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54화 (154/160)

154화. 돌아온 최측근 모임

“음~ 이 황궁의 냄새! 여기에 얼마나 다시 오고 싶었는지 몰라요!”

황궁 새장에 도착한 로제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는 꽃향기를 맡으려는 듯 콧구멍을 크게 벌름거렸다. 마침 불어온 향기로운 라일락 향기에 로제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간이 의자에 앉았다.

“황궁 출입을 금지당한 동안 새장에 오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새들도 보고 싶었고. 아무튼 이렇게 다시 오게 돼서 너무 기뻐요.”

“그래, 로제. 이제 오고 싶을 때마다 마음껏 와.”

“네, 당연히 그래야죠! 아주 질릴 때까지 올 거예요.”

로제가 카나리아에게 모이를 주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뮬에게 특식을 주던 슈리가 들뜬 로제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요새 뮬이 슈리 너를 특히 좋아하는구나.”

“네, 투렌 남작령에 있는 동안 제가 보살펴 주어서 부쩍 정이 들었나 봐요.”

“그게 아니라 네가 하루가 멀다하고 뮬한테 특식을 갖다 바치니까 그렇지.”

로제의 말에 슈리가 실실 웃으며 뮬에게 들고 있던 간식을 마저 먹여주었다. 그러자 뮬의 옆에 앉은 칸이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머리를 비볐다.

“미안해, 칸. 오늘은 빈손이라 간식은 나중에 줄게.”

내 말에 칸이 화가 난 듯 구구거리며 횃대로 올라가 나를 등지고 앉았다.

전쟁 중에 전서조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해낸 뮬은 매일같이 특식을 제공받고 있었다. 반면 칸은 오랜 만에 만난 내가 빈손으로 온 것이 서운했는지 여전히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슈리에게 받은 간식을 조금 떼어서 건네자 녀석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와 헬리온이 황궁에 돌아온 후, 그리운 얼굴들도 속속들이 환궁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황궁으로 돌아온 사람은 하녀장 애비게일이었다. 카리나에 의해 출궁당했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다음 날 바로 환궁하여 아수라장이 된 황궁을 정리했다. 그녀 덕분에 나도 황궁 정리 이외의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다음은 단연 로제였다. 리세리 자작가에 이제 황궁 출입을 해도 된다는 서신을 보내자 로제는 그 즉시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달려왔다.

“공녀님,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그래도 이렇게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애교 많은 로제가 내 옆으로 다가와 팔을 꼭 붙잡더니 갈색머리카락을 내 어깨에 비볐다.

“참, 대관식 준비는 잘 되어가세요?”

“응, 다행히 황녀님께서 도와주셔서 잘 진행되고 있어. 그래서 요즘엔 대관식 준비로 바빠. 이따가도 투렌 남작 부인과 식에서 입을 드레스를 시착해야 해.”

“으, 듣기만 해도 지루하고 귀찮네요.”

로제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공녀님, 그 소문이 정말 사실인가요?”

뮬을 횃대에 내려놓은 슈리가 내 곁으로 스윽 다가왔다.

“공녀님이 황제 폐하의 양녀 자격으로 헬리온 전하와 공동으로 즉위한다는 말이요, 정말이에요?”

“아, 맞아. 그런 소문이 있었지. 소문이 아니라 사실인 거 맞아요?”

로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를 한 사항은 아니라 말을 삼가야했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가장 친한 친구이니 사실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응, 맞아. 대관식이 끝나면 황제 폐하의 유언장을 발표할 거야.”

“우와! 그럼 이제 황후 폐하가 아니라 황제 폐하가 되시는 거예요? 진짜 신기하다!”

로제와 슈리가 동시에 박수를 치며 제 일처럼 기뻐했다.

내전과 황제 폐하의 갑작스런 승하로 황실 분위기가 침체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관식과 결혼식을 따로 진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하에 두 행사를 한 번에 진행하기로 했다.

알렌시아 황녀는 결혼식을 먼저 진행하여 내가 황후가 된 다음에 황제 폐하의 유지를 밝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도 순서상 황후를 거치고 공동 즉위를 하는 것이 나을 것이었다.

“그럼 이제 초상화 방에 왕관을 쓴 공녀님의 그림이 걸리겠네요. 아, 제가 몇 년만 더 공부했으면 직접 공녀님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워요.”

미술을 전공한 로제가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안 그래도 로제 너한테 부탁할 게 있었는데.”

내가 의자 옆에 기대 놓은 액자를 로제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로제가 금빛 비단의 매듭을 풀어 그 안에 든 그림을 꺼냈다.

“어, 이건 초상화 방에 있던 공녀님의 초상화잖아요?”

그림을 알아본 슈리가 재빨리 물었다.

“이거 어디서 찾으셨어요? 혹시 그……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단 게 정말이에요?”

카리나가 스스로 독약을 마셨다는 것이 공표된 이후,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꺼렸다.

마치 부정을 타는 것을 피하려는 듯, 조금 전 슈리처럼 ‘그 사람’이라고 에둘러 말하곤 했다.

“응, 카리나의 방에서 찾았어.”

