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이 지나면서 임새옥도 차츰 현실을 똑똑히 볼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북송(北宋) 신종(神宗) 희녕(熙寧) 7년, 늦가을이었다. 십방촌은 매우 작은 마을로, 열몇 묘(畝)의 척박한 땅에 민가 이십여 가구가 주로 콩, 보리농사를 지었다.
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며 곡물들을 살펴본 임새옥은 열악한 품질에 매우 실망했다. 열 살짜리 소녀가 어디에서 우량종자를 구해오겠나. 가장 기본 조건인 토지조차 자기 집엔 한 묘도 안 되는 척박한 땅뿐이었다.
지주? 꿈 같은 소리.
신분도 낮고 또 여자아이인 걸 어쩌라고. 운 좋으면 힘이 세고 일 잘하는 걸 보고 누군가가 마누라 삼을 것이고, 운 나쁘면 노비로 팔릴 것이다. 그 생각만 하면 온몸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죽을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조삼랑과 노씨를 보면서 장차 촌사람과 혼인해도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능력이라면 분명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임새옥은 혼인해서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억척스럽고 일 잘하는 좋은 촌부가 되기로 작정했다.
3년 동안 임새옥은 노씨의 호통 속에 아무런 불평 없이 물을 기르고, 장작을 패고, 빨래하고, 밥 짓고, 동생을 보살피며 눈만 뜨면 밤늦게까지 바삐 움직였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생활에 익숙해서 망정이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성공한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는 나날이 희미해졌다. 올해는 흉년이라 마을 사람 절반이 죽었다. 살아남는 게 임새옥의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목공 일을 조금 할 줄 아는 조삼랑은 농한기에 성으로 들어가 푼돈을 벌었다. 이 마을에서는 형편이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지만, 식구들 배를 채울 정도였다. 잘 먹고 잘살려면 현실적으로 임새옥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온 가족이 아침 식사(하루 두 끼)를 마친 후, 임새옥은 얌전하게 수저를 치우고 우물가로 가서 조삼랑과 노씨의 이야기 소리를 들으며 설거지를 했다. 금단은 따끈한 구석에 엎드려 임새옥이 며칠 전에 만들어준 흙 인형을 조물조물 가지고 놀았다.
“딸은 그새 키가 자라서 옷을 새로 지어야 하고, 아들은 신발이 작아졌고. 우리 어머니는 병이 또 도졌는데 맞아 죽어도 싼 오라버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할 테지……. 나도 벌써 4개월이고. 다 돈 들어갈 일뿐이네…….”
노씨는 눈살을 찌푸린 채 일일이 셈하면서 손도 열심히 놀렸다. 수시로 머리에 바늘을 긁어가면서.
“바늘도 무뎌졌네. 성에 들어가면 잊지 말고 바늘 새로 사와요.”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 다리가 부러진 나무 의자를 두드리던 조삼랑은 ‘응, 응’ 대답하더니, 노씨가 입을 다물자 침을 꿀꺽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내일은 우리가 어머니에게 밥 가져다드리는 차례니 잊지 말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씨가 일감을 내던지고 아이고, 하며 눈을 동그랗게 부릅떴다.
“왜 또 내일이 우린데요? 둘째네는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며칠이나 갔는데? 애초에 분가할 때 어머님은 작은집을 더 끼고 돌더니, 지금은 왜 안 그러신대요?”
그 말에 조삼랑은 곧바로 목공 도구를 짊어지고 집을 나섰다. 임새옥은 재빠르게 그릇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낡은 광주리를 들어 올리며 ‘장작 주워올게요!’ 하고 대문을 나섰다. 한참 멀어졌는데도 노씨가 욕해대는 소리가 들렸다. 조삼랑의 돌아가신 아버지, 살아계신 어머니, 그리고 마을 서쪽에 사는 남동생을 욕하는 소리였다.
듣자 하니 예전에 시어머니 등쌀에 고생을 꽤 한 것 같았다. 분가할 때도 불만이 많아서 지금껏 원망하며 틈만 나면 욕을 해댔다. 임새옥은 이럴 때 새우 등 터지는 건 분명 자기라는 걸 잘 알아서 얼른 몸을 피했다.
어슬렁어슬렁 마을 입구까지 갔다가 어른과 함께 있는 사내아이를 만났다. 낡은 포자(袍子)를 입은 사내아이는 울타리 담벼락에 웅크리고 앉아 나물을 말리다가 임새옥이 다가가자 헤헤 웃으며 일어났다.
