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부인들-143화 (143/160)

143화. 황태후 대관식

카리나는 대관식이 치러질 황궁의 중앙 홀로 걸음을 옮겼다.

황제와 황태후의 대관식이 동시에 치러지는 건 제국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때문에 황궁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분주했다.

“왔습니까, 록펠트 공작 부인!”

유리 상자에 놓인 황제의 왕관을 보고 있던 볼테로가 카리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대관식 준비를 하느라 바쁠 텐데 여기는 무슨 일로? 아, 나처럼 왕관을 구경하러 온 건가? 네 관은 여기 있단다.”

그가 몸을 뒤로 물리자 황제의 관 뒤로 황태후의 왕관이 보였다. 황제의 관에 버금갈 만큼 크고 아름다운 보석이 박힌 순백색 관이었다.

“내 어머니가 노년에 쓰시던 걸 너같이 젊은 애가 쓰게 될 줄이야.”

볼테로는 카리나를 눈으로 쓱 훑고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사실 볼테로는 서신으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카리나의 실제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하던 차였다.

파비엘 리젠트라의 손녀, 예비 황태자비가 데려온 차 시중 하녀, 그리고 황제의 정부.

남부까지 소문이 파다한 그녀였기에 볼테로 역시 카리나가 어떤 사람인지 내심 궁금했다.

남부를 배신한 에보니 블라딘이나, 전의를 상실한 아들 일리드를 대신하여 자신에게 연락한 패기가 기특하여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그녀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편지를 보낼 때만 해도 황궁을 집어삼킬 것처럼 야망에 부풀어 있더니 지금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환자처럼 생기가 없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죽상이군. 대관식을 앞두고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 난 누가 내 앞에서 얼굴 굳히고 있는 거 딱 질색이야.”

“황제 폐하의 장례식은 언제 진행되나요?”

카리나의 목소리는 표정만큼이나 힘이 없었다. 상대할 맛이 안 나는 목소리였지만 중요한 질문이었기에 볼테로가 짧게 대답했다.

“대관식이 끝나면.”

“그건 너무 늦잖아요. 시신이 망가지기 전에 얼른 시행해줘요.”

“그렇다고 황태후의 대관식을 장례식 다음에 진행할 수는 없지. 그랬다간 안 그래도 형편없는 네 정통성이 더욱 보잘것없어질 텐데?”

볼테로의 말에 카리나는 이렇다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황제 사후에 황후가 되고 황태후가 되는 것이기에 그녀의 입지는 매우 좁았다.

“그래도 에보니 블라딘은 반드시 죽여주세요. 그 여자가 나한테 했던 것처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단두대에 세워 비참하게 죽을 수 있게.”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나도 그 계집에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해서. 네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셈이었다.”

그 말에 카리나의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 반란의 끝이 어떻든 간에 에보니 하나는 끌고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너, 왜 그 여자는 죽이라고 안 하지? 이슈텔 리젠트라 말이야.”

볼테로가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여전히 딱딱한 표정의 카리나를 보았다.

“에보니야 나름 잘 지내다 네 정체를 까발린 거 하나로 틀어졌다지만, 이슈텔 리젠트라는 태생부터 어긋난 관계 아닌가? 나라면 제일 먼저 죽여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텐데.”

“…….”

카리나는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는 볼테로의 시선을 피했다. 황제와 꼭 닮았지만 훨씬 더 위협적이고 날카로운 그 눈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황자님의 아들이 그 여자를 감싸고도니 제가 죽여 달라고 해도 못 죽이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황궁 분위기가 어수선한데 쓸데없는 말을 꺼내 입씨름을 하고 싶진 않아서요.”

“하긴 그건 그렇지. 못난 놈 같으니라고. 하고많은 여자 중에 하필 그 집안 여식에게 빠져가지고.”

볼테로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세게 구겼다.

그는 이슈텔 리젠트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포로가 된 주제에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한 태도도 별로였고, 무엇보다 일리드가 어딜 가든 그녀를 옆에 데리고 다니는 게 최악이었다.

그래도 일리드가 황제가 되겠다며 마음을 바꾼 건 참 다행이었다. 그래서 더 눈엣가시 같은 리젠트라 공녀한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볼테로는 몇 년 전 시에라 휘어튼을 독살했다가 일리드와의 관계가 겉잡을 수없이 악화되었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또다시 여자 때문에 아들과 틀어지는 일은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런데 너희들 말이야. 조금이라고는 하나 피 섞인 사이인데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볼테로가 카리나의 얼굴을 이리저리 뜯어보며 말했다.

“너도 반쪽짜리긴 해도 그 집안 피가 흐를 텐데 얼굴이고 성격이고 리젠트라 공녀랑 닮은 데가 하나도 없어.”

“그렇게 안 닮았나요?”

시선을 피하고 있던 카리나가 얼굴을 돌려 볼테로를 보았다. 다시 자세히 보라는 듯 굽히고 있던 자세까지 바로 했다. 그러자 볼테로가 절대 아니라며 세게 고개를 저었다.

“얼굴이 다른 건 둘째 치고, 말투나 표정, 몸짓 하나하나까지 전혀 달라. 걔는 상황이 이따위인데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지내는데,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 됐는데도 죽상이잖아. 보는 사람도 밥맛 떨어지게.”