내가 로제를 보며 그림의 손상된 부분을 일러주었다.

일리드의 방에서 받은 초상화와 달리 이 그림은 유리가 덮혀있지 않아 군데군데 복원해야할 부분이 많았다.

액자 끝의 모서리 부분, 그림의 얼굴 부분과 특히 입가 부분의 손에 닳은 자국을 지금 색과 비슷하게 덧칠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 사람도 참 희한하네요. 이걸 왜 자기 방에 가지고 있었대요? 저는 어디다 갖다 팔았을 줄 알았는데.”

로제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돌려받게 되니 좋네요. 전 이 그림이 좋거든요. 제 스승님이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 황궁에 걸린 그림들은 죄다 엄숙해서 계속 보고 있으면 숨 막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러게. 유독 이 그림만 이렇게 웃고 있네요.”

슈리가 초상화 속 내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건 내가 어렸을 때 심각한 표정을 지으니까 궁정 화가가 어색하다고 해서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은 거야.”

내가 그 그림을 그렸을 때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냥 그림만 두고 볼 때는 괜찮은데 엄숙한 황궁 초상화 방에 걸리니까 어색했지. 이제는 그 자리에 새로 그린 그림이 올라가겠지만.”

“그래도 저는 이 그림이 좋아요. 이 그림이 공개된 이후로 어린 레이디들이 이렇게 그림 앞에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이 많아졌거든요.”

로제가 그림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 그림은 제가 잘 복원해서 돌려드릴게요.”

“고마워, 로제.”

“이제 대관식 준비를 하러 가셔야죠?”

“응, 투렌 남작 부인하고 몰리가 기다리고 있어.”

나와 로제, 슈리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갈 채비를 하자 칸과 뮬이 서운해 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내일 또 보자, 얘들아.”

내가 칸과 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새장 밖을 나왔다.

‘음,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데…….’

황궁으로 들어가기 전, 새장을 돌아보며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새장에 늘 있었던 불청객이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마침 새장 관리인이 지나가는 것이 보여 그에게 물었다.

“여기 매일 오던 검은 고양이는 어디 있지?”

“아, 그 녀석이요? 그러게 말입니다. 요새 어디를 간 건지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맨날 쫓아내기에 바빴는데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늘 보이던 녀석이 자취를 감추자 관리인도 내심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황궁 안에 있다면 언젠가 한 번 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슈텔, 어서 오렴. 마침 방금 전에 드레스 수선이 끝났단다.”

처소로 돌아가자 이모 투렌 남작 부인이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방 한가운데에는 황후의 왕관을 쓰고 예식용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서있었다.

“우리 아가씨, 진즉 입었어야 할 옷인데 이제야 드디어 입어보네요.”

남작 부인 옆에 있던 몰리가 드레스를 보고는 눈물을 글썽였다.

마티나의 전담 유모가 된 몰리는 요새 들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마티나가 또래보다 걸음이 빨라서 눈을 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불의의 사고로 출산 예정일보다 일찍 세상에 나온 아이가 건강하니 이보다 다행인 일이 없었다.

“자, 이슈텔. 어서 입어봐. 어디 불편한 데가 있으면 다시 수선을 맡겨야하니까.”

남작 부인과 애비게일이 내게 예식용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원래는 황가의 여인들이 입는 정복 드레스가 따로 있지만, 카리나의 피가 지워지지 않아 이제는 입을 수가 없게 되었다.

다행히 새로 맞춘 드레스는 내 몸에 꼭 맞았다. 제작 기간이 길지 않아 원래 예식복을 겨우 흉내만 낸 정도였다. 그만큼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대관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이정도도 감지덕지였다.

“대관식이랑 결혼식을 함께 진행하는 건 좀 아쉬워. 평생 한 번 있는 결혼식인데 그걸 대관식이랑 같이해야하다니.”

“괜찮아요, 이모. 식을 여러 번 진행해봤자 피곤하기만 하잖아요.”

“하긴, 그건 또 그래.”

쉽게 설득당한 남작 부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드레스 시착을 마치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애비게일은 황궁에 나가있는 동안 에시의 가족들을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에시의 가족들은 아이가 당한 일을 듣고 몹시 슬퍼했다고 했다. 카리나가 장례비 명목으로 많은 위로금을 주었지만 딱 장례식 비용만 받고 나머지는 전부 돌려주었다고 했다.

다행히 내가 황궁에 돌아오고 난 후로 보낸 위로금은 받아주었다. 에시의 공을 치하하는 서신과 이후로도 남은 가족들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걸로 에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갚을 순 없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 아이의 가족들에게 보답해나갈 생각이었다.

“나는 이슈텔이랑 할 얘기가 있으니 몰리랑 애비게일은 먼저 나가있을래?”

대화가 마무리 되어갈 때 즈음, 남작 부인이 몰리와 애비게일에게 잠시 나가달라 부탁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켜주자 이모가 큰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결혼식 준비는 잘 되어가니.”

“네, 이모랑 다른 사람들이 도와주고 있어서 저는 편해요.”

“아니, 그거 말고.”

한 박자 쉰 다음, 이모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첫날밤 준비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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