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새옥이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도, 어느덧 새해가 되었다. 돈 들어올 곳이 사라졌고 노씨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올해는 여느 해보다 더 힘든 새해를 맞이해야 했다.
태어난 지 한 달이 되기도 전에 임새옥에게 떠맡겼던 금단과 달리, 조삼저는 그녀가 돌보지 않았다. 노씨의 말에 따르면, 변변치 않은 망할 년이 동생을 잘못 가르칠까 봐서라나.
그렇다고 임새옥이 한가하진 않았다. 노씨가 아이를 보는 바람에 그녀가 할 집안일이 많아졌다. 금단은 갈수록 짓궂어졌고 잠시만 눈을 떼도 사라져서 닭, 개를 쫓아다니고 나무에 기어 올라갔다. 바쁜 임새옥은 금단을 허리춤에 묶어 놓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임새옥은 밤이면 신년의 폭죽 소리를 들으며 대지주가 될 밝은 미래를 그렸다. 아무 신선이나 그녀를 보살펴 주어 기회를 주길 간절히 빌었다.
이번엔 임새옥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는지, 정말로 신선이 보살펴 주는 일이 일어났다.
2월 초이틀, 영부귀(迎富貴)의 날, 조삼랑 일가가 다 같이 모여 강피(糠皮: 쌀겨나 보리겨)로 만든 병자를 구워 먹고 있을 때 문밖에서 마차 소리가 들렸다.
(※음력 2월 2일을 부귀를 맞이한다는 뜻으로 영부귀迎富貴의 날이라고도 부른다. 토지 탄신일. 이날 이제 농사를 시작하니 건강을 빌고 허리를 탱탱하게 지켜준다는 의미로 탱요고撐腰糕라는 떡을 지져 먹는다.)
새해에 친척을 보러 오는 사람은 많지만, 십방촌에는 마차를 타고 올 만한 친척이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대 사회의 가난한 골목에 갑자기 고급 승용차가 나타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광경이었다.
입가에 부스러기를 묻히며 병자를 먹던 금단이 가장 먼저 발딱 일어나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찬 바람이 훅 불어오자, 조삼저를 안고 있던 노씨가 버럭 화를 냈다. 임새옥은 눈치 빠르게 일어나 금단을 데리고 오려고 방을 나섰다.
방에서 나가자마자 마당에 들어와 있는 사내 둘이 보였다. 서른 남짓한 두 사내 모두 두툼한 검은색 비단 모자를 쓰고 오래 입은 듯한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 원래 거리낌이 없고, 임새옥 역시 대갓집 규수가 아닌지라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곧장 다가갔다.
“여기가 조삼랑 댁인가?”
그중 퉁퉁한 사내가 묻는 말에 임새옥이 몸을 돌리며 아버지를 불렀다. 방에서 나온 조삼랑은 두 사내가 낯설지만 촌스럽지 않은 차림새를 보고는 웃으며 누구냐고 물었다
임새옥은 금단이 어느새 문밖에 세워둔 마차에 올라간 걸 보고 급하게 두 사람을 지나쳐 아이를 끌어내렸다.
“이 댁에 소화라는 저아가 있습니까?”
임새옥은 의아해서 돌아봤고, 조삼랑은 얼떨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내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며 웃었다.
“드디어 찾았군요! 연초부터 헛수고하진 않았군요. 우린 강녕부에서 왔소이다. 저아에게 줄 것이 있어서.”
임새옥은 말썽을 부리는 금단을 아랑곳할 겨를 없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소 관인댁 부인이 보내셨나요? 이렇게 일부러 오시다니, 이를 어째요.”
조삼랑은 그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방 안에서 소리를 들은 노씨도 조삼저를 안고 나왔다. 노씨가 어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말해도 두 사내는 손을 저으며 마차로 가서 두꺼운 덮개를 열고 광주리를 내렸다.
“네가 화저아지? 일부러 온 건 아니다. 경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 노야께서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 온 거다.”
사내 하나가 임새옥을 살피며 말했다.
임새옥은 그저 의아하기만 했다. 엄숙하기만 했던 대관인이 무슨 약속을 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내가 덮개를 치우고 내린 광주리에는 진흙이 잔뜩 묻은 연근이 가득했다. 그녀는 귓가가 콰앙 울리는 것 같아서 믿을 수 없는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안 그래도 긴가민가하던 두 사람은 어리벙벙한 임새옥의 모습에 더 불안해져서 눈빛을 주고받았다.
“고내내의 심부름으로 온 건 아니다만, 고내내께서 전해달라는 말도 있다. 절대로 이걸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더라. 정 안 되면 팔아서 돈으로 바꾸라고 하셨어.”
임새옥은 흥분한 마음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낭비하지 않아요! 낭비하지 않아요!”
