굴로 바라보며 장난쳤다.

조대산이 어서 아이를 데리고 가라고 눈을 부릅뜨며 호통치자, 주 대인은 향취(鄕趣: 시골의 정취)니 동진(童眞: 천진난만한 아이)이니 어쩌고 못 알아들을 말을 하며 웃는 얼굴로 그를 저지했다.

“아 참, 이 마을에 누가 연근 농사를 지었다고?”

한참 둘러보며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를 살펴본 주 대인이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라, 지나치게 긴장했던 조대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나리께 아룁니다. 마을 백성 조삼랑입니다.” 

조대산은 현령이 이곳에 연근 농사지은 사람이 있는 걸 어찌 아는지 생각해 볼 배포도 없이, 그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주 대인의 얼굴에 놀라고 기쁜 기색이 스쳤다. 심지어 조금 들뜬 것도 같았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조삼랑인가?”

목소리가 크지 않았지만, 호기심에 귀를 세우고 있던 마을 사람들은 똑똑히 들었다. 사람들은 조대산이 부르기 전에 일제히 고함쳤다. 

“조삼랑, 조삼랑! 현령 나리께서 찾으시네!”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자, 조대산은 땀이 삐질 흘렀다.

“자네, 어서 가서 불러오게!” 

지목당한 사내가 쪼르르 달려가더니, 몇 걸음 만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넋 나간 얼굴로 조대산을 바라보며 말도 못 하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했다.

조대산이 발을 구르며 고함쳤다. 

“뭐 하는 게야! 할 말 있으면 말로 해야지! 손짓, 발짓 뭐 하는 것이야!”

행여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주 대인의 심기를 건드릴까 걱정이었다. 

“조삼랑 일가는 아직 밭에서 울고 있는걸요.” 

안 그래도 긴장했던 사내는 조대산이 고함치자 놀라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 말에 조대산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면서 무심결에 주 대인을 바라봤다. 주 대인 역시 그 말을 듣고 그를 돌아봤다. 

“울어? 무슨 일이기에?”

주 대인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밭으로 향했다. 과연 그곳에 어른과 아이 몇이 둘러앉아 있었다. 

조삼랑은 이때 이미 땅을 잃은 슬픔은 잊어 버리고, 현령 대인이 부른다는 말이 얼굴이 시커메진 조대산 입에서 나왔을 때부터 슬픔은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할아버님!”

조삼랑은 조대산을 덥석 잡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벌써 울음을 멈추고 얼굴이 창백해진 노씨를 가리켰다.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전히 시시덕거리는 조삼저와 금단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집에 목숨이 몇입니까. 잘못했습니다. 마음대로 때리고 벌하십시오. 하지만 관리 나리를 뵙는 건 안 됩니다.” 

조대산은 속으로 한시름을 놓고는 조삼랑을 일으키며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어찌 됐든 집안일 아닌가. 우리끼리야 어찌 때리고 욕해도 상관없지만, 밖에서야 그럴 수가 있나. 내가 어찌 자네를 사지로 몰아넣겠나.” 

그 말에 조삼랑은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임새옥과 유소호는 싸늘하게 코웃음 쳤다. 

“관리를 뵙는 게 어때서요? 제대로 이치를 따져달라고 현령께 말씀드려야겠어요.”

이미 정신을 차린 노씨가 두 사람을 향해 호통쳤다. 

아이들이라 역시 마을의 규범을 잘 모르지! 현령 나리 덕에 억울함을 풀면 뭐 하나. 결국은 마을에 설 자리를 평생 잃어버리게 되는걸. 어찌 됐든 현령 나리가 한평생 우리를 지키는 것도 아닌데!

조마조마한 조대산 역시 두 어린애의 불경한 말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조삼랑에게 몇 마디 당부하여 조금 전에 일어난 일을 입막음한 후에야 그를 데리고 주 대인 앞으로 갔다. 조삼랑은 지시가 있기 전에 알아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주 대인이 웃으며 일어나라고 해도 조삼랑은 재차 가당치 않다고 외쳤고, 결국 조대산에게 걷어차인 후에야 벌벌 떨며 일어섰다. 

