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56화 (156/160)

156화. 새 황제의 탄생

드디어 대관식 날이 되었다.

커다란 황금빛 문을 널찍이 개방한 황궁 홀에선 대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신전에서 공수해 온 조각상과 커다란 향로, 그리고 혼인서약서와 반지를 담은 황금빛 상자가 속속들이 도착했다.

대관식 참석자 겸 결혼식 하객들은 아직 황궁 정원에서 대기 중이었다. 알렌시아 황녀와 브룬델 공은 홀에서 신관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 홀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방을 신부 대기석으로 쓰고 있었다.

“이슈텔, 잠깐 고개 좀 이리로 돌려 보겠니?”

드레스를 정리해주던 투렌 남작 부인이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하녀에게서 분첩을 받아든 남작 부인이 화장이 덜 된 부분을 꼼꼼히 정돈해주었다.

“고모, 너무 예뻐. 공주님 같아!”

누가 말려들 새도 없이 엔리케가 내 드레스 자락을 와락 움켜잡았다. 기겁한 실비아가 둘째 아이를 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지만 엔리케는 여전히 내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제 고모는 공주님이 아니라 황후 폐하야. 엄마가 뭐라고 했지?”

“황후 폐하!”

엔리케와 그 옆에 앉은 로시엔이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결혼식의 화동을 맡은 아이들은 몸에 꼭 맞는 양복에 귀여운 나비넥타이를 하고 있었다.

실비아가 아이들이 실수하지 않게 집에서 맹연습을 시켰다고 했는데, 과연 실전에서도 그만큼 잘해줄지 기대가 되었다.

“마티나 아가씨! 아니, 언제 거기 가셨대!”

잠시 몰리가 한눈을 판 사이에 아기 마티나가 제 오빠처럼 내 드레스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몰리가 번쩍 안아 들자 마티나가 칭얼거리며 울음을 터트리려고 했다. 그러나 재빨리 입 안에 포도 한 알을 넣어주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방긋방긋 미소를 지었다.

“이슈텔 아가씨 어렸을 때랑 성격이 똑같아요. 어찌나 기운 넘치고 호불호가 확실한지. 마티나 아가씨도 어서어서 자라서 고모처럼 멋진 사람이 되세요.”

몰리가 마티나의 부드러운 뺨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아기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까르르 웃었다.

“이슈텔, 이제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겠네요. 너무 오래 기다려온 일이고 기쁜 일이긴 한데 거리감이 느껴져서 조금 서운해요.”

벌써부터 눈시울이 빨개진 실비아가 코를 훌쩍거렸다.

처음 공작가로 시집올 때만 해도 눈물 콧물을 다 뽑는 친정 식구들과 달리, 새언니는 눈물 같은 건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와 함께 살면서 성격이 변한 건지 요새 들어 이렇게 감수성이 풍부해졌다.

“실비아, 왜 그래. 신부도 안 우는데 왜 갑자기 새언니가 운대?”

투렌 남작 부인이 장난치듯 실비아에게 타박을 주었다. 그러자 실비아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이슈텔이 그동안 너무 고생했잖아요! 그 생각만 하면 자꾸 이렇게 눈물이 나요.”

“그건 그렇지. 결혼 한 번 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거야, 참.”

투렌 남작 부인과 몰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게 진행되는 결혼식인 만큼 다들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여러분, 이제 황녀 전하께서 홀로 오시라고 합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홀 안쪽으로 향했다.

홀 안에는 알렌시아 황녀와 브룬델 공이 서 있었다. 이제 입장을 허가받은 귀족들이 제일 먼저 황녀 부부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오늘의 주인공인 헬리온은 아직 신전에서 대신관과 함께 식전 예배를 올리느라 홀에 도착하지 않았다.

“이슈텔.”

지정석에서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오빠 자르가 내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내 동생, 드디어 오늘 네가 결혼을 하는구나. 어쩌다 보니 결혼 상대도 바뀌고 몇 년이나 늦춰진 결혼인데.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

역시나 나를 보자마자 오빠의 눈가에 눈물이 잔뜩 맺혔다.

“오빠도 고생 많았어. 앞으로는 힘든 일이 없을 테니 좀 더 마음 편하게 지내자.”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그런데 이슈텔, 이제 황후 폐하가 되면 황궁 밖으로 자주 못 나올 텐데, 벌써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가끔씩 놀러 갈게. 벌써부터 울지 마. 얼굴 망가져.”

“응.”

오빠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콕콕 닦아내고는 아들들의 손을 잡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둘 도착하는 사람들 틈에서 율리언과 에보니가 보였다.

처음에는 상극처럼 보였던 두 사람인데, 그간 여러 일을 겪으며 부쩍 가까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나를 발견한 두 사람이 싱긋 미소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결혼 축하해, 이슈텔. 할머니가 보셨다면 무척 기뻐하셨을 거야.”

율리언이 가볍게 나를 안아주며 말했다.