그리고는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광주리 가득한 연근을 쓰다듬었다. 정확히는 한 광주리 금이리라. 아니, 한 광주리가 아니라 곧 두 광주리, 심지어 더 많아질 거다. 그녀는 벌써 땅과 건물이 쉴 새 없이 눈앞에서 증식하여 끝도 없이 늘어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조삼랑과 노씨도 몰려왔다. 그들에겐 매우 낯선 물건이고 어디에 쓰는 건지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금단이 마차에서 폴짝 내려왔다.
“누이, 이거 당곤(糖棍)이야?”
금단이 대뜸 입에 넣자, 연근을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는 임새옥이 대번에 뺏어왔다.
“먹으면 안 돼!”
처음 보는 누이의 사나운 모습에 금단은 놀라서 울지도 못하고 쭈뼛쭈뼛 노씨 옆으로 갔다.
“우린 길을 재촉해야 해서 지체할 수 없다. 화저아, 5월에 물건 가지러 다시 올 테니 잊지 마라.”
퉁퉁한 사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임새옥은 성공하지 못하면 노비로 팔아버리겠다고 했던 이용의 말을 당연히 기억했다.
“안심하시라고 이 공자께 전해주세요.”
임새옥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새옥이 이렇게 흔쾌히 대답할 줄은 몰랐던 두 사람은 자신만만한 여자애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바보 아닌가 생각했다. 두 사내는 자기네 노야가 이 귀한 것을 쓸데없이 버리게 되었다고 한탄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여자애를 팔아도 돈이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이게 뭐냐?”
사람들을 보낸 다음, 노씨가 광주리를 맴돌며 물었다. 임새옥이 채소라고 대답하자 실망한 눈치였다. 노씨에게 채소는 옷이나 은과 비교하면 실속 없는 물건이었다. 그보다 딸이 그 집을 떠났는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걸 보면 정말로 딸을 좋게 본 모양이다 싶었다. 그 생각을 하자 또 울화가 치밀어서 임새옥의 이마를 툭툭 찌르며 혀를 찼다.
“보고만 있어도 화가 나는구나! 이 화근, 망할 년!”
기뻐서 죽을 것 같은 임새옥은 노씨가 욕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광주리를 끌고 안으로 들어가자, 먹을 거라는 말을 들은 금단이 먹고 싶다고 난리를 부렸다. 임새옥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이건 씨로 쓸 거라고, 시간이 더 흘러야 먹을 수 있다고 달랬다. 금단이 짓궂긴 해도 누이를 믿는 아이라 금세 잊어버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들은 조삼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 바로 심는다고? 이 한겨울에 어떻게 심게?”
“아버지, 저 돈 좀 주세요.”
조삼랑이 펄쩍 뛰었다.
“집에 돈이 어디 있다고! 돈을 달라니, 뭐 하려고?”
정말로 천막에서 연근을 키우려면 자금이 꼭 필요했다. 임새옥은 알기 쉬운 말을 골라 조곤조곤 조삼랑에게 설명했다. 조삼랑은 알쏭달쏭하게 듣다가 눈을 부릅떴다.
“연초에 그게 무슨 허튼소리냐. 정말로 그리 귀중한 걸 심는 법을 네가 어찌 안다고. 어서 돌려주어라.”
조삼랑이 노씨에게 가서 알리자, 조삼랑보다 영리한 노씨가 바로 쫓아와서 이 관인이 왜 이런 걸 시키냐고 물었다. 안 그래도 그걸 물을까 가장 두려웠던 임새옥은 그저 헤헤 웃으며 그날 연근을 쓴 것, 그 바람에 맞은 것을 이야기했다. 물론 첩 이야기가 나왔던 부분은 빼고, 벌 받지 않으려고 큰소리친 건데 이 관인이 진심으로 여길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제 어쩔 수 없다고. 성공하지 못하면 천노(賤奴)로 팔려 가게 됐다고.
노씨는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생각했으나 한계가 있어서 머리를 굴려도 더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의문스러운 얼굴로 임새옥을 살펴봐도 차분하게 고개를 숙인 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내 말대로 해라. 밭에 던져 놓으면 되니까, 가서 던져 놔. 이 어미는 너랑 허튼짓할 돈 없다.”
게다가 이 관인이 어쩌면 딸을 사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별안간 기분이 좋아졌다. 딸의 한마디에 이렇게 큰 도박을 할 정도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게 아니겠는가. 팔아버린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첩으로 들일 마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노씨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노씨는 임새옥의 부탁을 거절했고, 당장이라도 이 아이를 그 집으로 보내버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임새옥은 한눈에 어머니의 속셈을 읽고는 눈치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저 묵묵히 밥을 다 먹고 금단을 안고 멍하니 문밖 흙더미 위에 앉았다.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호흡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뭐가 어찌 됐든, 인생을 뒤바꿀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힘내자! 초조해할 것 없어! 분명 성공할 거야!”