“네가 연근을 취풍루에 팔았다고?” 

주 대인은 한참 그를 살펴보다가 느긋하게 묻고는 일어서며 뒤를 향해 손짓했다. 

“오 장궤, 이자가 맞는가?”

주 대인을 따르던 사람 중에 한 퉁퉁한 사내가 나와서 눈을 크게 뜨고 조삼랑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인께 아룁니다. 이 사람이 맞습니다.”

조삼랑은 눈앞에 나타난 사내를 바라봤다. 그날 연근을 사준 그 은인 아닌가! 

망했다! 연근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구나! 

그는 무의식중에 큰 사달이 났다고 생각했다. 

누가 먹고 잘못된 건 아니겠지? 집에서 기르던 병든 닭을 팔았다가 사람이 죽어서 송사를 겪은 시골 사람 이야기를 빈번하게 들었었던 조삼랑은 초조해져서 무릎을 꿇었다. 

“대인, 소인은 모르는 일입니다. 소인은 그저 팔기만 했습니다. 소인 집에서 심은 게 아닙니다. 그건, 그건…….”

땀을 한 바가지 흘리던 조삼랑은 임새옥 곁에 서 있는 유소호를 보고는 눈을 질끈 감고 가리켰다. 

“저, 외지에서 온 유씨의 아들이 심은 것입니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 히익 소리를 내며 현령 앞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 귓속말하기 바빴다. 

얼마 전 수확한 조삼랑네 연근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네. 

사고를 친 게지. 

게다가 현령 나리까지 움직일 정도로 큰 사고야. 

아무리 그래도 조삼랑이 그 일을 유소호에게 미룰 줄은 몰랐네그려.

임새옥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유소호를 바라봤더니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임새옥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가소롭고 가련했다. 그녀는 유소호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그녀의 마음을 느낀 유소호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그녀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임새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이고 예를 행했다. 

“만생(晩生: 늦게 태어남, 어린 사람이 자기를 낮춰 부르는 말), 유문장, 대인을 뵙습니다.” 

그들 부부야 연근이 절대로 문제가 될 일이 없고 오히려 귀인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임새옥이 유소호와 재배업을 시작한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 연근을 팔 때 임새옥이 유소호를 꼭 보내려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것 때이었다. 다만 조삼랑이 거절했었다. 사실 두 사람은 혹시 돈줄이 찾아왔을 때, 조삼랑 부부가 재물 욕심에 농사에 쓸 자금을 가로채 버리면 어쩌나 걱정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조삼랑이 불똥이 튈까 두려워서 발을 싹 뺄 줄이야. 역시 사람의 계획은 하늘의 뜻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주 대인은 앞으로 나서는 소년을 바라봤다. 조악한 장삼에 흙이 여기저기 묻어있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걸음걸이가 침착한 것이 행동거지만 보아도 시골 사람과 매우 달라 보였다. 입을 열었을 땐 더더욱 청풍이 불어오는 듯 고상함이 느껴졌다. 

“소상공(小相公), 그리 예를 갖출 것 없네.”

주 대인은 소년의 첫인상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조대산이 곁에서 이 소년이 기근을 피해 외지에서 와서 이곳에 정착한 사람이라고 소개했을 때 바로 알아챘다. 주문청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줄곧 현령 직급에 머문 관리가 아니고 한때 지부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한눈에 이 소년에게 훌륭한 배경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임새옥은 한쪽에 얼떨하게 서서 속으로 자기 남편 이름이 알고 보니 유문장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소상공, 올해 신선한 연근을 가장 먼저 먹는 행운을 갖게 되어서 본관(本官)이 매우 기뻤네. 난 또 경험이 풍부한 농부가 한 일인 줄 알았더니, 출중한 젊은이일 줄은 몰랐군. 이 노부(老夫), 정말이지 기쁘고 위안이 되는군.”

