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알렌시아와 정예병
라비를 처벌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이슈텔이 황궁에 있는 한 북부 대군이 온다 하더라도 궁으로 진군할 수 없다.
「어머니의 군대가 오는 대로 정예병을 꾸려 황궁으로 잠입시킬 것이다. 라비 텔리아도 그들과 함께 보내도록.」
라비를 비롯한 최정예 기사 몇 명만 하인으로 위장시켜 이슈텔을 빼내 와야 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처벌할 이유가 없었다.
알렌시아 황녀의 군대가 올 때까지 남겨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아론은 전서조를 보내 알렌시아와 긴밀히 연락을 취했고, 율리언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황궁 쪽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나 헬리온은 그 날 밤 이슈텔을 황궁으로 보냈다는 후회감에 빠져 방에서 두문불출이었다. 라비 역시 주인을 두고 자신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모두의 절망을 일단락 시켜줄 사람이 찾아왔다.
북부의 대군을 이끌고 알렌시아 황녀가 남작령에 당도했다.
* * *
“다들 분위기가 심하게 가라앉아 있네. 뭐, 시끌벅적할 상황이 아니긴 하지만.”
말에서 내린 알렌시아가 어깨 위에 앉은 얼음독수리를 만지작거리며 남작령을 둘러보았다.
거리가 먼 북부 대공령에서 이렇게 일찍 수도 부근으로 올 수 있었던 건 전부 뮬 덕분이었다. 체력이 강한 얼음독수리가 쉬지 않고 날아 서신을 전달한 덕분에 이 많은 대군이 지체 없이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슈리, 독수리 받아라.”
알렌시아가 슈리에게 뮬을 건넸다.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온 뮬이 제 주인을 찾으려는 듯 긴 목을 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슈텔도 헬리온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온은 어디 있지?”
알렌시아의 물음에 아론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저, 황녀 전하. 사실 헬리온 전하께서 며칠 째 한숨도 못 주무셨다가 방금 전에 겨우 잠드셨습니다. 그래서 함부로 깨우기가 곤란하여…….”
“그래 잘했다. 앞으로 잠 잘 시간이 더욱 줄어들 텐데 잘 수 있을 때 자 둬야지.”
“대신 여기 리젠트라 공작 부부와 릴체 후작께서 인사 나오셨습니다.”
아론이 자신의 뒤에 서있던 자르와 실비아, 그리고 율리언을 알렌시아에게 소개시켰다. 부부와 율리언이 황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런데 자네 동생은?”
알렌시아가 짧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며느리가 될 아이의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그 말에 자르가 말릴 새도 없이 갑자기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한 황녀가 푸른 눈을 찡그리자 다시 아론이 나섰다.
“전하, 리젠트라 공녀님께서는 함께 오지 못하셨습니다.”
“뭐? 왜? 이 집안 사람들 중에 그 애가 제일 중요한데 왜 못 왔다는 말이야?”
“저, 그게…… 황궁에서 옥새를 찾아가지고 나오시다 남부 군사들에게 잡히는 바람에…….”
“이런, 세상에. 그래서 지금 그 애는 황궁에 있고?”
“네, 그렇습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알렌시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황녀는 아론의 옆에 있는 라비를 스윽 보고는 혀를 찼다.
“그래서 텔리아네 셋째가 평소답지 않게 이렇게 축 처져 있는 거로군.”
“면목 없습니다, 전하.”
“그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몸가짐을 바로 해. 이렇게 병든 닭처럼 비실거리지 말고! 누구 보라고 어울리지도 않게 청승을 떨고 있어?”
황녀의 불호령에 라비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자르와 실비아도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황가의 푸른 눈에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알렌시아는 쌍둥이 동생인 볼테로만큼 강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허나 형제들보다 훨씬 더 성격이 세고 성미가 급한 탓에 그녀를 오래 본 텔리아 남매도 이렇게 쩔쩔매곤 했다.
“다들 긴장 늦추지 마. 우리는 볼테로와 일리드를 생포할 거지만 그들은 우리를 죽여서라도 잡으려고 할 거야. 여러모로 우리가 불리한 상황이니까 정신들 똑바로 차려. 알았어?”
“알겠습니다, 전하!”
텔리아 남매와 북부 가신들이 자세를 바로 잡으며 동시에 경례를 했다. 가신들 사이에 낀 자르 부부와 율리언이 어색하게 그들을 따라 황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고 보니 에보니도 안 보이는군. 그 애도 자고 있나? 그 애는 열흘을 못 잤더라도 내게 와서 얼굴을 비춰야할 텐데?”
“그게…….”
황녀에게 또 혼나기 싫은 아론이 율리언에게 눈짓을 했다. 율리언이 살짝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블라딘 공녀도 지금 황궁에 구금되어있습니다.”
“뭐? 걔는 또 왜?”
