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전쟁(2)
수도를 감싼 성벽은 사방에서 진군해오는 북부군에 의해 순식간에 포위되었다.
순찰을 돌고 있던 정찰병이 재빨리 황궁에 사람을 보내 이 소식을 알렸지만 북부 군대는 이미 무서운 기세로 성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제길, 저것들이 미쳤나!”
소식을 전해들은 볼테로가 큰 소리가 나도록 세게 책상을 내리쳤다. 그는 겨우 화를 다스리며 서쪽과 동쪽 성문에 병력을 배치하라 명령했다.
가장 위험한 쪽은 헬리온과 대장군이 밀고 들어오는 서쪽 성벽이었다. 처음부터 그쪽에 병력을 상당 수 배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쪽이 가장 염려되었다.
어차피 남부군이 먼저 수도를 점령한 이상, 제아무리 강한 북부군이라도 견고한 성벽을 쉽게 함락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필요한 물자들은 성벽 안에서도 충당이 가능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면 남부 대공령과 다른 지방에서 보내주는 원군이 올 테니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야했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여기에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우릴 공격하는 거야?”
예상치 못한 진군에 당황한 볼테로는 좀처럼 쉽게 차분해질 수가 없었다.
일리드가 황제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 황궁으로 쳐들어오겠다는 속셈인가? 이슈텔 리젠트라를 희생시키더라도?
좀처럼 북부 놈들의 속셈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볼테로가 주위에 있는 병사들에게 화를 내듯 명령했다.
“지금 당장 일리드와 리젠트라 공녀를 데려와라!”
그 계집의 머리카락이라도 잘라서 북부 놈들에게 보내야 경고가 되나 싶었다. 아니지, 손가락 하나 정도 없다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머리카락에 손가락까지 얹어줘야 하나 싶었다.
볼테로가 이런저런 잔인한 생각들로 고민하고 있을 때, 일리드에게 보낸 병사가 돌아왔다. 그러나 병사의 옆에는 일리드만 있을 뿐, 리젠트라 공녀는 없었다.
“뭐 하는 거야? 왜 얘만 데려와? 리젠트라 공녀는 어디 있어?”
“황자 전하, 저, 그게…….”
병사가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선 일리드가 대신 말했다.
“이슈텔은 여기 없어요. 북부군이 수도로 진군하는 걸 보면 지금쯤 헬리온에게 무사히 합류했나 보네요.”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당황한 볼테로가 제 귀를 의심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볼테로 뿐만 아니라 그의 곁에 있던 남부 가신들과 기사들마저 놀라 입을 벌린 채 일리드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은 사람들의 분위기 속에서 오직 일리드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이슈텔을 빼돌렸습니다. 오늘 아침 일찍 페리아 백작 부녀가 입궁한 건 아시죠? 그 집의 마차를 태워서 황궁에서 탈출시켰습니다. 그러니 이 궁을 이 잡듯이 뒤져도 이슈텔은 찾지 못하실 겁니다.”
청천벽력 같은 일리드의 말에 남부 가신들이 놀라 웅성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분한 볼테로를 진정시키던 가신들은 이제는 자신들이 더 흥분해 얼굴이 시뻘개졌다.
강력한 북부군이 밀려들어 오는데, 내부의 결속은 다지지 못할망정 일리드가 가장 먼저 나서 일을 그르쳤다.
이슈텔 리젠트라를 인질로 삼고, 그 사이에 신전의 동의를 얻어 일리드의 정통성을 확고히 인정받으려던 남부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고만 것이다.
“다들 이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요? 아직 남쪽 성벽에는 북부군이 오지 않았다고 하니 그쪽을 통해서 피신하는 게 목숨을 건지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리드가 가신들을 돌아보며 충고하듯 말했다. 일은 일대로 벌이고 저 혼자 멀쩡한 일리드를 보며 가신들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그에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가 볼테로밖에 없기에 가신들이 재빨리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황자 전하, 우선 황궁을 떠나 몸을 피하는 게 어떠실지요?”
가신 중 하나가 볼테로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자 볼테로가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웃기지 마. 여기가 내 집인데 어딜 도망가?!”
볼테로가 가신을 바닥에 내팽겨치듯 집어 던졌다. 그는 반쯤 눈이 돈 상태로 홀에 모인 가신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황궁을 떠나는 놈이 있으면 그 즉시 머리에 총구멍이 날 줄 알아! 남부에 남겨진 가족들도 다 죽일 거야!”
볼테로가 고개를 휙 돌려 일리드 옆에서 덜덜 떨고 있는 테셀라 경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너, 시에라 휘어튼 알지? 그 집안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하지?”
“예? 예…… 압니다…….”
테셀라 경이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울먹이며 대답했다. 볼테로가 다시 눈을 굴리며 가신들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들 모두 잘 알고 있겠지? 그 집안 꼴 나고 싶지 않으면 황궁에서 도망칠 생각 꿈에도 꾸지 마. 알았어?!”
