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한적한 나날이 서서히 흘렀다. 엄동설한에 접어들어 며칠 동안 줄곧 흐린 날이 이어지더니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임새옥과 청아 모두 이씨의 거처에서 전가아가 걸음마를 떼는 걸 싱글벙글 웃으며 지켜봤다.
전가아는 원래 몇 걸음은 걷는데, 두꺼운 겨울옷을 입고 있으니 우둔한 기아(企鵝: 펭귄) 같기도 했다. 아이는 비틀비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자꾸 넘어졌다.
이씨 방엔 두꺼운 요가 깔려 있지만, 전가아가 또 넘어지자 청아가 허둥지둥 다가갔다.
“그냥 두렴. 혼자 놀게 두어라.”
이씨가 청아를 말리고는 한쪽에 서 있는 임새옥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몇 번 넘어지면 잘 걷게 된단다. 밥도 잘 먹고.”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웃으며 이씨를 바라봤다. 포근한 느낌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밀려들었다. 이씨가 이렇게 자기 말을 잘 들을 줄은 몰랐다. 소중한 전가아도 안심하고 그녀에게 맡기고, 하라는 대로 하고.
어떻게 이렇게 나를 믿지?
청아는 겸연쩍은 듯 일어서서 옆으로 물러나더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고함치는 소리에 이씨가 일어섰다. 소금남은 검은 두봉 위로 눈송이를 가득 이고 들어오더니, 먼저 방 밖의 석판 위에서 발부터 힘껏 털었다. 청아가 두봉을 받으려고 서둘러 다가가려는데 이씨가 그녀를 불렀다.
“청아, 추위를 쫓게 생강탕 가지고 와서 노야께 드리렴.”
항상 임새옥이 해 온 일이라, 이씨의 말에 두 사람 모두 멈칫했다.
임새옥은 전가아가 이곳에 있으니 자기는 아이를 돌봐야 해서 청아가 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청아도 잠시 멈칫했을 뿐 곧 웃으며 대답하고 물러갔다.
이씨가 웃으며 외간(外間: 몇 칸으로 이루어진 방들 가운데 바깥으로 통하는 바깥방)으로 가더니 두봉은 받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걸 본 임새옥은 제가 다가가 두봉을 받았다.
“화아, 노야 신발 갈아 신겨 드리렴.”
임새옥이 두봉을 걸어놓은 걸 본 이씨가 말했다. 소금남은 발치로 기어 온 전가아를 허리를 굽혀 안으려다가 멈칫해서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이씨를 바라보고는 별말은 하지 않았다. 임새옥은 시녀이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집에서 신는 신을 가지러 돌아섰다.
다시 돌아왔을 때 소금남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임새옥은 청아가 소금남의 신발 시중을 드는 건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자기가 상상한 대로 살짝 무릎을 꿇었다. 신발을 갈아 신기면서 속으로 이를 갈며 하늘을 저주했다. 이 세상에 온 이래 처음으로 무릎을 꿇은 거였다.
무릎을 꿇지 않는 노비 생활에 익숙해졌었는데!
신발을 갈아 신기고 있는데 휘장 젖히는 소리가 나더니 청아가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 임새옥의 모습을 본 청아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 손이 흔들리는 바람에 뜨거운 물이 튀어 저도 모르게 씁 소리를 냈다.
청아가 생강탕을 내려놓자, 이씨가 모두 물러가라고 지시했다.
청아와 함께 밖으로 나온 임새옥이 입을 떼려는데 청아가 손을 휙 뿌리치더니 빠르게 걸어갔다.
임새옥은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누구 때문에 화가 난 건지 몰라서 서둘러 뒤쫓아 갔는데 청아는 벌써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화저아, 네 아버지 오셨다.”
막 청아를 부르려는데 평소에 소금남을 가까이 모시는 사환 원가가 중문 밖에서 머리를 내밀며 불렀다.
눈꽃이 뜯어진 솜이불처럼 종일 내리는 날이었다.
문 밖으로 나온 임새옥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큰 사람 하나, 작은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아버지?”
임새옥이 빠르게 다가가서 봤더니 작은 사람은 놀랍게도 유소호였다.
“소호? 너도 왔어? 웬일이야? 어서 문간방으로 들어가 몸 녹이자.”
