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57)

시간이 또 느릿느릿, 보름이 흘렀다. 화 대낭이 다시 찾아오지 않자, 임새옥은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조삼랑 집안 형편으로는 혼수를 줄 여력이 없으니 혼인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일단 열심히 연근 시중에 집중했다. 

청명이 지나고 나날이 날씨가 따듯해졌지만, 아직 천막을 치울 정도는 아니었다. 똥 거름도 한 번 더 추가하고, 수위(水位)를 높여주고, 두꺼운 덮개를 한 겹 거두었다. 그러자 모투지 너머로 촘촘하게 일어선 연잎이 보였다. 매번 천막을 열고 환기할 때마다 잎이 흔들거렸다. 강남 연못에서 자라는 하늘 끝까지 닿을 듯한 연잎 같은 느낌도 조금은 풍겼다. 

근래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 밭에 주목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이 밭을 에워싸고 호기심에 소곤거리고는 했다. 조삼랑은 뭘 물어도 모른다고 했고, 임새옥이 자세히 설명해주어도 알쏭달쏭했다. 그중에 몇 명이 식견이 좀 넓은 사람에게 이게 무엇인지 묻고 돌아와서는 조가가 부자가 될 거라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검증된 말은 아니었지만, 결국 구경꾼이 더 많이 몰려들었다. 조삼랑은 더더욱 조심하며 행여나 누가 훔쳐 갈까 밤낮없이 천막 앞을 지켰다. 

오늘 임새옥은 연근을 살펴본 후에 마당에 앉아 광주리를 짰다. 조삼저는 곁에 앉아서 금단과 함께 흙장난하느라 수시로 먼지를 날리며 까르륵 웃었다. 임새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 다가올 수확을 기대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화야.”

밖에서 쭈뼛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었더니, 그녀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애가 꽃무늬 홑옷을 입고 바구니를 옆에 끼고 서 있었다. 서촌에 사는 지보 조대산의 딸, 아명 난향인 아이임을 알아보았다. 

“난향 언니, 어서 들어와.” 

임새옥은 속으로 의아해하며 다급히 일어나 맞았다. 아무래도 진짜 나이가 서른이 넘어서, 조화의 몸에 들어온 이래 마을 아이들과 별로 교류하지 않고 항상 혼자 다녔다. 동년배 여자애들도 같이 놀자고 찾아온 적이 별로 없었고, 요즘은 나이를 더 먹어 집안일도 바빠져서, 같은 마을에 살아도 얼굴 마주칠 일도 없는 아이였다.

“어머니 찾아왔어? 밭에 식사 가져다주러 가셨는데.” 

임새옥은 머리를 긁적이며 앉으라고 말했다. 난향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힐끔 보고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같이 놀자고 왔어.”

임새옥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본 그녀가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아직 우릴 원망하니? 그날, 일부러 널 우물 둔덕에 올라가라고 한 건 아니야.”

임새옥은 그 말에 무슨 일인지 알아들었다. 언젠가 어렴풋이 노씨가 욕하는 걸 들었었다. 그 망할 년들이 소화를 물들여서 우물에 올라가는 바람에 빠져서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마을 아이들은 원래 놀 만한 곳이 없어서 그녀도 어릴 때 우물가에 많이 가서 놀았다. 작정하고 사람을 해치는 아이가 어디 있을까. 

“그 후로 놀자고 오지 않길래……. 우리 때문에 화난 건가 해서…….”

난향이 이어서 하는 말에 임새옥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냥 내가 너무 바빴어. 밭에서 일도 해야 하고, 동생들도 돌봐야 하고. 놀 시간이 어디 있어. 나갈 틈이 없어. 언니가 시간 있을 때 와주기만 해도 기쁜데, 화가 왜 나.”

난향은 작은 얼굴에 웃음을 드러내며 바로 앉아서 바느질거리를 꺼냈다. 수다를 떠는데, 죄다 이 집은 어쩌고, 저 집은 저쩌고 하는 이야기라 임새옥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특히 열몇 살 아이가 하는 말엔 더 관심 없어서 그냥 묵묵히 들으며 가끔 대답하는 정도였다. 난향이 가끔 조삼저를 안아주기도 해서 마당 안은 꽤 화기애애했고, 여자아이들의 놀이터 같은 느낌도 들었다. 

“소화, 너 참 재주가 좋다. 아버지한테 들었어. 네가 심은 연근을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며.” 

난향이 바느질하는 손을 놀리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지만, 눈빛엔 부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임새옥이 깔깔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뭘 알아서. 다 소호가 도와줘서 그래.” 