볼테로가 어떻게 휘어튼가를 멸문시켰는지 잘 아는 남부 가신들은 모두 겁먹은 상태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가만히 있지 말고 꺼져! 가서 북부 놈들 막을 생각이나 하라고!”
볼테로의 불호령에 남부 가신들이 앞다투어 홀을 빠져나갔다.
일리드는 증오스런 눈길로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볼테로는 가신들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애원과 탄식이 섞인 목소리로 아들에게 말했다.
“신전의 다른 신관들은 전부 우리 편으로 돌아섰어. 이제 대신관 하나만 설득하면 되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응?”
“…….”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잖아. 내가 너보고 뭘 하라고 했니? 어?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가만히 있으면 황제가 되고 이 나라가 네 것이 되는 건데, 대체 왜!”
“이제 가만히 있는 게 싫어서요.”
일리드가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껏 아버지 말을 들어서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더라고요. 그 착한 프리모스와는 간직할 만한 추억 하나 남지 않았고, 시에라는…… 더 말하기도 힘드네요.”
“그 죽은 놈들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네 앞길을 스스로 망쳐?!”
결국 참지 못한 볼테로가 아들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북부 놈들이 황궁을 점령하면 널 살려 둘 거 같아? 아니야. 나보다도 널 먼저 죽일 거야. 네 목을 쳐서 성문 밖에 걸어놓고 모두가 그 앞에 침을 뱉게 만들 거라고. 내가 거병을 했을 때 너와 헬리온 둘 중 하나는 죽게 되는 거였어. 그런데 왜 네가 죽으려고 해, 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제가 죽는 게 나아요. 헬리온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
“이 한심한 놈! 머저리 같은 자식!”
볼테로는 금방이라도 아들의 뺨을 후려칠 것처럼 손을 높이 들어올렸지만 결국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해 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크게 절규했다.
고막이 울리는 악다구니에 남부 기사들이 눈을 꼭 감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일리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당장 얘부터 남부 대공령으로 대피시켜.”
볼테로가 기사단장에게 손짓하며 명했다. 그러자 단장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게, 지금 사방의 성문이 다 막혔습니다.”
“남쪽 성문은 멀쩡하잖아!”
“방금 전에 남쪽 성벽에도 북부군이 당도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제기랄! 제기랄!”
볼테로가 다시금 홀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를 쳤다. 그는 몸을 크게 들썩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미친 사람처럼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야. 헬리온을 죽여야 해. 그러면 이 전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간에 황위를 이을 자는 너밖에 없어. 알렌시아도 널 죽이지는 못할 거야.”
“아버지!”
“네가 아무리 뭐라 그래도 소용없어! 다 널 살리기 위해서야! 난 그렇게라도 해야겠어!”
일리드와 볼테로의 언성이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황궁 밖 동쪽에서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이 들렸다. 땅까지 흔들리는 듯한 충격에 놀란 일리드와 볼테로가 창문가로 다가갔다.
“말도 안 돼!”
볼테로가 넋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너져 내린 동쪽 성벽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 *
“화약이 시간에 맞춰서 잘 터졌구나. 동쪽에서 먼저 터트려야 서쪽에 몰린 군사들이 이쪽으로 분산되지.”
말 위에 앉은 알렌시아가 무너진 동쪽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이 무너지자 남부군은 우왕좌왕하며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은 폭발물 잔해에 부상당한 전우들을 보고는 놀라 바로 투항하거나 황궁을 향해 도망쳤다.
사방에 검은 연기와 붉은 화염,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진동을 했다. 알렌시아와 북부 가신들은 냉정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런 전시 상황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그 광경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넌 이런 걸 보는 게 익숙하지 않지?”
전장을 바라보던 알렌시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내가 작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지간하면 보지 말라고 하고 싶지만 너도 봐야지. 이 전쟁은 내 어리석은 동생과 네 이기적인 친척이 만들어낸 합작이니까. 결국 그들을 막지 못한 우리 책임도 있고.”
“잘못은 그들이 했는데 피해는 죄 없는 사람들이 받고 있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전투는 보기 힘들다면서 총은 손에서 놓지 않는구나.”
알렌시아의 시선이 내 오른손을 향했다. 나는 손가락에 걸린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탄환을 뺀 총에선 소리가 나지 않았다.
“네. 제 손으로 끝내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여자 말인가? 파비엘 리젠트라의 손녀?”
“네.”
“너희들도 할아버지 대의 전철을 그대로 밟는구나. 이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는 거야. 뭐, 너희 같은 경우엔 어쩌다보니 잔뜩 어긋난 마지막 단추로 태어났지만.”
“네. 그래서 이번엔 모든 걸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나는 실탄이 든 가죽 주머니에서 총알을 꺼내 손에 든 권총에 장전했다.
“알렌시아 황녀님, 제게도 군사들을 나누어 주십시오. 카리나가 도주하기 전에 황궁에서 잡겠습니다.”
빤히 나를 보던 알렌시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아론에게 명했다.
“리젠트라 공녀에게 군사를 내어주어라. 그리고 아무도 카리나 리젠트라를 사살하지 못하게 하라. 마지막은 공녀가 처리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