임새옥은 서둘러 두 사람을 일으켰다. 조삼랑은 그녀가 나오는 걸 보고 후다닥 일어났다. 몇 달 못 본 새에 또 몇 년은 늙은 것 같은 그는 솜이 삐져나온 무명옷을 입고 추위에 입술이 시퍼레져서 거친 두 손을 비비며 대답했다.
“됐다, 괜히 남의 집 더럽힐라.”
유소호는 얼어서 코가 다 시뻘게진 채 팔짱을 끼고 발을 굴렀다.
“소화, 널 보러 왔지. 난 그것도 모르고…….”
유소호가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잘 지내? 누가 때리진 않고?”
아이의 말에 조삼랑은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이놈이, 그게 무슨 허튼소리냐!”
“일부러 날 보러 왔다고?”
임새옥이 의외라는 듯 묻자 유소호가 머쓱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날은 몰라서 인사도 못 했잖아. 그래서 와 봤지.”
임새옥은 감동해서는 두 사람을 데리고 문간방으로 들어갔다. 문간방에 있던 복생도 올해 서른몇 살인데 동갑인 조삼랑하고 같이 서 있으니 아들 같아 보였다.
복생은 두 사람에게 물을 한 그릇씩 따라주고는 부녀가 이야기 나눌 수 있도록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 다들 잘 지내죠?”
조삼랑이 물만 꿀꺽꿀꺽 마시는 모습에 임새옥이 먼저 물었다. 조삼랑은 다 좋다고 대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유소호는 따듯한 물을 마시고 몸이 따듯해지자 그저 임새옥을 바라보고 웃기만 했다.
“웃긴 뭘 웃어!”
임새옥이 눈을 부릅뜨자 유소호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길에서 만나면 몰라보겠다.”
그 말에 조삼랑도 고개를 들어 임새옥을 유심히 바라봤다. 발그스레한 볼, 붉은 얼레빗을 꽂고 양 갈래로 쪽 진 머리, 비취색 대섶 상의에 푸른 꽃장식 무명 치마, 테 두르기를 한 안치마까지, 그가 부잣집에 일하러 갔을 때 보던 낭자들처럼 온몸을 치장한 모습에 한순간 자기가 낳고 기른 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잘 지내는지, 맞고 지내진 않는지 물으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집에 있었다면 평생 못해볼 차림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쁘지?”
임새옥은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편하게 유소호에게 물었다. 예쁘게 입는 걸 싫어하는 여자가 있을까. 그녀도 요즘 종종 거울을 비춰보는데 조화라는 아이가 대단히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세상에 살던 임새옥보다는 훨씬 예뻤다.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다시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사람은 옷이 날개, 말은 안장이라더니, 부잣집 사람이 입는 옷은 역시 예쁘다.”
임새옥이 유소호에게 군밤 하나 건네주고는, 줄곧 물만 마시는 조삼랑을 돌아봤다.
“아버지, 성에서 일하는 거예요?”
조삼랑이 그래, 하고 대답하고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상한 생각에 다시 물었다.
“이 추운 날에 무슨 일거리가 있어요. 아버지, 일부러 저 보러 온 거죠?”
조삼랑이 여전히 고개 숙인 채 대답하지는 않고 유소호를 힐끔 바라보며 멈칫거리자, 임새옥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어 몸을 숙였다.
“아버지. 감추지 말아요.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조삼랑은 부끄러운 표정이었다. 마누라가 내내 심하게 울고불고 하는 게 아니라면 도저히 나올 말이 아니라서 몇 번 주저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얼마 전에 금단이 병에 걸려서 어렵게 목숨을 구했다. 그런데 네 어미가 또 넘어져서 하마터면 아이를 잃을 뻔했지 뭐냐. 집안 형편이, 도저히…….”
작아지는 목소리가 끝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임새옥은 다급해져서 발을 구르면서 왜 일찍 말하지 않았냐고 말하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삼랑은 딸이 갑자기 나가버리자 화가 나서 가버린 줄 알고 바람과 함께 들이닥치는 눈발을 맞으며 멍하니 있기만 했다.
“아저씨, 소화 판 몸값 다 썼어요?”
