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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들-148화 (148/160)

148화. 전쟁(1)

뮬을 하늘로 날려 보낸 후로도 우리는 몇 시간을 계속해서 북쪽을 향해 달렸다.

이제 황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도와 멀어졌지만 최대한 빨리 북부군과 합류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을 바꿔주는 물약의 효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졸이는 시간이 계속 이어지던 때, 라비가 돌연 마차를 멈추었다.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숲속 깊은 곳에서부터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가까이에 군대가 있는 것 같아.”

율리언이 창밖을 살피며 말했다.

“이슈텔, 창문 아래로 고개를 숙여. 텔리아 영애도 어서요.”

그의 말에 나와 슈리가 몸을 숙이고 숨을 죽였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탄 마차를 에워싸는 것처럼 긴장감이 느껴졌다.

“정체를 밝혀라!”

곧 쩌렁쩌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비가 마부석에서 풀쩍 뛰어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알 수 없는 신분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서쪽 바다 소금 상인회 카밀라 상단입니다.”

“검을 거두어라.”

암호 같은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병사들이 칼을 검집에 넣는 소리가 이어졌다. 곧 라비가 마차 문을 열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율리언이 나와 슈리의 손을 잡아주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숲은 나무 수보다 훨씬 많은 군사들로 가득했다. 엄청난 규모의 대군에 놀라 말문이 막혔을 때, 누군가 말을 타고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얼굴들이 그 모양이라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못 알아보겠군. 꼴들이 제법 재미있어.”

짙은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강인하면서도 단단한 느낌이 헬리온과 비슷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었다.

얼굴을 마주한지 오래되어 기억이 어렴풋했지만 눈앞의 여인은 알렌시아 황녀가 확실했다.

“여기 소금 상인회 조합원들에게 해독제를 가져다주어라.”

알렌시아의 명령에 기사 한 명이 다가와 우리에게 물약 하나씩을 건넸다. 쓴 맛이 나는 물약을 단숨에 삼키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가슴께에서 바람에 흩날리던 갈색 머리카락이 점점 밝아지더니 빛을 받은 것처럼 금색으로 변하였다.

다른 외모적 변화는 알아채지 못했으나 내 옆에 있던 슈리의 키가 커지며 머리와 눈 색이 바뀌는 것을 보며 나도 원래의 얼굴로 돌아왔겠구나 짐작했다.

“슈리!”

황녀의 뒤에 있던 아론이 냉큼 달려와 여동생을 끌어안았다. 막내를 위험한 곳으로 보내고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지 그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이슈텔, 고생 많았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율리언이 나를 품에 안아 몸을 다독여주었다. 황궁을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는데 이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공녀님,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공녀님께서…….”

라비가 평소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옥새를 잘 옮겨준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니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라비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는 듯 표정이 어두웠으나 내가 거듭 괜찮다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이쪽으로 올 줄 알았으면 헬리온을 동쪽으로 보낼걸 그랬어. 아침에 눈 뜨고부터 잠들 때까지 온통 네 걱정만 하던데. 하필 이렇게 길이 어긋날 줄이야.”

알렌시아가 말에서 내리더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네가 이슈텔 리젠트라구나. 황후 폐하의 장례식 이후에 처음 보는 건데 얼굴이 그대로구나.”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알렌시아 황녀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나를 찬찬히 살펴보던 황녀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우선 계속 진군하자. 볼테로가 네가 탈출한 걸 몰라야 황궁까지 거침없이 갈 수 있거든.”

알렌시아가 뒤따르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밤 안으로 황궁을 되찾는다. 진군하라!”

* * *

“샤샤, 이리 와!”

루비아가 검은 고양이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아이가 긴 꼬리를 잡아당기자 고양이가 귀찮은 듯 갸르릉 울음소리를 내며 제 주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카리나는 사랑하는 조카도, 귀여워하는 고양이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를 보기도 하는 등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하지 못했다.

“이모…….”

샤샤를 안고 온 루비아가 카리나의 드레스를 잡아당겼다. 평소에는 잘 놀아주고 선물도 많이 주던 이모였는데 요새는 놀러 올 때마다 관심을 주지 않는 기분이었다.

루비아는 카리나의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옆방으로 갔다.

옆방은 카리나가 있는 큰 방보다 훨씬 작고 장난감도 없었지만 조용히 고양이를 만지작거리기엔 더할 나위없이 좋은 곳이었다.

“샤샤, 이게 뭐야?”

루비아가 벽면에 놓인 검은 망토를 보며 고양이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미 노곤노곤하게 졸고 있는 샤샤는 대답이 없었다.

호기심 많은 루비아가 망토를 걷어내고 그 아래 놓인 물건을 살폈다. 처음 보는 예쁜 그림이었다.