“소화, 소화야.”
사내아이가 손짓했다. 임새옥은 눈을 흘기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 이름이 저 아이 입에서 나오면 더더욱 속이 뒤집혔다. 그런데 멈추지 않고 불러대니 결국 눈을 부릅뜨며 고함쳤다.
“그만 불러!”
“또 새 잡으러 가? 나도 데리고 가.”
사내아이는 웃으며 옷에 손을 쓱쓱 문댔다.
“쳇!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따라오지 마!”
임새옥은 순간 화가 났다. 이 아이는 유소호(劉小虎), 마을 사람이 아니고 작년에 홀어머니와 함께 사람이 살지 않는 이 집을 사서 이사 왔다. 북쪽 요(遼)나라에서 도망쳤고, 이장에게 뭘 좀 찔러주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유소호는 열서너 살쯤 되어 보였다. 매일 꾀죄죄한 꼴인데 커다란 두 눈만은 유난히 빛이 났고 키는 그녀보다 조금 더 컸다.
유소호와 그 모친 유 대낭(大娘: 아주머니)은 좀처럼 외출하지 않았다. 둘은 유 대낭의 손재주로 먹고살았고, 달에 한 번씩 성으로 들어가 먹을 것을 사 오고 마을 사람과는 별로 왕래하지 않았다.
임새옥은 홀로 온 들판을 뛰어다니는 아이라서 두 사람과 얽힐 일이 별로 없는데, 어느 날 마을 아이들이 유소호를 붙들고 때리는 걸 보게 되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 눈물을 참는 유소호의 모습에 남동생이 떠올라서 의리있게 달려가 아이들을 쫓아냈다.
그 후로 유소호는 불쑥불쑥 임새옥 곁에 나타났다. 특히 광주리로 참새를 잡을 때는 그녀가 수확을 얻으면 언제 어디서든 귀신같이 나타났다. 몇 번이고 흙을 뭉쳐 내던져도 번번이 나타났다.
임새옥의 경고에도 유소호는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화, 넌 왜 이렇게 참새 먹는 걸 좋아하니?”
“쓸데없는 소리! 배고프니까 그렇지.”
임새옥은 눈을 흘기고는 따라오지 말라고 다시 한번 모질게 외쳤다. 유소호가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말했다.
“소화, 배고프면 우리 집 와서 병자(餠子: 개떡. 밀가루를 둥글게 말이 구워 먹는 음식) 먹어. 참새 몇 마리라고 무시하면 안 돼. 참새를 먹는 건 보리 반 묘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다.”
처음 하는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뒷부분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임새옥은 흥미가 생겨서 그 아이를 힐끔힐끔 살폈다. 조류가 농작물에 끼치는 영향이야 농학 석사인 그녀도 당연히 안다. 그런데 이런 아이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안다니, 대단한 일이라 할 만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 나누고 있는데, 유 대낭이 방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일감을 들고나와 따듯한 곳을 찾다가 임새옥이 문 앞에 서 있는 걸 보고는 웃으며 인사했다.
“화저아, 또 장작 주우러 가니?”
올해 고작 서른 몇으로 보이는 유 대낭은 눈빛이 자애롭고 선했다. 그녀는 입구에 있는 큰 돌 쪽으로 가서 두꺼운 깔개부터 올려놓고 앉았다. 걸을 때 오래 입은 짧은 배자 아래 안에 입은 꽃무늬 남색 치맛자락이 살짝살짝 드러났다.
안색이 살짝 초췌하고 의복이 남루했지만,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가 이곳의 촌부와 다르게 느껴졌다. 어쩐지 글공부한 사람의 기품이 느껴진달까.
귀한 가문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자 중에 몰락한 사람도 많으니까. 특히 근래엔. 마을에 오는 방물 장수에게 들은 적 있는데, 경성의 어느 대상공(大相公: 재상)이 추진한 무슨 제도로 부자들이 재물을 잃고 땅을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올해 이런 ‘천변(天變)’이 일어났다고. 다행히 관가(官家: 송나라 때 황제를 부르던 호칭)가 즉시 그 재상을 처단했다고 했다. 3)
중국의 역사는 너무 방대했고, 가련한 임새옥은 학창 시절 시험만 대충 넘기면 외운 걸 바로 잊어버려서 결국엔 세세한 부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사는 시대가 어떤지 잘 알지 못했고, 미래의 동향을 알 까닭도 없었다. 며칠 동안 손가락을 깨물며 지금 관가가 송나라 어느 황제인지, 대상공이 누구인지 고민해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금손을 지닌 성공 인사가 될 턱이 있나.