옆에서 유소호가 얼떨떨하게 묻는 말에 조삼랑은 당황스럽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른 돌아가려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임새옥이 휘장을 걷고 들어와 전대를 손에 쥐여주었다. 무심결에 어림해 본 조삼랑은 놀라 펄쩍 뛰었다.
“어디서 이 많은 돈이 났냐?”
“달마다 받는 월전이에요.”
임새옥이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조삼랑은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이 집 주인이 선량하니 딸에게 부탁해 돈을 좀 얻어오라고 노씨가 닦달해서 온 것인데 딸이 이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이곳이 금 굴인 건가!
“자, 이건 네 거.”
임새옥이 기름종이로 싼 것을 유소호에게 찔러주었다.
“운 좋은 줄 알아. 어제 누가 성 안에서 사다 준 거다. 아까워서 다 안 먹고 남겨 둔 건데, 너도 먹어봐.”
유소호가 코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킁킁 냄새를 맡더니 물었다.
“암순골돌아(鵪鶉骨飿兒: 메추라기 살에 밀가루 피를 감싸고 삼각형으로 접어 튀기거나 찌는 음식)?”
“응? 이런 것도 알아? 난 몰랐는데. 어쨌든 맛있어.”
“식으면 맛없는데.”
유소호가 웃으며 투덜거리자, 임새옥이 눈을 치켜뜨고는 다시 빼앗으려 했다.
“이리 내!”
유소호가 웃으며 피하고는 소매에 찔러 넣었다. 돈을 받은 조삼랑은 이미 안절부절못하고 얼른 돌아가려 했다.
“어서 돌아가세요. 어머니는 밭에 나가지 말라고 하고 호박 달여서 먹이세요.”
임새옥은 배웅하러 나가면서 꼼꼼히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씨가 유산기가 있는 걸 생각하기만 해도 초조했다. 옛날엔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매우 힘들고 조씨 집안은 자식도 별로 없었다. 임신이나 몸조리는 잘 모르지만, 대학교 시절 목축 수업에서 동물이 유산기가 있을 때 호박을 먹이면 좋다고 배웠던 걸 떠올리고는 급한 나머지 말한 것이다. 그래놓고 제가 생각해도 웃겨서 의원을 부르라고 재차 덧붙였다.
“돈 모자라면 다시 오세요. 방법을 생각할게요.”
“오냐.”
조삼랑은 열심히 일하고 본분을 지키라는 말을 남기고는 유소호를 데리고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 길 미끄러워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임새옥은 몇 걸음 따라가며 큰소리로 외쳤다. 두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자 마음이 포근해졌다.
“소호, 고마워!”
“다음에 또 보러 올게! 좋은 거 가지고 오마!”
유소호가 씨익 웃으며 크게 고함치고는 구부정하니 걸어가는 조삼랑을 따라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임새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하늘을 보고서야 저녁 준비할 시간이 됐음을 깨닫고는 허둥지둥 부엌으로 달려갔다. 손 어멈은 벌써 채소 볶을 준비를 했고, 청아는 곁에서 쫑알거리다가 그녀가 들어가자 바로 얼굴을 굳혔다.
임새옥이 웃으며 다가가는데 손 어멈이 덥석 잡더니 대들보에 걸린 커다란 고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화저아, 저거 이제 먹어도 되니?”
고개를 든 임새옥은 얼마 전에 만든 엄육(腌肉: 소금에 절인 고기. 염장육)을 보고는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직접 한 덩이 잘라주자 손 어멈은 칼로 얇게 저미면서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정말로 맛있니? 어쩐지 더러워 보이는걸.”
청아도 다가가서 힐끔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니? 음식 낭비하지 마.”
임새옥이 헤헤 웃으며 소매를 걷어붙이는데 손 어멈이 어느새 며칠 전에 사 온 채소를 들고나오며 물었다.
“화저아, 이 송채(菘菜: 배추 품종 중 하나)도 볶아 먹을 수 있니?”
임새옥은 손 어멈에게서 푸릇푸릇 길쭉한 채소를 받아들고는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힘껏 참아야 했다.
백채다! 이건 고대의 배추야! 물론 여기서는 송채라고 부르고 모양도 현대 배추와 조금 달랐다. 맛도 조금 쓴데 여기 사람들은 겨울에 주로 탕으로 끓여 먹었다. 후원에서 원가가 한 광주리 메고 들어오는 걸 봤을 때 바로 달려들었었다. 원가가 놀라서 바라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한 장 찢어서 입에 넣어보고는 배추인 걸 확인했다.
