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46화 (146/160)

146화. 선한 마음

에보니의 처형식 이틀 전 날. 나는 일리드의 도움으로 감옥에 갇힌 에보니와 독대할 수 있었다.

처형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경비가 삼엄했지만, 곧 황제가 될 일리드를 본 간수들은 군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에보니…….”

내가 이름을 불러도 기절한 듯 잠든 에보니는 쌕쌕 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고 했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의 몸은 성한 구석이 없었다.

팔다리 곳곳에 말라붙은 피딱지가 무성했고 얼굴도 안쓰러울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안 그래도 일전에 폭발 사고로 다친 귀가 더 나빠졌는지 그녀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에보니, 잠깐 일어나 봐요.”

내가 감옥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녀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그제야 에보니가 퉁퉁 부은 눈을 힘겹게 떠올렸다.

“아, 이게 누구야. 이슈텔이잖아.”

그녀가 웅크려있던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희미하게 웃는 입술 끝이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터져있었다.

“내일모레면 저세상 사람이 되는데 잘됐네요. 마지막에 이렇게 얼굴 한번 볼 수 있어서.”

에보니는 마치 내가 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볼테로 황자가 북부군이 어디서 진군해 올 거냐고 물으면서 고문했는데, 정말 모르니까 뭔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수도 서쪽 성벽에서 온다고 했어요. 그쪽에 병력을 많이 배치한 것 같으니 혹시라도 북부와 연락할 기회가 있으면 그쪽은 피해서 오라고 해요.”

“알았어요, 고마워요.”

“볼테로가 당신을 불러다가 뭐라고 하진 않던가요?”

“네. 나는 일리드가 계속 옆에 함께 있어서 따로 손을 대진 못했어요…….”

“하, 그거 참 다행이네요. 괜히 둘이 말이 어긋났다가는 내가 거짓말한 게 들통났을 텐데.”

잠시 말을 멈춘 에보니가 밭은기침을 했다. 입가를 가린 하얀 소매에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처럼 상태가 심각한 에보니에 반해 나는 그녀 앞에 앉아있는 것이 무안할 정도로 멀쩡했다.

“미안해요, 에보니.”

내가 받아야 할 고통까지 그녀가 대신 받고 있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당신이 미안할 일이 뭐 있어요. 그냥 내 명이 여기까지인가 보죠.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내 예상보다 오래 산 거예요. 난 형제들한테 죽을 줄 알았거든요. 그때 마차 사고 때 말이에요.”

에보니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 중 아무도 이런 최악의 상황이 닥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잖아요. 그러니 내가 죽더라도 죄책감 같은 건 갖지 말아요. 안 그래도 당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들이 산더미같이 쌓였을 텐데 나까지 거들 순 없지.”

툭툭 내뱉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나를 신경 써주는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에보니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첫 만남부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사건건 나와 반목하던 사람이었는데, 내 편에 서기로 한 이후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완전한 내 사람이 되었다.

기껏해야 이중첩자로 남부와 카리나의 움직임만 파악해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어가면서까지 나를 위해 일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신이 이렇게 날 보러 와줬으니까 유언 같은 거 말해도 될까요?”

에보니의 말에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목이 메어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릴체 후작한테 살아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하다고 전해줘요.”

“네…….”

“여기 갇혀서 고문 받는 동안 유언으로 뭘 남길까 생각해봤는데 사실 딱히 할 말이 없더라고요. 어차피 들판에 버려져 까마귀밥이 되나, 땅에 고이 묻히나 똑같이 썩어 없어질 몸을 거두어 달라고 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난 죽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서요.”

“…….”

“첨엔 좀 서글프다 생각했는데 다르게 생각해보니까 미련 없이 떠나는 거니까 좋은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부탁할 게 없긴 한데 겨우 하나 쥐어짜냈네요.”

“말해줘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라도 할게요.”

“이 내전에서 북부가 이기게 되면 나도 반역죄로 처형당했다는 누명을 벗을 수 있겠죠. 그러면 역사에 내 이름이 남을 텐데……. 난 죽어서도 블라딘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럼?”

“내가 어머니의 성으로 기록될 수 있게 해줘요. 당신이 내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들을 받을 순 없겠지만 역사에 한 줄 적히는 이름이나마 다르게 불릴 수 있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내 대답에 에보니가 만족한 듯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잠시 후, 에보니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 당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내가 말해 보라고 하자 에보니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당신은 참 선한 사람이에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유약함에서 오는 흔한 착함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기에 행동하는 선함이죠.”

“…….”

“카리나가 이렇게까지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나도 이렇게 허망한데 당신은 얼마나 모든 게 부질없다고 느끼겠어요. 앞으로는 다른 이들에게 당신의 그런 선한 마음을 베풀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말은 고맙지만 결국 내가 헬리온처럼 단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잖아요. 이게 선한 마음의 결과라면 난 이제 그런 거 필요없어요.”

