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새로운 가족
“아, 이모. 갑자기 무슨 말씀을.”
민망해진 내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프리모스와 결혼 날짜가 잡히고 나서 귀부인들에게 수업을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에이, 그때랑은 상대도 상황도 다르지. 시간도 오래 지났고.”
부끄러워하는 나와 달리 이모는 꽤나 진지했다.
“사실 원래대로라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 나눠봐야 하지만, 상황상 그럴 수가 없으니 서로 민망해도 속전속결로 해결해야지.”
“뭘 속전속결로 해결해요?”
“오늘부터 너한테 첫날밤 수업을 해주겠다는 말이지. 사실 헬리온 전하께선 사흘 전부터 수업을 받기 시작하셨단다.”
남작 부인의 말에 아까 전에 먹은 점심이 얹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대답을 피하며 잔에 든 물을 마시자 이모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슈텔 너는 참 다른 일들엔 적극적이면서 이런 쪽에선 엄청 쑥스러움이 많더라.”
“어떻게 안 부끄러워해요. 상상만 해도 이렇게 얼굴이 터질 것 같은데.”
“황후는 그저 왕관만 쓰고 고상하게 왕좌에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잖니. 게다가 지금 후사를 이을 수 있는 황족은 헬리온 대공밖에 남지 않았으니 네 어깨가 무겁단다.”
황후 자리에 따라오는 의무를 생각하니 마냥 부끄러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남작 부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헬리온도 이모한테 수업을 받아요?”
“그럼. 너랑 헬리온 전하 두 사람 모두를 잘 아는 귀부인은 나밖에 없잖니. 처음에는 헬리온 전하도 부끄러워하더니 이제는 익숙해지셨는지 내 수업만 기다리고 계신단다.”
남작 부인이 재미있다는 듯이 부채 끝으로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었다.
헬리온이 수업에 적극적이라는 것이 낯 뜨겁긴 했지만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나 같은 숙맥이 하나 더 있었다가는 황족의 대가 그대로 끊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하자.”
남작 부인의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들 수 없는 수업이 시작되었다.
* * *
야외에서 사냥 같은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남작 부인의 수업은 듣는 것만으로도 기가 쭉 빠지는 시간이었다.
내 또래의 귀족 레이디들은 전부 진즉에 결혼하여 빠르면 아이 한둘쯤은 낳아서 기르고 있었다.
오빠와 새언니도 지금 내 나이쯤에 첫 아이인 로시엔을 낳았는데, 막상 그게 내 일이 될 거라 생각하니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선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대관식과 결혼식부터 잘 치르자.’
대관식은 황궁 중앙 홀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오늘은 마지막 예행 연습일이라 대관식 당일과 최대한 비슷하게 꾸며두었다. 익숙한 곳이지만 붉은 카펫이 깔리고 못 보던 장식품들이 옮겨지고 있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어서 오거라, 이슈텔. 마침 헬리온과 대관식 예행 연습 중이었는데 잘 왔구나.”
홀 안으로 들어서자 알렌시아 황녀가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무릎을 꿇고 왕관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던 헬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보았다.
“이슈텔 어서 와. 이 왕관 좀 봐. 제법 무거워서 오래 쓰고 있으려면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
헬리온은 황족의 제복에 긴 붉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편의상 평소에는 허리까지만 오는 망토를 거쳤지만, 대관식에서 착용하는 망토는 땅에 끌릴 정도로 길었다.
‘입는 사람은 불편하겠지만 보기엔 확실히 멋지네.’
왜 그렇게 화가들이 옛 그림 속 영웅들에게 망토를 입혔는지 알 것 같았다. 헬리온의 붉은 머리카락과도 잘 어울리는 망토가 황제가 될 그의 위엄을 한층 더 올려주는 느낌이었다.
“헬리온, 제복이 정말 잘 어울린다. 너무 멋진데?”
내 칭찬에 헬리온이 씩 미소 짓다 금세 표정을 가다듬었다. 어머니 앞에서 팔불출 같은 모습을 들키고 싶지는 않은 듯했다.
“너도 빨리 드레스 입고 와. 실제처럼 같이 서봐야 동선도 맞추지.”
헬리온의 재촉에 내가 드레스를 갈아입으러 옆방으로 갔다. 내가 예식용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알렌시아의 얼굴이 몹시 환해졌다.
“넌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는구나. 급하게 제작한 드레스가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이야. 역시 옷보다는 얼굴이 중요한 건가? 젊음이 좋긴 하구나. 나도 너처럼 좋은 시절이 있었는데.”
“전하께서는 지금도 아름다우십니다.”
“하하, 이제 곧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라고 네가 나한테 듣기 좋은 말만 해주는구나. 그렇게 깜찍한 말 하지 않아도 예뻐해 줄 테니 하고 싶은 말은 마음껏 하거라.”
알렌시아가 드레스를 입은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몹시 뿌듯해했다.
“이슈텔, 난 대관식보다 결혼식 식순이 더 떨려.”
헬리온이 긴장한 듯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나도 그래. 대신관 앞에서 혼인서약서에 서명하고 서로 반지만 나눠 끼면 되는 건데, 그게 뭐라고 이렇게 떨리는지.”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아라. 긴장하지 않아도 시간은 가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정신없이 하다 보면 모든 게 다 끝나있을 거다.”