아직 개량되지 않은 배추!
“백 가지 채소도 백채에 못 미치지.”
임새옥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기회가 생기면 송채를 개량할 생각이었다.
더 맛있게 만들 거야. 기회만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속에 작은 쥐가 마구 헤집고 다니는 것처럼 몽글거렸다.
자글자글 소리와 함께 고대판 배추 고기 볶음이 완성됐다.
청아는 코를 틀어쥐고 부엌의 기름 냄새와 연기를 털어내려 손부채질했다.
“누가 이렇게 기름지게 볶아 먹니.”
임새옥이 싱긋 웃으며 한 젓가락 집어 건넸다.
“언니, 먹어 봐.”
한동안 부엌에 있으면서 이곳 사람들은 음식을 찌거나 끓여 먹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인과 비교하면 건강한 식생활이지만, 가끔 입맛을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청아는 원래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냄새가 코를 찌르자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과연 맛있었다. 손 어멈도 곁에서 한 입 먹어보고는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화저아, 솜씨가 참 좋구나.”
임새옥이 헤헤 웃으며 집에서 자주 만들어서 그렇다고 대충 대답했다. 그런데 청아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위아래로 살피며 피식 웃었다.
“집에서 이런 걸 자주 먹는다고? 형편이 꽤 괜찮았나 봐?”
이 고기며 채소며, 일반 집안에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임새옥은 멈칫하고는 순간 얼굴이 빨개져서 몇 마디 웅얼거렸다. 손 어멈도 의아한 얼굴로 실실 웃었다.
“이런 아이를 아까워서 어떻게 팔았대?”
그러고는 얼굴을 붉히는 임새옥을 보고는 무언가 떠오른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직 열세 살이지만 벌써 꽤 마음을 흔들 얼굴이었다.
“화저아가 얼굴값 하길 바라고 보내신 건가?”
임새옥은 그 말을 듣고도 별생각이 없었고 손 어멈이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도 몰랐지만, 청아는 안색이 변했다.
이야기하는 사이 저녁 준비가 끝나고 임새옥은 전가아에게 줄 증단(蒸蛋 : 계란찜)을 꺼냈다. 청아는 준비를 마치고 손 어멈과 찬합을 들고 내원으로 향했다.
“내가 할게. 손 데겠다.”
임새옥은 청아가 탕이 가득한 그릇을 들고 가는 걸 보고 허둥지둥 다가갔다. 그런데 청아가 싸늘한 얼굴로 비켜서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당키나 하니. 화저아는 잊지 말고 휘장이나 올려주시죠.”
임새옥은 머쓱해졌다. 뜬금없이 한 소리 듣고는 어리둥절한데 더 이상 다가가진 못하고 그냥 조심스럽게 따라가면서 몇 마디 말을 걸었지만 청아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식사 준비를 마친 후, 청아는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임새옥은 전가아를 안고 평소처럼 옆방으로 들어가 밥을 먹였다. 죽 한 그릇을 다 먹이자마자 이씨가 부르는 소리에 재빨리 달려갔다.
소금남은 눈살을 살며시 찌푸린 채 서신을 읽고 있었고 이씨는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 있었다. 이씨는 술을 조금 마셨는지 눈가가 조금 붉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으며 반쯤 남은 엄육을 가리키며 물었다.
“네가 만든 거니? 맛이 꽤 좋구나. 노야께서 매우 좋아하셨다.”
그리고는 소금남을 힐끔 바라봤다. 소금남은 담담하게 임새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백송(白崧)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았겠다만.”
그 말에 이씨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러게요. 이곳엔 백송 파는 곳이 없네요.”
임새옥은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두 사람이 말하는 게 아마도 다른 품종의 배추이리라 싶어서 대뜸 물었다.
“백송은 어떤 맛인가요?”
처음으로 주인들이 이야기할 때 끼어든 것이라, 세 사람 모두 그녀를 바라봤다. 세 사람의 시선에 임새옥은 바늘에 찔린 듯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는데, 소금남이 느긋하게 ‘조금 단 맛’이라고 대답했다.