“얼음독수리로 서신을 보내러 새장에 갔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듯합니다.”
“상황 정말 최악이네.”
알렌시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황궁으로 진군하기 위해선 먼저 그 두 아이를 빼와야겠네.”
“그렇습니다, 전하.”
아론이 재빨리 맞장구를 쳤다.
“저희 생각으로는 아무래도 소수의 정예병을 황궁 사용인으로 변장시켜서 두 공녀님을 빼오는 게 최선일 듯싶은데, 전하께선 어떠신지요?”
“당연히 그래야지. 달리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라비 텔리아는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히 가야 하고.”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던 알렌시아가 율리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릴체 후작이라고 했지?”
“네, 전하. 율리언 릴체라고 합니다.”
“리젠트라 공작은 할아버지랑 똑같이 생겼는데, 자네는 할머니랑 닮지 않았군.”
“예.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기사단장이었다고 하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황궁 지리에 가장 밝겠군. 자네도 라비와 함께 가게.”
“명 받들겠습니다.”
율리언의 다부진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알렌시아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전하!”
그때 슈리가 하늘 높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남자들이 하인으로 변장하는 것보다 제가 하녀로 변복해서 공녀님께 접근하는 게 의심을 덜 살 거예요. 그러니 저도 보내주세요!”
위험을 자처하는 막내 여동생의 발언에 놀란 오빠들이 가만히 있으라며 신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슈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데려오신 군사들 중에서 황궁에 잠입했을 때 저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저는 황궁에서 지내며 하녀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고, 여차하면 숨을 수 있는 비밀 공간들도 여럿 알고 있습니다.”
아론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목뒤를 잡았다. 라비는 제 동생을 안전한 곳에 두고 싶었지만 자신이 지은 죄가 있어서 차마 나서지 못했다.
떨떠름하기는 알렌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집안에서 두 명씩이나 사지나 마찬가지인 곳으로 보내기가 꺼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슈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알렌시아가 데리고 온 여전사들 중에 슈리만큼 황궁을 잘 아는 이는 없었다.
“그럼 자네들에게 특별히 이 약을 주도록 하지.”
알렌시아가 손짓하자 기사 하나가 나무함을 가져왔다. 알렌시아가 함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물약이 든 병을 슈리에게 건넸다.
“외모와 체격을 바꿔주는 약이란다. 이 약을 정예병들과 나누어 마시고 가렴. 약효는 한 모금당 반나절이니 주의하여 소분해 마시거라.”
“감사합니다, 전하.”
슈리가 두 손으로 조심히 물약이 든 병을 받아들었다.
알렌시아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이만 쉬고 내일부터 잠입 준비를 시작하도록.”
* * *
황궁에 포로로 잡혀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일리드가 이야기한 대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의 곁에 붙어있었다.
낮에는 일리드가 황제 대관식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주고, 밤이 되면 그의 처소로 가서 잠을 잤다.
볼테로가 일리드를 불러서 식사를 하면 그 자리에 따라가서 꾸역꾸역 밥을 다 먹었다. 그럴 때마다 볼테로는 못마땅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일리드가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은 덕분에 따로 나를 불러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 덕에 엊그제까지만 해도 시시각각 날 따라다니던 감시의 눈길이 조금은 줄어들었다.
오늘은 감시가 뜸한 틈을 타서 황제 폐하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성묘로 갔다. 이곳은 황궁에서도 가장 외진 곳이라 인적이 드문 탓에 황궁에서 오래 산 나조차도 어색한 곳이었다.
그래도 성묘 가운데에 있는 관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두려움과 슬픔이 뒤섞인 마음을 누르며 유리관 가까이 다가갔다.
“폐하…….”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폐하의 시신은 손상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신관들이 관에 신성력을 걸어두었다고 들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헬리온이 후계자로 발표되기 바로 전날 밤, 폐하께서 승하하실 거라고는 감히 상상조차하지 못했다.
아마 그 누구라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런 비극이 닥칠 것이라고.
실의에 빠진 내가 멍하니 관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있을 때, 성묘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등불이 있는 내 근처로 다가왔다.
“……!”
카리나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란 눈치였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내 옆으로 와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내가 차가운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저 밀랍 인형처럼 굳어있었다.
그동안 일부러 나를 피해 다닌 건지 같은 황궁에서도 카리나를 마주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일리드에게 카리나를 이곳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를 만나서 꼭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네가 폐하를 독살했어?”
볼테로는 내가 폐하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씌웠다. 그러나 일리드가 볼테로 몰래 신관들을 시켜 알아본 바로는 폐하의 체내에서 독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폐하의 사인이 독이 아니거나, 신관들이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독을 썼다는 것이다.
“……아니야, 내가 죽인 거.”
한참 만에 카리나가 작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갔을 땐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 더 손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