임새옥은 주먹을 불끈 쥐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뒤숭숭한 마음을 진정시키는데 멀지 않은 곳에 유소호의 허름한 천막이 눈에 들어왔다.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아!
임새옥은 연근 심을 적기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노씨가 친정으로 간다기에 남아서 집을 지키겠다고 먼저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그녀가 거슬리던 노씨는 흔쾌히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조삼랑이 직접 만든 외바퀴 수레를 밀고 처자식을 데리고 떠나기 무섭게 임새옥은 유소호를 집으로 불렀다.
“어디서 이걸 구했어?”
유소호는 눈 앞에 펼쳐진 물건에 깜짝 놀랐다.
역시 알아보는구나!
임새옥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길게 설명하지 않고 곧바로 말했다.
“나 이거 심을 거야. 도와줄 수 있어?”
유소호는 잠시 멈칫하다가 반질반질한 아래턱을 애어른처럼 문지르며 연근을 다시 힐끔 본 후에야 느릿느릿 대답했다.
“연근을 심으려면 깊은 연못이 있어야 해. 우리 마을엔 강밖에 없는데 그 물을 끌어와 연못으로 만드는 건 너무 어려워. 가장 중요한 건, 연근은 4월쯤에 재배하는데, 지금은 겨울이야. 이 연뿌리는 그때까지 못 가.”
정말 잘 알고 있었네!
임새옥은 다시 한번 놀랐다. 옛날 글공부하는 사람들은 손발을 움직이지 않고 오곡을 분간할 줄 모른다더니,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소호의 말이 이어졌다.
“이건 매우 귀한 물건이야. 내 생각엔 말이다, 소화, 늦기 전에 성에 가지고 가서 파는 게 좋겠다.”
임새옥이 급히 그의 말을 잘랐다.
“그냥 우리 집에도 저 비닐……. 흠, 네가 채소 심은 그거, 그거만 만들어주면 내가 잘 키울 수 있어.”
유소호는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긴 채 혼잣말했다.
“연근도 그렇게 재배할 수 있던가? 아버지는 그런 말씀 없으셨는데…….”
임새옥은 더 듣지 않고 말을 잘랐다.
“돼! 분명 돼! 들은 적 있어. 이번 달에 성에 들어가면 연근 몇 개만 팔아줘. 필요한 건 그 돈으로 사면 돼.”
유소호가 여전히 망설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임새옥이 벌써 연근 세 뿌리를 안겨주었다. 서둘러야 한다고, 더 늦으면 심을 시기를 놓친다고 당부하며 등을 밀자, 유소호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흙이 잔뜩 묻은 연근을 안고 서 있었다.
유소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결국 연근이 어디에서 났는지 물었다. 그를 속일 생각이 없던 임새옥은 그의 진심 어린 도움을 얻기 위해 성공하지 못하면 노비로 팔려서 청루로 가야 한다고 일부러 이야기해주었다. 유소호는 놀라 얼굴이 심각해졌다.
“우리 아버지한텐 말하지 마!”
말을 마친 임새옥은 찔리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서둘러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근을 판 걸 조삼랑이 알게 되면 분명 돈을 빼앗길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연근도 전부 팔아 버릴 가능성이 매우 컸다.
“가격은 알지? 싸게 팔지 마! 내가 갈 수 없어서 그렇지, 아니면 직접 갈 텐데.”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표정을 가다듬고는 간절하게 말했다.
“소호, 너만 믿는다.”
유소호는 놀란 표정으로 어리둥절해서 임새옥을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의구심을 싹 털어내고 싱긋 웃었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반드시 키워낼게!”
임새옥은 멈칫했다.
얘, 아무래도 내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하지만 잘됐어. 내게 갑자기 이런 재주가 생겼다고 사람들이 나를 괴물처럼 여길 일은 없겠네.
그녀는 그냥 마음대로 생각하게 두고는 유소호가 달려가는 걸 웃으며 배웅했다.
며칠 뒤, 임새옥은 한가한 틈을 타서 필요한 물건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기로 했다. 아궁이의 목탄을 주워서 구석에 숨어 천천히 쓰고, 다 쓰고 나면 지웠다. 그런데 그림자처럼 따르는 금단에게 결국 들켰고, 금단은 이게 뭐냐고 난리를 부렸다. 글을 쓸 줄 안다는 걸 절대로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임새옥은 그냥 그림 그리는 거라고 금단을 어르고 겁줘가며 겨우 달랬다.
금단은 더러운 손가락을 물고 자기도 그릴 거라고 소리쳤다. 노씨가 얼굴과 몸이 시커메진 금단을 발견했을 때, 임새옥은 피할 수 없이 또 한바탕 욕을 먹어야 했다.
나흘 후 아침, 임새옥이 이진탕을 끓이려고 물을 끓이는데, 유소호가 문밖에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임새옥은 신이 나서 물 끓이는 것도 내팽개치고 몇 걸음 만에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