“어, 고모다. 고모!”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본 루비아가 그림 속 이슈텔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루비아는 이슈텔 고모가 보고 싶었다. 고모가 리젠트라 공작 저에 있었을 때는 자주 만났는데 요즘엔 얼굴을 못 본 지가 너무 오래됐다. 게다가 최근엔 무슨 일인지 사촌 오빠들과 아기 마티나도 보지 못했다.

“이챠.”

루비아가 낑낑거리며 그림을 끌고 카리나에게로 갔다. 멍한 얼굴로 창을 보던 카리나가 조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비아가 카리나에게 그림을 내밀었다.

“이모, 우리 고모랑 친구예요?”

“그건 아닌데, 왜 그러니?”

“그냥 이 그림이 방에 있어서요.”

카리나가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은 루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전에는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는 친구 못 해.”

“왜요? 싸웠어요?”

루비아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놀란 듯 물었다. 카리나가 피식 웃음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잘못해서.”

“그럼 사과했어요?”

“음, 그것도 아니.”

“왜요?”

“내가 너무 비겁해서.”

“비겁한 게 뭐예요?”

“음, 그건 말이지. 내가 겁쟁이에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야.”

아이는 악의 하나 없는 순진한 눈빛으로 끊임없이 질문을 했다.

계속되는 질문 세례에다 별로 말하고 싶은 주제도 아니었기에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카리나는 그런 기색 하나 없이 아이의 질문에 전부 답을 해주었다.

“우리 고모는 엄청 착해요. 언제라도 사과하면 받아줄걸요?”

루비아가 그림 속 이슈텔을 보며 말했다.

“엄마가 그랬는데 용서는 선택이지만 사과는 필수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모도 고모한테 꼭 사과해요. 고모는 착해서 용서해 줄걸요.”

아이가 어떤 말을 하든 다정히 대답해주는 카리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이렇다 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루비아.”

카리나가 조카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앞으로는 나를 이모라고 부르지 마렴. 예전처럼 공작 부인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그냥 부르지 않고 모른 척 지나가도 괜찮아.”

카리나는 오늘부로 아이를 더는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니가 남긴 유일한 아이인 걸 생각하면 늘 곁에 두고 싶을 정도로 눈에 밟혔지만 이젠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접어두려고 했다.

자신이 무사히 황태후가 된다 하더라도 황가를 어지럽힌 악녀라는 낙인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것이다. 아마 제국 역사상 가장 악독하고 권위 없는 최악의 황태후로 기록될 것이다.

황제 사후에 받은 황후 자리에다가 황태자의 친모도 아닌 이에게 황태후의 명예 같은 걸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루비아를 데리고 있더라도 길게 보면 아이에게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카리나는 루비아가 친엄마에 관한 이야기를 모르길 바랐다. 카리나가 가장 후회하는 일은 자신의 복수만을 생각하느라 루비아가 커서 겪을 상처를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결국 말리파의 말이 다 맞았어.’

스스로가 가장 가엾다고 생각해온 카리나에게 루비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 존재였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카리나는 이슈텔을 생각했다.

신전에 사는 그 미친 늙은이 말리파가 말했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카리나의 입장을 생각하지만, 카리나는 그녀의 편에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지금까지야 늘 이슈텔이 자신보다 위여서 그랬다고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슈텔 리젠트라는 볼테로의 손에 목숨이 달린 황제 독살범이었고 자신은 황태후가 될 몸이다.

결국 이렇게 역전된 상황에 와서야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바로 보였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여인이 되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이슈텔 리젠트라가 나락 밑바닥까지 굴러떨어졌지만 자신이 원하던 건 그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루비아. 평생 출생의 비밀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닐 아이를 생각하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 나갈 것만 같았다.

‘이 황궁에 와서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어.’

가장 바라던 것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잃은 것이 떠올랐다.

황금빛 장미 목걸이.

언젠가 값을 치르고 가져가겠다고 했던 언니의 유품. 그것은 아마 죽어서도 돌려받지 못할 거다.

‘그럼 난 대체 뭘 위해서…….’

자신을 아껴주었던 황제의 죽음에 안도하고, 유일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세워진 기쁨이라면 적어도 죽을 때까지 자신은 행복해야 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물밀 듯 몰려드는 서러운 감정에 카리나의 금빛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아이 앞이라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슬픔에 그만 소리 내어 흐느끼고 말았다.

“카리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카리나가 손에 파묻은 얼굴을 들었다. 루비아가 작은 손에 손수건을 쥔 채 그녀에게 건넸다.

“이모라고 부르는 게 싫으면 카리나라고 불러도 되죠?”

아이의 위로 섞인 말에 카리나가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양팔을 크게 벌려 조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화목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록펠트 공작 부인!”

카리나의 담당 하녀가 놀라 사색이 된 채로 처소로 뛰어 들어왔다.

“공작 부인! 북부군이 성벽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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