요즘 묻는 사람이 많아서, 임새옥은 다 유소호에게 떠넘겼다. 유소호는 처음엔 이의가 있었지만, 임새옥이 쉴 새 없이 이건 네가 한 거고, 저것도 네가 한 거라며 칭찬했다. 게다가 원래 임새옥이라는 촌아이가 농사지을 줄 아는 걸 의아해하던 터라, 이래저래 정말로 자기의 가르침 아래 임새옥이 연근을 재배한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새옥의 천부적인 재능은 인정해주었다. 

노씨는 언짢아하며 임새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공을 모두 유소호에게 돌리면 연근을 판 돈도 나눠줘야 할까 봐서였다. 하지만 당당하게 내 딸이 기른 거라고 하지는 못했다. 자기조차 믿을 수 없는데, 남을 어떻게 설득하랴. 그렇게 임새옥은 바라던 대로 나날이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난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임새옥에게 바짝 다가가 속삭였다.

“아버지 말씀을 들어 보니까, 소호 집이 예전엔 매우 부자였대. 땅도 많았대. 그러니까 이런 솜씨가 있는 거구나.” 

임새옥도 궁금해하던 일이라 더 물어보려고 하는데, 난향이 수줍은 듯 일어서더니 주뼛주뼛 고개를 숙였다. 문 쪽을 돌아봤더니, 유소호가 괭이 한 자루를 끌고 들어왔다. 

“네 아버지가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유소호가 괭이를 담벼락 쪽에 가져다 놓고는 그제야 마당에 낯선 사람, 그것도 여자애가 있는 걸 깨닫고 다급히 나가려 했다.

임새옥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난향이 수줍게 손을 모으고 깍듯이 예를 갖췄다. 

“유 공자!” 

유소호는 마을 사람과 그리 거리를 두지 않는 데다가, 여자애가 먼저 아는 척하는데 모른 척하고 갈 수 없어서 답례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임새옥도 빙긋 웃으며 둘을 소개했다. 

“공자는 무슨. 소호라고 하면 돼. 조 지보 댁 대저아야.”

난향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안 되지. 공자는 우리 같은 촌사람과 다르다고 아버지가 자주 그러셨어.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달라? 

그런 느낌은 안 드는데? 

임새옥이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이 이러다가 예법 대회라도 열 것 같아서 서둘러 입을 열었다. 

“고마워. 와서 차 마시고 가.” 

유소호는 됐다고 하고 황급히 가버렸다. 임새옥도 그냥 해본 말이지 정말로 차를 끓여줄 생각은 없어서 웃으며 입구까지 배웅했다. 

자리로 돌아왔더니 난향이 얼굴을 붉힌 채 아직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난향 언니, 어서 앉아.” 

난향은 임새옥이 부르자 그제야 앉긴 했지만 말수도 적어졌고 마음이 붕 떠 보였다. 발그레한 뺨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걸 보고 임새옥은 갈수록 궁금해졌다. 

“왜 그래? 유소호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해마다 언니 집에 인사하러 가지 않아? 뭐가 그렇게 수줍어.” 

난향은 얼굴이 더 붉어져서 웅얼거리다가 인사하고 후다닥 가버렸다. 임새옥은 시골 여자애들은 아무래도 수줍음이 많아서 제 말에 당황한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붙잡지도 않았다. 

난향이 가기 전에 내일 또 온다기에 인사치레인 줄 알았더니 다음 날 오후에 정말로 올 줄 몰랐다. 게다가 약속이나 한 듯이, 마을에 다른 동년배 여자애들도 하나둘 놀자고 찾아오는 바람에 임새옥은 더 의아해졌다. 

임새옥은 큰 나무 아래 둘러앉아 재잘거리면서 바느질하는 여자애들을, 한 손에 조삼저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나무에 올라가려는 금단을 잡아끌면서 바라봤다. 골치가 매우 아팠다. 

사람은 사교 활동을 해야 하는 게 맞고, 임새옥도 겉도는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이 낭자들, 때를 못 가리고 찾아온 것 같은데? 

아우도 돌봐야 하고, 밥도 해야 하고, 밭에도 가야 했다. 바느질은 거들떠볼 시간도 없으니 그녀들과 사귀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애들은 저들끼리 알아서 잘 즐겼고 주인이 참여하지 않는 것에 불평하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심지어, 아예 주인의 존재를 잊은 것 같기도 했다. 

임새옥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조삼저를 방 안에서 일하는 노씨에게 들여보낸 다음 소중한 연근을 보러 밭에 갈 준비를 했다. 직접 가지 않고 유소호와 조삼랑에게만 맡기는 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임새옥은 마당에서 떠들썩한 여자애들을 보며 눈을 질끈 감고 이만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여자애들이 몽땅 일어설 줄은 몰랐다. 

“소화, 뭐 가지고 갈 거 있니? 내가 도와줄게.”

“너무 잘 됐다. 나도 가보고 싶었거든.”

“곧 꽃이 필 거라던데.”