“재밌네. 결국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와서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카리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황제가 죽고 남부 군사들이 황궁을 장악한 이후, 카리나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락내리락하는 감정에 지쳐가고 있었다.

어떤 날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들떠 사람들을 불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놀았다.

황제를 제 손으로 독살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남부와 먼저 선수를 쳐 황궁을 점령한 건 천운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그 기쁨이 계속 지속되는 건 아니었다.

어떤 날 밤은 극심한 우울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악몽 속에서는 늘 북부 병사들을 데리고 황궁을 점령한 헬리온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한 후 깨어났다.

뭔가를 먹어도 자꾸 속이 허했고, 아무리 마셔도 목이 타는 것처럼 갈증이 났다. 감정의 기복이 너무 심해 신경안정제를복용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제 원할 때면 루비아를 아무 때나 마음껏 볼 수 있지만, 이 마음속의 공허함이 채워지질 않았다.

“그렇게 멍하게 있을 거면 방에 가서 이 교지나 숙지하고 있어라.”

볼테로가 왕관 보관함 옆에 놓인 금빛 두루마리를 카리나에게 건넸다. 일전에 황제전에서 본 적 있는 그 교지였다.

카리나가 매듭을 풀고 교지를 읽었다. 새로 조작한 교지에는 일리드를 후계자로 세우며 록펠트 공작 부인에게 정비인 황후 자리를 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옥새는 없을 텐데 이건 어떻게 찍은 거죠?”

카리나가 교지 마지막 부분에 찍힌 도장 자국을 보며 볼테로에게 물었다.

“난 황족이라 옥새가 찍힌 문서를 자주 보았지. 그깟 도장 따위 새로 하나 파는 것쯤은 일도 아니란다.”

하긴. 평생 옥새가 찍힌 문서를 볼 일 없는 자신과 달리 볼테로 황자라면 각인 모양 그대로 도장을 위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내가 헛짓거리를 했어.’

차라리 처음부터 옥새 찾는 것을 포기하고 위조할 생각을 할 걸. 죄 없는 에시의 목숨만 앗아간 꼴이 되었다.

카리나가 쿡쿡 쑤시는 머리를 잡고 홀을 떠날 준비를 했다. 최근에 가까웠던 사람을 둘씩이나 떠나보내서 그런지 기운이 없고 자꾸만 이렇게 현기증이 났다.

“대관식이 끝나면 황제 폐하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줘요.”

“당연하지. 그런 교지를 남기신 건 유감이지만 그래도 내 형님 일인데. 내가 알아서 잘 준비하고 있단다. 그런데 넌 어찌 장례 준비에 한 번 와보지를 않느냐?”

“내가 무슨 염치로…….”

작게 중얼거린 카리나가 힘없는 발걸음으로 홀을 나갔다.

* * *

수도 북쪽에 위치한 투렌 남작령. 이곳은 리젠트라 측근 가문의 영지 중 북부 대공령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헬리온과 북부 가신들, 그리고 리젠트라와 릴체 가문의 사람들은 남작령에 임시로 머물며 북쪽에서 내려오는 알렌시아 황녀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렌 남작 부부는 저택에서 가장 큰 방을 헬리온에게 내주었다. 모두들 영문도 모른 채 정신없이 피신을 오는 바람에 짐을 풀면서도 긴장을 늦추질 못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대공 전하, 오늘 밤 안으로 군대가 도착할 예정이니 잠시 눈이라도 붙이시지요. 벌써 며칠 째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론이 등불이 잔뜩 켜진 헬리온의 방에 들어와서 걱정스런 눈길로 주군을 살폈다. 그러나 헬리온은 지친 얼굴로 며칠 째 똑같은 질문만 반복했다.

“이슈텔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론은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쫓기듯 수도를 빠져나와 투렌 남작령으로 거취를 옮긴 후, 모두의 머릿속엔 이슈텔에 대한 걱정밖에 없었다.

그날 밤, 율리언이 재빨리 북부 저택과 리젠트라 가문의 사람들에게 위급 상황을 알렸기에 중요한 사람들은 전부 수도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헬리온은 황궁으로 간 이슈텔이 걱정되었지만 라비와 함께 갔기에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라비가 손에 옥새를 쥔 채 홀로 돌아왔을 때는 정말 세상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넋이 나간 헬리온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자르가 냅다 라비에게 달려들었다. 내 동생은 어따 두고 너만 살아왔냐고 욕을 하며 때리는 동안 라비는 변명 한마디 없이 맞고만 있었다.

「대공 전하, 처분을 내려 주십시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은 라비가 헬리온 앞에 검을 내려놓고 처분을 기다렸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주인을 놓고 혼자 살아온 기사는 북부에선 사형까지 가는 중징계감이었다.

아론과 슈리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헬리온에게 제 형제를 살려달라고 부탁조차 하지 못했다.

헬리온이 검을 들자 슈리가 숨죽여 흐느끼고 아론은 차마 못 보겠단 듯 눈을 감아버렸다.

라비가 헬리온의 처분을 기다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헬리온은 검을 뽑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다시 이슈텔을 찾으러 황궁에 잠입해야 하니 그 계획도 실패하면 그때 처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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