역시 그랬구나!
임새옥은 전기가 짜르르 흐르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억눌러온 소망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먹고 싶으면 용가아가 올 때 가지고 오라고 하지.”
소금남의 청담한 목소리가 이어서 들렸다. 이씨에게 하는 말이었다. 임새옥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있다가 청아가 꼬집자 고개를 들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에 주변을 살폈더니 청아가 이미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길래 얼른 정신을 차렸다.
이씨가 손을 닦고 전가아를 안아가자 임새옥은 재빨리 다가가 청아를 도와 상을 치웠다. 물러나서 입구까지 갔을 때 이씨가 한숨을 내쉬며 하는 말이 나직이 들렸다.
“정말로 온답니까?”
휘장이 내려가고 소금남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언니야, 왜 그래? 누가 화나게 했어?”
방으로 돌아온 임새옥은 누가 돈이라도 떼어먹은 것 같은 청아의 얼굴에 더는 못 참고 그녀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청아는 뿌리치려다가 뿌리치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히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너보다 못해. 부인께 미움받기 전에 얼른 남쪽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어.”
임새옥은 얼떨떨해져서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부인이 언제 그런 눈치를 줬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씨는 언제나 조용하고 말도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살짝 넋이 나간 임새옥의 모습이 아른아른한 촛불 아래 유난히 더 순진해 보였다. 청아는 더 울화가 치밀어서 힘껏 그녀를 밀어내며 혀를 찼다.
“노야도 안 계신데 누구 보라고 그렇게 애교 부려!”
임새옥은 바늘에 찔린 것 같았다. 아무리 아둔해도 서른 넘은 사람이 이런 말을 못 알아들을까.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
임새옥은 화를 억누르고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청아는 침상에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임새옥은 달려가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아무래도 확실히 묻는 게 좋겠어!
“언니야, 나 때문에 화난 거였구나. 화가 났으면 이유는 제대로 말해줘야지. 아무 말이나 하면 되겠어?”
임새옥은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녀 곁에 붙어서 어깨를 잡아 돌리며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청아가 눈물을 훔치고 대답했다.
“내 주제에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겠어. 넌 생긴 것도 예쁘고 재주도 좋은데. 부인께서 널 좋아하고 잘 보시는 게 당연하지. 가당치 않게 내가 어찌 화를 내겠어.”
임새옥은 그제야 깨달았다. 요 며칠, 청아가 해 온 일을 부인이 무심결에 그녀에게 시키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난 거야! 다 같은 시녀인데, 누가 하든 다 똑같은 거 아니야?
임새옥은 줄곧 청아를 귀한 소저처럼 여겼었다. 청아를 편하게 해주려고 자기를 사 온 거라고. 그래서 뭐든 자기가 하려고 나섰는데, 그게 잘못이었다니.
그 생각에 웃음이 절로 나와서 청아를 흔들며 웃으며 말했다.
“그거였구나. 언니, 난 언니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언니가 나이도 나보다 많으니 내가 더 많이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난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몰라서 예절을 잘 몰라. 언니를 화나게 했다니, 내 잘못이야. 내가 고칠게, 응? 그러니까 화내지 마. 때리고 욕해도 좋아. 마음에 담아두진 마.”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고 조용조용하게 하는 말에 청아는 저도 모르는 새에 화가 조금 풀려서 코를 훌쩍이며 대답했다.
“너 때문에 화난 건 아니야. 내가 변변치 않아서 그래. 부인은…… 내가 싫어진 거겠지.”
그러면서도 청아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임새옥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노비가 너무 재빠르고 부지런한 것도 좋은 일이 아니구나!
임새옥이 얼른 자기가 예절을 몰라서 그런 거다, 언니 좀 편하게 해주려고 그런 건데 다시는 함부로 나서서 일하지 않겠다, 재차 말하자 청아가 피식 웃었다.
“말하는 것 좀 보게. 꼭 내가 밥 배불리 먹고 할 일 없어서 트집 잡는 거 같잖아!”
그렁그렁한 눈으로 흘겨보며 하는 말에 임새옥은 속으로 그게 맞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래도 청아가 웃는 걸 보니 화가 풀린 듯해 따라서 헤헤 웃으며 손을 잡아당겼다.