그렇게 십방촌 사람들은 그날 저녁, 여자애들이 새해 때보다 더 많이 모여서 일제히 조삼랑의 밭에 나타난 것을 보게 되었다. 노을이 비스듬히 저문 석양 아래, 온통 비취색 같은 연꽃밭을 에워싸고 지지배배, 꾀꼴꾀꼴, 다정하게 속삭이는 여자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무리 둔한 임새옥도 자기의 ‘규중 밀우(閨中密友: 규수들의 절친한 벗)’들이 자신을 찾아오는 데 규칙이 있음을 깨달았다. 바로 유소호가 있을 때 찾아온다는 것. 혹은 농기구를 돌려줄 때. 또 혹은 그녀에게 연근 상황을 알려주러 올 때였다.

여자애들과 몇 번 우연히 만난 다음, 유소호는 더는 임새옥을 찾아오지 않았고 여자애들도 자연스레 흩어졌다. 조가 마당은 드디어 예전의 평화를 되찾았다. 

“설마, 그중에 유소호를 마음에 둔 사람이 있는 건가?” 

조삼저 덕에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임새옥은 홀로 나무 아래 앉아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때 방 안에서 노씨와 조삼랑이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화 대낭에게 돈을 더 줄걸. 지보 댁 큰애와 저 외지에서 온 아이 혼사 이야기로 바빠서 우리 큰애를 내버려 둘 줄 알았겠어요!” 

이로 실을 끊는지, 노씨의 목소리가 또렷하지 않았다. 

“그것참 이상하지. 유가네는 고아에 홀어미인 외지 사람인데 왜 너도나도 좋다고 그러지? 보산네도 말을 넣는다던데…….”

의문이 가득한 조삼랑의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임새옥은 그제야 무슨 일인지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십방촌에 외지 사람이라곤 유소호네 하나뿐이었다. 

이제 보니 그 여자애들, 남편을 구하러 찾아온 거였구나! 

노씨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어리석은 건 아니죠. 유소호가 재주도 있고 혼수도 필요 없으니까.”

조삼랑은 그 말에 무언가 떠오른 듯이 다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큰애도 가서 말 넣어봐야지 않소.” 

임새옥은 바늘에 찔린 듯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다리에 앉아 있던 조삼저가 넘어져서 우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노씨가 빗자루를 들고 방에서 튀어나왔고, 임새옥은 화들짝 놀라 얼른 조삼저를 안고 도망쳤다. 

청명이 지나자, 십방촌 주위의 휘영청 흐드러진 버드나무는 마치 하룻밤 만에 푸른 옷을 갈아입은 듯했다. 집에 칩거하던 농부들도 슬슬 밭에 나가 한 해 생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마을 어귀에 있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버드나무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녀가 손에 든 버드나무 가지를 내던지자, 금단은 같은 나이 아이들과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폴짝폴짝 달려가 잡으려 했다. 금단 혼자 세 가지를 잡고 우리 누이가 준 거니까 다 내 거라고 쉴 새 없이 외쳤지만, 아무도 상대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고함치며 각자 제 몫을 들고 그 자리에 앉아 버들피리를 불었다. 맑고 날카로운 버들피리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임새옥은 찢어진 소매를 보고는 노씨가 보고 또 한바탕 혼내기 전에 냉큼 말아 올렸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한 여인이 고래고래 고함치며 그리 멀지 않은 유소호 집에서 나왔다. 

“다 망한 형편에 주제도 모르고! 아직도 제가 대단한 줄 아나! 우리 저아가 좋대서 그렇지, 돈도 땅도 없는 외지 사람을 거들떠나 볼 것 같아? 이것저것 고르고, 따지고. 진흙에 사는 두꺼비가 선녀라도 얻어오려고?” 

머리에 꽃을 잔뜩 꽂고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밝은색 옷을 입은 여인이 허리를 흔들며 내내 툴툴거리며 걸어왔다. 다름 아닌 매파 화 대낭이었다. 임새옥은 그녀가 다가오자, 말을 걸까 봐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필 임새옥을 발견한 화 대낭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소리쳤다. 

“조 대저! 내가 한마디 해주는데, 앞으로 저 유씨네와 왕래하지 말아라. 괜히 평판 안 좋아진다. 내가 내일 좋은 혼처 가지고 오마.”

“마음 쓰실 거 없어요!” 