“그러게 할머니께서 조금 더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나 역시 할머니가 나와 헬리온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고 가셨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모습 또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쟁취해낸 모습이기에 하늘에서도 기뻐하실 거라고 믿었다.

“축하해요, 이슈텔. 이젠 정말 황후 폐하가 되네요. 당신은 역시 높은 자리가 잘 어울려요.”

“와 줘서 고마워요, 에보니.”

나와 짧게 인사를 나눈 에보니가 율리언과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신관이 홀 안으로 들어왔다. 대신관은 황녀 부부, 그리고 나와 차례로 인사를 나눈 후 대관식을 시작했다.

식이 시작되자 엄숙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새 황제가 될 헬리온이 홀 안으로 입장했다.

예행 연습 때와 같이 황가의 제복에 붉은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늠름했다. 홀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새 황제를 향해 무릎을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붉은 카펫 위를 걸어간 헬리온이 대신관 앞에 섰다. 대신관은 한 손에는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는 향로를, 다른 한 손에는 오래된 성서를 들고 있었다.

헬리온이 붉은 카펫 위로 무릎을 꿇자 대신관이 선황의 교지를 발표하며 헬리온이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공표했다.

“이에 테브론 제국은 여신과 선대의 모든 황제들의 영혼 앞에서 헬리온 테브로니아를 새로운 황제로 맞이할 것을 선언합니다.”

대신관의 선언과 함께 보조 신관들이 그에게 왕관을 건넸다. 대신관은 건네받은 왕관을 헬리온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새로운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보조 신관들이 그의 손에 황가의 검과 왕홀을 건네주었다.

“황제 폐하, 옥좌에 오르시지요.”

보조 신관들의 안내에 따라 헬리온이 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옥좌로 다가갔다. 그가 옥좌에 앉는 순간 알렌시아 황녀와 브룬델 공을 시작으로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황제 폐하 만세!”

목청 좋은 북부 가신들이 홀이 가득 울릴 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가신들은 특유의 절도 넘치는 박수 소리로 대관식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선황 폐하의 갑작스런 사망 후, 한동안 비어있었던 옥좌가 드디어 주인을 되찾게 되었다. 나는 옥좌에 앉은 헬리온을 보며 손이 빨개질 정도로 세게 박수를 쳤다.

홀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헬리온은 단번에 나를 찾아내 오래도록 시선을 고정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가슴 속에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 * *

대관식이 끝나고 다음으로 이어지는 식순은 결혼식이었다.

대관식과 달리 결혼식은 황궁 정원에서 진행되었다. 하객들이 먼저 정원에 마련된 의자에 가서 착석해 신랑과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부 대기실로 사용하는 천막 안에서 하녀들이 마지막으로 내 드레스를 손질해주었다.

대관식에서는 착용하지 않았던 부드러운 실크 망토가 달린 어깨 장식을 달았고, 머리에도 베일이 달린 티아라를 착용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황후 폐하.”

뒤로 길게 늘어진 면사포를 잡은 로제가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투렌 남작 부인도 반대편 면사포를 잡으며 맞장구쳤다.

“이렇게 아름다운 신부는 살면서 처음 보는 것 같아.”

“고마워요, 이모.”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이 이런 걸까. 일부러 아침도 간단한 죽으로 때웠건만 속이 배배 꼬이는 기분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이제 행복할 일만 남은 신부잖아.”

남작 부인이 다정한 목소리로 내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신부, 입장하실게요!”

슈리가 천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남작 부인과 로제가 면사포를 들어주었다.

천막 밖으로 나가자 이른 오전의 눈부신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순백의 카펫이 길게 이어진 길 옆자리에 놓인 의자들은 신부와 신랑을 기다리는 하객들로 가득했다.

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헬리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는 제국의 황제이자 내 남편이 될 남자.

황제 폐하라는 호칭은 어색하지 않았으나 남편이라는 호칭은 아직까진 어색했다. 몸이 간질간질하고 가슴 속에 몽글몽글한 것이 피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살짝 긴장한 나와 달리, 헬리온은 오래도록 기다려온 순간을 맞이하는 사람처럼 환한 표정이었다.

“긴장하지 마, 이슈텔.”

내가 다가가자 헬리온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제나 그랬듯 그의 손을 잡자 떨리는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손을 맞잡은 채, 대신관 앞으로 걸어갔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로시엔과 엔리케가 나팔 소리에 맞춰 꽃잎을 뿌려주었다.

하객석에서 부드러운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대관식부터 이어지는 기나긴 행사가 지루할 만도 한데 다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밝은 얼굴들이었다. 오히려 대관식보다 지금이 더 생기 넘치는 눈빛이었다.

텔리아 삼 남매가 우리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들 앞에 앉은 율리언과 에보니도 여러 감정이 뒤섞인 얼굴로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오빠와 새언니였다. 고작 입장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눈물이 터진 오빠 부부는 한쪽 손으로는 눈물을 훔치고 다른 한쪽 손은 나와 헬리온을 향해 계속 흔들어주었다.

우리가 대신관 앞으로 가자 성서에 손을 올린 대신관이 본격적으로 결혼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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