“언니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여기에 내가 아니라, 나 같은 애 열이 와도 누가 감히 언니 자리를 넘보겠어.”
청아의 안색은 점점 풀리는데 임새옥은 여전히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다. 단순히 부인의 일등 시녀 자리를 다투려고 하는 줄 알고 화가 난 게 아닐 것이다. 그랬으면 아까 소금남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리라. 확실히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은 일이기에 이야기해 보려고 청아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한참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아까 노야 이야기는 왜 했어?”
해가 완전히 진 때고 방 안의 기름 등이 다 타고 마지막 불빛만 남아서 방 안팎이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청아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기이한 시선을 느낀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뭐 하나 물어볼게. 날 언니라고 생각하면 솔직히 대답해.”
청아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나직이 물었다.
“부인께서 널 노야에게 들이려고 하면, 그럴 거니?”
임새옥은 발끝부터 한기가 올라오는 느낌에 더는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부인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
안 그래도 목청이 큰 임새옥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자, 청아가 허둥지둥 그녀의 입을 막았다.
“얘! 소리는 왜 지르니.”
임새옥은 마음이 서늘해져서 온몸이 덜덜 떨렸다.
“겁주지 말고, 어서 말해 봐. 부인께서 말씀하셨어?”
임새옥이 살을 파고들 듯이 꽉 움켜쥐고 묻자 홑옷만 입은 청아는 손아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아파서 소리 내며 힘껏 그녀를 밀어냈다.
“좋아서 그러는 거야,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청아는 임새옥을 잡아 앉히려고 손을 뻗었다가, 막상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자 깜짝 놀라 의아한 듯 물었다.
“놀란 거야?”
임새옥은 앉을 겨를도 없이 청아를 붙들고 어떻게 된 거냐고 연신 물었다. 청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물어본 건데 뭘 이렇게 놀라. 요괴가 널 잡아먹는 줄 알겠다. 부인께선 그런 말 한 적 없으니 안심해.”
그러고는 피식 웃었다.
깊어가는 밤, 갈수록 거세지는 눈보라에 마당 가득 기이한 소리가 울리고 창살을 비집고 매서운 바람에 새어 들어오자,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방 안의 화롯불은 이미 열기가 식어갔다. 청아는 걱정거리가 해소되어서인지 홀가분한 모습으로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는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임새옥은 그대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서 이불을 껴안고 비집고 들어가며 물었다.
“정말로 언니가 농담으로 한 말이야?”
청아는 임새옥이 흔들어대는 통에 골이 다 울려서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그래 내가 그냥 한 말이야. 노야가 널 꽤 좋아하시는 것 같고, 부인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아서 그냥 말해 본 거야. 나중에 정말로 그렇게 되면 잘 봐주세요, 이낭.”
그 말에 임새옥은 그제야 안도했지만, 심장이 아직 쿵쿵 뛰어서 청아를 한 대 때렸다.
“놀랐잖아. 그런 걸로 농담하는 거 아니야. 어딜 봐서 노야가 날 좋아한다는 거야. 그동안 세 마디는 나눴나? 부인께서 잘해주시는 거야, 선량한 주인이라서 그러시는 거지. 나한테만 잘해주시는 것도 아니잖아. 부인께선 이 집안 누구든 웃는 얼굴로 대하시잖아. 아닌 사람이 있어? 나보다 부인 곁에 더 오래 있었으면서 왜 그런 것도 몰라. 그런 말, 누가 들었다간 난 여기에 못 있어.”
그 말에 청아가 웃음을 거뒀다. 아까 했던 말을 누가 들었다간 경을 칠 일이었다.
“내가 경솔했어.”
청아가 후다닥 일어나서 하는 말에 임새옥은 완전히 안도했다. 그제야 뼈가 시릴 정도로 추운 걸 깨닫고 자기 침상으로 돌아가려는데 청아가 덥석 잡았다.
“추우니까 같이 자자. 붙어서 자면 따듯해. 난 추운 거 못 참아.
노비인 우리 처지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난 정말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임새옥이 웃으며 바짝 다가가서 그녀와 나란히 누웠다.
“대관인이 하시는 장사가 끝나면 자연히 돌아갈 걸 뭐가 그렇게 급해. 그날이 오면 난 언니랑 헤어져야 하는데. 언니가 떠나면 평생 다시 못 보잖아.”