주 대인이 감탄하며 말하자, 유소호와 임새옥도 유달리 마음이 들떴다. 가장 먼저 연근을 먹게 된 사람이 현령 대인일 줄은 두 사람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유소호는 겸허히 인사한 후 사정을 간단히 설명했다. 주 대인은 흥미를 보이며 길 안내하라고 지시하고는 몸소 조삼랑의 밭으로 향했다. 

“대인, 제 지식은 대부분 책에서 본 것입니다. 실천해 낸 것은 다 제 졸형(拙荊: 우처愚妻, 자기 아내를 낮추는 말) 덕분입니다.”

유소호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 사이에서 웃는 얼굴로 서 있는 임새옥을 바라봤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연근이 가지고 온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부끄럽고 후회스러워서 얼굴이 거무죽죽해진 조삼랑을 제외하고는 다들 부러운 표정이었다. 이런 상황에 조 지보의 위협이 두려울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호의를 드러내며 유소호를 빤히 바라봤다. 조삼랑이 그런 행동을 했으니, 조 대저는 이제 유가에서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소상공의 눈을 더럽히지 않도록 다들 그녀를 저쪽으로 밀어냈었다. 그런데 유소호가 그 영광을 그녀와 나눌 줄이야!

얼마나 후덕한 사람인가! 

마을 사람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조 지보를 두려워하지 말고 제 딸을 시집보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그랬다면 오늘 영광은 제 것일 텐데!

임새옥이 서둘러 앞으로 나와 예를 갖췄다. 

“촌부 조씨, 대인을 뵙습니다.” 

주 대인은 오늘 안목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우연히 든 생각에 이렇게 나와본 것인데, 의외의 일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눈앞에 있는 소년의 어린 아내는 아직 소녀처럼 단장하고 있었다. 차림은 보통 촌사람보다 더 궁색했지만, 행동거지에 분명히 설명할 순 없는 기민함이 엿보였다. 

참으로 잘 어울리는 배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부의 간단한 소개를 들은 주 대인은 갈수록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장난스럽게 떠올리고는 곧 잊어버렸던 그 생각이 다시 튀어나왔다. 

“그토록 신기한 연근이니 혼자 독점할 수가 없어서 요주(饒州)에 재임 중인 증 대인에게 보냈지. 증 대인께서 보시고는 기이한 일이라 연신 칭찬하셨네. 내가 다스리는 성안현을 ‘청우(靑藕: 신선한 연근)의 고향’이라 부르겠다 하셨지. 그날은 사양했는데, 오늘 자네 부부 두 사람을 만나고 나니 후회가 되는군. 그 칭호를 받아서 성안현 전체에 퍼트려야 마땅했어. 본관이 성안 현주가 된 보람이 있었을 것을.”

유소호와 임새옥은 눈빛을 주고받았다. 

너무 과한 칭호인데? 북방의 작은 성을 남방에서 온 연근의 산지로 부른다고? 

“대인, 가당치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저희 연근이 며칠 일찍 시장에 나간 것뿐입니다. 생산량은 실로 미미합니다.” 

유소호가 서둘러 말했다. 

“소상공에게 이러한 재주가 있는데 생산량이 적을까 걱정인 겐가. 이 마을 땅에 전부 연근을 심으면 적지 않겠지.” 

주 대인이 눈앞에 보이는 개간지와 미개간지를 가리켰다. 부부 두 사람의 겸손함에 그는 갈수록 흥미가 생겼다. 겸허한 사람이라야 일 처리가 믿음직한 법이니까. 두 사람이 기뻐하며 미친 듯이 장담하며 승낙했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퇴당고(退堂鼓: 조당에서 물러날 때 치는 북. 어떤 일을 그만둘 때 쓰는 표현)를 치고 물러섰을 것이다. 