황실 행사에 노련한 알렌시아가 별거 아니라는 듯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하녀가 붉은 벨벳 천에 감싸온 황후의 왕관을 받아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언젠가 네가 황후의 관을 쓸 줄은 알았는데, 네 옆에 서는 사람이 내 아들이 된 건 아직도 신기하구나.”
티아라 모양의 황후의 관은 황제의 왕관에 비해 무겁지는 않았으나 긴 베일이 달려있어서 쓰기가 불편했다.
알렌시아가 내게 관을 씌워주자 하녀들이 베일 끝을 정리해주었다. 아직 연습일 뿐인데도 실전처럼 긴장되었다.
“황후의 관도 무척 잘 어울리는구나. 대관식에서도 떨지 말고 지금처럼만 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아라.”
홀 안을 둘러보던 알렌시아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곧 황녀의 얼굴이 아이처럼 환해졌다.
“헬리온, 너희 아버지가 도착했구나.”
나와 헬리온이 창가 근처로 갔다. 알렌시아의 말대로 북부 대공령의 깃발을 단 마차가 황궁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헬리온의 아버지 브룬델 공이 마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 황녀 부부가 동시에 대공령을 비우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아들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브룬델 공도 황궁에 온 것이다.
“아, 어떡하지. 너무 떨리는데.”
브룬델 공을 보자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에 땀이 났다.
알렌시아 황녀와는 어린 시절 헬리온과 어울려 놀다가 종종 마주친 적도 있고, 황후 폐하의 장례식에서도 만난 적 있어 얼굴이 익었지만 브룬델 공은 달랐다.
정치에 큰 뜻이 없고 가정적인 성격의 공은 황궁 출입이 잦지 않았기에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곧 시아버지가 될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에 절로 몸이 떨리는 기분이었다.
“알렌시아!”
홀에 들어서자마자 브룬델 공이 아내를 찾았다. 그는 몹시도 반가운 얼굴로 품 안 가득 아내를 끌어안고는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헬리온, 우리 아들!”
다음은 헬리온 차례였다.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아들을 와락 끌어안은 아버지가 아들의 볼에 마구 입맞춤을 퍼부었다. 다 큰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그만…….”
헬리온이 아버지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브룬델 공은 아들을 놔주지 않았다.
“너는 아비가 보고 싶지도 않았지? 뭘 하고 지내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연락도 한번 없고. 오는 편지라곤 텔리아 남매가 보내는 게 전부니, 원. 무심하다, 무심해.”
“그래도 이렇게 무사한 거 보셨으니 된 거죠.”
헬리온이 아버지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옷소매로 스윽 닦아냈다. 그는 아버지의 쏟아지는 관심을 돌리려는 듯 재빨리 나를 소개했다.
“이슈텔, 인사해. 우리 아버지야. 아버지는 이슈텔 기억하시죠?”
헬리온의 뜻대로 브룬델 공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나를 향했다.
나도 뺨을 닦고 기다려야 하나 싶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브룬델 공은 볼 키스 대신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네가 리젠트라 공녀구나. 어렸을 때 얼굴이 제법 남아있어.”
브룬델 공이 신기하단 표정으로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고는 다시 헬리온을 보고 피식 웃었다.
“네가 왜 아비에게 편지 한 통 쓰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는구나. 그래, 사람의 마음은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거지. 네 어머니가 그런 것처럼.”
브룬델 공은 황족과의 혼인을 꿈꾸기 어려운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알렌시아 황녀의 적극적인 구애로 연애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다.
살아생전, 황제 폐하께선 다정다감한 성격의 브룬델 공이니까 불같은 성격의 황녀와도 싸우지 않고 잘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지금 세 가족의 모습을 보니 헬리온이 딱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을 반반씩 물려받은 것 같았다.
평소에는 어머니를 꼭 닮은 듯 보이지만 내게 동화책을 만들어 선물해준 거나, 풍등 축제에 가자고 하는 걸 보면 아버지처럼 감성적인 면도 있었다.
“헬리온, 이제 대관식을 치르면 황제 폐하가 되는 것이니 지금처럼 편히 말을 할 수도 없겠구나.”
아들을 보던 브룬델 공이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황제가 된 자식에게는 아무리 부모라 할지라도 말을 함부로 놓을 수 없었다. 특히 알렌시아 황녀와 브룬델 공은 같은 황족이라도 아들인 황제보다 서열이 낮아지기에 언행도 점차 바꿔 나가야 했다.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어머니, 아버지가 편하신 대로 불러주세요.”
“이제는 그러면 안 되지. 그게 황제가 보여야 하는 위엄이란다.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알렌시아가 나를 스윽 돌아보았다.
“그리고 네가 우리 가족이 될 날도 금방 오겠어. 지금이 아니면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미리 말해주마.”
알렌시아가 나를 향해 팔을 넓게 벌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가족이 된 걸 환영한다, 이슈텔 리젠트라.”
황녀가 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처음엔 놀라 어색하게 서있기만 했는데 점차 맞닿은 몸에서 황녀의 온기가 느껴지자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이었다.
내겐 늘 리젠트라라는 이름의 가족만 있었는데,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이렇게 테브로니아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이다.
“감사합니다.”
내가 팔을 들어 황녀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눈물을 훔치며 다가온 브룬델 공이 감격스런 얼굴로 아내와 나를 감싸 안고는 코를 훌쩍였다.
부모님과 내가 서로 껴안고 있는 걸 어색하게 바라보던 헬리온이 눈치껏 다가와 우리를 안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