“아, 내가 깜빡했구나. 널 사 오긴 했어도 함께 갈지 말지는 네가 정하라고 부인께서 허락하셨지!”
청아의 말투에 어쩐지 기뻐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임새옥도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돈을 더 많이 받는다고 교낭이 꼬셔서 조삼랑이 그녀를 종신 노비로 팔았는데, 대체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때 같이 따라갈 건지 말 건지, 임새옥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이씨 부인이 조삼랑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그 소식에 교낭은 크게 기뻐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임새옥을 다시 팔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셈했을 것이고, 임새옥은 하늘이 한순간에 맑아진 기분이었다. 구름과 안개를 헤치고 해를 다시 본 느낌이랄까. 다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니.
청아는 한참 주저하다가 느릿느릿 물었다.
“만약 널 양녀로 들이면 어쩔래?”
(養女: 송나라 율법에 따라 첩과 시녀에게는 근무 기한이 있다. 그래서 주인의 마음에 들어 첩으로 들어가는 시녀는 일반적으로 그 집에 영원히 머물 수 있도록 양녀라는 제도를 취한다.)
양녀?
임새옥은 할 말을 잃고 실소했다.
소씨 가문에 후손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무슨 금지옥엽도 아닌데 양녀로 들일 리가 있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양녀라니. 정말 양녀를 들인대도 언니가 가야지. 언니가 얼마나 오래 모셨는데. 나는 며칠뿐이잖아.”
청아는 하, 소리를 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 뜻이 아니야. 그건…….”
하지만 곧 다시 입을 다물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새옥은 그녀가 잠든 줄 알고 밖에 바람 부는 소리가 잦아들었길래 이제 자려고 몸을 돌리는데 청아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 집에서 태어난 노비야. 나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내 자식, 대대손손 모두 소가의 노비야. 양민이 아니라고. 그런데 내가 노야의 양녀가 될 자격이 있겠니?”
그러게, 그게 내가 알고 있는 노비잖아.
임새옥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청아에게 연민이 느껴져서 토닥이는데, 청아가 웃음을 터트리더니 손을 찰싹 때렸다.
“뭐 하는 거야?”
청아의 목소리에 서글픔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임새옥은 머쓱해졌다. 청아가 돌아눕는 소리가 들리더니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 어머니는 화원에서 일하고 우리 아버지는 별채에서 잡일을 해. 이번에 내가 따라 나오게 됐을 때 무슨 일이라도 난 것처럼 슬퍼하셨어. 울기까지 했다니까. 왜 울어? 다들 얼마나 부러워했는데. 누구는 따라오지 못해서 걔네 부모는 눈이 시뻘게질 정도로 울었어.
게다가 우리 부모님은 부인께 청해서 일찍 내보내 달라고 하라고 얼마나 닦달하는지. 나가면 뭐가 좋아서? 사실 이번 일은 내겐 기회야. 정성껏 부인 시중 들다 보면 언젠가 내가…….”
거기서 말이 멈추자, 아리송하게 듣고 있던 임새옥이 물었다.
“내가 뭐?”
청아는 더는 말하지 않고 웃더니 잔다고 이불을 푹 덮었다. 임새옥은 청아는 진심으로 즐겁게 노비 생활을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입을 비죽였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자기는 자꾸 현대 사회의 각도에서 봐서 이 봉건 사회를 숨 막히게 여기지만, 원래 이런 환경에 익숙하게 사는 사람에겐 다를 수도 있을 테니까. 자신이 지옥으로 여기는 곳이 천당일 수도 있잖은가. 본질로 보면 노비도 그냥 직업이다. 가족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직업.
이미 이경(二更: 밤 10시 무렵)이라서 눈이 뻐근했다. 임새옥이 늦었다고 생각하고 자야겠다 몸을 돌리는데 청아가 별안간 이불을 들추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부인이 정말로 널 첩으로 들이면 어쩔래?”
임새옥은 첩이라는 단어에 완전히 신경이 거슬렸다. 조금 전에 내려놓았던 심장이 다시 철렁해서는, 그녀도 따라 일어나서 의심스러운 듯 청아를 바라봤다.
“언니야,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야.”