임새옥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이 쉽지, 진짜 하려면 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재력이 더 중요한데. 연근 가격에 이끌려 대부분 앞다퉈 심을 수는 있겠지만, 위험은 누가 감당하나? 

뭐 하나라도 순조롭지 않으면 바로 양을 줄이거나 아예 그만둘 가능성도 있고.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어찌 살라고?

지금 오월 일대(吳越: 춘주 전국시대 오나라, 월나라 영토)에 가뭄 때문에 심각한 기근으로 난리라는데, 아직 이쪽까지 여파가 미치지 않았지만, 온 마을의 밭에 곡식을 심지 않으면 어떤 후환이 생길지 상상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설명을 들은 주 대인은 아쉬운 마음에 진정하고는 유소호에게 글공부는 어떤지 물었다. 올해 주시(州試)에 참여할 예정이고 참가 자격 때문에 걱정이라는 것을 알고는 바로 보증해 줄 것을 약조했다. 주 대인의 이번 출행이 유가에 가져다준 가장 큰 일이면서 기쁜 일이었다. 

존귀한 현령 대인을 배웅한 후, 유소호는 마을 사람들의 축하를 들을 겨를도 없이 이 기쁜 소식을 유씨에게 알리려고 나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유씨가 천지신명께 비는 탁자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슬피 우는 걸 보고 두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어머니, 무슨 일이에요.” 

부부 두 사람이 같이 달려가 무릎을 꿇고 물었다. 그러자 유씨가 눈물을 닦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좋아서 그런다. 이랑, 드디어 주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구나. 유가 앞날에 희망이 생겼어.”

유소호와 임새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크게 인기척이 났으니 유씨도 사람들 뒤에 서서 모두 다 보았고, 기쁜 일이라 조상 앞에 절하고 기도를 올린 것이다. 

유씨는 조 지보와 싸우느라 엉망이 된 두 사람도 추궁하지 않았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잘난 아들을 위로해야겠다고 부엌으로 향했다. 임새옥은 시어머니가 부엌에 들어가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제가 하겠다고 나섰다. 일가가 그렇게 한창 화기애애할 때, 노씨가 대문에서 매무새를 다잡고는 느릿느릿 들어갔다. 

“안사돈, 안사돈.” 

임새옥은 못 본 체하며 안으로 들어가 면을 반죽했고, 유소호도 글공부하러 방으로 들어갔다. 노씨가 샐샐 웃으며 다시 부르자 유씨는 그제야 싸늘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대답했다. 노씨는 그녀가 대답해준 것만 해도 몹시 기뻤다. 자기네가 억지를 부린 걸 잘 아는데 유씨의 태도를 따질 수는 없었다. 

“집에 일이 있는데, 큰애가 잠시 다녀가도 될까요?”

유씨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새옥이 양손에 가루를 잔뜩 묻히고 나왔다. 

“밥하는 중이에요. 시간이 어디 있어요. 무슨 일인지 여기서 말씀하세요.” 

노씨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부릅떴지만, 유씨도 함께 있으니 화를 낼 수 없어서 꾹 눌러 참고 말했다. 

“할 말이 있다. 얼른 따라오렴. 오래 안 걸린다.” 

눈짓을 보내는데도 임새옥이 꿈쩍도 하지 않자 노씨는 속이 부글부글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집에 사람이 왔다. 강녕부에서 왔다는구나.” 

노씨는 잠시 생각하다가 유씨를 힐끔 보고 덧붙였다. 

“이 부인께서 보낸 사람이라더구나.”

이 부인? 

임새옥은 섬돌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려왔다. 

그러게, 깜짝 놀랄 연근을 보냈는데, 소식 하나 없을 리가 없지. 

오늘에야 온 것이구나. 늦어도 너무 늦었는데?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지? 

이 임새옥에게 겹경사가 찾아왔구나!

<고대 지주> 3권에 계속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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