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첫날밤
“헬리온 테브로니아, 그리고 이슈텔 리젠트라.”
대신관이 나와 헬리온을 보며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테브론 제국의 황제와 황후로서 전 제국민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순간부터는 부부의 연으로 맺어져 평생토록 서로 신의를 지키며 제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합니까?”
“맹세합니다.”
대신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리온이 대답했다. 이어 나도 그와 같은 답을 했다.
“저도 맹세합니다.”
내 대답을 들은 후, 보조 신관들이 나와 헬리온 앞에 혼인서약서를 가져다주었다.
기나긴 혼인서약서 아래에 황제와 황후의 서명란이 비어있었다. 우리는 깃펜을 들고 각자의 이름을 서명했다.
“그럼 반지 교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보조 신관들이 두 개의 반지가 든 반지함을 우리에게 건넸다.
먼저 헬리온이 조금 더 작은 반지를 꺼내 들어 내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다음으로 내가 헬리온의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었다.
“이로써 두 사람이 정식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의 선언과 함께 다시 한번 우렁찬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와 헬리온은 하객들의 축복을 받으며 정원 문 앞에 있는 황금 마차에 올랐다.
결혼식의 마지막 행사는 황제 부부가 황금 마차를 타고 수도 시가지를 지나 신전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제국민들에게 새로운 황제 부부의 탄생을 알리고 여신께 예배를 드리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황궁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신전까지의 행차를 진행했다.
마차가 가는 길을 따라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제국민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나와 헬리온은 우리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후 폐하 만세!”
제국민들은 새로운 황제 부부의 탄생을 진심으로 기뻐했다. 젊은 황제 부부가 피해가 컸던 내전을 수습하고 치세를 펼치리라는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구름처럼 몰려든 인파는 신전 앞에 가서야 끝을 보였다.
신관들과 성기사들이 나와 헬리온을 마중 나왔고, 우리는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신전 안으로 들어섰다.
“헬리온,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혹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이제야 한숨 돌리는 나와 달리 헬리온의 표정은 왠지 모르게 굳어 있었다. 대관식과 결혼식 내내 담담하던 그였는데, 지금은 세상의 고민을 혼자 다 짊어진 얼굴이었다.
“아니 불편한 건 아닌데, 막상 이렇게 사람들을 보고 나니까 걱정이 돼서.”
“뭐가 걱정이 되는데?”
“그냥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 백성들은 저렇게 나한테 기대하고 환호하는데 내가 저들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네.”
어떤 일이 닥쳐도 늘 당당하고 패기 넘치던 헬리온이었는데, 막상 수많은 백성들의 관심과 기대를 눈앞에서 확인하니 두려움이 앞서는 것 같았다.
“괜찮아, 헬리온. 지금까지도 잘해왔잖아.”
이번엔 내가 헬리온의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그리고 이젠 네 옆에 내가 있잖아. 그러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내가 그의 손을 틈 없이 꽉 맞잡았다. 내 말에 금세 기운을 되찾은 헬리온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순조롭게 황위에 올랐다면 이런 걱정이 조금은 덜했을까? 그런 생각에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른 후에야 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슬픔은 아마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짊어지고 가야 할 아픔이 될 것이다.
하지만 슬픔 속에서도 행복은 피어나고, 그 행복으로 앞으로 다가올 슬픔까지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헬리온에게, 헬리온은 나에게. 우리는 항상 서로의 곁에서 다가올 행복과 슬픔, 모두를 함께 나눌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래도 되는 사이였다. 영원한 미래를 약속한 부부가 되었으니까.
* * *
신전에서의 예배 행사까지 전부 마친 후, 나와 헬리온은 황궁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도 못하고 식을 진행한 탓에 온몸에 피로가 누적된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사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황후 폐하, 욕실로 오세요. 장미꽃잎 향이 아주 좋아요.”
“머리카락은 라벤더 향이 들어간 비누로 감겨드릴게요.”
목욕 시중을 드는 하녀들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욕조에 들어가서도 하녀들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얼굴은 발그레해져 가지고 자기들끼리 눈만 마주쳐도 헤벌쭉하게 웃었다.
반면 나는 멍한 얼굴로 하녀들의 손길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인형처럼 끌려다니던 나는 금빛 침의를 입은 상태로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아, 어떡하지.’
하녀들이 얼굴과 몸에 보습제를 발라주고 긴 머리카락을 말려주는 내내 머릿속이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투렌 남작 부인의 말로는 첫날밤은 헬리온이 리드할 테니 내가 크게 신경 써야 할 건 없다고 했다.
‘아, 그래도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몸 정리를 마친 하녀들이 나를 부부방으로 안내했다.
황궁에는 황제와 황후의 처소가 따로 있었지만, 이렇게 부부가 공용으로 쓰는 방도 있었다.