“하지만 이슈텔, 나는 당신이 그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카리나는 아니어도 에보니 하나는 건졌잖아요. 선한 마음은 꼭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고귀한 것이니 당신만큼은 끝까지 그런 사람으로 남아줬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에보니가 머쓱한 듯 고개를 숙이고는 내게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럼 가 봐요. 당신을 만나서 내 지루한 인생이 조금은 즐거웠어요.”

* * *

“에보니는 잘 만났어?”

지하 감옥에서 나오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일리드가 물었다. 내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에보니가 죽으면 모두들 당신한테로 시선을 돌릴 거야. 그러니 지금처럼 내 옆에 꼭 붙어있어.”

“난 언제쯤 황궁을 나갈 수 있는 거야?”

“지금 기회를 엿보고 있어. 하인들을 매수하기가 쉽지가 않아. 당신이랑 친했던 하인들은 카리나가 전부 황궁 밖으로 내보내는 바람에…….”

“에보니가 처형당하기 전에 탈출할 수는 없을까?”

“힘들 거야. 아직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탈출부터 했다간 이슈텔 당신도 위험해져. 에보니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에보니를 이렇게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이슈텔, 먼저 내 처소에 가있어. 나는 잠깐 테셀라 경을 만나고 갈게.”

“응.”

일리드는 나를 처소 근처까지 데려다 준 후 자리를 떠났다.

문을 열고 일리드의 처소로 들어가자 하녀 하나가 침대를 정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즘에는 하녀 한 명이라도 근처에 있는 게 신경이 쓰였다. 혹시라도 볼테로가 보낸 사람일까봐 염려되었다.

“나머지는 내가 할 테니 그만 나가 보아라.”

그러나 내 명령에도 하녀는 쭈뼛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기만 했다. 주변에 나와 자신밖에 없는 걸 확인한 하녀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공녀님, 저 슈리예요.”

한껏 목소리를 낮춘 하녀의 말에 내가 눈을 끔뻑였다. 분명 처음 보는 하녀인데 이 하녀가 지금 내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건가 싶었다.

“그래, 슈리. 이만 나가보아라.”

“아뇨, 공녀님. 그게 아니라 제가 슈리 텔리아예요. 아론 오빠와 라비 오빠의 동생 슈리요!”

“뭐……?”

놀란 내가 하녀를 스윽 훑어보았다. 금빛 머리카락에 검은 색 눈동자를 가진 이 하녀는 내가 아는 슈리가 아니었다. 게다가 슈리는 나보다 키가 더 컸는데 이 하녀는 나와 키가 비슷한 정도였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알렌시아 황녀님께서 가지고 온 물약을 마셔서 이렇게 됐어요. 제가 슈리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의 말에도 나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나와 슈리만 알 수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가 선물 해준 물건들, 함께 놀러갔던 곳들. 그 이야기를 듣자 이 낯선 하녀가 슈리라는 것이 조금씩 믿기기 시작했다.

“슈리 너만 온 거야? 다른 사람들도 왔어?”

“네, 라비 오빠와 릴체 후작님,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있어요. 지금은 저처럼 다른 얼굴이라 알아보지 못하셨을 거예요.”

슈리는 그들이 나를 황궁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잠입한 정예병이며 며칠 안에 상황을 봐서 궁을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수도 시가지를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얼음독수리를 날려 보낼 거예요. 그러면 저희와 북부 군대가 중간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거고, 그 길로 바로 황궁을 향해 진격할 거예요.”

슈리의 말대로라면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라면 나는 에보니의 목숨을 꼭 살리고 싶었다.

“내일 안에 나갈 수 있을까? 에보니가 처형되기 전에 황궁을 탈환하면 좋을 텐데.”

“저희 쪽은 이미 준비를 다 끝냈어요. 공녀님한테 붙는 감시만 덜해지면 언제라도 궁을 나갈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이번 탈출은 단 한 번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절대 실패해서도 안 되고 일말의 의심도 받아선 안 됐다.

“페리아 백작가의 마차를 타고 가자. 내가 페리아 영애로 위장하면 의심을 덜 수 있을 거야.”

“예? 페리아 영애라면 요새 황궁에 자주 드나드는 그 집안의 딸을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

황태자비 자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페리아 가문은 최근 들어 볼테로 황자와 자주 만남을 가졌다.

페리아 영애도 아버지를 따라 종종 입궁했기에 그 집안의 마차를 탈 수만 있다면 무사히 수도 시가지를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페리아 영애가 언제 입궁하는지 아세요? 며칠 전에 입궁해서 바로는 오지 않을 텐데.”

“내일 아침 일찍 올 수 있게 할게.”

“어떻게요?”

“일리드에게 말해서 페리아 백작가에 입궁하라고 전하면 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