임새옥이 안부를 묻고 돌아가려는데 유소호가 몇 발자국 따라오면서 소화, 하고 불렀다. 임새옥은 어쩔 수 없이 돌아서서 노려보고는 낮게 대답했다.
“알았어! 이제 안 먹어!”
1년 동안 옥신각신하면서 이 대답을 처음 들은 유소호는 걸음을 멈추고 흐뭇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임새옥은 그런 그를 흘겨보고는 달려갔다.
햇살이 가장 좋은 오후 시간, 이 시기엔 마을 밖 밭엔 잡초가 가득했다. 그곳은 시야가 탁 트여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이 똑똑하게 보였다. 임새옥은 이곳에 오는 게 좋았다.
그녀는 먹성이 좋아서 뭐든 다 먹고 싶어 했다. 농촌에서는 흔히 그릇을 들고 길거리에 앉아서 밥을 먹곤 하는데, 어릴 적 그녀의 부모는 밥때엔 그녀를 밖에 데리고 나가는 일이 없었다. 다른 사람 밥 먹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딸의 모습에 부모 체면이 땅에 떨어지니까.
임새옥은 대충 장작을 줍다가 낡은 기왓장을 발견했다. 이걸 현대로 가져갈 수만 있다면 진짜 금은으로 바꿀 수 있는 보물인데, 하면서 한숨만 쉴 뿐이었다.
이어서 비탈언덕에 엎드려 솔새 뿌리를 캤다. 흙덩이를 털고 똑똑 부러트려 입에 넣고 씹었더니 사탕수수처럼 달았다.
이곳에 온 지 어언 3년, 임새옥은 나름 즐거움을 찾았다. 이곳의 파괴되지 않은 자연을 지키는 즐거움, 1년 사계절 먹을거리가 끊이지 않는 즐거움.
햇볕이 내리쬔 땅이 따듯해서 눈이 가늘어지고 잠이 오려는데, 사방에서 풀 뜯어 먹으며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겁게 폴짝거리는 통통한 새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참 침을 흘리다가 끝내 먹고 싶단 생각을 억눌렀다.
됐다. 기회를 봐서 노씨를 설득해서 개나 키우자. 그럼 토끼를 잡을 수 있어.
갈수록 맛이 연해지는 풀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넋을 놓고 있으니 문득 가족이 떠올랐다. 콧날이 시큰해졌다. 다행히 새집도 지었고, 동생도 자기 밑에서 이것저것 꽤 배웠으니 과수원을 분명 잘 운영할 것이다. 그러면 가족의 생활도 보장될 테고, 딸 된 도리도 한 셈이고.
아빠는 줄곧 날 탐탁지 않아 했는데, 죽은 걸 알아도 그렇게 슬퍼하지 않겠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때 길에서 행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더니 검은색 마차 두 대가 보였다. 마차 옆엔 사내 넷이 허둥대고 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하니 부잣집 사람처럼 보였다.
“얘야!”
그중 한 사람이 그녀를 발견하고 초조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임새옥은 어리둥절해서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자기를 부르는 게 확실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을을 나간 적이 없어서 흉년이 든 해를 제외하고 타지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십방촌은 매우 외진 곳이라 여기까지 들어오는 사람도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겨 조금 들뜬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마차 휘장이 젖히더니 누군가 뛰어내리자,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다가갔다.
그 사람이 길에 선 채 멀리서 그녀를 향해 공수했다.
“이곳에 의원이 있니?”
의원이요? 임새옥은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저 사람들이 멈췄을 때 마차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들었었다. 굉장히 괴로워하는 여자 목소리 같았다.
질문한 사람은 스물 남짓한 젊은 남자인데, 검은 비단 옷차림에 자태가 수려했다. 햇살이 어른거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생김새가 맑고 빼어난 것이 평소에 흔히 보는 마을 사람과 달랐다. 딱 봐도 점잖고 고상해 보이는 것이 호감이 들었다.
남자가 마차에서 내리면서 휘장을 걷자 마차 안의 신음 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옆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들렸다.
“얘야, 성에 들어가려면 아직 멀었을까?”
남자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임새옥을 바라보며 물었다. 임새옥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어수룩한 표정과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모습에 사람들은 맹한 시골 아이라고 생각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다시 길을 떠나려고 서두르는데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며 크게 외쳤다.
“노야! 부인 상태가 안 좋으세요!”
“혜낭!”
