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전쟁(3)
전쟁의 승기는 점차 북부군 쪽으로 기울었다.
서쪽에서 지원병으로 온 남부군이 최대한 열심히 성문을 막았지만, 이미 성벽이 무너진 상태라 전력이 되지는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담했다. 남부군이 황궁으로 퇴각하며 북부군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 주변에 전부 불을 지른 것이다.
“이 제기랄 놈들이!”
알렌시아가 아비규환이 된 마을을 보며 분에 찬 욕을 내뱉었다.
성벽과 가까운 수도 외곽은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낙후된 곳이었다. 한순간에 집이 잿더미가 된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아 공포에 떨며 흐느껴 울었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울부짖음이 하늘에 닿을 듯 크게 울려 퍼졌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그 모습에 북부군도 크게 탄식했다. 전쟁의 민낯은 책에서만 보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다.
집에 불을 지르지 못하게 막았다는 이유로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 죄 없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죽어가고 있었다.
“황녀님, 급한 불만 잡고 바로 황궁으로 진군해야 합니다!”
내가 알렌시아를 향해 소리쳤다.
불붙은 나무판자가 황궁으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판자촌의 불을 먼저 잡아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 진군이 늦춰지면 남부군은 다른 마을에도 계속해 불을 지를 것이다. 게다가 볼테로가 남부로 도주한다면 전쟁이 장기화될 확률도 높았다. 그러면 피해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 자명했다.
“길을 막은 불만 끄고 바로 진군하도록 해라!”
알렌시아의 명령에 군사들이 재빨리 불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불길은 오래지 않아 잡혔다. 하지만 그사이 이미 남부군은 황궁을 향해 전부 퇴각했다.
“저기 황궁이 보이는구나.”
알렌시아가 황궁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황궁은 수도보다 성벽이 높지 않지만 벽이 견고하여 난항이 예상되었다.
“여기선 1, 2분대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전부 황궁으로 간다. 남은 군사들은 남부 가신들과 볼테로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라!”
알렌시아는 일부 군사들만 남기고 황궁으로 계속 향했다.
그때, 서쪽 성벽에서 커다란 함성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남부군인가 해서 긴장했지만, 서쪽에서 밀고 들어온 북부군이었다.
“황녀님, 헬리온 전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아론의 말에 내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전투가 정점에 달하고 볼테로 황자를 생포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헬리온의 이름을 들으니 세상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두로 진군하는 군사들 뒤로 말을 탄 헬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푸른 눈과 마주치는 순간, 전쟁이 끝난 것도 아닌데 무언가 뜨거운 것이 가슴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슈텔!”
헬리온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말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완전 무장을 한 그의 모습은 평소에 내가 알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를 보자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목숨을 건 전쟁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났다.
악몽을 꾸고 황궁으로 간 이후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었지만, 우리에겐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조차 없었다.
“너희들이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알겠으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니 나중에 천천히 하거라.”
알렌시아가 감정적인 분위기를 애초에 차단하려는 듯 차갑게 말했다.
전시 상황이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나는 차오르는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황궁 성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군사들이 성문을 부술 만큼 커다란 나무통을 옮겨왔다. 무거운 나무통을 들어 올린 군사들이 그 끝을 성문에 세게 부딪치기 시작했다.
쾅-! 쾅-!
나무통으로 문을 칠 때마다 커다란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성벽 위에서도 남부군의 필사적인 공격이 쏟아졌으나 북부군의 거센 반격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성문이 열렸다!”
오래지 않아 황궁 성문이 열렸다. 마지막 남은 방어선이 뚫리자 남부군이 재빨리 황궁 본궁을 향해 도망쳤다.
“볼테로와 일리드를 생포하라!”
대장군의 외침에 북부군이 함성을 지르며 황궁을 포위했다. 나와 헬리온, 알렌시아도 군사들의 뒤를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
“이슈텔, 동쪽으로 도망친 남부 가신들은 없었어?”
헬리온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쪽으로 온 사람들은 없었어. 그쪽은?”
“몰래 도주하려다 잡힌 사람이 몇 명 있었어. 주군을 두고 도망치다니, 남부 쪽도 이미 와해된 것 같아.”
“그런데 헬리온, 볼테로와 일리드가 황궁에 남아있을까? 내 생각엔 가장 먼저 남부로 도망가지 않았을까 싶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훗날을 도모할 수 있잖아.”
내가 볼테로였다면 지금쯤 진작 황궁을 떠나 남부 대공령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우선 목숨을 건져야 다시 군대를 꾸릴 수 있고, 그래야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진군해온 군사들도 볼테로나 일리드를 생포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들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거나, 추적하다 놓쳤다는 말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아직 황궁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확실히 이상하기는 하지. 성벽에서 수비를 잘했다면 도주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성벽이 함락된 시점에선 누구보다 빨리 도망쳐야 했을 텐데 말이야.”