청아는 한참 동안 주저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원래 우리 부인은 절대로 노야가 첩을 들이는 걸 용납할 성격이 아니야. 용납했으면 이런 난리를 부리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질투 많은 여인이라는 말은 또 싫으시겠지. 집에서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어. 노부인께서 보낸 사람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속속들이 아는 사람을 직접 고르는 게 낫다고.”
대갓집에서 첩실을 들이는 건 흔한 일이었다. 임새옥도 이해했고 굳이 비난도 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그런 시대였다. 듣고 보니 그렇게 걱정할 일이 아니다 싶어 웃었다.
“아이고, 언니. 내가 뭐가 좋다고 부인께서 마음에 들어 하겠어.”
그 말을 꺼내자마자 무언가 번쩍 떠올랐다. 청아가 요즘 왜 돌연 자신을 멀리하는지 깨닫고는, 어둠 속에서 의미심장하게 청아를 바라봤다.
“용모든 속속들이 아는 거든, 골라도 당연히 언니를 고르시겠지.”
청아의 얼굴이 붉어졌는지는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는 확실히 부드러워진 듯했다. 청아가 임새옥을 살며시 밀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어르지 마. 소씨 가문이 얼마나 부귀한 집인지는 둘째치고 대관인이 얼마나 잘생기셨니. 성격도 좋으시고. 너는 그런 마음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청아의 먹먹한 목소리가 이불을 뚫고 나왔다. 임새옥은 조금 전 죽을 만큼 놀라게 했던 말이 순전히 요 여자애 혼자 의심하고 생각해낸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위험이 사라지자 마음도 홀가분해져서 히죽히죽 청아를 밀며 말했다.
“그렇게 좋아? 첩이 되는 게 그렇게 좋아?”
청아는 웃음이 나서 더는 누워있지 못하고 이불을 젖히며 대답했다.
“첩이 어때서? 이 집이면 첩이 아니라 통방(通房: 잠자리 시중도 드는 시녀 겸 첩)이 되어도 좋지.”
“이러니 저마다 보는 눈이 다르다고 하는 거야. 예쁜 꽃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잖아. 언니야, 이제 날 그만 의심해. 언니들은 조만간 떠나잖아, 우리 가족이 날 같이 보내겠어? 곁에 두고 보살필 수 있도록 근처에 괜찮은 사람과 혼인하길 바라셔.”
임새옥이 웃으며 청아의 머리를 콕콕 찔렀다. 제 생각을 읽힌 청아는 부끄럽기도 하고 수줍어서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가 무슨 의심을 해. 지금은 너 하나지만 집에 있을 땐 안팎으로 열몇 명이 노야를 모셨는데, 그랬다면 내가 벌써 속 터져 죽었게? 게다가 노야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노야 문제지, 내, 내가 무슨…….”
임새옥이 실실 웃더니, 다급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청아를 끌어당겨 눕혔다.
“됐어, 됐어. 다신 그런 말 안 할게. 또 하면 벼락 떨어질 거야.”
임새옥의 독한 맹세에 청아는 멈칫했다. 절대로 첩으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힌 것임을 깨닫고는 한순간 머쓱해져서 임새옥의 손을 잡았다.
“넌 좋은 애야. 나도 앞으로 이런 소리 하면 벼락 맞을 거야.”
임새옥은 드디어 오해가 풀렸음을 알고 나른하게 하품했다. 정말 골치 아픈 일이었다. 두 사람뿐인데도 뜬금없이 이런 시샘을 받아야 하다니. 외출하는 데 시녀 여남은 명이 출동하는 그런 대갓집이었다면 밥 한 끼 얻어먹는 것도 힘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그런 환경에 천월하지 않는 것만 해도 천지신명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임새옥은 부인 거처에서 시중들 때 나서지 않고 조심했다. 바쁘게 들고 나면서도 미소 짓는 청아를 보니 마음속 짐작이 더 확실해졌고, 괜히 부지런 떨지 않기로 했다. 대갓집엔 규칙도 많고, 주인들끼리 암투를 벌일 뿐만 아니라 시녀들끼리도 지킬 게 많았다. 그저 착실하게 지내다가 부모가 데리러 오면 농가에 시집가서 밭 갈고 수확해서 애 낳고 사는 게 나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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