젊은 남자가 가장 먼저 마차로 달려들어 갔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몰려들었다.
“이를 어쩐답니다. 말벌에 이렇게 심하게 쏘이다니요!”
마차를 몰던 이가 뛰어 내려와 발을 동동거리며 소리치자 마차 안에서 우는 소리와 어우러져 한바탕 난리가 났다.
말벌?
임새옥은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하긴 지금은 말벌이 벌집을 지을 시기이자 가장 난폭한 시기였다.
그녀는 바깥쪽에 서 있는 사람을 잡아당겼다.
“그거라면 별일 아니에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초조해서 발을 구르는 중에 어수룩한 어린 여자애의 말이 어디 귀에 들릴까. 바로 뿌리치려는데, 마차 안에 있던 젊은 남자가 듣고는 바로 뛰어 내려왔다. 병이 급할 땐 아무 의원이나 찾는다지 않나.
“마을에 사는 아이니까 잘 알 것이다. 일단 말해 보렴. 정말로 나으면 제대로 보상하마.”
매우 초조한 낯빛이었는데 행동은 여전히 진중한 걸 보니 평범한 가문은 아닌 듯했다. 임새옥은 여태껏 이런 남자와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녀는 원래 잘 꾸미지 않았고, 이곳에 온 후로는 더더욱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세수도 며칠에 한 번씩 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리 멀끔한 사람을 마주치니 갑자기 자기가 촌스럽고 천해 보여서 내심 거북해졌다. 그 편법을 도저히 입에 올릴 수가 없어져서 잠시 생각하다가 한창 울고 있는 어린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시녀 아이는 어리둥절했지만, 주인을 살려야 한다는 간절한 생각에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왔다.
시녀인데도 평범하지 않은 옷차림을 본 임새옥은 부잣집에 천월하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다시 한번 한탄했다.
나란히 서니 더 비교되지 않은가.
시녀 아이는 그녀에게 다가오다가 흙냄새가 훅 코를 찌르자, 무심결에 코를 가리려 했다. 임새옥은 더 무안해져서 시녀의 귓가에 빠르게 속삭이고는 바로 멀찍이 떨어졌다. 이야기를 들은 시녀의 안색이 확 변해서는 부끄럽기도 하고 애도 타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그런 게 어디 있니!”
임새옥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린 다 그렇게 해. 믿기 싫으면 말고.”
그녀는 바닥에서 광주리를 들어 올리며 해가 지기 시작한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고는 느릿느릿 마을 쪽으로 걸어갔다. 멀리서 뒤를 돌아봤더니 그 사람들은 아직 길가에 서 있었다.
부디 알려준 대로 했길 바랐다. 말벌에 쏘인 건 사실 큰일도 아니었다. 다만 체질이 민감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만.
집으로 돌아갔더니 금단을 안고 닭 모이를 주던 노씨가 아니나 다를까 호통부터 쳤다. 임새옥은 허둥지둥 금단을 받아안고서 아궁이 아래로 데리고 가서 놀아주었다.
겨울엔 해가 빨리 져서 조삼랑이 돌아왔을 땐 코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금단은 어리니까 일찍 밥 먹는 게 허락되어 먼저 저녁밥을 먹고 잠들었고, 임새옥은 주린 배를 안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창 클 때라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다. 나물 풀죽을 허겁지겁 다 먹고서 한 그릇 더 담으러 가다가 노씨에게 들켜서 등을 맞고 혼났다. 많이 먹는다고 혼나고, 쓸모없이 돈만 까먹는 딸년이라고 혼나고. 임새옥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안쪽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자 종이를 붙인 창이 퍼덕거리며 소리를 냈다. 춥고 배고픈 상태에서 가물가물 잠들었는데 조삼랑이 밖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임새옥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일거리를 못 찾았구나. 올겨울은 힘들겠다.
그러다가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였다. 집안일을 마치고 금단을 업고 나가서는 막 움집 앞에 앉아 진흙을 빚으며 놀기 시작하는데 유소호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소화, 새를 잡아먹지 않겠다는 약속 잘 지켰네.”
유소호가 웃으며 웅크리고 앉아서 하는 말에 임새옥은 그를 노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새라는 말을 들은 금단이 침을 뚝뚝 흘렸다.
“누이, 나 새 먹을래!”