알렌시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볼테로, 그놈은 예부터 자존심이 셌지만 그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는 않았어. 그러니 체면이 상한다는 이유로 황궁에 남아있는 건 아닐 거야.”
황녀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았다.
“조심하거라, 헬리온. 우리 중에 남부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 너일 테니.”
“알겠습니다.”
헬리온은 짧게 대답한 후 병사들의 뒤를 따라 황궁 안으로 향했다.
황궁 안에서의 저항은 황궁 밖보다 심하지 않았다. 이미 방어선이 전부 뚫린 시점부터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였다.
비교적 순조롭게 황궁을 장악한 우리는 궁 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가장 찾고 싶은 건 볼테로나 일리드가 아닌 카리나였다.
이 모든 사태를 만든 장본인. 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혹여나 그녀가 황궁을 떠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황궁을 떠날 만한 시간이 있었다. 궁에 있는 패물을 죄다 들고 하녀 복장으로 궁을 빠져나갔을 수도 있다.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진 마을로 간다면 평생 신분을 숨기고 살 수도 있는 노릇이다.
은발이야 짙은 색으로 염색하면 가려질 일이고 금빛 눈은 언뜻 보면 옅은 갈색으로 보이니 추적을 피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눈감아 주기엔 이미 오래전에 선을 넘었어.’
나는 허리춤에 걸린 총에 손을 대었다.
카리나를 살려주라는 황제 폐하의 유언이 떠올랐지만 이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고 죄송한 마음이 들거나 죄책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이미 황궁으로 오면서 너무 많은 희생을 치르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불타는 판자촌, 아이들의 절규, 그리고 피 흘리며 죽어간 사람들.
그들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더 다짐했다. 카리나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고, 자신의 목숨으로 그 죄를 갚아야 했다.
그리고 카리나를 처단하는 건, 그녀를 궁으로 들인 내가 되어야 했다.
“문을 열 만한 것을 가져와라.”
황궁 홀의 정문이 굳게 닫힌 것을 본 알렌시아가 아론에게 명했다. 아론은 군사들을 시켜 문을 부술만한 거대한 석상 같은 것을 찾아오라고 명했다.
곧 북부군이 초상화 방에서 초대 황제의 석상을 가지고 왔다. 거대한 석상의 머리 부분이 홀 문에 부딪히자 문이 부서질 듯 크게 흔들렸다.
“다들 준비하라. 문이 열리는 순간 곧바로 볼테로와 일리드를 생포한다. 그들이 없을 시, 황궁 수색병을 늘리고 남부 대공령으로 이어지는 모든 길목을 통제해서 반드시 찾아내라!”
알렌시아가 말을 마치는 순간, 석상의 머리가 부서지며 동시에 홀 문이 열렸다.
총성이 난무하는 저항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홀 안은 조용했다.
무장을 한 남부군은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빈손으로 겁에 질린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남부 가신들이 모여 있었고 그 뒤로 볼테로, 그리고 일리드가 보였다.
남부 가신들은 두려움에 질려 곧바로 무릎을 꿇은 채 항복의 의미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볼테로는 노여움 가득한 표정으로 병사들 뒤에 선 알렌시아를 노려보았다. 반면 일리드는 모든 걸 체념한 얼굴이었다.
“전부 체포하라!”
헬리온의 명령에 군사들이 남부 가신들에게 다가가 총을 겨눈 채, 포승줄로 그들의 손을 묶었다.
“손 치워! 감히 황족의 몸에 손을 대?!”
볼테로가 자신을 포박하려는 병사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결국 북부군이 포박은 하지 않고 총만 겨눈 채 볼테로와 일리드를 알렌시아와 헬리온 앞으로 데려갔다.
“미친놈, 네가 결국 나라를 망치는구나.”
알렌시아가 가까이 다가오는 남동생을 보며 경멸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처럼 황족이 얼마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어차피 너는 날 못 이겨. 지금도 봐, 너한테 남은 건 네 군사들의 산더미 같은 시신밖에 없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렌시아. 아직 끝난 건 아무것도 없어.”
볼테로가 입을 크게 벌리며 섬뜩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광기 어린 그의 시선이 알렌시아를 넘어 그녀의 뒤에 있는 헬리온에게로 향했다.
누군가 막을 새도 없이 볼테로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헬리온!”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볼테로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황궁 홀 가득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뒤이어 나와 알렌시아, 그리고 남부 가신들의 비명이 홀 전체에 퍼졌다.
“헬리온, 헬리온!”
놀란 내가 헬리온의 앞으로 다가가 그를 살폈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사람은 헬리온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