선대 황후 폐하께서 승하하신 후로는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방이 되었지만, 이번 결혼식을 준비하며 깨끗하게 재정비하였다.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황후 폐하.”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하녀들이 조심히 문을 닫으며 말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어두운 밤하늘이었지만 방 곳곳에 촛불이 켜져 있어서 주위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
‘헬리온은 아직인가?’
나도 준비 시간이 꽤 길었는데, 헬리온은 그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나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며 ‘우리 방’ 안을 구경하였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물건은 두 사람을 위한 것들이었다. 침대도 이인용으로 무척이나 크고 넓었고, 그 앞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도 모두 이인용이었다. 하다못해 방 뒤편에 있는 욕실 안의 욕조도 무척 널찍한 걸로 보아 저것도 이인용이 확실했다.
“황제 부부의 신혼 방이나 마찬가지네.”
집무를 볼 때면 몰라도 앞으로 부부 생활은 주로 이곳에서 해야 할 듯싶었다. 다행히 유능한 하녀들이 방 정리를 깨끗하게 해둔 덕분에 오래 방치된 방치고는 매우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침대도 푹신푹신하고 좋네.”
의자에 앉아있을까 하다가 몸을 좀 눕히고 싶은 마음에 먼저 침대로 올라갔다.
베개를 베고 천장을 보니 새삼 이 방의 천장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 느껴졌다. 방이 널찍하고 시야가 탁 트인 것이 보기 좋았는데, 앞으로 이 방이 점점 더 좋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들면 안 되는데 왜 이렇게 졸립지.’
방금 목욕을 마친 데다가 푹신한 침대에 누운 탓에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만 감겼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하면서도 나는 몰려오는 수마에 그대로 빠져버리고 말았다.
* * *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잠자던 몸이 이상함을 느꼈는지 한순간에 눈이 번쩍 뜨였다.
너무 놀라 고개를 돌리자 옆에 누워서 나를 보고 있는 헬리온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깼어?”
“나 오래 잤어?”
“아냐. 한 삼십 분 정도?”
잠이 깊게 들어서 그런지 고작 삼십 분을 잔 건데도 피로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찬물을 마시고 나니 남아있던 졸음도 한 번에 달아났다.
헬리온은 내가 물을 마시고 있을 때도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눈길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잠시 생각해보니 내가 조카들을 보고 있을 때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 숨 쉬는 것까지 사랑스러운 존재를 볼 때 드러나는 눈빛과 표정이었다.
“자꾸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운데.”
내가 작게 불평하자 헬리온이 또다시 웃으며 내 손에 든 잔을 받아 테이블 위에 두었다.
나처럼 자신의 처소에서 씻고 온 헬리온도 아직 머리카락이 다 마르지 않아 살짝 물기가 남아있었다.
청초한 그 모습이 보기 좋아 손을 들어 헬리온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숱 많고 부드러운 그의 붉은 머리카락은 언제 보아도 참 매력적이었다.
헬리온이 머리카락에 닿은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으로 가지고 갔다. 그는 이렇게 내가 손으로 뺨을 쓸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내 손에 뺨을 가져다 비비는 거였지만.
그렇게 한참을 강아지처럼 내 손에 얼굴을 비비던 그가 몸을 돌려 나와 얼굴을 마주했다. 어스름한 등불 아래로 그늘진 그의 얼굴이 사내답고 분위기 있게 느껴졌다.
‘예전엔 귀여웠는데 지금은 참 멋있단 말이야.’
침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어색해서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는데, 이렇게 헬리온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오히려 이제부터 이어질 시간들이 기대되어 가슴이 쿵쿵거렸다. 내가 이런 성격이었나, 지금까지는 내숭을 부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설렘과 긴장이 섞인 내 마음을 읽었는지 헬리온이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가 이마에서 입술을 떼는 순간, 이번에는 내가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술을 맞추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달콤한 키스가 이어질 때 즈음, 헬리온이 살짝 얼굴을 떼며 내게 물었다.
“이슈텔, 혹시라도 피곤하면-”
“아냐, 계속해 줘.”
헬리온은 나를 배려해줘서 한 말이었지만, 나는 지금이 좋았다. 아까 잠깐 잠들었던 것이 도움이 됐는지 피로도 한결 가신 참이었다.
내가 손을 들어 헬리온의 침의 허리 부분에 둘러진 매듭을 풀자, 느슨하게 벌어진 침의 사이로 잘 짜여진 단단한 근육이 보였다. 내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난 준비됐어.”
내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헬리온이 내 옷에 달린 매듭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늘 준비됐어.”
그의 목소리와 함께 실크 매듭이 사르륵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맨살이 드러난 어깨 위로 헬리온의 몸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토록 부끄럽던 마음이 기대와 설렘으로 변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