임새옥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벌써 저쪽으로 가버린 화 대낭은 그 말을 듣지도 못하고 바삐 가버렸는데, 때때로 돌아보며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임새옥은 화가 잔뜩 나서 가버린 화 대낭을 은근히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화 대낭은 다리가 부지런하고 말주변도 좋아서 혼담을 넣는 사람이 사방팔방에서 부지기수였다. 특히 화 대낭의 입은 흑백을 전도하고, 사람을 잘 되게도 망하게도 할 수 있었다. 유소호네는 안 그래도 친지와 벗이 없는 외지 사람인데 그녀에게 밉보였다간 더 고립될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다리가 저도 모르게 유소호네 집 쪽으로 향했다. 여자애들이 이때다 싶어 몰려든 후로, 유소호는 한동안 임새옥을 찾아오지 않았다. 밭에도 거의 나오지 않고 종일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담벼락으로 삼는 울타리는 겨우내 조금 너저분해졌다. 울타리 밑에 새로 헤집은 흙더미 사이로 푸릇푸릇한 새싹이 제법 나와 있길래 궁금해서 쪼그리고 살펴봤더니 시금치였다. 

꽤 세심하네. 씨앗을 남겨 놓았어. 

그런 생각을 하며 넋을 놓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려 서둘러 일어났다.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올린 유 대낭이 바느질 광주리를 끼고 웃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소매가 또 뜯어졌구나. 내가 꿰매주마.” 

임새옥은 제 소매가 다시 흘러내렸음을 깨달았다. 너덜너덜한 천이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부끄러워서 손을 뒤로 숨기며 괜찮다고 사양했다. 

하지만 유 대낭이 벌써 그녀의 팔을 잡고 돌 위에 앉혔다. 재빠르게 바느질하면서, 찔릴 수 있으니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임새옥은 기운 소매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감사 인사하고는 겸연쩍어하며 뒤를 가리켰다. 

“동생 데리고 놀고 있었어요. 이만 가볼게요.”

유 대낭은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아이들이 큰 나무를 에워싸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금단의 작은 다리는 기둥처럼 튼튼했고, 달리기도 다른 아이들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가난한 집 아이는 튼튼하게 자라지 못한다고 누가 그러나. 

유 대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랑이 그러던데, 연근이 거의 다 자랐다면서? 저아, 참으로 손이 야문 아이구나.” 

칭찬에 겸연쩍어진 임새옥이 고개를 돌리고 돌아가려는데 유소호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며 소리쳤다.

“내가 어제 가 봤다. 급하게 따지 마라. 5월은 지나야 한다.” 

손에 책을 들고 있는 걸 보니 글공부 중인 모양이었다. 며칠 못 본 새에 더 수려해진 얼굴에 임새옥은 멈칫했다. 조삼랑이 그날 ‘우리 큰애도 말 넣어 봐야겠다.’고 한 것이 떠올라서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알았다는 말만 남기고, 유소호가 뒤에서 뭐라고 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못하고 그 길로 돌아서서 달아났다. 

그녀는 온 들판을 뛰어다니는 금단을 찾아내 싫다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밭으로 끌고 갔다. 조삼랑은 언제나처럼 밭 경계에 쭈그리고 앉아서 강물이 서서히 밭으로 흘러 들어가는 걸 보고 있었다. 

“때가 되었는데도 농작물을 심지 못한다니, 정말 낭비구나.”

조삼랑은 이웃들이 자기 밭에서 바삐 움직이는 걸 보고는 절로 걱정이 되어서 겹겹이 자라고 있는 연잎을 바라봤다. 

여기서 연근이 몇 개나 나올까, 설령 나온대도 적어도 두 광주리는 이용에게 주어야 하는데, 남는 게 얼마나 될까 하는 걱정이었다. 

임새옥은 벌써 밭으로 내려가 연근 상황을 살피면서 말했다. 

“이제 한 달이 지나 소만(小滿: 양력 5월 21일 전후)만 지나면 수확해요. 그럼 이걸 팔고 벼를 사 와서 심으면 10월엔 수확할 수 있고요. 벼 수확이 끝나면 채소 좀 심고, 그럼 우리가 먹을 것도 있고 팔아서 돈도 벌 수 있어요.” 

조삼랑이 콧방귀를 뀌며 구시렁거렸다. 

“벼? 우리 밭에 언제 벼를 심었다고.” 

임새옥은 헤헤 웃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이용이 준 연근은 모두 상등품이었다. 옛말에 씨가 좋으면 반은 성공한 거라고, 이번 도박은 이긴 경기였다. 

그녀는 손꼽아 날짜를 세면서, 속으로 유소호가 쓸 만한 인재라고 감탄했다. 

저 재주로 농사짓지 않고 글공부하다니, 정말 인재 낭비지. 내 밑에서 제대로 배우면 지주가 되는 건 문제도 아닐 텐데. 

음? 내 목표가 지주 마누라인데, 좋은 짝 아니야? 

그 생각을 하자마자 화들짝 놀라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그대로 연못에 얼굴을 박고 싶어졌다. 

봄이 왔다고, 다 늙어서 사춘기라도 온 거야? 어린애를 상대로 이런 생각이나 하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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