“금단, 내가 이거 줄게.”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뒤에서 달걀 두 개를 꺼내주자 금단이 덥석 받아서 손에 진흙이 묻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입으로 쑤셔 넣었다. 임새옥이 화들짝 놀라 금단을 찰싹 때리고 달걀을 빼앗았다. 돌려줘야 하나 마나 망설이는데 금단은 벌써 목 놓아 울어댔다.
“너희들 주러 부러 가지고 온 거다.”
유소호가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채소 절임도 한 덩어리 건넸다.
임새옥이 콧방귀를 뀌었다.
얘한테 체면 차릴 거 없지!
손을 옷에 쓱쓱 닦고는 달걀을 까서 조금씩 금단의 입에 넣어 줬더니 달걀 두 개를 금세 다 먹고 꺼억 트림을 했다. 노씨가 문 앞에 서서 ‘이 망할 년이!’ 하고 외치는 소리에 임새옥은 후다닥 금단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알고 보니 노씨가 친정에 가려고, 싸돌아다니지 말고 집 잘 보고 빨래를 해두라고 당부하려고 했는데 금단을 데리고 나와버렸던 것이다.
자유를 얻은 임새옥은 아침에 먹은 풀죽이 이미 소화된 배를 달래며 손에 붙은 달걀노른자를 쪽쪽 빨았다.
“이거 먹어.”
유소호의 목소리가 불쑥 들리자 임새옥은 깜짝 놀라 손가락을 깨물 뻔했다.
“넌 아까워서 못 먹을 줄 알았거든. 그래서 특별히 하나 남겨 두었어.”
임새옥은 하얗고 반지르르한 달걀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키다가 결국 받아들며 한마디 했다.
“은혜를 알다니, 착하네.”
유소호가 빙긋 웃으며 임새옥이 조심스러운 척 야금야금 먹는 걸 바라보다가 마당을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뭘 찾아?”
임새옥이 입가를 닦으며 묻자 유소호가 농기구가 몇 개 놓여 있는 담장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소화, 네 어머니가 안 계신 틈에 쇠스랑 좀 빌려주라.”
농기구는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목숨줄이나 마찬가지라서 함부로 빌려주지 않는다. 조삼랑이 1년 모은 돈으로 사 온 쇠스랑이었다. 임새옥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씨가 알면 때려죽이려 들 테니까.
“저건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
임새옥이 노려보긴 했지만 말투가 전처럼 거칠지는 않았다. 먹는 걸 얻어먹었으니 말투도 나긋나긋할밖에.
“가지고 놀려는 게 아니야.”
유소호가 아쉬운 듯 팔짱을 낀 채 서성이며 대답하자 임새옥이 씨익 웃었다.
“밭이라도 갈게?”
유소호네가 마을에 정착하긴 했지만 농사지을 땅은 없었다. 게다가 여인 하나, 아이 하나, 두 사람 모두 농사지을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유소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 앞에 땅을 좀 갈았어. 가서 볼래?”
임새옥은 노씨가 구석에 던져둔 옷을 빨려고 집어 들던 참이라 유소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휘휘 손을 저어 내쫓았다. 노씨가 돌아올 때까지 다 못 빨았다가는 저녁은 물 건너간 것이니까.
⥈ ⥈ ⥈
어느새 며칠이 흘렀다. 조삼랑은 거의 매일 성에 들어갔지만, 번번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항아리의 곡식은 나날이 줄어들고, 노씨의 안색은 나날이 흉악해졌다. 임새옥은 들고 날 때마다 살금살금 조심했지만, 번번이 무슨 이유로든 혼이 났다.
이번엔 감나무에서 떨어진 잘 익은 감 때문이었다. 벌써 3년 동안 과일이라고는 한 입도 못 먹어본 임새옥은 침이 꼴깍 넘어가서 땅바닥에 진창이 된 감을 살짝 핥다가 딱 걸리고 말았다.
노씨가 바로 빗자루를 들고 온 마당을 돌면서 그녀를 때렸고, 누이가 감 먹는 걸 본 금단도 먹겠다고 떼를 쓰고 난리가 났다. 쩌렁쩌렁한 우는 소리, 욕하는 소리에 놀란 닭까지 목청을 높이는 바람에 조씨네 작은 마당이 들썩였다.
그렇게 한창 야단법석이 났는데 문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누군가 허름한 대문을 열고 머리를 내밀다가 마침 노씨가 집어 던진 빗자루에 놀라 힉, 하고는 고함쳤다.
“아이고, 올케, 이게 무슨 일이에요.”
마흔 남짓한 여인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무라고는 임새옥을 제 등 뒤로 숨겼다.
<고대 지주> 2권에 계속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